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탄 성규헌, 그는 누구인가
제사를 지낼 때 모시는 분을 알아보니 제갈량(諸葛亮), 김시습(金時習), 김수증(金壽增), 김창흡(金昌翕), 성규헌(成揆憲) 등 다섯 분이다. 다른 분들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성규헌이란 분은 처음 듣는지라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선비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전해지던 문집이 전쟁 중에 사라져버려 주변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통해서 그 분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겨진 기록 중 자세한 것은 홍직필(洪直弼)의 『매산선생문집(梅山先生文集)』에 실린 「명탄성공묘갈명(明灘成公墓碣銘)」이다.
성규헌은 인조 25년인 1647년에 태어나서 영조 17년인 1741년에 돌아가셨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중일(仲一), 호는 명탄(明灘)원당(圓塘)이다.
기사환국은 숙종이 후궁 장씨(張氏) 즉 장희빈이 낳은 아들에게 원자(元子) 칭호를 내리고자 하자, 이를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때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노론은 반대했으나, 숙종은 강행하게 된다. 이에 노론측의 송시열이 두 번이나 상소하며 반대했다. 그러자 숙종은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한 후 제주도로 유배시키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다.
이후 숙종이 중전을 폐비하려고 하자, 서인이던 오두인(吳斗寅) 등 86명이 이를 저지하려고 상소했다. 숙종은 상소의 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 오두인 등을 밤낮으로 신문한 뒤 유배했다. 이 시기에 성규헌은 정도균(鄭度均) 홍경렴(洪景濂) 등 여러 선비들을 이끌고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조정에서 듣지 않자 시골로 내려오게 된다. 상소를 올릴 때 조정에서는 역적을 처벌하는 법률로 다스리려 하자 모두 무서워하며 도망갔으나 성규헌을 포함한 몇 사람만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
숙종 15년 기사(1689) 4월26일. 유학(幼學) 성규헌(成揆憲) 등, 진사(進士) 정도균(鄭度均) 등, 태학생(太學生) 홍경렴(洪景濂) 등이 각각 상소를 올려 폐비(廢妃)에 대한 간언(諫言)을 하였지만, 이 상소가 승정원에 이르자 승지(承旨)들이 상지(上旨)를 내어 보이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규헌(成揆憲) 등이 다시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퇴각당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성규헌의 기개를 처음 알린 사건으로 이후의 행동도 예측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하여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실천에 옮겨 시정하려는 정신은 이후의 삶을 관통한다.
그 후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1696년에 이현명(李顯命)의 상소문을 대신 써주었다 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나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등을 지냈다. 1705년에 남구만(南九萬) 유상운(柳相運)을 구하려던 상소로 인하여 이명준(李明俊)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남의 일도 내일처럼 생각하여 상소하고, 그로 인하여 연이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성규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파직을 당하고 수춘(壽春)에 있는 산으로 들어갔는데, 수춘(壽春)은 춘천을 가리킨다. 춘천으로 온 성규헌은 대명탄(大明灘) 가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명탄(明灘)이라 하였다. 그러면 대명탄은 어디에 있는가? 대명탄은 대탄(大灘)이라고도 하는데, 북한강가에 있는 여울이었으나 춘천댐이 건설되면서 춘천호 물속에 잠겼다. 지금은 마을이 통합되어 행정구역상으로 춘천시 사북면 원평리이지만, 예전에는 원당리라 불리던 마을 앞에 대명탄이 있었다.
성규헌의 사람됨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이 시기에 전해진다. 그는 ‘대명일월존주의리(大明日月尊周義理)’라는 8자를 방에 걸어 놓고, 「대명당기(大明堂記)」라는 글을 지었다다. 또 ‘경직내의방외(敬直內義方外) 국치설군은보(國恥雪君恩報)’란 12자를 자신의 등에 새기고, 늘 향을 피우며 신명(神明)을 대하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떤 때는 칼을 만지며 호통을 치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곤 했다.
‘대명일월(大明日月)’은 명나라 세월을 뜻하는 것으로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의 시절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다짐이 들어 있다. ‘존주의리(尊周義理)’는 주(周)나라를 높이는 의리이다. 공자는 주나라가 약해져 도의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을 주나라 중심의 정도와 대의로 바르게 다스려 천하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것을 춘추대의(春秋大義)라고도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나라는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도 대치되면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성규헌이 살던 시기엔 주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바로 공자의 생각을 따라 명나라 중심으로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에 의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명나라는 세상의 전부였던 것이고, 성규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직내의방외(敬直內義方外)’는 무슨 뜻인가? 군자는 경(敬)으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몸가짐을 방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수신의 뜻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당대 현실의 모순과 폐단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성규헌의 삶에서 나침반 역할을 한 것이 경(敬)과 의(義)였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국치설군은보(國恥雪君恩報)’는 나라의 치욕을 설욕하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인데,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설욕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인조15년인 1637년 병자호란 발발 45일 만에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했다. 황제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하였다.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여기던 조선의 선비들에겐 치욕적인 일이었고, 설욕하는 것을 최상의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위에서 예를 든 성규헌의 일화는 절의정신으로 귀납된다. 비록 명나라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시대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지만, 의(義)를 목숨과 같이 여기며 실천한 것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한다.
영조 2년인 1726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자, 시국의 당면과제 7조를 건의하였다. 7개의 항목은 학문에 힘쓸 것, 붕당(朋黨)을 혁파할 것, 백성의 부역을 덜어줄 것, 사치를 금할 것, 무기를 준비할 것, 성곽을 수리할 것, 시세의 변화를 살필 것 등이다. 이 기록도 성규헌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눈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로 돌려보자. 과연 성규헌처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임금에게 직언할 수 있는 성규헌의 태도는 요즘의 공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규헌의 은거지 원당리
성규헌은 수춘(壽春) 대명탄(大明灘) 가에 터를 잡고 살았다. 대명탄은 북한강가에 있는 여울이었으며, 예전에는 원당리라 불리던 마을 앞에 있던 여울이었다. 원당리는 현재는 마평리와 합해져 원평리란 새로운 이름의 마을이 되었다.
춘천에서 춘천댐을 지나 화천으로 향하는 길은 오른쪽에 넓은 초록색 호수를 끼고 있다.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굽어진 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38선임을 알리는 비석이 길 옆에 서 있다. 그곳에서 좌회전한 다음 바로 우회전을 하여 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통과하면, 다리가 나타난다. 그리고 산 밑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호수를 보면서 직진을 하면 옛 원당리에 도착하게 된다. 호수가 시작되면서 주변은 낚시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댐이 건설되면서 살던 집과 땅은 물에 잠기고, 산기슭으로 옮겨온 주민들은 조상이 물려준 곳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좁은 땅을 일구며 살고 있다.
한참을 가니 오른쪽에 기념비가 서 있다. 비 위쪽에 ‘원당(圓塘)’이라 새겨져있다. 기념비에는 마을의 명소인 못의 유래를 적어 놓았다. 못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못은, 형태가 둥글어서 원당이라고 불렀다. 못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이 원당리가 되었다고 한다. 성규헌이 이 못을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원당(圓塘)으로 삼았다는 해설도 덧붙어 있다. 그러고 보니 기념물 뒤에 보이는 못의 형태가 둥글다. 춘천댐으로 인해 대부분 잠겼는데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이 새삼 놀랍다. 여울이었던 대명탄은 물에 잠겨 호수가 되었다. 비록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여울을 바라보며, 혹은 연못을 바라보며 의리를 생각했을 명탄공의 기개가 서려있는 것 같다.
성규헌은 영조 6월 16일에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상을 치를 도구를 준비하게 했으며, 돌아가시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차서 사람들은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다. 원당의 집 뒤 북서쪽을 등지고 있는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재실을 관리하시는 분께 물어보았다. 그 분은 명탄공의 묘소가 바로 뒷산에 있다고 하시며 안내주셨다. 재실 뒤편 골짜기로 들어서니 협소하게 느꼈던 것과는 달리 넓은 밭이 있고, 그 사이를 계곡물이 흐른다. 가물어도 수량이 줄지 않는다고 하니 산이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밭이 끝나면서 경사가 급해지자 땀이 뚝뚝 떨어진다. 몇 번을 멈추어 숨을 고르다가 오른쪽을 쳐다보니 묘소가 보인다.
봉분은 상당히 크다. 양쪽으로 산줄기를 거느리고 앞에 대명탄을 바라보고 있어 한 눈에 명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봉분 앞의 석상과 묘비, 망주석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절의정신처럼 꿋꿋이 서 있다.
칠선동 와룡암에서 소요하다
성규헌은 원당리에만 거처했던 것이 아니라,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에서도 은거했다. 묘갈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탄(현 사창리)의 바위와 폭포를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살았다. 바위에 와룡암(臥龍巖)을 새겼으며, 공명(孔明)을 배우기를 바라셨다. 삼연(三淵) 김선생이 자주 거처에 왔으며 매우 정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명탄성공묘갈명」)
그가 세웠던 정자는 어디에 있을까? 어유봉의 「동유기」와 남유용의 「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계곡으로 들어가 1리쯤 가니 마을이 넓게 트이고 큰 돌은 올망졸망하다. 따라서 수십 보를가니 계곡물이 하나는 서북쪽에서 흘러오고, 하나는 동북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이곳이 곡운(谷雲) 선생이 이름붙인 쌍계협(雙溪峽)이다. 서쪽 절벽 높은 곳에 새로 모정(茅亭)을 지었으니, 지은 사람은 성규헌(成揆憲)이라 한다. 계곡을 건너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니 수석(水石)은 매우 청량하다. 강가에 있는 정자의 뛰어남과 같은 것이 있다.
(어유봉, 「동유기」)
산 아래 상수리나무로 만든 집이 있는데, 노인이 넝쿨로 울타리를 고치고 있었다. 가서 계곡 물의 발원지를 물으니 매우 멀고 험하여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잠시 있다 비가 다시 내렸다. 옷이 모두 젖어 허둥대다가 오던 길을 찾아 되돌아왔다 성씨(成氏)의 정자에 오르니 함께 유람하던 사람들은 모두 피를 피해 올라와 쉬고 있었다.
정자는 폭포에서 동쪽으로 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자못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고 트이게 해준다.
서생(書生) 여러 명이 그 가운데서 책을 읽는다.
(남유용, 「유동음화악기」)
두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서쪽 절벽에 모정이 있었고, 정자를 지은 사람은 성규헌이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그리고 위의 기록은 현재의 광덕계곡을 유람하는 과정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자의 위치는 광덕계곡 입구라는 것을 알려준다. 예전에 광덕계곡은 칠선동(七仙洞)으로 알려졌으며, 뛰어난 경관으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유람하고 글을 남긴 곳이다.
성규헌이 은거하던 곳을 가려면 먼저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를 가야한다. 사창리에서 옆 마을로 이동하면 광덕리가 나오고, 광덕리에서 광덕계곡 방향으로 가다보면 맹대교가 보인다. 맹대교를 지나면 철원으로 가는 길과 광덕계곡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맹대교에서 보이는 시내 건너편이 바로 정자가 있던 곳이다. 맹대교와 건너편 정자터 사이에 있는 시내가 쌍계협이고, 쌍계협에 있는 넓은 바위가 와룡암(臥龍巖)이다. 이하곤(李夏坤)은 「동유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너럭바위 위를 흘러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이룬다. 돌에는 주름이 있는데 꿈틀거리는 것이 용과 같다. 발톱과 뿔이 모두 있어서 와룡암(臥龍巖)이라 하였다.”
시내로 내려가 와룡암이라 새긴 글자를 한참 동안 찾았으나 보이질 않는다. 너럭바위가 다리 밑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리를 건설하면서 사라진 것 같다. 정자터를 찾기 위해 산으로 향했다. 용수로를 통과해 조금 올라가니 군사용 참호가 맞이한다. 수풀을 헤치며 정자터를 찾으니, 주변에 와편(瓦片) 몇 개가 보일뿐이다.
정자터는 군사용 참호로 변해있었고,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서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성규헌이 배우고자 했던 공명(孔明)은 제갈공명을 말한다. 와룡(臥龍)은 제갈공명의 호이다. 왜 제갈공명의 호를 따서 바위에 와룡암이란 이름을 붙이고, 글씨를 새기면서까지 제갈공명을 흠모하였을까? 제갈공명이 활약한 그 당시 유비의 촉 나라는 조조의 위나라나 손권의 오나라에 비해 형편없이 약했으며 삼국을 통일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갈공명이 유비를 따른 것은 촉나라가 한나라의 황실을 계승할 정통성을 지녔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비의 죽음 이후 공명은 천하의 대의를 바로잡고 선왕 유비의 유지를 받들겠다며 북벌에 나선다. 이때 공명이 위나라로의 공격을 감행함에 앞서 자신의 군주이자 유비의 아들인 촉나라의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출사표를 통해 공명은 한나라를 부흥시키라는 명령을 잊은 적이 없으며 유지를 받들어 북벌에 나서게 됐다는 당위성을 설명한다. 힘을 다해 흉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한 왕실을 회복시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이 선제께 보답하는 이유라고 언급한다. 곧 공명은 대의(大義)를 위해서 살았던 것이다.
평소에 의리를 중시하는 성규헌이었기 때문에 제갈공명을 흠모하였으며, 정자 앞의 바위에 제갈공명을 기리는 뜻에서 와룡암이라고 글자를 새겨 넣은 것이다.
삼연(三淵)은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호이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사창리에 은거한 곡운 김수증의 조카로서 당대에 문학과 사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 아니던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의 높은 풍도(風度)와 절조(節操)는 넉넉히 나약(懦弱)한 사람에게 뜻을 확립시키고, 재리(財利)를 탐내는 자의 마음을 청렴하게 할 수 있다.” 삼연과 매우 정분이 두터웠다는 사실은 성규헌의 인품과 학식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대의(大義)를 위해서 살았던 제갈공명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살았던 곳이 바로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였고, 성규헌의 자취는 시내 건너 정자터와 와룡암에 아직도 남아 있다.
성규헌의 절의를 기리는 곡운영당
김수증이 은거하던 용담리 곡운정사터에 곡운영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근래에 세워진 김수증선생 추모비만이 이곳이 영당터임을 알려준다. 영정을 모셔 둔 사당이 영당인데, 곡운영당은 서원의 기능도 담당하였던 것 같다. 영당터에 세워진 흥학비가 이를 말해준다. 1823년에 정약용은 이곳을 들른 후 기록을 남긴다.
서원은 사액(賜額)되지 않은 곳으로, 곡운(谷雲)이 주벽으로, 삼연(三淵) 김공(金公)이 좌배(左配), 명탄(明灘) 성공(成公)이 우배로 앉았다. 또 그 왼편 재실에 두 분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곡운과 삼연 두 분의 진영(眞影)이며, 오른편 재실에 또 두 본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곧 제갈 무후(諸葛武侯)와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의 진영이다.
(「산행일기」)
정약용이 이곳에 들렸을 때 서원이었던 그곳에서 성규헌을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배향되었다.
조선 말기의 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1842~1915)은 1905년 곡운영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강연을 하였다. 「곡운강회에서 ‘연(筵)’자를 얻어서」란 시에 곡운영당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다.
을사년(乙巳年) 3월 7일 제천읍 강회를 거행했는데 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일찍 금계(錦溪) 항와(恒窩)와 함께 곡운(谷雲) 강회를 열기로 약속하였기에 이 달 15일에 곡운으로 달려갔는데, 강회에 온 사람이 백사오십 명이 되었다. 그 날에 다섯 현인을 단에 모시고 지냈다. 다섯 현인은 제갈무후(諸葛武侯), 김매월당(金梅月堂), 김곡운(金谷雲), 삼연(三淵), 성명탄(成明灘)이다. 원래 영당이 있어 삼구월(三九月) 보름에 제사를 지냈는데 조정의 명령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최면암(崔勉庵) 익현(益鉉)이 그 자리에다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 지내기를 마친 후 강연을 시작했다.
(『의암집』)
그러면 왜 후대 사람들이 성규헌을 배향했을까? 성규헌을 평가하는 말 중에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풍모로 알려졌다’는 표현이 있다. 중봉 조헌이 누구였던가? 초등학교 때 ‘조헌과 칠백의총‘으로 알려진 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한 분이다.
조헌은 1572년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궁중불사(宮中佛寺)의 봉향(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고, 이듬해 교서관저작이 되어 다시 같은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1574년 5월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1월 귀국하여 시무(時務)에 관한 ‘8조소’(八條疏)를 올렸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한편 그는 국내외의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여러 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명탄 성규헌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답보 상태다. 전해오던 문집이 사라지면서 그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던 계획은 추가 자료가 발굴될 때까지 유보되었다. 만약 자료가 추가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절의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남유용, 『뇌연집(䨓淵集)』
어유봉, 『기원집(杞園集)』
유인석, 『의암집(毅菴集)』
이하곤, 『두타초(頭陀草)』
정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홍직필, 『매산선생문집(梅山先生文集)』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고전을 바탕으로 강원도 지역을 답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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