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걷다②

2015. 7. 23. 21:03여행 이야기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걷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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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굴암(月窟巖)과 송풍정(松風亭), 그리고 한래왕교(閒來往橋)

   " 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높이는 몇 길쯤 되는데, 냇가에 우뚝 섰다. 그 꼭대기에 의지하여 긴 다리를 만들어 골짜기를 가로질러 건넌다. 길이는 수십여 척이고, 높이는 몇 길이 더 된다. 소강절(邵康節)의 말을 취해 한래왕교(閒來往橋)라 이름붙이고, 그 바위는 월굴암(月窟巖)이라고 하였다."  (「화음동지」)

 

    화음동정사지에 오면 제일 먼저 눈이 들어오는 것이 개울 가운데 있는 바위와, 그 위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송풍정이다. 화음동정사를 지을 때 함께 지어진 것은 아니고 나중에 지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 바위 위에 있는 것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개울 가운데 있는 바위로 가기 위해선 신발을 벗어야한다. 주로 여름에 답사를 갔기 때문에 맨발로 조심조심 가곤했다. 바위는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크다. 바위의 동쪽에 ‘월굴암’이라 새겨져 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모되었고, 주변은 이끼가 듬성듬성 있다.


    월굴암의 이름은 소강절의 「관물(觀物」이란 시에서 가져왔다고 김수증 스스로 말하고 있다. “천근과 월굴로 한가하게 오가니, 삼십육궁이 모두 봄이네(天根月窟閒來往 三十六宮都是春)”란 구절에 있는 천근(天根), 월굴(月窟), 한래왕(閒來往)을 각각 바위와 다리의 이름에 사용하였다. 그래서 정자가 있는 바위의 이름이 월굴암이고, 월굴암에서 동쪽 방향에 있는 바위의 명칭은 천근석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지만 월굴암에서 천근석 방향으로 세워진 다리를 한래왕교라고 하였다. 


  1714년이하곤이 이곳에 들른 후 「동유록(東遊錄)」을 남겼다. 작년(1713년)에 물이 많이 흘러와 한래왕교가 무너졌고, 다시 쌓았으나 아름답지 않다고 하였다. 1721년 어유봉이 찾았을 때 화음동의 건물들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고 「동유기(東遊記)」에 적어 놓았다. 아마도 어유봉이 찾았을 때는 한래왕교도 건물과 함께 무너진 것 같다.
   김수증월굴암 위에 정자 한 칸 지었다. 월굴암 위의 송풍정겸재 정선(1676~1759)의 서화집인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김창흡겸재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기도 했다. 이때 이병연(李秉淵;1671∼1751)도 여행에 동참했다. 이병연은 이때 그린 겸재의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고 김창흡에게 보여주자, 김창흡‘이일원의 해악도 뒤에 쓰다[題李一源海嶽圖後]’란 글을 지어 주었다. 정선의 해악도(海嶽圖) 30폭 중에 사창리 일대 있는 농수정송풍정, 첩석대, 칠선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창흡송풍정 그림 이렇게 글을 지었다.

 

    " 화음동의 바위와 계곡의 꾸밈은 송풍정에서 지극하여 더할 것이 없다. 장쾌하구나! 허공에 지어서 함께 완상할 것이 없구나. 이곳은 곡운 선생님이 기뻐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한 곳이지만, 영리하지 못한 나는 늘 한(恨)을 품었다. 지금부터 날마다 마루를 쓸고 닦으면, 티끌을 딛고 내려준 가르침을 잇게 될 것이다."

 

   김창흡송풍정화음동에서 첫째로 꼽았던 것이다. 답사객들 눈에 제일 먼저 뜨이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화음동정사지 소개하는 곳마다 송풍정 사진을 싣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송풍정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김창흡이 말했듯이 김수증은 이곳에서 자연경관에 기뻐하였지만, 비분강개하기도 했었다.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문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고, 김수증 자신은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야 했던 일들이 그를 항상 괴롭혔을 것이다. 김수증보다 수양이 부족한 김창흡은 늘 한(恨)을 품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김수증 정자로 불어오는 바람에 비분(悲憤)한 마음을 보내고, 정자 밑을 흐르는 물에 강개(慷慨)한 심정을 씻었으리라.
  김창흡은 괴석(怪石)을 만나면 그 돌에 절을 하며 좋아하였다는 미불(米芾)송풍정을 향해 절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잘 만들었던 노반(魯般)이란 사람의 기술도 필요치 않을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다고 노래했다.

 

 

   주춧돌은 자연 그대로여서, 시냇물 가운데 굳세게 섰어라
 미불(米芾) 노인에게 절을 받을만하며, 노반(魯般)의 재주도 필요치 않구나.
 계곡에 들어서서 세상의 시비 멀리하고자, 교묘히 허공에 세운 정자를 찾아
 난간에 기대니 묘한 이치 모여들고, 소나무에 부는 바람소리 귀에 가득 들려오네.


    有石天然礎。剛方卧澗中。
    堪當米老拜。不費魯般工。
    越壑遙聽叱。踰尋巧架空。
    憑軒衆妙集。滿耳卽松風。


 

 김수증송풍정을 지은 이유와 송풍정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 송풍정 이름의 유래 등을 「송풍정기(松風亭記)」 에 남겼다. 

 

  " 내가 화음동에 들어왔을 때 시내와 산을 꾸며 보탠 것이 대강 갖추어져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정자와 누대를 오르내리고, 시내 구비에서 소요하였다. 더울 때 한래왕교에서 서늘한 바람을 쐬며 맑은 바람에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의 폭이 겨우 몇 자밖에 되지 않아 편안히 앉거나 누워 쉴 수 없었다. 그래서 바위 위에 정자 한 칸을 지었다. 월굴암(月窟巖)은 개울가에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는 몇 장이며 넓이도 몇 장이다. 바위 위에 기둥 세 개를 세웠는데, 바위 서쪽 떨어져나간 곳에 따로 큰 초석 하나를 세웠다. 초석은 개울 위 백여보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원래 주춧돌처럼 생겼고 높이가 아홉자여서 윗부분이 월굴암과 같았고 둘레는 몇 자였다. 그래서 옮겨 기둥 하나를 세웠다. 또 다리를 만들어 송풍정 남쪽 처마 아래에서 표독립대로 걸치게 했다. 길이는 수십여 척이고 도운교(渡雲橋)라 하였다. 부지암에서 표독립대를 거쳐 도운교를 지나면 송풍정에 이른다.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면 개울 가운데로 침이 떨어진다. 북쪽으로 무명와삼일정을 마주하고 인문석의 그림과 글씨가 또렷하게 보인다. 송풍정은 초연히 홀로 빼어나 부지암무명와 가운데 있으며 남북으로 두 다리를 끼고 서 있다. 큰 소나무가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맑은 여울이 그 아래에서 분말을 뿜는다. 숲에 낀 안개와 산 그림자가 처마에 어른거리고, 멀고 가까운 구름이 눈에 가물거린다. 맑고 상쾌하며 그윽하고 넓은 경개가 사계절 모두 아름다우나 삼복(三伏)에 시원함을 맞아들이는 것이 더욱 좋다. 여름에 물이 불면 기세가 더욱 장엄하다. 흰 물결이 부딪치면 정자는 흔들거리는 것 가운데 있는 것 같아 두렵게 만드니 또 하나의 기이한 볼거리다. 정자의 아름다움은 두루 열거할 수 없고 커다란 소나무 밑에 있기 때문에 송풍정(松風亭)이라 한다. "(「송풍정기(松風亭記)」 )

 

   여기서 화음동에 있던 다리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자료에 따르면 다리는 ‘한래왕교’ ‘도운교’ 두 개가 있었다. 한래왕교는 어디에 있었던가? 한래왕교란 이름은 ‘천근와 월굴로 한가하게 오간다’ 시 구절에서 취했다고 김수증 스스로 밝혔다. 그렇다면 한래왕교는 월굴암과 천근석 사이에 설치된 다리이어야 한다. 김수증은 1693년 사위인 유명건(兪命健)에게 편답장을 보낸다. 그 글에 길이 40척의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의 남쪽 끝은 월굴암을 베고 있고 북쪽에 있는 큰 돌은 천근석이라고 적고 있다.   
  도운교(渡雲橋)「송풍정기」에 나타나듯 표독립대송풍정 남쪽 처마 아래에 설치된 다리이다. 길이는 수십여 척이 된다고 묘사했다. 이어서 송풍정은 남북으로 두 다리를 끼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두 다리는 한래왕교도운교를 말하는 것이다.

 

 

 

 크기변환_송풍정과 삼일정.jpg      크기변환_월굴암 각자(세로).jpg

 

저 멀리 있던 천근석

 

 " 다리 건너 북쪽으로 또 큼직한 바위가 있어 천근석(天根石)이라 하였다. " (「華陰洞志」)

 

    몇 번 답사할 때만 해도 천근석이 있는 줄 몰랐다. 월굴암과 그 위의 송풍정, 그리고 인문석에 정신이 팔려서 번번이 지나쳤다. 지금이야 고백하지만, 천근석 뿐만 아니라 화음동정사를 구성하는 대부분에 대해 몰랐었다. 최근에 「화음동지」를 정독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면 보이게 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내가 그랬다.
  커다란 반석 위에 걸쳐있는 천근석김수증의 독특한 글씨를 또렷하게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천근석은 김수증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유준영 월굴암은 달을 상징하며 천근석은 해를 의미한다고 보고, 두 개를 잇는 다리는 음양소식(陰陽消息)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양에서 음으로 가는 소(消)와, 음에서 양으로 가는 식(息)천지의 시운(時運)이 바뀌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래왕교를 통해 월굴암천근석을 오고갔던 그는 세계가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되뇌이며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달이 차면 기울 듯, 또한 기울면 다시 찰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극에 달하면 반전하게 될 것이다 라고 스스로 위안했을 지도 모른다.

 

 

 

 

크기변환_천근석 각자.jpg    크기변환_천근석 원경.jpg

 

   

 

우주의 질서를 그린 인문석

  

    " 삼일정 아래 큰 너럭바위는 수십 칸쯤 된다. 회옹(晦翁)각조산(閣皁山)에서 했던 일을 본받아 하도낙서(河圖洛書), 선후천팔괘(先後天八卦), 태극도(太極圖)를 새겼다. 그리고 그 바위를 인문석(人文石)이라 하고, 전서(篆書)로 하락희문인문석(河洛羲文人文石) 일곱 자를 새겼다. " (「華陰洞志」) 

 

   매번 답사 올 때마다 찾았던 곳이 인문석이다. 처음에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진 글씨를 읽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곧게 쓴 해서체(楷書體)만 보던 초보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인(人)을 팔(八)로 잘못 읽고 무슨 뜻인가 한참 동안 고민하기도 했다. 나머지 글자도 몇 번의 오독 끝에 읽을 수 있었다.
   글씨를 읽고 나니 더 첩첩 산중이다. 초보자의 눈에 윷놀이판처럼 보이는 하도낙서와, 태극기의 괘를 더 복잡하게 그린 것 같은 팔괘는 그냥 도형으로만 보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 같아 감히 밟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하도(河圖)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그림이며, 낙서(洛書)는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이라고 한다. 복희는 하도에 의해 팔괘(八卦)하늘의 이치 밝혔고, 문왕은 팔괘로 땅에서의 인간절의(人間節義)의 이치 밝혔다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역(易)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 언제 역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 인문석의 발치는 개울이다. 이곳은 화음동정사의 가운데 부분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는 17세기와 확연히 다르다. 김수증이 소요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감상해본다. “삼일정 앞의 물과 돌은 맑고 투명하다. 큰 소나무가 늘어섰으며, 꽃과 나무가 교대로 그늘을 드리운다. 남쪽 언덕에는 부지암자연실, 요엄류표독립대가 시내와 떨어져서 그늘을 드리운다. 화악산은 푸른빛이 겹쳐져 푸릇푸릇하다. 구름과 안개가 끼었다가 지는 아침 저녁의 온갖 형상에 한량없는 흥취가 일어난다. 부지암으로부터 오고가는 것이 수백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표독립대 동쪽 귀퉁이에는 늙은 단풍나무가 소나무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엇갈려 그늘을 만드니 짙푸르기만 하다."  (「화음동지(華陰洞志)」)” 

 

 크기변환_인문석 각자(세로).jpg크기변환_태극도.jpg

 

 

 

우주를 입체적으로 반영한 삼일정

 

   "백운계 북쪽 작은 산은 바로 부지암과 책상처럼 마주 본다. 총계봉(叢桂峰)이라 하였다. 총계봉 아래 물가에 바위가 있는데, 요엄류정과 마주하여 작은 정자를 세울 만하다. 그런데 바위의 앞은 넓으나 뒤가 좁아서 네 기둥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기둥 셋을 두고 짧은 대들보를 가운데 달았다. 대들보의 세면에 서까래 셋을 꽂아 서까래가 마주치게 해서 세 마룻대가 만나는데 얹었다. 대들보 밑에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곁에 8괘(卦)를 늘어놓았다. 세 개가 마주치는 서까래에는 음양(陰陽), 강유(剛柔), 인의(仁義)를 나누어 적었다. 글자체는 팔분체(八分體)로 하였다. 세 마룻대에는 64괘를 두루 그렸다. 세 기둥을 각각 여덟 면으로 만드니, 모두 스물 네 면이다. 24절기를 차례로 늘어놓았고, 12벽괘(辟卦)를 배치하였다. 다시 12율(律)과 12지(支)를 적고 삼일정(三一亭)이라 하였다.  " (「華陰洞志」)

 

  삼일정인문석 바로 옆에 있다. 지금의 삼일정은 송풍정과 함께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삼일정은 독특한 외형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정자가 사각형인데 삼일정은 삼각형이다. 김수증은 바위 모양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삼일정 기둥에 써 놓은 글자들을 보면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지어진 것 같다. 유준영인문석의 세 도상을 삼일정 내부에 선천 64괘 효와 기호나 글씨와 함께 입체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인문석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삼일정인 것이다.


  삼일정에 형상화된 것은 태극도와 팔괘, 그리고 천지만물을 상징하기 위해 설정한 64개의  괘(卦)이다. 예서체의 일종인 팔분체(八分體)로 음양(陰陽), 강유(剛柔), 인의(仁義)를 적었다. 1년을 구성하는 24절기와, 1년 12달을 주역의 괘에 배합시킨 12벽괘, 12개의 음율인 12율, 12지(支)를 세 개의 기둥에 나누어 적었다. 주역의 체계를 반영한 우주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축소한 것이다.


  삼일정김수증이 처음 지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기둥마다 빼곡하게 한자가 적혀 있으며, 천장 위에는 태극도가 그려져 있다. 인문석이 바로 정자 아래 보인다. 인문석의 도상을 관찰하기 위한 목적에서 정자를 지었다는 해설이 적절한 것 같다.
  조카 김창협「삼일정기(三一亭記)를 지어 명문장이란 호평을 받으며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 곡운(谷雲)화음동(華陰洞)에 있는 정자는 우리 백부가 설치한 것이다. 어찌하여 삼일정이라고 이름하였는가? 기둥이 셋, 대들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세 개의 기둥과 하나의 대들보에서 의미를 취하였는가? 천(天)ㆍ지(地)ㆍ인(人) 삼재(三才)와 한 이치의 상(象)이 있기 때문이다. 삼재와 한 이치를 상징하여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정자를 짓고 보니 이러한 상이 있었던 것인가?
  전에 백부께서 이 시냇가에 와 배회할 적에 보니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거북과 악어가 물가에서 볕을 쪼이는 것 같았다. 그 등은 정자를 지을 만한데, 앞은 충분히 넓고 뒤는 점차 좁아져서 기둥 세 개만 용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 따라 정자를 짓자 이와 같은 상이 갖추어진 것이고, 정자가 완성되어 이름을 붙이자 그 뜻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할 것이다.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건은 각각의 수(數)가 극히 일정치 않지만 그 수에는 다 자연적인 상(象)이 있다. 도를 아는 사람은 은연중에 그 수를 관찰하여 그 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데, 몽매한 자는 살피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황하(黃河)에서 나온 신령스러운 말 등에 그려진 그림과,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령스러운 거북 등에 쓰여진 무늬를 사람들은 그저 열이니 아홉이니 하는 수만을 보았다. 그러나 복희(伏羲)와 하우(夏禹)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천지 생성의 순서와 음양에 따른 짝수ㆍ홀수를 한눈에 뚜렷이 알았다. 그리하여 8괘를 만들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서술했던 것인데, 후대의 군자는 어떤 사람이 토끼를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토끼로도 괘를 그을 수 있다.”고 하였다.
  사물을 잘 관찰하는 사람은 사물로 물건을 보지 않고 상으로 사물을 보며, 상으로 상을 보지 않고 이치로 상을 본다. 상으로 사물을 보면 지극한 상 아닌 사물이 없고, 이치로 상을 보면 지극한 이치 아닌 상이 없다. 비유하자면 포정(庖丁)의 눈에는 더 이상 온전한 소가 없는 것과 같다.
  이제 이 정자가 기둥이 셋, 대들보가 하나라는 것은 산중의 목동과 나무꾼도 다 가리켜 말할 수 있지만, 그 오묘한 이치와 상은 선생만이 은연중에 이해한 것이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그 사이에서 생활하면서 완상하고 즐기기에 충분할 것이니,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앞에 펼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가 지어졌을 때에 선생이 이름을 지은 것은 뜻을 취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부합된 것이니, 참 기뻐할 만한 일이다. 어찌 구구하게 그것을 상징한 것이겠는가. "

 

  김창협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세 기둥의 정자가 세워졌다고 하면서 백부를 칭송한다. 그러나 우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주변의 모든 사물에 또렷한 의미를 내포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크기변환_삼일정.jpg     크기변환_삼일정 밑에 있는 각자.jpg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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