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 전법사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外

2015. 4. 2. 18:19들꽃다회

 

 

 

 

     밀교 전법사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01/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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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다라니경. 국보 제126호.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발견 유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너비 8㎝, 전체길이 약 600㎝의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권인데 751년을 하한으로 하는 측천무후제자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로 평가되고 있다.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

내용

  밀교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힌두교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사상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 大日經≫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 金剛頂經≫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 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 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725년 선무외(善無畏)≪대일경≫을 번역하고, 753년 불공(不空)≪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밀교의 정통사상인 순밀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 뒤, 밀교는 송나라 때까지 크게 발전하여 깊은 신앙의 의지처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잡밀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계통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 보았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진언염송을 통한 밀교신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신라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성취를 위한 목적보다는 세간적 성취를 위하여, 전쟁방지 및 병의 치료와 같은 목적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신라시대의 밀교)

 

(1) 밀교 승려들의 활약과 전래교법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회향하였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밀교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밀교사상 신인비법(神印祕法)·사리탑(舍利塔)·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소재활동(消災活動:재앙을 없앰) 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라 신인비법 명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랑이 금광사를 중심으로 밀교신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자, 문무왕은 명랑에게 이를 물리쳐줄 것을 부탁했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다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더불어 신인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신인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이념과 연결되면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狼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신인비법은 원래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으로서 그 사상은 ≪관정경≫ 제7권 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5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관정경≫에서 사상적·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 觀佛三昧海經≫≪금광명경 金光明經≫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활동과 짝하여 신라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명랑의 신인비법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식은 고려시대 가서 신인종(神印宗)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혜통이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함으로써 성립된 일맥은 고려시대에 와서 총지종(摠持宗)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랑신인종의 초조(初祖)로, 혜통 총지종의 초조로 삼고 있다. 이 밖에도 의림 805년(애장왕 6) 103세의 나이로 밀교의 전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주로 순밀계통의 태장계법과 금강계법 위주로 하였다.

 


(2)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하루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동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쪽 봉우리에서는 아미타불을 수위(首位)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북쪽 봉우리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수위로 500의 아라한(阿羅漢)이, 중앙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1만의 문수보살이 각각 나타났으므로 예배를 올렸다.

   그 뒤, 보천태자만이 오대산에 계속 남아 ≪수구즉득다라니경 隨求卽得陀羅尼經≫을 매일 염송하면서 50년을 수양하였다. 이러한 보천이 말년 나라를 지키고 이익하게 할 비법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동쪽 봉우리에는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관음상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福田)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과 ≪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 천수주(千手呪)를 외우게 하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게 하고,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지장보살상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게 하고,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서대(西臺)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과 흰 바탕에 무량수불을 수위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게 하고, 수정사(水精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북대(北臺)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석가상을 모시고, 검은 바탕에 500나한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 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진여원(眞如院)으로 문수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모시고 그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36화형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600권 ≪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여,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5색·5방·5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 6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대산신앙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금강지(金剛智)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의림 등의 훌륭한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신라 오대산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신앙에 철저하였다.

따   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모두가 밀교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운동은 신라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3)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 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 창림사(昌林寺) 삼층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 법광사(法光寺)의 삼층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신앙이 다른 밀교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된 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사상을 사리탑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사상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취서사 석탑의 경우 무구정광단(無垢淨光壇)을 건립하고 밀교적 의식까지 거행하였으며, 871년에 중수한 황룡사구층탑에는 99기의 작은 탑과 함께 사리·다라니경 등을 봉안하였다.

   또한, 895년(진성여왕 9) 백성산사(百城山寺)에서는 길상탑(吉祥塔)을 세우면서, ≪법화경≫·≪금강반야경≫·≪금광명경≫·≪진언집 眞言集≫·≪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77기, 99기의 작은 탑도 봉안하였다. 이 때 특히 77기, 99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면서 그 각각의 탑 속에 진언을 또 봉안하였다.

이러한 백성산사의 길상탑을 통하여 신라의 현교와 밀교는 자연스럽게 융합됨은 물론, 그 사상면에 있어서도 더욱 깊고 넓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고려시대의 밀교)

 

(1) 왕실의 밀교신앙과 보호정책

   고려는 나라를 세울 당시부터 밀교에 대한 신앙과 관심이 매우 깊었다. 밀교를 포함한 불교사상을 고려에서는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밀교적 수행의식을 진호국가(鎭護國家)의 한 법용(法用:정례화된 의식)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철저한 호불왕(護佛王)으로서, 특히 밀교신앙과 밀교계통의 승려들로부터 정신적·현실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밀교신앙의 전개와 보호에도 대단한 힘을 기울였다.

태조의 불교에 대한 신앙의 경향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제2조와 제6조에서 유일하게 도선(道詵)을 거론하였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팔관회·연등회와 도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후대 왕들에게까지 유촉함으로서 원래의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에 이르러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으로 탈바꿈되었다. 도선의 사상에 대해서도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실제로 도선의 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다.

   따라서, 태조가 훈요 중에서 도선을 내세우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하였던 것은 그의 밀교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한 이듬해 개경에다 10개의 사찰을 세우면서 그 수사찰(首寺刹)인 법왕사(法王寺)의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또 태조가 개인적으로 신앙이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밀교적 감화력을 크게 입은 고승으로서는 광학과 대연이 있다.

광학과 대연은 신라 명랑의 법을 이어받은 밀교의 대덕들로서, 문두루법으로 태조의 건국을 도왔다. 태조는 광학·대연과의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하여 936년(태조 19) 현성사(現聖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938년에는 인도의 승려인 홍범실리박일라(弘梵室哩縛日羅)가 ≪갈마단경 羯磨壇經≫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양가(兩街:불교 업무를 관장하던 僧錄司의 2개 부서)로 하여금 위의를 갖추고 맞이하게 한 것도 밀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의 밀교는 위정자들의 돈독한 신앙심과 보호정책에 힘입어 초기부터 굳건한 전통의 기반이 확립되어 뒷날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어 발전적인 밀교신앙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목종은 1007년(목종 10) 총지사(摠持寺)의 주지 홍철(弘哲)로 하여금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祕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을 총지사에서 개판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였다.

목종이 이 경을 개판한 것은 “만약 이 경을 개판하여 탑 속에 봉안하게 되면 모든 재난이 소멸하게 된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모든 국력을 기울여 이루어진 초조(初彫)와 재조 고려대장경에도 밀교의 경전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현종 때 착수하여 문종 때 완성된 첫번째 대장경은 몽고병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현재 초조장경의 것으로 확인된 몇 권의 남은 책 속에는 ≪무량문파마다라니경 無量門破魔陀羅尼經≫·≪성지세다라니경 聖持世陀羅尼經≫ 등 24권의 밀교경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조장경에도 밀교에 관한 전적들이 많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수기(守其)가 찬술한 고려 재조대장경의 ≪대장목록 大藏目錄≫에 의하면, ≪대비로자나경≫ 7권, ≪금강정경≫ 3권 등 순밀교에만 해당되는 경전이 191종 356권이 들어 있고, ≪금강정유가호마의 金剛頂瑜伽護摩儀≫ 1권,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 佛頂尊勝陀羅尼念誦儀軌≫ 1권 등을 비롯한 밀교의식의 작법(作法)에 관한 것도 20종 21권이나 들어 있다.

 

   그리고 충렬왕은 1275년(충렬왕 1)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색신변진언경≫ 30권을 은자(銀字)로 각판하여 현재 그 제13권이 가장 오래된 은자경(銀字經)으로 남아 있다. 1328년(충숙왕 15) 5월 충숙왕은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130권을 금서(金書)로 간행하여 세상에 펴내기도 하였다.

   충숙왕은 호불왕으로서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철저하였던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서 이루어진 밀교대장경 90권과 아직 정리되지 못한 40권을 다시 구하여 130권이나 되는 밀교대장경을 금서로 펴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왕실이 국력을 기울여 밀교신앙의 기초가 되는 전적들을 수집, 정리, 간행한 것은 모두가 밀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돈독한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역대왕실과 위정자들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실천적 모습은 여러 종류의 도량과 의식을 통하여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는 80여 종류의 법회(法會)·설재(設齋)·도량 등의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들 중 문두루도량·인왕도량·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소재도량(消災道場)·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관정도량(灌頂道場)·만다라도량(曼茶羅道場)·제석천도량(帝釋天道場)·진언법석(眞言法席) 등과 같이 순수한 밀교의식이 매우 많았다.

 

   또한 전적 자체는 밀교의 것이 아니지만 장경도량(藏經道場)·능엄도량(楞嚴道場) 등과 같이 밀교성이 매우 강한 의식들도 아주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와 의식들이 역대왕실을 중심으로 매년 매월 거행되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더욱 극진하였던 후대의 왕들 중 그 즉위식까지도 밀교의식의 전통적 방법에 따라 거행한 경우도 있었다. 강종·원종·충렬왕·충선왕은 모두가 관정의식(灌頂儀式)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왕들이다.

   이 관정의식은 밀교의 독특한 것으로서, 원래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보병(寶甁)에 네 바닷물을 넣어 그것을 왕의 정수리에다 뿌리는 의식에서 채용, 표방된 것이다.

 

   밀교에서는 보병에 오지법수(五智法水)를 넣어 스승인 아사리(阿闍梨)가 제자의 머리에 그것을 뿌려줌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지어온 무명(無明)의 때를 씻고 자기의 성품(自性淸淨心)을 깨달아 진리의 왕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왕들이 관정법에 따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들은 세속적인 왕의 지위를 넘어 출세간적인 진리의 왕이 되고자 하였던 강렬한 신앙과 염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총지종(摠持宗)과 신인종(神印宗)

   우리 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형태로는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었다. 명랑을 효시로 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과,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이 그것인데 이들이 하나의 종파로 각각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원래 총지라는 말은 다라니를 뜻으로 번역한 데서 유래한다. 우리 나라에 총지법이 최초로 전래, 수용된 것은 신라 혜통이 처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지종의 성립을 신라시대로 보고, 그 개종조를 혜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총지종이 성립되었다는 결정적 기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백두항룡(白豆降龍)이나 병고치는 법(愈疾法)이 순밀의 총지법보다는 잡밀적 성격이 매우 짙다. 따라서 혜통은 우리 나라에 총지법의 최초 전래자로 총지종의 원조(遠祖)는 될지언정, 그 개종조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총지암(摠持嵒)은 신문왕과 효소왕 때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에 와서 총지사가 되었다. 이 절에서는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이 개판되었고, 1186년(명종 16)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의 밀교의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275년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색신변진언경 不空羂索神變眞言經≫ 30권을 은자로 찍어낸 것은 모두가 고려왕실이 다라니의 수행을 존중하였던 좋은 예들이다.

 

   또 1157년(의종 11) 총지사의 주지가 된 회정(懷正)은 주금사(呪噤師)로서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에 승직(僧職)과 상(賞)을 구하려는 모든 승려들은 그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높은 권좌에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가 의종의 총애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유일한 주금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금사라는 말은 경전에서 주력승(呪力僧)을 대력주사(大力呪師)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러한 대력주사가 의업(醫業)에 종사하면 이를 고려에서는 주금사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외에도 충숙왕 때의 복산(福山), 충혜왕 때의 학선(翯仙)·천기(天其) 등을 비롯하여, 문종 때 전의시(典醫侍)에 종사한 종9품의 주금박사(呪噤博士)·주금사·주금공(呪噤工) 등 많은 밀교 계통의 주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36년(인종 14) 고시의 방법도 의업식과 주금식으로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금업에 종사한 총지주사는 물론, 밀교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교단 안팎에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류에 짝하여 13세기경 조유(祖猷)·혜영(慧永)과 같은 대아사리가 배출되었으며, 이때부터 강종을 시작으로 하여 모든 왕의 즉위식 때는 반드시 관정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혈구산(穴口山)이 대일왕(大日王)의 상주처라는 백승현(白勝賢)의 말에 따라 이곳에다 혈구사를 지었으며, 꿈에 늙은 비구로부터 ≪대일경≫을 권념(勸念)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총지법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였던 왕이다. 이와 같은 상황과 여건으로 총지종은 고려 의종에서 고종 21년(1234) 사이에 개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인종의 신인이란 ‘문두루’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신라 문무왕 때의 명랑이 이 법으로써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 된다.

그러므로 총지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신인종이 성립되었고 그 개종조 역시 명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아직 어떠한 종파도 성립된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당시 해적이 침략해오자 신인조사(神印祖師) 명랑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두 대덕을 청하여 이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태조는 태조 19년(936) 현성사를 세워 신인종의 근저가 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인종은 936년 그 중심사찰인 현성사가 창건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개종되었다고 하겠다.

이 종파는 국난타개라는 신라적 전통을 유지, 계승하면서 그 신앙은 고려일대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1047년(문종 1) 7월 동경(東京 : 경주)의 사천왕사에서 적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27일 동안 개설한 문두루도량을 위시하여, 숙종 6년(1101) 4월과 예종 3년(1108) 7월 진정사(鎭靜寺)에서, 예종 4년 4월 흥복사(興福寺)·영명사(永明寺)·장경사(長慶寺)·금강사(金剛寺)에서, 고종 4년(1217) 4월과 12월 현성사에서 각각 문두루도량을 개설한 사실이 ≪고려사≫에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신인종과 그에 대한 신앙이 계속 유지, 발전되어왔음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역대의 많은 왕들이 신인종의 근본도량인 현성사를 많이 찾았음도 이러한 사실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1130년(인종 8) 4월 나라의 대신들이 경비를 모아 현성사와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이 뒤를 이어 명종·고종·원종·충렬왕·충숙왕·공민왕 등이 현성사를 찾아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은 모두가 문두루도량과 간접·직접으로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인비법에 깊은 신앙과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국난타개의 최고비법으로 믿고 있었다.

 

(3) 밀교의식과 행사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왕도량은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왕도량은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백좌도량 등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인왕경≫에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구역본과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 있는데, 고려에서 주로 사용한 것은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다.

   이 ≪인왕경≫을 고려에서는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최승의 법으로 신앙하였다. 특히 ≪인왕경≫ 제5 호국품(護國品)의 교설을 근거로 하여 역대 왕들은 많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다.

 

   ≪고려사≫ 세가편(世家篇)만 보아도 1012년(현종 3) 5월 내전에서 ≪인왕경≫을 강설한 것을 비롯하여 1373년(공민왕 22) 4월까지 무려 122회나 인왕경의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인왕도량이었다.

   특히 1020년(현종 11) 5월의 기사에서 “내정(內庭)에 100개의 사자좌를 마련하고 3일 동안 인왕경을 강설하였으며, 그것을 매년 상례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려 인왕경 의식의 시행횟수는 122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인왕경≫ 의식이 국가적 행사로 개설되었던 것은 인왕경을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며, 나라를 지키는 최고의 법(求世之良藥 護國之勝門)”으로 믿고, 그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왕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국가 사회의 여러가지 환란을 극복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왕경신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이나 사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에서는 경행(經行)이라 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보행독송(步行讀誦)하는 의식이 1046년(정종 12)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경행은 고려 인왕경신앙의 특유한 모습으로서, 그것이 일반농민들과 같은 서민층에서는 행독(行讀)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시골의 농민들은 천재지변이나 기타 우환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 경을 독송하여 모든 재난이 물러가고 복이 오기를 기원하였다.

 

  이와 같은 행독이나 경행의식은 모두 인왕도량과 그 사상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승려와 속인은 물론, 왕실과 촌민(村民)에 이르기까지 ≪인왕경≫에 대한 신앙이 가장 열렬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신앙이 불공의 번역본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밀교적 의식법에 따라 전개되었던 점에서 인왕도량을 통하여 고려 밀교의 발전적 모습의 일단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에서 인왕도량 다음으로 널리 행하여졌던 밀교의식은 금광명도량이다. 금광명도량이 주로 나라 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널리 행하였던 의식이라고 한다면, 인왕도량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서 나라 밖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개설된 금광명도량은 ≪금광명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을 근본으로 삼아 개설한 도량으로, 고려에서는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금광경도량(金光經道場)·금경도량(金經道場) 등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1041년(정종 7) 5월부터 1389년(공양왕 즉위년) 9월까지 금광경의 도량의식이 모두 37회나 개설되었다. ≪금광명경≫의 사상에서 유래된 밀교의식으로는 금광명도량 외에도 공덕천도량과 사천왕도량(四天王道場)이 있다.

 

   공덕천도량은 ≪금광명경≫ 권6 공덕천품(功德天品) 제13에 사상적 근거를 둔 것으로, 인간사회에 복과 재물을 키워준다는 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이러한 도량들이 많이 개설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밀교도량으로 소재도량이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80여 종류의 의식들이 모두가 소재(消災)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 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 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의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밀교관계 도량으로는 1367년 6월에 개설된 진언법석과 1264년(원종 5) 6월의 대일왕도량, 1110년 4월의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됨으로써 고려에서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 후대 왕들은 정책적 이념으로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을 표방하여, 불교를 탄압, 종단을 통폐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신인종과 총지종도 1407년(태종 7)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면서 총지종과 남산종(南山宗)을 합하여 총남종(摠南宗)이 되게 하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이 되게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태종 이후 7종이던 것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폐합하게 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되고, 중신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과 함께 교종(敎宗)으로 폐합되었다.

그리하여 밀교의 신인·총지의 양종은 그 명맥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1401년 궁중의 송주승(誦呪僧)을 파하였고, 1417년 ≪진언밀주경 眞言密呪經≫이나 ≪다라니집 陀羅尼集≫ 등 밀교관계 서적을 불살라버리게 하고 청우(請雨)나 시식수법(施食修法)에 관한 것들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을 가하던 태종은 태조가 죽자 진언법석·화엄법석 등을 빈전(殯殿)과 각 사찰에서 개설하게 하였으며, 칠칠재(七七齋) 및 소상재(小祥齋)와 대상재(大祥齋)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왕의 대사를 당하여 마음에 시비를 계교할 겨를이 없다.”는 정책적 명분론을 내세웠다. 따라서 태종이 밀교의 각종 서적을 불살랐던 것은 유교적 풍토에 따른 정책적인 조처에 불과하였으며, 그 내면의 신앙에는 밀교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태조는 1393년 2월 숙위사졸(宿衛士卒)들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신중경 神衆經≫ 소재주(消災呪)를 염송하게 하였으며, 그 재위연간 동안 밀교의 소재도량을 14회나 개설하였으며, 1395년 4월 총지사와 현성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기도 하였다.

1400년(정종 2) 3월 정종은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고, 세종은 1450년 1월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게 하고 ≪불정심다라니경≫을 개판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또 1451년(문종 1) 5월과 1457년(세조 3) 7월 공작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밀교계통의 ≪공작명왕경≫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일대를 통하여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개판되어 널리 신앙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개간된 밀교의 전적으로는 제일 먼저 ≪진언집≫을 들 수 있다.

   ≪오대진언 五大眞言≫은 42수진언(四十二手眞言)·신묘장구대다라니·수구즉득다라니·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불정존승다라니 등을 한데 모은 것인데, 이것은 1458년(세조 4)과 1531년(중종 26), 1535년, 1634년(인조 12)에, 또 ≪천수경 千手經≫은 1476년(성종 7)과 1496년(연산군 2) 등 모두 8차에 걸쳐서 개판되었다.

   ≪제진언집 諸眞言集≫은 1569년(선조 2) 전라남도 안심사(安心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658년(효종 9) 강원도 신흥사(神興寺)에서, 1688년(숙종 14) 묘향산 불영대에서 개판되었으며, 1777년(정조 1)과 1800년에도 각각 개간되었다.

이 밖에도 1560년(명종 15) 장우사(藏于寺)에서 개판된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 1권, 1784년 불영산 수도암(修道庵)에서 개판된 ≪비밀교 祕密敎≫ 등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고 지송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진언집이나 밀교관계의 전적들이 종단폐합의 이전보다 그 이후에 더욱 많이 개판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조선시대에 있어서 밀교는 종단폐합이나 숭유배불이라는 정책과는 관계없이 왕실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밀교는 그 발전된 내용면에서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된 점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또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채용된 수행법이 신인비법이나 삼밀수행(三密修行)에서도 특히 진언지송(眞言持誦)만을 존중하여 신인종과 총지종이라는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도 그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밀교의 더욱 두드러진 점은 밀교가 타종의 교학과 서로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러한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 번을 하여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와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밀교의 진언과 정토의 염불이 외형적으로는 무리없는 접근으로 파악되지만, 그것이 개인적 깨달음의 내용에서는 접근이 아닌 원융성(圓融性)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세가 진언염송과 미타염불을 통하여 수행일과를 하였다는 것은 밀교와 정토의 조화로운 융섭적 신앙(融攝的信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 밀교의 조류는 요세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요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 있었던 원참(元旵)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원참은 1298년 ≪현행서방경 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미타정토의 왕생(往生)을 아미타본심미묘진언(阿彌陀本心微妙眞言)의 염송만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고려나 조선에서는 밀교가 진언을 매체로 하여 정토신앙과의 상호교섭관계를 밀접하게 맺게 되었다. ≪현행서방경은 1448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531년 하동 쌍계사(雙磎寺), 1556년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1710년 하동 칠불암(七佛庵)에서 각각 개판되었다.

 

   그리고 선사였던 석실(石室)은 실제로 이러한 신앙을 널리 펴는 데 힘을 기울였던 고승이다. 그리고 1668년(현종 9) 보현사(普賢寺)에서 개판된 ≪진언집≫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었던 ≪염불작법 念佛作法≫·≪일용작관법 日用作觀法≫·≪비밀교≫ 등에는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를 비롯하여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아미타불심주(阿彌陀佛心呪)·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무량수여래심주(無量壽如來心呪) 등 많은 정토관계의 진언이 있어 실제 의식상에 응용되고 있었다.

   164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점점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면에서도 서로가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신앙이 밀교화된 ≪현행서방경≫ 등이 저술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신앙되었으며, 많은 밀교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의식에서도 밀교화된 정토관계 진언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밀교계의 현상은 한국의 밀교와 정토가 신앙·교학·사상·역사의 측면에서 원융한 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밀교와 선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제2세로서 밀교의 여러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 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 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所依:한 종파의 근본을 이룸.)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 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 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 說禪儀≫를 저술하여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선과 밀교는 신라 말기부터 서로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관계가 교학적이나 의식면은 물론, 신앙 속으로까지 융섭되어 어느 일면에서는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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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시대의 밀교전래고」(박태화, 『조명기박사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 1965)
  • 「신라 신인종의 연구」(문명대, 『진단학보』 41, 1976)
  • 「도선비보사상의 연원」(서윤길, 『불교학보』 13, 1976)
  • 「한국불교의 밀교적성격에 대한 고찰」(정태혁, 『불교학보』 18, 1981)
  • 「고려의 밀교와 정토신앙」(서윤길, 『동국사상』 14, 1981)
  • 「고려밀교신앙의 전개와 그 특성」(서윤길, 『불교학보』 19,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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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면과 동면 삼층석탑이 함께 보인다

 

  북면 전면

 

 동탑                         석가여래                   서탑

 

 

 

  - 사진 <토함산솔잎파리> 솔뫼님의 자료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남산 탑곡. 신라. 보물 제201호. 수십구의 불보살상과 다른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블로그 < 임기영>

[출처] 밀교|작성자 임기영

 

 

다음 Tip 답변자료

  •    저희는 대보름날 아침에 오곡밥을 먹고 전날에는 부럼을 먹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대보름날의 절식(節食)으로는 햅찹쌀을 찌고, 또 밤, 대추, 꿀, 기름, 간장 등을 섞어서 함께 찐 후 잣을 박은 약반(藥飯)을 준비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조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을 깨닫게 하여, 우리 풍속에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하는 날로 정하여 찹쌀밥을 지어 까마귀 제사를 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약반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풍속이다. 이 약반은 지방에 따라 오곡밥, 잡곡밥, 찰밥, 농사밥 등을 그 대용으로 즐기기도 한다.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번 먹는다.

       또 가을이 되면 호박이나 가지, 시래기, 곰취 같은 나물들을 손질해서 겨울 동안 잘 말렸다가 대보름이 되면 이 나물들을 삶아서 기름에 볶아 먹는다.

       그리고 대보름의 절식으로 복쌈이 있는데, 이는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등에 싸서 먹는 풍속을 말한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전한다.

       또한 대보름에 귀밝이술이라는 풍속도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 이것을 귀밝이술이라 한다. 생각컨대 섭정규(葉廷珪, 中國 宋代人)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춘분 전후의 무일(戊日)에 귀밝이술[治聾酒]을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에 행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602&docid=43608

    2015.03.04 00:46 | 신고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 불설무량수경 / 정토사상

2015/03/2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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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조위(曹魏) 천축삼장(天竺三藏)

강승개(康僧鎧) 한역

 

최봉수 번역

 

[0266c23] 佛告阿難:「乃往過去久遠無量不可思議無央數劫,錠光如來興出於世,敎化度脫無量衆生,皆令得道乃取滅度。次有如來名光遠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찍이 헤아릴 수 없는 과거, 한량없고도 불가사의한 겁 이전에
정광여래(錠光如來)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해탈시켜 모두 도(道)를 얻게 하고, 열반에 드셨느니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여래께서 계셨으니, 명호가 광원불(光遠佛)이니라.


次名月光、次名栴檀香、次名善山王、次名須彌天冠、次名須彌等曜、次名月色、次名正念、次名離垢、次名無著、次名龍天、次名夜光、次名安明頂、次名不動地、次名琉璃妙華、次名琉璃金色、次名金藏、次名炎光、次名炎根、次名地種、次名月像、次名日音、次名解脫華、次名莊嚴光明、次名海覺神通、次名水光、

그 다음으로 월광불(月光佛)·전단향불(栴檀香佛)·선산왕불(善山王佛)·수미천관불(須彌天冠佛)·수미등요불(須彌等曜佛)·월색불(月色佛)·정념불(正念佛)·이구불(離垢佛)·무착불(無着佛)·용천불(龍天佛)·야광불(夜光佛)·안명정불(安明頂佛)·부동지불(不動地佛)·유리묘화불(琉璃妙華佛)·유리금색불(琉璃金色佛)·금장불(金藏佛)·염광불(炎光佛)·염근불(炎根佛)·지종불(地種佛)·월상불(月像佛)·일음불(日音佛)·해탈화불(解脫華佛)·장엄광명불(莊嚴光明佛)·해각신통불(海覺神通佛)·수광불(水光佛),


次名大香、次名離塵垢、次名捨厭意、次名寶炎、次名妙頂、次名勇立、次名功德持慧、次名蔽日月光、次名日月琉璃光、次名無上琉璃光、次名最上首、次名菩提華、次名月明、次名日光、次名華色王、次名水月光、次名除癡冥、次名度蓋行、次名淨信、次名善宿、次名威神、次名法慧、次名鸞音、次名師子音、次名龍音、次名處世,如此諸佛皆悉已過。

대향불(大香佛)·이진구불(離塵垢佛)·사염의불(捨厭意佛)·보염불(寶炎佛)·묘정불(妙頂佛)·용립불(勇立佛)·공덕지혜불(功德持慧佛)·폐일월광불(蔽日月光佛)·일월유리광불(日月琉璃光佛)·무상유리광불(無上琉璃光佛)·최상수불(最上首佛)·보리화불(菩提華佛)·월명불(月明佛)·일광불(日光佛)·화색왕불(華色王佛)·수월광불(水月光佛)·제치명불(除癡冥佛)·도개행불(度蓋行佛)·정신불(淨信佛)·선숙불(善宿佛)·위신불(威神佛)·법혜불(法慧佛)·난음불(鸞音佛)·사자음불(師子音佛)·용음불(龍音佛)·처세불(處世佛) 등 여러 부처님들께서 지나가셨느니라.

 

[0267a14] 「爾時,次有佛名世自在王如來、應供、等正覺、明行足、善逝、世間解、無上士、調御丈夫、天人師、佛、世尊。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명호가 세자재왕(世自在王)여래·응공(應供)·등정각(等正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니라.


時有國王,聞佛說法心懷悅豫,尋發無上正真道意,棄國、捐王,行作沙門,號曰法藏,高才勇哲與世超異。詣世自在王如來所,稽首佛足,右遶三匝,長跪合掌以頌讚曰:

그 때 국왕이 있었으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기쁜 마음으로 참된 무상보리심을 발하여 나라를 버리고 왕위를 내어 놓고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는데, 그 이름을 법장(法藏)이라 하였느니라. 재주가 뛰어나고 용감하고 슬기로움은 세상에서 뛰어났느니라. 그는 세자재왕여래께서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나서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느니라.


光顔巍巍,威神無極,如是炎明,無與等者。  

日月摩尼,珠光炎耀,皆悉隱蔽,猶如聚墨。  

如來容顔,  超世無倫,正覺大音,響流十方。

戒聞精進,  三昧智慧,威德無侶,殊勝希有。  

深諦善念,諸佛法海,窮深盡奧,究其崖底。  


빛나는 얼굴은 당당하시고
위엄과 신통은 그지없으니
이와 같이 밝고 빛나는 광명
뉘라서 감히 따르리이까.

해와 달과 마니 구슬의
빛이 빛나고 불꽃처럼 타올라도
모두 다 완전히 가려지니
마치 덩어리진 검은 먹과 같네.

여래의 얼굴은 거룩하시어
이 세상을 무엇으로도 견줄 이 없고
바른 깨달음의 크신 음성
시방에 널리 울리네.

계(戒)와 다문(多聞)과 정진(精進)
삼매(三昧)와 지혜(智慧)
그리고 위덕은 짝할 자가 없으니
수승하고도 희유하도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의 바다[法海]를
자세히 보고 깊이 생각해
끝까지 밝히고 속까지 뚫어
그 안과 바닥을 두루 비추네.


無明欲怒,世尊永無,人雄師子,神德無量。

功德廣大,智慧深妙,光明威相,震動大千。

 

願我作佛,齊聖法王,過度生死,靡不解脫。

  

布施調意   戒忍精進,如是三昧,智慧爲上。

吾誓得佛,普行此願,一切恐懼,爲作大安。  


무명과 탐욕과 성냄
세존은 영원히 여의었으며
사자와 같은 위대한 이의
신묘한 공덕은 헤아릴 수 없네.

크신 덕과 넓은 공적
그 지혜 또한 깊고 오묘하오니
광명과 위엄을 갖춘 그 모습
대천세계를 떨치네.

원하건대 제가 부처님 되어

거룩한 공덕 저 법왕처럼 갖추어
생사(生死)의 중생 모두 건지고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지이다.

보시하고 뜻을 조화롭게 하고
계행을 지니고 인내하고
끊임없는 정진 거듭하면
이러한 삼매 지혜 으뜸일세.

나도 맹세코 부처님 되어
두루 이러한 서원 행하고
두려움 많은 중생 위하여
편안한 의지처 되리라.


假令有佛,百千億萬,無量大聖,數如恒沙,  

供養一切,斯等諸佛,不如求道,堅正不却。

譬如恒沙,諸佛世界,復不可計,無數刹土,  

光明悉照,遍此諸國,如是精進,威神難量。  

令我作佛,國土第一,其衆奇妙,道場超絶。

 

만일 수많은 부처님 계심이
백천만억이라도
한량없는 큰 성인들
그 수가 항하의 모래알과 같아도

이렇듯 많은 부처님들
빠짐없이 받들어 공양하여도
보리도를 굳게 구하여
물러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하리.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많고 많은 부처님 세계
그보다 더 많아 헤아릴 수 없고
그 많은 세계의 국토에

부처님 광명 널리 비치어
모든 국토에 두루하니
이와 같은 정진과 위신력
무슨 재주로 세어 보리요.

만일 제가 부처 된다면
국토 장엄은 으뜸 되고
그곳 중생들은 한결같이 훌륭하며
도량은 참으로 수승하오리.

 

 


國如泥洹,而無等雙,我當愍哀,度脫一切。  

十方來生,心悅淸淨,已到我國,快樂安隱。  

幸佛信明,是我眞證,發願於彼,力精所欲。

十方世尊,智慧無礙,常令此尊,知我心行。  

假令身止,諸苦毒中,我行精進,忍終不悔。


국토가 마치 열반[泥洹]과 같아서
세상에서 둘도 없으며
마땅히 모든 중생 불쌍히 여겨
내가 제도하고 해탈케 하리라.

시방에서 오는 중생들이
마음이 즐겁고 청정하게 되어
이미 나의 국토에 도착하면
유쾌하고 즐겁고 안온하게 되리라.

원컨대 부처님 굽어 살피사
진실한 저의 뜻 증명하소서.
저 국토에 원력을 세워
있는 힘을 다해 정진하리라.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
그 밝은 지혜 걸림 없으니
저의 마음과 수행 정진을
항상 살펴주옵소서.

만일 이 몸이 어쩌다가

온갖 고난에 빠진다 한들
제가 나아가며 정진하고
참지 못하고 후회하오리까."


[0267b19] 佛告阿難:「法藏比丘說此頌已而白佛言:

이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법장 비구는 이 게송을 읊은 후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느니라.

『唯然,世尊!我發無上正覺之心,願佛爲我廣宣經法,我當修行,攝取佛國淸淨莊嚴無量妙土,令我於世速成正覺,拔諸生死勤苦之本。』」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無上正覺]을 얻고자 발원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널리 경전의 교법[經法]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는 마땅히 수행하되 부처님 국토가 청정하고 장엄하여 한량없이 청정 미묘하게 국토를 장엄하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에서 빨리 정각을 이루게 해주시옵고, 생사 괴로움의 뿌리를 뽑아 버리도록 하여 주소서.' "


[0267b23] 佛語阿難:「時世自在王佛告法藏比:『如所修行莊嚴佛土,汝自當知。』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어 말씀하셨다.
。我聞此已,當如說修行成滿所願。』

이에 비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그 뜻이 크고 깊어 저의 경계가 아니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께서 저를 위하여 모든 부처님들께서
정토를 이룩한 수행법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는 그것을 듣고자 하옵니다. 말씀하신 대로 마땅히 수행하여 소원을 원만히 성취하고자 합니다.'


[0267b27] 「爾時,世自在王知其高明志願深廣,卽爲法藏比丘說經言:

그 때 세자재왕여래께서는 법장 비구의 높고 밝은 뜻과 서원이 심오하고도 광대한 것을 아시고는 법장 비구 위하여 법을 말씀하셨느니라.

『譬如大海,一人斗量,經歷劫數尙可窮底,得其妙寶。人有至心,精進求道不止,會當剋果,何願不得?

'비유하면 큰 바다에서 한 사람이 적은 양이라도 억 겁의 세월 동안 퍼내면 마침내 바닥에 닿아 미묘한 보배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부처님 도를 구하기를 쉬지 않으면 마땅히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니, 어떠한 소원도 이루지 못할 것 없느니라.'

[0267c03] 「於是,世自在王佛卽爲廣說二百一十億諸佛刹土天人之善惡、國土之粗妙,應其心願悉現與之。

그리고는 세자재왕여래께서는 그를 위하여 210억의 여러 불국토에 살고 있는 천상과 인간의 선악 그리고 국토의 거칠고 미묘함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법장 비구의 소원대로 모두 낱낱이 나투어 보여 주셨느니라.

[0267c05] 「時彼比丘聞佛所說嚴淨國土,皆悉覩見。超發無上殊勝之願"그 때에 세자재왕(世自在王)여래께서 법장 비구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그대가 수행하고자 하는 바와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그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니라.'


[0267b25] 「比丘白佛:『斯義弘深,非我境界。唯願世尊廣爲敷演諸佛如來淨土之行,其心寂靜,志無所著,

一切世間無能及者。具足五劫,思惟攝取莊嚴佛國淸淨之行。」

그 때 법장 비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

또한 장엄하고 청정한 국토를 그대로 친견하였느니라.

그리하여 더없이 수승하고 가장 뛰어난 원을 세웠느니라.

그 때 그의 마음은 맑고 고요했으며,

또한 뜻에 집착하는 바가 없었으니,

일체의 세간에서 그에게 미치는 자가 없었느니라.

그리하여 5겁 동안 사유하였으며,

불국토를 장엄하기 위한 청정한 수행법을 받아들였느니라."


[0267c08] 阿難白佛:「彼佛國土壽量幾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 불국토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0267c09] 佛言:「其佛壽命四十二劫。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부처님의 수명은 42겁이니라.


[0267c10] 「時法藏比丘攝取二百一十億諸佛妙土淸淨之行。如是修已,詣彼佛所,稽首禮足,

遶佛三匝,合掌而住,白言:

그 때 법장 비구는 210억이나 되는 여러 부처님들의 미묘한 국토에서의 청정한 수행을 다 거두어 받아들였느니라.

그렇게 수행하고 나서 다시 세자재왕여래의 처소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 합장하고 여쭈었느니라.


『世尊!我已攝莊嚴佛土淸淨之行。』

 '세존이시여, 저는 일찍이 장엄한 부처님의 국토에서의 청정한 수행 모두 섭취(攝取)하였습니다.'

 

[0267c13] 「佛告比丘:『汝今可說,宜知是時。發起悅可一切大衆。菩薩聞已,修行此法,緣致滿足無量大願。』

이에 부처님께서 법장 비구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법장 비구여, 지금이야말로 그대의 서원과 수행의 결과를 대중에게 널리 알려 기쁘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할 때이니라.

보살들은 이미 들은 대로 이 법을 수행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대원(大願)을 성취할 것이니라.'


[출처]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작성자 byunsdd

염화미소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密教编辑[mì jiào] 

密教又作真言宗、瑜伽宗、金刚顶宗、毗卢遮那宗、开元宗、秘密乘。依真言陀罗尼之法门,修五相、三密等妙行,以期即身成佛之大乘宗派。我国十三宗之一,日本八宗之一。主要以金刚顶经为经藏,苏婆呼经为律藏,释摩诃衍论为论藏。统称密教之经典为密经。
中文名
密教
又    作
衍    论
时    期

1何谓汉传纯正密教编辑

密之涵义

「密教」与「显教」是相对待的。佛所亲传的经教共有两大类。
一类为「密教」,另一类为「显教」。顾名思义,「显」之意为显明、显现出来:凡是可以用语言表达或宣示的法称为「显法」或「显教」;而「密」则表示「如来的秘密境界」,系离于言语思惟,超越言诠、亦即超过了凡夫「言语、思维所能达到」的范畴之外,无法为凡夫所了知,所以才称为「密」。因此「密」并非是故作神秘或神秘兮兮等。如来的「密法」或「密教」不但难以言语来表示,甚至以凡夫的思维亦无法想象得到,那样的境界便称之为「密法」或「如来秘密境界」。而如来的秘密境界,以其大悲。为了度化众生,则示现在他的清净的身、语、意三业之上,而成为如来的「三密」;如来即是以此「三密」来加持众生,令他们速能除障、离染、断惑、证真、开悟成佛。所以可知,密教修学的主要内容即是身语意「三密法门」,用以求得如来的「三密加持」,速成佛道。

如来与众生的三密境界

如上所说,所谓的「三密」就是「身密」、「语密」、「意密」。如来便是以其身语意的「甚深不可思议秘密境界」来加持众生,令他们速能断除三障,开悟证道。因此,一般都以为只有佛才有「三密」,而不知众生亦有「三密」。唯一不同的是:众生的「三密」,正如其「三业」一样,是染污的;而佛的「三密」则是由其「清净三业」所成,故具足无量功德,其差别如是。
兹将众生的「三密」,简单说明如下:
众生与佛的「身密」境界
「秘密境界」是十法界中六凡四圣都有的。凡夫的身密境界例如:爱、恨、讨厌、喜欢等感情,连言语都无法完全表达的部分,却可以透过眼睛,嘴巴等五官的动作,乃至于扬眉,瞬目、蹙鼻、抿唇等,也都能传达不同程度的爱、恨、敬佩或轻视等之情。因此,众生不但五官具有「身密」之功能,课题传达超乎言语范畴的意义,乃至依行为科学家的研究,便知有所谓的「肢体语言」或「行为语言」,亦即我们的身根、整个都可以用来传达言语所不能表示的「不可思议境界」;这就是凡夫的「身密」境界。
至于佛的「身密」境界,不但是超乎「言语」的境界,而且还超过了「思维」的范畴。还有一点不同,就是佛的「身密」是由清净的身业所成,具足无量功德,所以佛能以其「身密」度化无量有情。
众生与佛的「语密」境界
众生的语业亦有其秘密之处,这就是众生的「语密」。
众生的「语密」例如:众生为何会有那么多话要说呢?(——几乎整天说个不停,也不觉得累!)世界上为何会有那么多种语言?你看,这世界上到底有多少种语言?真是不可思议。众生以这么多种的语言,来传达他们无量的心意与讯息。甚至同样一句话,由于其时间、地点、对象、说话者的心情、了解的程度,及说话的音调之高低、音量之大小、强弱等之差异,都会有令其含意随之改变,对不对?譬如说,有人很恭敬地端上来一盘食物说:「这个请您用。」与用不屑的口吻,大声嚷着:「这个给你吃啦!」,这两者之间的意味就有天渊之别;又如大吼大叫地说:「拿去吧!」与女人以撒娇的语气说:「嗯,拿去啦」同样一句话,但所传达的情绪与意味却迥然不同。所以同样一句话,以种种口气,所表达出来的意思,作用上就会产生极大的差异,乃至完全相反。这就是凡夫语言种的秘密境界——亦即所谓的「言外之意,弦外之音」,故只能意会。但无论如何,众生的语言境界,则是「无常」的:其所表达之意,在在处处都会因为人、事、时、地的不同而产生种种差异。
相较于众生的「语密」境界,如来的「语密」则永远都是「清净无染」、「恒常不变」的,其所表达总是同一个意义,不会因为众生的身份、地位、人、事、时、地、罪福因缘、说话音量等的不同,而有所改变;简而言之,即是「佛语谛实」、「佛无异语」、「佛不二语」,故其意义都是恒常不变,永远都是清净一如的:好人所念得佛语同样的意义,坏人所念,也是同样的意义;心情好时或坏时所念出来,其意义仍然相同。过去念、现在念、未来念,其意义也都不会有所改变。唐朝的人所念得经咒,与现代人所念的经咒,其意义都不会有所差异。
古人念阿弥陀佛,今人也念阿弥陀佛,然而阿弥陀佛所表之义不会有所更动、改变:佛亲自金口宣说的经论,其意义亘古不变:自古以来,不论是印度人、中国人、日本人、欧洲人或是美国人,所念得a弥陀佛也好,念o弥陀佛也好,念e弥陀佛,也都能听得懂,没有太大差别,都是在表达相同的意义,所以这就是如来的「语密」,或「语言秘密」,亦即:它不为种种「无常法」之所改变。
众生与佛的「意密」境界
第三个秘密境界是「意密境界」。「意」是什麼呢?
意即是「心」。从六道的众生六凡乃至四圣,即声闻缘觉菩萨,这十法界中一切众生及圣人皆有「心」。虽然六凡四圣之心所缘不同,但此「心」皆有秘密。因此众生心也有其秘密,何以故?因为「秘密」系指「不可思议」之意而言。因为众生心,不可思议地会生出很多种类的念头、想法出来:众生之心,不知什麼来由,时时刻刻都像在自己内心中播放电影或幻灯片一般,不论白天、晚上,常常一出又一出地播个不停,妄想纷飞;有时候其妄想有头无尾,杂乱无章;有时不论白天晚上同样的妄想相续不绝,不知是什麼道理;因此众生之心实不可思议;此名之为众生的「意密境界」。
再者,你不晓得为何会如此,然而你的「心」就自然而然地会生出许许多多的想法,及很多的贪爱、愚痴、瞋恚、嫉妒等妄念。有时心中无缘无故地,毫无来由地,它就生气了;或不快乐了,或烦闷了;有时甚至没什麼大不了的事,也会气得大吼大叫;要叫它不生气,偏偏就是忍不住,这是没办法的事。有时这个心则会油然生起嫉妒。例如女人若看见他的先生与别的女性谈得很高兴,她就心生烦恼,於是可能就会开始详细查询,必得问到水落石出、或俯首认罪、道歉,方才罢休。男人也是一样,若见到他太太跟别的男人交谈时,有说有笑,也是无法忍受的;这实在是不可思议的事。但他若用理智来思考,那其实也没有什麼呀!明知并没有什麼,但他却自然而然就会生出那些「烦恼心」来,於是就会纠缠一整夜,闹得不可开交。所以这就是「众生心不可思议」之处;明明知道也不会有什麼事,但它仍然会不思议地产生无量的「烦恼」及「随烦恼」等,因此称之为众生的「心秘密」。
而如来心亦有其秘密,但不同於众生心之秘密。众生心之秘密为由於「无明」,而在种种因缘环境之下,会生出种种烦恼来,乃至於无量无边。但如来的「心秘密」,因为无始劫来不断熏修、累积的无量功德,因而包含了无量智慧於其中。例如禅宗六祖大师对五祖大师说:「弟子自心常生智慧。」这句话不是那麼简单就能说的!一般人对祖师所说的,恐怕是:「弟子自心常生烦恼!」因为心内都是乌漆嘛黑、乱七八糟的烦恼。所以这是圣者的心之不可思议处。是故,人若修行,其心便自然常生智慧;若不修行即常生烦恼。一大堆的烦恼,不知为何而自然生起这里也放不下,那里也放不下。比如挑了两肩重担,都几乎走不动了:一肩挑妻,一肩担子,怀里还要抱孙子。这样也许能取得平衡:一边挑夫,另一边挑子,就平衡了,否则恐怕会倾向一边。然而孙子却是最大的,所以顶在头上,他即使在头顶上面撒尿也没关系。菩萨是顶戴如来,而众生则是顶戴孙子。孙子乃至比祖宗都还大。不仅外人碰不得,连作父母的也碰不得。作父母的不能稍为骂一下你的孙子,否则你就会说:「我以前也没这样对待你」这就是众生的「心秘密」与如来的「心秘密」不同之处。有些人担自己的父母不够,还要去认养一些干爹、干妈、干姐、干妹、干儿子、干孙子……,都是「干」的,没有一个是「湿」的。众生就是这样拿很多葛藤来纠缠自己,无端自寻烦恼,这样才会觉得爽快——这就是攀缘,众生心就是爱到处攀缘。所以学佛的人就不应该这样拜来拜去,还去结拜兄弟、结拜姊妹。自己的兄弟姊妹都已经照顾不来了,都没互相疼惜了,还到处结拜乾姐、乾妹;自己的父母都孝顺不来了,还有能力去孝顺到好几个干爹、干妈?你不知为何要拜他为干爹,讲不出道理来,那是无明业力使然,於是就变成
愚痴干爹——这就是众生无明的心秘密之显现。以上是为了帮助大家瞭解「什麼是密教」所作的阐释。
现在再简单复习一下:所谓「密教」即是阐发众生与佛的三种「秘密」:众生有染污、秘密的三业,成为众生的「身密、语密、意密」三种秘密;而佛则有清净的「身
密、语密、意密」三种秘密。佛即是以他三种清净的秘密境界,来转化众生的染污三业,令其净化,因而开悟、解脱、成道。接著佛又将其自证的「三密境界」,传授给祖师大菩萨,祖师菩萨再继续将此法脉传至後代,而此清净秘密法脉的不断传承即是「真言密教」,此教法是超越言语思惟的范围。然而於如来全体教法之中,亦有与此密教境界相接近的,那就是禅宗;因为禅宗的教法也是属於不可思议的境界,所以禅宗与密宗这两宗是大根器人修的。因为那不只是教你作什麼而已;好有一比,例如学绘画,一般的教法就有如教你怎麼作画,你学了之後,通常也会跟著画一些画儿,而且也能画鸟像鸟、画马像马、画花像花。但若要教他成为一名「艺术家」,那就不容易了:因为那需要天份,对吧?同理,如来的一切教法,虽可以教你如此这般地做,但你究竟是否能够真正进入其圣境,则是另外一回事——换言之,「画匠」是可以学得的,但「艺术家」则是超乎一般学习的。禅宗与密宗就有类似这样难以言传、通达的境界;亦即,此二宗皆有很多修行的法门,但到最後,都会达到一种不是仅凭学习就能通达的境界,故是「不可思议法门」。至於其他宗派,多半是在言思范围之中,而禅宗与密宗则是最後都超越了言语与思惟范围之外,也就是「不可思议的境界」;而行者究竟能不能进入那个不思议境界,则须靠累劫所修得的善根、福德、因缘以及发心。

印度密宗

七世纪后半,印度佛教进入全盛期,已有经有教,有轨有仪,真正密教方始开展,以真言、陀罗尼为中心而增益大乘佛教哲学,以奠定其基础。此为纯正密宗,纯密以大日经、金刚顶经为主。在七世纪后半时,成立于中印度之大日经,将杂密经典所说诸尊以大日如来为中心,集大成而成胎藏界曼荼罗。其理论可能承自华严经之说法,主张在现实之事相上,直观宇宙真相。金刚顶经成立稍晚,流行于南印度,系传自佛教瑜伽派之说,以心识为中心而言五相成身(在心身中具备五相与本尊同一之观法)。以此二经为代表之纯密,在印度不久即告消灭。八世纪时,纯正密教由开元三大士传至我国,后经惠果阿阇梨及日本空海大师传至日本成为如今纯正密教真言宗的惟一血脉。

发展历程

密宗东传,当以东晋帛尸梨蜜多罗译大灌顶经、孔雀王经为经典。三国吴之支谦所译八吉祥神咒经、无量门微密持经、华积陀罗尼神咒经、持句神咒经、摩诃般若波罗蜜咒经、七佛神咒经等亦颇著名。唐以前与密宗关系最深者则推东晋竺昙无兰,译有陀邻钵咒经、摩尼罗亶神咒经等凡二十五部,皆属密宗经典。唐时译密经最多者为义净三藏,有观自在菩萨如意心陀罗尼经、曼殊室利菩萨咒藏中一字咒王经、称赞如来功德神咒经等十余部。唐开元三大士(善无畏、金刚智不空)传来纯密之前,中土业已广译密宗经典,此外,显教经典中之咒文陀罗尼尤不胜枚举。
东晋帛尸梨蜜多罗译出大灌顶神咒经,咒术灵验,首都建康盛行咒术,此后杂密更不断传译。唐玄宗开元年间(713~741),善无畏、金刚智二纯密大师先后于长安译出根本经典,建立灌顶道场,我国密宗于是真正成熟。另有不空、一行、惠果、辨弘、慧日、惟上、义圆、义明、空海、义操、慧则等,传持纯密。其中,日本空海(弘法大师)于贞元二十年(804)来唐,就惠果受法,返国后,持弘不绝,是为日本真言宗之祖。会昌法难之后,加以唐末五代兵燹不断,战乱频仍,密宗坛场仪轨销毁殆尽,不过,这并不意味着唐密开始消逝, 幸有惠果阿奢黎得金胎二部之法嗣,如惠应、惠则、惟尚、誓弘、惠日、空海、义满、义明、义照、义超、义愍等;和单受胎藏法者:悟真、义澄、法润等;单受金刚界法者:义证、义一、吴殷、义智、义圆等;另外受法弟子还有:义恒、义云、智兴、行坚、圆通、义伦、义润、开怌等。(其中义超和空海为正嫡,义超嗣青龙寺法灯,传出弟子义真、海云等)继续弘扬,但是真言宗道场各种法器,佛像,曼陀罗等损失严重,无法恢复如初,故后代祖师将唐密和禅宗互相融合,形成禅密一体的独特密法,由于佛教多次受到灭佛的打击,故祖师隐秘传承法脉,得以延续至今,世人皆以为唐武宗灭佛后,唐密逐渐式微,虽宋时虽有施护、法贤等师传其法,至元则绝矣。其实,密教并未消亡,而是隐入山中,秘密传承。为外人所不知。外界多认为唐密东传于日本,殊不想惠果阿奢黎杰出之弟子众多,持金胎两部大法者不在少数,虽经历法难,但身为汉人又持龙树菩萨一脉相传之真言法教,怎能让密法传承在自己这里断绝,怎么会让唐密在汉地绝响?宋代法贤、施护,法天等,传译密宗经轨,亦未能光大久远。且此时之密宗已异于唐代,唐代密宗可谓为有体系之综合密宗,宋代则是分化的、通俗的,以崇拜特定之本尊,诵持其真言陀罗尼为主,如宣扬宝箧印陀罗尼、观音六字明咒、准提咒等即是。又宋代因输入时轮怛特罗之印度密宗,故以威猛之忿怒明王本尊较多。元代定喇嘛教为国教,喇嘛教实即以密宗为骨干之西藏佛教,其后以元帝室过分优待喇嘛教,导致腐化,乃有宗喀巴之改革,而形成新旧之黄教、红教
密教鼎盛于七世纪时,至十一世纪印度佛教衰亡止,在中印度颇为兴盛,融入性力派(梵Saktah)教说之后,成为左道密教,此派尤其强调散见在纯密金刚顶经中之大乐说(梵mahasukha -vada )。八世纪以来,传入西藏,遂成为喇嘛教之骨干。至十、十一世纪时,其部分经典已在中国流传并翻译,但在思想上则未产生影响。因此从发达史而言,杂密先兴起,继而纯密集大成,与纯密平行者,为融入印度性力派等教说之左道密教。据传,谓大日如来越三世之一时,于色究竟天之法界心殿,对金刚萨埵等从心流出自内证之内眷属,为自受法乐而宣说大日经,又于真言宫殿宣说金刚顶经,后由金刚萨埵结集之(日本台密谓阿难亦参加)。后于佛陀入灭后约八百年顷,龙猛(龙树)菩萨施咒于七粒白芥子,以之打开十六丈(表示金刚界之十六菩萨)南天竺之铁塔,亲从金刚萨埵受两部大经(台密则称大日经系于铁塔外由文殊菩萨所传授)。后龙猛传予龙智,复经七百年左右(相传龙智岁寿七八百年),再授大经于善无畏。故密教以龙猛为开山祖师,根本教典为大日经及金刚顶经,信奉之教主系大日如来(大毗卢遮那佛),与释尊之说法不同,故自称为金刚乘

金刚乘

一词,于日本系指纯密,于印度及欧人之间则惯指左道密教,英文为 Tantric Buddhism。广义之金刚乘分为二派:(一)右派:以大日经为主,即指纯密。富于稳健之神秘主义,欲藉咒术实现宇宙与精神之合一,以支配自然与人事,此派又称为真言乘(梵Mantrayana ),自我国传至日本,成为真言宗,称为唐密东密。另在日本天台宗流传之密教称为台密。(二)左派:或性力派,重视双身法,以原始佛教立场言,此系左道旁门,九世纪以后与印度教结合而日趋兴隆,后传入西藏,成为‘藏密’之骨干。藏密,乃西藏佛教密宗之简称,系八世纪时由莲华生、寂护等传入。前弘期佛教中,西藏所行之密法多为行、事二部,史称旧密法;十一世纪初,仁钦桑波等翻译多种瑜伽密教经典,史称新密法;而后瑜伽部及无上瑜伽部密法遂盛行于西藏佛教各派中,传承不绝。而密宗之东传我国亦有此二阶段。

不同点

,在修持上之传承与仪轨。显宗理论固然有师承传授,而修持法门不一定要严格之师承、仪轨;如瑜伽之五重唯识观,天台之大小止观,即无师承亦可自习。反之,密宗之仪礼繁复,世界诸宗教中无出其右者,自初皈灌顶至金刚上师有一定之程序,不可躐等,与显教之简易方便迥异其趣。就教义而言,显教为应身佛说法,密宗则以法身佛说法。依显教修行者,认为须经三大阿僧祇劫,修六度万行始得证佛果;依密宗者,则认为仅修三密之妙行,现生即可成佛。又有六大缘起之说,六大即地、水、火、风、空、识,此六大乃一切诸法之本体,能造一切佛,乃至一切众生之根身器界,即自性等四种法身,众生国土等三种世间,皆为六大所生。依此六大缘起,故立生佛平等之义,大、三、法、羯等四种曼荼罗亦由六大缘起现法身德相。众生若依三密妙行修持,契证性德时,即以父母所生身立证大觉位。所谓‘三密加持妙行’,即手结印契,口诵诸佛真言,心住三摩地。如说修行时,行者之身口意能与诸佛之身口意相应,则可速得成佛。诸佛之身口意,即大、三、法、羯等四种曼荼罗:大曼荼罗即诸佛之身密,三摩耶曼荼罗即意密,法曼荼罗即语密,羯磨曼荼罗即其余三曼荼罗之业用。要之,四种曼荼罗具有诸佛之三密而不阙。又此四种曼荼罗赅摄一切曼荼罗,依大日经建立之曼荼罗称为胎藏界曼荼罗,依金刚顶经建立之曼荼罗称为金刚界曼荼罗;前者表示本觉之理,故又称因曼荼罗;后者表示始觉之智,故又称果曼荼罗。又对依余经所立之别尊曼荼罗而言,此金胎二部称为总德曼荼罗。此外,一切佛菩萨等乃从大日如来法身所流出之别尊,各代表其别德,为一门之本尊,对于此,大日如来即是总德普门之本尊;一门之诸尊中,阿閦、宝生等四佛表大圆镜等四智;四佛又各有四菩萨,合为十六大菩萨,与四波罗蜜、四摄、八供等,计三十七尊,凡此皆不外从大日法界体性智流出者。行者若常以白净之信心,自住金刚萨埵三昧,修五相成身等妙行,即现得契证佛智,圆满佛身,成就利他事业。

十住心

从异生羝羊心至极无自性心等九心为世间、出世间、小乘、大乘、二乘、一乘等之住心,第十秘密庄严心即真言密宗之住心。亦即本宗以凡圣不二为宗要,一尘一法皆住本初之智源,悉为三摩地之心地故,虽上根胜慧之人,起居动作、开口发声、心思念想,皆成无相三密;而下根劣慧之机,依有相之三密门,能与三部诸尊之德相应,本宗思想之特质,自教主方面观之,显教为应化之释迦所说,本宗为法身佛之大日如来所说;自法身立场观之,显教法身为理体,理体法身无形无相,密宗法身有形有相,且能说法;自所说法观之,三论宗八不之中道寂灭境界、法相之离言胜义谛境界、天台之一念三千不可思议境界、华严之性海果分不可说十佛境界等皆毕竟可说;自真理之表现观之,一切诸法皆是真理象征,此种象征之具体表现,即密宗之仪轨;自成佛迟速观之,除禅宗外,其余诸宗均须经三阿僧祇劫,密宗则主张即身成佛;自宗教之立场观之,密宗两部曼荼罗表现以人格主义思想为基础之世界观,由无量无数之诸佛菩萨,构成一即一切、一切即一之轮圆具足之世界;自教义体系观之,密宗为一种‘理智不二’之宇宙人生观,大日如来即具此伟大人格,智法身之世界称为金刚界,理法身之世界称为胎藏界。由修持之力,可将智之世界扩大至与理之世界一致,此即理智不二。

2唐密缘起编辑

密教始祖为法身佛大日如来(音译作摩诃毗卢遮那,又作毗卢遮
大日如来大日如来
那佛、最高显广眼藏、遍照王如来、光明遍照、大日遍照、遍一切处、遍照尊),大日如来传法金刚萨埵(与普贤菩萨同体,又称金刚手、金刚手秘密主、执金刚、持金刚、金刚持、一切如来普贤、普贤萨埵、普贤金刚萨埵),是为密宗第二祖。金刚萨埵据大日如来内证法乐之境界集成密法之两部根本经典――《大日经》和《金刚顶经》,并将之纳入南天铁塔(然其全息意义乃有情本身法界之塔也),以期待后世有缘者。释迦牟尼佛(化身佛)灭度后800多年时,龙树菩萨(亦翻译为龙猛)开启南天铁塔,亲自从金刚萨埵得受密法,为第三祖。龙树传法给其弟子龙智,是为第四祖。又过数百年,龙智700多岁时,传法给善无畏与金刚智,是为第五祖,史称“开元三大士”的善无畏、金刚智及不空于中国盛唐时先后自印度来华广弘密法,并经一行、惠果等祖师的努力,将金刚界、胎藏界两部大法集于一身,是为“两部一具”,因处于中国盛唐时期,故名唐密。

3三大士词编辑

玄宗开元年间,善无畏、金刚智和不空三位印度密宗大师先后来到中国弘扬密法,这就是历史上著名的“开元三大士”,中间经一行和惠果等的发扬,形成唐密。

善无畏

(公元637-735年):又译净师子,称无畏三藏,是中天竺乌荼国佛手王之子,出家后于那兰陀寺得遇达摩掬多尊者(即龙智菩萨)为其授胎藏界大法灌
胎藏界曼荼罗胎藏界曼荼罗
顶,为密教五祖。其后,善无畏三藏遵师命,携带佛经,绕道中亚,于公元716年(唐玄宗开元4年)到达唐都长安,后奉皇帝之诏翻译《大日经》于洛阳大福先寺。《大日经》为密教之根本经典,由善无畏三藏口述,其弟子一行阿阇梨记录而成。善无畏祖师传授以胎藏界(理)为主的密法,是为中国密教正式传授之始,故亦称其为汉地密教初祖。因其具备神通及对密教经典的精通与贡献,善无畏被唐玄宗尊奉为“教主”,入灭后其真身奉塔于洛阳广化寺之前庭。五祖善无畏的著名弟子除一行外,尚有温古、玄超、义林、智严、喜无畏、不可思议(新罗僧)、道慈(日僧)等。

金刚智

(公元663-731年):中印度王子,十岁出家于那烂陀寺,二十岁受具足戒,广习大小乘经律论。三十一岁依止南印度龙智菩萨受教,七年承事供养,受学一切密教,受金刚界灌顶传承,为密教五祖。寻游师子国登楞伽山,闻中国佛法盛行,于唐玄宗开元七年(719)由海路经锡兰、苏门答腊至广州,翌年至东都,敕迎于长安慈恩寺,寻徙荐福寺,于所住立大曼荼罗灌顶道场以大弘密法普度四众,并翻译密经,译有《金刚顶经》、《瑜伽念诵法》、《观自在瑜伽法》等八部十一卷。后示寂于洛阳广福寺,谥灌顶国师、大弘教三藏,金刚智亦为汉地密教初祖。门弟子有不空、一行、慧超、义福、圆照等。

不空

(公元705-774年):又作不空金刚,南印度师子国人
不空金刚不空金刚
,天资聪明,幼从叔父游南海诸国,其后出家,十四岁从金刚智三藏学悉昙章,诵持梵经,深获三藏器重,尽得五部三密之法。及五祖金刚智三藏示寂,遵遗命,往印度求  法,从龙智菩萨(普贤菩萨化身)受十八会金刚顶瑜伽及大毗卢遮那大悲胎藏各十万颂、五部灌顶、真言秘典、经论梵夹五百余部,并蒙指授诸尊密印、文义性相等。又遍游五印度,于天宝五年(746年)还京师,为玄宗灌顶,赐号“智藏国师”。不空三藏译出唐密的另一部根本经典《金刚顶经》。后有诏使住大兴善寺。自天宝至大历六年,译出密部之经轨,凡七十七部,一百二十余卷,密教之盛,此时为最。金刚智及不空两祖师的传授原以金刚界密法(智)为主,后善无畏与金刚智两三藏金胎互授,并分部将两部大法传授给不空祖师,六祖不空随集两部大法于一身,即“两部一具”,此即唐密的最突出特点,不同于以往印度密教的“两部分传”。不空祖师后期主要活动于西安大兴善寺,历任三代国师,他
青龙寺惠果空海纪念堂青龙寺惠果空海纪念堂
还是中国四大译经家之一,建立了梵语与汉字间严密的音韵对照组织,以解释咒语实义于其弟子。
不空祖师弟子众多,杰出者有金阁寺含光、新罗慧超、青龙寺惠果、崇福寺慧朗、保寿寺元皎、觉超,世称“六哲”,而以惠果祖师承其法系,受两部大法,是为唐密七祖。惠果祖师历任代宗、德宗、顺宗三代国师,:传法与;惠应、惠则、惟尚、誓弘、惠日、空海、义满、义明、义照、义操、义愍等;后传日本僧人弘法大师空海,其中义操和空海为正嫡;义操嗣青龙寺法灯,传出弟子义真、海云等,空海大师回国后,大弘密法,成为日本密宗――“东密”亦称真言宗”的始祖,史称弘法大师。自此,遂有东密之盛。延历二十三年(804),空海入唐,师事惠果,大同元年(806)返国,以时机相应,受朝野归仰。自来日僧入唐请回经籍者虽有所谓入唐八家,然得七祖之嫡传、化风之盛,则无出空海之右者,故以之为付法第八祖,并被尊为日本真言宗开祖。弘仁七年(816),于高野山创设金刚峰寺。弘仁十四年,嵯峨天皇赐予东寺(即教王护国寺),遂与金刚峰寺同为此宗之根本道场。门人甚多,以真济、真雅、实慧、道雄、圆明、真如、杲邻、泰范、智泉、忠延等十人最为杰出,或媲美为世尊之十大弟子。空海与此等门人大扬宗风,而予平安时代社会各阶层以极深之影响。然于空海寂后百年顷,事相之传承分成小野、广泽两大流派。即于真雅之下有源仁,源仁之下有益信、圣宝二哲。益信之后,经数代至宽朝时,其门流称广泽流;圣宝之后,经数代至仁海时,其门流称小野流。二者复各分六流,合称野泽十二流,其后更生三十六流、七十余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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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宗(佛教宗派)编辑[mì zōng] 

密宗,中国佛教宗派之一,包含真言宗金刚顶宗、毗卢遮那宗、秘密乘金刚乘等宗派。佛教密宗综合了各国家地区密宗的传承。密宗起先是有融合了中国道教内容的印度密教,八世纪时印度密教,由善无畏上师、金刚智上师、不空法师等宗派祖师传入中国,从此修习传授形成密宗。此宗派依《大日经》、《金刚顶经》等建立三密瑜伽,事理观行,修无上本尊秘法。
密宗以密法奥秘,不经上师亲自灌顶,不经上师亲自授三昧耶戒,并持执不怠,不经传授不得互相传习及显示非密宗信众,因此称为“密宗”。
祖庭——陕西西安的大兴善寺青龙寺(毁于北宋)。
虎衣明王 (藏语称为达拉美巴第一代生根活佛)是密宗三大师祖之一,他在以五胜金刚为主的修法中对所修法门作了详细阐释编撰结集研究,将父续密法与母续密法相结合,并传授给智藏龙师,称为子续密宗,也就是大圆满修法[1] 
中文名
密宗
类    别
中国佛教宗派
起源地
印度
祖    庭
陕西西安的大兴善寺青龙寺

1众知释义编辑

密宗
密宗(2张)
   密宗的修习方式起源甚早,许多仪式与修行方式可以追溯到早期的印度教传统(伟大的 释尊 时代已有念咒传统),但真正兴起 静慈园阿阇黎亲笔“唐密”二字的时间则是印度大乘佛教晚期(神咒乘),多数学者皆认同它是因为印度教复兴,大乘佛教修行者吸纳了印度教修行方式而形成的特殊教派。其特色是充满神秘色彩,重视神通、鬼神、及神秘体验,以密续(又称怛特罗),取代原先“修多罗”(义译为“经”)的地位,并以这些秘密教典作为修行的主要依据,在师徒间秘密传授。
密续的内容极为庞杂,汉传佛教分为三部,杂密胎藏界金刚界。杂密部多为仪轨、咒语,讲究神通与尊请鬼神等内容,缺少高深的义理,是密宗最早的雏形。
藏传佛教,依宗喀巴大师《密宗道次第广论》则分为四部:事续(所作怛特罗)、 行续(行怛特罗)、 瑜伽续(瑜伽怛特罗) 前三个史称老密、无上瑜伽续(无上瑜伽怛特罗)史称‘新密’。汉传的三部,与藏传的前三部相当:杂密,相当于事续;胎藏界,相当于行续;金刚界,则相当于瑜伽续。
由时间上来看,无上瑜伽续的发展最晚,只有少部份在宋代传入中国内地,并没
有造成大的影响,主要是在印度及西藏地区流传,成为藏传佛教中最有力的一只传承。无上瑜伽续之下,又分成“父续”、“母续”(也有分“父续”、“母续”、“无二续”的),父续中包含“密集”、“阎曼德迦”、“无上幻网”。母续中包括了“时轮”、“胜乐”、“喜金刚”、“幻顶座”等多个支派。
藏传佛教密宗中,部分地区又以金刚乘、果金刚乘或果秘密金刚乘作为密宗的别称。金刚乘(VAJRAYANA),源自梵文VAJRA(金刚)及YANA(即工具或通道的意思)。金刚乘是秘密大乘佛教用以与大乘小乘作区别而创造出的名称,因金刚(今天所说的钻石)是极坚硬、极完美的代表,代表了密宗的教法如同钻石一般完美,而且可以摧破一切外道错误的想法。严格来说,金刚乘是指无上瑜伽部的通称,有时专指时轮续,称为时轮金刚乘[2] 

  

  

  

  

2密宗部分特点编辑

佛教是唯一的最讲平等的宗教,佛法认为:任何有情本具有佛性,任何人通过正确的修行,都可以悟道成佛,了脱生死。“迷”即是凡夫,“觉”即是佛。然而,
这个从凡夫到佛的过程,道路有多种多样,如可以学禅宗、净土宗等等。正象我们要想到达一个目的地,可以有多种选择,或步行或乘车、或坐飞机,显然坐飞机是最快的选择,但并非人人都可以有坐飞机的条件,如经济条件等。同样学修密法除了需要有上师的传承作为外部条件外,还需要有累世的修行因缘作为内部的条件。
密宗
密宗的修行方法(简称密法),虽然在西藏得以保留完整,并广为流传,但在汉地却如凤毛麟角,甚至被人误解。随着全民健身热的兴起,“密宗”随着“藏密气功”的概念,被人所知,但是大多数人对这种佛教古老的修行方法的认识只是停留在“功法”的一般概念上,一知半解。
密宗黑帽系活佛舍利密宗黑帽系活佛舍利
密宗之所以“密”,不仅仅是因为修法秘密赖以师徒口耳相传为传承方式,而更主要是由于层次和知见上,更为直接,更为一针见血。佛经上说:一个人修显教要经过三大阿僧祗劫(一个相当长的历史时期)才能成佛,而修密宗则可以“即身成佛”。佛说:“一切诸佛以持真言而得成就。”持真言者,密法修持者也,金刚手菩萨的化身诺那活佛对密法的殊胜有这样的解释:“密宗能够即生证佛之理,譬如一个极坚固塞口之玻璃瓶,佛为瓶外空气,众生是瓶内空气,佛之所以为佛,众生之所以为众生,只因为一层极坚且厚之心垢玻璃为之隔绝也。密宗行人以大菩提心为因,并得金刚上师心传密法,以我之三密,与佛之三密感应道交,恰如用大锤,将坚固的心垢“玻璃”击得粉碎,立使瓶内空气与瓶外空气融合交通,故得即生成佛。
密宗又分为各种教派,如雍仲本教、格鲁派宁玛派噶举派等。在修法上各有其特点。无论何种教派,无论哪一种修行方法,在修法上无有高下之分,在知见上也没有根本区别,都是诸佛菩萨应众生不同的因缘而创立的,因而具有以下共同的特点。
开元三大士——善无畏祖师开元三大士——善无畏祖师
第一,以佛陀的心印传承为理论根据。即以流传了近三千年的佛教的真知灼见为依据。
第二,以佛法的中观见为究竟证见。即世界上的一切事物的本性是“真空”,即非“空”亦非“有”;既非“非空”,亦非“非有”,由此认识宇宙的万物都是从“真空”显现出来的“妙有”。“妙有”是显现,“真空”是本性。
第三,以诸祖上师的口诀为修行法则。即以三密相应:手结印契,口持真言,意作妙观贯穿整个修行过程,使身、口、意构成的自性与咒、印、观所构成的佛性相应,产生法性,扫荡有始以来的浮躁垢习,得大安乐自在。
第四,以胜义菩提心为究竟发心。即众生皆有佛性,在他们未成佛以前,都显现出凡夫相,为自己的私利造业,故而处于轮回之中受无量苦。因此在觉悟自己的同时,还必须以大悲、大愿、大行的菩提心来救度他人,觉我觉他,觉行圆满。
第五,以上师灌顶,师徒口耳相传为传承方式。上师是佛与菩萨的化身,他们担负着代法之责,为佛的代言人,起着承上启下的作用,确保佛陀的思想代代相传。
第六,以密乘十四戒律为根本戒律。一切修密之人,都需要用戒律来规范和修改自己的行为,持戒,守戒。而密乘教戒更因它的传承特点规定了不得叛离、诽谤依止上师作为根本戒律。
以上六点是密法的传承根本之一,离开了以上法点就不是真正的密宗密法。对于那些社会上流传的所谓的“秘法”等等各种功法,宣扬抛弃身、口、意,甚至抛弃上师,从根本上背离了密法的原则。孰真孰伪,很易判断了。我们学修习“密法”,应把“密法”当是扫除障碍,彻底断除烦恼习气,渡过人生苦海到达智慧彼岸的“渡河之舟”;而不应怀有一颗贪嗔痴之心,舍本求末,去追求修密过程中的逆感应“,如民间传闻开“天门”啦,“会飞”啦等等,甚至把密法当成是发财致富的门路之一。以此“贪嗔痴之意”学修习密法,必入心之魔境![3] 

3注重传承编辑

“密法在藏地得到了弘扬,而且可以肯定地说,藏密的传承是非常清净的。因为密宗非常注重传承,而且一定要口传,目的就是为了避免假冒之法的出现。有些密宗故意用很多奇怪的名词,外人无法理解,只有证悟的金刚上师们才能解释,同样也是考虑到鱼目混珠的问题。另外,藏传佛教还有一个特别之处,就是辩论,通过辩论可以澄清很多问题,无论任何一句话,都可以一直追溯,直到认定为佛陀亲口所说为止,因此,藏密的教义不会有任何问题。但是佛陀去世几百年后,由众僧侣弟子合编而成。

4源流发展编辑

印度密宗

密教来源有二说法,一是来自吠陀与奥义书,一是佛说秘密教门,密教的梵文叫怛特罗,意思是纺织时的经线,重述万物归一的哲学。密教也说人体是宇宙的缩影。

陀罗尼密教

密教的原始阶段
杂密,意思为不纯或不系统的密法。开元年间,开元三大士译出胎藏界与金刚界密续之后,这两部密续被称为纯密。相对于纯密,在它们之前译出的密教经典与咒语,都被称为杂密。
杂密部多为仪轨、咒语,讲究神通与驱使鬼神等内容,缺少高深的义理,是密宗最早的雏形。在胎藏界与金刚界密续(此二部称为纯密)出现之后,它的地位慢慢被取代。
藏传佛教,称呼它为事续,因为它需要倚靠外部的仪轨及咒语才能够得到相应。
它的内容极为丰富,包括祈福、祈雨、治病、安家、息灾,乃至于驱使鬼神、诅咒敌人,包罗万象。与印度传统的婆罗门教,中国传统的道教,西藏的雍仲本教,与中亚的萨满教,有许多相似与相关之处。
主流密宗有,藏密,(西藏),蒙密,(蒙古)东密,(日本)而密宗还分六大派,分别是宁玛派 噶当派,格鲁派,萨迦派,噶举派,觉囊派.而觉囊派已经很少有人修习了.密宗五教就是指以上的五大派,也叫五教.红教.白教.黄教.本教.花教.

持明密教

密法体系的初步形成
真言密教:《大日经》体系
大瑜伽密教:金刚乘的进一步发展

5秘密大乘佛教编辑

秘密大乘佛教,又称为怛特罗佛教密宗秘密教秘密乘密乘金刚乘真言乘瑜伽密教真言宗,是大乘佛教的一个支派,为印度后期佛教的主流。这一系的佛教,有不许公开传授,及充满神秘内容的特征,因而又被称为密教;而相对于密教,之前的佛教流派,包括大乘小乘,则被称显教。密教叩密突是因为不能向有分别念的人传授.在中国没落的唐密从民国初年已从日本传回台湾和大陆。

6无二瑜伽编辑

时轮乘
根据唐密的传说,密宗最早传承印度龙树菩萨〈或称为龙猛菩萨〉,关于这个龙树是否真有其人,若有其人是否与《中论》作者为同一人,尚有争议。关于密宗的传承,亦有人推源到佛陀的十大弟子之一的目犍连。从可得的资料分析,密宗于7世纪东印度的波罗王朝时期兴起,以《大日经》等的形成为代表,以那烂陀寺、欧丹多富梨寺、超岩寺等寺院为中心,各自活动发展。其中,早期的密教,通过开元三大士等人传入中国形成了唐密。中晚期密教以秘密集会、喜金刚、时轮金刚等法门为代表则主要进入了西藏。由于印度教的兴盛,佛教僧团日益衰败,内部派系纷争不已,从而日趋式微。后来又由于伊斯兰教和德里苏丹国的兴起,重要寺院被毁,僧徒星散,13世纪初,趋于消亡。密教大师把印度新密带到了高原。 新密无上瑜伽,主张即身成佛,,新密主张‘乐空双运’以证明即身成佛之可能。印度密宗曾经向南传播,锡兰、缅甸(阿利僧派)、爪哇等地都留下来密教的痕迹。中国密宗的创始人之一金刚智,在来到中国之前曾经把密教传播到锡兰,不空也曾带弟子二十七人前往该岛;在缅甸曾经出土过多罗菩萨像和双身拥抱的壁画,被认为和密宗有关;爪哇夏莲特拉王朝诸王,信仰密教,建立婆罗浮屠等多家寺院。但由于种种原因,密教传承在这些国家全部断绝了(全部成为小乘佛教)。

7汉传密宗编辑

杂密传入时代
开元三大士——善无畏祖师
在成体系的密宗形成之前,称为“杂密”的一些密法已经就传入中国,最早见于三国吴黄龙二年(西元230年)竺律炎译出《摩登伽经》,支谦译《华积陀罗尼神咒经》,《无量门微密持经》。 还有金光明最胜王经。

8密宗形成编辑

公元8世纪唐玄宗时代,印度高僧善无畏、金刚智、不空来华,史称〝开元三大士″。三位密宗大师,在大唐皇室的扶持之下,于长安的大兴善寺(位于今西安市)译出大量密教经典,宏扬密法。最重要的是于洛阳大福先寺由一行协助译出《大日经》,视为密宗“宗经”,此后逐渐确立了“密宗”的佛教宗派,现今则被称为唐密,又称真言陀罗尼宗、真言宗、金刚顶宗、毗卢遮那宗、开元宗。
唐开元八年,南印度密教高僧金刚智经南海、广州抵洛阳,大弘密法。金刚智于开元十一年至十八年,先后在长安资圣寺、大荐福寺译出《金刚顶瑜伽中略出念诵法》等经4部。其弟子不空曾奉师命赴狮子国(今斯里兰卡)学习密法,回中国后先后在长安、洛阳、武威等地译出《金刚顶经》、《金刚顶五秘密修行念诵仪轨》等11部,143卷。《金刚顶经》后亦为密宗所依的主要经典。他们的传授以金刚界密法(智)为主。不空著名弟子有金阁寺含光,新罗慧超,青龙寺惠果,崇福寺慧朗,保寿寺元皎、觉超,世称“六哲”。而以惠果承其法系。惠果曾任代宗、德宗、顺宗三代“国师”。其弟子有爪哇僧辩弘、日僧空海等。
汉传密宗主要的道场包括长安的大兴善寺、青龙寺和扶风县的法门寺。传统上,以开元三大士传入的胎藏界《大日经》,与金刚界《金刚顶经》合称二部大法,称为“纯密”,而称以前所译出的为“杂密”。

9佛顶尊胜信仰编辑

尊胜佛顶,一名佛顶尊胜,亦名除障佛顶。是五佛顶之随一,尊胜陀罗尼之本尊,即释迦如来由佛顶现出之轮王形,为佛顶尊中之最尊,故名尊胜佛顶,能除一切惑业,故名除障佛顶。尊胜佛顶修瑜伽法仪轨下曰:‘一切佛顶中,尊胜佛顶能除一切烦恼业障故,号为尊胜佛顶心,亦名除障佛顶。’同下曰:‘释迦牟尼如来,结跏趺坐,作说法相。(中略)尔时世尊慈悲愍念,便入除障三摩地,从如来顶上发生惹耶三摩地,状若轮王之像,白色,首戴五佛宝冠,手执金刚钩,项背圆光,通身如车轮状,晖曜赫奕。现此三摩地时,十方世界六种震动,十方世界一切地狱六趣众生应堕恶道者,皆悉灭除,一切恶业不复受,若便生天及十方清净国土。为此善住天子七返恶道之身一时消灭,是故号为除障佛顶轮王,即是五佛顶轮王之一数,并通三佛顶八大顶轮王也。’佛顶尊胜陀罗尼念诵仪轨曰:‘即于山间空闲处,或于净室,画本尊尊胜陀罗尼像安于东壁,持诵者以面对之。’

10毗沙门天王编辑

毗沙门天王又名北方多闻天王,为佛教护法之神,四天王之一。据说,他是古代印度教中的天神俱毗罗别名施财天(意思是"财富的赠予者"),早在印度古代伟大史诗《玛哈帕腊达》等书中就已出现过。又说吉祥天女和他关系密切,是他的妹妹或妻子。在古代吠陀神话中,毗沙门天王本是帝释天的部下。后因帝释天在神话流传中的地位越来越低,尽管佛教传说中还保留其名,然势已微弱,毗沙门天王等便逐渐脱离了他,独树一帜。在中国早期佛教中,他们之间的关系就已若即若离了。
更有甚者,在唐不空译《北方毗沙门天王随君护法仪轨》中还记述说:天宝元年(742年),安西城被蕃军围困,毗沙门天王于城北门楼上出现,大放光明。并有"金鼠"咬断敌军弓弦,三五百名神兵穿金甲击鼓声震三百里,地动山崩,蕃军大溃,安西表奏,玄宗大悦,令诸道州府于城楼西北隅置天王像供养。一时毗沙门天王声威大震,香火极盛。

11传统信仰编辑

由葱岭通向龟兹的第一大都是疏勒。疏勒之传进佛教。理应早于龟兹。《后汉书?西域传》载,元初(114-120)中,疏勒王舅臣盘被徙于月氏;及至疏勒王死,月氏送臣盘归国,立为疏勤王。《西域记》载,迦腻色迦王兵威至于葱岭以东,“河西蕃维畏送质子”。迦王为此质子住处建立专门伽兰。有学者认为,此质子当就是臣盘。臣盘后回国为王,在疏勒推广佛教是当然的事。据后人历次游历疏勒的记载,此地供养“佛浴床”、“佛钵”、“佛唾壶”、“佛袈裟”等佛遗物非常突出,明显地保留着早期佛教的特色,所以僧人也尽是小乘学者,偶尔才有外来的大乘僧人出现。国王大都是佛教的提倡者。
在大月氏北部的康居,佛教也颇流行。到3世纪,康居的译经者来汉地已有不少,如汉灵帝时的康巨、献帝时的康孟祥、曹魏时的康僧铠、孙吴时的康僧会等,所译经典大小乘都有。他们大都是随其先人或经商,或进乱辗转进到汉地的,有的在汉地定居已经数代,因此,他们译出的经典不能完全代表康居的佛教。但他们都信奉佛教,是由康居带来的传统。
准提法 (一) 准提法是一门无上甚深的妙密法,亘古相传,有无量、无数、无边的古佛,皆以修习此法门而成就。
(二) 它是显密圆通成佛的心要,融合了禅宗心法、密教精要、贯通了观心、观音,念佛诸法门,并结集了天台宗、大小止观、禅密要法、不净观、白骨观等佛法精髓于一体。兹分别略释如次:
⒈ 显教(净土宗):就教理而言,准提法所探讨的是一个人生命的根本,目的在转化人生的烦恼。它同时包含持名念佛、观想念佛和实相念佛、并以“自性弥陀(自性光明-无量寿、无量光)、唯心净土”来强调信、愿、行。
⒉ 密宗:就修行上言,准提法以修气、修脉、修明点来做为修证的架构。明点与气脉息息相关,如果只谈修气、修脉、讲究气功,那就与道家没有两样。但密宗的可贵处即在“修明点”,“明点”是智慧的一种表征,用功到某种程度,三轮七脉自己都会知道,对色身的转化(健康)是可以肯定的。
⒊ 准提法是心地法门,与禅宗心法,般若正观等无差别。所谓“直指人心、见性成佛”,准提法“圆满次第”即等于“实相念佛”。心月轮观由开始至纯熟,从有相到无相、大而无外、小而无内、真空妙有,皆与整个法界相应。
⒋ 准提法门也具备了小乘的修行门路,如不净观、白骨观皆是准提法门的基础入手处;同时,准提法也是华严法界观,必须福慧双修、解行并进才得契入。
(三) 禅、净、律、密各有所长,亦各有所短,而准提法则综合了各宗各派之所长,将见地、修证、行愿皆融会贯通于一炉,堪称为真正的大圆满。
(四) 准提法门统合了文殊、普贤、观音三大菩萨的精神:
⒈ 文殊菩萨表征智慧光明,在一切境界中放得下,了无挂碍,与“空、无相、无我”相应。修持准提法门相当于“南无(皈依)七俱胝大佛母准提王菩萨”,而佛母乃诸佛之母,大佛母乃大般若。故准提法门即是大般若--般若正观的法门,修至“圆满次第”即证入一真法界、毗卢性海。所以准提法门含摄了文殊菩萨的大智慧。
⒉ 普贤菩萨表征法界重重无尽的大愿海,象征一个人有着大气魄、大力量。他的精神启示我们要在任何境界中提得起、切得断、踏实践履、勇于承担、开扩心量、包容一切、敬人敬事、广结善缘、培福修德。而准提法实际上即是华严境界,它所显现的就是佛陀的本怀,和每个人的本地风光。故唯有在日常生活中,待人处世上,实际行持六波罗密,心中常保清净无碍,才能与法相应,当然森罗普贤菩萨的大行大愿了。
观世音菩萨大慈大悲,成就耳根圆通,寻声救苦,普渡众生,利乐有情。而准提法门的金刚念诵念得纯熟了,即可以达到“耳根圆通法门”所讲的“初于闻中,入流亡所,所入既寂,动静二相,了然不生”的效果,让我们契入“心气合一、能所双亡”的境界,与“空、无相、无我”相应。
总而言之,准提法门是一个道道地地真修实证的法门,也是一个含藏无尽宝藏的法门。从心灵的开发,到色身上、气质上的转化,乃至让我们明心见性,成就无上菩提的大业,它可说都为我们勾勒出了一幅非常美妙的修证蓝图。所以只要你具足信心,依教奉行,锲而不舍,蓦直修练,则功德自在其中,福慧亦将不断增长,而改善健康,消灾免难更是理所当然了。

12成佛功德编辑

一、身无失。二、口无失。三、念无失。四、无异想。五、无不定心。
六、无不知已舍。七、欲无灭。八、精进无灭。九、念无灭。十、慧无灭。
十一、解脱无灭。十二、解脱知见无灭。十三、一切身业随智慧行。
十四、一切口业随智慧行。十五、一切意业随智慧行。
十六、智慧知过去世无碍。十七、智慧知未来世无碍。十八、智慧知当前世无碍。
无上瑜伽经典的传译和中断 无上瑜珈就是安祥。
密宗最高的是‘无上瑜伽’的心态,它和上帝、佛是一样的。这个法已经失传了。
安祥就是‘无上瑜伽’,至高无上!没有比安祥更高的。这是正法,很难遇。
密宗有三系:一个是‘藏密’,莲花生大师从印度传来的;一个就是‘台密’,五台山的密宗,最高级的是止观法,是唐朝五台山的祖师传来的法,如白衣神咒等;第三个,日本佛法回流的‘东密’(东洋的密宗)。三者的躯壳融为一个的使命和发展,使之成熟的要领就是无上瑜伽。
诺那活佛说:‘禅是大密宗!’大密宗就是‘安祥’-‘无上瑜伽’。
无上瑜伽和其它瑜伽的区别在于,它更注重对心的要求,即把修心放在首位,它认为只有我们更好的控制自己的心态即对意志的控制,才能最终达到无上的境界;什么是无上境界,就是无欲无求,直至心如止水,意识外放,最终达到生即是死,死即是生,善即是恶,恶即是善,好即是坏,坏即是好的至高境界;从而达到佛陀所说的众生平等,人人可渡之无上心态。
唐朝后期,唐武宗下令取缔佛教,代之以道教,佛教各教派遭受沉重打击,深受皇室器重的唐密也不能幸免,虽然唐宣宗继位后立即宣布恢复佛教,但唐密已逐渐式微,系统性的两部大法传承趋于隐没,主要原因是合格的阿阇梨阙如,坛场仪轨也很难完备。至宋初,虽稍有复兴迹象,但仅限于译经,不过,这并不意味着唐密开始消逝,因唐密的许多真言、本尊法门和别尊曼茶罗已逐渐融入到其它宗派之中,如《药师法》、《准提法》、《孔雀明王法》、《秽迹金刚法》、《瑜伽焰口施食法》等一直广为流传,许多真言密咒被列入日常课诵,一并被广泛运用于佛教法事活动至今。因此,有专家称唐密已成为隐身于佛教各宗派中的“寓宗”。

13密宗复兴编辑

唐密在盛唐时期盛极一时,然至晚唐已露衰微端倪。到了宋代,虽尚有法贤、施护、法天、天息灾等一批译师继续译出大量密部经论,然在教理上已无多发明。元代所弘传者非纯正密教,乃是印度后期密教和藏地风俗结合后形成的藏密,明清两代亦大体如此,且主要是基于政治上的考虑,同时,其流传也仅限于宫廷和贵族阶层,民间不得随意传授。因此,总起来说,唐密自元代以后,在中国内地基本上是中断了。而这中断的唐密,却在民国时期得到一时复兴,成为当时佛教界的一大奇观。
最早赴日学密的是江西的桂伯华。他大约于清末的1906年前后赴日本留学,到民国四年即1915年三月病逝于东京时止,计有十余年,但其在国内影响甚微。随后,出家僧中赴日学密的逐渐增多,先后有大勇、持松、显荫、曼殊揭谛(纯密)、谈玄等在东密根本道场高野山学习密法后带回中国。居士界则有顾净缘、程宅安等。
当时的佛教界领袖太虚大师对此十分关注,曾说:“诸师接踵东渡,人才济济,绝学有重光之望矣。……考其数人中,于教理素有研究者,只大勇、持松、显荫诸师耳,故真能荷负吾国密宗复兴之责任者,亦唯其三人耳。”(太虚《中国现时密宗复兴之趣势》,文载《海潮音文库》二编《真言宗》)
大勇法师于1919年依太虚法师出家,1922年冬入日本真言宗高野山大学,专修密法,经一年左右,得阿阇黎位,乃于1923年10月回国,仅三、四个月即先后在上海、杭州、武汉等地开灌顶坛十余次,皈依及学法者达数百人之多。一时,中断千年之久的唐密,顿显重兴之势。然佛法深奥,有情体悟各殊。由于当时学法时间短,且侧重事相,忽视教相,大勇对密法的理解受到其依止上师金山穆韶大阿阇梨的批评。金山穆韶大阿阇梨在《弘法大师之佛教观》中说:“然嗣后于支那刊行之《海潮音》之杂志,见有大勇法师发表于关于密教之论文,似于弘法大师之佛教观,有不充分纳得大师教义之处,甚为遗憾焉。由是,余草一文,欲匡法师之谬见。”后来他转而入藏,惜中途病故。
显荫法师于1923年冬到达日本高野山的,次年春回到上海,然仅过半年即因病圆寂了,年仅二十四岁。显荫法师天资聪明,慧解过人,可惜未能展其雄才,骤而英年早逝。
持松法师与大勇法师一同东渡,于高野山依金山穆韶大阿阇梨修学古义真言宗密法,得三宝院流五十一世传法阿阇梨位,1924年春回国。先于上海传法,后于是年夏应邀至武汉任洪山宝通寺住持,并开坛传法,并在宝通寺内建造法界宫、瑜祗堂、五轮塔,购置各种法器,请人绘制诸尊曼陀罗,使洪山宝通寺一时成为唐密重兴之根本道场。后法师又乘赴日出席亚洲佛教大会之机,续留东瀛学法,再得新义真言宗传法院流、古义真言宗中院流两个阿阇梨位,并专习台密仪轨,于事相教相均融会贯通,影响甚巨(详见第二节)。
总体来看,上世纪的“密宗热”对社会重新接触认识密法,起到了非常重要的作用。但无庸讳言,也产生了一系列问题,其中问题的症结要么是“不如法”(越三昧耶传授、非器传授),要么是缺乏大小乘根基,要么对密典歪曲理解,还有非常重要的一条就是失去了大乘戒律的制约。这也是民国时期密法热不能持久的根本原因。因此,唐密回传的历史任务也就无法圆满完成,期待着后来者再续前缘。

14持松法师编辑

持松法师(公元1894(甲午年)-1972年),现代高僧。俗姓张,法名密林,因慕名玄奘,自号师奘沙门,因修密受灌顶,又号入入金刚。法师出生于湖北省荆门县(现荆门市)沙洋的一世代书香门第。17岁时感人生之无常,投铁牛寺出家,后往远安县观音洞居住。1913年往汉阳归元寺求戒。戒期后,往禅堂,一心参禅。1914年,适闻月霞法师在上海办华严大学,欣然投试,被录取,师事三载,对大小乘经论,各宗教义,深有所得。1917年随月霞法师赴归元寺及宜兴、盘山。七月随居常熟兴福寺。半年后,月霞法师示寂,次年二月,嗣法月霞法师接任兴福寺住持。五年中:偿还积债,赎回寺产;两次传戒;设华严预科学校;授课之余,撰《摄大乘论义记》十卷,《释迦如来一代记》一卷。1921年,受太虚法师之邀于杭州净慈寺讲《八识规矩颂》,再次传戒,度僧百人。次年春,先赴汉口九莲寺学校,讲《摄大乘论》,旋至武昌佛学院,讲授《观所缘缘论》、编《观所缘缘论讲要》一卷。后杖锡安庆迎江寺,讲《十二门论》。1922年冬,因阅《法轮宝忏》,深感瑜伽宗密义难解,且原在我国盛行于唐,久已不传,而今仍盛行于日本,遂立志挽回千载之绝学,毅然辞去兴福寺方丈之职,孤身东渡日本,礼高野山五十世阿阇黎金山穆韶,习古义真言宗,得五十一世阿阇黎位,上师赐灌顶,号入入金刚。后因东都地震,加之川资告磬,遂归国,旋赴杭州菩提寺为信众结缘灌顶。1924年春,武汉佛教界暨两湖巡阅使萧珩珊(萧耀南)、李香庭、汤乡明、李开先、陈元白等迎请来鄂主持武昌洪山宝通寺。法师来此,讲经传法灌顶几无虚日,其《自述》说:“两年中,先后受灌顶者数万人,是五代以来所未有也”。
1925年秋,法师随中国佛教代表团赴日本东京参加亚洲佛教大会。会后至新泻县,从权田雷斧大僧正受新义真言宗各流灌顶,得“新义真言宗传法院流相承血脉──密林第四十九世阿阇梨位”。次年,赴京都比睿山延历寺,习台密仪规。卒业后,再赴高野山依金山穆韶再受三宝院安祥寺各流传授及口诀,兼习梵文文法,得“高野山古义真言宗中院流引方血脉──密林第六十四世阿阇梨位”,尽得铁塔正传血统一脉。1927年归国。抗日期间,法师蛰居欧阳竟无大居士所购赠之上海圣仙寺,杜门谢客,拒敌伪之所诱,如是数载。1947年3月,上海静安寺恢复十方丛林选贤制,法师被推为住持,兼任静安寺佛学院院长。次年创办《学僧天地》月刊,担任名誉社长。
1949年,中华人民共和国成立,先前有人劝持松法师去台湾,为其婉拒,随继续住持静安寺。1953年,在静安寺设立唐密道场,恢复在我国失传已久的唐密。此后,被选为中国佛教协会常务理事,上海佛教协会副会长、会长;上海市人民代表。1956年,随中国佛教代表团赴尼泊尔参加第四届世界佛教大会。1957年,率中国佛教协会代表团赴柬埔寨参加释迦牟尼涅般2500年周年纪念庆典。1964年,随中国宗教代表团出席在日本召开的第一届世界宗教徒和平会议,并多次出访尼泊尔、缅甸、日本、印度尼西亚、柬埔寨等国。1972年法师自感来日不长,墨书毛主席诗词、法华碑文、圣教序、兰亭集序等馈送诸友。11月16日,于入寝定中安然圆寂。法师示寂于上海,而塔于常熟虞山兴福寺,并设纪念堂于静安寺,世寿七十有九,戒腊五十。
持松法师爱国爱教、爱人民、爱和平,功德无量,高山仰止,受到了人们的普遍尊敬,他被选为人民代表,多次受到党和国家领导人的亲切接见,每次国庆节都应邀登上观礼台,参加检阅典礼,他和海内外许许多多为祖国为人民鞠躬尽瘁的精英诚挚交往,以其学识广博,待人真诚,富有智慧,赢得了许多高级知识分子和广大信众的称赞与敬重。
持松法师生前结缘灌顶人次众多,超晔等居士得到良好法理熏陶,并培育指导多名优秀唐密行者。

15唐密回传台湾编辑

五智山光明王寺--悟光上师
悟光上师,法名悟光,字全妙,传临济宗竹溪寺眼净老和尚暨日本佛教真言宗高野山派金刚峰寺中院流法脉,为台湾佛教真言宗五智山光明王寺第一代传灯大阿阇梨, 上师俗姓郑,台湾高雄县内门乡人,生于民国七年(十二月五日,离开娘胎落地之时,即颈缠脐带、两膝跪地、双手握拳,有如僧人颈悬念珠,双手合掌拜佛之势,实慧根夙备乘愿再来者也。
上师幼学时,即聪慧过人,灵动机巧,同侪间嬉戏,每装扮佛道礼拜仪式模样,显现出善根宿植。于国校五年级时,即向当时学校日籍老师预言:将来收音机会如香烟盒般大,可置于口袋;在家中高坐即能欣赏电影,不必去戏院;打电话不必经交换机接线,全世 界到处都可以通话,并看到对方真面目;电线将全面地下化;又言会发明人体分解术,将人光化,瞬间往返各地,诚轻而易举事,所言之语全证诸事实,无 不令人讶其巧思慧心,不与俗同之独特卓见。
上师力慕高远,志切宏博,勤阅藏经,苦参禅法,诸方耆宿,莫不赞奖。其后随贡噶老人 - 申书文,再习藏密。然而上师虚怀自御,不自满意,竟而独入六龟深山,结茅荒涧,抑志深修,持咒阅藏穷研诸家典籍,亲证历代法案,于禅录之外,兼及语疏,复及密部。悟密旨所寄,不在简册,若欲求融,应当另行筑求。
上师于六龟深山闭关阅藏时,知有绝传于中国之真言宗,广布日本已达千余年,期间国内颇多高士欲赴日习法,或不得其门而入,或未获其堂奥,虽于民国年间或有弘传,然以中辍。故发心亲往日本求法,遂于民国六十年六月远渡东瀛,入日本高野山金刚峰寺,依中院流宣雄大阿阇梨攻习金胎两部,三昧五观,刻苦修证,获阿阇梨位,并嫡传中院流,登第五十四世传法大阿阇梨位,从此真言法脉再回流此土。
民国六十一年,上师获授‘大阿阇梨’位,返回台湾,勤于弘法教化。先后分别蒙高野山真言宗管长大僧正‘高峰秀海’颁授‘大僧都’之位,管长大僧正森宽绍 ,再授‘少僧正’之位,并应允披紫色衣之荣耀。民国七十年,以【生活禅】一书,获美国联合大学夏威夷太平洋学院颁赠‘荣誉哲学博士’学位。
上师六十一年返台后,随即于竹溪寺‘一真兰若’(后易名‘妙明精舍’)开坛传授真言教法,并成立‘佛教布道所’,展开各地讲经弘法工作。翌年,首创道场于台南,适有信众捐赠‘龙山内院’为密教布教所,经整修后,于民国六十三年落成启用,即为今日之‘真言宗光明王寺台南分院’。民国六十九年,因信众日益涌增,又于高雄市左营购屋创立‘真言宗光明王寺高雄分院’。民国七十年,于美浓镇建‘造化庐’为龙肚道场,真言宗总本山筹建工作因之露出曙光。上师愿力弘深,佛力加被,民国七十三年,有人建言,内门旗山交界,向称明秀,识者许为圣域,既谋弘大法,可藉以为基地,故请之临鉴。 上师乃偕五智山光明王寺众往观亲视,登临展望,大加赞许,且说偈言:
左旗右鼓峙楠仙 凉伞高耸入西巅
龙吟雨化圆潭月 虎啸风云岫口烟
玉梳挠起东方日 禄马交骋护八边
威音留下空王地 镇在五智山中天
吟毕,告示随众:我初得法之时,于东瀛金刚峰寺发愿,誓持所学,归还我土,重兴密法,追继唐朝开元盛期;及归国以来,开教所、设讲院、立道场、不遗余力,今日遇此佳壤,堪充瑜伽密教重振之基,何其幸运!希望诸君共同于此创立密宗根本梵刹,为我密宗开别生面。上师遂将此地命名为‘五智山’,全名为‘五智山真言宗光明王寺’台湾总本山。随众遵聆教言,连袂奋起,集资纠力,开荆辟棘,合力垦植。于七十九年三月动工,十年间,光明王寺从地涌出,万佛宝塔凌空显姿,民国八十八年十月大殿工程毕竣。上师于开山期间,为弘法利生亦奔走各地,先后又于台北、香港二地分别设立了‘光明王寺台北分院’、‘光明王寺香港分院’。
台北大毗卢寺--成观大法师
成观法师:台湾大毗卢寺住持、美国遍照寺住持。台北市人,1947年生,1988年7月于美国纽约庄严寺住持天台宗第45代传人显明老和尚座下披剃,同年于台湾基隆海会寺受三坛大戒。
学历:
国立台湾师范大学英语系毕业
台大外文研究所肄业
美国德州克里斯汀大学英研所研究员。
佛学经历:
美国德州闭关三年(1984--1987年)
俄亥俄州闭关半年(1990年)
日本高野山真言宗第五十三世传法灌顶阿阇黎(1996年)
大毗卢寺系由释成观法师于民国八十年 (1991年) 六月创办,当时名为“大毗卢弘法院”,院址设在北投温泉路,并向中国佛教会登记为团体会员。同年十月,即由北投迁至台北市文山区(景美)现址迄今。其后于民国八十四年(1995年)本寺于第一次内部整修后,即改名为“大毗卢寺”。
本寺所修之法门,以禅密为主体,而兼容他宗。所修密宗者,则系真言宗,即俗称之“东密”,此即唐朝日本弘法大师(大师出家法号空海,“弘法大师”之号乃日本天皇所赐)渡海到中国长安、青龙寺,由惠果阿阇梨亲传的“三国传灯”之正统如来密教 (三国者,印、中、日也) 。此密教在中华即称为“唐密”,弘法大师传入日本后,发扬光大,传承至今不断,即称为“东密”(以其最初设坛灌顶系在京都之“东寺”,故名)。惜乎在唐武宗毁佛之后,密教在中国即一蹶不振,几乎断绝,逮至明太祖昭令禁止设立密坛,密教馀绪可说完全中断。兼以元、清两代内廷提倡喇嘛教,更使正统密教的真面目鲜人得知。成观法师于1990年前后,于美、台各地参学藏密、唐密、东密,并于1991年开始,至日本真言宗的总本山、高野山(弘法大师所创之真言宗总本山),修学真言宗密法。六年之间辛勤往返,终于完成学业,于1996年8月8日入坛受金胎两部大法传法灌顶,得阿阇梨位,是为三国传灯真言宗第五十三世阿阇梨。

16日本密宗编辑

  因唐朝中期中日交流的密切,唐密由日本弘法大师空海传入日本创立真言宗,又因以东寺为发源地,故称为东密。另有台密,为同期入唐交流僧最澄大师所创,亦称理秘密教。东密体系于空海大师已大体完备,台密体系是于最澄法子法孙继续赴唐交流而成。由此瑜伽密教盛行于日本。

17东密编辑

东密因其是大日如来的真实言教,故称真言宗。开祖为弘法大师空海(774-835),根本经典为《大日经》(善无畏译)、《金刚顶经》(不空译),称为两部大经。另又依《苏悉地经》、《瑜祗经》、《释摩诃衍论》、《菩提心论》、《大日经疏》等经轨与论释。此外,空海大师自撰之《十住心论》、《秘藏宝钥》、《辨显密二教论》、《即身成佛义》、《声字实相义》、《吽字义》、《般若心经秘键》等亦极为重要。其教义大纲系讲说六大(体)、四曼(相)、三密(用)等三大圆融,建立两部曼陀罗,而以‘即身成佛’为其主旨,自空海极力弘传,依据显密二教判与十住心而建立横竖二判之纯密教,以表示胜于其它诸宗。可见,东密完全承袭唐密,也就是说,东密就是原汁原味的唐密,同时,十分重视空海大师的思想。密宗虽衰绝于印度、唐密不显中国,却于日本直传至今,实乃不幸中之大幸。
延历二十三年(804年),空海和尚入唐,师事七祖惠果,惠果大阿阇梨将密法无遗地传于空海和尚,是为唐密八祖。空海大师于大同元年(806年)返国后,先于高雄山寺造坛灌顶(弘仁元年,810年),又于高野山建立真言宗根本道场(弘仁七年),后再得赐东寺(即教王护国寺),建立灌顶道场(弘仁十四年),遂又称真言宗为东密。
东密门人甚多,以真济、真雅、实慧、道雄、圆明、真如、杲邻、泰范、智泉、忠延等十人最为杰出,或媲美为世尊之十大弟子。空海与此等门人大扬宗风,而予日本平安时代社会各阶层以之影响。空海寂后百年顷,事相之传承分成小野、广泽两大流派。然中世以来,一些真言宗的僧众提出,大日如来的本地身不说法,说法的是大日如来的加持身,这一见解有别于传统法义,由此形成了新义真言宗一派,相应称坚持传统法义者为旧义真言宗。究其实质,新旧义的区分缘于对佛法特别是密法欠缺真正体悟,只是执着于文字相,于修证没有丝毫意义。

18三昧耶戒编辑

在纯密传入中国的唐代,密僧们仍然保持着重视戒律的传统。而且为了适应密宗复杂的事相,规定实行密法咒术的次序仪轨,专门的密教律也应运而生。善无畏翻译了含摄密教戒律的《苏悉地揭罗经》与《苏婆呼童子请问经》,并为《苏悉地经》作供养法,使之广泛流播。
密教的戒律称为三昧耶戒。“三昧耶”在梵语中,是“誓言”的意思,而广义的说,它有平等、本誓、除障、惊觉四种含义。
三昧耶戒之含义(见《大日经·具缘品》、《大日经疏》卷九、胎藏入理钞)
三昧耶戒的戒体是众生本有的清净菩提心;行相为法界无量万德;而戒相则为《大日经·具缘真言品》列举的四种重戒。
四种三昧耶重戒列表
此后,四重禁戒又发展成密教十重戒,在不同的经典里有不同的说法,但只是条文开合的不同,内容上并无太大区别。
密教十重戒的两种说法
总摄上说,汉传密教三昧耶戒之戒相可归纳为如下十戒条文:
在《大日经疏》 卷九中,列举了违背三种违背三昧耶戒的重罪:

19西藏密教编辑

自唐文成公主下嫁西藏(贞观15年)印度佛教也随而导入西藏,兴建佛寺。但该时所谓的《金光明经》大概都是为了除灾、护国、正法治国等思想,无论如何皆以王室、贵族为中心来展开。与其说西藏贵族对佛教深邃的思想体系有深湛的认识,不如说是重视咒术的机能为其主体。只求现世利益与死后冥福,成为以王室为中心的上层阶级的贵族佛教,所以说明护国思想的《金光明经》最受西藏的崇拜,此点与日本的容受佛教类似。
763年代西藏的政治军力大振,王室采信印度佛教,虽然期间也有排佛派出现,但王室仍派遣学僧于印度那烂陀寺迎请有名闻的寂护入藏。寂护对于密教造诣深高,宣讲十善等显教思想,后来崇佛思想隆盛,继由寂护介绍迎请莲花生入藏,莲花生善于咒术,咒缚上着邪神而调伏之。善显神变而为西藏人民所崇隆。莲花生的咒法有佛教基盘与地方旧有宗教的结合,并摄受融合下层阶级的信仰,随成为宁玛派。
779年西藏从印度迎入十二名有部律僧,在贵族中选出六名秀才出家,这是西藏僧侣之始,由当时中国输入的印度经典,受王室的拥护也由此开始,同时对地方土教用密教咒法极力压制,确立了中央集权的政治体制。当时为了维护贵族的封建社会体制,因此西藏贵族则尽力采取密教修法中的息灾法、增益法。但是在印度兴隆的无上瑜伽部密教和都认为破坏其体制的降伏法、咒诅法都极力避免输入。其经轨除敕许以外,皆禁止翻译。
792-794年,印度僧之代表莲花戒与中国佛教代表摩诃衍在西藏王前举行对论,当时莲花戒得到胜利,西藏遂成为印度系的佛教天下。历代国王为维护正法治国起见,宣说佛教的十善业道与十善戒,强调无念无作。当时王朝采取印度渐悟佛教而放弃中国僧摩诃衍的顿悟佛教。当时所翻译经典虽然有密教佛典,但是属于瑜伽部的经典却是很少。后来迎请印度阿底峡后,才渐渐呈小型密教倾向,佛教与民众也渐渐融合,而不可分。最后西藏受了印度无上瑜伽部密教的影响,其后期佛教出了不少优秀大德,并且与其弟子集团各形成了不同宗派,而各派均受民族集团之支援而确立了教团基础。十二世纪以后,教团参与政治,遂成教权与政权一手掌握之宗派出现,后来佛教各派内部对于前期的戒律主义思想渐趋颓败,以致引起佛教之改革运动。
在经典之翻译上也渐次摄取了无上瑜伽部密教。其代表性的翻译有般若、母旦特罗经典,其中“时轮”系葛支派马尔巴等瑜伽修法均陆续出现。但是西藏树立了新教学的是阿底峡,他着有《菩提道灯》,声闻缘觉(小乘)、波罗密(大乘)、真言(密教)三乘,都是现存且价值性颇高,自成一体系的组织者。在判教上,以无上瑜伽部密教为其最高位。由此联带的提升了波罗密与真言乘的要谛而取菩提心教说,这是菩提心与般若方便融合不二的无住涅盘的理论,但事实上也是一切佛教者的归结点。故若将菩提心当做佛教的究极原理以做为佛教者的自觉根本条件来看,则无上瑜伽部密教的修道与戒律甚至大乘佛教思想,非加以提升不可。所以显教从中观,密教则般若、母旦特罗。其后,西藏又有马尔巴等所起之葛支派萨迦耶派等各派人才辈出。马尔巴受法于印度那尔巴,梅特利巴、帝尔巴,归回西藏独成一派,那尔巴之六法对葛支派的影响很大,葛支派之教义,修道法上,具有无上瑜伽部之般若,母旦特罗的浓厚色彩。葛支派是经马尔巴的弟子密勒日巴、甘波巴,并集加丹派教义以大成。甘波巴的弟子童逊剑巴重新创立葛尔玛派,继承了葛支派传统,此后西藏佛教,给长期演变,遂形成了化身喇嘛的制度,信仰当代之喇嘛为先代之转生,由此相续了其化身喇嘛的教团。以迄于今。萨迦耶派与葛支派一样,都宗奉般若、母旦特罗。萨迦耶派还许可带妻,代代父子传承。
西藏黄教的宗喀巴,在其教学中,把握了戒律与大乘根本思想的特色,而以密教无上瑜伽部为其学习条件。其代表著作有《菩提道次第》与《真言道次第》。《菩提道次第》是通达小乘、大乘及般若上中下人士之道,以大乘止观为上位,最后一切归入《真言道次第》,即密教立场的最终目的。宗喀巴尊重阿底峡的教学,但其密教观却受葛支派的影响。宗喀巴创立的宗派,称为清净派或黄帽派,以严格的戒律与独身主义为其标榜而宗风大振。或有人云其避免所谓信仰“兜率天”之快乐主义的暗示而改称为清净派。黄帽派是对红帽派(即西藏宁玛派)而言的名称。宗喀巴没有宗派执着,随从很多大德,学了很多佛学。以比丘的立场,宣扬三乘并存之佛学是值得赞叹的。
其他,有如白教系,则相承于那鲁巴以至于贡噶狮子。传有大手印道,为其修道之至极。实修中有父母双融法,均从父母续展开,历代皆有成就者出,如噶玛巴大宝法王都是先代的喇嘛转世者(呼必勒汗)。民国缔造后传教于各国,备受尊重者他一人也。
西藏佛教完全密教化,远传至蒙古,也甚受欢迎。如章嘉承受黄教,也是化身喇嘛。在中国地位颇高,与甘珠并肩而出皆为一代名僧。

20藏传佛教道教编辑

一些印度学者发现,《度母秘义经》、《风神咒坦多罗》、《摩诃支那道修法》、《弥曼山坦多罗》、《梵天坦多罗》等几部婆罗门教梵文献,都提到印度密教中与救度母崇拜或独结母崇拜有关的“女人道”(Vamacara)来自中国,印度密教中奉行的“五真性”供养也与中国有关。《度母经》和《风神咒坦多罗》还提到在公元4世纪时,伐湿斯塔(殊胜,Vesistha)曾亲赴中国向道教徒学习“摩诃支那功”。
中国古籍中所说的四海,不同的古籍、不同的时代所指不同。《尔雅·释地》将中原周边地区泛称为四海,曰:"九夷、八狄、七戎、六蛮,谓之四海。"《太上洞渊神咒经》将四海移到境外,用它泛称中国周边地区。
东海和北海与本文关系不大,本文只对南海和西海感兴趣。《太上洞渊神咒经》将中国的疆域大致确定在汉代强盛时期的范围。其卷20曰:"中国,长安是也。东至海隅,南至吴楚之外郊,西至JI罽宾,北至沙漠,悉是中国之名也。"
据此我们很容易知道它说的南海和西海的范围。南疆外,从东南到西南横着看过去,南海当包括西南端今天的孟加拉湾、孟加拉国、尼泊尔和印度西部等。唐代僧人义净赴印度取经,写了一部书就命名为《南海寄归内法传》。西疆外,从西北到西南竖着看下来,西海当包括西南端今天的阿拉伯海和印度东部等。总之,南海和西海的范围将古印度包括了进去。
所谓"水人"或"水中人",当指渔民、船民以及水下采珠工人等。他们生活在岛上、船上或水边,善于游泳,以水为生,故《太上洞渊神咒经》称之为水人或水中人,并加上了"居在水下"、"往来水下"之类的神话描写。印度东面为孟加拉湾,西面为阿拉伯湾,大陆上流淌着印度河、恒河、布拉马普特拉河等,不乏"水人"。
《太上洞渊神咒经》说西海也有夫妇之道,行道异于中国之人。印度婆罗门教主张满足爱的情感或性欲,方法与道教房中术不同。
总之,《太上洞渊神咒经》说南海人来中国受道,三洞大经布流于西海,神仙去南海、西海化人等等,大概描写了晋代印度有人来中原学习道教,道教经典传入印度,道士赴印度传道等事实。天人和玄女是道经中常见的夫妻神。尤其是玄女,作为房中女神可谓大名鼎鼎。王方平是著名的男性神仙,女神仙麻姑在古代也家喻户晓。《太上洞渊神咒经》让他们出双入对,显然也赋予他们共同教授房中术的使命。这两个神话是将道士的行为神化的结果。
有学者苦心寻觅道教功法于历史上传入印度的交通路线。荷兰汉学家高罗佩(R·H·VAN GULIK)博士推测,金刚乘所吸收的道教的东西,当是经阿萨姆邦从中国传入印度的[3]。中国学者张毅研究员说道教是经由滇缅线传入东印度的[4]。
除了专门来华学道和专门赴印传道者外,来华印度僧人融会佛道、促进中印文化交流,亦功不可没。黄心川教授从史传中统计,自公元2世纪上叶至8世纪中叶,即纯密形成之前,印度次大陆和中亚地区来汉地的僧侣中谙熟杂密法术的共计39人。可以想象,名不见经传者更不在少数。39人中三分之二以上是印度人。这些人不仅身怀妙术,而且个个通达权变。为了传播印度佛教,他们尽可能采用中国人熟悉的表达方式,甚至学习与吸收中国宗教的一些思想和方术。黄心川教授指出,在这些人身上,“集中表现了印度婆罗门教、中亚萨满教、西藏的雍仲本教和中国先秦两汉道教的巫术、魔术、占星术、方术、谶纬、神咒等等之大成”。这种现象是释道融合与斗争的具体表现。
黄心川教授对《大正藏》卷18-21密教部收录的受到道教影响的70部经轨进行分析,总结出杂密时期密教在汉地和道教的交融可分为三种情况。
(一)密教吸收了道教以前先行的思想和信仰,如阴阳五行说、五脏六腑说、谶纬、神仙方术、六甲、巫祝、鬼神等等。
(二)道、密在传播过程中摄取、融合了对方的教义内容、仪礼、符咒、印法等,采用了对方的术语、文句、咒声等。
(三)道、密全盘吸收了对方思想和内容,甚至名称也很雷同。
谙熟杂密法术的来华印度僧人们回到印度后,免不了传授融合了道教的巫术、魔术、占星术、方术、谶纬、神咒等等内容的密术。这种密术大概为日后的纯密所摄取。
密教和道教的相似之处
荷兰高罗佩博士说:“中国古代道教的房中秘术,曾刺激了金刚乘在印度的出现。”
张毅研究员比较了密教和道教的相似之处。我将他的比较,大致归纳为九点:
(一)追求肉体不朽。
(二)认为人身为宇宙的一小天地,因此非常重视身体的修持。
(三)根本修行中,双身功尤为重要。
(四)非常强调阴性的重要,有佛性的某些说法,和道家的“玄牝之门,是天地根”的说法完全一致。
(五)采用还精术。
(六)较真言宗晚出的天性宗的教义与仪轨中所带的道教色彩更为浓厚而显著,在他们的祈祷歌中可以发现许多和《道德经》中“知其雄,守其雌”之类的说法十分相似的辞句。
(七)女性无论在密教的教义、神祇和信徒中都占有十分重要的地位。
(八)密教对待各个种姓一视同仁。
(九)密教也如道教一样,长期流行于民间,和劳动人民有密切联系,同道教一样,他们所注意的是现实世界,而不是一味地追求理想的彼岸。
他看到密教在许多地方都和印度传统各宗派有显著的差异,和道教却十分相似,而且相似之处又非常明显,认为不能轻率地认为这种现象仅仅是偶合。他总结说:“不是密宗的框架形成之后,才接受了道教思想那样的外来成分,而是道教输入印度之后,才促使密宗的形成。”

    ㅡ 百度백과 자료

 

 

 

미술·건축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20)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입력 : 2014-02-21 20:45:02수정 : 2014-02-21 22:26:26
 
ㆍ해서의 전형 속에서도 강철 같은 고신라 글씨의 미감

   문자문명의 변천사는 인간의 인지능력 확장의 역사다. 칼에서 붓으로, 다시 키보드로 도구가 바뀌는 것은 결국 저장하고 전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바일 기기나 유비쿼터스 IT환경이 지배하는 키보드의 ‘치기’ 이후 또 다른 도구의 발명이 가져올 문자문명이 궁금해진다.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하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물론 그 판하본(版下本)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쓴 것이지만 쓴 것을 토대로 찍어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 시대 키보드의 치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 결과 일일이 불경을 필사하던 것과 달리 정보전달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또 인쇄술이 없을 때의 필사한 책마다 다른 글자가 아니라 표준화된 글자로 복제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문자 치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의 기계 자판은 표준글자를 개인이 다시 소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 다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부분. 다라니는 ‘주문’을 뜻하며 이 경을 석가탑에 안치한 것은 일종의 사경공양이다. 이를 통해 한없이 깨끗하고 밝은 세계의 실현을 염원하는 것이다. 751년 이전에 간행된 이 목판인쇄본은 너비 8㎝, 길이 620㎝이며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았다. 이 인쇄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770년경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왔다.

 

   다라니경은 빠르면 704년, 늦어도 751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근거는 애초 산스크리트어로 된 다라니경이 처음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된 해가 704년이고 751년은 석가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중국이나 일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벌어진다. 인쇄문화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중국은 다라니경에 나오는 8개의 무주제자(武周制字, 당나라 측천무후가 685~704년 재위 당시 새롭게 만든 글자)를 들어 자기 나라에서 만들어 통일신라로 전해진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일본은 석가탑의 완성이 아니라 만들기 시작한 때가 751년이라는 점을 들어 ‘백만탑다라니경’이 먼저라고 흠집을 내고 있다. 하지만 무주제자는 당시 중국은 물론, 신라나 고려에서도 사용되었고 다라니경의 지질은 신라의 닥종이다.

   그런데 이런 우격다짐이나 흠집 내기를 넘어 다라니경의 명성에 의구심이 들게 하는 일이 2005년 일어났다. 다라니경을 석가탑 안에 넣었다고 기록한 1024년(고려 현종 15년)의 중수기문이 사계 전문가들에 의해 판독된 것이다. 1966년에 발견된 이후 40여년 만이다. 결락된 글자나 종이가 찢겨져 나간 부분을 감안해서 해당 기사 부분을 보자. “대금도 한 묶음과 구리에 도금한 ○, ○칼 한 묶음, 무구정광다라니경…, 금으로 만든 병 하나, 수금대 하나, 사리 8○, 수금도 한 묶음, 두루마리로 된 무구정광다라니경 한 권, 수금대 하나 등을 이 탑에 안치하옵니다.(○○矣臺錦刀冬音一銅鍍金○...○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九偏全金甁一隨[錦]一舍利八○..○金○一隨錦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一卷隨[錦]一右之安藏爲白置...)” 요컨대 1024년 석가탑 중수 때 여러 부장품과 함께 다라니경을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다라니경이 통일신라 때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탑 속에 넣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은 탑을 창건할 때 넣었던 다라니경을 고려 때 보수하면서 도로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적은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풀린다. 더구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때 탑에서만 발견되며 고려로 넘어오면 ‘보협인다라니경’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다라니경이 발굴된 신라 탑은 10여기에 이르지만 고려 탑에서는 발굴된 예가 없다. 또 1007년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은 정교한 인쇄기술로 제작된 반면 다라니경은 초보 수준이다. 인쇄기술로 봐도 다라니경이 보협인다라니경보다 나중에 제작됐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관련 학계에서 등한시하는 부분은 글자의 제작연대를 판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글자 자체의 구조나 서풍이다. 글자는 내용은 물론 같은 서체 안에서도 점과 획, 글자의 짜임새로 결정되는 조형미감에서 시대 및 지역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다라니경의 서체 조형이나 글자구조는 이미 당나라 해서가 통일신라에 들어와 소화된 지 길게는 100여년이 지난 지점이다. 그래서 글자의 기본 골격은 응당 전형적이면서도 8세기 중반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글씨미감과는 차이가 난다. 다라니경은 안진경체도 아니고 초당 때 유행한 구양순체도 아니다. 사경이라서 북위서와 비교할 수도 있지만 이미 시기적으로 한참 후다. 고졸, 한가하면서도 강철같이 강한 고신라 글씨의 미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필획이다. 해서의 전형 속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비정형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라니경은 중국글씨와 맛이 다르다. 굳이 명명한다면 해동서성 ‘김생체’라 하듯 그냥 ‘무구정광대다라니경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는 디지털시대 키보드 치기의 한가운데를 살면서 점점 더 기계문자의 기성품 ‘치기’에 함몰되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 지역마다 다른 ‘쓰기’라는 글씨미학에서 더욱 문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 IT문명을 주도하는 우리가 1300여년 전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앞에 놓고 오늘날 디지털 문자문명의 씨앗과 뿌리가 어디이고 기계 글자에 인간의 체온을 담은 글씨미학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절실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ㅡ 경향신문 기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