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
소대(召對)했는데, 겸문학(兼文學) 정민시(鄭民始)와 겸사서(兼司書) 홍국영(洪國榮)이 《주서(朱書)》의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세 편지를 강론하였다. 그 동안 연대(筵對)를 오래 폐한 까닭에, 홍국영이 달사(達辭)를 올려 청했더니, 동궁께서 손수 답하여 아름답게 여기고, 즉시 주강(晝講)하라는 영을 내렸다. 저녁에도 또 규례에 따라 소대했는데, 춘방(春坊)이 문의를 다 아뢰었다. 내가 아뢰기를,
“여기에 이르되 ‘논어(論語)를 보아 문리를 얻으면, 나머지 경서(經書)들은 절로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논어 한 책은 누구나 다 읽는 책이건만, 능히 모든 경서를 절로 알게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독서(讀書)를 능히 이토록 익숙하게 하지 않으면, 실상 유익이 없습니다. 어찌 논어뿐이겠습니까? 무릇 독서에 있어서 반드시 이같이 익숙함을 구한 다음이라야 참으로 독서한다 할 것입니다.”
“나같은 자는 족히 논어를 읽었다고 할 수 없겠소. 아까 마침 논어에 있는 ‘바로 하는 말을 능히 따름이 없겠느냐[法語之言能無從乎].’라는 한 장(章)을 상고할 일이 있었는데, 어느 편(篇)에 있는 줄을 몰랐으니, 부끄럽지 않소. 계방은 능히 기억할 수 있으시오?”
“신도 또한 어느 장인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노사숙유(老師宿儒)들도 흔히 기억하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대개 독서란 그 문의(文義)를 마음속에 흡족하게 쌓는 것이 귀하지, 장의 차례를 기억하지 못함은 그리 유감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여기에는, ‘곧 글을 읽으며 이론을 세우려는 마음부터 먼저 가진다면, 한생각[一念]이 이미 바깥으로 달린다.’는 것입니다. 대개 저서(著書)란 본디 초학자(初學者)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이 조금만 있어도, 바깥으로 달림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독서의 경계로 삼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고 하였다.
“‘자방(子房)이 조용한 모습을 지었다.’는 일도 교휼함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곧 이르기를 ‘공명(孔明)도 미칠 수 없다.’ 하였으니, 온당치 못한 말이 아니오.”
“자방은 일을 할 즈음에, 때를 기다리고 기회에 따르면서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기척도 없었으니, 이른바 ‘조용한 모습’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개 깊고 두터운 그의 기국과 역량은 ‘공명으로서도 혹 미칠 수 없다.’는 말은 선배(先輩)에게도 많았던 것입니다.”
“법어(法語)라는 말이 과연 어느 편(篇)에 있는가?”
다들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홍국영이 아뢰기를,
“본원(本院)에 논어가 있으니 상고해 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계방이 나가서 상고해 오시오.”
하였다. 나가서 논어를 가지고 들어와,
“자한편(子罕篇)에 있습니다.”
하니, 동궁이 다시,
“대전(大全)도 가지고 오시오.”
하므로, 나는 대전을 갖고 들어와 아뢰려고 막 나아가 엎드리자, 동궁은 이르기를,
“계방의 글 읽는 소리를 아직 듣지 못했으니, 한 번 읽으시오.”
하였다. 다 읽자, 동궁은,
“손여(巽與)란 무슨 뜻이오.”
“손여란 부드럽고 순하다는 뜻입니다. 군신(君臣)간의 관계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여 차츰 깨닫도록 인도해 나가는[納約自牖]’ 따위가 곧 손여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손우여지(遜于汝志 너의 뜻을 겸손히 하라는 뜻)’의 ‘손(遜)’과 뜻이 다른가요?”
“글자는 비록 다르나, 뜻은 같습니다. 손(巽)과 손(遜) 두 글자는 다 부드럽고 순하다는 뜻이며, 아첨하거나 아양 떤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고, 내가 막 물러나오려고 할 때, 동궁이, ‘계방은 어느날 출직(出直)하느냐.’고 묻기에 ‘내일 당번이 바꾸어진다.’고 하였더니, 다시 ‘번을 들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세마(洗馬) 임준호(林濬浩)입니다.’고 답한 뒤, 곧 물러나왔다.22일진시(辰時) 때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겸문학(兼文學) 정민시, 겸사서 홍국영이 성학집요(聖學輯要) 형내장(刑內章)을 읽었고, 춘방(春坊)이 문의를 아뢰었다. 내가 아뢰기를,
“문의는 아뢸 만한 것이 없으나, 부질없는 우견(愚見)이 조금 있습니다. 이글은 체계가 다른 글과는 달리, 긴요한 곳이 부주(附註)와 안설(按說)에 많이 있는데, 이제 주(註)를 전폐하고 읽지 않으니, 너무 소홀한 일이 아닙니까?”
“하번(下番)은 이미 앞서 한 말이 있으니, 반드시 고집할 터이나, 상번(上番)의 생각은 어떻게 여기시오.”
정민사가 대답하기를,
“경서(經書)도 주설(註說)을 다 읽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이 성학집요의 주설은 다른 경전(經傳)에 모두 나오니, 빠뜨려도 무방합니다.”
고 하였다. 나는 아뢰기를,
“훈고(訓詁)의 주(註)같은 것은 빠뜨려도 무방하나, 장(章)마다 붙인 부주(附註)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널리 인증하고 부연(敷衍)하였으므로, 가장 볼 만한 것이 많고 아뢸 만한 문의도 또한 여기에 많이 있는 만큼, 전폐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
“요즈음 모시는 일이 바쁜 관계로, 서연(書筵)을 못마치고 중도에서 끝날까 두려워 부득이 빠뜨린 것이지, 빠뜨리기 좋아해서가 아니었소,”
“바쁜 일이 있을 때는, 나누어 읽혀서 잠심(潜心)해서 듣는 것이 오히려 전폐하기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복습(復習)할 때는 나누어 읽도록 하는 것이 가하겠소. 또 서연(書筵)에서 읽지 못했더라도 궐내(闕內)에 들어가면 자연 겨를이 있는 대로 자세히 보게 될 것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홍국영이 아뢰기를,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서연(書筵)에서 이미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저하(邸下)께서, 귈내에선들 어찌 자세히 볼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동궁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어찌 보지 않으면서 겉으로 헛말을 하겠소. 나는 하번(下番)에게 일찍이 헛말로 속인 일이 없거늘, 하번은 항상 나의 말을 이토록 믿지 않으니, 어찌 민망치 않소. 계방은 하번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말은 진실로 과도한 듯합니다. 그렇지만 저하께서 받아들이실 줄 우러러 믿고 그와 같이 말한 것이오니, 이는 성세(聖世)의 일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지금도 또한 바삐 끝내게 되어 매우 부족한 감이 있으나, 계방이 한 말은 매우 좋았소.”
하였다.29일진시(辰時)에 성학집요(聖學輯要) 친친장(親親章)을 가지고 서연에 입시하였다. 겸필선(兼弼善) 오재소(吳載紹)와 겸사서(兼司書) 홍국영(洪國榮)이 읽었고, 오재소가 문의를 대강 아뢰었다. 홍국영이 아뢰기를,
“여기에 이르기를 ‘지나치게 사(私)에 편중함과 데면데면하여 친절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병통이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지나친 사의 편중이 데면데면하여 친절치 못하는 것보다 그 병통이 심할 듯합니다.”
하였다. 나는 아뢰기를,
“별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번(下番)이 아뢴 말이 의미는 비록 있다 하겠으나, 신의 생각엔 ‘친한 이를 친히 한다[親親]’는 뜻을 보면, 그 염려가 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박함에 있는 것이니, 두 병통에 대하여 그 경중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고 하니,
“계방의 말은 아주 완벽(完璧)하오. ‘친한 이를 친히 한다.’는 것은 이성지친(異姓之親)도 아울러 말한 것인가?”
하였다. 오재소가,
“그렇습니다.”
고 아뢰니, 동궁이,
“한 문제(漢文帝)가 두광국(竇廣國)을 쓰지 않은 일에 대해서 호씨(胡氏)의 논(論)이 있었으나, 나는 그의 논을 일찍이 의심스럽게 여겼소. 만약 광국(廣國)을 대현(大賢)으로 여겨, 천하의 안위(安危)가 그를 쓰고 안씀에 달렸다면 진실로 쓰지 않을 수 없다 하겠거니와, 다만 그의 재주와 덕이 보통보다 조금 나았을 뿐이었다면, 차라리 그를 쓰지 않음으로써 외척(外戚)의 폐단이나 막는 것이 또한 옳지 않았겠는가? 후세의 불초(不肖)한 임금이 외척에게 정사를 맡겼다면 이는 호씨의 논을 구실(口實)로 삼지 않았다고 단언을 못할 것이오. 계방은 호씨의 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호씨의 논에 대한 신의 의심은 예교와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호씨의 논도 옳지 않은 것이 아니고, 문제(文帝)의 마음도 사(私)가 아닌 것은 아니나, 오직 군자(君子)로서 논을 세움은, 후세에 그 논을 전하여 폐단이 없어야 귀한 것입니다. 한(漢) 나라 이후 외척의 폐단이 얼마였기에 호씨의 논이 그와 같은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대공지정(大公至正)하지 못할 바에야 한 문제(漢文帝)처럼 혐의스러움을 피하여 외척을 쓰지 않는 것이, 자신의 허물을 적게 하는 데 해롭지 않습니다.”
“상체지화(常棣之華 아가위나무꽃은 빛난다)와 척령재원(脊令在原 할미새는 언덕에 있다)은 모두 부체(賦體)인가? 시전(詩傳)에 육의(六義)가 분명치 않은 것이 많소.”
“이는 모두 흥체(興體)에 속한 것이었으나, 육의에 의심스러움이 많음은 진실로 예교(睿敎)와 같습니다.”
“이 시(詩)는 주공(周公)이 지었다 하는데, 이것은 서(序)에 있는 말인가?”
“주자(朱子)의 뜻도 또한 그러한 듯합니다.”
“계방이 나가 시전(詩傳)을 가지고 오시오.”
내가 나가서 가지고 들어왔더니, 동궁이 보고,
“다만 형제간에 잔치하는 악가(樂歌)인데, 주공이 지었다 함은 이 서(序)에 있는 말이구려. 계방이 한 번 읽는 것이 좋겠소.”
내가 다 읽었더니,
“이 두 장(章)은 과연 흥체(興體)로군요.”
하고, 책을 덮어 두었다. 또 이르기를,
“대조(大朝 부왕인 영조(英祖)를 지칭함) 때 바야흐로 향실(香室)로 나오시게 되는데, 지영(祗迎)할 때에 혹 부복(俯伏)할 일이 있으면 내가 당장 나가야 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앉아 기다리겠으니, 아직 물러가지 말고, 글도 보며 이야기도 하다가 나가는 것이 좋겠소.” 하고, 곧 강연법어(講筵法語)라는 책자 한 권을 내어 보이면서,
“강연(講筵)에서 이야기한 여러 관료(官僚)의 아름다운 말을 없애버리기 애석하여 이렇게 초록[抄記]하였으니, 상번(上番)이 읽고 계방(桂坊)도 또한 같이 보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상번이 이미 동궁이 지은 소서(小序)를 다 읽자,
“계방의 소견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신이 감히 함부로 아뢸 수는 없지만 저하(邸下)의 생각이 매우 좋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이렇게 초기하는 일이 과연 무방하오.”
하매, 내가 대답하기를,
“신이 아뢰기 매우 참람스러우나, 이렇게 하문(下問)하시는데 감히 바로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매양 서연(書筵)과 소대(召對)가 모두 정지될 때면 부질없게도 ‘저하께서 혹시 안일에 빠져 계시는가, 오락을 혹 즐기시지는 않는가.’ 하는 여러 가지 지나친 걱정을 실상 견디지 못했사온데, 이제 저하께서는, 쉬시는 동안에까지 이런 일에 마음을 두시니, 이 어찌 만행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하께서 저희들 궁료(宮僚)들의 아름다운 말을 연석(筵席)에서 잘 받아들이셨을 뿐 아니라, 이를 모아 책자로까지 만드시니, 가만히 생각건대, 붓을 잡고 기록하실 즈음에, 연석에서 말씀하실 때나 다름없었을 것인즉, 이는 바로 성인(聖人 공자)이 이른바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은 궁구해 보는 것이 귀하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고 하였다. 드디어 박성원(朴聖源)과 이보관(李普觀) 등 여러 사람의 말을 적은 열두어 장(張)은 동궁이 친히 읽고, 홍국영(洪國榮)이 설서(說書)로 있을 적에 아뢴 말은, 오재소(吳載紹)에게 읽도록 명한 뒤, 이르기를,
“아름다운 말을 많이 아뢰기는 하번(下番)이 으뜸이다.”
하였다. 오재소가 아뢰기를,
“이는 하번의 말이니, 하번을 시켜 읽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매, 동궁이 이르기를,‘그렇겠다.’ 하므로, 홍국영(洪國榮)이 두어 장을 읽었다. 동궁이 이르기를,
“하번이 목이 쉬었으니, 상번(上番)이 읽으시오.”
하여, 오재소가 두어 장을 읽었다. 또 계방을 읽으라 하여, 내가 대여섯 장을 읽고 끝마쳤다. 오재소가 아뢰기를
“위징(魏徵)이라 하더라도 여기에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그의(홍국영) 말은 나에게 절박한 것도 많이 애매한 것도 많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허물을 숨기는 데 가까운 까닭에, 빠짐없이 다 기록하였소. 계방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기록된 것은 모두 격언(格言) 아님이 없습니다. 이미 잘 받아들이시고 또 기록까지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뜻이옵니다. 다만 이런 일이란 흔히 문구(文具)에만 그치기 쉬운데, 만약 정성껏 받아들이시고 또 궁구하여 허물을 고친다면, 이 어찌 신민(臣民)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계방의 말이 매우 좋소.”
“궁관(宮官 동궁 관원)으로서 진언(進言)하는 법이 먼저 자신부터 다스린 다음에 임금께 권하는 것이 마땅하오나, 상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도는, 사람이 착하냐 착하지 못하냐는 따지지 말고, 다만 그 착한 말만 취해야 할 것입니다.”
홍국영이 요산당기(堯山堂記)로써 간했던 일에 이르자, 국영이 또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요산당기가 아직 좌우(座右)에 붙여져 있으니,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이 그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동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비록 좌우에 두었지만, 다시 유의(留意)하지 않는데 무엇이 해롭겠소.”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무릇 신하로서 아뢰는 말은, 사물(事物)을 들어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요추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있으며, 임금으로서 간함을 받아들임엔, 말씀과 모습에 나타내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요추는 절실히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한갓 허례와 문구(文具)로만 한다면 결코 유익이 없습니다.”
“하번은 항상 나의 말을 믿지 않고 박절한 말을 많이 하니, 어찌 민망하지 않소.”
“아래에서 소회를 아뢰고 위에서 간함을 따름에 있어, 매양 부드럽고 순한 말을 기뻐하고 바른 말을 싫어 하는, 이것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억울하고 민망하고 절박한 말을 성심껏 용납하고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간함을 용납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절박한 경우를 믿지 않으니, 실로 원통함이 많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다시,
“신의 생각엔 원통한 그것이 가장 훌륭한 용납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동궁이 일찍이 한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출신(出身)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대조(大朝)께서 아직 이름도 알지 못하니, 어찌 벼슬하기를 이토록 어렵게 여기는가?’ 하니, 강관이 대답하기를 ‘이렇게 하문(下問)하시는데 감히 바로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형문(刑問)을 두려워하고 결곤(決棍)도 두려워합니다.’고 하였다. 동궁이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있다가 이르기를 ‘사대부(士大夫)는 마땅히 형장(刑杖)으로써 꺾을 수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번은 강관에게 ‘대전 별감(大殿別監)의 작폐가 특히 심하여, 조정이 모두 두렵게 여긴다고 하는데, 그러냐.’고 물으니, 강관이 ‘그렇습니다. 조금이라도 만약 제뜻대로 되지 않으면 꾸짖음과 욕이 반드시 이르게 되니, 어찌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고 하였다. 동궁은 다시, ‘내 보기에도 별감(別監)들이란 모두 눈초리가 좋지 못한데, 무슨 까닭이냐.’고 하니, ‘이들은 하는 행동이 모두 불량하니, 눈초리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별감을 모두 정원(政院)에서 승진시키고 출척(黜斥)시켰던 까닭에 조정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감히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 그들의 교만하고 포악함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동궁은, ‘들으니, 이들이 약방(藥房)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구걸(求乞)하다가 제 욕심대로 채워주지 않으면 반드시 약가루를 뒤엎고 흩어버리니, 의관(醫官)들이 견딜 수 없다고 하므로, 내가 매양 궁속(宮屬)들을 엄히 경계하여 약방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그 무리들이 혹시 강관에게는 교만하고 포악한 짓을 하지나 않느냐.’ 하니, ‘신등(臣等)이 출입할 때는 그들이 모두 부복(俯伏)한 채 감히 목소리도 높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신등은 이미 저하(邸下)께서 엄절한 경계가 계신 줄을 알았습니다.’고 하였다. 동궁이, ‘학사(學士)로서 어찌 궁속[掖隸]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그대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이라도 교만하고 포악한 짓이 보이거든, 바로 일러줌이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강관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대관(臺官)이, 토지가 없어서 궁가(宮家)에게 면제되었던 세금을 호조(戶曹)에서 직접 받아들인다는 일로써 계청(啓請)하여 윤허(充許)를 받았다. 각 궁(宮)에 붙어 있는 무리는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자가 수십 명인데, 장차 그 혜택을 입지 못할 염려가 있게 되었다. 까닭에 내가 모든 궁(宮)에 분부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생활이 곤란할지라도 대조(大朝)께서 50년 임어(臨御)하시는 동안 많이 돌보아 주셨으니, 이것은 막대한 혜정(惠政)이시다. 너희들은 절대로 딴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였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은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인원 성모(仁元聖母) 때의 일을 들은 적이 있는데, 조신(朝臣)에게 찬물(饌物)을 하사하시고 상(床)이 물려나오면 반드시, 얼마나 잡수셨느냐고 꼭 존대 말씀으로 물으셨다 하니, 공경하는 예우(禮遇)가 이와 같았다. 지금 집경당(集慶堂)에 그 당시 분판패(粉板牌)가 있지만, 조회[朝對]할 때면 늘 좌목(座目)에다 상신(相臣)일지라도 모두 그 이름을 적었다. 까닭에 대조(大朝)께서는 따로 환시(宦侍)를 시켜 분패(粉牌)에 쓰도록 하고, 상신에는 다만 성자(姓字)만 써서 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신(大臣)을 우대하는 뜻이었다.’고 하였다.
2월
16일
오시(午時) 초에 소대(召對)하였다. 성학집요(聖學輯要) 제5권 총론(摠論) 위정장(爲政章)의 ‘기자왈황건기유극(箕子曰皇建其有極)’이란 대문(大文)으로부터 ‘각언위정지본(各言爲政之本)’이란 귀절까지 가지고 입시하였다. 보덕(輔德) 이진형(李鎭衡)ㆍ겸사서(兼司書) 홍국영을 오늘부터 신수음(新授音)으로 정하고 아울러 주석(註釋)까지 읽은 다음, 춘방(春坊)이 문의를 다 아뢰었다. 내가 아뢰기를,
“춘방이 아뢴 바가 모두 절실하니, 원컨대, 이것을 켸켸묵은 말이라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고 절실하게 받아들이신다면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이 장(章)의 문의는 더욱 좋아서 모든 문의의 집대성(集大成)이라 할 수 있겠소.”
하였다. 이진형이 아뢰기를,
“이 총론(摠論)은 여러 가지를 포함하여 매우 넓습니다.……”
하였다.‘후비(后妃)는 관저(關雎)의 덕이 있고 후궁(後宮)은 아름다운 얼굴을 나무라는 이가 없다.'는 대문을 강론했는데, 동궁이 이르기를,
“여자를 사랑하는 해독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여색이란 진실로 가까이할 것이 아니로군.”
하매, 홍국영이,
“여색은 가까이해야 될 때도 있고 가까이해서는 아니될 때도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고만 말씀한다면 불도(佛道)가 될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요사스러운 여색은 진실로 멀리해야 하지만 만약 어떤 여색이든 통틀어 가까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인륜(人倫)이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하니, 동궁이,
“전혀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오. 만약 소위 후비(后妃)처럼 관저(關雎)의 덕이 있다면 난들 어쩔 수 있겠소?”
하였다. 홍국영이,
“후비의 덕 또한 군자(君子)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부인 치고 어찌 감화(感化)할 수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동궁이,
“집안 다스리는 책임은 진실로 남자에게 있는 것이나, 부인의 성질과 행실이 끝내 감화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있겠소.”
하였다. 나는,
“남자로서도 능히 요순(堯舜)과 같은 자가 드문데 여자로서 임사(姙姒)와 같은 자를 어찌 얻기가 쉽겠습니까? 소위 ‘후비(后妃)가 관저(關雎)의 덕이 있다.’는 것 또한 그 인품(人品)의 고하에 따라 안에서 도우고 집안을 바로잡음에 있어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뿐입니다.” 하였고, 홍국영은,
“부인이 설령 어질지 못하다 하더라도 남자로서 집을 다스리는데 진실로 그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어찌 감화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동궁이,
하매, 홍국영은,
“포사와 달기같은 이는 진실로 별도로 논해야 마땅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후는 한 고조(漢高祖)가 살았을 적엔 감히 악한 짓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폐출되지도 않았으니, 어찌 한 고조의 집안을 잘 다스린 힘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이진형은,
“신의 생각에는, 포사와 달기란 천백 년 만에 한 번쯤 있은 여자입니다. 그 드물기로 말한다면 5백 년 만에 한 번 나는 성인(聖人)과 다를 것이 없으니, 포사와 달기의 일은 논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으며, 홍국영은,
“신의 의견은 결코 남자로서 진실로 옳은 도리만 다한다면 여자를 감화시키지 못할 이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것은 끝내 통할 수 없는 말이오.”
하매, 나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부터 감화시키기 어려운 부인이 또한 한 둘이 아니었는데, 어찌, 하나만 고집하여 논할 수 있습니까? 지지리 못난[下愚] 여자가 아니라면 남자로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잡는 도리를 힘껏 다하고 은의와 위엄을 아울러 행해서 감화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끝내 감화시킬 수 없다면 또한 처리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내 충후(忠厚)한 뜻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뿐입니다.”
하니, 동궁이,
“말한 것이 진실로 좋으나 이 말은 그만 두는 것이 옳겠소.”
하고, 잇달아서 조보(趙普)의 일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보(普)는 ‘논어(論語)를 반으로 나누어 반부(半部)는 태조(太祖)에게, 반부는 태종(太宗)에게 도와드렸다.’ 하였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논어 중에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두어 구절이면 천하를 넉넉히 다스릴 수 있거늘 논어를 무엇 때문에 반으로 나누었을까? 계방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오.” 하였다,
“조보가 이렇게 말한 것은 글을 잘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하는 말이오.”
“그가 훈고(訓詁)와 구두(句讀)만 따지는 학자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질없이 빈말[空言]만 하는 것이 아니고, 능히 책에 있는 말을 끌어다가 실지 일에 적응했으니, 한갓 읽기만 하는 자에게 비할 수는 없습니다. ‘논어를 반으로 갈라서 도왔다.’는 말은 살려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조보는 과연 글을 잘 읽은 자였소. 송 태조(宋太祖)가 일찍이 논어를 하사하여 보에게 읽도록 했는데, 하루를 읽으면 그날의 정사는 전일과 아주 달랐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재주와 기국이 보통에 뛰어났던 까닭으로 송(宋) 나라에 큰 공로를 세웠지요. 다만 태종(太宗)에게 한 일만은 소인(小人)을 면하기 어렵지요. 대저 장자(長子)에게 계통을 전함은 국가의 대경(大經)입니다. 덕소(德昭)의 나이 이미 어리지 않았으니, 장군(長君)이 아니라 할 수 없었는데, 두 태후(杜太后)는 일개 부인일 뿐이거늘, 국가 대사를 어찌하여 부인에게 결정할 수 있단 말이오. 계방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오.”
“조보가 송조(宋朝)의 원훈[元功]이 아니될 수는 없지만, ‘폐하(陛下)께서 두 번 그르칠 수 없습니다.’고 한 말은 어찌 천고(千古)의 소인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송조(宋朝)의 일은 아조(我朝)와 서로 비슷하오. 계방은 어떻게 보시오.”
“진실로 예교(睿敎)와 같습니다. 저하(邸下)께서 이미 그 서로 비슷함을 아셨다면 그 흥망과 득실의 즈음에 대해서 반드시 징계되고 감동될 일이 많으실 것입이다.”
“남ㆍ북송(南北宋) 말기에 사절(死節)한 자가 대명(大明)과 견주어 보면 어떠하오.”
“그렇긴 하지만 이 일은 서유신(徐有臣)의 말이 진실로 이치가 있겠소. 서유신이 ‘남송 말기에는 일국이 한 배[船]에 실려 있었으니, 한 배가 침몰하면 한 나라가 사절(死節)하게 되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어떠하오?”
“그 말도 좋긴 합니다마는, 충신(忠臣)이 나라를 붙들고 있었지만 대세(大勢)가 이미 기울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사직(社稷)을 위해 죽은 것은 오직 송 나라뿐입니다.”
“구준(寇準)이 전연(澶淵 하북성(河北省) 복양현 서북에 있는 땅. 글안과 접전한 곳)에서 한 일을 어떤 이는 그가 임금에게 권한 계획이 위태로운 것이었다는 것으로써 구준의 죄로 삼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오?”
“혹은 구준이 임금을 막돈[孤注]으로 삼았다고 말한 자가 있으나 신은 일찍이 구준의 계획이 다 행해지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길 뿐, 그것이 죄가 되는 줄은 모르겠습니다.”
“정위(丁謂)가 증양(蒸羊)으로 귀양갈 적에 시(詩)로 증별(贈別)한 일을 어떤 자는 그의 도량이 좁다고 나무랐는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오?”
“사람을 평가하자면 반드시 그 인품의 고하에 따라 해야 하는데, 구준 같은 자에게 어찌 무엇이든 중도(中道)로써 책(責)할 수 있습니까? 도량이 좁다고 나무람은 너무 가혹한 이론인 듯합니다.”
“소인(小人)이 잇달아 정권을 잡고 나라를 그르친 예로 송조(宋朝)와 같은 나라가 없는데, 조사필(趙師罼)이 개짖는 노릇을 하면서 임금에게 충성을 바친 것은 더욱 웃을 만하오. 주자(朱子)가 비부(鄙夫)란 뜻을 주석함에 있어 ‘작은 것인즉 헌데를 빨고 치질을 핥는다.’ 하였으니, 참으로 사필에게 해당한다 하겠소.” 이진형이,
“사필의 일은 헌데를 빨고 치질을 핥는 것보다도 더 심합니다. 대개 부모가 헌데와 치질이 있다면 혹 분모를 위해 빨고 핥은 자가 있었으나, 개짖는 노릇을 하면서 부모를 그르쳤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계방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헌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일은 오히려 사람에게 속한 일이니, 춘방의 아뢴 말이 또한 옳습니다.”
하니, 이진형이 아뢰기를,
“또 이보다 더 심한 자가 있습니다. 대명(大明) 말기에 조신(朝臣)으로서 위충현(魏忠賢)의 아들을 위한 자가 있으니, 이것은 사필도 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하였다. 동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계방은 누구를 더 심하다 하겠소?”
“이 모두가 비부(鄙夫)의 누추한 일들이니, 그 우열을 따질 필요는 없겠습니다.”
하였다.또 역대의 제왕(帝王)을 논했는데, 동궁이 이르기를,
“한 고조(漢高祖)와 당 태종(唐太宗)과 송 태조(宋太祖)는 삼대(三代 하(夏)ㆍ는(殷)ㆍ주(周)) 이후로 이 세 임금을 손꼽을 만하오. 그러나 한 고조는 정장(亭長)에서 발신하여 지체가 미천했던 까닭에 그의 평생을 미루어 보아도 끝내 사대부(士大夫)의 풍채가 없었고, 당 태종 같은 이는 자칭하기를 천가한(天可汗)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이름과 실지가 서로 맞는다 하겠소, 어째서 그러냐 하면 그의 침실[帷薄]안의 행동을 보건대 참으로 이적(夷狄) 중의 영웅이오. 대개 천자(天子)보다 더 높음이 없거늘 자기 몸을 낮추어 가한(可汗)이라 자칭하였으니, 또한 웃을 만하지 않겠소? 송 태조 같은 이는 인후(仁厚)한 덕으로 문명한 정치를 이미 열었으나 웅장한 지략은 당 태종에게 미치지 못했소. 만약 한 고조의 역량에다 학문을 더한다면 요순(堯舜)과 같지 않을 줄 어찌 알겠소? 세 임금 중에 제일이오.”
또 왕안석(王安石)을 논했는데, 이진형이 아뢰기를,
“신은 신종(神宗)이 안석을 등용한 것은 천고(千古)의 큰 쾌사(快事)라 생각합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어째서 하는 말이오?”
하매, 이진형이,
“당시에 있어서 안석의 훌륭한 이름은 정자(程子)보다 몇 갑절 높았습니다. 만약 신종이 안석을 등용하지 아니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의 나쁜점을 감춘 채 일생을 마치도록 했던들 안석은 반드시 정자와 나란히 천고(千古)의 유종(儒宗)이 되었을 터이니, 그렇게 되었다면 비록 지금의 신등(臣等)도 또한 반드시 그를 대현(大賢)으로 우러러 높였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이 여기에 미칠 적마다 그가 아예 당시에 낭패당한 것을 통쾌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하였다. 동궁이,
“신은 이 일을 천고(千古)에 큰 한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하는 말이오?”
“삼대(三代) 이후로, 군신(君臣)간에 서로 마음이 맞아 유자(儒者)로서 정권을 잡을 때가 그때처럼 좋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종은 사람을 아는 눈은 밝지 못하면서 다스림을 구하는데 너무 급했으며, 안석은 엉성한 학문에 집요한 성격을 겸했던 바, 당시의 창생(蒼生)만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후세에 유자(儒者) 등용을 경계하게끔 만들었으니, 어찌 크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종이 만약 정자를 능히 등용했던들 삼대(三代)의 정치를 가히 만회(挽回)할 수 있었을 터인데, 다만 다스림에 너무 조급한 탓이었고, 정자의 어짐을 몰라서 안 쓴 것은 아니었지요. 아마 태종은 한 해에 이루어진 일을 반드시 한 달에 이룩하려고 했던 까닭에 안석의 말이 그의 뜻에 맞았던 것인가 하오.”
책을 덮은 뒤에 동궁이 다시,
“관저(關雎) 시(詩) 가운데 ‘전전반측(轉輾反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 등의 일을 혹자는 문왕(文王)의 일이라 하고 혹자는 궁인(宮人)의 일이라 하였으니, 이 문의를 한 번 상량(商量)해 보는 것이 합당하겠소. 삼연집(三淵集)에는 궁인(宮人)의 일이라 했고, 창계집(滄溪集)에는 문왕(文王)의 일이라 했으며, 북헌(北軒)과 지촌(芝村)도 모두 언급이 있었으니, 계방은 나가서 시전(詩傳)과 문집을 가지고 오시오.” 하였다. 내가 나가서 시전과 창계집을 갖고 들어왔다.
“삼연집과 북헌ㆍ지촌집은 원중(院中)에 없다 합니다.”
“창계의 이론은 어떻다고 했는가요?”
“창계의 이론은 문왕의 일이라 했는데, 그의 논설은 매우 길게 되었습니다.”
“계방의 의견은 어떠하오?”
“집주(集註)에 적힌 ‘희락존봉(喜樂尊奉)’이란 네 글자로 본다면 주자(朱子)의 뜻도 반드시 궁인의 일로 해설한 것입니다.”
“부처(夫妻)간에 서로 손님처럼 공경함이 높이 받드는데 해로울 것이 있겠소?”
“높이 받든다는 존봉(尊奉) 두 글자는 결코 아내에게 쓸 수는 없습니다.”
“창계도 또한 자기의 창설(創說)이 아니고 본디 소주(小註)에 있는 주자(朱子)의 말에서 나왔으니, 곧 ‘오매반측……(寤寐反側云云)’이라는 것을 형용한 것이오. 그렇기는 하지만 먼저 후비(后妃)를 둔 다음이라야 잉첩(媵妾)을 두는 것이니, 숙녀(淑女)를 얻지 못하고 어찌 잉첩부터 둘 수 있겠소? 나도 또한 주자의 이 말은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의심하여, ‘궁인의 일이라.’ 한 말을 낫다고 생각하오.”
18일저녁에 소대(召對)했는데, 주서절요(朱書節要) 중에 ‘정윤부(程允夫)에게 답한 편지’를 갖고 입시하였다. 보덕(輔德) 이진형(李鎭衡)과 겸사서(兼司書) 홍국영(洪國榮)이 문의(文義)를 다 아뢴 다음 ‘성(性)은 사생(死生)이 없다.’라는 대문을 강론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소위 불가(佛家)의 말이란 무엇을 이른 것이오?”
하매, 내가 대답하기를,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성(性)이란 것은 심(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론은 대개 ‘사람은 죽어도 성은 죽지 않고 끊임없이 윤회한다.’는 것이며, 유자(儒者)가 이르는 성을 이치[理]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성(性)이란 본디 사생을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사생이 없다고 이른다면 말한 뜻이 이미 지각(知覺)에 있는 까닭에 주자(朱子)께서 이와 같이 변론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지각을 버리고 성(性)을 말할 수 있겠소?”
“저하(邸下)의 뜻을 신도 진실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지각이란 즉 심(心)이고 성(性)이란 즉 이(理)입니다. 필경에는 이(理)는 스스로 이(理)이고 심(心)은 스스로 심(心)으로 되나니, 이미 서로 떠날 수도 없거니와, 또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소. 성리(性理)란 가장 말하기 어렵겠소. 나의 뜻은 과연 서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 것인데, 지각(知覺)을 겸하여 성(性)으로 삼는다 하였으니, 말의 병통을 면치 못하였소. 이(理)와 기(氣)의 선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타당한 것이오? ‘기(氣)로써 형체가 이루어지면 이(理)도 또한 주어지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기(氣)가 먼저고 이(理)가 뒤란 뜻이 아닌가요? 춘방은 ‘기(氣)가 먼저라 하기도 하고 이(理)가 먼저라 하기도 하였소.”
“이(理)와 기(氣)의 선후에 대해서는 옛부터 유자(儒者)가 각기 다른 주장을 하였는데, 중용 주설(中庸註說) 같은 데에는 또한 형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이(理)가 주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으론 이와 기가 있다면 함께 있게 되는 것이요, 본디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봅니다. 대개 천하에 이(理) 없는 물(物)이 없고, 물이 아니면 이(理) 또한 붙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매우 좋으니,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폐단이 없겠소.”
하고, 춘방을 돌아보면서 재삼 칭찬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이것은 신의 창견(創見)이 아니고 곧 주자(朱子)의 말씀입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기설(理氣說)이란 아무리 충분하게 강론한다 하더라도 신심(身心)과 일용(日用)에서 끝내 그 절실함은 보지 못하는 것이오.”
“예교(睿敎)가 매우 타당합니다. 일용에 대해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일만 들어 간절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여 일에 따라 몸받아 행한다면 성리(性理)란 것도 또한 별것이 아니라, 곧 일용에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와 행이 아울러 진보되면 한 근원으로 된, 성(性)과 천도(天道)를 환히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학(初學)으로서 앉아 성명(性命)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갓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입니다.”
“그 말이 지극히 옳소. 자공(子貢) 같은 총명한 이로도 만년(晩年)에야 비로소 성(性)과 천도(天道)를 얻어 들었다 하오. 그렇다면 처음 배우는 자가 진실로 차례를 건너 뛸 수는 없는 것이오. 계방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겠소. 이 말을 보더라도 계방(桂坊)은 고집스러운 이론은 하지 않는 듯하오.” 하였다. 이진형이,
“계방의 의론은 본래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간재명(艮齋銘)은 누가 지은 것이오?”
하매, 내가,
“차의(箚疑)에 남헌(南軒)이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니, 동궁이,
“계방이 나가서 남헌집(南軒集)을 가지고 오시오.”
하였다. 내가 나가 물어본 뒤에 들어와 대답하기를,
“원중(院中)에는 본디부터 없다고 합니다.”
하니, 동궁이 중관(中官)을 시켜 대내(大內)에 있는 책(冊) 목록(目錄)을 가지고 왔으며, 춘방을 시켜 상고케 하였으나 없었다. 동궁은 또 중관을 시켜 당판(唐板)으로 된 책 다섯 함을 가지고 왔는데, 곧 분당지(粉唐紙)에 찍은 강목(綱目) 고판(古板)으로 모두 30책인데 5책이 낙질(落帙)이었다.동궁이 이르기를,
“계방도 보시오. 이것은 대내(大內)에 전래된 책인데, 주묵(朱墨)으로 구절(句絶)을 찍은 것은 열성(列聖)의 유적인 듯하오. 이것은 궁중(宮中)의 값진 장서이건만 낙질된 것이 애석하오.”
하였다.
3월
28일
소대(召對)했는데, 주서절요(朱書節要) 중에 ‘채계통(蔡季通)에게 준 편지’를 갖고 입시하였다. 겸필선(兼弼善) 이보행(李普行)과 겸사서(兼司書) 임득호(林得浩)가 문의를 아뢰자, 동궁이 이르기를,
“둘재 번 편지 서두(書頭)에, 운운(云云)한 것은 무슨 뜻이오?”
하매, 내가 대답하기를,
“전서(全書) 중에 깎아 없앨 절차를 말한 것입니다.”
하니, 이보행이 아뢰기를,
“대전(大全)을 상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먼저번 전 겸사서(兼司書)는 계방이 책을 가지고 왕래함은 서연(書筵)의 체통에 어긋난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매우 옳소. 계방도 들었소?”
하매, 내가,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동궁이,
“그의 말이 옳기도 하고 상고할 것도 긴급하지 않으니, 계방은 가지고 나갔다가 다시 가지고 들어올 필요 없이, 그냥 두었다가 다음번에 상고해오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내가,
“이미 전일의 규례가 있으니만큼 열 번 왕래한들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고, 이보행도,
“이미 상고할 것도 있고 또 전례도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동궁이,
“전 겸사서의 의도는 계방을 위함이 아니라, 서연(書筵)의 체통을 위한 말이었는데, 그의 말이 매우 옳았소.”
하였다. 나는,
“전 겸사서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으나 신등(臣等)으로서는 지극히 황송합니다.”
하였다. 잇달아 형기(形氣)를 논했는데, 동궁이 이르기를,
“이기(理氣)에 대한 강론도 마침내 긴절함을 보지 못했소. 계방이 말한 ‘이기(理氣)의 변론은 초학자(初學者)의 급선무가 아니라.’는 그 말이 매우 좋소.”
하였다.29일소대(召對)는 전일과 같았다. 문의를 다 아뢴 다음, 동궁이 이르기를,
“1천 족(足)이 1천 문(文)이오?”
하매, 이보행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또 이르기를,
“1문이 1냥(兩)이오? 1전(錢)이오?”
하였다. 내가,
“중국 법에 1푼[分]을 문(文)이라 합니다.”
하였다.
“1천 문은 몇 냥이나 되오?”
“10냥입니다.”
“7천 냥입니다. 그러나 돈 따지는 법이 역대로 각각 경중이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지금 쓰고 있는 돈과 비교하면 조금 박했을 것입니다.”
“과연 같지 않았을 것이오. 아안전(鵝眼錢)같은 것은 물에 넣어도 가라앉지 않았다 하니, 대개 쇠망(衰亡)기엔 돈이 반드시 얄팍하고 볼품이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오.”
또 이르기를,
“옛부터 흔히 유안(劉晏)을 일컬어 물을 잘 다스려 백성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나라의 씀씀이를 넉넉하게 했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어떠했는지는 과연 알 수 없으나 남의 신하가 되어 재물 잘 다스리는 것으로써 발신(發身)하였다면 무엇이 그리 볼 만하겠소? 자고로 망해가는 나라일수록 재산이 반드시 위에 모였으니, 재물을 긁어들이는 해독이 이와 같소.”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지금 광은(礦銀)이니 내은(萊銀)이니 하는 것은 무엇을 이름이오?”
“광음이란 것은 천은(天銀)인데 우리 나라 은점(銀店)에서 제조한 것이고, 내은이란 것은 왜은(倭銀)이 동래(東萊)를 통해서 들어온 것인데 소위 정은(錠銀)이란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소금과 무쇠는 어떻게 만드오?”
“우리 나라 은과 무쇠는 산에서 나는데, 바둑돌을 늘어 놓은 것처럼 되어 있고, 소금은 삼면(三面) 해변에서 구어내는데 무진장(無盡藏) 있으니, 이는 참으로 화재(貨財)의 부고(府庫)입니다. 다만, 산해(山海)의 이익을 다 개척하지 못하여 백성과 나라가 함께 가난함을 면치 못하오나 이것은 태공(太公)ㆍ관중(管仲)의 법이 없는 까닭입니다.”
“소금은 어떻게 만드는지 계방은 보았소?”
“동해(東海)와 서해(西海)에서 소금 구어내는 법을 모두 보았습니다.”
춘방이 그 제도를 자세히 아뢰니, 동궁이 이르기를,
“금(金)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소?”
하매, 내가 아뢰기를,
“자산(紫山)에서 생산되는 것을 과자금(瓜子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금으로는 최상품이긴 하나 매우 귀하다 합니다.”
“동록(銅綠)을 동(銅)과 함께 녹이면 주석(朱錫)이 되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본 적이 있는데, 만드는 법도 그와 같았다 하나 그 빛이 몹시 나빴소.”
또 이르기를,
“도성(都城) 안의 똥과 쓰레기는 농부들이 모두 실어간다 하는데,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없다 해도 또한 곤란하겠소.”
하고, 또 이르기를,
“계방은 북경(北京)에 가 보았소?”
“가 보았습니다.”
“무슨 일로 가서 보았소?”
“신의 숙부(叔父) 전 승지(承旨) 신(臣) 홍억(洪檍)이 을유년(1765, 영조 41)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었을 때 신이 자제비장(子弟裨將)으로 따라갔었습니다.”
“그때 상ㆍ부사(上副使)는 누구였소?”
“왕래할 때 옷차림은 무엇으로 했었소?”
“전립(氈笠)에다 군복(軍服) 차림으로, 다른 비장과 같이 했었으며, 돌아올 때는 포립(布笠)에다 도포(道袍)를 입었습니다.”
동궁이 웃으며 이르기를,
“백면서생(白面書生)이 갑자기 군복 차림을 하다니, 이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며, 또한 호사가(好事家)라 할 만하겠소.”
또 이르기를,
“듣건대, 북경에서는 오로지 상업(商業)만 일삼는다 하는데, 그렇소?”
“이것은 도성 안을 말하는 것이며, 시골 백성은 농사에 힘쓰는 것이 우리 나라보다 더 심합니다.”
“북경의 주식물은 다 산벼[山稻]라 하는데 그렇소?”
“북경 이동은 모두 밭[旱田]곡식으로 기장과 수수 등 잡곡을 하며 산벼도 역시 밭에서 나는데, 그 밥이 몹시 나빠서 먹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북경에는 다시 황후(皇后)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데,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오? 그때에는 어떠했었소?”
“그때는 황후를 냉궁(冷宮)에다 유폐(幽廢)시켰던 바, 온 도하(都下)가 걱정하고 탄식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언로(言路)가 막힌 것은 추측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랬었었소?”
“황후를 유폐시킴은 옛부터 나라가 망할 근본입니다. 온 조정이 벙어리처럼 되었는데, 오직 만관 아영아(滿官阿永阿)란 자가 있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간하다가 혹독한 형벌을 받고 겨우 주륙을 면하여 먼 변방에 군졸로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한 선비가 전한 말이었는데, 벌벌 떨고 두려워하면서 얼굴빛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때 정령(政令)은 엄하고도 혹독했다고 생각되오.”
또 이르기를,
“서책 점포는 어떠했소?”
“유리창(琉璃廠)으로 된 여닐곱 개의 서책 점포가 있다 하기에 과연 가서 보았더니 판자 시렁을 둘러 설치하고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서적에 각각 표제를 붙였는데, 한 점포에 쌓인 것만도 몇 만 권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춘원(暢春園)과 원명원(圓明園)도 보았소?”
“신은 창춘원을 보고서, 강희(康熙)는 참으로 근고에 영특한 임금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또 그가 60년 동안 태평을 누린 것이 까닭이 있었다는 점도 짐작했습니다.”
“무슨 까닭이오?”
“창춘원은 담 높이가 두어 길에 불과하고 담을 따라 돌아보아도 높은 기와집은 보이지 않다가 대문 틈으로 보긴 하였는데, 그 규모가 지극히 보잘것없고 소박하였습니다. 대저 황성(皇城)에 웅장하고 화려한 거처를 버리고 황야로 물러 앉아 숨어 살면서 궁실(宮室)을 이와 같이 낮고 좁게 하였으며, 백성도 지금까지 성군(聖君)으로 칭송하게 되었으니, 그의 영특함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원명원은 창춘원에 비교하면 어떠하던가요?”
“굉걸하고 사치하고 화려함이 창춘원에 비하여 백 배도 넘으며, 서산(西山) 같은 곳은 또 원명원의 십 배도 넘었습니다. 궁실이 사치했느냐 검소했느냐를 보아서 그때 임금이 어질지 못했느냐 어질었느냐와 그때 세운이 쇠했느냐 성하였느냐를 점칠 수 있습니다. 또 서산은 누각(樓閣)과 대사(臺榭)가 하수(河水)를 따라 40리를 뻗어 경성(京城) 서쪽까지 닿았으며, 그 위치와 구조는 그 묘가 극도에 달하였으나 실상은 어린아이 장난처럼 되었습니다. 생민의 고혈을 짜내어 오로지 유익 없는 놀음놀이에 바쳐, 당시엔 원망을 샀고 후세인 웃음을 남겼으니, 곧 천고(千古)의 감계(鑑戒 거울로 삼아 조심함)가 될 만합니다. 그런데 하수 연변의 누각도 근래에는 조금 벗겨지고 떨어진 것을 보면 그들도 의기(意氣)가 소침하여 다시 마음껏 즐기고 놀지 않는 듯합니다.”
“누각들이 과연 벗겨지고 떨어졌었소?”
“이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무릇 사람의 이목(耳目 둘만 들었으나 5관을 말한 것)의 것입니다. 욕망이란 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비록 천하의 사치를 다한다 하더라도 때마다 달마다 즐기어 이미 묵은 것이 되어버리면 반드시 새롭고 기이한 물건을 생각하여 점점 기괴한 도모를 더하게 되기 마련이란 것을 수 양제(隋煬帝)와 진 후주(陳後主)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城)과 못은 어떠했었소?”
“성 높이는 대여섯 길쯤 되는데, 안과 밖에 모두 여장(女墻)을 설치했으며 두 면이 절벽처럼 된 것이 우리 나라 성 제도와는 달랐습니다. 그 넓이는 성 위가 수풀처럼 판판하게 되어 10마대(十馬隊)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사람의 덕에 있고 산천의 험함에는 있지 않다.’고는 하지마는, 성제도가 이미 이와 같다면 또한 쉽게 공격할 수 없을 것 같소.”
“성과 못 험함도 진실로 믿을 수 없으며 다만 형세와 힘이 서로 적수될 만해야 공격할 수 있으나 실상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기(日記)가 있소?”
“못했습니다.”
“인재(人才)는 어떠했었소?”
“두서너 선비를 보았는데 그의 시문(詩文)과 서화(書畵)가 모두 절묘하였습니다.”
“필담(筆談 말이 통하지 않아 글로써 문답함)으로 하였었소?”
“그렇습니다. 대개 한인(漢人)은 재주 있는 이가 많고 만인(滿人)은 질실(質實)한 이가 많은데, 인품을 논하면 만인이 한인보다 낫습니다. 이는 전 사람의 일기에도 이미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인은 문승(文勝)한 때문일 것이오, 문승한 폐단이란 진실로 말할 수 없으니, 중국이 다시 떨치기는 기필할 수 없을 것이오. 들으니, 몽고(蒙古) 사람은 아주 용감하고 사나워 두려울 만하다 하던데 보았었소?”
“신이 한번 그의 객관(客館)에 가서 그의 추장(酋長)을 보았더니, 관직은 1품(品)이라던데 형용은 미련하고 추잡한 것이 금수(禽獸)와 별로 다름없었으며, 또 잠자리도 온돌(溫突)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미천한 자는 겨울 밤에도 수레 위에서 노숙(露宿)하는데 서리와 눈이 의복과 모자에 가득 차도 근심하거나 괴로운 기색이 없음을 보니, 그 사납고 강인함은 진실로 두려울 만합니다.”
“상원(上元)날 관등(觀燈) 놀이는 어떠했었소?”
“등(燈)을 대나무 장대에 달지 않고 처마 밑에다 두루 달아, 우리 나라와 달랐으며, 오직 사찰(寺刹)과 묘우(廟宇)에만 모두 대나무 장대에 달았습니다. 우리 나라 제도는 여기에서 나온 듯합니다.”
“우리 나라는 상원을 이용하지 않고 팔일(八日)로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임득호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석씨(釋氏) 생일에 불(佛)을 숭상하는 유풍(遺風) 때문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그러면 관등은 어떻게 했었소? 선정(先正)들도 또한 참관했었소?”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분명한 증거는 없으나 보지 않았을 이치는 없을 듯합니다. ‘노(魯) 나라 사람들이 사냥할 적에 공자(孔子)도 또한 사냥했다.’는 것처럼 풍속으로 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여럿을 따라 보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그 근본부터 바르지 못하고 또 없어지는 비용도 적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왕정(王政)으로서는 반드시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유래된 지 오랜 것을 금함은 너무 과하지 않겠소? 한두 개의 등(燈)을 다는데 큰 비용이 들겠소?”
하고, 또 이르기를,
“만약 난간등(欄干燈)을 만든다면 비용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북경에 세폐미(歲幣米)는 얼마였소?”
하매, 내가 대답하기를,
“대명(大明) 시대는 1만 석이나 되었는데, 순치(順治) 때에는 9천 석으로 줄었고, 용정(龍正) 때에 또 줄어서 지금은 40~50포(包)로 되었을 뿐입 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그와 같이 세폐미를 줄였으니, 우리 나라 경비가 반드시 넉넉해지겠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줄이는 쌀은 해마다 별도로 쌓아 둔다면 반드시 그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경비에 혼동시키면 한두 해 뒤에는 그것을 가감(加減)했는지 조차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듣건대, 근래에는 경비가 늘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하는데, 이것은 과연 무슨 연고인가?”
하였다. 이보행이,
“민결(民結)은 여러 가지 잡스러운 폐단이 반이 넘는 관계로 정공(正供)은 이미 크게 줄고 용도(用道)는 더욱 많아졌으니, 형편이 자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듣건대, 당상관(堂上官)은 사용(司勇)의 녹(祿)을 받는다 하는데,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오. 궁중(宮中)에 있어서는 궁녀[紅袖]의 경비도 또한 한결같이 소모되는데, 또 듣자니, 사도시(司䆃寺)의 월봉(月俸)이 늘어가기만 하고 주는 것은 없다 하니, 그것을 무엇으로써 감당할 것인가.”
하였다. 임득호는,
“도하(都下) 백성 중 농사도 장사도 하지 않고 호구(糊口)하며 사는 자는 대개가 이런 후한 봉록에서 남아 흘러 나가는 것에 의지하는 형편이니, 무엇이든 국가의 교화와 덕택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나는,
“생산하는 자가 여럿이고 소비하는 자가 적은 것이 나라 다스리는 큰 법이거늘, 소위 요행을 바라고 노는 백성이나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괴롭히는 관원들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깊이 생각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동궁이,
“계방의 말이 지극히 옳소.”
하였다.
4월
8일
야대(夜對)에 입시하였다. 필선 이진형(李鎭衡)ㆍ사서 홍국영ㆍ사어(司禦) 김근행(金謹行)ㆍ시직(侍直)인 내가 존현각(尊賢閣)에 이르렀다. 첨당(簷堂)엔 많은 양각등(羊角燈)과 옥등(玉燈) 너댓 쌍을 달아 안팎을 통해 밝게 하고 나아가 부복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오늘은 곧 등석(燈夕 관등일 저녁)이다. 대조(大朝)께서 마침 사찬(賜饌)이 있고 또 옥등(玉燈)도 하사하신 까닭에 계방(桂坊)과 상하번(上下番)을 아울러 부른 것은 꼭 함께 한번 구경하자는 것이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미 등(燈)을 보았소?”
하매, 춘방이 대답하기를,
“야대(夜對)하라는 명령이 계신 까닭에 감히 멀리 떠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계방은 보았소?”
하매, 김근행은 ‘못보았다.’ 하였고, 홍국영은 ‘계방도 또한 야대하라는 명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동궁이,
“북경의 등(燈) 제도는 어떠했었소?”
하매, 이진형이 대답하려고 하자, 동궁이,
“계방 하번(下番)에게 물은 것이오.”
하였다. 내가,
“대개 양각등(羊角燈)이 많고 혹 사등(紗燈)에다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도 있습니다.”
하니, 동궁이,
“유리등(琉璃燈)도 보았소?”
하였다. 내가,
“못 보았습니다.”
하니, 동궁이,
“궁중(宮中)에 진주등(眞珠燈)이 있는데, 이것은 인원 성모(仁元聖母)께서 손수 만들었소. 난간등(欄干燈)에 비교하면 드는 비용은 아주 적게 먹혔는데, 유난히 번쩍이어 매우 볼 만하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창덕궁(昌德宮)과 어수당(魚水堂)은 계방이 혹 보았소?”
하였다. 내가,
“못 보았습니다.”
하니, 동궁이,
“어수당 관등이 자못 좋지요. 연전까지만 해도 등석(燈夕) 때마다 옥당(玉堂)에서 많이 입시하였지요. 후원(後園) 연못 가운데는 용주(龍舟)가 있는데 평소엔 쓰지 않다가 등석에 혹 쓰게 되는데, 나도 어릴 적에 한 번 보았지요. 또 수면(水面)에 등을 놓아둔 것이 가장 볼 만하지요.”
하고, 잇달아 이르기를,
“오늘은 마침 소찬(小饌)을 준비시켰는데 춘ㆍ계방 상하번에게 각각 한상씩 차려올 터이나 대조(大朝)께서 내리신 찬(饌)부터 먼저 회식(會食)하는 것이 가하겠소.”
하고, 중관(中官)을 시켜 가지고 왔는데 판판하고 둥근 칠반(柒盤)에다 10여 그릇을 갖추어 놓았고 또 자그마하고 얕은 반에는 6~7개의 작은 그릇이 있었다.동궁이 이르기를,
“계방 하번도 드시오.”
하고, 또 이르기를,
“전번 빈객(賓客)에게 선반(宣飯)할 적에 계방 하번은 참석하지 않았던가요?”
하였다. 내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니, 동궁이,
“모든 당번 차례가 마침 가신(佳辰 좋은 때)을 만나기는 아주 쉽지 않은 일이오.”
하고, 또 중관을 시켜 각상으로 차린 찬(饌)을 들여왔는데, 사약(司鑰)이 겨우 한 상을 들었다.동궁이 이르기를,
“이미 먼저 드신 이가 있으니, 이 상(床)은 각각 원중(院中)으로 보낸 다음, 그곳으로 나가서 함께 드는 것이 무방하겠소.”
하고, 곧 춘방을 시켜 사약에게 이야기하여 원중으로 물려 보내도록 하였다.먹다가 남은 두 상도 또한 물려 보낸 후에 모두 물러나왔다.9일야대(夜對)에 주서절요(朱書節要)의 ‘유성지(游誠之)에게 답한 편지’를 갖고 입시하였다. 필선 이진형과 사서 홍국영(洪國榮)이 읽은 다음 이진형이 ‘조존(操存)’의 문의를 논하기를,
“무릇 사람이 일을 잘 처리하는 이는 그 마음이 고요하고 깊지 않음이 없고, 일을 잘못 처리하는 이는 그 마음이 경솔하고 조급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비록 신같은 자도 일용(日用)에서 징험한 바, 일찍이 그렇지 않은 적이 없으니, 마음 갖는 방법은 반드시 고요하고 깊음을 귀하게 여기며 경솔하고 조급함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춘방의 말이 매우 훌륭하고 또 그의 말은 체험한 나머지에 나온 것이고 구차스럽게 입으로만 지껄이는 말이 아닙니다. 저하(邸下)께서도 또한 겉으로만 좋다고 칭찬하지 말고 실제로 받아들인다면 착한 덕에 유익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말은 좋소. 다만 인품이 고요하고 침묵한 자는 분발함이 적고 나약(懦弱)함이 많으니, 단단하고 굳센 자가 변통성 있게 일을 잘함만은 못한 것이오.”
하였다. 내가,
“그러합니다. 대개 사람의 기(氣)란 굳셈을 변해서 부드럽게 만들기는 쉽고 부드러움을 변해서 굳세게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시골 사람을 말하더라도 어릴 때에 온순한 자는 커서 성취하는 이가 드물고, 가정에 있을 때 꼿꼿함이 많은 자가 조정에 들어가서도 풍절(風節)을 많이 세우게 됩니다.”
하니, 동궁이,
“나의 생각도 또한 경솔함과 조급함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 침묵한 자가 고명(高明)한 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이를 뿐이오.”
하고, 또 이르기를,
“매양 고요한 밤에 잠이 없을 때를 당하면 심기(心氣)가 아주 좋아져서 착함을 할 마음이 생기다가도, 아침과 낮으로 일을 처리할 때면 마음이 흐려지고 어지럽게 되니, 이것이 가장 민망할 만하오.”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마음을 가지고 기른다는 이 조존(操存) 두 글자는 옛부터 심학(心學)에 대한 격언(格言)으로 된 것이니, 일이 있고 없을 때를 따질 것 없이 항상 조존(操存) 공부를 더해서 동(動)할 때도 또한 마음이 안장되고 정(靜)할 때도 또한 마음이 안정된 뒤라야 마음자리가 깨끗하고 밝아져서 일을 처리함이 이치에 맞게 될 것입니다.”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계방의 아뢴 바가 매우 좋으며, 이것이 소위 ‘경(敬)은 동정(動靜)에 통한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동궁이,
“진실로 그렇소. 하지만 정(靜)을 주로 삼는 것이 실상 학문의 요추가 되오.”
하매, 내가,
“이천(伊川)께서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항상 그것을 잘 배우고 싶어한 것은, 한갓 고요히 앉았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본원(本原 본심)을 함양(涵養)키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본령(本領)이 없으면 마음자리가 어지럽고 흔들리게 되니, 일을 처리하는데 경솔하고 조급함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국영이 아뢰기를,
“비록 신등(臣等)도 이예(吏隸)들이 죄가 있을 때 성내는 마음을 억누르고 조용히 살펴보면 용서할 점이 많고 심기(心氣)가 안정됩니다. 그러니, 분을 징계하는 공부는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효묘(孝廟)께서는, 신하의 죄가 있을 때를 당하면 반드시 하룻밤을 지난 후에 결단하셨다고 하니, 성조(聖祖)의 반성(反省)하고 살피는 공부를 여기에서 볼 수 있소. 계방도 또한 이런 이야기를 들었소?”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들었습니다.”
한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어제 중관(中官)에게 처분(處分)한 일도 또한 너무 지나쳤으니, 타일러 속히 놓아 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 일을 밤에 생각하니 진실로 지나쳤소. 하번의 말이 매우 좋소. 내일 당장 잘 처결하겠소. 계방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오?”
하였다.
“중관에 대한 처분은 신이 그 곡절을 알지 못하므로 뭐라고 감히 대답할 수 없사오나, 이미 춘방이 아뢴 바를 할당하다고 하셨으니, 내일까지 기다릴 것없이 즉시 놓아 주시는 것이 간함을 따르는데 과감하다 하겠습니다.”
“나는 허물이 있을 적마다 일찍이 뉘우치지 않은 적이 없었소. 다만 이 뉘우쳐 책망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잡아 떠나지 아니하니, 민망하오.”
“허물 고침을 과감하게 하는 것이 허물없는 것보다 나으나, 허물을 이미 고친 다음에는 자연 마음이 후련해지는 법인데, 어찌하여 가슴속에 남겨두고 뉘우칠 것이 있습니까?”
“계방의 말이 매우 좋소. 정자(程子)가 이르신 ‘자신을 죄주고 자책(自責)함은 잠간도 버릴 수 없다.’는 말이로군요.”
하고, 또 이르기를,
“오늘 문의는 매우 좋았소, 상번은 말 머리를 꺼냈고, 계방은 이를 부연해서 설명하였으며, 하번은 통틀어 매듭을 지었소.”
하였다. 이진형이 아뢰기를,
“오늘 심염조(沈念祖)가 마침 왔는데 춘방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장황스럽게 문의를 아뢰는 것이 긴급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 민망스러운 일이 있으니, 곧 저하(邸下)께서 궁료(宮僚)의 죄를 너무 너그럽게 덮어주신다.’ 하였습니다.”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그의 말이 소견이 없지 않습니다. 이는 아만 가까이 모시는 궁료치고 누구인들 충성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혹 엄숙하고 두려워하는 태도가 부족할까 염려해서 한 말일 것입니다.”
하였다. 동궁이,
“아뢴 바가 그럴 듯하오. 상하번 중에 지금 춘방 같은 자를 어찌 쉽게 얻겠는가? 하지만 그간에 쓸데없이 아뢴 것은 비록 타이르고 물리쳐 버린다 하더라도 가하겠소. 대개 서연(書筵)의 체통이란 대조(大朝)와는 아주 다른 까닭에 말을 함부로 높이거나 낮추거나 할 수 없음은 형편이 또한 그런 것이오. 계방은 어떻게 생각하오?”
“예교(睿敎)가 지당합니다. ‘거친 것도 감싸주고 더러움도 용서한다.’라는 말과 같이 임금의 덕량(德量)도 마땅히 이와 같거늘, 하물며 저궁(儲宮)이겠습니까? 다만 신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저하(邸下)의 덕량(德量)과 기국(器局)은 인명(仁明)함은 넉넉하나 위중(威重 위엄과 무게)함이 혹 부족한 듯합니다. 이 위중(威重) 두 글자를 배우심이 급선무입니다. 날선비도 오히려 하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학문이겠습니까? 앉거나 일어서는 기거동작에 무게를 힘쓰는 까닭은 다만 덕을 기르는 터전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귀천(貴賤)과 수요(壽夭)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신이 매양 저하(邸下)께서 거동할 때나 혹 모시고 앉았을 때에 저하의 위의(威儀)를 우러러 보았는데, 안중단엄(安重端嚴 침착하고 후중하여 단정하고 엄숙함)함으로써 여럿의 우러러 봄을 위안시키고 나라의 의표(儀表)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몸가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옛사람처럼 ‘단정히 앉았으면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손발을 움직이지 말라.’는 것을 깊이 더 체념(體念)하여 보심이 어떠합니까?”
“경계하는 말이 나의 병통에 적중하니, 고맙게 여기오. 나도 또한 이 병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근년부터는 늘 스스로 닦고 꾸며 왔기 때문에 전일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음을 면치 못하오.”
“기질(氣質)을 변화 시킴을 어찌 하루아침에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때 어느 장소든 잊지 않고 늘 공부해 가는 것이 가장 긴요한 방법입니다?”
“소위 공부라는 것을 감히 전폐야 하겠소마는 보잘것이 없으며, 하는 척할 뿐이었소.”
“그것은 저하께서 스스로 겸손해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모양으로만 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진실한 마음으로 공부하는 절도(節度)라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웃으면서,
“모양으로만 한다 하더라도 말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날이 어찌 없겠소?”
하매, 홍국영이 아뢰기를,
“이번 저경궁(儲慶宮) 거둥 때에 이계방도 또한 수가(隨駕)했는데, 모두 말 고삐를 안온하고 조용하게 잡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마음으로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상궁(毓祥宮) 거둥 때는 대조(大朝)께서 재촉하셨기 때문에 조금 빨리 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동궁이,
“혹 교외(郊外)에 나가서는 어찌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이 없겠소마는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뿐이오. 그런데 능행(陵幸 능에 거둥함) 때는 대가(大駕)가 이미 떠나신 뒤라, 수가(隨駕)하는 모든 관원들로 길이 꽉 막히었소. 그때 천천히 혁교(革橋)를 나와 보니 대가가 벌써 멀리 가셨으므로 부득이 빨리 달려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때 형편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소.”
하였다. 홍국영이 아뢰기를,
“신등도 진실로 그런 줄 아오나 이 내용을 모르는 백성들은 모두 저하께서 말달리기를 좋아한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책을 덮은 다음에 북경 진신편람(北京縉紳便覽)을 내어 보이고 이르기를,
“계방은 일찍이 이 책을 보았소?”
“보았습니다. 그들의 관직 제도는 대개 명(明) 나라 제도를 따른 것으로 천하의 큰 규모를 볼 수 있습니다.”
“관직 수효가 어찌 이렇게 적소?”
“신은 이것도 오히려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 비교하면 십 배도 넘습니다.”
“우리 나라에 비교하면 많지만 천하의 큰 것으로 말하면 많은 줄을 모르겠소. 우리 나라 내외직(內外職)을 합쳐서 관원 수효가 얼마나 되오?”
모두들 자세히 모른다고 대답하자, 동궁께서 협시(夾侍)를 시켜 관안(官案)을 가지고 오라 하였다. 춘방을 시켜 내안(內案)을 상고했는데 모두 9백여 원(員)이었고, 나를 시켜 외안(外案)을 상고했는데 모두 6백 70여 원이었는바, 내외직을 합쳐 1천 5백여 원으로 되었다. 내가 아뢰기를,
“신도 진실로 관원 수효가 이처럼 많은 줄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경비 부족은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참으로 쓸모 없는 관원도 많소.”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북경은 천관(千官), 우리 나라는 백관(百官)이라고 하는데 무슨 연고로 이토록 불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천관(千官)이라 하는 것이 합당하겠소.”
하고, 또 이르기를,
“북경 관원은 무엇으로 만한(滿漢)을 구별하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름마다 밑에 각각 주소(住所)가 갖추 기록되는데 만주 모기인(滿洲某旗人)이라 한 자는 만인(滿人)이고, 봉천 모기인(奉天某旗人)이라 한 자는 한군(漢軍)입니다. 한군이란 일통(一統)되기 전에 복종한 자의 자손으로, 함께 팔기(八旗)의 부하로 있다가 봉천(奉天)에 소속된 자들입니다.
봉천이란 심양(瀋陽)입니다.”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관직(官職)이 갈리고 바뀌어짐은 있다 하지마는 이 관안(官案)은 이렇게 자주 고쳐졌는가요?”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북경 관제(官制)는 9년으로 과한(瓜恨)을 정했으므로 아침에 옮기고 저녁에 바뀌어지는 우리 나라의 것과는 다릅니다. 까닭에 매년 연초(年初)에 관안을 개간(改刊)하여 한 해 동안 사용하므로 그 중간에 갈리고 바뀌어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북경에서 당보(塘報)를 보았소?”
“보았으나 우리 나라와는 달리 옥안(獄案)이 많으며 또 인본(印本)입니다.”
“우리 나라 조보(朝報)도 인본(印本)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소?”
“선묘조(宣廟朝) 때 일찍이 한 번 인본으로 시행하다가 즉시 금령(禁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이선정3(李先正 이이를 지칭)의 경연일기(經筵日記) 중에 실려 있으나 인본으로 사용한다면 비용도 아주 적게 들 듯 합니다.”
“무방할 듯하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북경 벼슬아치의 봉록(俸祿)이 아주 적지 않던가요?”
“신도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 모든 왕자(王子)의 봉록은 매년에 쌀 만 곡(斛), 은 만 냥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너무 후한 듯합니다.”
“어찌 후하다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세금(稅金)도 면제하고 수천 결(結)씩 휩싸고 앉았으니, 이보다 더 후하지는 않겠소.”
하였다. 이때에 전일의 과목을 읽을 적부터 가끔 씹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주(茶珠) 두어 알이 자리에 흘러 떨어졌다. 홍국영이 주워서 맛보고 아뢰기를,
“이것은 다주입니다. 진어(進御)를 너무 많이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식체(食滯)가 있기 때문이고 또 그 맛이 달고 향기로워 좋기 때문이오.”
하고, 또 나에게 이르기를,
“북경에서는 다(茶)를 어떤 것으로 상품(上品)을 삼던가요?”
“보이다(普洱茶)로 상품을 삼는데, 보이는 운남(雲南) 지방에서 나는 까닭에 얻기가 힘들다 하며, 신도 또한 보지 못했습니다. 다주는 전혀 용뇌(龍腦) 기운인데 약성(藥性)이 차서 기를 조화시키는 데는 알맞지 않습니다. 또 다(茶)란 쓴 것을 귀하게 여기므로, 단것은 비록 입에는 알맞다 하더라도 뒷 맛이 쓴 것만 못합니다. 오직 계화다(桂花茶)는 달고 향기로움이 다주의 맹렬함만 조금 못하나 기운을 내리게 함에는 알맞습니다. 식적(食積)으로 고통을 겪는 자가 흔히 먹고 효력을 보지마는 다주는 반드시 과하게 진어할 것이 못됩니다.”
“계화다는 과연 식적에 좋은가요?”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본래 체증이 없었는데 어릴 적에 어떤 체증 있는 사람을 보고 속으로 부럽게 여겨 트림을 내면서 흉내를 냈더니, 근년에 와서 정말 체증이 생겨 몹시 고달프게 되었소.”
“체증은 글 읽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증세며, 또 글 읽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기도 하오니, 조섭(調攝)하셔야 합니다.”
“시체(時體)가 점점 변하오, 반상(盤床) 기명(器皿)같은 것도 또한 옛 것과 지금 것이 다르니, 이것은 무슨 까닭이오?”
“시대에 따라 숭상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변함은 본래 그러합니다. 다만 그 변함을 보아서 세상 운수의 승강(昇降)도 또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식기(食器)같은 것도, 옛 제도는 주둥이를 반드시 넓게 했는데 지금은 배를 넓게 하고 주둥이는 도리어 줄여서 좁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 제도가 어느 것이 나은가요?”
홍국영이 대답하기를,
“줄여서 좁히는 것이 열어서 넓게 함만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신의 집에는 아직 옛 그릇을 사용합니다.”
하니,
“계방은 집에서 어느 것을 사용하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신의 집에는 지금 만든 것을 사용합니다.”
하니, 웃고 이르기를,
“그렇다면 계방은 시체를 좋아하는구려.”
하고, 또 이르기를,
“외간(外間)의 음식(飮食)들은 사치하오? 검소하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므로 의복과 음식이 날로 사치해져서 식자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하니, 동궁이,
“계방은 집에서 음식을 어떻게 하오?”
내가 대답하기를,
“신같이 한미한 자는 곧 사치를 하고 싶어도 또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이진형이 아뢰기를,
“신이 주서(注書)로 있을 적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께서 찬(饌)을 하사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맛과 품수가 낱낱이 진기하고 이상스러운 것이 시골음식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인원 성모(仁元聖母)께서는 재주와 인품이 뛰어났던 바, 음식 만드는 솜씨도 또한 그러했었고 또 본방(本房)에 있는 분들도 본래 음식을 잘하기로 유명하였지요.”
하고, 또 이르기를,
“그분들 중에는 어느 집 음식을 제일로 삼소?”
하였다. 나는 저하(邸下)께서 묻는 뜻을 알지 못하여 홍국영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척리(戚里)의 집안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홍국영의 말이, 이는 아무의 집이라고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아무의 집 음식은 사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모두 척리에서 시작하여 차츰 연인(連姻)에게까지 물들게 되었으니, 이것은 자연 보고 들음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전하는 말이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식사에 대해 사치를 극도로 했다는 말은 나도 또한 들었소. 그의 집 사람이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하던데, 과연 그러했던가요?”
하였다. 이진형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귀양살이할 때는 형편이 어쩔 수 없었으니, 비록 추한 음식인들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굶주리면 음식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당시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근래에는 찬품(饌品)은 적고 사치만 지나친데 나의 생각에는 이것이 도리어 풍성하게 차린 것만 못한 듯하오.”
하였다.
8월
26일
소대(召對)했는데, 주서절요(朱書節要) 제7권 중에 정전사(程正思)에게 답한 ‘소론 개정당(所論皆正當)’에서부터 ‘왕성가(汪聖可)에게 답한 편지’까지 갖고 입시하였다. 겸필선(兼弼善) 이보행(李普行)과 겸사서 임득호(林得浩)가 문의를 다 아뢰었다. 동궁이 이르기를,
“무릇 이단(異端)의 학설도 또한 그 소이연(所以然)을 밝힌 다음이라야 가히 배격하고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겠소?”
하고, 또 이르기를,
“여기에 이른바 ‘옛날 선종(禪宗)에서 배웠다.’라는 말은 곧 주자(朱子) 자신을 이른 것인가요?”
하매, 이보행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이르기를,
“옛부터 고명(高明)한 자가 불도(佛道)에 많이 물든 것은 어째서인가요?”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불서(佛書)는 사람의 마음을 논함에 있어 그 말 만듬이 기이하고 놀라워 반성하고 깨닫는데 용이하도록 하였습니다. 때문에 마음을 수양하는데 지나친 현자들이 흔히 그 학설에 들어갑니다.”
하니, 동궁이,
“능엄경(楞嚴經)같은 것은 그 말이 아주 좋다 하며 또 선비들도 읽는 자가 많이 있다 하니, 참으로 그런가요?”
하였다. 이보행이 대답하기를,
“고 재신(宰臣) 이덕수(李德壽)는 불서(佛書)를 많이 읽었지만 그 외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동궁이,
“계방도 불서를 보았는가요?”
하였다.
“능엄경(楞嚴經)ㆍ원각경(圓覺經) 등 여러 경(經)은 젊었을 적에 대략 보았습니다. 그러나 선비로서 서산(書算)을 놓고 번수를 따지면서 읽은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불경(佛經)도 또한 향판(鄕板)이 많은가요?”
“승도(僧徒)들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가 향판이며, 소위 팔만 대장경(八萬大藏經)이란 판본(板本)이 있는데 치도(緇徒)들이 중보(重寶)로 일컫는 것입니다.”
“듣건대, 여러 차례 화재(火災)가 있었는데도 마침내 불타지 않았다 하던데 사실인가요?”
“대장경 판본은 경상도(慶尙道) 해인사(海印寺)에 있는데, 이 해인사가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났으나 장경각(藏經閣)엔 끝내 불이 미치지 않았다 합니다. 또 듣건대, 새도 그 지붕에는 감히 깃들지 못하며 1년 내내 청소하지 않아도 먼지가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 합니다. 이것은 비록 중들이 과장하는 말이라 하지만 자못 신기하고 이상스러운 일입니다.”
“그 판본이 어떤가요?”
“신도 보지 못했지마는 대개 불서 판본이 유서(儒書)보다 훨씬 나은데 그것은 중들의 정성을 따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듣건대, 중들의 불서 존봉(尊奉)하는 것이 선비들의 경서(經書) 존봉하는 것보다 더 잘한다 하던데 참으로 그런가요?”
“그들의 존봉하고 애호하는 정성은 유가(儒家)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으니, 유자(儒者)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듣건대, 대장경 판본은 칠과 제작이 아주 정교[精]하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요?”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도교(道敎)는 우리 나라에 전하지 못했는가요.”
“도교는 비록 삼교(三敎)라 일컫긴 하지만 선(仙)과 불(佛)의 나머지 말을 주워 모으고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으로 기도하는 술법을 섞어 만들었으니, 그 학설은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나라에는 더구나 전한 것이 없습니다.”
“중국에는 지금까지 많이 전하는가요? 계방은 중국에 가서 보았다니 과연 어떠하던가요?”
“중국에도 또한 많이 전하지는 않습니다. 용호산(龍虎山)에 있는 장천사(張天師)의 집이 도가(道家)의 종주관(宗主關)으로 되었고, 안팎으로 운유(雲遊)니 전진(全眞)이니 하는 자들이 있으나 모두 무식하고 학설도 없으므로 족히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용호산은 어느 곳에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이 살았었는가요?”
“장도릉(張道陵)이 살던 곳인데 신도 그 산이 어느 지방에 있는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거기는 장도릉의 자손이 대대로 천사(天師)가 되어 사는데 이적(異蹟)도 많다고 합니다. 감여가(堪輿家 풍수)에서는 이곳을 길지(吉地)로 일컬어 궐리(闕里)와 병칭합니다. 들리기론 천사란 자는 장량(張良)의 후예(後裔)란 말도 있었습니다.”
“송(宋) 나라 효종(孝宗)은 이 도교(道敎)를 숭상한 자인가요?”
“휘종(徽宗)도 자칭 도군(道君)이라고 했으나 말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역시 도교의 죄인입니다.”
“이 편지에 ‘성시(省試)의 득실(得失 합격과 불합격)은 다시 마음속에 두지 않은 줄로 생각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로 미루어 본다면 그 당시에도 과장(科場)의 득실을 큰일로 삼았던 모양이오.”
이보형이 대답하기를,
“정정사(程正思)가 필연 과거(科擧)에 합격하지 못했던 까닭에 주자(朱子)의 말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그 당시 인심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소. 대저 과거(科擧)할 생각을 털어 없애기란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오. 계방은 벌써부터 과거를 그만두었는가요?”
“그만둔 지가 4~5년이 되었습니다.”
“과거를 그만둔다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소?”
“신은 재주와 지식이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문(程文)엔 더욱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원하여 그만두게 된 것이지, 고상(高尙)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
“계방의 조예(造詣)를 내가 깊이 알지는 못하나, 계방 같은 재주로써 어찌 과거를 못하겠소? 이것은 분명히 달갑게 여기지 않는 때문일꺼요.”
이보형이 아뢰기를,
“계방이 과거를 그만둔 것은 참으로 아무나 못할 어려운 일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옛사람은 일찍이 ‘공부에 해롭고 뜻을 빼앗긴다.’는 훈계를 하였고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대개 방탕함이 많고 언행(言行)을 돌아보는 이가 없지마는, 계방이 과거를 그만둔 까닭은 짐작컨대 실학(實學)에 오로지 할 계획인 듯 합니다.”
하니, 동궁이,
“계방은 누구의 자손이오?”
“정사공신(靖社功臣)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의 6대손입니다.”
“어제 거안(擧案 공적 모임에 참석한 벼슬 아치가 임금이나 상관에게 올리던 명함) 중엔 계방에 대한 것이 어찌 그리도 많았소? 어떤 시직(侍直)이 또한 공신(功臣)의 자손이었소? 계방의 선조(先祖)는 어떠한 사적이 있었소?”
“별로 사적이 없습니다. 신의 선조는 곧 구사맹(具思孟)의 외손으로 인조 대왕(仁祖大王)과 이종(姨從)이 됩니다. 신의 종가(宗家) 집은 높은 지대에 있었고 또 집에 문루(門樓)가 있어서 문루에 오르면 도성 안을 내려다보게 되었답니다. 이런 까닭에 거의(擧義 인조반정)하던 당시에 모든 집 부녀들이 모두 그 문루에 모여서 약속하기를, ‘대궐(大闕) 밖에 불빛이 있으면 대사(大事)가 이루어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 것이라.’고 한 다음 모두 자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합니다. 집안에서 전해오는 말입니다.”
“집은 어느 곳에 있는가요?”
“남산(南山) 밑 암리문(暗里門) 동리에 있습니다.”
“그때에 불빛으로 약속했다는 전말을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그 집이로군. 또 각기 명주 한 필씩 가지고 목매어 죽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소.”
“명주에 대해 전해 오는 말도 있습니다.”
“그 문루가 지금도 있소? 거의루(擧義樓)라 부르는 것이 좋겠소.”
또 이르기를,
“정사공신(靖社功臣)은 중묘 공신(中廟功臣)처럼 잡되지 않았는가요?”
내가 대답하기를,
“신의 선조를 신이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연평(延平) 이귀(李貴)와 승평(昇平) 김류(金瑬)ㆍ완성(完城) 최명길(崔鳴吉)ㆍ계곡(谿谷) 장유(張維)같은 분은 모두 유문(儒門)에서 강학(講學)한 분으로, 중묘 공신과는 동떨어지게 같지 않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귀도 또한 유문의 사람이오?”
하였다. 내가,
“이귀는 율곡(栗谷) 이선정(李先正)의 문인으로서, 이선정이 모함 당했을 때 여러 차례 상소(上疏)하여 변명하였습니다.”
하니, 이르기를,
“이귀는 이ㆍ병판(吏兵判)을 자청해서 했다 하니, 다른 사람들은 본받을 것이 아니나 그 사람의 충성과 진실은 귀히 여길 만하겠소.”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진실로 예교(睿敎)와 같습니다. 이른바, 허물을 보면 그 어짐[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의 가법(家法)도 매우 엄하여 여러 아들을 옳은 방향으로 가르쳤으므로,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귀하게 되었습니다. 연성(延城) 이시방(李時昉)이 술에 취해서 실수하매, 그의 형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이 그의 아버지에게 여쭙고 막 종아리를 치려 하는데 연평(延平)이 웃으면서 자기의 뒤에다 숨겨 주었다 하여 선비들은 이것을 미담(美談)으로 전합니다.”
하였다.
“그의 가법도 그러했었소?”
“이시백이 수원부사로 있을 적에 참소하는 말을 두렵게 여겨 감히 갑옷과 병기(兵器)를 수선하지 못하자, 이귀가 매를 치면서 꾸짖기를 ‘너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국가를 위해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참소하는 말을 돌아보느냐.’ 하였다 합니다. 여기에 그의 충성스럽고 진실한 가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괄(李适)이 배반할 때에 이귀가 생존해 있었소?”
“이괄의 배반이 갑자년(甲子年 인조 2 1624)에 있었으니, 반정(反正) 초기입니다.”
“돈화문(敦化門)에 아직도 이괄의 도끼 흔적이 있는데, 그것은 인조(仁祖)께서 개수하지 못하게 명하신 것으로 곧 ‘편안할 때도 위태함을 잊지 않는다.’ 는 뜻이었소.”
하였다. 잇달아 이단 잡서(異端雜書)를 강론했는데, 동궁이 이르기를,
“열국(列國) 선진(先秦) 시대에도 아마 잡서가 많았을 터이니, 진 시황(秦始皇)이 분서(焚書)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겠소.”
하고, 이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일은 말하기 어렵소. 만약 ‘진 시황이 분서한 것을 당연하다.’ 했다고 잘못 전해진다면 어찌 말이 되겠소?”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만약 진 시황이 잡서를 불태우지 않았던들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말이 세상에 아무 유익도 없이 한갓 사람의 이목만 어지럽혔을 터이니, 불태워 없앤 것이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