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淵 永 矢 의 精 藍

2015. 7. 21. 23:26

 

 

 

 

 

    

 

三 淵     永 矢 의   精  藍

                                     -   鷺  山    李  殷  相 < 鷺  山 文 選 > 중에서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影山潭 맑은 물에 저기도 내가 있네

누가 참이온지 어느 것이 그림잔지

물 속에 지나는 구름 보고, 웃고 돌아서니라.

 

**** 영시암 - 일찌기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숙종 15년<서기 1689년에

그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장사(膓死)를 입은 소위 기사화변(己巳禍變) 치른 후로,

당세(當世)에 단심(斷心)하고 산수를 애상(愛尙)하여, 반도 역내(域內)의 필천(匹泉)

촌석(村石)에 그 족적(足跡)을 아니 미침이 없거니와, 이곳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더욱 생각나는 것은 선생의 노래 ㅡ

 

吾生苦無樂     於世百不堪

投老雪山中     成是永矢庵

膏盲實煙霞     契會卽岩潭

偃仰斯得宜     孤寂固所甘

 

園池紆規畵     選幽獨耽耽

藏書有小樓     虛牖萬象涵

佳名高明帖     玉峰儼來添

層域與閬風     品題較二三

 

悠我惑支頣      浮念奇輕風

彤雲凝欲霰      灝氣著松楠

挹彼炕瀣精      塵胸與吐含

顧己實菲薄      淸亨詎無慚

嗟我仁智伴      玄對莫閑談

 

 

이라한 것을 재삼 음독(吟讀)하면서, 그를 추모(追慕)하는 때에,

행인의 마음 또한 외로워짐을 금(禁)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여기다 정사(精舍)를 짓고, 6년을 지난 후, 어느날 선생의 식비(食婢)가

이 영시암(永矢庵) 뒤에 있는 골짜기에서 범에게 물려간 일이 있어,

선생은 그 인정을 생각하고, 이곳을 떠나 수춘산(壽春山)으로

이거(移居)하였거니와, 지금도 그 동곡(洞谷)을 호식동(虎食洞)이라 부릅니다.

 

그 후로는 이 정찰(精刹)이 조잔(凋殘)하여, 적극(积棘)의 황림(荒林) 속에

매몰되고 말았었더니, 설정선사(雪淨禪師)가 이를 슬피여겨 경대부(卿大夫)와

관동후백(關東候伯)이며 기타 공(公)의 덕을 사모하는 역내의 모든

유석(儒釋)들에게서 구재(鳩財)하여 정사들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하니, 승당(僧堂)이 24칸이요, 비각이 1칸이었습니다.

 

그 뒤로 한참 동안은 설정(雪淨)이 이곳에서 혹은 한소(閑嘯)하고,

혹은 철다(啜茶)하고, 혹은 언와(偃臥)하고, 혹은 소요(逍遙)한 위에,

암기(庵記)를 거(據)하면,

 

惑息心之人,     萬里爭趨,

惑養氣之士,    六合雲會

 

라 하였으니, 한참 융성한 시절도 있었든가봅니다 마는,

오늘 와서는 또 다시 적막한 폐암(廢庵)이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이를 때, 저 뒷방으로부터 현순백결(懸鶉百結)의 납의(衲衣)

노승 한분이 눈이 어두어 앞을 더듬어 나와, 우리를 맞아주는데,

그의 법명을 물으니, 추담(秋潭)이라 합니다.

 

 - <노 산 문 선 > 설악행각(雪嶽行脚) 중에서 .........

 

 

 

 

*****  조선조 중후기에 성행한 성리학과 주자학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저술활동을 통한 지나친 지식의 유희는

수 많은 파당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여러 차례 사화(士禍)를 야기하여

결국에는 비생산적인 분야에서 과도한 국력의 소모와

잦은 외란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도 다분히 수사학적이고 언어학적인 과도한 논리의 계발에 한반도의

지식인들이 빠져 있을 때, 이웃의 일본은 여러 번들로 나누어 있었던 각지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적인 막부를 형성하여 대륙진출의 야망을 키워왔고,

우리 사대부들이 야인(野人)들이라 멸시하던 여진족은 여러 부족들로 나누어진

부족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전통사냥기법인 팔기(八旗)법을 팔기군(八旗軍)으로 편성에

활용하고 군사력을 확장하여 차례로 요동과 중원을 점령하여 청나라를 건국하고 있었으며,

요동과 중원정벌에 함께 동참하지 않았다고 하여 정묘,병자 호란으로 조선을 문책성으로 침범한다.

 

오늘날 차계에서 극소수 인사들을 통하여 제기되고 있는 정통성 논란은

위에서 예를 든 조선조 중기의 상황과 같이 불필요한 이론 논쟁에 탐닉함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수 있는 다른 큰 일들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몇 줄 적어본다.

 

설악산 영시암에 처음으로 정사(精舍)를 지은 삼연당 김창흡 선생님도

조선조 중기에 성행하였던 과도한 이론논쟁과 예송논쟁 등을 통한

권력투쟁용 파벌싸움인 사화의 희생자 중의 하나였다는 생각이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설악행각> 글을 읽다가 불현 듯 생각이 들어

몇 줄의 독평(讀評)을 부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