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함께 걷는 석천계곡 ③

2015. 7. 22. 22:56여행 이야기

 

 

 

 

 

      

하수렴에서 그림처럼 노닐다

 

    "폭포 위에서 바라보니 붉은 누대가 솟아있다. 바로 석천사(石泉寺)이다. 절을 왼쪽으로 두고 동쪽으로 가다가 깊은 곳으로 꺾어 들어가면 입을 벌릴 정도로 두 계곡이 갈라진다. 남쪽에 있는 것은 소회곡(小檜谷)이고 북쪽에 있는 것은 대회곡(大檜谷)이다. 계곡은 시내물이 합쳐져 쏟아지며 두 길 높이의 폭포를 만들고 맑은 못이 이어져 있다. 뛰어난 경치가 더욱 단정하며 좋다. 양 옆에 서 있는 돌이 마주하여 우뚝 서 있는데 계곡의 문을 만든 것 같다. 물은 그 사이를 뚫고 흐르며, 사람은 그림처럼 그 가운데서 노닌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폭포 위 좌측에 석천사가 있었다. 김칭흡은 절에 들르지 않고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간다. 그는 상수렴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절에 들렸다. 나는 먼저 석천사터를 들렀지만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밝히도록 한다. 김창흡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소운폭포까지의 길이 우락부락한 청년의 길이라면 소운폭포부터 상류의 길은 연륜이 있어 부드러운 장년의 길이다. 여기서부터 산길은 다시 계곡의 좌측으로 계속 이어진다. 조금 지루하다 싶을 때 문득 폭포가 나타난다. 소운폭포가 경외감과 장엄함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폭포는 예뻐서 어루만지고 싶을 정도의 아담한 폭포다. 김창흡은 단정하다고 표현했다. 곱게 머리를 빗고 비녀를 꽂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과 같다고 할까. 폭포수는 밑에 깊고 넓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는 폭포 때문인지 김창흡은 이곳에서 그림처럼 노닐었다. 그림처럼 노니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한 폭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도 전혀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스런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물아일체(物我一體)이리라. 김창흡은 노닐다가 잠시 앉아 참을 수 없는 흥취를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새벽 서리 남아 있는 듯 돌은 하얗고
맑은 바람에 씻긴 옷엔 먼지 하나 없구나.
여전히 시내에서 바람 불어와 
빈번히 단풍잎 나부끼누나.


曉霜留白石。袖拂淸無塵。
猶有溪風颯。飄來紅葉頻

 

 

   속세의 티끌이 완전히 사라져버려 신선이 된 삼연은 바람에 나부끼는 단풍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폭포를 지나자마자 바로 두 개의 계곡이 나타난다. 오른쪽 계곡은 왼쪽에 비해 수량도 적고 규모도 작다. 오른쪽은 소회곡(小檜谷)이고 왼쪽은 대회곡(大檜谷)이다. 그리고 김창흡이 노닐었던 곳의 폭포의 이름은 하수렴(下水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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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곡

하수렴

 

 

 

 

활연히 막힘없는 상수렴

 

   " 발걸음 내키는 대로 대회곡(大檜谷)으로 갔다. 잡목이 무성하고 담쟁이 넝쿨이 있어 앞에 길이 없는 것 같았으나, 홀연히 폭포와 입석(立石)을 만났다. 크기는 하수렴과 비슷했다. 폭포 위에 두 개의 얕은 못이 더 있다. 맑으면서 빠르게 흘러 즐길 만하다. 입석(立石) 중 오른쪽에 있는 것은 겹쳐진 옥처럼 쌓여있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또 깎아 만든 것 같아 모서리가 있다. 옆에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고 꽃은 활짝 폈다. 앞서 본 것에 비해 더욱 기이하고도 아름답다. 폭포 아래쪽으로 가서 앉았다. 계곡의 형세는 깨달음을 얻어 막힘없이 트인 것 같다. 좌우의 여러 봉우리들은 아름답고 험준하며 수려하고도 곱다. 비록 빙 둘러싸고 있지만 사람을 압박하지 않는다. 나는 둘러보며 즐거워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더 가려고 했지만 수원(水源)은 점점 얕아져서 위쪽에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폭포를 상수렴(上水簾) 하수렴(下水簾)으로 불렀다. 또 입석(立石)문암(門巖)이라고 이름 붙였다. 위와 아래로써 차례지은 것이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하수렴에서 얼마 올라가지 않아 상수렴에 도착하였다. 김창흡하수렴보다 상수렴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무엇 때문일까? 먼저 하수렴에 비해 넓은 공간 때문인 것 같다. 김창흡은 깨달음을 얻어 얽매임이 없는 경지로 상수렴 주변을 비유하고 있다. 또 하나는 주변의 경치 때문이다. 폭포 위의 입석은 얇게 켜낸 널빤지를 수 십 장 쌓아놓은 것 같다. 겹쳐진 옥과 같다고 표현한 문암은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다. 또한 문암 주변의 단풍나무와 다래 넝쿨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봉우리들을 들고 있다. 구첩병 주변의 산들과 달리 상수렴 주변의 산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감싸주는 듯한 편안함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김창흡은 한참 동안 머무르며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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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렴

문암

 

 

 

 폭포의 나라인 석천계곡

 

   김창흡석천계곡 여행은 상수렴까지이다. 그는 여기서 석천사로 내려갔다. 그는 당시 계곡물이 얕아서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없으리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위로 올라가니 폭포의 계곡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폭포를 품고 있었다!
  폭포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제각각의 아름다음을 뽐내고 있다. 마주한 폭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폭포가 나타나곤 한다. 폭포들은 또한 제각각의 못과 짝을 이루며 경연을 펼친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심미안이 다르듯, 답사객들은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며 자신의 심미안에 따라 품평이 끊이질 않는다.
    맨 위에 위치한 것은 규모가 가장 큰 와폭이다. 너럭바위 위를 뽀얗게 내달리는 물은 하얀 비단이다. 나뭇가지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내려오다가 한번 굽이친 물은 이내 사뿐히 얕은 못에 소리 없이 스며든다. 맨 위에 위치한 폭포지만, 깔딱고개에서 내려올 때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이곳은 폭포에 입문하는 초보자에게 기초부터 가르쳐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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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렴 위에 있는 폭포들

 

 

 

감로수인 석천

 

    "절에 도착했다. 석천(石泉)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와 졸졸 흐르며 끊이지 않는 것이 마치 뽑아 당기는 것 같다. 스님이 말하길 이 물은 홍수와 가뭄 때에도 넘치거나 준 적이 없어서, 예로부터 감로(甘露)라 불렀다고 한다. 시험 삼아 따라 마셔보니 무척 차가우면서도 맑다. 비록 제대(帝臺)라는 신선의 음료라고 하더라도 이것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내려오다가 김창흡석천사에 들렸다. 석천사는 석천암(石泉庵)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문화유적총람에 석천사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언제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인근 용화사(龍華寺)의 승려가 창건했다한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수도처의 하나로서 많은 수도승들이 거처했고, 효험이 많은 약수가 있어서 요양객들도 즐겨 찾았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돌담의 흔적이 있으며, 석재와 기와, 식기류의 파편 등이 출토된다고 알려준다.


   석천사 터 찾아 나섰다. 절터에 대한 정보는 소운폭포 위쪽이라는 것과, 김창흡이 절을 왼쪽으로 두고 하수렴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절을 왼쪽으로 두었다는 것은 계곡 상류를 보고 섰을 경우 왼편이기 때문에 계곡과 왼쪽 산 사이의 공간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정보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다는 것이다.
   계곡 왼쪽은 온통 나무와 넝쿨, 그리고 돌들 뿐 이다. 폭포 옆에 위치한 자운대에서부터 절이 있을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반경 20여 미터를 꼼꼼하게 조사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여 살피니 건물이 있었을 법한 평평한 터가 몇 군데 보이고, 석축의 흔적도 나무 사이로 보인다. 와편(瓦片)은 수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절터를 찾았다는 기쁨과 폐허로 변해버린 무상함에 만감이 교차할 때, 함께 답사를 하던 임선생님이 저쪽에서 샘물을 찾았다고 알려와 절터 오른쪽으로 뛰어갔다. 
  석천(石泉)은 그곳에 있었다. 풍부한 수량은 아니지만 바위틈에서 이끼 위로 졸졸 흘러내리고 있다. 바위 아래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고, 최근까지 누가 정성을 드렸는지 샘터 주변에 제구(祭具)가 있다. 주변의 넓적한 나뭇잎을 반으로 포개어 잔을 만든 후 답사팀 모두가 한 모금씩 마셨다. 때마침 갈증 때문인지 시원함이 뱃속까지 전해진다. 


   한편 문화유적총람은 폐사와 관련된 가슴 아픈 전설을 전해준다. 이 절의 바위틈에서 매일 1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어느 날 욕심 많은 수도승이 쌀을 많이 얻으려고 바위틈을 크게 뚫었으나, 쌀은 나오지 않고 샘이 터지면서 뱀이 몰려 나왔다고 한다. 그 뒤 샘물이 흐려지게 됨에 따라 승려들이 모두 떠나게 되었고, 절은 자연히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절이 폐사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후대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리라. 그러면 왜 폐사가 되었을까?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말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절터에 흩어져 있는 와편.gif

석천사에서 바라본 남쪽 봉우리.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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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에 흩어져 있는 와편

석천사에서 바라본 남쪽 봉우리

석천샘물

 

 

 

 

비래폭포

 

   " 남쪽 봉우리에 석벽(石壁)이 기울어진 곳이 있는데 멀리 절의 누대와 마주하고 있고, 폭포는 중간에서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은 가볍게 화살이 날아가듯 빠르다. 떨어진 물은 깊숙하고도 컴컴하여 끝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아래로 가서 보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래(飛來)폭포라 이름 붙이고 떠났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고개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올 때는 소운폭포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답사가 끝난 다음에야 비래폭포를 빠뜨렸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드디어 세 번째 답사 만에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소운폭포에서 비래폭포로 가려면 폭포 오른쪽 계곡으로 가야한다. 계곡 입구에서 20여미터를 가니 조그만 폭포 형태를 한 절벽이 나타났다. 양 손으로 바위를 지탱하며 오르다 한번 미끄러지며 추락했으나 멈출 수 없었다. 돌출된 부위를 간신히 잡고 기어가다시피 하여 난코스를 통과했다. 물 없는 계곡의 바위를 건너뛰며 계속 따라 올라갔다. 계곡에 물은 없어 제대로 된 폭포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5분 정도 앞으로 가니 폭포가 왼편으로 보였다. 갈수기인지라 폭포의 형태가 아닌 암벽의 모습이다. 구첩병보다는 규모가 적지만 그에 필적할 정도의 높이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김창흡이 말한 것 처럼 약간 기울어진 암벽은 폭포라는 것을 알려주듯 자신의 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고 있다. 아마 김창흡이 방문했을 때는 물이 하얗게 떨어졌을 것이다.
  물이 제대로 떨어질 때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소운폭포 쪽으로 향했다. 하산길이 더 위험하다고 했던가. 산비탈에서 미끄러지길 몇 번, 나중엔 다래넝쿨을 타고 절벽을 내려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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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대에서 바라 본 비래폭포.gif

비래폭포

자운대에서 바라 본 비래폭포

 

 

 

 

계곡 최고의 전망대인 자운대

 

  " 절의 서쪽에 산등성마루가 남쪽으로 향하여 날면서 내려오다가 소운폭포(素雲瀑) 위에 이르러서 멈춘다. 올라가니 멀고 가까운 곳을 볼 수 있으나, 때마침 구름과 노을이 끼어 있어서 멀리 볼 수 없다. 오직 구름 낀 나무 사이로 흐릿하게 계곡 가운데를 볼 수 있어 풍성한 물과 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자운대.gif 그래서 올라간 곳을 자운대(紫雲臺)라고 이름 붙였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소운폭포 옆에 있는 바위가 자운대이다. 석천사에서 봤을 때 서쪽에 위치한다. 처음에는 폭포 건너편 산에 있는 바위가 자운대라고 생각을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폭포 옆의 바위임에 틀림이 없다. 자운대를 떠나 북쪽으로 향해 귀가길로 올랐다는 것으로 볼 때 처음 생각했던 곳은 자운대가 아니었다. 김창흡은 그곳에 올라가서 계곡 전체의 경치를 감상하였다. 자운대에 오르니 서쪽 계곡 입구로 철원이 보인다. 비래폭포도 바로 코앞에 다가선다.
  이제 귀가길이다. 김창흡의 발길을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왔던 길로 되돌아 갈 것인가, 또 아니면 깔딱고개를 넘어 용화저수지 쪽으로 갈 것인가. 여러 사람들은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깔딱고개로 향하였다.


 

명성산을 바라보다

 

   " 자운대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얼마 안 되는 길이 더욱 높아졌다. 절벽을 오르는데 다른 방도가 없으니 구첩병(九疊屛)이기 때문이다. 남쪽 봉우리의 폭포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사람을 쫓아오는 것 같으며, 은하수가 하늘에 이어진 것 같다. 스님이 말하길 물이 시작하는 곳에 옛날에 절이 있었고, 또 그 위에 고려시대에 쌓은 성벽 흔적이 있는데 명성(鳴城)이라 부른다고 한다. "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자운대에서 귀가하는 길은 험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가파른 산세 때문에 진행이 더뎠을 것이다. 쉴 때마다 머리를 돌려도 비래폭포는 바로 눈앞에 보였을 터. 큰 비가 내릴 때 이 산길을 걷는다면 웅장한 폭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리라. 폭포 위로 명성산 보인다. 궁예의 한이 서려있는 명성산. 산에는 절이 있었고, 또 그 뒤쪽 명성산 정상 쪽에 성벽이 있노라고 동행하던 스님이 삼연에게 전해 주었다. 지금도 절터와 성터가 남아 있어 답사객에게 궁예의 한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을까? 궁예의 자취를 따라 명성산을 답사할 날이 있으리라.
  김창흡석천사에서 용화동으로 돌아오다가 구첩 위에서 두 수의 시를 남긴다.


봄날에 새는 무리지어 나무에서 날아오르고
산승(山僧)은 손님 보내고 꽃을 들고 돌아가네.
돌아보니 남쪽 봉우리의 폭포 아득히 멀리 보이는데
아직도 잔물결 내 옷 털어낼 것 같네.


春鳥聯羣出樹飛。山僧送客拈花歸。
南峰瀑布歸迢遞。猶恐餘波拂我衣。

 

 

10일 만에 돌아가니 봄날은 모두 지나가고
그대와 여기 소나무 사이에서 쉬고 있네.
앙상한 늙은 가지 매만지며 오랜 옛날 생각하니
온 산에 봄날의 꽃 가득하구나.


十日回筇春盡還。與君申憇此松間。
摩挲老幹心千古。非不煙花滿四山。

 

 

 

증령(甑嶺)을 넘어 귀가하다

 

    "구첩병이 다하자 산세는 차츰 평탄해지면서 고개에 이르렀다. 이 고개는 도로에서 바라본 아리랑고개 입구.gif화산 서쪽 갈래이다.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증령(甑嶺)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여기에 이르러서 보는 것이 끝났다. "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험한 절벽을 오르자 이내 평탄한 길이 나타난다. 이곳이 증령이다. 이 고개를 현재 지역 주민들은 아리랑고개라 부른다고 동행하던 임선생님이 덧붙인다. 조금 더 가니 조그만 분지가 보인다. 예전에 화전을 하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아리랑고개와 분지는 김창흡이 거처하던 진사곡과 연결이 된다. 계곡을 빠져나오니 바로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들이 보인다. 신선의 세계에 노닐다 속세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 이럴까?  

 

 


에필로그

 

   1680년, 삼연 김창흡 세 번 석천계곡을 다녀간 후 「석천곡기」를 남기고, 나는 지금 인연에 끌려 세 번 삼연 발자취를 따라 답사를 하였다. 삼연에게 석천계곡은 어떤 의미로 다가섰던가?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계곡입구부터 걸어가는 삼연은 그 중 승경을 찾아 이름을 불러주었다. 도가적 도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인 통현교와 코로 감상하는 곳인 미화석삼연의 독특한 심미안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리고 소운폭포보다 상수렴하수렴에 더 애정을 보이는 것도 삼연의 미적 취향을 보여준다. 이전에도 존재하였지만 삼연에 의해 불려지면서 의미를 갖게 된 석천계곡의 구석구석들. 석천계곡은 의미를 갖게 되었고, 삼연은 그 속에서 물아일체가 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림처럼 즐겼다.
  한동안 잊혀졌던 석천계곡을 제대로 답사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미흡한 부분이 앞으로의 답사와 연구를 통해 수정된다면, 몇 번의 답사와 그 결과를 엮은 글은 나름의 역할을 다한 것이리라. 부디 석천계곡을 찾는 사람들은 상수렴에서 바라본 계곡처럼 깨달음을 얻기를. 그리하여 막힘없이 트인 형세처럼 활연히 트이기를.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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