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넷

2014. 6. 28. 22:41들꽃다회






       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넷


                                             /  20140614 토요일, 맑음





       비로사 금당 적광전의 벽화.......

















































    해수관음보살과 선재동자 벽화













        신라의 화엄종


       


   화엄종은 화엄사상을 천명한 불교종파로,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661년(문무왕 1) 당나라에 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671년 이후에 화엄교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에 ≪화엄경≫이 전래된 때는 의상의 귀국 훨씬 이전이고 화엄경교의 
신행(信行)도 앞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헌기록상으로 볼 때 최초의 화엄사상가는 
자장(慈藏)입니다. 선덕여왕 때의 고승인 자장은 636년(선덕여왕 5) 당나라에 가서 
그곳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화엄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귀국(643)한 뒤에는 ≪화엄경≫을 강설(講說)하여 영응(靈應:신령스러운 
감응)이 있었고, 또 화엄신앙의 하나인 오대산신앙을 비로소 이 땅에 옮겨놓은 
장본인입니다. 

    또, 의상보다 8세 위이며 입당구법(入唐求法)의 뜻을 같이하였던 원효(元曉)도 
≪화엄경종요 華嚴經宗要≫ 1권과 ≪화엄경소 華嚴經疏≫ 10권 등의 화엄관계 저술을 
남긴 화엄의 대가였습니다.

 


                                        

                     - 네이트 지식 <
choalex
 
님의 답변>에서 발췌







      신라의 의상대사


     

님의 답변
지식브레인 | 04.11.05 14:43
답변공감

 

1)생애

가)출가와 수도

  왕실 중심으로 수용된 신라 불교가 공인되면서 귀족 불교로 발전되었고, 중대의 전제정치가 성립되어 나가는 시기에 淨土信仰 등 대중불교로 퍼져 나갔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이론적으로 성숙되어 철학체계를 성립시켜 갔다. 한국 불교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엄사상인데, 의상은 신라 화엄종을 성립시킨 인물이다. 그는 海東화엄종의 初祖로 숭상되고 있다.

  신라 화엄종 내지 화엄사상의 성립을 논하고자 할 때 의상의 인물됨을 정확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의상의 사상 경향이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엇갈린 견해가 있어 왔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의상에 관한, 비교적 확실하고 자세한 기록이었던 崔致遠이 撰한 「義湘傳」이 전해지지 않은 데 기인한다. 현전하는 의상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기록은

  (1)『三國遺事』 권4, 義湘傳敎條  (2) 贊寧, 『宋高僧傳』권4, 義湘傳 이다. 이 외에 간략하지만 의상의 생애를 알려주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1)『三國遺事』권3, 前後所將舍利條
  (2)『三國遺事』권3, 洛山二大聖 觀音正趣調信條
  (3)『三國遺事』권4, 勝詮  條 
  (4)『三國遺事』권5, 眞定師孝善雙美條
  (5) 覺訓, 『海東高僧傳』권2, 釋安含條
  (6) 義天, 『圓宗文類』권22, 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條
  (7) 澄觀, 『華嚴法界玄鏡』권下
  (8) 曇 , 『六學僧傳』권4, 義湘傳
  (9) 徐昌治, 『高僧摘要』권4, 義湘傳

  이상 열거한 사료는 모두 의상에 관한 단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六學僧傳』등 중국 僧傳類의 義湘傳도 『宋高僧傳』의 의상전에 있는 내용을 소략하게 전재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三國遺事』의 前後所將舍利條에는 「浮石本碑」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 데 의상의 행적에 관한 비교적 많은 절대 연대가 나타나 있어 도움이 된다. 이러한 자료들의 기록이 대부분 일치하고 있지 않아서, 그것을 종합해 봄으로써 의상의 행적을 추구하고자 한다.    의상의 출생에 대해서 부석본비에는 武德 8년, 즉 眞平王 47년(625)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으나, 『海東高僧傳』의 釋安含傳에는 최치원이 찬한 의상전을 인용하여 眞平 建福 42년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종래에 건복 42년을 진평왕 42년으로 생각하여 의상은 출생에서부터 그 연대가 혼동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그것은 또한 당대의 의상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낳게끔 했다. 왜냐하면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의 출생 연대가 혼동되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평왕 6년에 건복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고, 건복 42년은 진평왕 47년이 됨으로, 의상의 출생 연대에 관한 기록은 일치하고 있다. 부석본비에는 의상이 長安 2년, 즉 聖德王 1년(702)에 78세로 입적하였다고 했다. 이로 보면 의상은 진평왕 47년에 출생하였음이 분명하다.


  의상의 부친은 韓信이고 俗姓은 金氏였다. 어려서 京師의 皇福寺에 출가했는데, 『삼국유사』의상전교조에서는 29세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대신 20세에 출가한 것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부석본비」에 <冠 歲>에 출가하였다고 했는데, 아마 <관세>가 20세로 추측된 듯하다. <관세>는 상투를 트는 청소년기를 갓 지난 때를 의미하는 듯하며, 반드시 20세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마 의상은 20세가 되기까지는 출가했을 법하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에는 의상이 29세에 출가했다고 기록되었는 데, 이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곧 의상의 29세 출가설은 武烈王系의 등장과 표리관계가 되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의상이 출가한 해가 무열왕계의 등장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었는지를 분명히 할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출가 기년이 아마 잘못 기록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필 그의 나이가 29세로 나타나게 된 사실과 <관세>에 출가한 사실이 묶어 합리적인 해석을 내린다면, 어쩌면 의상은 19세에 출가한 사실이 29세로 와전되었을 법하다. 모르긴 해도 의상은 19세 되던 해인 善德王 12년(643)을 전후한 시기에 출가하여 경주의 황복사에 거주하고 있었을 법하다.

  중국에 유학을 시도하기 전에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普德에게 나아가 涅槃經과 維摩經 등을 전수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보덕은 고구려의 寶藏王이 도교를 받들자 그것에 반대하여 完山州의 孤大山으로 옮겨 불교를 일으킨 인물이다. 때가 永徽 6년이기 때문에 의상과 원효가 보덕을 직접 만나 열반경과 유마경을 전수받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장군 居柒夫가 고구려 승려 惠亮을 모셔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 고구려는 불교계 소식을 서로 전해주고 전해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의상과 보덕의 관계도 이와 같은 불교계의 분위기 속에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의상은 보덕을 비밀리 만나 경전을 전해받았을 수도 있고,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상을 흠모하여 영향을 받았음직하다. 아마 후자가 더 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의천은 보덕의 사상 경향에 대해 <涅槃 方等敎가 바로 吾師(보덕)로부터 전수되었다>고 시를 지어 읊었다. 의상이 보덕으로부터 전수받은 유마경은 그의 실천행에 부합되는 것이고, 열반경도 엄격히 말하면 涅槃 方等敎여서 그의 華嚴觀行에 부합되는 것이다.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高德을 만나고자 산천을 두루 찾아 다녔다. 東萊 梵魚寺에 남아 있는 大師가 坐禪하던 義湘臺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의상은 靈鷲山의 朗智和尙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음 기록을 통해 이를 유추할 수 있다.

  (1) 智通이 靈鷲山에 도착한 때는 文武王卽位 元年(661) 辛酉 歲이다.
  (2) 지통이 후에 의상의 문하로 나아가 堂에 올라 오묘한 것을 보고 자못 玄化의 資가 되었다.
  (3) 원효가 磻高寺에 住錫할 때에 항상 와서 朗智를 알현하였다.
  (4) 산의 동쪽에 大和江이 있는데 중국 大和池에 있던 龍의 福을 심기 위해 창건하였다. 고로 龍淵이라 부른다.
  (5) 지통은 원효와 더불어 大聖인데, 二聖이 옷을 걷어올리고 師事하였다.

  영취산은 신라 국가 불교의 전통과 깊이 얽혀 있었다. 대화지의 용은 慈藏이 불교신앙을 상징해 주는데, 그는 신라 왕실의 眞種設話를 성립시키는 장본인이었다. 특히 자장은 화엄종 승려로도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 들어가서는 淸凉山에서 文殊菩薩의 감응을 받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은 영취산의 불교신앙 전통과 맥락이 닿아 있었다. 다음 기록을 유념해 보자.

  師(朗智)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에 가서 徒衆을 따라 청강하고는 삽시간에 돌아왔다. 그 곳 승려들이 그를 이웃에 거주하는 자로 여겼으나 머문 곳을 알지 못했다. 하루는 寺衆에게 명하되 상주하지 않은 別院에서 온 승려는 제각기 거주하고 있는 곳의 名花와 진기한 식물을 가져와서 道場에 바치라고 했다. 낭지는 이튿날 산중의 異木 한 가지를 꺾어다가 바쳤다. 승려들이 보고 가로되 <이 나무의 梵名은  提伽인데, 여기서는 赫이라고 하니 오직 西竺과 海東의 두 영취산에만 있다. 이 두 산은 모두 第十 法雲地로 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聖者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그 행색을 살피고 해동의 영취산에 사는 것을 알았다.

  낭지가 주석한 영취산은 화엄경의 제10 법운지로 비교되었으며, 일찍이 낭지는 구름을 타고 청량산에 왕복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낭지가 중국 청량산의 화엄종과 비슷한 사상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생겨난 낭지와 의상의 인연은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낭지와 의상이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것 아니다. 낭지의 법맥을 가진 지통이 의상의 문하로 들어왔다든가, 원효와 지통이 낭지를 알현하였다든가와 같은 간접적으로 그 인연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원효와 더불어 산수를 두루 찾아다닌 의상에게 낭지와의 교류는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낭지는  提伽 가지를 중국 청량산에 바치는데, 그것은 서축과 해동의 두 영취산에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연기설화의 비유는 康居國 출신의 法藏과 함께 의상이 지엄의 문하에 수학하게 되는 것과 연관됨직하다.         

 

  입당하기 전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수도의 길을 걸었고 고구려 僧 보덕에게서 경전을 전수받았는가 하면, 낭지에게서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직하다. 낭지의 교학에서 普賢行을 강조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낭지의 문하에 든 지통은 普賢大士로부터 正戒를 받았다. 화엄은 연계된 普賢行願은 실천적 화엄관행을 주장하는 의상의 사상을 형성시키는 데 작용하였다. 의상은 입당하기 전 수도 행각을 통해 그의 사상적 특성을 대체로 구조할 수 있었다.

   

나)입당과 수학

  의상의 입당 연대 역시 많이 혼동되어 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을 비롯한 중국 僧傳類에는 의상이 總章 2년, 즉 文武王 9년(669)에 입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전교조에는

  (1) 얼마 뒤에 서쪽으로 유학하고자 하여 원효와 함께 遼東으로 가다가, (의상은) 변방의 戌卒들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累旬 동안 갇혔으며 간신히 면하여 돌아왔다.

  (2) 永徽 초에 마침 唐使의 배가 돌아가자 편승하여 중국으로 갔다. 처음 揚州에 머물다가 州將 劉至仁이 청하여 관아에 머물렀는데, 공양함이 豊贍하였다. 끝내 終南山 至相寺에 이르러 지엄 대사를 배알하였다.

  라 하였다. 이 기록대로라면 의상의 입당은 영휘(650년; 진덕왕 4-655년) 연간이 되고, 원효와 같이 중국에 들어가는 시기는 이보다 더 빨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부석본비」에는 다음과 같은 다른 기록이 전하고 있다.

  영휘 元年 庚戌에 원효와 동반하여 서쪽으로 당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고구려에 이르러 고구려에 이르러 난을 만나 돌아왔다. 龍朔 6년(661, 문무왕 1) 辛酉에 입당하여 지엄의 문하에 취학하였다.

  643년에 출가한 의상이 650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원효와 더불어 입당을 시도하고 있음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출가 이후 연륜에 비해 입당 시기가 너무 빨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의상의 입당 시기에 대해서는 「부석본비」가 더 진실을 말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650년(진덕왕 4년)에 입당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뒤 661년(문무왕 1년)에 귀국하는 당의 사신을 따라 입당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처음 의상이 원효와 더불어 입당을 시도한 경위에 대해서는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나와 있었지만, 현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송고승전」에 그 내용이 간략하게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약관의 나이가 되어 당나라에 교종이 鼎盛함을 듣고, 원효법사와 더불어 동지가 되어 西遊하였다. 본국의 海門인 唐州界에 이르러, 巨艦을 구하여 장차 滄海를 넘고자 하였다. 중도에서 삽시간에 폭우를 만났다. 어쩔 수 없이 길가 土龕間을 의지하여 몸을 숨겨서 바람과 습기를 피하였다. 다음 날이 되어 서로 보니 고분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는 아직도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땅이 짙어, 머무른 곳에서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다시 묘소의 벽을 의지하여 있었는데 밤이 깊지 않아서 잠깐 사이에 鬼物이 일어 妖怪처럼 되었다. 曉公이 감탄해서 말하기를 <어제 토감 속에서 잠잘 때에는 편안했는데, 오늘밤을 지내는 데에는 귀신들이 많이 나타났은 즉, 心生인고로 種種의 법이 일어나고, 心滅인즉 龕과 墳이 둘이 아님을 알겠다>고 하고는 보따리를 챙겨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의상은 홀로 입당하고자 하여 죽기를 맹서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중도에서 비를 만나 무덤 속에서 지낸 일화는 의상과 원효의 사상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주목된다. 전날 밤에는 편안하게 잤는데 그것이 무덤인 것을 알고부터는 귀신이 나타나고 무서움증이 들어, 원효는 모든 것을 마음 작용으로 보아 법 자체를 마음속에서 구했다. 그렇지만 의상은 보편적인 불법을 구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心外의 보편적인 법을 구하려는 의상과 마음속에서 법을 구하려는 원효의 사상 경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원효는 입당 유학을 포기하였고 의상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 설화는 뒷날 원효가 신라 불교사상사에서 중요한 쥐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부회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사로이 입당하려다가 난을 만나 실패하였거나 또는 국경 근처에서 변방의 나졸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붙잡힘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더 실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의상은 원효와 같이 고구려를 통해 遼東을 거쳐 입당하려 했으나 그것은 일단 실패로 끝난 셈이다.


  661년에 중국의 사신을 따라 입당한 의상은 揚州에 이르러 州將인 劉至仁의 존대를 받아 衙門 내에 머물렀다. 당시 양주는 登州와 더불어 우리 나라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그 곳의 주장인 유지인은 현지의 유력자였으며 당의 중앙 정계에도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이다. 의상은 곧 양주를 떠나 지엄 문하로 나아갔는데, 이 때에도 유지인의 도움을 받았거나 그의 배려가 있었을 법하다. 의상과 지엄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엄이 전날 저녁에 꿈을 꾸었다. 큰 나무가 해동에서 나서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神州까지 와서 덮고, 그 위에는 봉황의 집이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摩尼寶珠가 하나 있어 빛이 멀리까지 미쳤다. 그 꿈을 깨고는 이상히 여겨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다. 특별히 예로 맞아 從容이 일러 가로되 <나의 어제 꿈이 그대가 올 징조였다>라 하고 入室을 허락했다.

  지엄은 杜順의 嗣法으로서 중국 화엄종의 제 2祖였고 至相寺에 住錫하였다. 그의 제자에 법장이 있었는데, 그는 중국 화엄사상을 방대하게 정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법장과 더불어 화엄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자는 그의 同學인 의상이다. 의상이 지엄의 문하로 나아간 때는 입당한 그 다음 해인 662년인 듯하다. 지엄의 꿈에 의상이 해동의 큰 나무로 비유되어 그 가지가 중국을 덮었다고 한 내용이나, 또는 봉황집 속에 있는 마니보주로 비유되어 그 빛이 멀리 미쳤다고 한 것 등은 그가 법장과는 대조적인 독특한 화엄사상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신라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사실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의상이 화엄의 오묘한 뜻을 심도있게 분석하니, 지엄은 영특한 재질을 만났다고 하여 기뻐했다. 새로운 뜻을 펴내고 깊은 것을 끌어내어 숨은 것을 찾아냄으로써, 의상은 스승보다 낫다는 평을 받았다.


  의상은 지엄의 화엄교학을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같은 종남산에 거주하면서 계율사상을 선양하던 南山 律宗의 初祖인 道宣律師와 깊이 교류하였다. 다음 기록을 참고하기로 하자.

  옛날에 의상법사가 입당하여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존자 처소에 이르렀다. 이웃에 宣律師가 있어 항상 天供을 받았다. 매번 齋를 올릴 때에 天廚에서 음식을 보냈는데, 하루는 율사가 齋儀에 湘公을 청하였다. 湘公이 이르러 坐定함이 오래 되었는데, 때가 지났음에도 천공이 이르지 않았다. 이에 의상이 空鉢으로 돌아가니 천사가 이르렀다. 율사가 <금일에는 왜 늦었느냐>고 묻자, 천사가 말하기를 <洞內에 神兵이 가득차 있어서 갈 막았기 때문에 능히 들어오지 못했다>고 했다. 이로써 율사는 상공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아 그 道의 우월함을 탐복했다. 그 천공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다시 지엄 의상 兩師를 재에 청하여 자세히 그 사유를 말하였다.


  도선은 지엄과 깊이 연고되어 있었던 光統律師 慧光의 孫弟子가 되는 인물이며, 667년에 靈感戒壇을 건립하고 입적하였는데, 의상은 그와 더불어 약 7년간 사귀면서 계율에 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입당하기 전 의상은 계율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이미 신라 불교의 분위기 속에서 체득할 수 있었다. 신라 사회에서는 枯骨觀과 같은 엄격한 수련을 요구하는 수도자의 계율이 있었는가하면, 자장은 보살계와 범망계를 아우르면서 계율을 일반인들에게 생활화시켰다. 의상은 대중화된 신라 불교의 계율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입당하였다.


  의상이 도선에게서 영향을 받은 계율은 엄격한 보살계행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수행자 일반을 위한 大乘戒行이었다. 다음 기록에서 이와 같은 면을 읽을 수 있다.

  (1) 의상은 說行을 귀중히 여겨 도선을 請하는 것 외에는 精勤 修練하였으며, 莊嚴刹海에서 춥고 따뜻함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였다.

  (2) 또 항상 義淨의 洗濊法을 행하여 수건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서서 乾燥하기를 기다렸다. 세 法衣와 甁鉢을 가진 것 외에 다른 물건을 가지지 않았다.

  의상은 도선을 강당으로 청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정근 수련하는데 힘썼음은 유념되어야 한다. 애초부터 그는 엄격한 계율의 전수가 아닌 대승계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근 수련하려는 계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동학인 법장이 文持라 불린 대신 의상은 지엄으로부터 義持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실천 수행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의상이 계행을 익힘은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적 특성과 연계되어 있다. 의상은 도선의 저술에 의거하여 律學의 연구에 힘썼던 義淨과도 사귀었으며, 항상 그의 洗濊法을 즐겨 행했다. 의정은 의상이 귀국한 671년에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는데, 그의 세예법은 이름 그대로 세간에서 묻은 때를 깨끗이 씻는 계행이다. 그것은 몸을 깨끗하게 씻지만 세간의 물건이 모두 더러워져 있어서, 수건이나 종이로도 몸을 닦지 않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類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상은 3종의 법의와 甁, 鉢盂 이외에는 가지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물욕을 떠난 깨끗한 실천 수행의 생활을 하였다.


  문무왕 8년(668)에 지엄이 돌아가게 되는데, 그 해에 의상은 「華嚴一乘法界圖」를 작성했으며, 淸禪寺의 船若院에 주석하고 있던 스승에게서 普法印을 전수받았다. 「화엄일승법계도인」의 작성에 대해서는

  화엄경 및 十地論에 의거하여 圓敎宗要를 표명했다. 總章 元年9668) 7월 15일에 記한다.

  고 하였다. 원래 지엄이 지은 73印이 있었는데, 의상에 의해 一根本印으로 작성된 것이 「화엄일승법계도」이다. 따라서 법계도인의 완성에 지엄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지엄 문하에서 의상은 『大乘章』10권을 지었는데, 지엄은 그것에 대해 <義理는 매우 아름다우나 文詞가 아직 옹색하다>고 했다. 의상은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고 사방으로 통하게 한 후, 다시 지엄과 함께 佛前에 나아가 서원을 세우고는 태웠다. 이때 타지 않고 남은 210字를 얻어 7言 30句의 偈頌을 만들었다고 한다. 법계도를 제작한지 약 3개월 후에 지엄은 입적하였다.의상은 스승이 遷化하기 직전에 청선사의 반야원에서 法印을 전수받으면서 十種의 總과 別을 나누고는, 그것의 근본인 中道實相을 중시하려는 華嚴法界觀을 성립시켰다. 의상은 화엄 性起論的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一>을 중시하여, 그것을 통해 전체를 이해하려는 橫盡法界觀을 가졌는데, 아마 그는 이때에 이러한 법계관을 성립시켰음이 분명하다.

  지엄이 입적하자 의상은 스승의 임종을 몸소 지켜보았고, 그 후에도 2, 3년 더 당나라에 머물면서 화엄 연구에 매진하였다. 지엄의 교학은 의상이 화엄사상을 성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지엄은 입적하기 수일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一微塵中含十方>의 의미를 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을 이루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법장과는 달리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는데, 그러한 사상 경향은 입당 유학 생활을 통해 지엄 뿐 아니라 도선 등 여러 승려와 교류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다)귀국과 흥교

  화엄사상의 습득에 정진하고 있던 의상이 갑자기 귀국하게 되는 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당이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이 당의 東征을 알리자 신라 조정에서는 明朗으로 하여금 密壇法을 설치하여 그것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의상의 귀국 연대는 『三國遺事』권4, 義湘傳敎條에 咸亨 元年, 즉 670년(문무왕 10년)으로 되어 있으나, 「부석본비」에는 671년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혼동이 있다. 의상은 당의 신라 침입과 연관하여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와 당과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시기인 670년에 귀국했다는 의상전교조의 기록이 옳을 듯하다.


  귀국 후 의상은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名山을 구하여 도량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귀국하자 바로 건립한 것은 낙산사였다. 낙산사의 관음에 대해서는 다음 기록이 참고된다.

  옛날에 의상법사가 처음으로 당에서 돌아와서, 大悲眞身이 이 海邊窟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洛山이라 이름하였다. 대개 서역에 寶陀洛伽山이 있는 까닭이다. 이 산을 小白華라고 하는 것은 白衣大師의 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어 이름지은 것이다.

  낙산사가 세워진 곳은 觀音眞身이 거주하는 곳이므로 서역의 觀音住處地인 보타낙가산의 이름을 따와 낙산이라 부쳐졌다. 의상이 귀국하여 제일 먼저 觀音眞身處를 찾았음은 의미 있게 생각된다.


  낙산에서 의상은 관음진신을 친견하고자 하여 7일 동안 齋戒를 드린 후, 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龍天의 八部侍從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하여 參禮하고, 海龍으로부터 水精念珠 한 꾸러미를 얻었으며, 또한 如意寶珠 한 알을 받았다.

  의상이 그것을 받들고 다시 7일 동안 재계한 후에 관음의 진신을 뵈었다. 진신의 부탁으로 그가 앉았던 山頂에 雙竹이 나는 곳을 찾아 낙산사의 불전을 지었다. 의상은 金堂에 觀音塑像을 모시고 받은 두 염주를 그 곳에 두었다. 낙산사는 의상이 귀국하여 처음 세운 사찰인데, 그 主尊이 관음상이었다. 이 점은 의상의 화엄사상이 실천적 수행을 중시한 것과 깊이 연고되어 있다.


  낙산사를 창건한 후에도 의상은 주로 京師의 황복사에 住錫하였다. 입당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황복사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귀국 후에도 그 곳에 주석하면서 불교 행사를 주관하였다. 특히 문무왕 14년(674)에 의상은 황복사에서 表訓·眞定 등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다. 『華嚴一乘法界圖記』는 이때에 의상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한 저술일 것이다.

  의상은 화엄종의 主道場으로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부석사는 문무왕 16년(676)에 왕명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그러나 『宋高僧傳』에 善妙라는 娘子와 얽힌 부석사 창건에 관한 연기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의상이 입국한 후에 산천을 두루 다녔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바람과 鳥牛가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이곳은 땅이 神靈스럽고 산이 수려하여 참으로 法輪을 굴릴 만한 곳인데, 어찌 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있는가?>라고 하였다. 의상은 또 조용히 생각하기를 <大華嚴敎는 福善의 땅이 아니면 가히 흥할 수 없다>고 했다. 때에 善妙龍이 항상 (의상을) 따라 다니면서 수호하고 있었는데, 의상의 想念을 몰래 알고는 이에 虛空 중에서 크게 神變을 일으켜, 너비 1리나 되는 巨石으로 변하여 伽藍의 머리를 덮고 장차 떨어질 듯했다. 群僧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면으로 흩어져 버렸다. 의상은 드디어 이 절에 들어가 겨울에는 양지 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이르는 자가 많았다.

  선묘는 의상이 입당한 시절에 사귀었던 여자로 아마 揚州 衙門에 거주하고 있을 때 교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상이 귀국하게 되자 선묘는 용으로 변신하여 그를 호위하였으며 부석사 창건을 돕고 있다.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와 얽힌 石龍·善妙井·浮石 등이 남아 있고, 의상은 浮石尊者로 의상계 화엄종은 浮石宗으로 불린다.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이전 그 곳에는 權宗異部의 무리 500여 명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선묘룡이 부석으로 변하여 그들을 쫓아내고 있음은 유념될 수 있다. 의상계 화엄종과는 다른 부류의 종교집단이 거기에 있었으며, 의상은 그들을 몰아내고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부석사의 주존불은 無量壽殿에 모셔진 阿彌陀佛이다. 의상은 본래 무량수전의 내부를 綠釉塼으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그 곳이 바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극락정토라는 관념에서 구조되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의 땅은 청정한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입구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사찰 전체가 크게 3단으로 구조되었는데, 그 각 단은 각각 3부분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중생의 部類를 9단계로 나눈 九品往生說을 나타내고 있다. 부석사의 창건에는 정토신앙을 곁들인 화엄관법을 펴려는 의도에서 아미타불을 모셨는데, 그것은 낙산사의 주존으로 관음을 모신 것과 연관된다. 관음은 중생을 정토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상의 화엄 사상에 아미타·관음신앙이 중시되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실천적인 華嚴觀行을 펴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석사 창건 후 의상은 거기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을 강의했다.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강론했으며, 40일간 법회를 열고 一乘十地에 대해 문답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의상은 小伯山에 따로 도량을 열었다. 다음 기록을 참고하기로 하자.  

  의상이 문도를 이끌고 소백산의 錐洞으로 돌아와 띠를 이어 집을 지었다. 무리가 삼천이 모였는데 90일간 華嚴大典을 강론했다.


  부석사에서는 돌아간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한 법회를 열기도 했다. 진정의 어머니를 위한 7일 동안의 극락왕생 법회를 드렸다. 그 후 의상은 소백산 추동에 다시 도량을 열었는데, 무리가 3,000에 이르고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론했다. 물론 이러한 법회가 낙산사에서도 행해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태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의상은 華嚴觀行을 중히 여겨서 몸소 실천하는 수행을 행했기 때문에, 이리저리 다니며 주거가 일정하지 않았던 듯하다. 부석사를 창건한 이후에도 경주에 머물렀다. 그의 수행은 구도적인 것은 아니어서 세속을 따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의상의 실천행은 원효의 교학과 통할 수 있는 면이 있다. 문무왕 21년(681)에 의상이 왕정에 대해 諫言하고 있음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문무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城을 쌓으려는 데 대하 그 부당함을 준엄하게 諫하였고, 그 결과 왕은 성 쌓는 일을 그쳤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간언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의 화엄종이 크게 일어나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만년에 의상은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神文王代에 활동하고 있었다. 신문왕 대 말에 唐 法藏의 문하에서 수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勝詮을 통해, 법장은 자기의 저술과 편지를 의상에게 전하고 있다. 다음 기록이 이를 알려 준다.

  (1) 西京 崇福寺僧 법장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의 侍者에게 글월을 드립니다. 한 번 작별한지 20여 년에 傾望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마는 烟雲이 萬里이고 海陸이 첩경으로 떨어져 있어서, 이 몸이 다시 만나 뵙지 못하는 것을 恨하며 연연한 회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2) 다만 和尙(智儼)의 章疏가 뜻은 풍부한데 문장은 간단하여, 後人으로 하여금 趣入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므로, 화상의 微言妙旨를 모아 義記를 勒成하였습니다. 가까이에 勝詮法師가 抄寫하고는 고행에 돌아가 그 땅에 전하고자 하니, 청컨대 上人께서는 臧否를 詳檢하여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來世에는 몸을 버리고 몸을 받음에, 서로 함께 盧舍那佛 前에서 이와 같은 無盡妙法을 받고 無量普賢願行을 수행한다면, 나머지 惡業은 一朝에 굴러 떨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上人께서는 諸處에서 같이 지낸 것을 잊지 말고, 正道로써 敎示하여 人便과 書信이 있을 때마다 存沒을 물어주소서.


  승전은 귀국할 때 법장의 저술을 베껴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華嚴探玄記』20권(당시 두 권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음)·『一乘敎分記』3권·『玄義章雜義』1권·『華嚴梵語』1권·『起信疏』2권·『十二門疏』1권·『法界無差別論疏』1권 등이다. 법장은 이러한 자기의 저술을 의상에게 전하면서 잘 검토해 줄 것을 청했다. 법장의 서신과 저술을 받은 의상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일단 저술의 내용을 분석하도록 하였다. 다음 기록을 참고하기로 하자.

  問: 본래 義理分齊는 第九에, 所詮差別은 第十에 있었는데 왜냐?

  答: 이것은 後人이 고친 것이다. 후인의 의도는 이 義理로써 능히 所詮을       모두 답습할 수 있는 고로 第九에 두어 전후를 관통하려는 것이다.

  問: 後人은 누구인가?

  答: 相和尙이다. 章主가 相德에게 준 서신에서 말하기를, 청컨대 上人께서는 臧否를 詳檢하여 주시면 다행이라 하였는 고로, 相德은 眞定·智通으로 하여금 그 臧否를 교감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今釋(의상의 교정본)과 아울러 章主가 열거한 바(법장의 저술본)가 있다. 此文은 草本과 鍊本이 不同한데, 의리를 第九에 놓은 것은 초본이며 반대로 놓은 것은 연본인 때문이다.

  법장의 대표적 저술은 『華嚴一乘敎分記』인데, 진정과 지통이 주로 그것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의상은 十門으로 된 『교분기』의 체제를 바꾸어 놓았다.

  법장이 처음 의상에게 전한 『교분기』는 제9문에 所詮差別, 제10문에 義理分齊로 구조되어 있었다. 그것을 검토한 의상은 그 순서를 바꾸어 제9문에 의리분제, 제10문에 소전차별을 설정하였다. 법장이 서술한 원본을 연본이라 하고 의상의 교정본능 초본이라 했다. 교분기 10문 가운데 제9문과 제10문의 차례를 달리한 데네 의상과 법장의 화엄교학에 대한 입각점이 다름을 보여 준다.


  법장의 화엄교학은 綠起建立에 의미를 두고 있어서, 연기된 事相의 실체를 인정하여 그 차별을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의상의 화엄교학은 性起趣入的이어서 연기된 事相은 본래의 원칙적인 <하나>속으로 돌아가 융합됨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것은 차별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차별을 인정하는 법장의 교학은 諸法相의 차이에 집착해 그 하나 하나를 설명하려 한다. 반면 차별을 인정하지 않은 의상의 교학은 근본적인 <하나>의 이해로써 전체를 관조하려 한다. 의상이 義理分齊를 제9문에 놓은 이유는 原理를 說한 의리분제를 이해한다면 제10문인 所詮差別까지를 모두 답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법장이 소전차별을 강조해서 제법상이 차별되는 원리를 부각하려는 것과 대조될 수 있다.


  법장은 중국 화엄사상을 총정리하면서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장본인이다. 당시 중국에서 天台宗과 法相宗勢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화엄종은 智儼代에 상당히 발전하였으며, 법장이 이를 대성시키고 있다. 특히 법장의 『華嚴五敎章』은 화엄사상을 잘 정리한 것으로 마치 중국 화엄종의 교본에 해당될 수 잇다. 그런데 의상이 그 책의 編目을 바꾸어 교정하고 있음은 화엄사상사에서 가히 그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의상은 당대에 중국의 법장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독특한 화엄사상을 성립시켰다.

                                      출처 : http://www.uisang.or.kr/                                              - 네이트 지식에서


  적광전 문에 그려진 용두상(龍頭像)



















적광전 주존불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지권인(智捲印)

     

      -  고불(古佛)의 풍모를 지니셨다(여말~고려 초기?). 광배는 전란 중에 부숴져서

        일부 망실되었고 일부는 법종각 옆마당에 쌓여 있다.









협시불과 주존불을 겸한 석조아미타여래좌상


      - 기(氣) 공부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로는 기가 충만해지면 

    마치 불상의 머리부에 수없이 돋은 육계처럼 기가 정수리부로 


    여러개로 나누어 솟구친다고 하나, 불교에서는 선정에 들어 

    아라한과를 얻으면 육계처럼 기의 흐름이 생겨난다고 한다.


    이러하니 비로자나불과 아미타여래상의 육계는 단순하게

    불교미술의 장식성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성취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닷집안에 고이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과 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제996호







    신중탱화(神衆撑畵)







  • 北잡지, 금강산서 발굴 금동아미타여래삼존불 소개
  2012-11-13 16:53 입력 | 2012-11-13 17:02 수정

          금강산서 발굴 금동아미타여래삼존불



                                                                            - <연합뉴스> 기사 중에서 발췌





       석조비로자나불과 아미타여래상






아미타여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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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여래도
(阿彌陀如來圖)
대한민국 대한민국 보물
Amitabha (Uhak Yongin).jpg
지정번호보물 제1238호
(1996년 4월 4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470
용인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고려
소유자우학문화재단

아미타여래도(한자阿彌陀如來圖)는 서방 극락정토에 있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어주는 불교 부처 중 한명인 아미타여래를 주로 그린 불화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1238호로 지정된 아미타여래도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여래를 그린 불화로, 용인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특징[편집]

   신라 중대 이후 크게 유행하게 되는 아미타(阿彌陀) 정토신앙은 주로 조각작품을 통해서 그 사례를 살필 수 있으며,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불화로 제작된 사례를 많이 살펴볼 수 있다. 실제 고려불화(高麗佛畵)의 대부분이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는 아미타독존도(阿彌陀獨尊圖),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등으로 극락에서 설법하는 모습이나 염불수행자들을 맞이하는 광경으로 묘사되고 있어 이를 내영도(來迎圖)라 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아미타여래가 입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금니(金泥)로 두광(頭光)을 표현하고 있다. 붉은 가사에 녹색 장삼을 걸치고 있으며, 가사와 장삼에는 원문(圓紋)을 그리고 당초문(唐草紋)을 표현하고 있는데, 기법상의 섬세함은 물론 금니로 그려지고 있어 화려한 고려불화의 세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아미타여래의 얼굴은 정면관(正面觀)을 취하고 있어 다른 고려시대의 아미타여래도가 측면관을 취하며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근엄한 상호에 왼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있으며, 양발을 약간 벌리어 연화좌 위에 직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은 배를 앞으로 내밀면서 옆으로 구부리고 있는데, 마치 경주 석굴암(石窟庵) 인왕상(仁王像)의 하체를 보고 있는 듯하다. 왼손을 가슴에 대고 있으면서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모습은 고려불화의 아미타여래입상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오른손은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붙여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있음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반하여 왼손은 아무런 수인(手印)을 취하지 않고 있어 현존하는 고려불화들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아미타여래를 단독으로 그린 화면은 상단의 끝 부분에서부터 두광이 표현되고, 하단의 끝 부분에까지 발과 연화좌(蓮花座)를 묘사함으로써 전체의 화면을 여래상의 표현에 할애하고 있다. 또 두광을 금니의 선으로만 표현하고, 두광의 내부의 색과 외부의 색을 동일하게 처리함으로써 조선불화(朝鮮佛畵)에서 느낄 수 있는 경직된 분위기를 찾을 수 없으며, 본존과 화면의 여백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의 멋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동해암 소장 아미타여래도와의 유사성[편집]

    아미타여래도는 정면향을 취하고 있는 단독의 도상으로 호암미술관 소장 아미타여래도와 일본 동해암(東海庵) 소장의 아미타여래도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호암미술관본은 비단에 자수로 제작되어 질감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일본 동해암본은 도상과 채색에 있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세부에 있어서는 동해암본의 아미타여래가 반듯이 서있는 직립의 형태로 안정감을 주면서도 도식적인 경향을 찾을 수 있으며, 천의의 자락이 상단에서 하단을 향하여 곧바로 내려트려지고 있어,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이 그림에서는 팔자(八字) 형태의 발벌림이 동해암본에 비하여 넓어지고, 배를 앞으로 내밀어 보이는 듯한 자유로운 포즈는 신라 조각의 삼곡(三曲)의 자세를 연상시킬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시키고 있다. 특히 마치 우측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이 천의가 하단의 좌측방향으로 흩날리는 표현은 동해암본과는 비교되는 묘사라 할 수 있으며, 이 그림이 가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정면상이라는 어려운 표현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채색·문양의 시문 등에서 정교하고 화려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고려불화로 14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보여지는 일본 동해암 소장 아미타여래도와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함께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http://cafe.daum.net/mdala/Nyo... l 2013. 8. 18 l 700x873








     적광전의 연등천장 구조







     적광전 천장에 걸린 인등(引燈)





     적광전 천장의 봉황장식 

       - 사진이 흔들렸으나 한장 밖에 없어 수록함.

















  연화대좌에 서계신 관세음보살은 협시불로 모신 것이 아니라 

남쪽벽에 벽화로 대신하여 모셨다.






























적광전 창호의 빗살문





















     적광전 편액







     적광전 편액 도장  - 함산 정제도(咸山 鄭濟道)







  적광전과 나란하게 북쪽편에 배치되어 있는 나한전








     나한전 벽화.....




















     요사채로 쓰인 듯한 반야실 - 수리중...







     배추흰나비와 지칭개


         - 더운 날씨에 몸이 나른하여 지치니까 지칭개가 

          보라빛 꽃을 자랑하고 있고, 나비들이 날아와서 

          나비를 찍을 욕심이 앞서 긴장감을 주어서 쉴틈이 없다.








    은점표범나비와 지칭개






















     배추흰나비와 지칭개















      잎이 6~8장인 으름덩굴

            - 보통의 으름덩굴은 잎이 다섯장이다.















     음나무 고목에 날다람쥐집










적광전 뒤안의 음나무 고목에 아래위로 여러개 뚫린 날다람쥐집






     적광전 앞마당 경사면에 있는 박달나무와 느티나무


   - 수령은 그리 많지 않으나, 박달나무는 단군신화에서 태백산 신단수인 나무로

     "밝다"에서 기원된 말로 태양신을 모셨던 우리 한민족의 원형질적인 종교이자

     생활철학인 선도(仙道)에서도 신목(神木)으로 숭상되었다.


        태양신이 법신불화(法身佛化)한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신 적광전 앞뜰에

     꼭 있어야할 나무이므로 이 나무를 심은 노승은 누구실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다.

     부여(扶餘), 비류(沸流) 등은 "불"에서 , 박달(朴達), 단(檀 박달나무 단) 등은 

     "밝다"에서 유래된 말로 우리 원시종교의 불신앙, 태양신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하셨다.


        이와같이 뿌리가 깊은 불교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는 달리 우리 한민족

      고유의 전래신앙까지도 포용하고 있는 통섭형 종교임을 이 박달나무 한그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포용성과 통섭성이 다신교의 장점이자 앞으로 

      불교가 유럽이나 미주 또는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 또는 포교하는 데에 큰 

      역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불교의 선문화나

      인도의 명상수련 등을 깊숙히  공부하고 있고, 이와는 반대로 유럽의 성당이나

      교회는 신도수가 줄어들어 폐쇄되고 주민복지시설이나 재교육시설로 전환된 

      곳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동양정신과 문화의 정수의 서구전파는 한류열풍 처럼 개별회사 

       차원에 맡겨놓지 말고 각 종교단체와 국가기관 그리고 사회단체 등이 연계하여 

       문화전파의 넓은 시각으로 보아서 국가적인 지원이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21세기는 물론 장래에는  산업화 정보화사회에서 얻은 과실로 

       인하여 급속한 문화발전이 기대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국가경제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영화, 게임, 인터넷 문화관련 소프트웨어 등의 문화사업로 얻는 소득이 

       제조업으로 얻는 소득보다 훨씬 시장규모가 커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사진 아래는 요사채인 보련당(寶蓮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