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함께 걷는 석천계곡 ①

2015. 7. 22. 16:33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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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과 삼부연폭포, 그리고 삼연 김창흡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는 철원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철원 지역의 대표적인 폭포 중의 하나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갈말읍 신철원리 속한다. 철원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어서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최근에 1박2일에 나오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삼연(三淵)삼부연(三釜淵)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호(號)라는 것을 맞추는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한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풀기 어려운 퀴즈이리라.
지금이야 해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부연폭포는 나에게 멋진 관광지였을 뿐이었다. 아내가 신철원에서 몇 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주말부부였던 우리는 휴일에 주변의 명소를 찾곤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삼부연폭포였다. 폭포가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 갑자기 폭포가 나타나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뿐 아니라 오룡터널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연적인 굴처럼 보였던 오룡터널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 때문에 지날 때마다 오싹한 느낌이 들곤 했다. 지금은 보수공사를 해서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그 분위기가 남아 있다. 


   폭포를 지나 터널을 통과해 계속가면 용화저수지가 나온다. 그때 저수지 근처에서 갓난아기였던 첫째를 목마 태우고 찍은 사진이 아직도 옛날 앨범 한 구석에 있다. 나의 명소 여행은 여기까지였다. 월세방 가까운 곳에 명소가 있어서 편하다고 생각만 했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을 만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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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폭포                                          폭포 옆 오룡터널

 


 

    김창흡의 연보를 보니 숙종 5년1679년삼연(三淵)으로 자호(自號)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연의 집안은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큰아버지화천 사창리 은거한 김수증(金壽增)이다. 그의 동생영의정 김수항(金壽恒)아들 여섯 명을 두었다. 첫째는 『몽와집(夢窩集)』을 남긴 창집(昌集)이고, 둘째는 『농암집(農巖集)』을 저술한 창협(昌協)이다. 삼연셋째이다. 넷째는 『노가재집(老稼齋集)』의 저자인 창업(昌業)이며, 다섯째는 『포음집(圃陰集)』의 주인공인 창즙(昌緝)이다. 막내 창립(昌立)은 문집을 남기기도 전인 1683년 겨울에 형들을 곡(哭)하게 했다.
    삼연1673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684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여기저기에 은거하며 시문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은거지 중의 하나가 삼부연폭 위에 있는 마을인 용화동이다. 지금 행정구역상으로 신철원3리이다. 삼연이 용화동에 은거했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연보에 의하면 삼연용화동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가 27살이다. 그가 살았던 진사곡(進士谷)은 현재 용화저수지 밑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킨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진사골’이라 부른다. 이름만이 옛 일을 말하여줄 뿐, 여러 채의 단정한 농가와 정돈된 논밭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성해응의 기록은 삼연이 몸소 농사일을 하며 주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소하는데 적극적이었음을 알려준다. 홀로 고상하게 산속에서 은둔했던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틈틈이 그는 주변의 산수(山水)를 유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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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골 전경                                           용화저수지 

 

 

 

삼연과 석천곡기

   삼연(三淵)용화동 근처의 석천(石泉) 계곡 유람하고 「석천곡기(石泉谷記)」를 남겼다. 철원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남겼지만, 그 중 대표적인 기문(記文)인 셈이다.  『삼연집(三淵集)』에 실려 있는 「석천곡기(石泉谷記)」를 따라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 용화산(龍華山)을 넘어 서쪽으로 향하면 산세가 막혀 깊숙하게 골짜기를 이룬다. 그 가운데에 작은 절인 석천사(石泉寺)가 있다. 절의 위아래를 둘러싸고 유람할 수 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골짜기와 시내와 못이 6~7리에 펼쳐져 있다. 그 사이에 절이 있는데, 계곡의 1/4은 절 위쪽에 있다. "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용화산(龍華山)은 어디에 있는가? 김창흡용화산명성산(鳴城山)을 또렷하게 구별하여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화산을 넘어 서쪽으로 향하면 석천사가 있다는 기록이 석천곡기 앞부분에 있고, 뒷부분에 비래폭포의 발원지 윗부분에 명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해응(成海應;1760~1839)『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석천곡(石泉谷)」에서 같은 견해를 보인다. 그 기록의 일부분을 보면

 

    “석천(石泉)계곡은 영평(永平) 용화산(龍華山) 서쪽에 있다. 그윽하고 깊은 곳에 석천사(石泉寺)가 있다.(중략) 절의 남쪽 산등성마루가 남쪽으로 향하여 날면서 내려온다. 올라가면 멀리 볼 수 있는데, 자운대(紫雲臺)라고 한다. 모두 삼연(三淵) 김창흡 선생이 이름 붙였다. 산은 명성산(鳴城山)이라 부르는데, 고려시대에 쌓은 성벽 흔적이 있다고 한다.”

 

    성해응의 경우도 용화산명성산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가 말한 명성산은 석천사에서 봤을 때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아무튼 용화산의 정확한 위치는 앞으로 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용화태화산(太華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천사(石泉寺)에 대해 알려주는 곳은 없다. 지역의 문화원에 들어가 봐도 시원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성해응(成海應)「철성산수기(鐵城山水記)」‘석천암(石泉菴)은 새로 지은 몇 칸의 선원(禪院)일 뿐이어서 볼 만한 것이 없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서가 깊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은 것 같다. 
  용화저수지 입구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알 만한 사람을 소개시켜준다고 하면서 정씨(鄭氏) 집안의 어르신네 집을 약도로 그려주었다. 마을로 찾아가니 진사곡의 위치를 알려주신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 앞산 너머에 석천사가 있었다는 고급정보까지 알려주셨다. 드디어 삼연의 「석천곡기(石泉谷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석천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세 번의 석천계곡 유람

 

  " 나는 계곡을 세 번 유람하면서 뛰어난 경치를 다 구경하였다. 그 중 한 번은 작년 여름이다. 용화사(龍華寺)의 스님 일행과 폭포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갔기 때문에, 위와 아래를 다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올 여름에 또 동생 경명(敬明)과 걸어서 서재곡(西齋谷)으로 와서 시내를 거슬러서 올라갔다. 그러나 폭포에 이르러서 멈췄기 때문에, 그 근원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틀 뒤에 혼자 다시 앞의 길을 따라가서,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대체적인 것을 모두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삼연집 해제 의하면, 김창흡숙종 6년인 1680년 3월 석천사(石泉寺)를 유람하였다. 동생인 김창즙 연보에도 이 해에 석천사를 유람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삼연은 동생과 유람하기 한 해 전인 1679년, 곧 용화촌(龍華村)에 복거(卜居)하기 시작한 해에 처음 석천계곡과 상견례를 하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두 번 계곡을 유람한 후 「석천곡기(石泉谷記)」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 유람했을 때 동행한 사람은 용화사(龍華寺) 스님이다. 용화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를 설명하는 글에서 용화사는 지금 포천에 위치한 보개산에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허목(許穆;1595~1682)「증정군산수지로기(贈鄭君山水指路記)」에서 용화사삼부연폭포 위에 있다고 밝힌다. 삼연과 함께 유람한 스님이 어느 용화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은거지에서 가까운 곳의 스님과 동행하지 않았을까?
  여섯 형제 중 김창즙(金昌緝;1662∼1713)은 다섯째이다. 그의 자(字)는 경명(敬明)이다. 20세의 나이에 『징회록(澄懷錄)』을 편집하였고,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문장과 훈고(訓詁)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대 후반의 형과 10대 후반의 동생이 1680년석천계곡을 유람하였고, 이틀 뒤 삼연은 홀로 다시 계곡을 샅샅이 유람한 후 「석천곡기(石泉谷記)」를 남기게 된다. 


    석천계곡느치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각종 지도와 명성산 등산로를 알려주는 자료에는 간혹 표시되어 있지만,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철원지역의 사람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석천계곡은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석천계곡을 답사하기 위해 첫 번째 철원을 방문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평일날 무작정 지도와 「석천곡기」 번역문을 들고 철원을 찾았다. 지도위에 표시된 길을 따라 가다보니 군부대 정문이 보였다. 조금 더 접근하자 근무자가 손신호를 보내며 멈추라고 한다. 군대 특유의 어투로 무슨 용무로 오셨냐고 묻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군부대를 통과해야만 석천계곡을 갈 수 있다고 말했으나 단호하게 진입할 수 없다고 한다. 너무나 황당하여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2시간을 달려왔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재차 애원을 하니 전차사격훈련장이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통제를 할 수밖에 없다고 건조하게 말한다. 


    그냥 귀가할 수 없어 자료도 얻을 겸 철원군청을 찾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다. 창문 남쪽으로 명성산이 보이고, 석천계곡 입구인 듯한 골짜기도 보인다. 석천계곡을 지척에 두고 의자에 앉아 석천곡기를 읽으며 업무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어물어 관광자료도 얻고, 철원지역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철원지역의 역사문화를 연구하는 연구소장님을 소개받고 한참 동안 철원지역의 문화재와 경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군훈련 때문에 평일날 석천계곡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니 추후 휴일날 함께 답사하기로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이것이 첫 번째 방문이었다.
 
  두 번째 답사는 한달 후쯤에 있었다. 함께 답사를 약속한 곳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아, 어느 토요일에 철원으로 차를 달렸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짰다. 1차 계획은 포천과 철원의 경계강포리를 경유하여 계곡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금강산까지 몇 키로 남아있음을 새진 큰 돌을 보면서 우회전하여 들어갔다. 마을을 통과하자마자 군부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경고문도 잇달아 서 있다. 트럭 바퀴 자욱 선명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니 조그마한 고개가 나타난다. 차 바닥이 도로와 부딪히는 소리를 몇 번 내고나서야 고개를 넘었다. 정상에 오르자 바로 명성산이 보인다. 내려가면서 바로 좌회전하여 100여 미터를 가니 굳게 잠긴 철문이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 하염없이 석천계곡 입구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분단의 현실을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곧바로 2차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신철원으로 향했다. 삼부연폭포 계곡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진입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일직선 도로를 따라 직진했다. 말이 포장도로이지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그나마 얼마가지 않아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고, 움푹 패인 바퀴 자욱엔 며칠 전에 내린 빗물이 그대로 있었다. 오른쪽 철망을 끼고 얼마를 달리다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게 잠긴 철문이 앞을 가로 막았고, 옆에 CCTV도 설치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차를 돌릴만한 공간도 없었다! 후진과 전진을 십여 차례 한 다음에 차를 겨우 돌릴 수 있었다. 차는 흙탕물로 위장을 하였고, 아무 성과도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단념할 예비역이 아니었다. 입구로 나오자마자 삼부연폭포를 거쳐 용화저수지를 통과한 후 명성산 등산로 입구도착했다. 비록 김창흡의 여행길과는 반대이지만 명성산 등산로를 따라 가다가 중간에서 느치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길옆에 간벌한 나무 중 쓸 만한 것을 꺾어 지팡이를 만들었다. 두 번의 실패로 인하여 시간을 허비했다는 조바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가파른 길을 씩씩하게 올랐다. 조금 오르자마자 바로 땀이 떨어졌다. 숨도 차고 흐르는 땀 때문에 눈이 따가워지고서도 한참 후에야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의자 몇 개와 이정표가 서 있었고, 이정표 뒤로 군사지역임을 알리는 경고판이 버티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지역사람들은 이 고개를 깔딱고개라고 불렀다. 진짜 숨이 ‘깔딱’하고 넘어가는 줄 알았다.                
  이정표엔 계곡으로 향하는 표시가 없다. 등산로인 명성산하산로인 용화저수지만을 가리킬 뿐이다. 이정표에 없는 오솔길을 따라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서 답사할 수 있었다. 다시 되돌아왔을 땐 어둑어둑해지는 기운이 농도를 더해갔다. 고개마루에서 지포리에 사는 등산객 세 분을 만나 지포리까지 태워다주고 두 번째 답사를 마쳤다. 


  며칠 뒤 철원에서 연락이 왔다. 여러 사람의 일정을 조정하여 답사팀이 꾸려졌으며, 철원군청에서 출발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날아왔다. 일행 중에 석천계곡을 답사했던 분이 있어 수월하게 세 번째 답사를 마칠 수 있었다. 나의 답사는 우여곡절 끝에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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