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자료 (2)

2015. 3. 27. 17:46들꽃다회

 

 

 



 
경주 남산 자료(2)
 
 
칠불암의 발견과 ‘황법련화공덕비’ | * 경주 남산
솔뫼 2012.11.30 10:34
  

 

      

칠불암의 발견과  ‘황법련화공덕비’

 

 

칠불암 마애조상군

 

 

   칠불암은 경주 동남산 끝머리 봉화골에 있는 칠불암 마애조상군을 말한다

이곳에는 통일신라기인 8세기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불상이 마애불로 남아 있다

뒤편 큰바위면에 본존불과 양 협시불, 앞쪽 바위에 돌아가며 네개의 불상, 해서 모두 일곱분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의 장대한 규모 그리고 이 곳에서 출토된 경석편(經石片),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볼 때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거대한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 칠불암의 경내 건물로는 요사채를 겸한 암자 1채와 삼성각(三聖閣)이 있을 뿐이다.

 

   암 불상군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200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2일 '국보 제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으로 명칭을 바꾸어 승격,변경 되었다

 

 

황법련화공덕비(黃法蓮花公德碑)

 

 

   그런데 칠불암 마당 한구석에는 ‘황법련화공덕비(黃法蓮花公德碑)’이라고 쓰인 작은 비가 초라하게 서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앞을 자주 지나건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 비석의 주인공 황법연화(黃法蓮花)란 누구이며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무엇일까?

 

   칠불암 아래 남산리에 ‘황(黃) 씨’라는 성을 가진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1930년대의 어느 봄날, 황할머니는 산나물을 캐기 위하여 이곳 봉화골을 찾아 들었다.

한참동안 산나물을 찾아 헤메다가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잠시 쉬기 위하여 산 능선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 때 잡목과 칡넝쿨에 가려진 숲속의 큰 바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불상의 머리를 발견하였다

수풀을 헤치고 좀 더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한 분이 아닌 일곱 분의 부처님을 접견할 수 있었다. 황할머니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제자리에 엎드려 108배를 하고는 황급히 동네로 내려와 집안 식구들에게 전하였다

이튿날 황할머니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낫이랑 연장을 갖고 다시 올라갔다. 불상근처를 제초하고 주변의 잡목을 제거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런 후 아들과 함께 바로 옆에 작고 초라한 암자를 짓어 살면서, 석불을 닦고 손질하며 정성을 다하여 칠불상을 모셨다. 그리고 법화연이라는 법명도 가지게 되었다

관계 관청에도 이 사실을 알려 그 때부터 일곱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여 ‘칠불암’이라 불리어졌으며 일제에 의해 주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졌다

 

   그후 관리하던 황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들 김만춘이 관리하다가 1973년 작고하고 지금은 비구니스님 두분이 불도를 닦으며 암자를 관리해오고 있다.

황할머니는 죽어서도 멀리가지 못하고 이 근처 서남쪽 산기슭에 묻혀, 항상 칠불암을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님이 사시던 집은 아랫마을 염불사지 곁에 있는데 손자 김덕봉씨가 살다가 몇년전에 세상을 뜨고, 현재 그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칠불암의 외국인 비구니스님이 그린 기와그림

 

 

   우연히 민간인의 눈에 띠어 수풀 밖으로 나온게 된 칠불암마애조상군은 불심의 도량으로, 등산객의 휴식터로, 문화재의 보고로 남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몇년 전 석축 보수공사 때에는 일제 때 만든 칠불암 문화재 표지석이 나와  마당 한쪽에 보관돼 있다.

 

 

신라석불의 표본-미륵골 보리암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전경

 

   탑곡 입구에서 남쪽으로 600m 정도 문천변 도로를 따라 오다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서 남산으로 들어오는 도로인 남산고적로와 만나는 곳이 미륵곡(彌勒谷) 입구이며 마을 이름은 갯마을이다.  옛날 나룻배가 닿던 곳이라 한다

마을의 남쪽으로는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가 있다. 갯마을을 지나 산 기슭 대나무 밭 북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약 200m 올라 가면 아늑한 곳에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보리사(菩提寺)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과 50대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이 절은 두 왕릉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 신라시대부터 '보리사(菩提寺)'라 불리워 왔음을 알 수 있다.
절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마애여래좌상, 삼층석탑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역 밖으로 마애여래좌상이 자리하는 등 통일신라시대에도 사역은 꽤 넓었던 듯하다.
새로 조성된 축대 앞에 뒹굴고 있는 길이 156㎝, 너비 45㎝, 두께 26㎝의 장대석과 석조여래좌상 주변의 기단석 일부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보리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사로 창건 당시의 가람 형태를 알 수 없다. 특히 최근 대대적 사역 정비를 하고 탑을 복원했는데, 오래 전에 조사되었던 여러 자료와 비교할 때 원 위치를 많이 유실시킨 듯하다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

 

 

 

 

   법당 남쪽 위에 육중하고 웅장한 바위들을 배경으로 석조여래좌상이 높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항마촉지인을 한 채 동쪽을 보고 앉아있다.

이 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고,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석불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여래좌불이 지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어 불상을 처음 연구하는 이에게는 좋은 자료가 되는 불상이다

 

   불상이 위치한 곳은 보리사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장소로서, 현 법당이 자리한 곳보다도 더 동남쪽으로 올라 제법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재(石材)는 광배석 1매, 신체석 1매, 대좌 4매(지대석 1매, 상대복련좌 1매, 간주 1매, 하대양련좌 1매)로 총 6매의 별석(別石)으로 되어 있다.

 

 

 

 

 

 

   육계가 높은 머리는 이중(二重)으로 표현된 나발(螺髮)이 덮여 있는데 머리와 얼굴 경계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여 깔끔하다. 포물선으로 약간 치켜 올라간 긴 두 눈썹사이엔 큰 광명을 비추는 백호의 흔적이 패어져 있으며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에는 아래를 향한 눈, 적당한 크기의 코, 미소를 머금은 입 등이 잘 조화되어 균형있고 이상적인 얼굴을 이루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어깨까지 드리워졌는데, 목에는 세 줄로 주름이 새겨져서 부드럽게 몸체와 연결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머리 크기에 비해 신체는 빈약한 편이며 특히 오른쪽 팔과 손, 결가부좌한 두 발은 가늘고 길게 표현되어 있다.

비대하지 않은 단정한 신체는 목에 삼도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내려 항마촉진인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결과부좌한 발 위에 올려놓고 있다.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는데 옷주름은 가지런한 층단(層段)을 이루며 신체 각 부위를 감싸고 있으며,가슴 위에는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내의(內衣-승기지)가 보이고,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뜨려진 옷자락은 가슴 부분에서 옷깃 속으로 살짝 접혀 들어가 있다.

 

 

 

 

 

 

 

 

   불상은 사람의 형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모습에는 종교적인 이상이 가미되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서른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32길상이라 하는데, 그 중 15번째가 '장광상'이라 하여 부처님의 몸에서는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진다고 하였다.  불상 뒤에 세우는 넓은 광배는 바로 이 32길상 중 장광상을 나타낸 것이다.

 

   화려한 장식을 한 광배는 외곽 상단을 귀죽임하여 두겹의 배모양(二重舟形)으로 처리하였고, 그 안은 화문과 화염문, 화불 등으로 채워져 있는데 원래 상단이 파손되어 옆쪽에 놓여져 있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사라진 윗 부분은 신재를 붙인 것이다   

 

   보리사 여래좌상의 광배는 여섯송이의 연꽃으로 장식된 두 줄기의 주연선을 불상 몸체의 뒤에 타원형으로 돌려 신광을 나타내었고, 또 다섯송이의 연꽃으로 장식된 두 줄기의 주연선을 머리위에 원형으로 돌려 두광을 나타내었다.
신광과 두광에는 구불구불 뻗어 오른 줄기와 잎사귀사이의 간간이 핀 일곱송이의 연꽃위에 작은 여래불들이 새겨져 있다. 그 부처들을 화불이라고 한다.

   주연선 마디 마디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연꽃처럼 깨끗한 정토가 된다는 뜻이고, 간간이 작은 화불들을 배치한 것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뜻이라 한다.

   주연선 바깥 둘레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새겨져 있는데, 불길은 부처님의 빛과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석불좌상의 광배는 화려함과 정교함에 있어 우리나라 석불광배 중 손꼽히는 것인데, 아깝게도 깨진 윗부분 조각이 없어졌다. 후세에 다른 돌을 다듬어 보수하였으나 옛 모습은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대좌는 지대석 위에 복련의 연화대좌를 놓았고, 그 위는 팔각받침을 3단으로 마련한 후 우주가 각출된 팔각 간주를 세운 후 앙련의 상대석을 얹어 놓은 구조이다. 

   이 상대석 역시 아래에서 간주와 만나는 부분에는 2단의 팔각 받침석을 마련했는데, 세겹으로 핀 큰 연꽃송이로 되어 있는 앙련(仰蓮)의 연화문은 단판(單瓣)이면서 중층(重層)으로 각출시켜 넉넉하게 마련하였다.
이 광배(光背)는 상단이 반파(半破)되었으나 최근 보존처리를 위한 복원작업을 거쳐 견고하게 복원되었다.

신체와 광배 크기에 비해 대좌는 높지 않아 불상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석조여래좌상 광배 뒷면의 약사여래상

 

   이 석조여래의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가 새겨져 있다. 약사여래는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이고 석조여래는 반대편에 있어 동방유리광세계의 반대편은 서방극락세계이기 때문에  이 석조여래좌상은 극락세계의 주존불이신 아미타여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불상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으로 앉아있기 때문에 석가여래로 불러야한다고 하는 이도 있다. 항마촉지인은 부처님이 성도하실 순간의 수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불상에는 수인에 일정한 규정 없이 자유롭게 표시하는 예가 많을 뿐 아니라 석굴암 이후로는 석굴암 부처님을 모방하여 항마촉지인상으로 조성된 불상들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중 어느쪽을 따라야할 지 난감하다 

 

불상은 광배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4.36m, 불상의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 몇년 전 KBS에서 방영한 내용에 의하면

이 불상의 얼굴을 스캔하여 경상도 경주지역의 사람들의 얼굴과 비교 조사한 결과 골격구조나 형태가 거의 일치하였다고 한다.

 

 

마애약사여래좌상

 

 

 

 

약사여래의 탁본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는 불상 높이가 1.27m되고 무릎넓이가 1m가량되는 거의 선각에 가까운 얕은 부조의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이 새겨져 있다.

두 겹으로 핀 앙련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앞에 들어 시무외인이나 설법인을 취한 것 같고 왼손은 약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얹고 설법하는 모습이다.

   마모가 심하여 얼굴 등 세부 모습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낮은 육계의 방형 얼굴로 귀는 길게 늘어뜨려져 어깨에 닿았다.

머리 위에는 둥글게 두광이 그려져 있고 몸체 뒤에는 타원형으로 신광이 새겨져 있다. 그 둘레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연화대좌 밑에는 피어 오르는 구름이 새겨져 있다

   통견으로 입은 신체는 앞면의 불상에 비해 풍만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신 주위에는 선각의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다.

 

광배 오른쪽 아래의 선각비천상

 

   특이한 점은 광배의 오른쪽 어깨 아래부분에 선각 비천상 1구가 앉아 있다. 마모가 심하여 세부표현을 확인할 수 없으나, 연화 대좌 위에서 양팔을 벌려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양다리는 결가부좌를 취하고 있다. 머리 위로 길게 뻗은 천의자락은 하강 자세의 비천으로 보인다.

왼쪽의 같은 위치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마모가 심하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


마애보살입상(또는 판석보살입상)

 

  보리사 불상 뒤편의 작은 축대 사이에 판석 3매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둘은 미완성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는 정도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포개어져 있어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조사에 의하면 길이 1.2m∙폭 70㎝ 가량되는 판석에 2구의 보살상이 나란히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둥근 두광이 있고,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른쪽 다리에 힘을 뺀 자세이다.

  두 손은 가슴부분까지 올리고 있으며 천의자락은 좌우로 뻗친 모습이며 끈은 배 앞에서 양쪽으로 매듭을 짓고 그 나머지는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문명대, 1989, '경주남산 불상실측조사연구', 한국미술사연구소, p.20)

 

   정비 복원된 현재의 사찰에는 마애보살입상을 직접 볼 수가 없다. 이 마애보살입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조여래좌상 오른쪽의 큰 바위 주변에 축대석(築臺石)을 이용하여 세워져 있었으며, 그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 축대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자리에 건물과 축대 모두가 없고 판석들은 다른 석재와 함께 담쪽에 엎어져 있어 확인이 어려운 형편이다아마 사찰측에서 보관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기존 자료에 의하면 판석은 모두 3매로서 폭 70㎝, 높이 120㎝ 크기이며 그 표면에 보살입상들이 각각 조각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마애상들은 본래부터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던 듯하며, 그 일부가 사진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옛보리사 전경

 

복원 전의 석조여래좌상

 

광배 뒷면의 약사여래좌상

 

석조여래불의 옛모습

앞에 보이는 탑은 현재 대웅전 앞으로 이전하여 복원을 하였다

 

※ 이 석조여래불처럼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곳은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경북대학 소장 석불광배 등이 있으며, 안강 근계리 석불입상의 광배 뒷면에는 삼층탑이 새겨져 있고 그 삼층석탑의 기단에 좌불상이 새겨져 있다. 

경북 구미 선산의 문수사 궁기동석불좌상에도 광배 뒤에 좌불상이 있다

 

 

 

 

경북 구미 선산의 청량산 문수사에 있는 궁기동석불좌상

(바로가기)http://blog.daum.net/kinhj4801/15959857    

 

 

안강 근계리석불입상

(바로가기)http://blog.daum.net/kinhj4801/15959829    

(신라의 마애탑은 어디어디에 있을까?) 

 


 

삼층석탑과 탑재

 

 

 

 

 보리사 경내의 복원된 삼층석탑

 

 석조여래상 앞 담장 옆에 있는 탑재들

 

 

 

   원래 보리사 경내에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가지고 1993년 대웅전 앞에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탑은 이중기단으로, 지대석은 장대석 2단으로 층을 이루었고, 그 위로 탱주 1주가 있는 하층기단면석이 놓여졌다. 하층기단갑석은 그 경사가 급하며, 상면은 호각형2단으로 상층기단면석받침을 마련하였다. 상층기단면석에는 탱주가 표현되어 있고, 상층기단갑석도 하층기단갑석과 마찬가지로 경사가 있으며 상면에는 호형 1단 탑신받침을 마련하였다.

탑신석은 모두 우주가 있고, 특히 1층탑신석 상면에는 사리공이 마련되어 있다.

 

   탑의 높이가 비교적 낮고, 갑석 상면에 경사가 있으며, 옥개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9세기 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복원된 탑 이외에도 탑신 별석받침, 옥개석 3매, 네 면에 天人의 부조좌상(浮彫坐像)을 하고 우주가 있는 작은 탑신이 있었다고 하나들 탑재는 현재 경내에는 없고, 창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석조여래좌상 앞 담장 옆에 있었는데 요즘은 보이지 않는 삼층탑

 

  

보리사 마애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제193호)

 

   보리사 주차장에서 보리사로 오르다가 왼쪽에 표식판이 있다. 이 안내판을  따라 오르거나 석조여래좌상에서 남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1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높이 2m정도의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바위벽을 얕게 파 높이 1.5m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약 0.9m 정도의 작은 부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원만한 얼굴에 양쪽 뺨 가득히 자비 넘치는 미소를 간직하고 앉아 있는 불상은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거친 편이다. 특히 옷은 두꺼우며 옷자락의 1단은 두 무릎사이에 늘어지고 있는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을 그은 것처럼 얕게 새겨 매우 독특한 조각수법을 나타낸다.

   보리사의 석불좌상보다 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1.1m에 지나지 않으나 발아래에는 급경사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갖도록 하고 있다.

불상 앞에서 내려다보면 망덕사지를 비롯한 벌지지와 사천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이와 너비가 약 2.4m이며 약간 앞으로 기운 바위 면에 연잎 모양의 광배를 감실처럼 움푹하게 파고 그 안에 상당히 얕은 새김으로 불상을 부조하였다.
   낮은 육계가 있는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이 표현되고 얼굴은 두툼하고 세밀하게 하여 자비 넘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두 귀는 옷깃에 닿을 듯 내려왔으며  목에는 3개의 선으로 나타내는 삼도(三道)를 두 선으로 표현하였다. 옷은 통견으로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가슴을 일부 드러내고 속옷의 윗단만 경사지게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가는 음각선으로 간단하게 표현하였으며, 대의 안에는 사선의 내의를 표현하였다.

 

   양 손은 탑곡마애조상군의 부처들 처럼  옷자락으로 가리고 있어 정확한 수인을 확인할 수 없다. 

   발이 표현되지 않은 양 다리는 특이하게 가운데로 향하는 옷선 몇 개로 처리하였다. 아래쪽에 흐릿하게 표현된 연꽃대좌(臺座)는 중판의 연화를 앙련(仰蓮)으로 표현하였으나 앞 바위의 윗면에 가리어 생략된 듯하다

바위 크기는 높이가 약 2.4m∙너비 약 2.4m 정도이며, 감실형 전체 높이는 152㎝∙너비 85㎝이다.

상은 높이 112㎝∙얼굴너비 24㎝∙얼굴길이 29㎝∙어깨너비 48㎝∙무릎너비 74㎝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앞에서 내려다본 배반들

멀리 낭산과 사천왕사지, 효공왕릉이 보이고 들 가운데 숲에는 망덕사지가 있다.

망덕사지 남쪽으로 문천이 흐르고 문천에는 박재상과 관련있는 벌지지가 보인다

바로 아래의 큰 건물은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소이다

 

 

 

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 경주 남산의 재발견

 

 

경주 남산 삼릉골과 용장골의 유적지

 

 

   남북 8㎞, 동서 4㎞. 경북 경주의 진산, 남산(495m)의 체격입니다. 산 치고는 작고 야트막한 편이지요. 한데 덩치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깊고 또 넓습니다.

과장 좀 보탤까요. 딱 '나무 반 유물 반'입니다. 확인된 절터만 150곳이고 불상은 129기, 탑은 99기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체 문화유적은 694개소이고요. 고(古)신라부터 통일신라 이후, 심지어 고려시대 유물까지 빼곡합니다. 산 전체가 절집이자 지붕 없는 박물관인 셈입니다.

그러니 국립공원으로 지정(1968년)된 건 당연하고,유네스코 세계문화류산 에 등재(2000년)된 것도 어색할 게 없지요.

여름방학을 앞두고 아이들과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남산을 프로그램에 넣는 걸 잊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경주 남산(南山)은 옛 월성 왕궁의 '남'(南)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산의 이름도 이 같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 대릉원 등 문화재가 밀집한 도심이나, 불국사가 깃든 토함산 등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지역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남산이 늘 관광객들의 시선에서 한발짝 비켜 섰던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산엔 신라의 모든 것이 새겨져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품은 우물 나정(井)과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각각 남산 자락에 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화산으로 치자면 남산은 활화산이다.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다. 2007년에도 남산 열암곡에서 대형 마애석불이 발견됐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발견될지 모르니 '남산에선 구르는 돌 하나도 문화재급'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겠다.


 


 

 

●절터 150곳·불상 129기·탑 99기…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남산을 둘러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표도 두 가지 종류로 세워져 있다. 노란색 글씨는 문화재 탐방 코스, 흰색은 단순 산행 코스다. 가장 일반적인 건 삼릉~용장골 코스다. 바둑바위와 금오산 정상을 찍고 용장계곡으로 내려온다. 이 코스에선 '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한 문화재와 만날 수 있다. 단순 산행이라면 3시간 남짓 걸리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 문화재를 들여다보자면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들머리는 삼릉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잠든 봉분 셋이 연달아 솟아 있다.

삼릉을 찾게 하는 건 주변의 솔숲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들이 빼곡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솔숲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이다. 남산 일대 상당수의 불상들이 그렇듯, 이 불상도 목과 얼굴 부분이 없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의 희생양이었을 거란 게 유력한 추정이다. 인근 계곡에 쳐박혀 있던 것을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얼굴은 잃었지만, 불상의 자태는 당당하다. 넓은 어깨와 가슴, 선명한 옷 매듭 무늬 등에선 기백이 넘친다. 경주남산연구소의 김구석 소장은 "7~8세기 신라 초기의 불상들은 이처럼 가슴이 넓고, 목 주름 등이 박력있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라며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허리 부분이 잘록해지고 가슴의 윤곽도 좁아지는 등 미려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석조여래좌상 위엔 아담한 크기의 마애관음보살이 서 있다. '미스 신라'라고 불리는 불상이다. 키 154㎝로 아담하고, 입술은 루즈를 바른 듯 붉다. 신라 석공이 붉은 빛 도는 돌 부분에 부러 입술을 새겼다니, 선인들의 해학에 설핏 웃음이 새어나온다.

 

동남산의 칠불암

 


●일곱 부처와 비승비속의 신선을 만나다

   큰 바위에 아미타부처 여섯 분을 새긴 선각육존불을 지나면 선각여래좌상이다.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산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어린' 마애불상인 셈. 코는 두리뭉실하고 입술은 썰면 반근은 족히 나올 만큼 두툼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은 실실 웃고 있다. 부둥켜 안고 있는 바로 옆의 부부바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계신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남산에서 얼굴이 가장 잘생겼다는 삼릉계 석불좌상과 기골이 장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면 바둑바위에 닿는다. 대릉원 등 경주의 주요 문화유적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 포인트다. 남산에 들면 최소한 두 번은 놀란다. 그 작은 산에 유물이 빼곡한 것에 놀라고, 암릉이 많은 것에 또 한 번 놀란다. 선 굵은 바위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데,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불상과 탑들이 이 같은 풍경과 기막히게 잘 어우러져 있다는 거다. 하나하나가 '있을 만한 곳에 있'다. 다리쉼을 하려는 고갯마루, 한 굽이 돌아 시선이 닿는 암벽마다 어김없이 유물들이 세워져 있다. 이는 유물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좋지만, 몇 발짝 떨어져서 완상하는 게 더 낫다는 뜻과 맥이 닿는다.

   금오산(468m) 정상을 찍고 용장계곡으로 향한다. 골이 깊어질수록 풍경도 속도를 낸다. 하산길의 으뜸 명소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높이는 4.5m. 경주사람들은 이 탑을 '한국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부른다. 남산 자체를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원래 탑을 세울 때 기단을 쌓는데 이 석탑은 별도의 기단을 세우지 않았다."며 "해발 380m만큼의 산을 기단 삼았으니 국내 최고 높이의 탑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산길에 가끔 뒤를 돌아보시라. 늘 이 석탑이 보일 만큼 풍경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삼층석탑 아래 삼륜대좌불도 인상적이다. 원반 모양의 세 돌받침(삼륜대좌) 위에 부처를 모신 특이한 구조다. 삼륜대좌불 아래는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사터다. 김시습은 용장사에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돌아봐도 나무랄 데 없다. 한데 기왕 나선 길, 봉화골의 칠불암까지는 다녀오는 게 좋겠다. 남산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 가운데 유일한 국보(312호)다. 다만 남산 동쪽의 통일전이 들머리여서 서쪽의 삼릉~용장골 코스와 하나로 묶자면 체력이 달릴 수 있다. 통일전에서 왕복 3시간 남짓 걸린다. 칠불암 바로 위는 신선암 마애불이다. 결가부좌를 튼 대부분의 불상과 달리 구름 위에 한 쪽 발을 떠억하니 담그고 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호방한 형상이다.

 

 

 

삼릉가는 길의 창림사지 삼츰석탑

 


●신라의 건국 신화와 함께… '삼릉 가는 길'

   삼릉~용장골 코스가 산행을 겸한 답사길이라면 '삼릉 가는 길'은 남산 아래 자락을 따라 걷는 트레킹 길이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나정 등을 끼고 있어 신라의 건국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복원 공사 중인 월정교에서 삼릉까지 약 8㎞ 거리지만 코스의 중간쯤인 나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담긴 우물터다. 박씨 문중의 제각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 팔각건물지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발견됐다. 경주사람들은 나정이 박혁거세의 신궁(神宮)터라고 믿고 있다.

박혁거세 신화 또한 이 대목에서 역사로 굳어진다. 신궁의 실체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길은 1980년대까지 실제 사용됐던 남간 마을의 신라 시대 우물과 신라의 첫 왕궁터 창림사지, 배리 석불입상, 포석정 등을 거쳐 삼릉에서 끝난다.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와 오릉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35번 국도를 타고 5분만 가면 삼릉이다.

 KTX는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2시간 10여분이 소요된다.

경주남산연구소(www.kjnamsan.org)는 다양한 남산 답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 무료이다. 777-7142

 

 

***************************************************<서울신문 /경주 손원천기자  2012.7.5>

 

 

 

 

<관련자료>

 

삼릉과 삼릉계제1사지의 유적http://blog.daum.net/kinhj4801/15960363

삼릉계 제2사지의 유적 :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376

삼릉계 제9사지 상선암절터와 주변:http://blog.daum.net/kinhj4801/15960381

 

▶ 김시습이 머물렀던 용장사지 :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389

▶ 일곱부처가 한자리에-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419

 

 ※   남산에 관한 모든 자료는 본 블로그의 카테고리 "경주남산의 유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ㅡ 다음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