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4. 11:51ㆍ글씨쓰기
-22년 유배의 삶 '음악 연주하듯' 승화-
요즘 주류예술은 돈과 직결된다. 이유는 예술이라는 꽃은 시장에서 화상과 관객이 피워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대가는 부자일 수밖에 없고 명작은 수천, 수억원을 호가한다. '이 작품 돈 냄새가 난다'는 시쳇말을 거론 안해도 돈을 먹고 자라는 예술은 응당 돈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간혹 사람냄새가 그리워 작가 스스로 외딴 곳에 궁지(窮地)를 파고 극한 상황을 연출하지만 붓을 놓는 순간 작품은 시장을 향한다.
↑ 그림 1. 이광사(1705~1777), ‘오언시팔곡병’(五言詩八曲屛) 중 6폭 부분, 72×38cm, 종이에 먹, 한빛문화재단 소장.
↑ 그림 2. 이광사, ‘침계루’(枕溪樓), 편액, 전남 해남군 대흥사 소재.
그래서 작가는 배고파도 배고프지 않고, 외로워도 외롭지 않지만 예술의 자리까지 인간이 돈에 밀려났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타락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시대 명작은 전적으로 혼자 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유배라는 강제된 궁지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외로움을 오직 붓 한 자루로 감내해야 한다. 요컨대 한 인간을 송두리째 평생 빨아 먹어야 피는 꽃이라고나 할까.
# 예술은 진정 시련을 먹고 자라는가
우리 문예사에서 작품과 생을 맞바꾼 예는 허다하다.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작은 18년 강진유배의 대가다. 18세기 조선예원의 영수인 표암의 존재는 과거길이 막힌 30년간의 안산 고행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추사체 또한 제주유배 8년과 그 이후의 결정이다.
그러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생애는 고통으로 치면 이들을 다 모은 것이다. 1728년 이인좌 난으로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근 20년간을 야인으로 백하 윤순과 하곡 정제두를 사부로 글씨와 양명학 공부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원교 일생에서는 다행이었다.
원교의 진짜인생은 1755년 소론일파의 연잉군(훗날의 영조) 제거 역모사건(나주괘서사건)의 실패로 가담자 모두가 장살·옥사되는 가운데, 왕족의 후예이자 예술적 천품이 참작되어 영조가 원교에게 사약 대신 유형(流刑)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원교 스스로 이천리 유배 길을 나서는 1755년 3월30일을 성은(聖恩)으로 다시 태어난 생일 날로 삼을 정도였다. 원교는 조선의 최북단 함경도 부령에서 7년, 다시 최남단 절해고도인 전라도 신지도에서 15년간 도합 22년간을 유배지에서 살다죽었다. 요컨대 원교는 죽도록 유배지에서만 희(喜)·노(怒)·애(哀)·락(樂)을 모두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 차라리 음악인 원교 글씨
그래서 그런지 원교의 글씨에는 유독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기 어려운 다양한 표정이 포착된다. 그중에서 날고 뛰는 행서(그림1)는 원교체의 진수인데,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다산과 같은 인물들은 반전이 심한 원교 행서를 "자형(字形)이 가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씨에 개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인물로는 원교를 따를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글씨를 놓고 스승인 백하와 서로 우열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하는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온화하고 단정하지만, 이광사는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자체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뚤삐뚤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연기현감 황운조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원교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헐뜯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걸(奇傑)한 기질로 액운이 쌓임을 만났으니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하나의 획을 긋고 하나의 글자를 씀에 울림이 기세가 등등하고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진실로 은 갈고리나 쇠줄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상이 바탕에 있다"(그림2)고 할 정도다.
요컨대 원교의 글씨는 획 하나 하나의 음악적 리듬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가장 큰 특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서가록'에서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두고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썼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도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글씨가 추구하는 바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 진·당 고법과 전서·예서를 동시에 구사
그렇다면 원교글씨의 토대나 이상은 어디에 있는가. 원교의 문필은 고조부인 이경직·경석, 증조부 이정영, 조부 이대성은 물론 백부 이진유, 부친 이진검, 숙부 이진급 등이 타고난 명필임에서 확인되듯이 집안내림이다. 여기에다 당시 과장(科場)에서 시체(時體)로 통하던 당대 최고명필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원교예술의 골간이 된다. 원교 스스로도 "내가 30세 이후로 고인의 필법을 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필의(筆意)를 깨닫게 된 바는 백하에게서였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를 토대로 김생 이래 우리 글씨는 물론 중국의 당·송·원·명의 글씨맥락을 소화해낸 백하의 창경발속(蒼勁拔俗)한 글씨미학과 학서(學書)방법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의 글씨는 백하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송은 물론 위·진 고법에서 거슬러 올라가 전서와 예서로 된 여러 비석 글씨를 아울러 구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교가 왕희지를 근본으로 둔 옥동 이서나 공재 윤두서는 물론 백하 등 선대 명서가들의 서예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그 이전의 전·예서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교가 자신이 지은 '서결(書訣)'에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왕희지 고첩(古帖)이 없었는데, 오로지 옥동과 민성휘 집에서 얻어 본 낙의론(樂意論)과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讚) 두 첩에서 내 평생 필력을 얻었다. 무릇 고첩은 모두 모각(摹刻)을 거듭하였으니 오늘날 왕희지의 본색을 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漢)·위(魏)의 여러 비석글씨는 원래 각을 전하고 있어 심획(心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가지 첩을 여러 비석글씨와 비교하여 익혔다"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원교는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주장하며 이미 추사가 목표를 삼았던 왕희지 근본의 해서나 행초 중심의 첩학파는 물론 이전의 전·예서 등 비학파의 성과까지 동시에 실천해낸 선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 너무 심한 추사의 원교비판
그러나 원교 글씨의 이러한 성취에 대해 정작 추사는 '서원교서결후(書員嶠書訣後)'에서 원교가 먹을 가는 법, 붓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구양순과 안진경 글씨를 일률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추사는 청에서 들어온 급진적인 비학파 이론을 토대로 원교가 왕체 소해법첩과 '순화각첩' 등 첩학의 본래 결함도 모르고 있거나 한·위의 여러 비석글씨의 품평상의 오류까지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의 이러한 비판은 지금까지 본 대로 사실과는 다른 측면이 많을뿐더러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어 원교서예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절하케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 이동국| 에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서예가 열전](19) 조선 후기 - 원교 이광사(下)
필자는 최근 어느 잡지에 '지금, 한국미술의 현장'이라는 제하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서예 분야가 유독 다른 분야에 비해 작가나 비평가 교육자 전시기획자 등의 역할구분이 안되어 있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서단이 처한 현실이라 어쩔 수 없지만 실제 국제적인 행사까지 작가가 전시기획이나 비평도 하고 작가 선정을 하다보니 객관성이 떨어지는 일이 왕왕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이광사(1705~1777)의 ‘난저봉상 정약용등’, 비단·삼베에 먹, 개인소장. ‘난새가 날아오르고 봉황이 비상하며, 鼎이 뛰어오르고 용이 솟아오르듯하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유의 ‘석고가’(石鼓歌)에 나오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서체는 고전(古篆)의 하나인 현침전(懸針篆)이다.
↑ 이광사의 ‘서결’(書訣)의 첫장과 마지막장, 17×8.5cm, 목각 탑본, 개인소장. 원교가 신지도에서 1764년 6월 1일 ‘서결’을 완성하여 아들 이영익에게 써 준 글씨를 모각한 탑본(榻本)으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1766년 1월에 큰아들이 이긍익에게 써 준 것은 간송미술관에 전한다.
# 작가이자 비평가인 원교
이런 가운데 우리 서예비평의 역사에서 추사 김정희나 표암 강세황의 존재는 단연 우뚝한 존재이고, 옥동 이서나 원교 이광사 또한 익히 아는 바대로 각각 '필결(筆訣)'과 '서결(書訣)'이라는 전문적인 서예이론서이자 비평서까지 남기고 있다. 특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우리 서예의 비평문화에서 당시 글씨 역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귀중하다.
특히 원교는 '필결'을 통해 자신의 서예철학이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예를 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예컨대 원교는 우리나라 서예가 비평에서 통일신라 김생을 종장(宗匠)의 반열에 놓고 있다. 즉 "지금 김생의 진적이 거의 전하지 않으나 탑본 또한 기위(奇偉: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움)하여 고려 이후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글씨이다…. 신라 승려 영업글씨는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함이 취할 만하고, 고려 승려 탄연은 오로지 '성교서(聖敎序)'만을 따랐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비루한 획을 계몽시켰다"고 하였다.
# 비평의 척도로서 왕법
이러한 관점은 원교의 선대 작가이자 이론가인 옥동 이서와도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로서 원교는 수많은 작가 중 안평대군 이용,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를 4대가라 평하였고 이 중에서 석봉을 최고로 쳤다. 특히 원교는 "석봉 같은 사람은 학식이 높지 못했지만 연습으로 고인의 필법에 부합하였고, 행초의 득의처는 웅심(雄深)하고 질건(質健)하여 송·원과 차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원교는 고려 말 조선 초 이후 조선의 국서체로 자리 잡았던 송설체는 물론 이를 토대로 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재주는 있으나 일가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봉래 양사언에 대해서도 "봉래의 초서는 호탕하여 장지나 왕희지보다 낫지만 재능만 성해 그림자만 얻고 뼈를 잃은 격으로 특별히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혹평하고 있다. 이것은 백하 윤순이 "봉래는 역시 초서만 잘 쓰지만 역시 가장 훌륭하다"고 치켜세운 것과 달라 주목된다. 즉 원교는 서평의 기준을 고법(古法)이 녹아난 글씨의 굳센 기세에 두면서 우리나라 역대 서가 중 왕법을 기본으로 했던 김생, 영업, 탄연, 석봉을 최고로 꼽았던 것이다. 이러한 원교의 품평 잣대는 옥동의 예에서 보듯이 이미 송설체에 대한 반발로 왕법으로 복귀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작용되었음은 물론이다.
# 근골과 질박함이 구비된 글씨
그러면 이러한 비평의 잣대를 들이대는 원교의 글씨이 대한 이상이나 화두는 무엇인가. 원교는 특히 글씨의 고질(古質)과 연미(姸媚)에 대하여 말하면서 "상사(上士)가 도(道)를 들으면 근실하게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어버리니, 웃지 않는 것은 도로 삼을 만하지 않다"고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교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는 것은 결코 글씨가 아니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글씨는 근골(筋骨:근력과 뼈대)을 바탕으로 삼아야 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예의 고박하고 변화 있는 필의를 통해 험경(險勁)함과 소탕(疏宕)함을 동시에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옥동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인데 그래서 원교는 당 이후의 글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이며, 동기창의 말을 인용하여 수미(秀媚)한 자태가 글씨의 병폐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왕헌지도 장지·종요에 비해 질박(質朴)하지 않다고 하면서 연미하거나 공교(工巧)보다 험경하고 졸박한 글씨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이에 원교는 이왕을 거슬러 올라가 종요와 장지를 따르고, 더 올라가 한나라 예서와 주나라 전서의 예스러운 필의를 배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한 '서결'
지금까지 '서결'을 통해 본 대로 원교는 위진필법과 전예중비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당대 이후 중국서풍에 대해 비판일변도 시각을 보였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의 우열을 논하면서도 주관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서결'을 통해 전예고비의 중요성과 공력(功力)의 가치를 일깨운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원교의 서결은 당시 조선후기 시대적 관심사와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원교는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글씨가 비록 작은 도이지만 '반드시 먼저 겸손하고 두터우며 크고 굳센 뜻(謙厚弘毅之意)'을 지닌 뒤에라야만 원대한 장래를 기약 할 수도 있고, 성취할 수도 있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고 '서결'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공모전을 통해 자격증을 따듯 작가가 속성으로 배출되고 있는 요즈음에 더욱더 크게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
〈이동국|예술의전당서예박물관 학예사〉
員嶠書訣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며 서예가인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서체 이론서이다. 저서로 《동국악부(東國樂府)》《원교집선(圓嶠集選)》 《원교서결(圓嶠書訣)》 등이 있고, 글씨에 《영의정이경석표(領議政李景奭表)》 《우의정정우량지(右議政鄭羽良誌)》 등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1764년과 1768년에 각기 전편과 후편을 지었는데, 후편의 글은 아들인 영익(令翊)에게 기록하게 하고 저자가 수정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제는 서법의 이론을 전개한 다음 7가지 획에 관해 구체적인 서법을 설명하였다. 즉, 전편에서 송대까지의 중국의 역대 서결을 모아 정리하고, 후편에서는 전편에 누락된 서예가의 이론을 보충하고 자신의 서론을 곁들여 보충하였다.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 비교하고, 조선 특유의 서법을 밝힌 다음 자신의 서체이론을 밝히고 있어 ‘동국진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조선 고유의 서체인 원교체의 형성과정과 이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
한석봉 <石鼓歌>
한유 석고가
韩愈的《石鼓歌》原诗:
张生手持石鼓文,劝我试作石鼓歌。少陵无人谪仙死,才薄将奈石鼓何。
周纲凌迟四海沸,宣王愤起挥天戈。大开明堂受朝贺,诸侯剑佩鸣相磨。
搜于岐阳骋雄俊,万里禽兽皆遮罗。镌功勒成告万世,凿石作鼓隳嵯峨。
从臣才艺咸第一,拣选撰刻留山阿。雨淋日炙野火燎,鬼物守护烦呵。
公从何处得纸本,毫发尽备无差讹。辞严义密读难晓,字体不类隶与蝌。
年深岂免有缺画,快剑砍断生蛟鼍。鸾翔凤翥众仙下,珊瑚碧树交枝柯。
金绳铁索锁钮壮。古鼎跃水龙腾梭。陋儒编诗不收入,二雅褊迫无委蛇。
孔子西行不到秦,掎摭星宿遗羲娥。嗟余好古生苦晚,对此涕泪双滂沱。
忆昔初蒙博士征,其年始改称元和。古人从军在右辅,为我度量掘臼科。
濯冠沐浴告祭酒,如此至宝存岂多。毡包席裹可立致,十鼓只载数骆驼。
荐诸太庙比郜鼎,光价岂止百倍过。圣恩若许留太学,诸生讲解得切磋。
观经鸿都尚填咽,坐见举国来奔波。剜苔剔藓露节角,安置妥帖平不颇。
大厦深檐与覆盖,经历久远期无陀。中朝大官老于事,讵肯感激徒妍婀。
牧童敲火牛砺角,谁复著手为摩挲。日销月铄就埋没,六年西顾空吟哦。
羲之俗书趁姿媚。数纸尚可博白鹅。继周八代争战罢,无人收拾理则那。
方今太平日无事,柄任儒术崇丘轲。安能以此上论列,愿借辩口如悬河。
石鼓之歌止于此,呜呼吾意其蹉跎。”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이광사(전주인)는 조선 2대 정종(1398~1400)이 성빈 지(池)씨 사이에서 태어난 10남 덕천군의 후손으로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이고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이진검으로 명문대가이다.
그러나 경종(1720~1724)이 후 당쟁에 휘말리면서 집안이 어렵게 되드니 아버지 이진검은 영조(1724~1776)가 즉위하자 3년 후 1727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당하면서 이곳에서 죽게되고 이 후 집안은 "역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게 된다.
원교 이광사 역시 50세가 되던 해,
영조31년(1755)에 나주벽서(객사에 영조를 비난한 글이 붙음)에 연루됨으로서 영조의 친국이 이어지자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을 감지한 부인(문화유씨)은 7살 딸과 두 아들을 두고 자결하게 된다.
이광사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7년을 다시 전라도 진도를 거처 완도 신지도로 이배를 당하고 이곳에서 15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정조(1776~1800)즉위 1년(1777)에 유배 23년의 길고 긴 막을 내린다.
원교 이광사는 일찌기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이질인 白下 尹淳(1680~1741)에게서 서예공부를 했는데 이 후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당대의 명필가로도 유명하다.
동국진체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여주인 玉洞 李緖(1662~1723)가 처음으로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동국진체를시도하고 공재와 옥동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백하의 제자로 자연스럽게 원교가 동국진체를 완성 시키기에 이른다.
또 이무렵 그림으로는 "동국진경"이라는 조선의 특색있는 그림이 전개되는데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1676~1759)의 화풍이 그것이다.
원교는 신지도에서 유배생활 중에 남긴 글씨가 많은데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과 "침계루" "해탈문" 구례 "지리산 천은사"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 과 "만경루" 등 행서체와 해서체가 많이 있으며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소개 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잠시 대흥사를 찾아 초의선사를 만나게 된다.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대웅보전 앞에서 "대웅보전"이란 편액을 한참을 바라 보더니 초의선사에게 하는 말이 "대웅보전"이란 편액이 원교가 쓴 글씨 같은데 조선의 글씨를 원교가 다 망쳐 놓질 않았소? 하며 당장 편액을 떼 낼것을 요구하고 당시에 "무량수각(지금도 대웅보전 옆에 걸려 있음)"이란 글씨를 써서 초의선사에게 주고 유배길에 나섰다.
그 후 9년의 세월이 흘러 추사는 유배가 풀리고 다시 대흥사에 들러 하는 말이 "내가 귀양길에 떼어 내라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어 달라~!"라고 했던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원교는 자신의 어두운 생을 글로 쓴 시가 있다-
영회(詠懷)
평생불속지 노대위류인(平生不俗志 老大爲流人) 평생을 속된 뜻 없이 살아왔거늘 늙어서 유배인이 되었구나
유몽심래도 미방망북진(有夢尋來道 迷方望北辰) 꿈속에 래도재(친구서실)를 찾기도 하고 길 잃고 북극성을 보기도 하고
만형자득의 고객여이신(萬形自得意 孤客與怡神) 만가지가 스스로 뜻을 얻는듯하고 외로운 손이 마음을 기쁘게 하니
점애문장세 유수명익진(漸愛文章細 唯愁命益嗔) 점점 좋아진 문장을 사랑하는데 운명이 사나워 지는것이 근심일세,
-대흥사 대웅보전 앞의 <침계루> 편액-
원교 이광사 / 대둔사 현판
두류산 천은산 현판 / 이광사 : 水體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원교 이광사
- 한(恨)으로 이룬 민족 고유의 서체(東國眞體) -
김세곤 ( 목포지방노동사무소장)
완도 신지도 - 이광사의 유배지
지난 주말에 목포, 해남지역에 폭설이 내렸다. 산에 흰 눈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완도 신지도를 간다. 조선 후기 명필로 알려진 원교 이광사(1705 숙종 31년 -1777 정조1년)를 만나기 위하여서이다.
원교 이광사. 전주 이씨 왕족의 후손이며 몇 대째 내려오는 명필 집안으로 아버지와 백부가 경종시절에는 판서를 지낸 소론의 핵심인물이었으나, 경종이 재위 4년(재위 1720-1724)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재위 1724-1776)하면서 노론이 득세하자 하루아침에 몰락한 가문의 후예. ( 숙종의 아들인 경종은 장희빈이 낳았고 , 영조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가 낳았다.)
벼슬 한번 해보지 못한 야인으로서 평생을 살면서 일찍이 백하 윤순(1680-1741) 으로부터 서예를 배우고 하곡 정제두(1669-1736)에게 양명학을 배운 명필이요 문인. 그러다가 불운하게도 51세에 귀양살이를 시작하여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한(恨) 많은 생을 마감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
그리고 보니 올해가 그가 탄생한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흔적을 보러 완도 신지도 가는 길은 마음이 설렌다. 강진을 지나면서 같이 동행한 분에게 원교의 기구한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대대로 소론이었던 그의 집안은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정권을 잡자 아버지 이진검은 강진으로, 백부 이진유는 추자도로 유배되고, 23세 되던 해(1727) 유배지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병사(病死)하고, 26세에는 백부가 옥사하고, 27세에는 첫째 부인 권씨가 여 쌍둥이를 낳다가 난산하여 죽게 된다. 1755년 51세에 전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국문(鞠問)을 받게 되자 둘째부인 유씨는 원교가 극형에 처해졌다는 헛소문을 듣고 처마에 목을 매달아 자결을 하고, 원교는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가서 8년을 지낸다. 그러나 주변에 글과 글씨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유로 다시 1762년에 진도로 이배된 뒤에 또 다시 절해고도(絶海孤島) 완도 신지도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1777년 8월에 죽는다.
유배지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도는 정말 한이 많은 곳이다. ‘사는 것이 한을 쌓는 것이고, 한을 쌓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의 한 대목처럼, 유배지의 삶이란 한을 쌓는 일 그 자체이다. 신안 흑산도에서 유배되어 하늘만 바라보다 죽은 손암 정약전의 삶과 완도 신지도에서 푸른 바다를 보면서 글씨에 혼을 불사르다 죽은 원교 이광사의 삶 모두 다 그렇다.
해남을 지나 완도에 이르자 ‘건강의 섬 완도’ ‘장보고의 고장 완도’라는 현수막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해신(海神)깃발이 도로변에 줄줄이 꽂혀있다.
완도(莞島). 장보고의 해상왕국 청해진.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일본을 넘나드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흥성하였으나, 장보고가 살해당한 뒤로는 완도 주민들은 모조리 김제의 벽골지로 강제 이주 당하였으니. 그리고 후백제시대에 와서야 다시 돌아와서 빙그레 웃었다하여 ‘완(莞)’ 이란 말이 붙었다는 한(恨) 많은 섬이 완도이다.
이윽고 완도읍에 도착하여 선착장에서 배를 탄다. 신지도까지는 7분정도 걸린다. 신지도 도선장에 도착하여 신지면사무소로 간다. 가는 도중에 유명한 명사십리 해수욕장 팻말이 보인다. 면사무소에서 원교 이광사의 유배지에 대하여 잘 아는 분을 만나 그분의 안내로 이광사가 살았다는 금곡리(옛 지명은 金實村)마을로 간다. 이광사가 살았다는 집은 금곡리 경로당 바로 옆에 있다. 옛날에 황희 정승의 자손인 황치곤이 살았던 집이라 한다. 황치곤은 이광사와 친하게 지낸 친구이다. 허름하게 생긴 꽤 오래된 가옥 한 채. 지붕은 비가 새어 새로 수리를 했다 하나 집 자체는 고색(古色)이 짙다.
아, 여기가 1762년 9월에 원교 이광사가 귀양을 와서 호를 수북이라고 하고 글씨를 쓰던 곳이구나. 유명한 <원교서결>이란 서법 책을 쓴 곳이구나.(이광사의 원교란 호는 1737년에 그가 서울 동그재(원교)근처에서 살았을 때 지명을 따서 붙인 호이다.)
이 집이 바로 원교가 둘째아들 영익과 북쪽 변방에서 유배살이 할 때 낳은 주애(珠愛)란 이름의 서녀(庶女)와 같이 살던 집이구나.( 일몽 이규상(1727-1799)의 ‘병세재언록’책의 서가록에 의하면 그 딸은 글씨를 하도 잘 써서 아들 영익보다 나았다는 데 이광사가 죽자 섬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한다. 이광사의 큰 아들은 실학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연려실기술’ 을 편찬한 이긍익이다. )
이곳이 바로 주변 사람들이 병풍, 족자, 서첩등 글씨를 써 달라는 요구가 많아 하루 날을 택하여 글씨를 썼던 요즘 말로 하면 개인전(展)인 서장(書場)이 열린 곳이구나.
그런데 이광사의 유배지를 잘 아신다는 분이나 동네 이장인 황치곤의 후손에게 물어보아도 이 집에서 원교 이광사의 흔적은 어느 하나 찾을 수 없다. 집안에 이광사의 글씨 한 획도 발견할 수 없고 벽이나 나무에도 글씨 흔적은 없다. 금곡리 마을에도 이광사의 유품은 말할 것도 없고 원교의 글씨나 병풍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지금 가 본 집이 정말 이광사가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곡리 경로당에서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려고 관계자의 말을 듣는다. 안내를 해준 분과 동네 이장의 말로는 예전에는 원교가 쓴 병풍을 이 마을 황씨 후손이 소지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병풍이 해남에 있는 어느 분에게 있단다. 황치곤의 초상화는 인천에 사는 황씨 문중 어느 분이 소장하고 있다 한다. 그러면서 장수황씨 족보에서 황치곤의 내역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숙종 기축생 무술 3.18 졸’이라고 써 있고 ‘이광사 편기당왈(扁其堂曰) 괴괴(怪魁)’ 라고 써 있다. ‘원교가 황치곤의 모습이 하두 괴이하여 그를 괴괴(괴이의 으뜸)라고 부르고 괴괴당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는 이완우의 글(원교의 생애와 예술)과 일치한다.
‘황치곤의 초상화’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렇다면 1774년 겨울원교가 70세 되던 해에 도화서의 화원(畵員) 신한평이 신지도에 와서 원교의 초상화를 그렸을때 같이 그린 그 초상화가 아닌가.( 신한평은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이것이야말로 귀중한 자료가 아닌가. 며칠 전에 유홍준의 ‘완당평전 1’책에서 원교 이광사의 초상을 본적이 있다. 머리에 사각의 두건을 쓰고 흰 도포를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단정하게 모은 초상. 그런데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20년 이상의 유배생활과 자기의 기구한 처지가 얼굴에 나타나 있다. 한이 많이 서려 있다.(이 초상화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나는 금곡리 동네 분들에게 황치곤의 초상화라도 복사하여 마을에 비치하라는 권유를 하면서 또 다른 것은 없는 지를 다시 물어본다.
하기야 이광사가 죽은 다음해에 그의 유해는 이장되어 선영이 있는 경기도 북부의 유씨부인 묘와 같이 합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묘역이 지금은 군사분계선 지역이라 하니 이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당대의 동국진체 명필가의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니. 매우 처량한 기분이 든다.
완도로 돌아가는 길에 신지도 앞 바다를 본다. 바다가 정말 맑고 푸르다. 청정(淸靜)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 책에 의하면 “원교는 적거인 섬에서 매번 행초와 해서로 작은 서첩을 만들어 호로박에 넣어 물에 띄우면서, ‘바다 밖 다른 지방에서 모두 내 글씨를 얻도록 함이다’ 고 하였다 한다.” (이완우 글에서 인용) 바로 이 바다에 호로박을 띄웠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벼슬은 못했으나 글씨로서라도 세상에 자기를 알리고 싶은 원교의 심정을 이해하여 본다.
다시 도선을 타고 완도읍으로 오면서 이 배도 오는 12월 14일이면 운행이 그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완도읍에서 신지도까지 연륙교가 개통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원교가 신지도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날 밤 목포 집에서 <동국진체>와 <원교서결>에 관한 책을 본다.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18세기 초는 한국 서화사에서 민족 특유의 자각이 싹트던 시기였다. 서예에는 동국진체가 , 그림은 정선(1676-1759)으로부터 동국진경(東國眞景) 화풍이 전개된 때였다.
가장 조선색이 나는 민족의 진정한 글씨체인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1662-1723)와 서화가이며 옥동의 친한 친구인 해남윤씨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합작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공재의 이질인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수된 후에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이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옥동 이서는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형임).
이 서체는 중국서예와의 차별성을 확보하기위하여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성을 토대로 조선적인 자연스러운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한편 원교의 서결은 이곳 완도 신지도에서 만들어진 서법 책이다. 서결 전편은 1764년 6월에 원교가 직접 썼고, 후편은 1768년 정월에 둘째아들 영익에게 글을 쓰게 하고 자기가 교정을 본 후에 완성하였다. <원교서결>은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 비교하고 조선특유의 서법을 밝혔으며, 동국진체라고 하는 조선 고유의 서체의 형성과정과 이론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러움과 근골격, 전서와 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왕희지체를 본받았으나 우리민족 고유의 생명력을 강조하였다.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 <만경루>
다음날에 강진 백련사를 들른다.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를 감상하기 위하여서 이다. 백련사 가는 동백숲 길은 언제 걸어도 운치가 있다. 어느덧 백련사 만경루를 지나 대웅보전에 이른다. 먼저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편액 글씨를 본다. <대웅보전>은 <대웅>과 <보전> 두 줄 세로로 쓴 글씨를 2개의 널빤지에 붙인 행서를 가미한 해서체 편액이다. 글씨가 마치 살아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대(大)자 글씨는 사람이 활개를 치고 걸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대웅보전 글씨를 찬찬히 보니 <대웅> 글자가 약간 비스듬하다. 이규상의 책에 보면 “원교의 글씨는 비록 해서(楷書) 글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딱하고 비스듬하다. 연기(燕岐)원으로 있는 황운조는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광사의 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흠잡는 일이 많으나,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이한 기세로서 쌓인 울분을 털어 놓은 것으로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라는 글이 있다. 글씨체가 사람 마음의 표현이요 기(氣)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로 한이 많은 그의 글씨체가 비스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 당시에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너무 유행하여 서예를 배우는 일반 사람들도 모두 원교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글씨를 비스듬하게 썼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원교가 기를 추구한 글씨를 썼다는 일화는 ‘도보(道甫: 이광사의 字임)는 글씨를 쓸 때에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 두었는데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羽調)의 분위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한다.(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 같은 글씨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글씨가 달라지는 것은 누구나 경험 하는 일이다.
한편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만경루 편액을 본다. 만 가지 경치가 보인다는 뜻의 <만경루(萬景樓)> 편액은 반듯하게 정자로 쓴 전형적인 해서체이다. 글씨도 두툼하게 먹이 잘 묻어있다.
문득 다산 정약용이 지은 이광사에 대한 시가 생각난다(1807년).
다산과 혜장선사가 자주 만나던 시절에 다산이 백련사에 걸려 있는 이광사의 편액을 보면서 쓴 칠언시이다.(觀李道甫題額白蓮寺)
“우리나라 글씨는 뛰어난 작품이 적은 데
근래엔 이광사가 있어 그 사람만 홀로 세상에 유명하다.
북쪽 변방 끝에서 남쪽 섬으로 귀양살이를 옮겨서
미개한 천민들에게는 예악과 제도 가르쳐 배우게 했다네.
거룩하다. 일개 포의(布衣)로 귀양을 살았지만
우레 같은 명성이 백세를 울리네.
그가 쓴 백련사 편액을 볼라치면
꿈틀대는 용의 기세 붙잡아 헌걸 치구나.
거칠고 질박한 김생은 헛이름만 얻어
시골 백성들 계약서나 써 줄만한 글씨였다오.
...
큰 인재 외진 바닷가에서 불우하게 죽다니
남긴 자취 처량해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후략 “
이렇듯 다산 정약용은 원교 이광사를 명필로 칭송하고 있다.
이는 원교의 글씨를 가혹하게 비판한 추사 김정희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해남 대흥사에서
백련사를 구경한 후에 해남 대흥사를 간다. 여기에도 원교의 글씨가 여러 개 있다. <해탈문> <침계루> <대웅보전> <천불전> 편액이 그것이다.
피안교를 건너고 두륜산 대흥사라고 쓰인 일주문과 부도탑을 지나서 해탈문에 들어선다. 이곳을 지나면 대흥사 경내이다.
해탈. 번뇌와 망상의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성불(成佛)의 길, 뜨거운 정진(精進)을 촉진시키는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의 해탈문.
<해탈문>이라는 원교의 편액 글씨는 문 안쪽에 걸려 있다. 행서체로 쓰여진 글씨를 보니 명작중의 명작이다. 글씨라기보다는 미술이다. 글씨의 오르내림, 끝마무리가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특히 문(門)자는 용이 트림을 하는 느낌이다. 이 글씨를 보고 있으니 원교의 글씨는 ‘ 용이 날고 호랑이가 날뛰는 듯하다 ’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는 너무 부족하다. 차라리 이 편액을 직접 사진으로 감상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해탈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간다. 대웅보전은 북원이라고 불리는 경내 왼편에 있다. 심진교 다리를 두고 계곡 물이 흐르고 있고, 정문에는 <침계루> 라고 써진 편액이 붙은 누각이 있다. ‘계곡을 베개 삼은 누각’ 이라는 이름의 침계루. 계곡물이 잔잔히 흐르는 금당천 옆 누각에 걸려있는 행서와 초서를 합친 이광사의 글씨는 마치 계곡물이 흐르듯 유려하다.
침계루를 지나니 바로 앞에 대웅보전이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백설당’ 승방이다. 대웅보전에는 <대웅>, <보전>이라고 세로 두 줄로 쓴 원교의 해서체 편액이 붙어 있다. 그리고 백설당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 김정희는 이광사가 죽은 지 10년 후에 태어났다.)가 쓴 <무량수각> 편액이 붙어 있다. 이조 후기 서예의 양대산맥인 원교와 추사의 글씨를 대흥사 대웅전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다니 정말 흥미롭다.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는 뼈대가 있고 깔끔하고 말쑥한 해서체이다. 반면에 추사의 <무량수각>은 획이 기름지고 두툼하고 묵직한 예서체이다.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를 한참 보고 있자니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생각난다. 1840년 추사가 55세 되던 해 병조참판까지 한 당대의 권세가인 추사 김정희는 어느 순간에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완도에서 제주도행 배를 타러 가는 길목에, 그는 평생지기 초의선사를 만나러 해남 대흥사를 찾는다.
그리고 추사는 대웅보전에 걸려 있는 원교의 글씨를 보고 속기(俗氣)가 있다고 생각하여 떼어 내라 하고, 자신이 쓴 대웅보전 글씨와 무량수각 글씨를 초의에게 써준다.
그로부터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이후 해배된 추사는 서울로 가던 도중에 다시 초의를 만나러 대흥사를 들른다. 그리고 떼어진 원교의 편액이 아직도 있는 지를 초의에게 묻고, 초의는 그 편액이 어디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추사는 원교의 편액을 대웅보전에 다시 붙이라고 한다. 자신의 글씨에 자만하였던 추사도 수년간의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야 원교의 글씨에 대한 이해를 하여서일까.
한때, 추사는 그의 나이 50세 시절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글을 써서 원교의 서법에 대하여 혹평을 한 적이 있다. 청나라의 문물을 경험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글씨를 논하였던 개화된 신세대의 선두주자 추사로서는 소위 조선 안에 머물고 있는 원교의 동국진체는 우물안 개구리로 보였으리라.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추사가 원교를 혹평한 것은 그만큼 그 시대에 원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고 , 추사가 同時代 사람을 혹평한 것은 조금 지나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교의 글씨는 귀양지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때로는 그의 아들과 딸이 대신 글씨를 쓰기도 했다 한다.)
대흥사 경내 중앙에 있는 <천불전> 편액도 원교의 글씨이다. 그리고 천불전을 들어가는 문 위에 써진 <가허루> 편액. 이것은 원교의 제자이며 호남의 명필인 전주의 창암 이삼만(1770-1845)이 쓴 글씨이다. 이외에도 대흥사는 당대의 명필들 글씨가 수두룩하다. 정조대왕이 직접 쓴 글씨도 있다.
한편 원교의 편액은 호남지방의 사찰에 널리 걸려 있다. 구례 천은사, 전북 부안의 내소사, 고창 선운사에도 원교의 편액을 볼 수 있다.
원교의 편액글씨는 기존의 설암체 편액과는 달리 글자가 너무 비만하지 않으며 획법이 가늘고 획 사이의 간격이 넓다. 그 가운데 화기(火氣)를 막기 위하여 물 흐르듯 썼다는 구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일주문 편액은 이러한 그의 편액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은사 일주문 편액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리산 기슭에 천은사가 있다. 창건 무렵 절 앞뜰에 감로천 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이슬처럼 맑은 이 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는데 당시의 이 절의 이름도 감로사였다. 고려 충렬왕 때 남방제일선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후 중건하면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감로천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절 이름도 ‘샘물이 숨어버렸다’라는 뜻의 천은사(泉隱寺)가 되었다. 그런데 절집을 중건한 후 이상하게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이곳에 들른 원교는 이 사연을 듣고는 불을 막기 위해서는 물이 항상 흘러야 한다며 <지리산 천은사> 글씨를 물 흐르듯이 써주고 일주문에 걸게 했다. 그 뒤로 천은사 절은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최준호 책을 참고함)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예실
주말에 서울에 가서 국립중앙박물관의 2층에 있는 미술관 서예실을 다시 찾는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서예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한 게시판과 중국과 한국의 서예 역사를 비교 설명한 게시판이 있다. 이 설명문을 읽어보니 조선 중기이후는 석봉 한호와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가 가장 유명한 명필로 기재되어 있다.
이광사는 옥동 이서와 공재 윤두서를 거처, 백하 윤순에게 전수된 동국진체를 완성한 사람으로, 추사 김정희는 조형미가 뛰어난 추사체를 완성한 사람으로 적혀 있다.
이곳에 전시된 이광사의 작품들을 찾아보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도연명(도잠 365-427)의 오언시를 쓴 12폭 병풍이다. ‘큰 글씨의 행서로 시원시원하게 붓을 휘둘러 썼고, 강한 필치와 글씨의 여백을 살려 감각미를 높였다’는 설명이 있다.
다른 한쪽 벽면에는 원교 이광사와 그의 스승 백하 윤순이 쓴 글씨가 같이 배치되어 있다. 백하는 부친인 이진검과 친구로서 같은 소론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의 문하가 되었고 글씨를 배웠다. 원교 5언시 행서에는 ‘조선적인 글씨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원교가 왕희지로 대표되는 중국 육조시대의 서풍을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를 빠른 붓놀림과 힘찬 필치로 흥취를 이루었다’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백하 윤순의 7언시는 원교의 글씨 오른편에 있다. 스승과 제자인 두 사람의 글씨가 나란히 한 곳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미술관 관계자의 이 뜻 깊은 배치에 찬사를 보낸다.
마치면서
원교 이광사. 내가 그분을 알게 된 것은 대흥사에 걸려 있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편액과 관련한 추사의 일화 때문이었다. “남도에 남긴 추사의 흔적” 글을 쓰면서 원교가 누구인지를 조금 알았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최근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을 구경하면서 미술관 서예실을 가보니 원교는 추사와 같이 조선 후기 서예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다. 또한 남도의 한을 가득 안고 완도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한 점. 그의 한 많은 삶의 역정. 동국진체라는 민족고유의 서체를 완성한 독자성, 그리고 공재 윤두서, 다산 정약용, 혜장선사와도 연관을 가진 점 등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원교 이광사에 대한 평가는 추사 김정희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직도 원교가 진도에서 유배되어 죽었다는 오기(誤記)를 하고 있는 자료도 많다.(국립중앙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의 인명사전 검색, ‘18세기 조선 인물지 - 병세재언록’ 책의 인명 해설 등).
올해가 그가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그가 귀양을 살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완도의 지역 인사들로 구성된 ‘원교 이광사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한다 하니 기대를 가져 본다.
<참고문헌>
o 목정배등, 대흥사(대둔사), 대원사, 1994
o 예술의 전당, 원교 이광사 전(展) -원교 서예의형성과 전개,
1994 11.24-12.10
o 유홍준, 완당평전 1, 학고재 ,2002
o 유홍준, 화인열전 1, 역사비평사, 2001
o 이광사등 원저, 김남형 역주, 옛날 우리나라 어른들의 서예비평,
한국서예협회, 2002.
o 이규상, 18세기 조선인물지 -병세재언록 , 창작과비평사,1997
o 이완우, 원교의 생애와 예술, 예술의 전당 ,1994
o 이완우, 서예 감상법, 대원사, 1999
o 전종주, 동국진체의 완성과 완도, 전라남도지, 1991
o 정약용 지음, 박석무 정해렴 편역, 다산 시 정선(하),
현대실학사, 2001
o 최준호,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한얼미디어, 2005
[서예가 열전]원교體는 비학(碑學)의 선구
경향신문 입력 2006.11.24. 15:57원교 글씨가 동시대나 이전 작가와 다른 것은 해서나 행초 등에서 왕희지법을 고수하면서도 전·예서까지 두루 겸했다는 점이다. 특히 원교의 전·예 수련은 친구인 김광수가 청대 학자 임본유·임개 부자로부터 들여와 수장한 한·위의 전서나 예서비, 특히 그중에서도 '역산각비' '석고문'이나 '예기비' '수선비'에서 전적으로 힘을 입었다.
이를 통해 원교는 왕희지법만을 글씨 기준으로 인식해온 시류에서 탈피하여 이왕(二王) 중심의 위·진시대의 고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전서와 예서를 함께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그림3), 이것 또한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의 진전 속에 배태되었다.

17세기 조선에서 이 방면의 선구인 허목은 중국의 삼대고문에서 글씨의 이상을 미수체로 실천해냈다면, 동시대 조속은 우리나라 역대 금석문을 모아 '금석청완'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방면에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예서 중 팔분예서의 명가인 김수증·김창숙 부자는 우리나라와 중국 금석문 수집에 열을 올렸으며, 이우·이간 형제는 신라~조선의 명비탁을 모아 '대동금석첩'을 엮어냈다. 이것은 조선금석학의 발전은 물론 우리 글씨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나 서학(書學)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우리 글씨의 기준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후 김재로·유척기·김광수와 함께 홍양호가 금석학 연구 수집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박지원 문하의 북학파인 이덕무·유덕공·박제가·남공철 등은 중국 청대 금석학의 성과를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성과는 청의 금석학이 조선학계에 이식되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토대로 추사의 금석학이 완성되고 다시 오경석·오세창 부자로 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요컨대 추사의 금석학 연구와 그 실천으로서 '진흥이비고'나 전·예필법을 해서와 행서에 혼융시켜내는 추사체의 경지는 원교는 물론 당시 이한진·유한지·이인상 등 전·예의 명가들도 이룩하지 못한 영역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은 선대 연구자와 서가들의 업적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의 원교비판은 원교 당시의 시대적 한계나 서예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가해진 만큼 지나치다고 할 것이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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