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 12:54ㆍ들꽃다회
<신라의 탑 1> 신라의 마애탑 * 석탑. 불상. 사찰,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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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올렸던 것인데 최근 발견한 마애탑이 더 있어 수정하여 올립니다>
신라의 마애탑은 어디어디에 있을까?
신라불교는 대체적으로 민속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무속신앙의 기원처인 바위 곳곳에 부처님을 새기고 촛불을 켜서 소원을 빌며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로 귀속하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남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바위에는 부처님이나 보살 또는 승려를 새긴 마애불이 대다수이며(문화재청 집계-134점) 탑을 새겨 놓은 마애탑은 극히 소수이다.
('마애'라고 함은 '바위에 새김'이라는 뜻이므로 '마애탑'이란 '바위에 새겨놓은 탑'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며 마애불이란 바위에 새겨놓은 불상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마애탑은 4곳의 5기, 배면불의 일종으로 불상 광배의 뒷면에 새겨진 곳이 1곳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종을 새겨놓은 마애종이 1기(경기도 안양 중초사지)가 있으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신라말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 외 하동 금오산의 석굴에 마애불과 마애구층탑이 있다고 하는데 신라의 마애탑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1.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의 목조 쌍탑
"우리 조상들은 불교 공인 이전부터 자연을 신앙해 왔다. 그 때문에 우리 종교예술은 자연과의 조화에 그 생명을 두고 있다. 자연을 섬기는 우리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하나로 어우러져 나라를 지키려는 정열과 꿈으로 가득 차서 신비로운 유적으로 남아난 것이 남산 탑골 부처바위인 것이다."
- 향토사학자 윤경렬 선생(작고)의 <경주 남산의 탑골> 중에서.-
탑곡 마애조상군의 남면
경주 남산의 동남쪽 탑곡에는 큰 자연암석에 불상 27개와 9층탑, 7층탑 등이 새겨진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일명 '부처바위'가 있다.
부처바위는 동서남북 4면에 불교조각을 새겨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를 나타낸다. 부처님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각기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부처 바위의 북면은 5.7m 너비에 9미터 높이로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바위면은 석가여래께서 여러 보살과 나한들에게 설법하시는 영산 정토를 새겨 놓았다.
벽면 중앙에 석가부처님이 앉아 계시고, 머리 위에는 천개가 있다. 석가여래 앞 양쪽에 목탑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목탑 앞에는 천마를 닮은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보고 있다.
북면과 동면 삼층석탑이 함께 보인다
북면 전면
동탑 석가여래 서탑
북면의 동쪽에 있는 탑은 땅에서부터 2m 높이에 너비 2.05m 되는 이중 기단을 새기고 그 위에 9층으로 된 목탑을 새겨 놓았다.
첫 층은 비교적 높고 다음 층부터는 탑신이 낮으며 추녀의 넓이와 탑신의 높이는 올라 갈수록 조금씩 축소되어 9층지붕이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9층 지붕위에는 1.77m의 상륜부가 노반, 복발, 앙화 위에 수없이 많은 풍경이 달린 다섯 겹의 보륜, 수연, 용차, 보주가 정연하게 솟아 있다.
동 탑
서 탑
옥개의 귀마다 풍경이 달려 있고 다섯 겹의 보륜에도 수없이 많은 풍경이 달려있어 찬란하다.
각 층마다 두 개의 창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 개의 창문에서 열린 쪽은 더 깊게 새겨 단순한 조각에 명암으로 입체감을 살린 것도 신라인의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쪽에 있는 탑은 7 층으로 새겨져 있다. 층수가 다를 뿐, 모양이나 조각 수법은 동쪽의 탑과 같다.
쌍탑 구조이면서도 동쪽보다 두 층이나 낮게 새긴 것은 바위면이 갖는 제한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천연바위에 얇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했지만 마치 실물사진을 보는 듯 생생한 탑 모양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석탑은 신라시대 만들어진 수많은 목탑의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9층 목탑 모형도 이 부처바위 쌍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각 층의 추녀 끝에는 풍탁을 달아 더욱 화려하게 장식을 했다
약간 검게 보이는 부분이 좀 더 깊게 파서 음영으로 창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나타내었다.
2. 경주 남산 탑곡 제1사지 마애조상군 오층탑
경주 동남산 탑곡(塔谷)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길 안에 현존사찰인 월정사가 있고, 월정사 뒷쪽의 대나무 숲을 지나 50m 정도 올라가면 탑곡 제1사지 마애조상군이 있다.
가로 7.5m 세로 3.9m의 자연 바위의 남동면과 남서면에 두 곳에 부처상, 보살상, 5층목탑, 식물 등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5층 목탑이 표현된 부분은 바위의 전면 좌측에 있다.
탑 전체가 선으로 새겨져 있으나 각의 깊이가 약하며 바위의 마모현상으로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다.
광선의 영향을 잘 받아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
불과 100여m 거리에 있는 탑곡 마애조상군과는 규모나 조각수법이 대단히 미흡하다.
전각 안의 부처상이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상은 선이 굵고 새김이 깊어 비교적 뚜렷하다.
오층탑 부분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 부분
식물조각이 있는 부분
3. 경주 백율사 마애삼층탑
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異次頓)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퍼하여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자추사(刺楸寺)로서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이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곧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백율사 대웅전 앞은 변변한 석등 하나 조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앞은 높은 암벽으로 막혀 있다.
절 자체가 단탑이나 쌍탑을 조성할 만큼 여유있는 면적을 갖고 있지 못하나 신라인들은 이러한 자연을 교묘히 이용하여 불심을 높였으니 절 앞에 놓여야할 석탑을 바로 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바위에 새긴 것으로 보여지지만 신라인들은 바위 속에 있는 석탑을 찾아 밖으로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탑의 높이는 320cm이고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상륜부를 갖춘 마애탑으로서 독립된 탑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것이다.
그런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마모되어 기단부와 1층탑신석 외의 탑신과 옥개부분은 뚜렷하지 않으나 형체는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며 상륜부는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층 기단 위의 삼층석탑에는 옥개받침이 네 개이며 층급간의 비례도 정형적인 신라탑과 같다.
탑의 중앙부에는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는 없으나 글씨를 새겨 탑을 파손해 놓았다.
대웅전 맞은편 암벽에 새겨진 삼층탑
상륜부와 삼층, 이층의 옥개석이 화연히 보이고 누군가가 새겨놓은 한자가 보인다
상륜부
옥개석
남산의 마애탑은 목탑을 양각한 것으로 구조나 형식이 석탑 형식과는 다르며 봉화 북지리의 삼층석탑은 체형을 갖추지 못한 조잡한 형태의 탑인 것에 비하면 이 탑은 완전한 신라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더욱 중요하게 생각된다
안강 근계리의 입불상 광배 뒷면에 새겨져 있는 삼층석탑은 윗 부분이 파손되고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구별이 어렵다.
'백률사에는 방주형(方柱形) 사면보탑(四面寶塔)이 있었다.
본래 백률사 입구 전면의 요사 축대 위에 놓여 있던 것으로 여러 개였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3개만 남아 동국대 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보관되고 있다. 높이 56㎝, 너비 31㎝의 화강암으로 된 네모난 기둥 형태의 보탑으로 각 면마다 양각된 탑신을 조각하고 있으며 탑신에는 실제의 석탑과 동일하게 옥개석 받침을 3단으로 하고 각 옥개석 끝 부분에는 풍경까지 조각되어 있어 그 정교함이 뚜렷한 유물이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5) '
그러나 위에 적힌 세 곳의 박물관 유물 검색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도 검색되지 않았다
4, 봉화 북지리 지림사 마애탑
봉화 북지리 마애삼존불과 마애탑은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의 지림사(智林寺) 경내에 있다.
같은 경내에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거대한 국보 제 201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으며 마애여래좌상에서 50여m 떨어진 원통전의 뒤편 산기슭의 큰 바위에 삼존마애불과 승상, 삼층석탑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과 승상의 둘레는 깊게 파내어 감실을 만들어 모셨고 마애삼층탑은 감실없이 바위면에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렇듯 복합적으로 부처님 세계가 조성된 경우는 드물어 주목할 만하다
마애탑은 삼층이며 단층으로 표현된 기단부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탑이 삼층인 점 그리고 탑신부의 굵기가 목탑에 비해 가는 점. 삼국시대의 목탑들이 삼층인 것은 없었으며 신라나 통일신라를 통털어 석탑들은 대개 삼층으로 조성됐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마애조상군의 조성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애매하기는 하지만
석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마애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주변의 불적을 감안하면 신라시대 말 까지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마애삼존불의 고졸한 모습이나 감실을 사용하여 본존불을 모신 점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애탑과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풍화가 심해 날이 갈수록 삼존불의 모습이 쇠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며 바로 그 곁에 국보 제 201호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까닭에 푸대접을 받아서인지 변변한 안내판조차 없어 서글프다.
마애탑과 같은 바위에 새겨놓은 삼존불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201호
국보 제 201호의 마애여래좌상
(주위의 흰 종이는 정비보수를 위해 붙여놓은 번호표이다)
불상주위의 화불
같은 경내에 있는 국보 제 201호의 마애여래좌상이다.
이 불상(佛像)은 원래 감실(龕室)안의 본존불(本尊佛)로 조성된 보기 드문 신라(新羅)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이다
넓은 무릎과 무릎을 덮어내린 옷자락의 소박한 상현좌(裳縣座), 불상 주위에 새긴 옛스러운 화불(化佛)들과 함께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소력(彫塑力) 때문에 실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기로 측정되고 있다.
북지리반가사유상
마애불좌상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 마애불좌상 옆에 놓여 있던 것을 1966년 경북대학교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 1.6m 가량에 상반신은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과 다른 돌로 만든 둥근 연꽃무늬 발 받침대만이 남아 있지만,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며 크기는 세계 최고이다
5. 대구 북구 읍내리 안양동 마애구층석탑
(이 마애탑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이름이 없으므로 필자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원래 칠곡군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대구시 북구에 편입되었으며 자연부락명이 안양리입니다.)
대구시 북구 읍내리 안양마을에 이름없는 불상군이 있다.
행정상의 지명이 대구 북구이나 옛 칠곡군에 속했던 마을로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서쪽으로 약 3km쯤 들어가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 앞산 북쪽면에 병풍을 쳐놓은 것 같이 w형의 바위가 있고 이 바위의 각 면에 불상, 마애탑, 관음보살상, 성중비구.신장상 등 18구가 조각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특이한 불상군으로서 경주남산 탑골마애조상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마애불(부처 13기, 마애탑 1기)이 조각되어 있는 곳으로 체계적인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리라 보며 보호각이나 산줄기에서 흘어내리는 낙수에 대한 방비책이 없어 마멸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므로 빠른 정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할 가치가 높은 불상군인데도 불구하고 안내판조차 없어 딱하다.
불상군이 새겨져 있는 바위 전체의 모양
중앙의 볼록 튀어나온 모서리에 본존 마애불이 있고
왼쪽 협시불3기 라고 적힌 부분에 관음보살상과
2분의 성중비구가 있다
오른쪽 협시불2기 라고 적힌 부분에 2기의 협시불이 선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며
작은 동그라미 친 부분에 작은 불상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왼쪽 바위면에는 구층석탑이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탑신과 옥개석의 숫자가 아홉이며 상륜부까지 선각으로 완연하게 나타나 있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전국의 신라마애탑이 몇개 안되는 시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임을 알 수 있다.
시급히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탑의 높이는 약4m정도이며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비례감이 안정되어 있다. 각의 깊이가 작고 마모가 심하여 뚜렷하지는 않으나 구분은 완연하다.
병풍처럼 생긴 바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마애불
본존불 오른쪽 1면에 있는 선각되어 있는 관음보살과 2구의 승상
위 마애조상군에 대한 내용은 본 블로그/유물유적문화재이야기/한 곳의 바위에 13명의 부처님 구층마애탑이..(2010.6.19일)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6, 경주 안강 근계리 석불입상 삼층탑
근계리의 삼층석탑은 바위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배면불인 입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것이라서
마애탑이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참고가 될까하여 함께 소개한다.
안강읍 근계2리 용운사
입불상이 있는 미륵전
근계리 석불입상
광배의 윗부분과 불구를 보수하였다
경주근계리석불입상은 안강읍 근계리 용운사의 용화전(龍華殿) 내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입상이다.
불상의 앞면을 고부조로 새겼으며 배모양의 광배를 하고 있는 입불상이다
광배의 상부와 불두가 결실된 것을 근래에 와서 시멘트로 복원하였으나 복원된 불두는 비례가 맞지 않고 더우기 백분을 발라 흉물스럽게 변하였다.
장방형의 풍만한 체구에 무릎 이하는 콘크리트로 덮여 확인할 수 없는데 아마 그 아래도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통견의 법의는 신체의 굴곡을 비교적 잘 드러내고 있으며, 양팔을 감싸고 좌우 측면으로 흘러내렸다.
하반신의 옷자락이 양 허벅지 사이에서 'V'자형으로 나타나고, 다시 다리 부분에서는 타원형을 이루며 흘러내려 다리의 윤곽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옷주름의 표현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여력을 엿볼 수 있어 제작 시기는 9세기 중엽 경으로 추정된다.
수인은 왼손은 위로 하여 가슴에 대었는데 손가락의 모양이 특이하며, 오른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여 복부 아래에 대고 있다.
광배의 뒷면
아래쪽에 좌상한 여래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나 삼층석탑의 모양은 마모가 심하여
여래상 양 옆으로 초층 답신부 외에는 정면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층 탑신에 있는 여래 좌상
광배의 옆모서리에서 보면 삼층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면으로 그려본 마애탑과 여래상
위의 색이 다른 부분이 복원된 광배 부분이다
광배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이 밋밋하게 처리되었으나, 뒷면에는 삼층탑을 조각하고, 조각된 탑의 초층탑신에 여래좌상을 새겨 넣어 매우 특이하다. 즉 탑상을 전후면에 새긴 보기드문 형식이다.
삼층탑에서 5개의 옥계받침을 확인할 수 있어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상륜부의 장식은 화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상층부로 갈수록 줄어드는 비례감이 안정되고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잘 따른 탑이다.
<찾아 가는 길>
안강 읍내에서 서쪽의 칠평천을 건너 근계 2리 마을 안길을 따라가다 길 가의 표지판을 따라 우측으로 좁은 농로를 약 15-20여분 걸어가면(승용차로는 5분정도) 작은 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 아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용화사, 왼쪽으로 가면 용운사이다.
승용차로 절의 주차장까지 갈 수는 있으나 길이 좁아 차가 마주치면 고생을 좀 해야한다. 차가 피할 수 있는 공간도 거의 없다.
7. 안강 안계리 석불좌상 뒤 석물 탑조각
이 탑 역시 마애탑이라고는 볼 수는 없으나 흔히 볼 수 없는 조각이라서 소개 할까 한다
경주시 강동동 안계리에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92호 지정된 안계리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석상은 2004년 2월 화재로 인하여 석불 일부 파손. 지붕돌도 파손되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자그만한 담장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이 석불 뒤에는 불교문화원에는 발굴을 하여 출토된 많은 석재들이 있는데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의 면석에 삼층탑이 새겨져 있다
석조여래상 뒤에 있는 용도 불명의 사면석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다른 것을 보아 탑신석이 아님은 분명하며 어떤 용도에 쓰였는지 알 수 없다)
이 면석의 앞면에는 두기의 공양상이 새겨져 있다
면석의 양쪽에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이 면석의 뒷쪽에 삼층탑과 한분의 승상(?)이 조각되어 있다.
뒷쪽에 다른 석물이 놓여 있어 면의 아래부분까지 볼 수가 없다
면에 돋을 새김이 되어 있어 삼층탑의 구분이 확실하며 별다른 탑의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면석은 안계리 석조여래가 화재가 나기 전에는 불상의 대석으로 사용되었으나 화재 후 불교박물관 측에서 일대를 발굴한 결과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석이 발굴되어 지금은 뒷쪽에 여러 석물들과 함께 놓여 있다.
화재가 나기 전 석등의 옥개석을 머리 위에 올려놓아 갓 쓴 불상이라는 애칭도 함께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이 옥개석도 옆에 놓여 있다
복원 후의 안계리석조여래좌상
화재가 나기 전의 석조여래좌상
(불전 아래 사각대좌가 보이고 머리에는 석등 옥개석을 모자처럼 쓰고 있다)
머리에 갓처럼 썼던 석등 옥개석
ㅡ 다음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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