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자료 (1)

2015. 3. 27. 17:28들꽃다회

 

 

 


 

 

 

 

 
경주 남산 산행 지도
 

* 경주 남산 자료(52)

 
 
경주 남산의 삼화령(三花嶺)은 2군데 | * 경주 남산
솔뫼 2015.02.26 18:00
  

 

경주 남산의 삼화령(三花嶺)은 2군데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전)삼화령에서 출토 석조삼존불상

 중앙의 본존불이 1925년대 전삼화령에서 출토된 것이고,

좌협시보살(우측)이 일명 애기부처로 불리는 불상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실에는 경주 남산 삼화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석조삼존불상이 있다. 1925년에 발견되어 발굴한 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한 불상이다.

삼화령석조삼존불이 발견된 삼화령은 남산의 북쪽, 신라 말엽의 문필가 최치원(崔致遠)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상서장(上書莊) 옆 등산로를 따라 약 800m 가량 오르면 해목령 못미쳐 있다.

   등산로 옆 오른편으로 40여m 들어가면 무덤 10여 기가 모여 있는데 그 중간쯤으로, 1m 가량의 돌기둥으로 둘려쌓인 곳이 전삼화령이다. 현재 누군가가 조상의 묘를 써서 작은 봉분이 만들어져 있다.

 

 

1925년 출토 당시의 모습.

(전)삼화령 석실 속에 이 불상과 보살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

 

 

   1925년 불상이 출토된 이후, 이곳을 ‘삼화령’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황수영 박사의 주장으로 불상 조각양식이 삼국시대의 것이며, 무덤 중 세 개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삼화령을 ‘화랑 세 명의 무덤’으로 해석하고 이곳이 삼화령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금오산 남쪽에 있는 생의사터의 연화대좌가 있는 곳을  '삼화령'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삼화령으로 추정된다’는 뜻으로 ‘전(傳)’자를 붙여 전(傳)삼화령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전 삼화령 앞의 이정표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서 삼화령으로 부르는 곳은 2곳인데, 남산 금오봉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한 곳씩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이 '삼화령(三花嶺)'이고 북쪽에 있는 것이 '(전)삼화령(傳 三花嶺)'이다.

 

'삼화령'과 '전 삼화령'의 위치

 

 

   금오봉 남쪽에 있는 삼화령(三花嶺)은 금오봉 정상과 통일전을 잇는 탐방로 (지금은 탐방로이지만 옛날에는 경주와 언양을 잇는 중요도로였던 길) 중간쯤에 있다.

등산로에서  길 왼편의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숲을 헤치고 오르면 지름 2m가 넘는 연화대좌가 나온다. 바위를 둥그렇게 둘러 연잎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삼화령으로 보는 주장은 지형에 따른 것으로, 이곳과 금오봉과 천룡사가 있는 고위봉을 각각 하나의 꽃잎으로 보고 ‘삼화령(三花嶺)’이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전)삼화령에서 불상이 출토되기 이전부터 이곳을 삼화령이라고 불러왔다.

 

   이곳은 신라 경덕왕때 충담스님이 매년 중삼중구일(重三重九日 : 3과 9가 두 번 겹치는 날로 3월 3일과 9월 9일을 말함)에 미륵세존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던 곳으로 전해오는 장소이며 생의사미륵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현재 삼화령의 연화좌대는 비록 주인을 잃었지만 충담 스님을 추념하며 이곳에 차나무를 심고 매년 다례를 올리고 있다.

 

이 삼화령에는 근대까지 불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전(傳)삼화령 미륵삼존불

 

옛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을 때의 삼존불

 

 

우협시보살                                     본존불                                       좌협시보살

 

 

 

본존불의 의자좌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골의 한 석실(전 삼화령)에서 옮겨왔다.

가운데 본존의 높이는 162cm이며 자세가 특이하다. 다리를 내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의자좌(倚子座)자세인데 이런 형태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유일한 것이다.

중국의 6∼7세기 불상 중에도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불상이 있는데 대부분 미륵불이어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중국의 예로 미루어 본존불 또한 미륵불로 추정한다.

 

 

본존불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얼굴의 양감이 두드러지며 눈이 부은 듯이 표현된 것은 고신라 7세기 석불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왼손은 옷자락을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앞가슴이 깊게 벌어져 속에 있는 내의와 띠매듭이 보인다. 법의가 얇은 편이고 옷주름선이 정돈된 융기선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몸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의자좌(倚子座)의 상이면서 다리 옆면의 길이가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아 입체적인 조형감이 감소되었다.

둥근 두광(頭光)과 윗면이 편평하지 않아 기운 형태의 대좌에는 단판 연꽃무늬(單瓣蓮花紋)가 선각(線刻)표현되어 있다.

 

 

좌협시불

 

우협시불

 

 

   왼쪽 보살상은 높이가 98.5, 오른쪽 보살상은 높이가 100㎝로 4등신의 자그마한 체구에 연꽃을 손에 쥐고 서 있다. 양쪽의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모습이나 보관·손모양·목걸이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머리에는 세 개의 꽃장식이 있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정면 장식이 약간씩 다르다.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있다. 천의(天衣)는 양어깨를 덮고 가슴과 다리를 가로질러 양팔에 걸쳐 다리 옆으로 늘어지고 있다.

이 보살상들은 한쪽 무릎이 약간 앞으로 나오게 조각되어 초보적인 삼굴(三屈)자세를 보인다.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이용하여 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고신라 7세기의 전형적인 불상양식이 보이는 신라의 대표적인 석불상이다.

 

   이 불상이 출토된 (전)삼화령은 상서장에서 800m 가량 위쪽에 있다. 금오봉 북쪽의 해목령보다도 더 북쪽이다. 상서장에서 솔밭 사이로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길 오른편으로 무덤 10여 기가 모여 있는데, 1m 가량의 돌기둥으로 둘려 쌓인 곳이 전삼화령이다.

여기에는 발굴 당시 사진과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이 있다.

 

 

 

 

   동국대 황수영박사는 삼화령의 삼화를 세 명의 화랑으로 보았다.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에서는 미륵여래를 화랑의 화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화가 세 명의 화랑이라면, 화랑이 미륵의 화신이므로 삼화는 결국 삼존의 미륵상이 된다. 

경주박물관의 삼화령 미륵불삼존상은 명문이 없지만 주존이 미륵상 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상이든 보살상이든 미륵상은 결가부좌한 좌상 형식으로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미륵상은 주로 의좌에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두 다리를 나란히 아래로 내리는 의좌식(倚坐式), 발목을 교차하는 교각식(交脚式), 한쪽 발목을 다른 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반가식(半跏式, 반가사유상의 자세)이 있다.

(전)삼화령 불상은 의좌식을 하고 있는 미륵불상으로 양협시 보살의 대좌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 삼화령미륵불 연화대좌

 

 

 

 

 

 

 

 

 

 

 

   금오봉 남쪽의 삼화령은 세 개의 산봉우리가 세개의 연꽃잎을 이루었다고 하여 옛부터 삼화령(三花嶺)이라고 불리어진 곳이다

1천여년 전, 충담스님이 다 헤어진 장삼과 버드나무통을 메고 매년 중삼중구일(重三重九日 : 3과 9가 두 번 겹치는 날로 3월 3일과 9월 9일을 말함)에 삼화령 미륵불전에 차 공양을 올리던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충담 스님과 관련된 ‘생의사돌미륵(生義寺石彌勒)’ 조의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 때 도중사(道中寺)에 생의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수도승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 한 곳에 풀을 묶어 표시하고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했다.

‘아까 표한 곳에 내가 묻혀 있으니 파내다 고개 위에 묻어 달라.’

잠에서 깬 뒤 표를 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와, 이를 삼화령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644년)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생의사라 했다.

 

   충담 스님이 해마다 중삼중구일에 차를 달여 공양한 대상이 이 부처로서 삼화령이 남산 남쪽에 있다는 것은 이 내용에 기초한 것이다. 실제 삼화령 연화좌대 서쪽 계곡에 절터가 있고. 이곳 절터의 흔적이 연화좌대 방향으로 연결되는 만큼 이곳이 생의사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에 신빙성이 높다.

 

 

 

 

   충담스님이 경덕왕을 만난 날도  3월 3일 삼화령에 들려 헌다(獻茶)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경덕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서, 앵통(櫻筒, 앵두나무로 만든 통) 속에 다구[茶具]가 담긴 통을 둘러메고 오는 충담 스님을 본다. 경덕왕이 누구이며,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충담스님은 해마다 중삼일[重三日, 3월 3일]과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계시는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차를 끓여 올리는데, 지금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경덕왕은 스님에게 차 한 사발을 얻어 마셨습니다. 차는 맛이 훌륭했으며, 향기가 났다.
경덕왕은 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신 뒤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 '이안민가(理安民歌)'를 지어달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스님은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짓지 않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 즉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친다.

즉, 백성을 권위로서 다스릴 것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머니시라.
     백성을 어린 아이라 여기시니,
     백성이 그 은혜를 알리.
     구물거리면서 사는 물생(物生)들에게,
     이를 먹여 다스리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스님은 이 향가에서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라며 “각기 자기 본분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할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경덕왕은 충담 스님의 안민가를 듣고 바로 왕사(王師)에 봉했으나, 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왕사(王師)로 봉하겠다는 경덕왕의 청을 굳이 사양한 인품에서 볼 수 있듯 충담스님은 참다운 다인(茶人)이자 가인이었다

 

차공양을 하는 벽화(기림사 약사전)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들어왔던 차(茶)는 불교와 더불어 꽃을 피웠다. 충담스님이 미륵세존께 차를 올린 것이 바로 헌다의식(獻茶儀式)의 시원(始原)이며, 차를 마시는 것은 불가에서는 수행의 한 방편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8세기 이전에 차를 공양하거나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사복이 원효 스님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설화나 보천·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덕왕은 월명 스님에게 차를 예물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차가 널리 성행한 것은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뒤부터라고 한다.

 

 

 

♣ 경덕왕이 충담을 만나다 (765년)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 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 (忠談)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 (南山)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 (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경주 남산의 천년 묵은 나무

 

 

남산 탑곡 부처바위의 북면

 

노천박물관이라고 일컷는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탑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삼층석탑이 있어서 탑곡이라고 불리지만 석탑보다는 일명 '부처바위'로 인해 더 유명한 곳이다.

 

이 터에서는 일찌기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가 있는 막새가 발견이 되었고, 특히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 오사카가 이 부근에서 신인사(神印寺)란 명문이 있는 기와를 발견한 바가 있어 부처바위가 있는 곳은 신인종에 속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흔히 '부처바위'라고 부르는 이 곳의 정확한 명칭은 '탑곡 제2사지 마애조상군'이다.

높이 약 9m, 둘레 약 30m의 큰 바위 사면에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나한상, 신장상, 탑, 사자 등 34(최근 동면에서 1기를 더 발견함)기를 새겨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를 나타낸 바위이다.

 

이 바위에는 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

살아있는 생나무가 아니라 암벽에 새겨진 나무이다. 이 바위의 동,남,서면에 불상과 짝을 이루어 여섯그루의 나무가 새겨져 있다.

동면의 보리수(菩提授) 2그루,서면의 사라수(沙羅樹)와 대나무, 남면의 반야나무이다

이 나무들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모두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버텨왔고 앞으로도 몇 천년을 더,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할 것이다.

 

 

동면의 바위그림

 

동면(東面)의 수하승상(樹下僧像)

 

마애조상군의 동쪽 면에는 극락정토 사상이 담긴 아미타불여래가 가운데 모셔져있다. 비천상과 보살상이 보이며 오른쪽 아래에 사바세계 보살도 적게 표현되어있다.

동면의 왼쪽부분에 '수하승상(樹下僧像)'이라고 해서 두 그루의 보리수 아래에 선정에 든 스님상이 새겨져 있다

보리수는 석가모니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딜음을 얻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귀하게 여기는 나무이다.

 

 

남면의 바위그림

 

 

 

 

언덕 위에 있는 남쪽면에는, 삼존불이 정답게 좌정을 하고 있고. 왼쪽협시불 옆에 반야나무 조각이 돋보인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은 모습이다  

 

 

 

 

 

점선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있음

 

 

그리고 남면 앞 전실이 세워졌던 바위의 측면에 가슴아래가 땅에 묻혀 있는 수하승상(樹下僧像-나무 아래의 스님상)이 있다

스님의 머리 뒤로 한 그루의 반야나무가 서 있다

 

 

 

 

 

서면의 바위그림

 

 

 

서쪽면에는 연화대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 옆에 사라수(沙羅수)와 대나무(竹)가 있다

사라수는 석가모니가 이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고 하는 나무로 불교의 3대 성수(聖樹)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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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처바위의 조성연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부처바위 앞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이 여러 모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마애조상군 역시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에 따라서  7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와 9세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 7세기 중엽으로 보는 이유

 

▶ 신인사라는 명문기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명랑법사가 개조한 신인종의 가람이다.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진 눈에 웃음이 어려 있다.(8세기 이후 부처님들은 입가에만 웃음이 있다.)

여래상의 가슴에 비스듬히 승기지(가슴을 가리는 옷)가 그려져 있다.

군(裙 ; 치마)을 동여맨 옷끈 매듭이 부채살처럼 나타난다.

상현좌(裳懸座)의 모습은 중국 남북조시대 후기(494∼534)의 오래된 양식이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양식은 7세기에 유행했다.

금강역사가 무장한 모습이나 금강저를 들고 있는 모습은 고식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9세기로 보는 이유

 

북면에 조각된 쌍탑은 통일기 쌍탑가람배치의 구조를 받아들인 것이다.

불상조각이 삼국기의 단순 소박한 조소성(彫塑性)이 결여되어 있으며 고졸(古拙)의 미(美)도 적다.

남쪽에 있는 삼층석탑의 존재, 불상들의 윤곽선 강조, 평면부조에 추상적 옷주름의 선적(線的)처리,

    자유분방한 회화적 구성과 도상의 배치, 많은 부분의 치졸한 조각수법 등은

    통일신라의 전성기 이후의 조각양식이다.

 

 

 


 

      

수인(手印)이 가려져 있는 경주 동남산 북쪽의 불상들

   

 

탑곡 마애조상군

 

신라는 삼국(三國) 중에서 불교의 공인은 가장 늦었지만,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에는 수많은 불교유적이 남아 있다.

시내뿐 아니라 특히 경주 남산에는 도처에 사지(寺址)석불마애불석탑 등이 널려져 있어 노천박물관이라고도 한다.

 

남산에는 130여개의 사지와 80개의 불상,74기의 탑 등이 산재해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동남산의 북쪽기슭에만 법의(法衣)에 가려 수인(手印)이 보이지 않는 불상들이 분포하고 있다.

손목이 조금 보이는 것과 의도적으로 법의(法衣) 자락을 늘어뜨려 완전히 두 손을 가린 것들이 있으며 이 불상들은 형태로 보아 거의가 선정인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성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 불상은 모두 비교적 이른 시기, 7세기에 조성된 것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경주 남산의 수인 가려진 불상의 분포

 

 

이처럼 옷소매에 감춰진 수인은 전국에 36여 곳이 있는데, 이런 양식은 조성연대가 가장 빠른 경주 동남산 불곡 석불좌상에서 시작하여 11세기~13세기 사이에 전라도 지방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했으며 그 후에 전국으로 전파 되었던 양식이고 그 흐름은 18세기 후반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이런 형태의 불상은 경기도 1, 강원도 1, 충청도 7, 경상도 11, 전라도 16곳에 산재되어 있다.

 

 

동남산의 수인 가려진 불상

 

불곡감실불상

   

 

 

감실불상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불곡(佛谷)이라 부르는 골짜기에 있다.

도로 옆 주차장에서 평탄한 계곡 산길을 따라 400m 정도 오르면 좌우가 암반으로 연결된 자연 화강암군 안에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높이 2.3m너비 3.5m의 자연암반 가운데 굴을 파서 감실을 마련하고, 내부에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석굴이라기엔 너무 작아 불감(佛龕)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지만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형태이다.

 

 

 

 

 

 

 

 

얼굴은 높은 부조로 볼륨 있게 표현하였고, 신체와 대좌는 낮은 부조이면서 옷깃 사이로 드러난 앞가슴은 사각형으로 나타나 있고 옷주름을 선각으로 표현하여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크고 둥근 얼굴은 명상에 잠긴듯 다소곳이 숙이고 있으며. 반달모양의 낮은 육계가 놓인 소발의 머리는 귀와 연결되어 얼굴을 감싸고 있어 마치 머리에 두건을 두른 듯하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각이 진 어깨는 넓게 결가부좌한 무릎과 함께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입고, 그 아래에 사선으로 내의를 표현하였으며 양 어깨와 양팔을 감싸고 흘러내린 옷주름은 무릎을 지나 대좌를 감싸고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자세히 보면 좌대에 늘여뜨려진 옷자락은 정확히 두 겹이다. 아래의 주름은 대좌를 덮였던 것이고 그 위의것은 가사자락임을 알 수 있다

 

 

옷자락 속에 넣어 수인이 보이지 않는다

 

이 불상의 특징은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배 앞에 대고 있는데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두 손을 샅 위에 포개고 명상에 드는 선정인의 모습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감실의 규모는 높이 150㎝∙ 최대너비 110· 깊이 60이고, 불상은 높이 115㎝∙얼굴길이 36.5㎝∙얼굴너비 26㎝∙어깨너비 64로서 등신대(等身大)이다.

 

남산의 불상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 불상은 상호와 신체 표현, 그리고 감실의 조성 등으로 보아 조성연대를 6세기말에서 7세기로 추정한다

 

 

 

미륵곡마애여래좌상(보리사 마애석불, 지방유형문화재 제193)

   

 

 

배반동 동쪽 들판을 향한 높이 2m의 바위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보리사 주차장에서 안내판을 따라 동으로 산길을 돌면 망덕사터(望德寺址)를 비롯한 벌지지(伐知旨) 들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암벽에 얕은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앞으로 약간 기운 바위면에 광배(光背) 형태로 바위벽을 얕게 파 높이 1.5m의 감실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약 0.9m 정도의 작은 부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이 표현되고 얼굴은 두툼하고 세밀하게 하여 자비 넘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귀는 길게 표현하고 목에는 3개의 선으로 나타내는 삼도(三道)를 두 선으로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가슴을 일부 드러내고 속옷의 윗단만 경사지게 나타내었다. 이 불상 역시 양 손은 옷 속으로 숨겨서 표현하지 않았다.

발이 표현되지 않은 양 다리는 특이하게 가운데로 향하는 옷선 몇 개로 처리하였다. 아래쪽에 흐릿하게 표현된 연꽃대좌(臺座)는 중판의 연화를 앙련(仰蓮)으로 표현하였으나 앞 바위의 윗면에 가리어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거친 편이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을 그은 것처럼 얕게 새겨 매우 독특한 조각수법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바위 안에서 막 모습을 드러내는듯한 것을 느낌을 주기위함이라고 한다.

 

불상의 높이는 1.1m에 지나지 않으나 발아래에는 급경사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갖게한다.

바위 크기는 높이가 약 2.4m너비 약 2.4m 정도이며, 감실형 전체 높이는 152㎝∙너비 85이다. 불상은 높이 112, 얼굴너비 24, 얼굴길이 29, 어깨너비 48, 무릎너비 74이다

 

보리사의 석불좌상보다 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탑곡마애조상군

   

 

 

탑곡의 '부처바위'라 불리는 탑곡마애조상군은 남산의 유적과 유물가운데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유적이다.

높이가 10m, 둘레가 40m 쯤 되는 커다란 이 부처바위의 사방에는 탑, 불상, 나한상, 보살상, 비천상, 사자상등 무려 40여 점에 달하는 여러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본래 '만다라'는 부처와 보살을 그리거나, 모든 법을 원만히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음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바위가 '만다라'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특히 북쪽면에 그려진 탑은 9층과 7층인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뿐만 아니라 추녀 끝에 달아 놓은 풍경까지도 신라시대에 세운 목탑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로써 황룡사 구층목탑의 모습이 어떠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나의 바위 사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새겨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장인의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위대한 작품이다.

조각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이 바위의 동서남북면에 새겨져 있는 주존불은 모두가 수인이 가려져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북면의 석가여래본존불

 

 

북면의 전경

 

북면의 석가여래상

 

얼굴은 원형이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두광은 원형으로 안쪽에는 연화문, 바깥쪽에는 방사선을 표현하고 있다. 어깨는 둥글고 부드럽게 처리하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이고 양손을 감싸 흘러내리고 있다.

대좌는 연화문으로네개의 엽편을 간략하고 소박하게 처리하였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을 표시한듯 한데 옷자락에 두 손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동면 아미타여래불

 

동면의 전경

 

 

 

면의 본존불

 

 

가운데 아미타여래는 연화대좌 위에 좌상을 하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배 앞에서 두 손을 감싸 흐르고 있다. 광배는 원형으로 가운데 연꽃무늬에서 바깥쪽으로 방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오른쪽에 좌상한 분이 협시불인 관세음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본존보다 작은 체구로 작은 연꽃에 앉아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는데 얼굴을 본존불쪽으로 돌리고 합장을 하고 있다

 

 

 

동면에 있는 승상이다. 보리수나무 아래 좌정을 하고 명상에 잠겨 있는데 이 승상 역시 수인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남면의 본존불 

 

남면 전경

 

 

본존불은 얼굴이 둥글며 두광에는 사선을 그어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빛을 상징하고 있으나 얼굴은 약간의 마멸이 있어 눈과 눈썹은 윤곽만 보이고 코는 길며 입은 큰 편이다.

여래상은 이파리가 넓은 두 그루 나무(보리수) 사이에 결가부좌를 하고 연화좌 위에 앉아 계신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연꽃 이파리와 옷자락이 주름 잡혀 덮여 있는 자리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어깨의 선이 부드럽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팔을 감싸 흘러내리고 있으며 옷자락 안의 수인은 가려져 있으나 선정인으로 보인다.

 

 

남면 본존

 

수인(手印-손으로 나타내는 부처님의 약속)은 어떤 부처인지 알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되는데 탑곡 마애조상군에 조성된 불상의 특징은 불곡 감실부처처럼 수인이 모두 옷자락 안에 감추어져 있어 정확한 수인을 알 수 없다. 

(신라때에는 대개 동에는 약사여래. 서에는 아미타여래를 세웠으나 남북은 일정한 약속이 없다고 한다.)

 

본존은 연화좌위에 길게 법의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이런 형태를 상현좌라고 하며 고()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서면의 본존불

 

서면 본존불

여래상은 이파리가 넓은 두 그루 나무(보리수) 사이에 결가부좌를 하고 연화좌 위에 앉아 계신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연꽃 이파리와 옷자락이 주름 잡혀 덮여 있는 자리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손은 모으고 있으나 가사에 가려 수인(手印:손으로 나타내는 부처님의 약속)은 알 수가 없다.

 

본존의 얼굴은 원형으로 약간의 마멸이 있어 눈과 눈썹은 윤곽만 보이고 코는 길며 입은 크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팔을 감싸 흘러내리고 있다.

 

이 불상군의 동, 남, 북면의 불상에는 모두 원형 광배를 새겼는데 특이하게도 서면의 여래상은 보주형 광배를 쓰고 있다. 광배의 안쪽에는 연화문이고 바깥은 타원형의 연주문이다.

  

 

 

 

탑곡 제1사지 마애조상군의 불상  

 

 

탑곡 제1사지 마애조상군 전경

 

탑곡 입구의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탑곡 제1사지 마애조상군은 가로 7.5m 세로 3.9m의 자연 바위의 동면과 남면에 부처상, 보살상, 5층탑, 식물형태 등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전면 왼쪽에 있는 오층탑은 전체가 선각이나 각의 깊이가 약하며 바위의 마모현상으로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아 광선의 영향을 잘 받아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

 

그러나 전국에 몇 개 있지 않은 신라의 마애탑이 조각되어 있어 그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전각과 마애불

 

전면의 오른쪽에 있는 전각 안에 부처상이 있다

전실 지붕에는 둥근모양을 조각해 놓았으며 전실의 기단부분에는 작은 네모형태로 이단으로 표현한 점이  

특이하다. 전실 안은 천개를 표현한 듯 화려하다.

전실 안에 좌정하고 있는 부처도 인접해 있는 탑곡마애조상군의 불상처럼수인이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형태이다

 

부처상과 전각은 선이 굵고 새김이 깊어 비교적 뚜렷하여 불상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잎모양의 형상도 비교적 뚜렷하나 그외의 인물상들은 얼굴의 윤곽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동남산 북부에 집중되고 있는 수인이 가려진 불상들은 모두 7세기 전반, 중반에 조성된 것이며, 탑곡마애조상군의 주존불에는 모두 목에 삼도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ㅡ 다음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