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9. 10:25ㆍ들꽃다회
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다섯
/ 20140614 토요일, 맑음
비로사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義僧軍)의 주둔지가 되었다.
부산진(釜山鎭)에 상륙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왜병의 일부 부대가
강원도 영월로 진격하기 위하여 지름길인 비로사 앞을 지나 가려하자 이를
저지하려던 1,000여 명 의승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힘이 약하던 의승군 전원은
순국하고 비로사도 불탔으나, 다행히 적광전 안의 두 부처님과 당간지주,
진공대사 탑비는 화마를 피해 남았다고 한다.
1609년(광해군 1년) 중건과 1684년(숙종 10년)에 중창이 있었지만
1908년 갑오경장 때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과 1927년, 1932년에 중건 중수가 있었는데,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중건 불사가 계속되어
현재의 가람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소백산사'로 불렸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비로사'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제자인 진정의 홀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현 비로사 자리로
추정되는 소백산 추동에 초가를 짓고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90일 동안 계속된
이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하늘에서 환생했다고 말했다 한다.
- 다음 블로그 <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위:이수, 가운데:비신, 아래:귀부)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 신라 신문왕 때 승려 진정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소백산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거의 폐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1912년 이곳을 탐방한 다니이 세이치(谷井済一) 묘탑은 파괴되었고, 비는 넘어져 비신이 결단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병화를 당한 뒤 도굴꾼의 약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위 사진은 당시 진공대사보법탑비의 모습입니다. 부도비는 완전히 무너져, 이수, 비신, 귀부가 따로 있습니다. 비신도 여기저기 깨어졌는데, 깨어진 한 조각은 귀부 옆에 있습니다. -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 (사진 출처: 블로그 <이 땅에서 잘 놀기>) 형태로 복원되었습니다. 비해 얕습니다. 비좌도 낮은 편이며, 귀갑문은 연속된 육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수는 산 모양을 하였고, 양 모서리가 파손되었으며, 다소 도식화된 운룡문이 얕게 새겨져 있습니다. 전면 중앙부에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습니다.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도의선사의 자취가 서린 진전사를 찾는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선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와 개경 등을 방문하기도 했고, 소백산사를 중수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습니다.
태조에게 탑비를 세워줄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이에 태조는 시호를 진공대사, 탑호를 보법지탑이라 내리고, 최언위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습니다. 부도비는 그가 입적한 지 2년 만인 939년 8월 15일에 세워졌습니다. -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의 잔석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
진공대사보법탑터(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址)의 모습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부도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방형 부도는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은 해봅니다. 그러면 이 부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진공대사보법탑비 부근 어디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될 뿐입니다. - 비로사 동봉 부도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 이 부도도 지금은 없습니다. 대신 최근에 같은 모양으로 만든 부도가 비로사에 있습니다. 해도 비로사 동봉 부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와 고려시대 석조부도>의 저자 엄기표는 이 부도에 대해 "사찰 측을 따르면, 원래 자리인 비로사 동봉에서 도괴되어 마을 사람들이 비로사 경내로 이건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에 반출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2002년 8월 안내를 받아 원래 위치를 찾아가 본 결과 전혀 흔적이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
- 다음 카페 <옛님의 정취 그 향기를 따라>
하늘사랑 님의 글 중에서
소백산 비로사 나한전 편액
나한전
나한전 벽화 - 심우도......
소가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 십여년 전에 구한 다호(茶壺)에 새겨진 명문 에서.....
아래에 있는 나한전 벽화 사진 몇장은 이전 글과 중복되나
심우도의 일관성을 위하여 다시 게재하오니 혜량바랍니다.
고려시대 귀족문화의 발달 < 건축과 조각>
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
수덕사 대웅전 (충남 예산)
불일사 5층 석탑 (경기 개성) 무량사 5층 석탑 (충남 부여)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강원 평창) 경천사 10층 석탑 (경복궁 전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시대의 건축은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개성 만월대 터를 보면 당시 궁궐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에 건물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보였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주로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균형잡힌 외관과 잘 짜여진 각 부분의
치밀한 배치로 고려 시대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고려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승려의 승탑은 고려 시대에도 조형 예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달사지 승탑처럼 신라 후기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는
것이 많고,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등도 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또,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같이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한 걸작도 있다.
*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면서 건물을 치장하는 장치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져 있는 건축 양식
* 다포식(多包式) 건물
다포식(多包式) 건물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져 있는 건물.
웅장한 지붕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꾸밀 때에 쓰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나한전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좌상과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좌상
- 조성연대는 그리 올라가지 않는 상호를 보여주신다.
석가모니불좌상
관세음보살좌상
대세지보살좌상
-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거의 좌우대칭형으로
근대의 불상 조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나한전 천장의 가구구조와 단청
나한전 16나한상과 탱화
나한전 16나한상........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찬란한 불교문화재를.......
16나한상과 나한탱
|
소백산 비로사 나한전 16나한상과 나한탱.......
나한신중상
소백산 비로사 나한전 16나한상
사진이 흔들렸으나 한장 밖에 없어서 게재함..... ㅈ ㅅ.....
......... (()) .........
나한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월명루.....
법당의 부처님 명호를 알아보는 방법에 대한 고찰
사찰문화해설포교팀 제3회 공동학습 자료 편집 : 원경 윤 병구
Ⅰ. 서론
불상은 깨달은 부처님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어느 때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수많은 부처가 존재한다. 이렇게 많은 부처를 형상화하다보니 수많은 불상이 존재하게 된다. 불상을 넓게 보면 부처님뿐만 아니라 보살상,나한상, 신장상, 나아가 조사스님 상까지 포함하여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개괄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불상은 머리에 나발을 가졌으며, 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있고, 나한상은 삭발한 수행자의 모습을 지니며, 조사상은 스님 상으로 되어 있고, 신장상은 무장한 장수의 모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불상들은 한분을 모신 경우를 단독상이고, 두 분을 모신 경우는 병좌 상 또는 병립상이며, 세분을 모신 경우를 삼존 상이라 부르고, 또한 천분이나 삼천 분을 모신 경우도 있다. 또한 부처님이 계신 모습에 따라 입상, 좌상, 와상, 유행상 등으로도 구분하고, 한편 불상은 조성한 재료에 따라 금동불, 목각불, 석불, 바위에 새긴 마애불,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 종이 등으로 만들어 옻을 칠한 건칠불 등으로 조성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부처님을 형상화하다보니 수많은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실제로는 단독으로부터 53불, 1천불, 3천불, 1만불 등까지도 만들어 지고 있으나 시대를 막론하고 즐겨 만들어진 불상의 종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만들어진 불상으로는 석가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 등 경전에 따른 부처님과 1천불이나 3천불과 같은 시간 불 그리고 53불이나 1만 불의 같은 다불, 그리고 4방불 이나 5방불 등의 방위불이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자주 만들어지는 불상들을 어떻게 하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지 그 구별하는 방법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Ⅱ. 불상을 잘 알아볼 수 있는 기준
대승불교시대의 많은 불상들은 종교적인 표상으로서 일정한 법칙성과 의궤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얼핏 보면 그 부처님이 그 부처님 같기에 구분하기가 어려우나, 아래와 같이 몇 가지 기준을 적용하여 파악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1. 법당에 걸린 현판을 보고 구별한다.
사찰의 법당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씨를 보면 법당의 주존 부처님이 어느 부처님을 모셨는지 약 95%정도는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불상의 조성은 경전에 의거 의궤성에 따르기에 보통 대웅전(대웅보전, 황금보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대적광전(대광명전, 대광보전, 대광전, 광명보전, 대방광전, 비로전 )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극락전(극락보전, 미타전, 수마제전, 보타전, 보광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약사전(만월보전, 유리광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용화전(용화보전, 미륵전)에는 미륵부처님이 계시게 된다. 그리고 관음전(원통보전,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이, 명부전(지장전, 시왕전)에는 지장보상님이, 응진전(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500나한이나 16나한 등이 계시기 때문에 현판의 글씨를 보면 어떤 부처님이 계신지 거의 다 알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대웅전의 경우에는 위의 기준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대웅이란 “위대한 영웅”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로서 대웅전에는 대개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만, 모든 부처님 또한 “위대한 영웅이신 대웅”이기 때문에 간혹 대웅전에 석가모니부처님 이외에 다른 부처님을 모신 경우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선 충남 서산시 개심사의 주 존불이 모셔진 건물 현판에 대웅전이라고 한 전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아미타여래 부처님이 계시고, 또한 충북 보은의 법주사 대웅보전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비로자나 부처님을 비롯한 삼신불이 계시며, 그리고 충남 청양의 칠갑산 장곡사의 대웅전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약사여래부처님이 계신 것을 들 수 있다.
2. 부처님의 손 모양과 그 외 여러 특징을 보고 구분한다.
부처님의 손 모양인 수인은 그 모양에 따라 하나하나의 의미가 있기에 교리 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수인과 부처님의 명호는 상당히 관련이 있음으로 수인을 보면 어느 정도 그 부처님의 명호를 알 수가 있다. 즉 손에 지권인을 하고 있으면 비로자나 부처님이 되고, 손에 아미타여래 구품인 중 하나를 하고 있으면 아미타여래 부처님이 되고, 손에 약함을 들고 계시면 약사여래 부처님이 된다.
또한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으면 대부분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볼 수 있으나, 모두가 다 그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경전을 보면 부처님들은 팔상성도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수하항마상을 짓기도 함으로, 부처님들이 자기 고유의 특징을 표시하지 않고 통칭으로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는 앞서 말한 대웅의 경우와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그 실례로 우선 석굴암의 부처님을 들 수 있다. 석굴암 부처님은 수인으로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계시기에, 수인으로 볼 때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석굴암 조성 당시 불교사상의 흐름(화엄사상)과 주존 불을 중심으로 한 주위 여러 보처들과 관련지어 볼 때 화엄경의 교주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이라고도 보기도 하고, 또한 석굴암과 조성 연대와 같은 경북 군위의 제2 석굴암의 본존불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있기에 아미타부처님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지어 석굴암의 부처님도 이와 같음으로 아미타여래라고도 보는 등 각기 논거에 따라 명호를 달리 붙이기도 한다.
또한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부처님도 위와 비슷하다. 무량수전의 현판을 보면 법당의 본존불은 아미타여래 부처님이시다. 그런데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부처님이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계시기에 수인으로 볼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된다. 그러나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서방정토에서 덕화를 베푸시는 아미타여래 부처님을 모신 것으로 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부처님은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을 지라도 아미타여래 부처님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살의 경우는 모두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어려우나, 쉬운 것은 보통 보살님들은 보관을 쓰고 계시는데 비하여 지장보살님은 삭발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계시거나 두건을 쓰고 계기기 때문에 알기가 쉽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구별은 관세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계시고,대세지보살님은 보관에 보병이 있다. 또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좌우 대칭으로 부처님을 보좌하고 계신데, 부처님의 왼쪽에 계시며 청 사자와 관련 있는 분이 문수보살이고 오른쪽에 계시며 코끼리와 관련 있는 분이 보현보살님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3. 대중의 마음, 즉 주인 마음을 알고 구분한다.
법당에 그 부처님을 모셨거나, 현재 모시고 계신 대중의 염원을 알면 구분할 수가 있다. 학자들은 부처님의 상호 등 여러 근거를 통해 부처님 명호를 규정하지만, 만약 해당 사찰의 관계 비문이나 사찰 안 불상의 복장물 등을 통해 기록이 남아있다면 그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들이 이런 저런 근거로 그 부처님을 규정하려 하지만, 그 부처님을 모신 대중의 마음이 제일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 실례로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부처님이 아미타여래인 경우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불화에서도 나타난다. 경기 안성의 청룡사에 탱화가 있는데, 이에 존치되어 있는 부처님의 수인은 아미타여래 부처님의 설법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의 당시 기록을 보면 영산쾌불로 조성된 영산회상도 임으로, 따라서 이 부처님은 수인에 따른 아미타여래 부처님이 아니라 대중의 마음이 담긴 기록에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중생의 염원을 살펴 본다.
부처님의 명호는 한번 정해졌다고 그 명호가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 그 시대에 사는 중생의 염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우선 충남 논산시 은진 미륵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이 불상은 역사의 기록이나 조성양식을 통해 보면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들에게 관세음보살님이라기보다는 은진미륵이라는 미륵보살님으로 더 각인되어 있다. 근래 사찰의 주지로 부임하신 스님께서 이를 알고 관세음보살님으로 다시 모시자고 하였으나, 대중들의 염원이 여의치 않아 그대로 두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을 들 수 있다. 이 불상도 몇 십 년 전만해도 사람들에게 약사여래 부처님이 아니라 미륵 부처님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이는 그 전의 부처님이 지금은 팔공산 약사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볼 때 우리들에게 약사여래 부처님으로 나타나셨는지 모른다. 아마 어느 순간에 우리들의 약사여래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그렇게 나타났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불상은 단지 어떤 재료나 근거로 만들어진 불상이 아니라, 대중의 염원과 함께 살아 숨 쉬며 자비의 손길로 여법하게 나타나시는 부처님이라 할 것이다.
Ⅲ. 결 론
법당의 불상들은 창작성이 아니라 일정한 의궤성, 법칙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어려우나, 그 불상이 어느 부처님인지의 판단은 위와 같이 해당 사찰의 법당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씨를 보거나, 부처님의 손 모양과 여러 특징을 비교해 보거나, 그리고 법당에 그 부처님을 모셨거나 현재 모시고 계신 대중의 염원에 의하여 알 수 있으며, 또한 부처님의 명호는 한번 정해졌다고 그 명호가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 그 시대에 사는 중생의 염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또한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하심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사찰에 가서 교과서의 몇 가지 기준을 적용하여 감히 대추니 감이니 하면 큰 실례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과서의 기준(원칙)은 일반화하여 설명한 것임에 반해, 현실은 다양한 변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찰의 대중의 연원을 생각하지 않고 “어 이거 아닌데, 어 이거 아닌데” 하며 단순하게 단정한다면,자신의 선입견에 매몰되어 자신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또 상대방과의 마음만 상하게 될 수도 있다 할 것이다. 이는 교과서 다르고 현실 다르다는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는 하나의 틀이기 때문에 그 틀을 통해 다른 변수가 있다면 “왜 이렇게 했지, 이 절에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는가 보다. 누구에게 불어 봐야지” 하는 마음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자신을 낮추고 불보살님과 사부대중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불상이 어느 부처님인지의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사찰 내에 있는 조그마한 것 하나하나 또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
자현스님 저, 사찰의 상징세계 상 · 하, 불광출판사, 2012. 자현스님 저, 붓다 순례, 불광출판사, 2014. 문명대 저, 한국불교미술사, 한언, 2010. 문명대 저, 한국불교미술의 형식, 한언, 2002. 목경찬 저,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계종출판사, 2010. 석길암 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불광출판사,2010. 김정희 저, 불화(찬란한 불교미술의 세계), 돌베개, 2013. 허 균 저, 사찰 100미 100선 상 · 하, 불교신문사, 2007. |
- 다음카페 <포교사단 서울지역단> 원경 윤병구 님의 글 중에서
소백산 비로사 망월당 - 요사채로 보임
망월당 편액
달 바라보기......
출처 :한국교사천문동호회 (TSA) 원문보기▶ 글쓴이 : Kevin/박기현
익어가는 뻐찌 - 산중식구들....
사람, 산새, 소동물에게 휼륭한 산과일....
삼성각으로 가는 계단
계단에서 되돌아 본 망월당
- 맞배지붕이 간결하고 소박하다.
단청을 생략하고 도리와 들보에만 간략하게 단청을 한 것으로 보아
노장스님을 위한 요사채로 보인다.
삼성각 가는 계단에서 내려다 본
반야실, 나한전, 적광전(좌로부터)
나무 아래가 월명루...
맺배지붕의 풍판이 생략된 삼성각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16)
무량수전 법당 서편 불단에서 동향을 하고 계신 아미타여래불이다.
좌, 우 협시보살은 어디로 물리치시고 홀로 법당을 지키시니 그 외로움과 고독함이 또한 얼마나 무량 하실까?
아름다운 보궁(寶宮)은 아미타불의 품격을 한층 더 경외(敬畏) 스럽게 하고 있다. 사진 촬영금지 경고문을 무시하고 반쯤 열린 무량수전 문 사이로 보이는 아미타불을 살짝 찍는데도 부처님은 그저 말이 없으시다.
기대서서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을 가슴에 그려 본다.
|
■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
- 다음 블로그 < 미지로 떠나는 여행> 미지로 님의 글 중에서 발췌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충남 논산) 고달사지 승탑 (경기 여주)
청자 상감 운학무늬 매병 (간송미술관) 청자 진사 연화무늬표주박 모양 주자 (호암미술관)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고려의 청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생산되고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구워졌는데,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유명하였다
특히, 강진에서는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금속 공예 역시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은입사로 무늬를 새긴 청동 향로와 버드나무와 동물 무늬를 새긴 청동 정병이 대표작이다.
한편,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불경을 넣는 경함, 화장품갑, 문방구 등이 남아 있다. 나전 칠기 공예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 청자 만드는 과정
청자는 물에는 묽어지고 불에는 굳어지는 자토로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후 청색을
내는 유약을 발라 1250도에서 1300도 사이의 온도로 구워서 만든다.
유약은 규석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으로, 이들이 높은 온도에서 녹아 유리질화되는데,
유약에 함유된 철분이 1~3%가 되면 녹청색을 띠어 청자가 된다.
* 상감법 (象嵌法)
나전 칠기나 은입사 공예에서 응용된 것으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부석사(浮石寺)
金笠 炳淵(1807-1863)
평생미가 답명구(平生未暇 踏名區) 백수금등 안양루(白首今登 安養樓)
강산사화 동남열(江山似畵 東南列) 천지여평 일야부(天地如萍 日夜浮)
평생동안 느긋하게 명승지를 밟지 못하다가 흰머리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음이여
강과 산은 그림처럼 동남으로 펼쳐있고 천지는 부평초처럼 밤낮 없이 떠있네
풍진만사 홀홀마(風塵萬事 忽忽馬) 우주일신 범범부(宇宙一身 泛泛鳧)
백년기득 간승경(百年幾得 看勝景) 세월무정 노장부(歲月無情 老丈夫)
풍진세상 만사가 홀연 달리는 말인 듯 우주간의 이 한 몸 정처 없이 떠다니는 오리같음이여
백년동안 몇 차례나 수승한 경계를 보았던가 세월은 무정도 하여 늙은 장부 되나니.
<안양루 누각에 게시된 김삿갓 시>
- 다음 카페 <경북문화관광해설사 > 잠보님의 글 중에서 발췌
소백산 비로사 삼성각 편액
'들꽃다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추산 송천 들꽃다회 - 하나 (0) | 2014.07.24 |
---|---|
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여섯(完) (0) | 2014.07.01 |
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넷 (0) | 2014.06.28 |
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셋 (0) | 2014.06.26 |
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둘 (0) | 2014.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