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염선사 ㅡ 무설토론(無舌土論) // 박정진의 차맥

2013. 5. 27. 16:42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30> 불교의 길, 차의 길 ⑧ 독자적 선이론 무설토론
 
무염선사 ‘무설토론’ 주창… 선종의 토착이론 공로자로
후기근대철학 존재·해체론으로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없어

 

구산선문 일으킨 선사들에게 차는 기본적으로 몸에 밴 음료

동아시아 선종 계에서는 한때 동류지설(東流之說)이 만연하였다. 신라의 유학승들이 우후죽순처럼 활발하였고, 이들의 선기(禪機)는 중국 대륙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중국의 선법이 동쪽나라인 신라로 죄다 흘러간다는 중국 선승들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이 말은 신라불교의 위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의 왕자나 왕손들은 하나같이 불문에 들었으니 중국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당지장, 마곡보철, 남전보원, 석상경제, 운거도웅 등은 잇달아 신라에서 온 제자들을 인가함으로써 동류지설이라는 붐을 일으킨 선사들이다. 물론 그 원류에는 무상선사(淨衆無相)와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있다.

성주사지 석불입상
‘차의 세계’ 제공

양자강을 따라 남종선이 무르익을 즈음, 도의, 혜철, 철감, 홍척, 범일 등이 입당 구법 길에 오른다. 이 대열에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선사(無染禪師 800∼888)도 현덕왕 14년(822년) 국사 김흔(金昕) 일행과 함께 당은포(唐恩浦·지금 화성군 남양만)에서 구법 행에 오른다. 당시 남양만과 중국 산동성은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무염선사는 마곡보철(麻谷寶徹 생몰미상)의 제자이다. 무염이 마곡보철로부터 선맥을 받는다. 현재 마곡암지로 추정되는 곳은 중국 산서성 영제시(永濟市) 포주진을 지나 있는 설화산(雪花山) 기슭이다. 설화산은 예전에 마곡산으로 불렸다. 현재 영재시 설화산 기슭에는 만고사(萬固寺)가 남아 있다. 만고사는 당대중(唐大中) 11년(公元 854년)에 창건되었다. 만고사에는 진흙으로 빚은 부처님 열반상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아서 중국 당국은 ‘오로봉 풍경명승구’로 지정하고 있다.

이곳은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인데 산문협시의 웅이산과 경계를 하고 있고, 초기 선종을 주도했던 곳으로 이곳에 마곡보철이 들어옴으로써 당시 선의 열풍이 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곡산과 무염선사에 대한 이야기는 잊혀졌어도 이곳 사람들에게 차는 아직 살아 있다.

무염선사는 24년간 중국에 머물다가 문선왕 7년(845년) 당 무종의 훼불(毁佛)이 계기가 되어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무염선사는 이때 산서성 마곡산을 출발한 뒤 산동성 무염원에 잠시 머문다.

청말 광서 13년(1887년)에 세워진 ‘무염원사원중수비’에 따르면 광화(光化) 4년(天復 元年·901년)에 ‘대당등주모평현곤유산무염원비’가 세워졌는데 인근 문등현에 사는 무염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무염사가 크게 확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교학자 김문경 교수는 “24년간 당에 머무르는 동안 무염원지는 무염국사가 주석했던 곳 중의 하나다”고 비정한 바 있다.

무염은 중국에서 ‘동방 대보살’이라는 칭호를 얻고 귀국해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을 일으켰다. 성주사는 충북 보령군 성주면 만수산(해발 433m) 북쪽 자락과 성주산(해발 680m) 서남쪽 자락이 만나는 넓은 터에 자리 잡았다. 지금 금당은 간 곳이 없고, 석탑(오층, 삼층 석탑)과 석등만이 넓은 터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최치원이 썼다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光塔碑)가 그 옛날 구산선문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김립지(金立之)가 쓴 ‘성주사사적기’(聖住寺寺蹟記)에 ‘차와 향을 두 손으로 받들고’라는 뜻의 ‘차향수’(茶香手) 말이 나온다. 또 낭혜와상비에는 ‘명발(茗?: 차의 향기, 혹은 차와 향)’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아마도 구산선문을 일으킨 선사들에게 차는 기본적으로 몸에 익은 음료였던 것 같다.

무염은 애장왕(哀庄王) 원년(800년)에 태어나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하여 법성(法性)선사를 은사로 능가경(楞伽經)을 공부했다. 능가경은 알다시피 초기 선종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달마는 혜가에게 법을 전수할 때 능가경과 함께 심법(心法)을 전했다. 능가경에 의지하여 수행하던 달마의 제자들을 능가종, 혹은 능가사(楞伽師)라고 칭하기도 한다. 능가사들은 “부처님 말씀에서 마음을 제일로 삼는다(佛語心第一)”라고 하여 ‘마음’을 제일 중요시하였다. ‘전법보기(傳法寶紀)’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師資란 스승과 제자를 의미함)’는 이를 잘 말해준다.

무염이 능가경을 처음 공부한 것은 아마도 당시 신라인들이 당(唐)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거의 동시에 선진문물을 구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염은 능가경을 배운 뒤 석징(釋澄) 대덕에게 화엄(華嚴)을 배우면서 교학에도 관심을 표한다. 이는 아마도 공부를 더욱 튼튼히 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교선(敎禪)은 항상 동거하듯이 수도자들을 유혹하였다. 공부가 무르익음에 따라 중국 대륙의 성과와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무염이 신라 사신을 따라 낙양(洛陽)에 들어가고 당시 불광사(佛光寺·현재 낙양 香山寺)에 주석하고 있던 마조도일의 제자 불광여만(佛光如滿) 선사를 뵙게 된다. 그는 당당히 맞섰다.

여만 선사는 무염을 보자마자 이렇게 감탄한다.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이 같은 동국인(東國人)을 본 적이 드물다. 뒷날 중국에서 선(禪)을 잃었을 때 동이(東夷)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祖堂集’ 권 17)

무염의 중국행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 후에 마곡보철(마조도일의 제자)도 그를 인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스승 마(馬) 화상은 예언하기를, ‘만약 동쪽 사람으로 눈에 띄는 이를 만나면 그를 길거리로 보내라. 지혜의 강물이 사해에 넘치게 하리니. 그 공적이 적지 않다’ 하셨는데 스님의 말씀이 그대로 맞도다. 나는 그대가 온 것을 환영했으며 다시 동토(東土)에 으뜸가는 선문을 세우게 보내노라. 가거라. 기꺼이 가거라.”

최치원이 썼다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光塔碑)
‘차의 세계’ 제공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는 신라의 입당 구법승을 열거하면서 귀화승과 귀국승을 나누었다. 귀화한 인물로는 정중사 무상(無相), 당산(堂山)의 혜각(慧覺), 진주김(鎭州金)을 거론하고, 귀국한 인물로는 도의(道義), 홍척(洪陟)대사, 대안사 혜철, 혜목산 현욱, 쌍계사 혜소, 쌍봉사 도윤, 굴산사 범일, 성주사 무염을 거론하고 있다.

중국 송(宋)나라 도언(道彦)이 1004년에 석가모니 이래 여러 조사(祖師)들의 법맥(法脈)과 법어(法語)들을 모아서 엮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따르면 신라로 돌아온 승려가 21명, 당에 머문 승려가 5명의 비율이다.

중국의 눈 밝은 선승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학승들을 ‘어찌 이다지도 늦었는가’라고 반가이 맞았다. 이는 아마도 정중무상과 마조도일을 통해서 전해오는 불문율이 신라 승들을 매우 총명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무염이 불광여만을 찾아간 것은 아마도 당시 중국 선문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의한 것 같다. 여만은 당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백거이와 돈독한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백거이는 사재를 털어서 향산사를 중수하는 등 여만선사와 가까웠다. 백거이는 말년에 벼슬을 멀리하고 향산에서 18년 동안 머물려 자신을 향산거사로 칭하기도 하였다. 이 일대의 승속을 망라해서 친한 친구 9명이 구노사(九老社)를 결사하여 향산사에서 참선을 하고 음영임천(吟詠林泉)의 시를 지으면서 친교를 다졌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것이다.

백거이는 죽어서도 여만선사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낙양 향산에는 백원(白園)이 있는데 그 탑이 바로 백거이탑이다. 무염은 여만선사에게서 당시 가장 앞서가는 선 공부를 하였을 것이다.

무염은 불광여만에게서 공부를 한 뒤 다시 스승의 권유로 마곡보철을 찾아가게 되고 두 스승의 안목을 다 배우게 된다. 무염은 당시 신라에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화엄공부를 바탕으로 다시 그것을 해체하는 선(禪) 공부를 동시에 마쳤다. 화엄은 쌓아 올라가는 공부이고, 선종은 쌓아 올라간 것을 해체시키는 공부이다. 무염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대중(大中) 원년(847년) 숭엄산(崇嚴山) 성주사의 주지를 맡게 된다.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 모여든 승려가 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당집’은 그의 찬란한 귀국과 성과를 이렇게 전한다.

“두 조정의 성주(聖主)의 천관(天冠)이 땅에 기울어지고, 한 나라의 신하들의 머리가 발 뿌리에 닿게 절을 하였다.”(조당집 권 17)

“동국의 지식인이 대사를 모르면 세상에 수치이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무염선사의 한국 선종사적 의의는 누구보다도 독자적인 선(禪)이론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무설토론’(無舌土論·혀가 없는 땅)은 오늘날 후기근대철학인 존재론이나 해체론으로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무설토론에 대한 문헌기록은 ‘조당집(祖堂集)’과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보인다. 그는 ‘경절이무(境絶理無·경계가 끊어지면 무가 이치다)’ ‘무상위상(無相爲相·무상이 상이다)’ ‘무전위전(無傳爲傳·무전이 전이다)’을 주창했다.

경문왕(861∼875)은 함통(咸通) 12년(871년) 무염선사를 뵙고 물었다. “반야의 끊어진 경계에서 경계가 끊어진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염선사가 대답했다. “경계가 이미 끊어지면 진리도 또한 따로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심인입니다. 그러니 그저 묵묵하게 행할 뿐입니다.”

‘무설토론’에서 무염선사는 무상과 무위의 반야정신을 설파한다.

“혀(舌)가 없는 땅은 무슨 말입니까?”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은 그중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무설토에는 스승도 제자고 없는데 어찌 서천 28로 당토의 6로까지 법의 등불을 전하여 서로 비추어 지금까지 법등이 끊어지지 않았습니까?”

“모든 세상에 유포된 것은 올바른 정답이 아니리라.”

“만일 그렇다면 옛 사람의 말씀이 스승이 제자에게 전승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장경(章敬·章敬懷暉을 말함)이 말하길 세상은 모두 허공과 같아 무상(無相)으로 상(相)을 삼고, 무위(無爲)로써 용(用)을 삼는다. 선을 전하는 것도 이와 같다. 전하지 않는 것으로 전하고, 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하지 않는 것이다.”

무염의 무설토론은 실은 그 연원을 마조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인 마음으로 종지를 삼고, 무문으로 법문을 삼는다. 법을 구하는 자는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있지 않으며 부처 밖에 마음이 따로 있지 않다. 선(善)을 취하지 말고, 악(惡)을 취하지 말라. 깨끗함과 더러움 어느 것도 의지하지 말라. 죄의 본성은 비어 있으며 생각해도 얻을 수 없고 자성은 없는 것이다.”(‘오등회원(五燈會元)’ 권 3 ‘강서마조도일선사’(江西馬祖道一禪師). 이 구절은 마조의 선수반야화사상(禪修般若化思想)의 요체이다.

불광여만 선사도 말하였다.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아 항상 무심처(無心處)에 머문다.” “무심처를 깨달으면 자연 법을 설함이 없다.”(‘오등회원’ 권 3 ‘불광여만선사’)

남종선은 북종선과 달리 마음을 별도로 모으는 것조차 거부한다. 북종선의 신수(神秀)는 “마음을 모아 선정에 들고, 마음에 머물고, 깨끗함을 본다”고 한다. 이는 점수돈오(漸修頓悟)이다. 이에 비해 남종선의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마음이 가는 대로 임운자재(任運自在)하는 것을 말한다.

무염선사는 혀가 있는 국토와 혀가 없는 국토로 판단하였다. 근기에 따라 ‘설하는 문이 있는’ 교문(敎門, 佛土)과 ‘설하는 문이 없는’ 선문(禪門, 祖土)으로 나누었다. 물론 무염은 선문의 입장이다.

무염선사는 ‘무설토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문의 궁극인 여래의 체험을 해인정(海印定)이라 이름한다. 삼종세간(三種世間)의 법인(法印)이 드러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삼종세간의 흔적이다. 지금 조사선이 가르침은 번뇌를 벗어난 납자의 마음처럼 영원히 청정과 더러움의 분별이 생겨나지 않는다. 때문에 삼종세간이라는 것도 없고 출입(出入)의 흔적도 없어서 다르다. 청정이란 즉 진여와 해탈 등의 법이고, 더러움이란 생사와 번뇌 등의 법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수행자의 마음은 깊은 물과 같아 청정과 더러움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 또 부처님의 국토란 선정과 지혜의 옷을 걸치고 타는 불꽃으로 들어갔다가 선정과 지혜의 옷을 벗어던지고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어서 종적(踪迹)이 남아 있다. 조사의 국토란 본래 벗어나고 벗어나지 않음이 없어 한 올의 실조차 걸치지 않는다. 때문에 부처님 국토와 크게 차별된다.”

마조도일의 제자 장경회휘 선사는 “지극한 이치는 말로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마조도일의 제자 대주혜해(大珠慧海)선사는 “경론은 지묵문자(紙墨文字)일 뿐이고 지묵문자란 것은 모두 공(空)함이다. 설사 소리 위에 이름, 구절 등의 법을 세워도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무염선사는 차선의 맥에서 빠져서는 안 될 존재 일 뿐 아니라 선종의 토착이론을 개발한 공로자로 우뚝 섰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