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실(香室) 관련 고전 모음 - 둘 / 국조보감

2014. 11. 21. 12:39향 이야기

 

 

 

 

  <국조보감 제38권>

 

국조보감(國朝寶鑑) 국조보감 제38권 4년(계사, 1653) 신숙주(申叔舟)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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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조 2
4년(계사, 1653)

 


○ 1월. 고 현감 윤정준(尹廷俊)과 고 부사 박영신(朴榮臣)을 정려(旌閭)하라고 명했다. 이들은 다 이괄(李适)의 변란 때 저탄(猪灘)에서 순절한 자들이었다.
○ 전 판서 김집(金集)에게 숭정(崇政) 품계를 주라고 명했다. 김집의 그때 나이 80이었다.
○ 2월. 상이 세자로 하여금 후원 논에 가서 모심는 것을 보게 하고, 김맬 때도 수확기에도 그리하도록 하여 씨뿌리고 수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하였다. 그리고 늘 섭이중(聶夷中)의 시를 외면서 이르기를,
“농가의 근고(勤苦)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하였다.

 


성균관에다 향실(香室)을 건립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이일상(李一相)이 말하기를,
성종조 성균관 향실 낙성 때 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이 서(序)와 기(記)를 썼는데, 그 판본(板本)이 지금까지도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중건하여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뒤따르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 일본인이 제기(祭器)ㆍ악기(樂器)ㆍ심의(深衣) 등을 얻기를 원하므로, 그것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 비변사 당상관들로 하여금 각기 문무 장사를 추천하도록 명하였다.
○ 송도(松都)와 황해도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까지 유행하여, 내의원에 명해 약물을 보내주게 하고 관향곡(管餉穀)으로 진구하도록 하였다.
○ 강화도에 기근이 들어, 봄철 조세로 받은 쌀 1천 석을 풀어 진구하게 하였다.
○ 고 충신 송상현(宋象賢)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노개방(盧蓋邦)을 상현의 서원(書院)에 배향하도록 명했다. 개방은 임진왜란 때 동래(東萊)의 교양관(敎養管)으로서 선성(先聖) 위판 아래서 죽은 자이다.
○ 상이 강연에 나아갔을 때, 시독관(侍讀官)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후원의 별당이 불에 타 새로 짓고 있다고 들었는데, 수성(修省)하는 동안은 집을 짓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금중에서 비밀로 하는 일에 관해서는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신하로서는 말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그대는 말을 하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기는 것이다.”
하고, 이어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 경기의 선비 김석견(金石堅)이 상소하여, 안흥진(安興鎭)을 설치하여 강화로 외원(外援)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상이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李厚源)에게 그 문제를 묻자, 후원이 대답하기를,
“그곳이 바다 한 쪽 수십 리 밖에 꽂혀 있어 황해도와 통하는 길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곳에다 군량을 쌓아두고 군병을 주둔시켜 안으로는 강화도와 표리(表裏)가 되게 하고, 밖으로는 호남ㆍ영남까지 견제하면서 감사로 하여금 그곳에다 행영(行營)을 두어 일단 유사시 들어가 근거지를 만들 수 있는 곳으로 삼게 하면 관방(關防)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겨우 영종도[永宗]에다 설치했던 터라서 한꺼번에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경의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이 굳어진다. 가을철에 가서 다시 논의해 봐야겠다.”
하고, 석견에게 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 안방준(安邦俊)을 공조 참의로 삼았다. 방준은 호남(湖南) 사람으로 조헌(趙憲)의 문인이었다. 그때 나이 80이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학문에 열중하였고 자기 스승 조헌을 위해 《항의신편(抗義新編》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 처음으로 서양 역법(曆法)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조정이 반사한 월력만을 죽 써왔을 뿐 우리나라 자체로 만들어 쓴 일은 없다가 세종조에 와서야 비로소 계산하여 만드는 법을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셈하는 방법이 기껏 대통력(大統曆)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계절과 월삭 그리고 일식ㆍ월식 등이 가끔 맞지 않을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조(仁祖) 22년(갑신)에 와서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김육(金堉)이 사신으로 연경에 들어가서, 서양 사람 탕약망(湯若望)이 시헌력(時憲曆)을 만들어 숭정(崇禎 명 나라 의종(毅宗) 연호) 초기부터 쓰고 있는데, 그 역법이 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월등히 낫다는 말을 듣고는 그에 관한 서적들을 구입해 가지고 와서 상소를 올리고 관상감 관원 김상범(金尙范) 등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연구하게 하도록 청하여 그로부터 10년 후인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침 김육이 관상감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시행할 것을 아뢰어 청했던 것이다.
○ 4월. 관서의 관향곡 모조(耗租) 1만 석을 방출하여 연경 가는 사행들의 말 고용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흉년이었기 때문이었다.
○ 개성의 교수(敎授) 석지형(石之珩)이 상소하고 오위귀감(五位龜鑑)을 올렸는데, 내용은 《주역(周易)》의 괘효(卦爻) 중에 제5효가 임금의 자리라는 뜻을 확대 해석한 것이었다. 상은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호피를 하사하였다.
○ 6월. 경상도 관찰사 조계원(趙啓遠)이 아뢰기를,
“기장(機張)과 울산(蔚山)은 크고 작은 것에 있어 월등한 차이가 납니다. 울산의 하말면(下末面)은 바로 옛날 기장 땅인데 큰 데서 떼내어 작은 데다 보태는 것이 고을을 만드는데 있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말면을 기장에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 7월.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이 귤성정(橘成正)을 보내 예조와 변신(邊臣)에게 서자와 함께 예폐를 올리고 이어 만송원(萬松院)과 가강(家康)의 사당에 제를 내려줄 것을 청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 승지를 보내 노산군(魯山君) 및 연산군(燕山君) 묘에 치제하였다.
○ 윤7월. 이때 자의대비(慈懿大妃) 병환이 완쾌되어 그 기념으로 경과(慶科)를 보였는데, 상은, 먼 곳 사람들은 서울의 시험장까지 올 수 없다 하여 북도(北道)에다 별도 과장을 열도록 명하였다.
○ 8월. 경기 지방에 전지 측량을 실시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경기는 이 나라 뿌리에 해당되는 고장인데도 전지 결수 절반 이상이 축이 나고 있습니다. 각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회계리(會計吏)만 대동하고 현지 답사를 하면서 문서대로만 결수를 매기고, 공연히 전결을 실지대로 조사한답시고 백성들을 소란하게 만들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고 영서(嶺西) 지방은 유랑민들이 산을 일구어 생업을 꾸려가고 실지 전야(田野)는 개간하지 않기 때문에 명산들이 날이 갈수록 벌거숭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별장(別將)을 두어 둔전을 만들고 유량민들을 나누어 통솔하면서 전야 개간을 권장하고 산을 일구는 일은 금하게 하며 앞으로 3년간은 조세 징수를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이어 하교하기를,
“경기가 토질은 척박한 데 비하여 조세는 과중한 편이다. 앞으로 전지 측량 때는 되도록 헐하게 등급을 낮추도록 하라"
하고, 이어 준수책(遵守冊)을 반포하여 각 도에도 차근차근 시행하게 하였다.
준수책은 대략 이러하다.
옛날에는 전지 제도가 상품ㆍ중품ㆍ하품으로만 구분되어 있었고 측량하는 자 역시 3등급에 따라 각기 달랐다. 팔도(八道)의 토질이 일정하지 못해 등수를 3단계로만 해서는 될 수 없는데 그렇게 함으로 해서 서로의 등차가 정밀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더 자세한 방법으로 전지를 6등급으로 나누고 결법(結法)도 다시 정하기로 한 것이다. 즉 주척(周尺)으로 해서 4척 7촌 7분 5리를 양척(量尺) 단위로 하고, 단위 곱하기 1만 척을 일정 면적으로 하여 1등급인 경우 1결(結)을 과세하고, 2등급은 85부(負) 1파(把), 3등급은 70부 1속(束) 1파, 4등급은 55부 7파, 5등급은 40부, 6등급은 25부로 한다. 하삼도(下三道)는 논이 기름진 곳이 많은 대신 척박한 곳은 적고, 경기ㆍ황해도는 기름지고 척박한 곳이 각기 절반이고, 강원도ㆍ함경도ㆍ평안도는 척박한 곳이 더 많다.
종전에는 하삼도의 상품ㆍ중품전은 다 수재ㆍ한재에 관계없이 곡식이 잘되는 땅으로만 쳤는데 지금에는 9등분의 연분(年分) 및 재상(災傷)을 참작해서 조세 징수를 하고 종전 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전의 상품전은 이름을 제1등전, 중품전은 제2등전이라고 하고 그 중에서 등수가 맞지 않게 된 곳은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여 되도록 맞게 정한다. 그리고 종전의 하등전으로서 비록 수원[水根]은 없더라도 토양이 기름진 논 또는 가끔 물에는 잠겨도 원래 토양은 기름진 땅 등은 모두 1ㆍ2ㆍ3등 중에서 적당한 등급을 매기고, 또 지형이 높고 모래 절반 흙 절반인 땅이라도 물을 대서 벼를 심으면 곡식이 잘 되는 논은 역시 2등 또는 3등급으로 매기며, 토질이 그 다음 가는 것은 4등급, 그 밖의 토질이 척박하고 모래 자갈땅인 논과 강원(江原)ㆍ양계(兩界) 등처의 최하급 논과 다름이 없는 것들은 5~6등급을 매긴다. 그리고 제방이나 물대는 도랑 근처의 땅들은 5~6등급으로도 치지 않는다.

○ 선조조 시종신(侍從臣)들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강원도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직을 삭탈하였다. 그때 강릉(江陵)에 6월에 서리가 내렸었는데도 광훈이 그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노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한 것이다.
○ 11월. 육진(六鎭) 및 삼수(三水)ㆍ갑산(甲山)의 전지 조세를 견감하였다. 흉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주D-001]섭이중(聶夷中)의 시 : 농가의 신고상을 핍진하게 표현한 시. 섭이중은 당(唐) 나라 하동(河東) 사람으로 시를 잘하였고, 그 중에서도 그가 남긴 전가시(田家詩)는 유명하다. 《唐書 卷177》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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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조 2
9년(갑술, 1514)


○ 1월. 이조에 하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사람을 쓰는 데 달려 있고, 사람을 제대로 쓰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정조(政曹)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근래에 제수하는 것을 보면 매번 급속도로 승진시키는 폐단이 있었다. 일찍이 듣건대, 조종조에는 정(正)과 부정(副正) 사이에 그 직임을 오랫동안 맡은 사람이 많이 있더라도 연소한 자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히 나아가려는 풍조가 그쳐졌다고 한다. 대각의 경우에는 언책(言責)을 부여해 놓고 두어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다른 직임으로 옮겨버리니, 맡겨놓고 이루기를 요구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다. 경들은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 폐조(廢朝)의 승지 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이우(李堣) 등을 삭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신하로서 위급한 때를 만나 구차히 피하는 것은 의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 사람이 반정하던 날 나가서 사변(事變)을 살피겠다고 핑계를 대고 도랑을 통해 앞을 다투어 달려 나왔는데도 도리어 훈적에 기록되었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모두 삭직시켜 신하된 자의 절개를 면려하도록 하라.”
하였다.
○ 2월. 상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언호(李彦浩)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세종께서는 별도로 문소전(文昭殿)을 설치하고 편문(便門)으로 납시어 항상 직접 제사를 지내셨고, 또 향실(香室)로 납시어 축첩(祝帖)에 어휘를 직접 쓰셨으니, 이는 후세의 왕이 법으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로써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 다스림의 근본이다.”
하고, 마침내 따랐다.
○ 8월. 일식이 있었다. 상이 구식(救食)의 의식을 직접 행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인재를 가르쳐 양성하는 것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먼저 해야 할 일인데, 그럭저럭 나날을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어 근래에는 극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구임시켜 인재를 양성하는 데만 마음을 쓰도록 하라. 사관(史官)은 사건의 기록을 전담하므로 맡은 임무가 가볍지 않으니, 재능과 식견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제수하도록 하라. 독서당(讀書堂)의 인원은 학문을 하는 데만 뜻을 써야 하니, 지금부터 본사에서는 늘 나와 근무시킬 것을 계청하지 말라.”
하였다.
○ 12월. 종실(宗室)을 15세에 입학시키는 예(禮)를 밝히도록 명하였다. 시강관 민수천(閔壽千)이 아뢰기를,
“예에 가서 가르치는 법은 없는데 왕자의 사부(師傅)가 집에 가서 가르치니, 이는 예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말 그렇다. 폐조 때 종학(宗學)을 폐지하였으나 15세에 알성(謁聖)하고 입학하는 규례는 폐지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직접 행하였으니, 이것이 옛 제도이다. 종부시로 하여금 거듭 밝혀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존경각(尊經閣)에 불이 났으므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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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조 8
12년(병인, 1686)


○ 1월. 영부사 김수홍이 상에게 아뢰기를,
“봉조하 송시열이 금년에 나이가 만 80세가 되었습니다. 조정의 신하에 대해서는 간혹 가자(加資)하는 규례가 있지만, 이에게는 더 가자할 것이 없으니 특별한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옷감과 음식물을 특별히 제급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조하가 만 80세라니, 지금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옷감과 음식물을 특별히 넉넉하게 제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호조가 미두(米豆) 각 15석, 돼지 2마리, 민어(民魚) 20마리, 석어(石魚) 30속(束), 면주(綿紬) 10필, 면포(綿布) 20필을 보내 줄 것을 계청하였다.
○ 2월. 예조가 예고제(預告祭)의 축문 머리말에 ‘효자(孝子)’나 또는 ‘애자(哀子)’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수의하기를 청하였다. 이전에 향실관(香室官)이 담제(禫祭)의 축문 가운데 ‘애자’라고 썼으므로 예고제의 축문에 이르러서도 ‘애자’라고 쓴 것에 대하여, 승정원이 ‘효자’라고 써야 될 것을 잘못 ‘애자’라고 썼다고 하여 해당 관리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특별히 잡아다가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향실로 하여금 의궤(儀軌)를 내어 상고하게 하니, 신축년 효종대왕의 상을 마친 뒤에 담제와 고동가제(告動駕祭)의 축문에 다 ‘효자’라고 썼다고 하였다. 다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논의에 ‘담제 축문에 ‘효자’라고 쓰는 것은 예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니, 의궤가 비록 이러하다 하더라도 정식을 삼기는 어려울 듯하다. 《의례(儀禮)》와 《가례(家禮)》에서는 축문의 말에 ‘애자’를 바꾸어 ‘효자’로 쓰는 경우는 부제(祔祭)를 지낼 때이니 지금 비록 담사(禫祀)를 지내기는 하였으나 부묘(祔廟)하기 전이니 곧장 효자라고 쓰는 것은 역시 의례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신축년의 의궤 외에 근거할 전례(典禮)가 없었으므로 대신에게 수의하기를 요청한 것이다. 영의정 김수항과 영부사 김수흥이 말하기를,
“《의례》와 《가례》를 상고하니, 모두 부제 때에 ‘효자’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바로 졸곡 뒤에 행하는 부제입니다. 졸곡을 마치고 부제를 거행하고 대상(大祥)을 마치고 새 신주(神主)를 옮겨 사당으로 들이는 것은 본래 고금에 통행해 온 예입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졸곡 뒤에 부묘(祔廟)하는 예절이 없고 부묘하는 예식을 담제를 지낸 뒤에 거행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부제의 절차가 비록 고례(古禮)와 같지 않으나, 부묘하기 전의 축문의 말에서 ‘애자’를 바꾸어 ‘효자’로 쓰는 것은 《의례》와 《가례》의 조문에 위배됩니다. 여러 사람들의 논의에서 말한 것도 반드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다만 그와 배치되는 전거가 있으니, 잡기(雜記)에서 ‘제례에서는 효자 효손이라고 일컫고, 상례에서는 애자 애손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였고, 그 주석에서 ‘제사는 길제(吉祭)이다. 졸곡 이후는 길제이므로 축사(祝辭)에서 효자라 일컫고, 우제(虞祭) 이전은 흉제(凶祭)이므로 애자라 일컫는다.’고 하였습니다. 의절(儀節)에서는 우제에서부터 담제에 이르기까지는 선조(先祖)에게는 ‘효자’라 일컫고 망자(亡者)에게는 ‘애자’라 일컫는다고 하였습니다. 잡기를 근거로 하면 축사에서 ‘효자’라고 일컫는 것은 졸곡에서부터 시작하고 부제를 지낼 때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고, 우리나라 선정(先正)의 논의도 마땅히 예경(禮經)을 근거로 하여 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영모전의 졸곡 뒤의 축문 머리말에서 그대로 애(哀) 자를 쓰는 것은 참으로 고례가 아니고, 의절로 논하더라도 이미 담사에 이르러서 애자라고 일컫는다고 하였으니, 담제를 지낸 뒤에 효자로 고쳐 일컫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신축년에 행한 의식은 반드시 근거한 바가 있을 터이니 지금은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남구만은 우선 담제에 의거하여 ‘애자’라고 일컫기를 청하였다. 상이 김수항 등의 의견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청대하여 말하기를,
“계해년 가을에 이듬해 봄에 양궁(兩宮)에 잔치를 올릴 일을 품정하였는데, 국가가 불행하여 자성(慈聖)께서 승하하셔서 마침내 설행하지 못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의 통한을 어떻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가의 예산이 고갈되었으므로 평소에도 양궁에 잔치를 베풀어 드리지 못하였고, 또 자의전(慈懿殿)의 회갑날 한꺼번에 잔치를 베풀어 올리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하고 마니, 마음속의 지극한 통한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하자, 여성제가 아뢰기를,
“지금은 이미 부묘(祔廟)의 예식도 지나갔으니, 마땅히 좋은 날을 잡아서 설행해야 되겠습니다. 지난 갑자년에 봉조하 송시열이 수의 속에서 또한 부묘가 지난 뒤로 물려서 행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풍정(豐呈)과 진연(進宴) 중에서 다시 아뢰어 정한 뒤에야 거행할 수 있겠으나, 풍정으로 호칭한다 하더라도 번잡한 형식을 줄이고 절약하는 쪽으로 힘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풍정으로 정하여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 3월.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할 때에 하교하기를,
“지존(至尊)의 회갑을 맞는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지금 풍정을 설행하려 하는데, 자전의 하교에서 매번 거듭된 가뭄에 마음을 쓰시어 기필코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려 하시니, 이 뜻을 도감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에 예조 판서 여성제가, 외명부(外命婦) 중에서 조정의 문무관 정2품 이상과 공신ㆍ삼사ㆍ장관ㆍ육승지의 처로서 응당 들어와 참예할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감하여 번다한 형식을 줄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4월. 주강에 나아갔다. 집의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능에 행행하였다가 환궁할 때에 교장(敎場)에서 수레를 머물렀습니다. 태복 정(太僕正)이 채찍을 올리기 위하여 수레 뒤편에 서 있었는데, 젊은 환관 하나가 마치 종에게 하듯 꾸짖고 떠밀어서 하마터면 땅에 고꾸라질 뻔하였습니다. 환관의 패만한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사하여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처음에는 추고하게 하였는데, 서종태가 다시 간쟁하자 상이 그제서야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서종태가 또 말하기를,
“황창 부위(黃昌副尉)의 집에 상사(喪事)를 돌보러 간 중사(中使)가 사건을 인하여 서계(書啓)하고서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감히 법도를 넘어 이토록 무엄하게 조사(朝士)를 경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가의 법에 오직 환관이 법도를 넘지 못하게 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제도로서 종묘 사직이 편안하게 계승되는 데에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이것과 더불어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그 우려됨을 이루 다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국가에 화란을 끼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작은 시초를 미리 방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저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을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다시는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곤란하게 여기면서 이르기를,
“다른 고을에서는 다 일을 담당할 장정을 보냈는데 유독 양주 사람만 오지 않았으므로 서계하여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며, 추고를 요청한 일만은 규례(規例)를 알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하자, 서종태가 아뢰기를,
“중사의 처지로서는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진계(陳啓)하여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더구나 양주 목사는 품계가 낮지 않은데, 그자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에 대하여 매번 옹호하는 표정을 보이시니 신은 실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다만 그 일의 상황을 말하였을 뿐이다. 옹호하였다는 말은 나의 본의를 모른 것이다.”
하고, 이에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다. 지경연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시종신의 아비로서 나이 70세가 된 자에 대하여 초계(抄啓)하여 가자하는 일은 법전에 해당 조문이 실려 있지 않은데, 해마다 당연히 하는 것처럼 하니 실로 의의가 없습니다.”
하니, 판부사 민정중은 이제부터 정식으로 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상이 금년에 한하여 초계하라고 명하였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높은 반열에 있는 자에게 자식이 시종신이 된 것으로 인하여 다같이 가자하는 것은 또한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은전을 미루어 주는 전례는 마땅히 통정의 품계에 그쳐야 하니, 가선 이상은 논하면 안 된다.”
하였다.
○ 4월. 비망기로 이르기를,
“근래에 국가에 사고가 많음으로 인하여 풍정(豐呈)의 성대한 예식을 설행하지 못하여 나의 마음이 항상 서운하였다. 어제 삼가 대왕대비전에 상수(上壽)의 예식을 거행하여, 자손들이 다 모여 밤이 이슥하도록 모시고서 잔치를 열고 술잔을 들고 장수를 경하하여 화목한 분위기가 흐뭇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어찌 이 기쁜 마음을 이루 다 이기겠는가. 옛날을 더듬어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슬픈 마음이 치밀어 오른다.
이어서 생각건대, 지존이 회갑을 맞은 것은 경사스러움이 더없이 크니, 휘호(徽號)를 올리는 예가 비록 《실록》 가운데 나타난 것은 없지만 인정과 예절로 따져볼 때 그만둘 수 없겠다. 예관으로 하여금 즉시 여러 대신들에게 수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의정 김수항과 판부사 민정중은 예부터 내려온 전례(典禮)가 없다는 뜻으로 답하였고, 영부사 김수흥과 판부사 정지화ㆍ이상진과 좌의정 남구만과 우의정 정재숭은 효성을 표현하려는 한 방법이 되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지존의 주갑은 바로 자주 볼 수 없는 경사이다. 특별히 휘호를 올리는 일은 인정과 예문에 합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장수에 대하여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 최상의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으려는 지극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김창협(金昌協)이 문의(文義)를 자세히 풀이하고 경계를 빠짐없이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晉州城)에서 의롭게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서 김천일(金千鎰)ㆍ황진(黃進)ㆍ최경회(崔慶會)는 더욱 걸출한 자들입니다. 왜적이 전에 진주성에서 크게 패하였기 때문에 기필코 성을 함락하여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는데, 이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도모하여 굳게 지키고 힘껏 싸웠습니다. 그런데 황진이 먼저 적의 탄환에 맞아서 죽었고 김천일ㆍ최경회와 여타 장사들은 모두 성이 함락되던 날 순절하였으니, 그 충렬(忠烈)은 참으로 늠름하며, 한 지방을 방어한 공적도 장(張)ㆍ허(許)가 수양(睢陽)을 지킨 것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그들의 절의를 사모하여 사당을 세웠고, 조정에서도 사당의 편액을 하사하여 포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영남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진주를 들러 본 바로는, 사우(祠宇)가 퇴락하였고 청소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으며 춘추의 향사도 거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만 인근에 있는 승려 하나가 그들의 의열을 흠모하여 매년 성이 함락되었던 날이 되면 고을의 인가에서 쌀을 빌려다가 불사(佛事)를 하여 재(齋)를 올린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들으니 참으로 측은하였습니다. 매년 가뭄의 재해를 만날 때면 조정에서 근시(近侍)에게 향축을 싸가지고 가서 본주의 전사자에 대하여 치제하게 하지만, 평상시의 향사에 있어서는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충절을 바친 자를 가엾게 여기는 뜻이겠습니까. 조정에서 특별히 신칙하여 향사하는 일이 전과 같이 폐지되는 데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우에 이미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폐지되고 거행되지 않는다고 하니, 소식을 들음에 한심하기 그지없다. 본도로 하여금 춘추의 향사를 각별히 거행하고 폐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 7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일전에 상방(尙方)의 서리를 차비문(差備門)에서 죄를 다스렸는데, 이는 비록 전례라고는 하나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에 똑같이 법을 적용하는 뜻이 아닙니다. 유사에게 회부하여 법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체모로 볼 때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나도 그대로 따라서 쓴 것이다. 지금 유사에게 회부하여 다스리는 것이 또한 무엇이 어렵겠는가.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 8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아, 재해의 발생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만, 어찌 오늘날처럼 혹독한 적이 있었겠는가. 내가 즉위한 10여 년 사이에 두렵고 놀라운 사변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해마다 팔도에 똑같이 기근이 들었는데도 저축이 고갈되어 진휼할 길이 없으니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농사가 잘 결실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람과 서리와 우박과 눈의 이변이 장마가 계속된 나머지에 겹쳐 이르러 결실에 대한 희망이 끊겨 온 전야(田野)의 백성들이 어쩔 줄 모르고 헤매니, 백성의 부모가 된 처지에 안타까움이 어떠하겠는가. 밤낮으로 떨쳐버리지 못하는 근심과 두려움은 마치 내 몸에 아픔이 있는 듯하다. 또 음흉한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괴가 이런 때에 또다시 나타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떠한 화기(禍機)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에 인자한 하늘이 재앙을 내려 나를 경계함이 이토록 지성스럽단 말인가. 하늘의 형상은 심원하여 쉽게 헤아리지 못하지만,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면 하늘의 변괴가 위에서 응하는 법이니, 오늘날의 재앙은 과인의 재능과 덕이 부족하고 백성들에게 정사를 시행하면서 하늘의 마음에 크게 화합하지 못하여 불러오지 않은 것이 없다. 자신에게 탓을 돌리고 반성하면서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느라 밥을 먹거나 쉴 때에도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하였다.
○ 경상도 김해군(金海郡)의 민전(民田)으로서 마구잡이로 궁둔전(宮屯田)에 들어간 것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재해와 이변이 일어난 것을 이유로 면직을 요청하니,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은 마구잡이로 수포(收布)의 대상에 소속시킨 데 지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 주고 화기(和氣)를 이끌어 내려면 이 일을 변통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진달한 바가 바로 나의 뜻과 일치한다. 속전(贖錢)을 거두는 한 가지 일을 속히 탕척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특별히 상의 하교를 중외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드디어 또다시 비망기를 내리기를,
“애당초 이정청(釐正廳)을 설립할 때에 특별히 사목(事目)을 세워, 함부로 소속시키는 자는 사변(徙邊)의 법으로 처벌하였으니, 이는 대개 간사함을 막고 폐단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생각건대, 현재 재해와 이변이 매우 혹독하고 농사의 작황이 대단히 나쁜 때를 당하여 허다한 사람에게 획일적인 법을 적용하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써서 진휼하는 도리에 어긋나고 또한 화기를 맞아들이는 방법이 아닌 듯하다. 지금 죄를 짓고 전가 사변(全家徙邊)이나 감등(減等)에 해당된 자들을 모두 탕감하여 조정에서 관대하게 처리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서 하교하여, 흉년이 든 것을 이유로 호남에서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하는 물품을 명년 가을까지 한하여 특별히 탕감하게 하였다.
○ 12월. 옥당의 관원을 야대(夜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이 임금이 법을 쓰는 도리에 대하여 조금 논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옳았다. 법을 쓰는 도리는 오직 공평하게 하는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흔히 형세에 따라 굽히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번 정제선(鄭濟先)의 일도 그가 살인을 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가 형세를 가졌기 때문에 이선부(李善溥)가 이두진(李斗鎭)의 계사를 정지시켜 구해(救解)하기에 급급하였으니, 그 행동과 처사가 매우 해괴하다. 군자가 법을 씀에 있어서는 참으로 가깝거나 멀다고 하여 달리 조종해서는 안 되며 신하가 법을 지킴에 있어서도 형세의 강약에 따라 처우를 다르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모든 신하들이 다 일어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면려하고 경계하심이 여기에 이르니 감히 경건하게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주D-001]장(張) ·허(許)가 …… 것 : 장·허는 당 현종 때의 충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모두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수양에서 성이 함락될 때까지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안정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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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조 14
36년(경인, 1710)


○ 1월. 상이 하교하기를,
“해가 새로 바뀌어 농사를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니, 권농(勸農)하는 정사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모든 도의 감사로 하여금 열읍에 신칙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영남에서 특히 심한 고을에 대한 진정(賑政)도 도신으로 하여금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2월. 고려(高麗)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정몽주의 후손 호(鎬)가 죽고 자식이 없자, 연신(筵臣)이 건의하니, 상이 호의 조카 도제(道濟)를 후사로 세우라고 명하였다. 또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급료를 주어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 3월. 대신에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전년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거둥하여 창졸간에 예법을 따지지 못하여 절을 하지 않고 읍(揖)을 하였고, 그 뒤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도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이것이 비록 다 이루어진 일이지만 훗날 반드시 관례가 될 터인데, 읍을 한 것이 과연 실례됨이 없었는가?”
하니, 대신이 대답하기를,
“제왕의 묘에 대해서 고사(故事)에 의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묘조에 명 나라의 장수가 나왔을 때에 관왕묘에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결코 읍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였다.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때에는 명 나라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설행하였기 때문에 혹 배례(拜禮)를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꼭 길이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관왕(關王)의 충성과 용맹은 역사에 드문 것이기는 하나, 옛날의 명장으로서 선성(先聖)ㆍ선사(先師)와는 차이가 있으니, 배례를 행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읍례를 행하는 외에 다른 예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안왕(武安王)이라 호칭하고, 향실(香室)의 축문에서도 ‘감히 무안왕께 밝게 고합니다.’ 하였다.”
하자, 대신이 또 대답하기를,
“왕의 작호(爵號)는 추봉한 것이고 본래의 작호는 후(侯)입니다. 따라서 그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대등한 예로 접대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옛날 사실을 널리 상고하여 예절을 알맞게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홍문관이 아뢰기를,
“《회전(會典)》 군사조(群祀條)에 ‘홍무(洪武) 6년에 비로소 서울에 제왕(帝王)의 사당을 설치하고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이상의 제왕과 한(漢)ㆍ당(唐)ㆍ송(宋)을 개국한 임금을 제사지내게 하였다. 뒤에 주 문왕(周文王)은 은 나라를 섬겼다고 하여 신주를 설치하지 않고 단지 능묘(陵廟)에 제사지내는 데에 그치다가, 홍무 7년에 이르러 제왕묘에 친히 제사 지냈다.’ 하였고, 의주(儀註)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가정(嘉靖) 11년에 정한 친제의(親祭儀)에는 두 번 절하는 예가 있는데, 이 한 토막이 어느 정도 오늘날의 일에서 참조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왕을 능묘에 제사지내는 것에 그치고 친히 임하여 절하고 제사지냈다는 글이 없는 것은 대개 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돌아보건대, 이 관왕의 왕작(王爵)도 또한 추봉에서 나온 것이니, 명 나라의 예로 유추하면 상께서 친히 임하여 절을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또 《오례의(五禮儀)》 빈례(賓禮) 연조정사조(宴朝廷使條)를 상고하니 ‘전하가 사자(使者)에게 읍(揖)을 하면 사자가 읍례(揖禮)로 답한다 ……’ 하였습니다. 설령 관왕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예로 접대하여, 읍례를 하고 배례를 하지 않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으로써 말하면 성상께서 읍을 한 것은 실로 예법에 적중한 것입니다.
관왕묘를 창설할 때의 예절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간혹 우악한 예를 표하여 매우 신중하게 대처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한때의 임기 응변에서 나온 것일 뿐이니, 그것을 인용하여 법식으로 삼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훗날 《실록》을 포쇄(曝曬)할 때에 선묘(宣廟)의 친제의(親祭儀)를 상고해 내어오라.”
하였다.
○ 4월.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거둥하여 잔치를 받았다.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술잔을 올려 헌수(獻壽)하였는데, 술 9잔을 돌리고 거두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전년에 잔치를 받은 것도 내가 흔쾌히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번에 요청한 것은 더욱이 뜻밖이다. 세자의 상소를 저지한 일에서 보면 나의 뜻이 확실하게 정해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신이 앞에서 진달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기에 어쩔 수 없이 애써 따르기는 하였지만, 지금 심한 가뭄을 만나 더욱 불안하기에 정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몹시 서운하여 누누이 요청하였고, 또 과거 병인년 여름에 동조(東朝)에 잔치를 드릴 때에 마침 가뭄을 당하여 잔치를 정지하려 하셨는데, 내가 설명을 드려 마침내 물려 거행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옛날에 가졌던 마음으로 세자의 오늘날의 정성을 살펴보게 되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또 애써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나의 마음이 불안한 것을 어떻게 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잔치가 이미 지나갔고 은혜와 혜택을 미루어 시행하는 것도 이왕의 사례가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 7월. 유생 곽경두(郭景斗) 등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고, 끝에서 윤증(尹拯)을 헐뜯고 배척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윤 판부사는 초야에서 덕을 길러서 오래 전부터 무거운 신망을 받아왔으니, 유독 예우할 현인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이 어찌 감히 함부로 이토록 헐뜯는단 말인가. 전에 ‘유신(儒臣)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 말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이루려 하는 것이니, 나는 결단코 그 술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당파를 지어 논쟁하는 것은 국사에 무익하다. 비록 조정에 있는 신하라 하더라도 그런 논쟁을 좋아하는 자는 내가 절대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조정의 처분이 매우 공정한 뒤라야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다. 이 상소의 말은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 10월. 비변사가 인재를 특별히 천거하는 일로 절목을 만들어 요청하기를,
“기획력, 실무 능력, 용기 세 분야를 정하여 대신과 육경으로부터 각도의 감사ㆍ병사에 이르기까지 각각 2인을 천거하게 하여, 경외(京外)의 추천이 다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묘당에서 익숙히 논의하여 기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경상도 삼가(三嘉)에 사는 출신(出身) 흥방필(洪邦弼)이 어떤 이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의 처 최씨(崔氏)와 딸 홍씨가 몇 년을 두고 범인을 찾아서 직접 칼로 찔러 복수하였다. 도신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최ㆍ홍 두 여인이 기필코 복수할 작정을 했다가 마침내 찾아내어 직접 찔러 복수하고, 또 관아에 나와서 자수하였다니, 그 늠름한 절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이다. 이는 함부로 사람을 죽인 죄를 특별히 용서할 뿐만이 아니다.”
하고, 이어서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판부사 이유(李濡)와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법을 믿고 오로지 죽이기를 도모하는 것은 훗날의 폐단이 염려됩니다. 따라서 정려(旌閭)하는 일은 가볍게 시행하기 어렵고, 다만 부역을 면제하여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는 것이 아마도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하교하기를,
“도성은 지키기가 어려우니 특별히 다른 곳을 가지고 논의하겠다는 뜻으로 진사 허극(許極)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다. 옛날에 소열제(昭烈帝)가 말하기를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차마 버리고 떠나겠는가.’ 하였다. 더구나 도성의 백성은 다 나의 적자(赤子)인데 어찌 난리에 임하여 보전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가서 살펴본 두 곳 가운데에서 대계(大計)를 정해야 되겠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두 번째의 일이다. 무릇 관방(關防)에 관계된 긴요한 곳들은 마음을 다하여 조치하고 혹시라도 비상한 일이 생기면 힘을 합하여 적을 막아서 군부(君父)를 버리지 말게 하는 것이 참으로 제일의 급선무이다. 이에 대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착실하게 받들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대신이 청대하였을 때에,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순무사(巡撫使)의 행차 때에 해로(海路)의 요충지에 대한 상황을 분명하게 살펴서, 혹은 성첩(城堞)을 수리하고 혹은 돈대(墩臺)를 쌓아 예방할 방도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강화도는 바로 국가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니, 더욱더 보수해야 되고, 교동(喬桐)ㆍ영종(永宗)은 강화도와 서로 의지하는 지역이므로 군사를 증원하고 대비를 설치해야 됩니다. 그리고 남양(南陽), 인천(仁川) 등의 읍은 비록 바닷가에 위치한 지역이라고는 하나, 지방관 휘하에 한 명의 군사도 없어, 비록 능력이 있는 인물을 보낸다 하더라도 무략(武略)을 쓸 곳이 없습니다. 세 진에 비중을 두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변의 방어에 대하여 한 곳도 믿을 만한 곳이 없다. 비록 무사 태평한 시대라 하더라도 반드시 미리 방비를 해야 비상시에 다급하여 우왕좌왕하다가 패배하는 탈을 면할 수 있다. 더구나 지금 걱정스러운 점이 곳곳에 널려 있어 수비할 대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실정이다. 묘당도 마땅히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여 항상 마음을 풀어 놓지 않는다면 믿을 수 있을 듯하다. 이 점을 유의해야 되겠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안정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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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조 6
17년(신유, 1741)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었다. 어사 홍상한(洪象漢)을 보내어 진휼을 감독하도록 하고,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군포를 면제해 주고, 우심(尤甚)한 고을은 아울러 대동 신포를 면제해 주었다. 이때 관북(關北)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동북도(東北道)의 방물(方物)ㆍ물선(物膳)ㆍ삭선(朔膳)을 가을 추수 때까지 모두 면제해 주었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하교하기를,
“덕이 부족한 소자가 삼가 어렵고도 큰 자리를 이어받아,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덕이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하고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명령이 조정 신하들에게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만 해당되어도 두려울 것인데, 더구나 겸하여 해당하는 경우인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말에, ‘그 형체를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를 살펴보라.’ 하였다. 예전 병자년(1696, 숙종 22년)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고를 그림으로 그려 궁중에 놓아두도록 하였으니, 선왕께서 경계를 드리운 바가 깊고도 절실하다.”
하고, 마침내 10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 2월. 양양(襄陽)의 문관 최규태(崔逵泰)가 청옥규(靑玉圭)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임진란 때 강릉(江陵)에 유진(留陣)했던 곳에서 이 규를 얻었습니다.” 하였는데, 조현명이 이 말을 아뢰었다. 상이 이를 가져다 보고 경연 신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서전(書傳)》과 《주례(周禮)》에서는, 환규(桓圭)는 길이가 9치이고 신규(信圭)와 궁규(躬圭)는 길이가 7치이고 너비는 모두 3치이고 두께는 모두 반 치이고 윗부분의 좌우로 깎아낸 것이 모두 반 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고금의 예기(禮器)를 가지고 그 규를 재어 보니, 길이는 과연 7치인데 너비가 채 2치가 안 되고 두께와 깎아낸 부분도 다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상의원에 명하여 옛 제도에 의거하여 청옥으로 제후 및 세자의 규를 만들되, 주척(周尺)으로 길이 9치, 너비 3치, 두께 5푼이 되게 하도록 하였다. 이는 대개 명 나라 성제(成帝)가 하사한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 3월. 김진상(金鎭商)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김진상은 시골로 내려가 살면서 모든 관직을 의리를 이끌어대어 사양하고 한마디도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상이 그의 욕심없이 깨끗하고 편당을 짓지 않는 점을 칭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이렇게 명하게 된 것이다.
○ 개성부에 불이 났다. 경신년의 규례대로 본부의 창고에 유치해 두었던 곡식을 나누어주어 구휼하도록 하였다.
○ 부절(符節)을 찬 장신(將臣)은 성 밖에서 지내지 못하도록 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유생(儒生)이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적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지 말도록 명하고, 이를 정령으로 삼도록 하였다. 처음에 전 참판 이춘제(李春躋)가 아들의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서제(庶弟) 이하제(李夏躋)로 하여금 성찬(盛饌)의 마련을 담당하도록 하고, 공경(公卿)과 위포(韋布)들을 두루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중독(中毒)되어 돌아가 죽었고, 죽지 않은 경우도 병이 들었다. 이에 많은 원통한 사람들이 신문고를 두드리고, 이하제의 죄를 다스려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번 원통함을 씻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상이 불쌍히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많은 원통한 사람들이, 형조 관원의 보통 형문(刑問)으로는 자복을 받아내기에 부족하니 포도청으로 보내라고 청하였다. 그에게 치도형을 뒤섞어 시행함에 이하제가 마침내 포도청에서 죽게 되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관학생(館學生)에게 친시(親試)를 보이게 되었는데, 하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하제는 일찍이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 뜰에 들어왔던 자인데 그를 포도청으로 보내어 도적 다스리는 법률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포도청이 유생을 다스린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뒤를 잇는 임금들이 어찌 본받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유생이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적 다스리는 법률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할 때는 이조 판서가 서계문을 읽고 형조 판서가 이에 임석(臨席)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상이 이미 친림 서계의 의례를 정하여 유사가 의절을 지어 올렸는데, 승지로 하여금 서계문을 읽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이르러 홍문관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주례》 천관(天官)에는, ‘태재(大宰)의 직책은 백관의 서계를 관장하는 것으로 기일이 되기 10일 전에 집사를 거느리고 날을 잡아 마침내 서계한다.’ 하였고, 추관(秋官)에는, ‘대사구(大司寇)는 서계하는 날 임석하여 백관을 서계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승지가 서계문을 읽고 형조 판서가 서계하는 데 임석하지 않는 것은 옛 예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옛 예를 따르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명한 것이다.
○ 경기ㆍ황해ㆍ강원 세 도의 기민(飢民)으로서 서울로 흘러 들어온 자가 1400여 명이었다. 상이 이를 듣고, 안집(安集)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 도의 도신에게 문책성 유시를 하였다. 이어 진휼청에 명하여 죽을 쑤어 진휼하도록 하였다.
○ 4월. 관학생은 예전대로 홍단령(紅團領)을 입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거재(居齋)하거나 전시(殿試)에 응시하는 유생은 모두 홍단령을 입었는데, 유생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겨 《시경(詩經)》의,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이여[靑靑子衿]’라는 문구를 인용하여 청색옷을 입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성이 이 일을 아뢰자, 상이 대신과 유신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경국대전》의, ‘제학(諸學) 생도(生徒)는 단령(團領)을 입는다.’는 문구 아래의 주석에, 청금(靑衿)을 입는다고 하였고, 《시경》의 주석 및 자서(字書)에는, ‘영(領)은 금(衿)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혹 홍색옷에 청색깃을 다는 것인 듯합니다. 게다가 고 판서 이수광(李睟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우리나라 유생은 사사로이 출입할 때에도 홍직령(紅直領)을 입었는데 명묘(明廟) 말년에 잇따라 국휼(國恤)을 만나 흰옷을 입는 것이 익숙해져서 이내 습속이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홍색옷이 조종조의 옛 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정 선비들의 옷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중한 곳에서는 흑색옷을 입고 중하지 않은 곳에서는 홍색옷을 입습니다. 유생이 성묘(聖廟)에 들어갈 때는 청색옷을 입고 식당(食堂)에 들어가거나 재회(齋會) 때는 홍색옷을 입는 것은 뜻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대로 하도록 명한 것이다.
○ 전랑(銓郞)의 통청법(通淸法) 및 한림(翰林)의 회천법(回薦法)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전랑의 통청과 한림의 회천으로 다툼의 단서를 서로 일으켰다. 상이, 조정의 붕당은 모두 청선(淸選)을 다투는 데서 일어난다고 여겨 경장(更張)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송인명(宋寅明)ㆍ조현명(趙顯命)ㆍ원경하(元景夏) 등이 힘껏 찬동하였다. 이에 상이 마침내 용단을 내려, 전랑은 통청의 권한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고, 한림은 회천을 없애고 회권(會圈)을 하되 송 나라 조정의 관직(館職) 규례에 의거하여 소시(召試)를 보인 뒤에 부직(付職)하도록 하였다.
○ 5월.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오국성(五國城)에 황제총(皇帝塚)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연 고실(故實)에 밝은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리려 하였다면 오국성이 북도에 있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이미 황제의 무덤이라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꼴베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례의》에 나오는 궁(宮)ㆍ전(殿)ㆍ문(門)ㆍ교(橋)의 이름이 현재 쓰는 것과 달라 예를 행하는 데 불편하였다. 이에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바로잡도록 하고, 책이 완성되면 영남 감영으로 보내 간행하도록 하였다.
○ 7월.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종묘 각실의 축문(祝文)에는 모두 존호 및 시호를 적었는데, 유독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존호 ‘인수(仁粹)’,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존호 ‘인혜(仁惠)’,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존호 ‘자순화혜(慈順和惠)’만 빠뜨리고 적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예조 판서 및 승지에게 명하여 향실(香室)로 가서 바로잡도록 하였다.
○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궤장(几杖)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박필성은 효묘조(孝廟朝)의 부마(駙馬)인데, 이때 이르러 90세가 되었다. 궤장을 내리는 날 선온(宣醞)하도록 명하고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영광스럽게 해주었다. 이어 봉조하(奉朝賀)의 예에 의거하여 크고 작은 조회(朝會)에 궤장을 가지고 다니도록 명하였다.
○ 태학생을 광달문(廣達門) 밖에서 불러 찬(饌)과 술을 내려 먹였는데, 숙묘(肅廟)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선유문(宣諭文)에 이르기를,
“저 태학을 바라보니 선성(先聖)이 문묘에 있음에 십철(十哲)이 위의 있게 나열해 있고 육현(六賢)이 충만해 있도다. 예전의 현관(賢關)에는 푸른 옷깃이 가득 성대하였는데, 오늘날의 태학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힘쓰고 있다. 방책(方冊)이 앞에 있는데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태만한 마음뿐이니,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앞뒤에 있은들 어디에 훈계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 유시를 고요히 듣고 성인을 높이고 근본에 힘써 모두 바른 데로 돌아오도록 하라. 지난날의 일을 뒤미처 따라 금중(禁中)에서 선유하니, 아, 너희 제생들은 대사성에게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상이 희릉(禧陵)에 전알하고 이어 효릉(孝陵)으로 가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고 나서 재실(齋室)로 갔는데, 벽에 인묘(仁廟)가 궁관(宮官) 김인후(金麟厚)에게 내린 묵죽(墨竹)의 인본(印本)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어제시 1절(絶)을 써서 내려, 벽에 함께 붙이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궁궐과 여염은 하늘과 땅처럼 떨어져 있다. 이에 옛날에는 밤에 숙위 군병에 대해 물었던 훌륭한 일이 있었다. 상번(上番)하는 정병(正兵)이 비록 지척에서 숙위를 하고 있지만 아랫사람의 실정을 어찌 넌지시 위로 아뢸 수 있겠는가. 옛 규례를 따라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을 살펴 묻도록 하여, 그 가운데 늙었는데도 역(役)에서 제외되지 않은 경우나 한몸에 여러 가지 역을 지고 있는 자가 있을 경우 각도에 신칙하여 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9월. 관동에 큰물이 나서 민가 1천여 호가 물에 떠내려 갔다. 휼전(恤典)을 시행하고 제단을 설치하여 빠져 죽은 백성들에게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하였다.
○ 10월. 대훈(大訓)을 친히 지어 태묘에 고하고, 이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였다.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과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처분한 이후로 다시는 서로 대립하지 말라.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을 공변되게 하느냐 사사롭게 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전조(銓曹)에 달려 있으니 각각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북관(北關)에 크게 기근이 들었다. 상이 밤에 대신 및 북도의 구관 당상을 불러 진구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이에 영남의 대동미 2만 곡(斛)과 군작미(軍作米) 1만 곡과 세태(稅太) 1만 5천 곡, 호남의 위태(位太) 5천 곡을 전에 구획한 잡곡 5만 곡과 아울러 도합 11만 곡을 북관으로 들여보내고, 박문수(朴文秀)를 진휼사(賑恤使)로 삼아 진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에 끝내 굶어죽은 백성이 한 사람도 없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 (역) ┃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