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品第一 신라 金生

2013. 5. 14. 16:22글씨쓰기

 

 神品第一  신라 金生

 

   김생은 통일신라시대 서예가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해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받았으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친필이 귀해서 이광사의 《원교서결》에서 아주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글씨를 엿볼 수 있는 필적으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문 글씨들은 954년(고려 광종 5)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류의 단정하며 아름답고 고운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붓놀림으로 김생만의 개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서첩으로는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선우추김생서법첩(鮮于樞金生書法帖)》이 전하며, 그밖에 《해동명적(海東名蹟)》 《대동서법(大東書法)》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그의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며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중인 《선우추김생서법첩》은 원나라 서예가 선우추와 김생의 친필을 조선 중종 때 모사해 새긴 뒤 찍어낸 것이다. 이 서첩에 실린 김생 글씨는 《전유암산가서》 《보덕사(報德寺)》의 2점뿐이지만 신품으로 불린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생의 글씨체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중국 육조 시대의 필의(筆意)와 당대(唐代) 저수량의 서풍에서 취한 것이 많다.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아 반드시 변화를 일으키며, 선은 곡직(曲直)의 미묘한 운율을 구사하였다. 결구(結構)에 있어서는 음양향배(陰陽向背)의 묘를 느낄 수 있게 하여 과거 어떤 사람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법을 창안하였다.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     부분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     부분

 

 

 

   이 비석의 정식 이름은 태사자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朗空大師白月栖韻塔碑로 통일신라의 국사였던 낭공대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이 비석의 글씨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서예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집자集字란 특정한 한사람의 글씨를 뽑아서 한 작품의 글씨처럼 연결하는 것을 말하는데, 옛날부터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해 명필들의 글씨를 집자하여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서예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인 김생은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희지'로 추앙받는 명필이지만, 오늘날 그의 글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비석은 김생의 글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김생은 왕희지의 글씨를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비석 역시 힘찬 필치의 김생 글씨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에 대해, 옆면에는 절터에 버려져 있던 비를 옮긴 사유(원래 비석에 없던 글씨를 나중에 새겨 넣은) 그리고 뒷면에는 낭공대사께서 입적하셨을 당시에 세상이 어지러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고려 통일 후 광종 임금 때에 비로소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비석 건립과 관련된 내용 및 관계 인물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田遊巖山家序  /   탁본

 

 

 

 

 

낭공대사비의 행방 (김생 글씨集字) 

 

[인용자료]

 

낭공대사碑 역마살 끼었나
신라 명필 金生의 글씨 기록된 문화재 불구 이리저리 유랑생활
<주간 동아> 2000년 8월 10일자
 
   비(碑)의 궤적을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 지난 7월27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청량산의 한 자락을 붙들고 앉은 이 골짜기 마을엔 그러나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1)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는 비의 흔적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신라시대 고찰로 조선 중기에 이르기 전 일찍이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태자사 절터. 이곳에 있었다는 낭공대사비 대신 기자를 맞은 것은 비신(비의 몸체)이 달아난 채 남아 있는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이首·용이 새겨진 비석 덮개돌). 수년간 손대지 않은 듯한 퇴락한 비닐하우스와 지난 93년 폐교된 태자초등학교의 낡은 건물 사이로 숨겨지다시피 놓인 이 석조물들은 한눈에 보아도 1000년의 풍상을 겪었음직한 것들이었다.

 

   ‘이 석조물은 신라 말기 왕사(王師)인 낭공대사의 백월서운탑비의 귀부와 이수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제작 연대는 확인 못함… (중략) …우리나라 금석학상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 안동시청이 석조물 옆에 세워둔 안내표지판은 이 귀부와 이수가 ‘경북도 문화재자료 68호’란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표지판 내용대로라면 이 귀부와 이수는 낭공대사비의 부속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청량산 일대 김생 유적을 답사하고 있는 대구의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67)는 “이 귀부와 이수는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낭공대사비의 것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씨의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낭공대사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박물관 창고서 14년째 햇빛 못 봐

  

   낭공대사비의 기구한 유전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식 명칭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인 이 비는 원래 신라시대 명필로 ‘해동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며 중국 송나라의 최고 명필 왕희지와 비견되던 김생의 글씨들을 고려 광종 때인 954년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해 새긴 비석. 명승이자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낭공대사(832∼916)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에 남겨진 낭공대사비의 운명은 순탄치 않다. 건립 당시 경북 봉화군 태자리(일제강점기에 안동 땅으로 편입됐다)의 태자사에 세워져 있던 이 비는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당시 영주군수 이항(李沆)에 의해 영주군청 정자인 자민루(字民樓) 앞으로 옮겨져 400여년을 보낸 것으로 비의 측면에 기록돼 있다.

 

   제자리를 잃은 낭공대사비의 수난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이 비를 총독부 박물관이 있던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놓여 있던 이 비는 다시 1986년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의해 구 중앙청 건물로 이전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창고로 옮겨진 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

 

   7월28일 기자는 낭공대사비의 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신광섭 유물관리부장(49)은 “낭공대사비 비신은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포장이 씌워져 있다는 이유로 사진촬영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의 도록을 보여줬다. 도록엔 가운데가 절단된 낭공대사비의 사진이 있었다. 인수 당시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박물관측의 답변.

 

   중앙박물관엔 현재 12만여점의 소장유물 중 5000여점만 상설 전시되고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유물은 특별전시 계획이 없는 한 낭공대사비처럼 수년간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낭공대사비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는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생 글씨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신품(神品)으로 불릴 만큼 출중해 낭공대사비는 김생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유물관리부 학예연구사 조용중씨(40)는 “우리나라 비석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수준이 높지만 수장고 내에 있는 전체 비석 수는 10점도 안 될 만큼 희소하다”고 말했다.

 

   제자리를 떠나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낭공대사비엔 몇 가지 의문이 따른다.

 

   총독부는 왜 낭공대사비를 서울로 옮겼을까. 조씨는 박물관에 남아 있는 각종 자료를 통해 낭공대사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했다. 그가 제시한 박물관 유물관리 카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9년 6월11일 누군가로부터 이 비를 당시 돈 100원에 사들여 경복궁 정원에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구입했는지, 왜 구입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또 여러 금석학 문헌에서 밝히고 있는 ‘1918년’이란 비석 이전 시기도 1년이나 차이가 난다.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박물관측이 낭공대사비에 대해 아는 사실은 이 비가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진 이후 1959년에도 여전히 경복궁 정원에 있었고 1986년에 비로소 박물관 창고로 직행했다는 것 정도다.

 

   다행히 낭공대사비는 조만간 ‘세상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측은 2003년 말 준공 목표로 서울 용산에 건립 중인 새 중앙박물관이 완성되면 낭공대사비를 일반에 공개할 전시계획을 잡아두고 있다는 것. 17년여에 걸친 ‘지하 유배생활(?)’을 끝내게 되는 셈이다.

 

이젠 귀부와 이수를 찾아보자. 박물관측은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는 원래부터 사라지고 없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현재 안동에 있는 귀부와 이수는 무엇인가. 안동시의 추측대로 낭공대사비의 것일까.

  

2003년 말 일반 공개 추진

 

   아쉽게도 중앙박물관측은 물론 대다수 학자들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석조물의 명예관리인인 태자리 주민 김점수씨(53)는 “일부 대학생이나 서예 동호인들의 현장 답사는 간간이 이어지고 있으나 전문 학자들이 찾아온 적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점에 의문을 품어온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는 이미 2년 전 귀부와 이수의 치수를 재보았다. 이씨의 실측 결과에 따르면 이 귀부와 이수에 맞는 비신의 크기(높이는 알 수 없다)는 폭 85cm, 두께 14.5cm. 중앙박물관측이 밝힌 낭공대사비의 실측 결과인 비신 높이 208.5cm, 폭 102cm, 두께 26cm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비석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도대체 태자사터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어떤 비석의 것일까. 그리고 그 비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동시 문화재계 관계자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태자사터엔 낭공대사비와 함께 통진대사(通眞大師)비라는 비석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이 통진대사비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장유물 중 통진대사비라는 것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앙박물관측은 “해당유물 자체는 물론 그에 관한 기록조차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결국 언제인지 모르지만 귀한 비석 하나가 일찌감치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다.

 

   어쨌든 같은 절터에 나란히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비석의 엇갈린 운명은 오랜 우리 문화재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혹 우리의 유물 조사연구가 너무 크고 화려한 유물들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두 비신의 크기 차가 확연한데도 아직 일부 문헌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가 낭공대사비의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국 잃어버린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를 찾는 일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인 또 다른 비석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일도 과제로 남는다. 문화재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원래는 경복 봉화군 하남면 태자리태자사에 있던 것이었으나, 조선시대에 경북 영주군 영주면 휴천리 '영주군청'의 '자민루'로 옮겨졌던 것을 다시 191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세운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의 모습이다. 왼쪽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 전시되던 때의 모습이고, 가운데는 <조선금석고>에 수록된 비석의 탁본자료이며, 오른쪽은 낭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로 알려진 경북 문화재자료 제68호인 '태자사지귀부 및 이수'(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1082)의 모습이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인용자료에 보면, 이 귀부 및 이수의 크기는 낭공대사탑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사실이 확인되어, 엄밀하게 낭공대사탑비와 한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용해설]

 

   이 비석의 존재와 행로에 대해서는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에 관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요약하자면 원래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리에 있던 이 비석은 조선시대 중종 때인 1509년 당시 영주군수 이항(李沆)에 의해 경북 영주군 영천면 휴천리의 영주군청 '자민루(字民樓)'로 옮겨졌던 것을, 1917년 여름 무렵에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 조선총독부가 이를 총독부박물관으로 다시 옮겨갔는데, 이때가 1918년이었다. (중종 시절에 '자민루'로 옮겨진 사실은 비석의 측면에 관련내용에 새겨져 있으므로,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이 총독부로 옮겨진 때는 대개 1919년이라고 적고 있는 자료들도 적지 않은데, 이는 총독부박물관 시절에 작성된 수장품카드에 바로 '1919년 6월 11일'이라는 표시가 들어있는 데서 빚어진 오해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장품카드의 작성을 지칭하는 것일 뿐 유물의 반입일자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 부분은 아래의 목록에서도 보듯이, 진열품번호#본관 6751부터 #본관 6754에 해당하는 박물관수장품카드에 모두 '1919년 6월 11일'이라는 날짜가 표기된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진열품번호#본관 6751 철부(개태사 철확)

진열품번호#본관 6752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진열품번호#본관 6753 경천사탑

진열품번호#본관 6754 태자사지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이 가운데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는 1919년 3월에 옮겨온 것이 확실하며, 나머지는 1918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지만, 이 유물들이 동일한 날짜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유물반입일자가 아니라 (한꺼번에 작성된) 카드정리일자라는 얘기이다.

 

아래의 기록에서 보듯이,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는 1918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정 7년에 있어서 조선", <조선휘보> 1919년 1월호

- 금석유물의 수집

1)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 경북 영주군 영주면)

2) 석가철상(釋迦鐵像, 충남 서산군 해미면)

3) 경천사탑(敬天寺塔, 원 경기 개성군 광덕면)

 

"대정칠년도 고적조사성적", <조선휘보> 1919년 8월호

- 본년도 박물관 취기 완료유물

1) 영주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榮州 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 전년도중 운반에 착수했으나 본년도에 들어와 박물관에 도착함) 

2)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

3) 논산 개태사지 철부(論山 開泰寺址 鐵釜)

 

그리고 박물관 수장품 카드에 보면, "가격 100원정"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바 이를 두고 "누군가로부터 그 가격에 사들인 것"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오해이다. 이건 구입비용이라기보다는 비석의 운반비를 포함한 제반반입비용의 의미가 강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터에 흩어진 유물을 가져오는 댓가로 관련자에게 일정 금액을 준 사례도 없지 않지만, 초기 수장품카드에 기록된 (흔히 유물구입가격으로 오해되는) 금액표시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부대비용'의 뜻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이는 유물반입경로가 확실한 다른 반입유물의 수장품카드에 표시된 기재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참고 삼아, 낭공대사탑비의 존재가 조선총독부에 처음 포착된 당시의 신문자료를 아래에 덧붙여 둔다.

 

 

[자료 1]

 

김생(金生)의 서(書)로 성(成)한 고비(古碑)

봉화 태자사의 백월서운탑을 발견

조선고적조사회 위원장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郞)씨 담(談)

<매일신보> 1917년 10월 12일자

 

오랫동안 그 거처를 잃어서 고적을 상고하는 사람의 애석히 여기던 백월서운(白月栖雲)의 비석도 다행히 두어달 전에 경상북도 영주에서 발견되어 그 비문을 박인 것도 두, 세 장이 고적조사회에 와 있으며 이 비것은 일간 총독부박물관에 가져오기로 되었더라.



 <매일신보> 1917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 나온 내용을 보면, 경북 영주로 옮겨졌던 이 비석은 "두어달 전에"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비석에 새긴 글씨는 조선에서 가장 오래인 명필로 그 이름이 높은 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를 모다 새긴 것인데 고려 숙종시대에 송나라로부터 건너왔던 사신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갔던 학사 홍관(洪灌)이가 김생의 쓴 흘림글씨 한 권을 그때의 명필문장에게 보였더니 모두 다 조선사람의 글씨라고 믿는 이가 없고 지나 고금에 제일명필인 왕희지의 필적이 아닌가 한고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할 지경이라. 그런데 이 사람의 필적은 애석히 지금에 전하는 바이 없고 다만 이 태자사(太子寺)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에 김생의 글자를 모아 새긴 것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인 고로 실로 극히 귀중한 비석이라.

   이 비석도 김생이 쓴 것은 아니니 김생과 낭공대사는 시대로 매우 틀리고 석단목(釋端目)이라는 사람이 김생의 글씨를 주어 모아서 돌에 새긴 것이라. 이 백월서운의 비라는 것은 지금부터 구백육십삼 년전 신라말년의 도승으로 그 이름이 높던 낭공대사의 사리를 묻은 경상북도 봉화군 태자산 태자사 사리탑의 비문으로 그 비문을 최인곤(崔仁滾, 최인연의 잘못)이라는 사람이 지어서 이것을 새길 때에 글자의 서체를 여러가지로 선택한 결과 서목이가 조선명필 중에 제일이라 일컫는 김생이 끼친 글씨를 모아서 비로소 이 탑비가 이룬 것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에 간행된 '조선휘보'에 설명할 터인데 하여간에 조선의 옛일을 상고하는데 가장 유익한 자료가 되는 것은 분명히 말하기에 기탄치 아니하노라. 김생이라는 사람은 기록에 '탄생한 지방을 알지 못한다' 하여 어느 지방의 태생인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성덕왕 십년 임술에 탄생하였으며 다른 재주는 닦지 않고 전혀 글씨에 진력하여 나이 팔십이 넘어서 오히려 붓을 잡아 쉬지 아니하며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신묘한 지경에 들었다 하였는데, 이 글씨를 모은 귀중한 비석이 어떻게 하여 봉화로부터 (지금의 영주군 영천면)에 옮겨가서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깊이 묻혀 있었는가 하면,한번 김생에 이름이 송나라에 물린 뒤로는 지나에 사신이 올 때마다 이 비문을 박아 달라고 청구하는 고로 중종 4년에 봉화군사 이완(李浣)이가 군내의 유지자 권현손(權賢孫)과 상의하고 가만히 봉화의 동현 마당으로 옮겨다가 다시 영천으로 가져온 거신데 가석한 일은 비의 대가리와 받침이 깨여졌으나 비문은 전부가 분명하다. (비의 길이가 육척 구촌이오, 폭이 삼척 이촌이오, 두께가 팔촌 오푼이오, 비문이 이천 오백 칠십 삼 자인데, 여기 게재한 사진은 비문 박인 것의 일부분을 사진으로 박은 것이라.)

 

 

[자료 2]

 

귀중(貴重)한 김생(金生)의 서(書)

그 진필은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백월서운의 탑비에 대하여' ......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씨 담(談)

<매일신보> 1917년 10월 13일자

 

   조선의 서성 김생(書聖 金生)의 필적을 엿볼 수 있는 백월서운(白月栖雲)의 비명은 지금까지 묘연히 그 그림자가 감추어 허다 세월에 그 거처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번에 홀연히 세상에 나타났다는 일은 실로 서화를 연구하는 사람을 위하여 경사로운 일이라 유래로 이 백월서운의 탑비는 돌의 높이가 여석 자 여섯 치, 폭이 세자 세치에 글씨가 서른 한 줄, 한 줄에 여든 석자, 한 자의 크기가 사방 팔푼되는 행서인데 본래 경상북도의 석남사(石南寺)에 있던 것으로 신라 신덕왕(神德王)의 육년에 최인곤(崔仁滾, 최인연의 잘못)이가 글을 지어 석단목(釋端目)이가 김생의 글씨를 모아 석비에 새긴 것이라.

 

   김생이란 사람은 앞에도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의 서성이라 함을 불구하고 그 필적이 세상에 남아서 그 신령한 유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실로 이 비문 뿐이오 또 경상북도 경주 남산 산록에 있었다 하던 창림사(昌林寺)의 비도 또한 김생의 글씨이었으나 그 비는 이조의 중엽에 없어져 버렸다 전하는데 조자앙(趙子昻)은 이 비문에 박인 것을 보고 실로 왕희지의 글씨도 이에 믿지 못하겠다고 칭찬을 마지 않았다 함안 보아도 김생의 글씨가 얼마나 귀중함을 알 수가 있다. 백월서운의 비는 앞에도 말한 것과 같이 김생의 죽은 뒤 백년 가량이나 지나서 석단목이가 그의 끼친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인데 세상에서 혹시 그 비의 자체가 저윽이 빡빡한 곳이 있는 고로 김생 시의 글씨는 아닌 듯하다고 비평을 하는 말도 있었으나 이것은 돌에 새긴 까닭으로 얼마쯤 획이 빡빡하여진 일도 있을 걸이라.

 

   이 백월서운의 탑이 세상에 유명하여진 뒤로 항상 구경오는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는 고관대작의 사람도 오는 까닭에 그 지방백원은 응접이 고로워서 가만히 땅속에 묻어 버려서 거처를 읽었더니 그 뒤에 어떤 촌민이 외양간 속에서 파내어서 얼마동안 세상에 나타났다가 그 뒤에 또한 거처를 잃은 뒤로 금일가지 이르렀으며 다만 비문 박인 조화로 겨우 김생의 면목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더니 다시 그 원비가 세상에 발견된 것은 실로 이 위에 다시 없을 좋은 참고품을 얻은 세음이라.

 

   대체 김생이란 사람은 그 성명을 자세히 알 수 없도록 미천한 출신으로 삼국사기 등에도 '김생의 부모가 미천하여 유래를 알 수 없다......' 고 기록하였으며 신라 원성왕 시대의 사람으로 팔십 이상이나 여섯 임군의 세상에 살아 있었음은 삼국사기 등에 의지하여 추찰할 수가 있으며 또 정동기(鄭東驥)의 화영편(晝永篇)에는 '新羅金生之書寺刹中往往石黑質金字經, (?)良爲金生書, 多胃稱不可信, 或言金生名玖, 未知出可書 ......'라 하였으며 또 어떠한 책에는 김생의 자는 지서(知瑞)라 하였으나 지서를 김생의 자라는 것은 아미 최인곤의 관명중에 지서서원(知瑞書院)이라는 글자가 있는 비문을 잘못 해석한 것인 줄로 믿는다.

 

  하여간 김생의 진필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하여도 좋으며 세상에서는 왕왕히 김생의 글씨라 일컫는 경문조각을 팔러 다니는 자가 있으나 모두 믿을 수가 없으며 그 진필은 김생의 생시에도 오히려 극히 드물었던 듯이 생각되노라. 김생의 필적은 금일에는 백월서운의 탑비와 및 영화석각(永和石刻)에 나타나 있을 뿐이오 이 백월서운의 비와 영화석각은 김생의 필적을 엿볼 수 잇게 세상에 남아 있는 다만 두 개 보배인데 이제 백월서운의 원비가 발견되었다 함은 옛일을 상고하는 자료로 조선의 귀중한 보배를 얻었다고 이르지 아니할 수 없다.

 

 

 

 

 

김생(金生)에 대하여

 

   711년(성덕왕 10)∼791년.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생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954년(광종 5)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수 류(類)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왼쪽의 글씨가 경복궁碑 글씨(탁본)다

 

 

    중국에 왕희지가 있다면 한국엔 김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왕희지가 이전 시대의 전서·예서를 토대로 위(魏)·진(晉) 이래 서법(書法)을 세웠다면,

김생은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 글씨를 토대로 왕희지의 서법과 당나라 서법까지 하나로 녹여

우리나라 글씨의 법(法)을 일으켰다.

 

    海東書聖(바다건너 동쪽의 글씨 성인), 筆神이라 불린다.

그 이후 고려의 탄연(坦然), 조선의 안평대군·한석봉·김정희 같은 명필이 등장,

한국 서예는 중국 서예와 같고도 다른 궤적을 걸어왔다.

소개하는 글씨 이미지는 전시회에 진열된 글씨와는 상관없이 자료파일에서 옮겨온 것이다.

 

 

 

 

 

 

<송하빈객귀월>의 부분

 

 

 

丈人峰(장인봉) 집자

 

 

 

 

 

 

靑凉山  &  金生

 

 

                                                 정민호 청량산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생굴                                                      김생암터

1

 

 

 

 

 


 

 

  

     청량산에는 김생과 관련한 유적이 전한다. 경일봉 아래에 자리한 김생굴과 

그 앞의 김생암터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청량지]의 기록이다.

 

   


   김생굴은 경일봉 아래에 있다. 천장(千丈)이나 되는 철벽에 암굴(巖窟)이 하여 여러칸의 집을 지을 수 이따. 굴 위로는 비폭의 발을 드리운 듯 하다. 에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김생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하였다. 김생은 신라 으로 재산에서 태어나서 이 산에 들어와 글씨를 배우고 필명을 천하에 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청량산을 소재로 작성된 유산기(遊山記)에서도 자주 거론된다. 특히 퇴계의 문인으로 청량산을 유람한 권호문(權好文)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도 김생은 재산(才山)에서 출생하여 청량산 경일봉 아래 천길 낭떠러지의 바위굴에 작은 암자를 짓고 글씨공부를 해서 필명을 천하에 떨쳤다고 한다.


   재산은 현재 청량산 입구와 동북쪽으로 연접해 있는 봉화군의 면소재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청량지(淸凉志)』와 권호문의 「유산록」에서는 김생의 재산  출생설의 근거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이들이 청량산에 그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당시 이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던 전설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 치더라도 근거가 될 수 있는 사실 여부는 그의 출생을 언급하고 있는 기록을 통해 그 가능성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생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김생은 집안이 한미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생으로 표기한 예는 여러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은 이른바 '선생'이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존칭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접미사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80평생을 글씨공부에 매진하여 한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글씨하나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뜻일 게다.그래서 그는 서성(書聖)으로 불려졌으며, 존칭의 함축된 '생'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언급된 바와같이 집안이 한미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는 점, 그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점 등은 왕경인(王京人) 즉 경주사람이 아니라 외경인(外京人)이였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수도였던 왕경에는 왕족인 성골과 진골, 삼한시대의 부족장이 6두품으로 편제되어 거주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김생은 경주가 아닌 지방출신이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그가 청량산 인근인 재산에서 태어나서 청량산 경일봉의 굴에서 수도했을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조선전기 때 학자였던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청량산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앞선 것으로 보이는 칠언고시 한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구 중 김생의 행적을 언급한 부분이 보인다. 이 시에 따르면 산중에 김생이 수도하던 굴이있는데, 김생이 여기에서 천여 축의 불경을 써 내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시는 고려시대에 쓰여 진 작품으로 당시 정명국사(靜明國師)였던 천인(天因)이라는 스님이 치원암 주지가 산중고사에 대한 시 한 수를 요청하기에 이에 화답하여 지은 것이다. 이 시는 비록 치원암 주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쓴 작품이지만 김생이 활약하던 시대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고려시대에도 김생의 청량산 수도설이 회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바위 뿌리에서 흐르는 먹은 언제나 벼루에 떨어졌고,천

 제는 약을 내려 눈을 밝게 하였다'라는 구절은 김생이 암굴에서 글씨에 정진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김생의 청량산 수도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청량산 외에도 그 부근에 남아있다. 바로 청량산 인근인 안동의 문필봉(文筆峯)에 그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문필봉은 현재 안동시 남선면 갈라산의 한 봉우리이다.

 청량산과 안동은 지척지간이다. 고려시대부터 청량산은 안동땅에 소속되어 있었고, 근대까지 그 영역은 안동이었다. 김생이 안동의 문필봉에서 글씨 공부를 했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문필봉이란 이름은 김생의 수도로 인해 얻어진 이름이라 한다. 이 사실은 김생의 수도설의 근거를 더욱 구체화해준다. 말하자면

 김생이 청량산과 그 인근에서도 족적을 남긴 것으로 미루어 권호문이 언급한 것처럼 김생은 재산에서 태어나서 청량산 경일봉과 인근 안동 문필봉 등에서 글씨공부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글씨를 집자해서 세운 탑비가 청량산 인근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김생의 청량산 수도설을 더욱 명확히 해준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청량산과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속에 태자사라는 큰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찰에 통일신라시대 신덕왕(神德王)과 효공왕(孝恭王)의 왕사(王師)였던 낭공대사(郎空大師)의 행적을 기록한 비가 세워졌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비는 낭공대사의 문인이자 나말려초(羅末麗初)의 대문장가였던 최인연(崔仁연)이 짓고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 씨를 집자하여 고려광종 5년(954)에 낭공대사의 문인이자 문하법손인 순백(純白)스님에 의해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218cm,두께 25.5cm이며, 글자는 자경 2~3cm, 자수는 대략 3,500자 정도로 장중한 멋을 풍긴다. 비의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행력이 적혀있고, 뒷면 음기(陰記)에는 新羅國故石南寺國師碑後記를 집자해 놓았다. 비의 측면은 조선중기 때 방각(旁刻)된 것인데,기문(記文)에는 영주군수 이항이 1509년에 비를 영주 군 자민루로 옮기게 된 경위와 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내가 젊었을 때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에서 김생의 필적을 보고 그 용이 날고 호랑이가 누워있는 듯한 그 형세를 사랑하였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많지 못한 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내가 영천(榮川)군수로 오게되자 이웃고을 봉화현(奉化縣)에 어떤 비가 홀로 옛 절터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김생의 글씨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세상에 드문 지극한 보배가 풀숲 사이에 매몰되어 수습하여 보존할 사람이 없이, 들판의 소가 받아 대고 목동들이 부싯돌로 사용할까 모두 염려되었다.

      드디어 고을 사람 전참봉(前參奉)권현손(權賢孫)과 함께 의논하여 이것을 옮겨서 자민루(字民樓)아래에 안치하고 난간을 둘러치고 자물쇠를 단단히 잠그고는 만약 탑본(榻本)하는 사람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게 아였으니, 그 함부로 건드리며 침범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생의 필적이 세상에 널리 전하게 되어서 양반 호사가들이 앞을 다투어 구경하게 되었다. 아! 천백 년 동안 으슥한 골짜기에 버려진 돌이 하루아침에 큰 집에 들려 들어와 세상의 보배가 되었으니, 대저 물건이 나타나고 숨어 있는것도 또한 그 운수가 있는 것인가 보다! 내가 비록 재능이 부족하여 창려(昌黎)같은 박아(博雅)함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물건이 감상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인즉 진실로 기산(岐山)의 석고(石鼓)와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정덕(正德)4년(중종 4,1509)가을 8월에 군수 낙서(洛西)이항(李沆)이 기록하고 박눌(朴訥)이 썼다.

 

 

     이 비는 김생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위의 내용서 알 수 있듯이 이항이 이 비를 발견하기 전에는 김생의 필적을 보려면 법첩에 의존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항이 비를 자신이 부임한 영천군의 자민루로 옮겨와 난간을 두르고 출입문을 만들어 보호하게 되면서 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호사가들이 다투어 완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동안 법첩이 간행될 때마다 재집자(再集字)하여 간행될 정도로 더욱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비가 청량산 인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김생이 청량산에서 수도했다는 설화의 역사적 신빙성을 뒷받침 해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실제로 청량산에는 김생이 쓴 글씨가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산에 연대사가 있고, 연대사에 신라 때 김생이 쓴 불경이 많다. 근래에 한 선비가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몰래 한 권을 훔쳐 집에 가지고 갔다가 염병에 걸려 죽으니 그 족인(族人)이 이를 두려워하여 즉시 절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연대사에 김생이 쓴 금은자 불경 40여권이 지금 불전에 보관되어 있다.

 

     위의 사실은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擇里志)』와 이세택이 1771년에 편찬한『청량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두 책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것들이다. 이 사실은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후기까지 김생의 글씨가 청량산에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태자사가 김생이 수도한 청량산과 지척지간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집자는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낭공대사는 석남사에서 입적했다. 그런데 태자사에 낭공대사비를 세웠다는 사실 또한 글씨를 집자한 주인공인 단목스님이 김생 글씨가 많이 남아 있던 청량산 인근인 태자사에 머물며 적어도 그 스승이었던 낭공대사의 비를 집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

     이상으로 현재 전하는 기록들을 통해 청량산과 김생의 연관성을 구명해 보았다.

 위의 사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삼국사기』김생조에 언급된 출생에 관한 실을 통해 볼 때, 그는 경주가 아닌 지방출신으로 판명되었다. 『청량지』와 『동국여지승람』, 「유산기」의 기록에서 그는 청량산부근인 재산에서 출생하여 청량산 경일봉과 안동의 문필봉에서 글씨공부에 매진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글씨를 집자한 비가 청량산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태자사에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그의 청량산 수도설을 입증할 수 있었고, 그의 글씨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청량산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청량산 수도 이후 그의 행방은 경주일대와 충청도 일대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주 석굴 속에 들어가 나뭇잎을 따서 글자를 쓰고 40여 년 동안 나오지 않고 수도하글씨가 신묘한 경지를 통하였다고 하며, 경주에서 대로원(大魯院) 3자 편액과 백률석당기(栢栗寺 石幢記), 창림사비(昌林寺碑)를 썼다고 한다.

 

   이 사실은 경주에서  그의 행적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청량산에서 수도한 후 그의 실력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자 당시 수도였던 경주에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주에서 활약한 시기는 그의 전성기로 평가된다.

 

     또한 충주에서의 행적도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충주의 김생사지는 김생이 만년에 두타행(頭陀行)을 닦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두타행을 닦기 위해 만년에 충주 북진애(北津崖)에 있는 김생사(金生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김생사지가 있는 곳은 현재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반송산 부근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1974년 서원학회를 필두로 예성동우회, 충청대학 등에서는 김생사지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들 조사에서 가람의 대략적인 모습이 밝혀졌는데, 가람의 형태는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부속건물지(附屬建物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찰 터 주변에서 통일신라에서 조선에 이르는 많은 기와가 수습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비록 하단부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김생사가 시문(施文)된 것으로 보이는  ‘月日金□’을 좌서음각(左書陰刻)한 명문기와가 수습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절터 서쪽 강가에서는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김생이 쌓았다는 김생 제방이 남아 있어 충주에서 김생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생사가 실존했음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김생의 충주에서의 흔적을 명확히 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면 김생의 삶은 3단계로 나눠질 수 있다. 청량산에서수도했던 견습기, 경주에서 자신의 명성을 떨쳤을 것으로 보이는 전성기, 충주부근에 김생사를 짓고 두타행을 닦았던 만년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김생의 출생지를 청량산 부근인 재산으로 가정한다면 그는 재산에서 태어나서 청량산 경일봉과 안동 문필봉 등지에서 글씨 수련의 과정을 겪고, 당시 수도였던 경주에서 활약하여 세상에 그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만년에는 충주부근에 김생사를 짓고 두타행을 닦았음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러면 김생이 쓴 글씨의 특징은 어떠하였을까?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평가되는 김생의 글씨에 대한 평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있어 왔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인로는『파한집(破閑集)』에서 김생의 필법이 신묘하여 초서도 아니고 행서도 아니며, 57종의 제가의 필세보다 훨씬 뛰어 났다고 하였고, 또 이규보는 자신의 저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우리나라 역대 명서가를 품평하면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생의 글씨는 왕희지 서법을 모범으로 하였으나 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결구와 장법을 구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청량산과 관련한 김생 글씨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주세붕은 자신의 「유청량산록」에서 김생의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자획은 모두 날카롭고 강해서 바라보면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는 듯 하였는데, 이제 이 산을 보니 바로 여기에 살면서 글씨를 공부하여 필세가 정밀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 서서히 무르익어 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김생의 필첩을 보았을 때는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듯 하다고 하였는데, 청량산에 와서 청량산의 모습을 보니 그의 필세는 청량산의 모습을 닮아 필획의 정묘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여기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청량지』「산중고적조」에도 보인다. 
 
          김생이 오랫동안 산중에 머물면서 예서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필획
은 가파른 듯한 바위와 봉우리를 모아놓은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김생의 글씨를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청량산의 봉우리를 닮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산중에 들어와 산의 모습을 보고 글씨공부를 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의 형상을 본뜬 개성적인 필치는 자연과 하나되

는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수도처로 삼고 있었던 청량산 경일봉 아래에 있는 굴 속에서 자소봉과 탁필봉, 연적봉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왕희지체,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 냈으며, 그로 인해 해동서학의 종조(宗祖)로 여겨져 한국서예사의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이러한 김생 서체 형성의 토대에는 바로 청량산의 넓은 품이 있었던 것이다.   


      



 

 

 

 

박대성 화백과   김  생


 


사진누락 (액박)

 

▲ 김생의 글씨에 깃든 신라의 혼과 정신을 일깨워낸 박대성 화백.

 

   엑스포 타워 17층 전시실에서는 ‘김생과 박대성, 1300년의 대화’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화가 박대성화백은 올해 탄생 1300주년을 맞이하는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0 이후)과 정신적 예술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 결과를 작품으로 표현해 헌정전을 열었다.

   김생은 예서 행서 초서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렸고 중국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박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11점의 서화 대작을 선보인다.
‘장엄불국(莊嚴佛國)-순교 이차돈’ ‘원융무애(圓融無碍)-금강역사’ ‘진경희이(眞境希夷)-목탁과 다보탑 석가탑’, ‘현월(玄月)-분황사 달밤’ ‘청동불두’ 등.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이번 작품들도 힘이 넘치고 파격적이다.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석비 탑본도 함께 전시한다.

 

   박 화백은 김생의 서예와 목탁, 다보탑 석가탑, 금강역사, 미륵보살 등의 신라 유물과 연결했다. 그것을 통해 김생이 추구했던 신라 화엄불국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서울 예술의전당의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지금 신라의 정신으로 김생을 기릴 후학으로는 박 화백이 제격”이라고 말했다.

12월 14일부터 내년 3월 4일까지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선 ‘김생과 한국 서예’ 기획전이 열린다.



 

 

 

 












































김생 탄신 1300년 기념전

 

    <문화탐방>을 시작하고 매달 한군데 이상 탐방하려던 계획은 지난 1월 강추위와 일부 참가자의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한달을 쉬게되어 비록 적은 수지만 애독자(?)에게 미안한 맘 금할 길 없다.  필자는 '김생 1300주년을 기념하여 김생부터 김정희까지' 우리나라 붓글씨의 신(筆神)이라 불리는 대가들의 작품을 꼭 보아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은 있었으나 날씨는 춥고 혼자 가기는 거시기하여 미적미적하는 중에 전시기간은 계속 흘러가기에 붓글씨의 선배이자 이론가인 전옹에게 제안하여 전시 마지막 날(2월 12일 일요일)에 가기로 하였다. 마침 이런 <문화탐방>에 평소 지대한 관심을 보여온 심옹도 동참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회는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2층에서 열렸으며 전시 기간은 지난해 12월 24일 부터 올해 2월 12일 까지이다.

 

   지난 몇번에 걸친 <문화탐방>은 당일 몰아친 혹한으로 적잖이 애를 먹었으나 이번엔 그동안 춥던 날씨가 확 풀리고 햇볕도 따사로워 야외활동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쾌정한 날씨다. 전시는 우리나라 4대 명필이라는 김생부터 고려시대의 승려 탄연,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물론 조선조 4대명필에 들어가는 한석봉과 양사언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선조, 영조, 정조의 어필과 이퇴계 정약용 같은 학자, 서산대사나 화가 강세황 등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전시회 입구 정경(직접 촬영)

 

 

 

海東書聖 김생

 

   김생(金生, 711~791이후)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으로 비록 빈한한 집안의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빼어난 글씨로 신라는 물론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렸다. 김생을 두고 `삼국사기`는 “신라 성덕왕 10년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80이 넘었는데도 글씨 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생을 중국의 왕희지(王羲之·307∼365)와 함께 ‘신이 내린 최고의 솜씨(神品第一)’로 극찬하였다. 김생의 작품은 비문 등에 일부 남아 있을 뿐인데, 이번 전시에는 그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원비의 탁본,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의 미려한 행-초서체 글씨가 전시되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탁본

 

 

           감호의 흐르는 물은 봄 되자 출렁이고, 미친 나그네가 배를 저으니 고상한 흥취도 많다’라고 시작되는 이백의

           시를 흐르는 듯한 행서·초서로 썼다. 16세기 탁본첩 『해동명적(海東名跡)』의 첫 장에 실린 작품이다

 

 

고려 승려 탄연(坦然)

 

   탄연(坦然, 1070~1159)은 안적사(安寂寺)에서 출가하여 고려 예종 1년(1106년) 때에 대사가 되고 인종 24년(1146년)에 왕사(王師)가 된다. 그는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한국의 선문을 중흥시켰고 필법이 가장 정묘하여 홍관(洪灌)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서거정(徐居正)은 “동국의 필법에 김생이 제일이요, 탄연이 다음 간다.”라고 평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를 본받았으며 詩에도 조예가 깊었다. 춘천의 문주원비(文株院碑), 예천의 북룡사비(北龍寺碑), 삼각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등을 썼다. 이번 전시회에는 문주원비(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탁본 글씨가 전시되었다.

 

                           진락공중수청평산문주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1130년, 개인소장

 


안평대군(安平大君)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 1453)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종의 셋째 아들로, 형 수양대군(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란에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그의 글씨는 매우 뛰어나 우리나라 4대 명필에 들며 그의 송설체는 훈민정음 등 당시의 서체를 주도하던 글씨체이다. 그의 몽유도원도 발문은 특히 유명하다. 이번에는  안평대군의 7언시가 전시되었다.

 

 

                                                     안평대군 7언시 (27X28cm) 개인소장

 

한석봉(韓石峰)

 

    초등학교 책에서 익히 알고 있는 석봉 한호(韓濩, 1543-1605)는 고졸하고 무게있는 글씨가 특징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도산서원 현판과 검명(劒銘)이 전시되었다.

 

                   한호(1543-1605), <도산서원> , 1572년, 도산서원운영위원회 기탁/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한호(1543-1605), <검명劒銘> , 1604년, 『한경홍진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 영조, 정조

 

    나라를 잘 다스리지도 못했고 임진왜란 등에서 처신도 보잘것 없었던 선조는 조선의 왕들 중 글씨는 잘쓰기로는 정평이 나 있다. 조선왕조 최장의 재임기간을 자랑하는 영조의 어필도 다수 보였으나 아직 내공이 모자란 필자의 눈에도 글씨는 별로인 듯하였다. 반면 조선의 왕들 중 명석한 머리와 지혜를 지녔다던 두분 중의 한분인 정조의 글씨는 예술적인 것은 몰라도 참 단아하고 잘 쓴 글씨임에 틀림없다.

 

 

퇴계, 다산, 그리고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의 글씨는 생각하던대로 그들의 인품이 묻어나는 글씨체였다. 명필들 처럼 큰 글씨가 전시되지 않고 세필의 서간체가 대부분이라 아쉬움이 있었다. 서산대사의 글씨 그리고 학자이며 정치가로 그림에도 능했던 강세황의 글씨도 볼 수 있었다.

 

 

 

                  강세황 글씨-표암유체

 

 

추사 김정희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필자도 여러번 올린 바 있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글씨 사진으로 가름한다.

 

 

 

  김정희 8폭 병풍 글씨(현장에서 직접 촬영)

 

 

그외  사진들

 

  김생 글씨

 

 

 

 

  한석봉 글씨

 

 

 

                                                                       추사 김정희 글씨

 

唯愛圖書兼古器(유애도서겸고기)

且將文字入菩提(차장문자입보리)

 

오직 그림과 글씨를 사랑하되 옛것(古器)도 아울러 하며,

또 문자(文字)를 가지고서 큰 깨달음(菩提)에 이른다

 

 

 

 

 

백련사와 김생   ㅡ  서체 감정

 

    전라남도 강진에 소재한 백련사에는 해동의 서성(書聖)이라고 일컬어지는 통일신라 김생(金生, 711~790)의 필적이 전해지고 있다. 1200여 년 전의 필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해오는 얘기는 자못 진지하다.

 

    승려가 누 남쪽의 돌계단을 가리키며 “이 역시 신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잡석으로 쌓은 것인데 면이 깍은 것 같습니다.

대개 절에 삼절(三絶)이 있다고 하는데 김생의 글씨와 서원(西院)의 동백나무가 이것(돌 계단)과 합하여 셋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 김생,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銘> 부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문집에 실려 있는 위 글에서 승려는 백련사의 삼절로 지금도 유명한 동백나무와 돌계단, 그리고 김생의 글씨를 꼽았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인데, 김생의 글씨가 백련사에 있다는 기록이 고려시대와 조선 초에는 보이지 않다가 조선중후기에 갑작스레 나타나기 시작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사실 조선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그의 진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상황을 조선후기의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근원으로 삼는다.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탑본(榻本) 또한 기이하고 법이 있어 고려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만덕산백련사>가 정말로 김생의 필적일까? 조선시대에는 이 현판이 과연 김생의 필적인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조선시대 주자성리학의 거목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이 편액을 본적이 있다. 때는 그가 南人과의 당쟁 속에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1689년에 제주로 유배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강진에 도착하였지만 바람이 거세어져 잦아들기를 기다리고자 백련사에 기거하였다. 그는 이때 만경루에 걸린 김생의 <만덕산백련사>, 안여해가 쓴 <만경루 萬景樓>, 서역문자로 된 현판을 보았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 안노생(安魯生)의 후손인 안여해(安汝諧)와 담화를 나누었고 서역문자를 해석하여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김생 필적에 대해서는 승려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그가 김생 필적이라는 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시는 사상 논쟁이 치열하였던 때이므로, 아마도 이 같은 옛 유물이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 세대가 흘러 18세기 전반에 이르게 되면 서서히 고증학적인 분위기가 일어나면서 선비들은 옛 고적이나 유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서화 평론가답게 <만덕산백련사>에 대해 정확한 감정을 하였다.

 

 

 

 ▲ 김생, <萬德山白蓮社>, 115.6×47, 강진 백련사 소재.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세상에 전하기로는 김생은 사찰의 건물에 제액(題額)을 하였지만 결구법이 백월비(白月碑)와 다르므로, 아마도 김생의 진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필세가 맑고 굳세니 또한 신라와 고려 무렵의 명필이다.

 

    이하곤의 명확한 감정과 필적에 대한 비교 분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오늘날의 미술사가들도 그의 분석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점은 그의 뛰어난 감식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서예 양식적으로 보면 <만덕산백련사>의 어리 숙한 짜임새와 머리 부분이 큰 자형 등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낭공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백월비>와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글씨모양이 세로로 길고 획의 모서리가 심하게 각이 지며 획이 굵다.    이하곤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원대 설암(雪菴)의 <종춘첩(春種帖)>같은 大字 해서에서 찾을 수 있다. 설암은 중당(中唐)시대의 안진경(顔眞卿)과 북송시대의 황정견(黃庭堅)의 글씨에 바탕을 두고 독특한 大字 서풍을 일으킨 서가이다. 이 설암체는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시대에 유행하면서 제서(題書)나 편액 글씨에 쓰여 졌다. <만덕산백련사> 역시 그 같은 영향아래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다만 제작 과정에서 당시 김생의 필적이라고 전해오던 해서를 일부 참고하여 제작되었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인 비교를 통해 편액에 대한 정확한 감정을 시도한 이하곤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당대의 서화수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만덕산백련사>를 김생의 필적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에 이르면 더더욱 강해진다. 아래의 글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06년에 쓴 시이다.

 

   문의 주련은 김생의 글씨이고 누각의 현판은 이광사가 쓴 것이니
시대가 멀어 가짜일까 의심하지만 무게 있는 그 이름 허망하지 아니하네.

 

 

 

 ▲ 설암, <春種帖>, 1296年 書, 板本 冊, 개인소장

 

 

    당대의 실학자였던 정약용마저 <만덕산백련사>가 김생의 필적이라고 하였으니, 19세기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이후에는 많은 선비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이 편액을 김생의 필적으로 보게 된다. 이 현상은 당시 거세게 일었던 문헌고증학이라는 바람으로 인해 거의 모든 선비들이 옛 필적의 수집에 열광하던 터라, 감식과 애호를 혼동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만덕산백련사>와 관련된 옛 기록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너무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감정에 있어서 지나친 애호는 무관심보다 해가 될 때가 있다. 감정과 애호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며, 감정에 임하는 자는 혹리(酷吏)와 같은 눈에 차디찬 가슴을 지녀야 한다.

 
 
조선일보 : 입력 : 2008.07.25 10:31

 

문화재청 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김현권 감정위원

 

 




 최고 금석문 ‘수차례 수난’33. 태자사 낭공대사비

  • 승인 2009.10.13 21:02

  태자사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 위치한 옛 절터다. 이곳에 있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낭공대사(832~915)의 행적이 기록된 비로, 고려 광종 5년(954)에 세워졌다. 문인 최인연 시랑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단목스님이 신라 명필 김생의 행서 글씨를 집자한 것을 숭태.수규.청직.혜초스님이 새겼다. 세로 210cm, 가로 102cm이고, 글자크기는 2.1cm이며, 총 31행으로, 1행에 83자가 새겨진 큰 비다.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집자해 세워
 
일제 때 반출…결국 국립박물관으로
 
 
<사진>안동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탁본.
   앞면에 기록된 스님의 행장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불심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아이들과 놀 때마저 불사(佛事)를 하니,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풀잎을 따서 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출가할 결심을 아버지에게 전할 때는 자신의 소원이 출가수도해 부모님의 끝없는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문성왕 17년(855)에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이후 사굴산문 범일국사의 제자가 되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은 당시 천자(天子)인 의종(860~873)에게 청해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머물렀는데, 의종은 낭공대사와의 만남을, 법수대사가 진나라의 문제(文帝)를 만난 것과 담란법사가 양무제와 대좌한 것과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중국 각지를 운수행각하던 스님은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했다. 그리고 진성여왕 3년(889) 스승인 범일국사의 병환이 깊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정성껏 시봉하다가, 입적 전 부촉을 받았다.
 
   스님은 인정한 고승이었다. 삭주(춘천의 옛 이름)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산문을 여니, 찾아드는 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아침에 셋, 저녁엔 넷으로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효공왕은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했으며, 신덕왕도 스님을 왕궁에 초청해 경건하게 법을 청하니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을 정도였다. 말년에는 왕족의 후손이자 제자인 명요부인의 청을 받아, 스님은 경북 영일군 묘봉산 석남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신덕왕 4년(915)에 입적했다.
 
   그러나 신라말은 후삼국시대로 혼란스러웠던 때라 스님을 기리는 활동은 미비했다. 고려 광종에야 이르러 비로소 비가 조성됐다. 광종은 탑명을 추증하고 경북 봉화 태자사에 이를 세웠다.
 
그러나 태자사는 폐사됐고, 비는 방치됐다. 조선 중종 4년(1509) 영천군수 이항이 비 측면에 쓴 추기(追記)를 보면, 김생의 필적을 찾아다니다가 낭공대사의 비를 발견하고 영천군 자민루로 옮겼다고 한다. 또 명종 대에는 중국 사람이 머물며 수천장의 탁본을 해갔다고 한다. 잘 보존됐던 탑은 어느 때인지 또 버려졌고, 흙속에 묻혔던 것을 겨우 꺼내 다시 영천관사로 옮겼다.
 
결국 비는 1918년 몸돌만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반출됐고,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세워졌다.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비는 몸돌 가운데가 부러진 것을 붙여놓은 상태이며, 훼손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안동 태자사터에 남은 귀부와 이수가 낭공대사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필이라 추앙받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금석문 학자들의 감탄을 자아낸 낭공대사비이지만, 유랑생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66호/ 10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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