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선사 ㅡ 선차의 동아시아적 원류 // 박정진의 차맥

2013. 5. 27. 16:38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25> 불교의 길, 차의길 ③ 무상선사, 선차의 동아시아적 원류
 
선과 차는 하나라는 선차지법 사상 깨닫고 설파
원오극근의 다선일미는 선차지법의 새로운 버전

무상 선사가 선차일미 사상에 있어서 동아시아의 원류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 학자에 의해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 중국 학자에 의해서 드러났다. 2004년 9월 중국 쓰촨성 청두 대자사(大慈寺)에서 열린 첫 무상 선사 학술연토회에서 대자사 방장 다이언(大恩) 스님은 ‘신선소각사지(新選昭覺寺志)’를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무상의 선차지법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이날 학술연토회에 참가한 필자와 한국인 일행들은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두 대자사의 당대(唐代) 조사는 신라 왕자로서 출가한 무상 선사이다. 참선, 품차(品茶)를 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무상선차지법’을 개창하였으며, 선차문화에 매우 공헌하였다. 대자사에서 참학(參學)과 강경(講經)을 한 송대(宋代) 불과극근(佛果克勤·1063∼1135·원오극근) 선사는 선차문화를 간접적으로 일본에 전했다.”

무상의 오백나한 발굴과 일대기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정중무상평전’을 펴낸 최석환씨는 “무상의 선차지법은 동아시아 선차의 맹주가 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무상은 중국에서조차 오백나한의 재조명이 있기 전까지는 무상이 전법가사를 전한 보당무주(保唐無住)에 가려 있었다. 중국에서는 무주의 보당종만이 있었다. 무주는 사천지방 출신이고, 신라에서 온 무상은 외래인이었다. 대자사 방장도 학술연토회를 전후로 무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무상 선사의 업적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정중무상평전’.

필자는 당시 연토회에 참석하여 무주보당종의 텃세와 함께 나이가 비슷한 정중무상(淨衆無相·685∼762)과 하택신회(荷澤神會·685∼760)의 선종사를 둘러싼 각축에 대해 논문을 발표했다.

무상 선사는 신라에서 이미 차의 효능 가운데 하나가 수행차도(修行茶道)임을 터득했고, 중국 땅에서는 대중적 음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과 차가 하나라는 사상인 선차지법을 깨닫게 된다. 이는 선을 대중화·선교하는 데 유리할 뿐 아니라 중국인으로 하여금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라는 선의 요체를 깨닫게 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상의 이러한 선차일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발전한다.

무상의 선차지법은 그의 제자인 마조(馬祖)를 거쳐 마조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남전보원의 제자인 조주종심(趙州從諶·778∼897)에 이르러 ‘츠차취’(喫茶去)로 발전한다.

우리는 선차일미든 다선일미든, 선과 차가 하나라는 사상의 형성을 둘러싼 장막을 걷게 된다. 지금까지 베일에 가렸던, 차와 선과 관련한 비슷한 사상들의 발단과 선후전개, 그리고 발전과정의 미스터리를 풀게 된다.

일본에 다선일미(茶禪一味) 묵보를 써 주었다고 하는 원오극근도 실은 무상 선사가 활동한 주 무대인 대자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며, 이때 무상의 선차지법에 접했을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원오극근의 다선일미는 선차지법의 변형이며 요즘 말로 하면 선차지법의 새로운 버전이 된다. 무상의 선차지법은 중국 본토에서 확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갈래는 일본으로, 다른 한 갈래는 구산선문과 함께 신라로 발전하여 돌아오게 된다.

대자가 관음전 앞에서 펼쳐진 무상 선사의 선차지법 발표회.
일본 고대 다도의 발단에도 무상의 존재가 있음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신선소각사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 다도의 신화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승인 무라다주코(村田珠光·1442∼1502)는 중국에 와서 불과극근 선사를 참배하니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는 다선일미라는 묵보(墨寶)를 증송하였다고 한다. 무라다주코는 귀국하면서 태풍을 만났는데, 대나무통 안에 ‘다선일미’ 묵보를 넣고 밀봉한 것이 물에 떠돌아다니다가 잇큐화상(一休)에게 발견되어 후에 교토(京都)의 다이도쿠지(大德寺)에 보관되었다. 일본 승려들은 이 묵보를 보고 깨우치고 조사(祖師)의 오지(奧旨)를 발휘하여 후에 ‘선차지도’(禪茶之道)를 저술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구절은 일본의 다도를 종교화하고 신비화하는 ‘다도신화학’의 핵심부분이다. 최근 제6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중국 항저우 영은사, 2011년 11월 10∼13일)에서 만난 일본의 대표적인 차 학자인 구라사와 유기히로(倉澤行洋)는 다선일미 묵보의 존재에 대해 묻는 필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선일미 묵보를 본 적도 없고, 묵보를 보았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일본 대덕사의 은밀한 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풍설, 혹은 전설에 휩싸인 다선일미 묵보는 일본의 다도신화학을 완성하기 위한 일본인의 신화적 조작 혹은 지혜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없는 자료도 만들어서 신화학을 완성하는데 한국인은 있는 역사도 자료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조사연구의 게으름으로 쉽게 없애는 어리석음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모두 민족적 자부심과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이는 비단 다사(茶史)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에 해당하는 한국인 학자들의 수치이다.

중국 쓰촨성 청두 대자사에서 열린 무상 선사 학술연토회에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하는 필자.
한국의 차도는 신라시대부터 이미 헌차례(獻茶禮, 獻供茶禮), 수행차례(修行茶禮)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상의 음료인 중국과 달리 차가 귀한 음료였기에 부처님에게 바치거나 귀족계급에 속한 승려들의 기호 음료가 되어 이로 인해 선(禪) 수행에 도움을 주는 차의 효과에 대해 일찍 남달리 눈을 떴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너무 흔한 음료였기에 음료의 효과에 특별히 자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것이 무상 선사의 중국 구도순례로 요즘 말로 시너지 효과를 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헌공차는 이차돈에서부터 시작됐다. 고구려에서 불법을 배워온 이차돈은 비록 순교하였지만 부처님에게 차와 꽃을 바치는 의식을 가졌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신라에는 이미 차가 성행하였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차의 성행은 그만 한 전개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이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하지 않고 200년이나 뒤인 흥덕왕 때 대렴의 기록을 공식적인 차의 기록으로 보는 것은 역사를 잘라버리거나 후퇴시키는 안이한 태도이다.

왜 역사를 후퇴시키는가. 증거가 부족하다, 자료가 불충분한 것은 고대사의 다반사이다. 글자 하나, 문장 한 줄을 가지고 역사의 선후를 따지는 마당에 지나친 실증주의는 식민사학의 음모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 씨앗을 가져와 왕의 지시로 지리산에 심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성행하였다.”

대렴이 지리산에 차를 심은 곳이 화엄사 지역이냐, 쌍계사 지역이냐를 두고 양설이 팽팽히 맞서 있지만, 중국 경산사 일대의 차나무와 쌍계사 일대의 야생차 나무의 DNA 검사 결과 같은 것으로 나왔다. 화엄사 일대의 야생차 DNA 검사가 실시되면 진위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대렴이 차 씨앗을 가져온 것을 공식기록으로 본다는 것은 차의 역사를 잘라먹는 태도이다. 대렴 이전의 차의 역사를 소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에 앞서 진흥왕(재위 540∼575) 때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사에 파종을 했다는 이야기가 ‘화엄사사적기’(華嚴寺事蹟記)에 나온다.

“연기조사가 진흥왕 대에 지리산의 양지 바른 곳에 절을 짓고 현판에 화엄사라 한 것이 지리산에 절이 서게 된 시초이다. 연기 스님이 차 씨앗을 가져와 절 창건과 동시에 절 뒤쪽의 긴 대밭에 심었다. 긴 대밭의 죽로차(竹露茶)는 유명했으며 호남 일대는 조선차의 고향이다.”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한 진감선사(眞鑑禪師·774∼850)가 차를 심었다고 하는 것은 그 뒤이다. 지리산 일대가 차 재배에 적당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법흥왕 때는 불교가 처음 도입됐다. 불교의 도입으로 신라도 동아시아 세계사의 보편성에 진입하게 된다. 이는 신라가 당시 국가 팽창기에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산국을 정복한 22대 지증왕 때부터 신라는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는 등 영토 확장과 함께 부흥기를 맞는다. 차의 역사도 이차돈의 헌차의식을 비롯하여 진흥왕 때 연기조사의 차재배 등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선덕왕 때에는 차가 성행했다고 한다. 이는 차 문화가 정신문화의 중요한 항목임을 말한다.

무열왕과 문무왕 때는 삼국통일을 위한 무력전쟁으로 차와 같은 한가한 이야기는 없다. 신라의 부흥·통일기는 30대 문무왕의 삼국통일로 일단락된다. 통일 후 통일신라로의 재출발 기반을 다지는 성덕왕 때부터 차는 다시 평화 시의 이야기 대상이 된다.

무상 선사(684∼762)는 바로 성덕왕의 셋째 아들임이 제일 유력하다. 효성왕의 재위는 너무 짧다. 6년도 채 못 된다. 김교각(金喬覺·696∼794)은 경덕왕의 넷째 아들이다.

중국에서 김화상(金和尙)으로 통하는 무상 선사와 김지장(金地藏·지장보살)로 통하는 김교각은 신라 왕자들로서 중국 당나라에 가서 불력을 떨치게 된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이들은 또 출가하면 속성(俗姓)을 버리는 승가의 습속에도 김(金)씨임을 유지하면서 대중에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당시 신라의 왕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중국 대륙의 서(西)와 동(東)에서 맹위를 떨쳤던 셈이다. 그런데 이 두 왕자가 둘 다 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라의 차의 흥성을 말한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