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걷다①

2015. 7. 23. 11:48여행 이야기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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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걷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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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 삼일리

 

크기변환_심일1리전경.jpg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있는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를 몇 번 방문했었다. 올해 세 차례를 포함하여 다섯 번째이다. 이전에도 약간의 호기심이 있었긴 했다. 그러나 옛 전적을 읽고 자세하게 살펴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바람이나 한번 쐬자는 생각으로 찾았었다.


    이곳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온전히 김수증의 「칠선동기(七仙洞記)」 덕분이다. 칠선동을 답사하다가 자연스럽게 곡운구곡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전에 몰랐던 김창흡이 살던 곡구정사(谷口精舍)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와 더 깊게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우리네 삶도 이러한 것 같다.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개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주어진 상황을 선택하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커다란 줄기는 나의 의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해본다. 해가 더할수록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의지가 점점 약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에 대해 조금 더 겸손해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앞으로 화천 삼일리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다. 그저 펼져진 상황에서 현명하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할 뿐, 완강히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삼일1리에 있다. 삼일리는 행정구역이 1, 2리로 나뉜다. 삼일1리는 화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명경과 같이 맑고 깨끗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된 곳이라 하여 면대(面垈)라고 했다. 지금의 이름은 김시습(金時習)삼현(三賢)이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편히 가신 곳이라 하여 삼일리(三逸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경로당에 계신 어르신이 말씀해 주신다. 어떤 책자에는 김수증이 지은 삼일정(三一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마을 입구에 있는 군부대를 통해 왕래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이르러 길이 뚫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고, 현재 주민들은 토마토와 화훼를 재배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길가에 세워진 농산물판매대에 어김없이 빨간 토마토가 한바구니 듬뿍 담겨져 있고, 길 양쪽으로 비닐하우스들이 즐비하다. 김수증은 삼일리를 무룽도원이라고 했는데, 예전의 명성을 다시 찾아 무릉도원이 된 셈이다.

 

   "석문오를 나서면 봉우리가 뻗어 내리며 동서로 마주 섰다. 냇물은 동쪽 언덕의 서쪽 발치를 돌아 북쪽으로 흐른다. 물의 서쪽 기슭은 조금 넓고 평탄하다. 산골 사람의 집 여나믄채가 서쪽 기슭 동쪽 발치에 기대어 마을을 이뤘다. 골짜기는 우묵하면서도 넓고 평탄한 두둑이 있는가 하면, 높은 언덕이 있어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울타리는 쓸쓸하고 서로 떨어져 있으나, 닭과 개 우는 소리는 서로 들린다. 뽕나무와 삼이 뒤덮고 있고, 복숭아나무•살구나무와 잡다한 꽃들이 마을을 비춘다. 또 커다란 배나무 몇 그루가 있어 꽃이 참으로 흐드러지게 핀다. 마을 가운데 작은 우물이 있어 앞개울에 잔뜩 물을 댄다. 산을 태워 곡식을 심고 밭 갈고 김매며 나무하고 나물을 뜯는다. 산 어귀를 나서지 않아도 때로 마을 노인들을 만나 즐거이 웃으며 이야기한다. 터 잡고 산 지가 이제는 여러 대가 되었다 한다. 그야말로 무릉도원 모습이다. 농수정(籠水亭)에서 화음동을 오고가며 마을 앞으로 다녔는데 그리 험하지 않다. 내가 드나드는 것이 사실은 집 안인 셈이나, 항상 푸른 소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청우협(靑牛峽)이라 하고, 그 마을을 대곡(大谷)이라 하였다." (「화음동지(華陰洞志)」) 
 
   크기변환_옻샘물입구.jpg수증 묘사하고 있는 마을의 모습은 평온하다. 마치 동양화의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자족하면서 사는 산골 사람들은 흐드러진 꽃 속에서 몇 대를 거쳐 살아왔던 것이다. 마을회관을 지나 화음동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옻샘물’이란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 뒤 밭 사이를 통과해 산으로 십여미터 올라가면 샘물이 있다. 상수도시설이 구비되어 마을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 오솔길도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진 않으나 맑은 물이 흐른다. 이곳이 김수증이 말한 우물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부터 옻 오른 사람들을 치유해왔다고 한다.
  김수증은 유토피아인 이 마을을 대곡(大谷)이라 하였고, 마을 가운데에 형성된 골짜기를 청우협(靑牛峽)이라 불렀다. 푸른 소를 타고 여유롭게 마을을 지나가는 김수증은 이미 신선이 되었고, 마을은 신선이 사는 마을이 되었다.
   이 글의 체제에 대해서 밝힐 것이 있다. 이 글은 김수증「화음동지(華陰洞志)」를 바탕으로 한다. 다만 원작의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답사의 편의를 위해 순서가 바뀌고 필요에 의해 언급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원본은 이 글의 뒷부분에 참고자료로 실었다.

 

 

화음동의 입구 석문오(石門塢)

 

  • 화악산의 동쪽 자락이 북쪽으로 달리다가 서쪽으로 꺾이면서 총계봉(叢桂峯)이 된다. 또 서쪽 자락이 북쪽으로 달리면서 총계봉과 마주하는데, 물이 그 사이에서 흘러나와 골짜기 어귀가 된다. 이곳이 석문오(石門塢)이다.(「화음동지」)
  •  (천관석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가다가 북쪽으로 향하면 석문오(石門塢)가 있다. 이곳은 바깥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이다.(「화음동지」)

    삼일1리회관에서 화악산쪽으로 가다보면 김창흡이 거처하였던 곡구정사(谷口精舍)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화악산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화음동정사가 길옆에 자리하고 있다. 앞서 몇 번 여행의 목적지는 바로 화음동정사지였다. 그래서 중간에 있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갔다. 
    화음동정사에서 제일 먼저 기억할 곳은 석문오(石門塢)이다. 석문오는 화음동을 들어서는 길목에 있으며, 여기부터 화음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유봉  「동유기(東遊記)」에서 ‘길 가에 두 개의 조그만 돌이 있는데, 화음동문(華陰洞門)이란 네 자를 새겨 놓았다.’라고 기록하였다. 그곳이 바로 화음동문(華陰洞門)을 새긴 돌이 있던 석문오이다. 석문오에서 화음동의 입구임을 가르쳐주었던 표지석인 ‘화음(華陰)’이 새겨진 돌은 지금 삼일1리 마을회관 앞에 서 있다.
  석문오 주변엔 주변 유원지에서 키우는 개 몇 마리가 지나가는 탐방객을 향해 짖으며 이곳이 화음동 입구임을 알려준다. 아스팔트 오른쪽 좁은 공터는 비닐을 덮고 있고, 바로 이어진 산은 군데군데 바위가 드러나 있다. 사이사이에 소나무와 참나무가 자라고 있다. 골짜기는 무성한 수풀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다. 골짜기 물은 아스팔트 아래로 난 관을 통해 개울로 흘러갈 것이다. 아스팔트 왼쪽은 농산물 판매장 겸 유원지 매점과 넓은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개울쪽을 보니 개울 옆에 설치한 푸른색 그늘막 지붕만이 보인다. 지금은 화음동문(華陰洞門)을 새긴 돌이 없지만, 지금이라도 화음동 입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을 세워주는 것은 어떨까? 
 

크기변환_석문오.jpg       크기변환_화음동문표지석.jpg
  

 


화음동정사의 전진기지 요엄류정(聊淹留亭)

 

  •    신유년(辛酉年;1681)에 산에서 나왔는데 상을 당해 병이 나서 7~8년을 앓다가, 기사년(己巳年;1689) 가을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마침내 백운계(白雲溪)가에 띠로 된 정자를 짓고 요엄류정(聊淹留亭)이라 하였다. 시냇물의 한줄기는 화악산 북쪽에서 나와 왼편으로 치우쳐 흘러오고, 또 한줄기는 오른편으로 흘러와서 화음동의 남쪽에서 만나기 때문에 쌍계(雙溪)라 하였다. 꺾어지면서 북쪽으로 내달리다가 요엄류정을 지나고 4~5리를 돌아가서 농수정의 서쪽으로 흘러간다.(「화음동지」)
  •    표독립대에서 서쪽으로 수십 걸음 떨어진 곳이 요엄류정이다. 정자와 표독립대 사이에 좌우로 황국(黃菊) 수백 그루를 심고 만향경(晩香徑)이라 하였다. 정자 아래 커다란 돌은 흰 요를 펼친듯하다. 열 사람도 앉을 만하여 천관석(川觀石)이라 하였다. 천관석 옆에는 추진교(趨眞橋)가 있다. 다리에서 서쪽으로 십여 발짝에 그늘 드리운 소나무와 바위가 있고, 북쪽 물가에도 있다.(「화음동지」) 
  •    봄여름 사이에 천관석 아래에 통발을 설치하면 열목어가 뛰어오르다가 통발에 떨어진다. 내가 돌 위에 앉아 바라보다가 아이를 시켜 가져오게 한다. 마을 사람들 중에 간혹 그물로 잡아서 주는 자가 있다. (「화음동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났다. 이 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면서, 김수증도 정계로 복귀하였다. 이 기간 동안 회양(淮陽)청풍(淸風) 등지에서 벼슬을 하였다. 1687년에 부인 조씨(曺氏)의 상(喪)을 치뤘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왕이 후궁인 숙원 장씨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 하는 것에 반대한 서인들이 내침을 당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와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고, 김수증은 벼슬을 버리고 곡운(谷雲)으로 들어왔다.


   크기변환_천관석과 요엄류정 터.jpg사환국 이후 김수증곡운정사를 떠나 화음동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삼일계곡 주변에 정자를 세웠으니, 이 정자의 이름이 요엄류정(聊淹留亭)이다. 지금은 삼일계곡이라 부르지만 김수증백운계(白雲溪)라 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본채인 부지암(不知菴)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요엄류정화음동정사를 짓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한 셈이다.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고 있지만 김수증의 마음속은 정국의 변화에 따른 부침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소용돌이쳤을 것이다. 집짓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그의 회한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리라. 


    정자 아래 시내에 있는 길쭉한 바위가 천관석이다. 흰 요를 펼친 듯 하다라는 비유와, 열 사람이 앉을 만 하다라는 묘사는 이곳이 천관석임을 알려준다. 천관석 아래 통발을 설치하여 열목어를 잡고, 천관석의 북쪽 물가에 생김새가 대체로 같기 때문에 호석(互石)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글은 천관석의 위치를 더욱 확실하게 알려준다.  
   요엄류정의 유적은 없다. 그러나 정자 아래 천관석이 있다는 김수증의 기록에 의한다면 천관석 윗부분에 정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엄동정사지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철망의 출입구 근처가 정자터일 가능성이 높다.

 

 

    온갖 일 잊고자 한 부지암과 청몽루

  •    경오년(庚午年;1690) 여름, 요엄류정 남쪽으로 수십 걸음 나아가 작은 언덕에 기대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방 네 칸을 지었다. 육방옹(陸放翁)의 ‘온갖 일 잠들어 알지 못하는 것만한 것이 없네’라는 말을 취하여 부지암(不知菴)이라고 이름 붙여 걸었다. 부지암 왼쪽에 다시 두 칸 방을 짓고 자연실(自然室)이라 하였다. 자연실 뒤에 바위를 뚫어 절구를 만들고 방앗간을 지었다. 울타리를 두른 후 사립문을 닫고 함청문(含淸門)이라 하였다. 문기둥에는 회옹(晦翁) ‘게으르게 문 닫아 거니, 찾아올 나그네가 어찌 있으리’라는 구절을 적었다. 울 밖 채마밭에는 황산곡(黃山谷)의 말을 취하여 불가부지포(不可不知圃)라 하였다. 문 바깥의 우물은 한천정(寒泉井)이라 하였다. 우물 아래 청여허당(淸如許塘)이란 못이 있다. 못 가에 누대를 쌓고 표독립대(表獨立臺)라 하였다. (「화음동지」)

 

   요엄류정에서 추진교(趨眞橋)를 건너 남쪽으로 수십 걸음 가서 집을 완성하였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보이는 것은 길옆에 집터를 둘러싸고 있는 녹색 철망이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니 집터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중간에 수로가 있고, 수로를 지나 남쪽으로 향해가니 바위 위에 절구 확이 물을 머금은 채 하늘을 담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몇 개의 바위가 덩그러니 누워있다.
   여러 기록을 보았을 때 부지암터는 지금의 터에서 도로쪽으로 더 이동한 곳으로 보아야 한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지만 상상 속에서 정사(精舍)를 둘러보도록 한다.
   정사의 중심이며 김수증이 화음동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를 알려주는 것이 부지암(不知菴)이다. 그는 방 네 칸의 집을 짓고, 육유(陸游)의 시에 ‘만사는 차라리 잠들어 알지 못하는 것이 낫다.[萬事無如睡不知]’는 말 중 ‘부지(不知)’를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조카인 김창흡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김창협은 ‘세도(世道)의 변고가 끝이 없어 굳이 알 것이 없는 일도 있고, 알고 싶지 않은 일도 있고, 차마 알 수 없는 일도 있으니,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며 부지암의 기문을 짓는다

 

  ‘농수(籠水)’라는 말은 그래도 외적인 환경에 빗댄 것이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시비(是非)를 다투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암자를  ‘부지(不知)’라고 이름한 것은 지각을 거두어들여 내면에 닫아 두고 세상만사의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것들과 크고 작은 무궁한 변고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 뜻이 농수보다 더 깊다.
  부지암을 지은 것은 농수정을 지은 지 십 수 년 뒤의 일이니, 세도(世道)의 변화에 대한 선생의 느낌에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를 붙인 것이 깊고 얕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이름을 보면 천 년 뒤에라도 선생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 세도의 변고 역시 역사적인 사실을 고찰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김창협, 「부지암기」)

 

  1차 거주지였던 곡운정사농수정(籠水亭)과 2차 거주지인 화음동정사 부지암(不知菴)을 비교하며, 김수증의 심리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세도(世道)의 변화에 대한 건물 주인의 입장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김수증은 자신의 마음을 부지암(不知菴)이란 이름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고, 김창협은 백부의 심리상태를 기문을 통해 대변해주었다.
  김수증은 부지암 왼쪽에 두 칸 방을 짓고 자연실(自然室)이라 하였다. 기묘년(1699) 여름에 두 칸을 증축하여 세 칸을 터서 방을 만들고, 위쪽 한 칸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복들의 대기소로 삼았다. 방의 북쪽 한 칸은 작은 루(樓)를 만들어 방과 통하게 하고 청몽루(淸夢樓)라 하였다. 방 안에 서가를 설치해 경서(經書), 사기(史記), 유가(儒家)의 문자(文字), 제가(諸家)의 시문(詩文) 등을 구분하여 꽂아두었다.
  자연실 뒤에 바위를 뚫어 절구를 만들고 방앗간을 지었다. 기록에 의하면 부지암 뒷산 쪽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절구는 건물의 동남쪽이며 개울에 인접하여 있다. 어찌된 일인가?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먼저 절구가 놓인 곳에 방앗간이 또 있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도로공사를 하면서 바위를 치우는 과정에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바위가 커서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하튼 방앗간은 부지암 옆 자연실 뒤에 있었다. 뒤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자연실 뒤쪽에 조그마한 계곡이 있었고, 계곡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건물을 완성한 후 울타리를 만들고 문을 세웠다. 문의 이름을 함청문(含淸門)이라 하였다. 문기둥에는 회옹(晦翁)의 ‘게으르게 문 닫아 거니, 찾아올 나그네가 어찌 있으리’라는 구절을 적었다. 조카 김창흡함청문(含淸門)에 대하여 이렇게 읊고 있다.

 

 

이 문을 세운지 오래되었으나, 열린 적이 많지 않았지.
스님이 달 밤에 두드리거나, 계곡 늙은이만 구름과 지나곤 하네.
문 주변 개간한 밭과 길 사르고, 삼년 동안 비탈에서 도토리 주웠지만.
양중(羊仲)과 구중(求仲)같은 친구들 볼 수 없고, 잡초만 날로 무성해지네.


自設此門久。開時應不多。
巖禪乘月扣。溪叟伴雲過。
十字燒畬逕。三周拾橡坡。
求羊不可見。蓬草日交加。

 

 

    비록 문을 세웠으나 깊은 산중에 찾는 이 없는 이곳은, 반수암의 스님들과 농사일 때문에 오가는 마을 사람들뿐이다. 집을 새로 지은 지 몇 년 지났건만 우정을 나눌 친구조차 볼 수 없기에 조카인 김창흡은 감상에 젖어 시를 지었으나, 김수증 본인은 그 경계를 넘어선 듯하다.
    울타리 바깥 채마밭의 명칭은 불가부지포(不可不知圃)이다. 대문 바깥에 우물이 있었는데,  한천정(寒泉井)이라 하였다. 우물 아래엔 청여허당(淸如許塘)이란 못이 있었다. 그리고 못 가에 누대를 쌓고 표독립대(表獨立臺)라 하였다.   
  화음동정사를 자주 찾은 이는 조카 김창흡이다. 김창흡은 노년에 화음동정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곡구정사를 짓고 거처하기도 했다. 화음동정사와 관련된 시를 제일 많이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한청정표독립대에 대해서도 시를 남겨 화음동정사의 답사를 풍부하게 해 주었다. 

 

샘물 차가워 마실만하니,
순박한 마음 새로 솟는 우물에 있네.
새벽에 금액(金液) 넘쳐나자
산 위 달은 흰 두레박 줄을 비추네. 


泉冽可飮食。古心卽新井。
五更金液浮。山月映素綆。

 

 

 

황량한 누대서 지팡이에 기대니, 계곡 입구엔 구름이 자욱하구나.
산의 정령과 벗하여, 그대를 그리워하노라.
벽려 옷은 차가워지려하지만, 난초 띠는 향기롭구나.
개울 소리와 짐승들 소리에, 서울의 일은 들리질 않네.


倚杖荒臺小。溶溶谷口雲。
其將伴山鬼。且以望夫君。
薜荔衣將冷。蘭蘅帶有芬。
溪喧熊豹叫。京洛事無聞。

 

 

  화음동에서 김수증 소일거리 중의 하나는 꽃을 가꾸는 것이었다. 엄격한 선비란 이미지와 꽃을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감성의 이미지는 쉽사리 겹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은자의 삶을 사는 그에게 자연은 유일한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김수증의 글은 그가 얼마나 꽃에 대해 해박하고 사랑했던가를 보여준다. 

 

   " 부지암의 남쪽 창 계단 아래에 본래 산반화(山礬花) 한 떨기가 있으니, 부지암을 지을 때에 심어 놓은 것이다. 푸른 잎이 동글동글하다. 4월에 꽃을 피우면 꽃송이가 매우 가늘어 좁쌀을 꿰어놓은 듯하고 빛깔은 눈처럼 희다. 맑은 향기가 짙게 퍼지고 송이송이 열매를 맺으면 푸른 구슬 같다. 이 꽃이 산과 들 곳곳에 있으나, 옛 사람들이 적어놓고 읊조린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품격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 옆에 또 해당화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뜨락 동남쪽 귀퉁이에는 노란 국화 수십 뿌리 심었으며, 또 오동나무 한 그루도 심었다. 부지암 계단의 섬돌 사이에 석창포(石菖蒲)를 심었다. 남쪽 창 바깥에도 심었다. 이것은 강도(江都)에서 나는 산물로 약용으로 쓸 수 있다. 또 흔히 사람들이 석창포라고 하는 것은 잎은 단풍과 비슷하고 그 뿌리는 구불구불하며 돌 틈에서 잘 자란다. 실은 창포가 아니고 더러 석단풍(石丹楓)이라 한다. 이것을 자연실 계단 사이에 심었다. 또 한천정가에 감국(甘菊)구기자(枸杞子)를 심었다. 우물가에서 정자와 누대 사이까지는 오미자(五味子)가 많아서 덩굴져 열매를 맺는다. 또 미후도(獼猴桃) 한 떨기가 있다. 북쪽 언덕에 있는데 나무 위를 얼기설기 두르고 있다. 단풍나무진달래, 철쭉이 산과 시내, 솔숲 사이에서 두루 비친다. 철쭉의 연분홍 빛 품격은 매우 아름다워 가장 볼만 하다. 내가 일찍이 어느 날 산길을 나섰더니 풀꽃 하나가 연분홍을 띄었는데 바로 금전화(金錢花)와 같고 줄기와 잎 또한 금전화와 같았다. 무성한 잡초 가운데 묻혀 있었으니, 이것은 이른바 ‘수레와 말이 오지 않으니 누가 보아 감상하리’라는 것이다. 울타리 아래 옮겨 심어 두고 야금전화(野金錢花)라 하였는데, 해마다 꽃을 피우니 또한 즐길 만하다. 화분에 기르는 매화 둘이 있어 추위를 만나면 방 안에 두었더니 지난 달에 꽃을 피웠다. 또 화분에 심은 대나무 하나가 있다. "  (「화음동지」)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산반화였다. 고생 끝에 김수항의 넷째 아들인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노가재집(老稼齋集)』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산반(山礬)」이란 시에서 이 꽃의 속명(俗名)이 노론재(老論材)라고 밝히고 있었다. 노론재와 음이 비슷한 노린재나무를 찾아보니 김수증이 묘사한 것과 비슷하였다. 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노린재나무의 가지나 단풍든 잎을 태우고 남은 노란색 재 낸 잿물을 황회 하는데, 지치와 같은 천연 염료 옷감을 노랗게 물들일 때 황회매염제로 썼기 때문에 노린재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 키는 2~5m에 달하고, 나무껍질은 회색이거나 회갈색이며 세로로 얕게 갈라진다. 어린 가지에 잔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며 길이는 3~7cm 정도로 타원 모양이다. 표면에 털이 없고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오뉴월에 피는 꽃은 어린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로 피는데, 크기는 8~10mm 정도이고, 흰색이며 수술이 도드라져 보이고 옆으로 퍼지며 향기가 난다. 9월에 여는 열매는 타원 모양이고 남색이다.”


  김수증이 말한 미후도(獼猴桃)다래넝쿨을 의미한다. 야금전화(野金錢花)는 무슨 꽃을 지칭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꽃에 대해서만 애정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누런 닭 푸르스름한 닭 두 종을 길렀다. 닭을 위해 홰를 만들고 둥지를 매달아 주기도 했다. 울짱을 엮어 병아리를 보호하기도 했는데, 때때로 고양이나 너구리가 해칠까봐 남쪽 처마 아래로 옮겨 놓기도 하면서 화음동에서 살았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김수증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산골노인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렸다. 화음동정사는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봄여름 사이에는 산사람들이 매일 문을 지나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땔나무를 해 가기도 하고, 목재를 해 가기도 했다. 어떤 때는 뽕잎을 따고 어떤 때는 화전을 사르며, 밭을 매는가 하면 산나물을 캐기도 하고, 산의 벌꿀을 찾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또 곡식을 베거나 매를 잡거나 산삼을 캐기도 하고, 잣이나 산과일, 버섯을 따는 사람도 있어서 늘 집 앞을 지나다녔다. 그 가운데 서로 낯익은 마을 사람은 가끔 잠시 머물러 푸성귀며 열매를 내놓기도 하였다. 반수암에 오는 중과 사람들도 많이 문을 지나다녔다. 그러면 김수증 더러 불러다가 말을 나누면서도 시끄럽고 번거로운 줄 몰랐다.

 

 

 

크기변환_화음동정사 터.jpg     크기변환_절구터.jpg 

 

    

서쪽 계곡의 실개울과 용운대(舂雲碓)

  •    " 실개울이 부지암 서쪽에서 흘러나온다. 울타리 바깥에 물레방아를 만들고 용운대(舂雲碓)라 하였다. 부지암의 왼쪽에서 남아도는 물을 나누어 나무를 파내 흐르게 하여 나무 물통으로 받아 주방용으로 사용한다. 또 남쪽 창가 낙숫물 떨어지는 곳으로 나눠 흐르게 해서 빨래하는 데 보탠다. 밤낮으로 졸졸거리며 거문고와 축 소리를 내서 습운천(濕雲泉)이라 하였다. 물이 넘치면 계단과 뜰을 지나 나무로 엮은 문을 뚫고 나와서 추진교에 이르러 백운계로 흘러든다. "(「화음동지」)
  •    " 서쪽 언덕에서 샘물을 끌어다 서쪽 창가에 이르게 하고 나무를 파내고 지탱하여 나무물통으로 흐르게 하였는데, 난간과 높이를 같게 하였다. 남는 물은 처마 끝으로 떨어져 못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였다. 맑고 시원한 빛과 옥처럼 고운 소리가 늘 곁에 있어서 깊은 산이나 굽이굽이 흐르는 개울로 가지 않아도 되었다. 난간에 기대어 씻고 양치질을 하면서 몸을 청결하게 하였다." ( 김수증, 「청몽루기」)

 

   부지암 서쪽에 있는 실개울은 제대로 된 모습을 잃어버렸다. 화음동정사지터 중간에 화음동정사지터임을 가리키는 팻말이 있고, 길 건너편 대각선에 이동식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 옆으로 비포장 임시도로가 있는데, 바로 옆에 실개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개울은 콘크리트관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감춘다. 그런데 실개울은 임시도로를 내면서 원래의 물흐름이 바뀌었다고 인근 유원지 주인이 알려준다. 예전의 실개울은 지금 위치에서 석문오쪽으로 더 내려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십여 미터 밑으로 떨어진 곳에 용춘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 근처에 절구도 있었을 테지만 찾을 길 없다. 아스팔트 밑을 통과한 물은 화음동정사지터 가운데 반듯하게 돌로 쌓은 수로로 흐른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니 산비탈을 포크레인으로 평탄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건물을 지으려는 것 같다. 공터를 지나 더 위로 가니 계곡이 보이고 물이 흐른다.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수량이 적지 않다. 충분히 물레방아를 돌리고도 남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젠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고 콘크리트관을 통해 개울로 흘러갈 뿐이다.


  물레방아를 돌리고 남은 물은 부지암청몽루 두 곳으로 흐른 것 같다. 부지암쪽에서 끌어들인 물은 먼저 주방용으로 사용되었다. 또 부지암 남쪽 창가 낙숫물 떨어지는 곳으로 흐르게 해서 빨래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이 물은 밤낮으로 졸졸거리며 거문고와 축 소리를 내서 습운천(濕雲泉)이라 불렀다. 물이 넘치면 계단과 뜰을 지나 추진교에 이르러 백운계로 흘러들어갔다. 조카 김창협습운천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용운대터.jpg


소나무 계수나무 돌비탈 돌고 돌아                            
꽃밭이며 약초밭에 물을 뿌리네.
오솔길의 촉촉한 흰 구름
비 아닌 샘물 기운 머금었다오


洄洄松桂磴 濺濺花藥圃
一路白雲濕 須知不是雨

 

 

    실개울의 물을 자연실에 딸린 청몽루에서도 끌어들였다. 청몽루 서쪽 창가에 나무통을 설치하여 물을 받았다. 난간과 같은 위치에 설치했기 때문에 난간에 기대어 씻고 양치질을 하면서 몸을 청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처마 끝으로 떨어지게 하여 맑고 시원한 물소리를 감상하였다. 나무를 파내 만든 수로를 통하여 생활공간인 부지암청몽루로 흐르게 하여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떨어지는 물소리를 감상하였다. 김수증은 계곡 건너 무명와에서도 종일 우두커니 물이 떨어지는 용운대를 바라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실토하였다.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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