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예 & 대자 결구 84법

2013. 5. 14. 16:24글씨쓰기

 

 

 

 

한국의 서예

 

 

   고려시대에 남아있는 서예의 자료는 흔적비문 ·묘지명 ·사경 등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적다. 이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거의 비석이고 후기는 비 ·묘지명 ·진적과 사경 등이 많다. 전기는 전대를 이어 해서(楷書)구양순의 서풍이고 행서(行書)왕희지풍의 일색이며, 후기에는 특히 25대 충렬왕 이후 조맹부의 서체 들어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환추(李桓樞)의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와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碑塔:보물 361 )구법(歐法)인데, 근직(謹直)한 필력으로 주경하면서 금석기(金石氣)가 넘쳐 흐른다. 장단열(張端說)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眞靜大師圓悟塔碑;보물 172)는 한국 서예사상 드물게 우세남(虞世南)의 서풍으로서 수윤(秀潤) ·근정(謹整)한 명품이며, 고려 비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채충순(蔡忠順)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골기가 통달하고 정채(精采)가 비등하다고 하나 과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거웅(金巨雄)의 거돈사승묘선사비(居頓寺勝妙禪師碑)민상제(閔賞濟)의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모두 구체로서 당당한 것들이다. 안민후(安民厚)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국보 59)는 구법이나 우()에 가까운 것으로 근엄 ·정정하며 품격 높은 일품으로 일류에 속한다. 이원부(李元符)의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금석고(金石攷)에 “신라 ·고려 양조에 있어서 금석의 서체는 대부분 구법으로 일관한 경향이 있는데, 홀로 원부의 우법(虞法)이 있음은 실로 새벽하늘의 샛별에 비할 수 있는 진귀하고 중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단열도 있었으며 또 완전한 우법도 아니며 송나라 휘종의 수금체(瘦金體)처럼 자획(字劃)을 가늘고 길게 뽑는 독특한 필법이다. 유려하고 운필이 자재(自在)하며 청경(淸勁)한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명(書名)이 매우 뛰어난 석탄연(釋坦然)은 처음으로 안법의 해서썼고 왕법(王法)의 행서겸했으며 문수원중수기 액제(額題)와 승가사중수비(僧伽寺重修碑)를 썼는데 명실이 상부하다. 오언후(吳彦侯)의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는 구법으로 근엄 ·주경하고 단아하여 당당한 명품이다. 그 밖에 석영근(釋英僅)은 구법의 해서를 잘 썼고, 석혜소(釋慧素)도 안법을 섞은 듯한 해서를 잘 썼다. 김효인(金孝印) ·김순(金恂) 등은 구법이고, 전양고(錢良古)와 이군후(李君候)는 왕법의 행서를 잘 썼으며, 전원발(全元發)의 법주사혜정국사비(法住寺慧淨國師碑)는 전아한 해서이다. 26대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의 명사(名士)들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문적과 서화를 많이 들여왔으므로 이에 따라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고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의 서를 풍미하였으며, 이 시기는 송설체 일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에서 행촌(杏村) 이암(李灸)은 특히 송설체를 깊이 터득하여 행서와 초서에 뛰어난 대가였다. 권중화(權仲和)의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는 예서(隸書)인 것이 이채롭다. 한수(韓脩)《동문선(東文選)에서 양촌(楊村) 권근(權近)이 “유항 한문경공(한수의 호)은 지행이 높고 견식이 밝아서 일시에 사람의 모범이 되었고 서범이 절륜하여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그의 회암사지공대사비(檜巖寺指空大師碑) ·신륵사나옹화상석종기(神勒寺懶翁和尙石鐘記) 등은 우법(虞法)으로 아윤 청경하고 품격이 높아 고려 비 중 최상급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설장수( 乾 長壽) ·설경수( 乾 慶壽) 형제는 원()나라 사람으로 원 말에 고려에 귀화한 사람으로서 송설체를 썼다. 권주(權鑄)의 신륵사대장각장경비(神勒寺大藏閣藏經碑)는 아윤 ·청아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명필로 이름 높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하여 세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낭공대사비)가 있으며 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지만 서명 높은 왕희지의 서에 비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탑비(鱗角寺普覺國師塔碑)와 직지사대장각전비(直指寺大藏閣殿碑)가 있다.

 

 

한국 서예사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 이 있고, 그후 낙랑군(樂浪郡)유물로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초부터 중국의 직접적 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우세남(虞世南) 등은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 이다.


1. 삼국시대


가)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의 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한인(漢人)들은 낙랑(樂浪)시대부터 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일부에서 행정을 펴고 있었고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육지로 연접되어 고구려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무력적 공방으로 그들과의 접촉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면에 있어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당(唐)에 의 하여 왕조(王朝)가 없어지고 문화적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해져야 할 고구려의 역사마져도 겨우 왕의 세계(世系) 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대부분의 사료는 오히려 중국 측 자료에 의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구려 서법(書法)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로는 예서(隸書)로 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해서(楷書)로 묵서(墨書)한 {년두루묘지(年頭婁墓誌)}행서{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원비(中原碑)}와 북지(北地)에서 발굴한 고분벽서(古墳壁書) 수점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자체는 한자의 크기가 30cm에 달하며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져 있다. 이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 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품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다) 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와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實)함을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 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모 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었고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성교서(聖敎書)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 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부와의 교류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 풍미하 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 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 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 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 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다. 한글書藝
   한글 서예가 시작된 것은 세종대왕 28년(1446)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글을 창제한 이후이다. 한문서예가 고대 문자의 생성과 그 역사를 같이 하는 것과는 달리 한글 서예는 불과 55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조형상, 구조상에서 한문 서예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문서예가 사물의 모양을 본따고 의미를 합성한데 반해 한글서예는 天, 地, 人 삼재에 근거를 두고 만든 상형 분자이며 동시에 표음 분자이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글 서예는 한문 서예에 밀려 그 연구와 발전이 저조했었고 요즈음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녀자나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쓰는 글로 생각했었고 일제의 수난기를 거친 후에도 사대사상에 밀 려 겨우 명목만을 이어왔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양의 전통적 문자 표현의 재료와 도구 및 방법이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자연히 글씨 를 쓰는데 대한 인식과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한글의 예술성과 실용성이 이원화되면서 이른바 한글서예라는 전통적 근 대미술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서예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금세기의 전반은 일제의 침략과 6.25동란에 다른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통 서예문화에 많은 왜곡과 굴절을 초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경재적 재건과 더불어 부흥되기 시작한 서예문화는 주로 국전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급속히 발전한 반면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사실상 형식에 그쳤을 뿐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받침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단적으로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예관의 건립, 대학에서의 서예과의 신설, 그리고 사회적인 서예학술단체의 활동 은 21세기 한국서예의 확고한 위상정립은 물론 한글 서예계 발전의 획기적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 되나, 현재에는 아직 필체 및 서체의 명칭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내세우는 몇몇 서체명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1973 김응현: 정음체, 판본체, 정자, 반흘림, 진흘림
◦ 1973 김일근: 반포체, 효빈체(모방체), 궁체(남필, 여필), 잡체, 조화체
◦ 1983 박병천:
◦ *한글서체-전서체, 예서체, 해서체(정자), 행서체(반흘림), 초서체(흘림)
◦ *인쇄체-판본고체, 판본필서체, 인서체
◦ *필사체-정음체, 방한체, 궁체, 혼서체, 일반체
◦ 1979 중학 서예 : 판본체, 국한문혼서체, 궁체(정자, 흘림)
◦ 1985 윤양희 : 핀본체, 혼서체, 궁체(정자, 흘림(반흘림))
◦ 1986 김양동: 정음 고체, 언문시체(선비언필체,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

   위와 같은 분류들은 아직 분류개념 및 분류 위계도 불분명하다.
이상의 분류를 정리하여 한글 고전 자료를 분석해 보면 판본서체에도 전서, 예서, 정자, 반흘림, 흘림체가 있을 수 있고 궁중에 서도 전서체, 정자체, 반흘림, 흘림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서체형만의 판본체와 정자 흘림체만의 궁체라는 개념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한글 고전자료에서 순수한 예서체형의 글씨는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한글 서예는 크게 나누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생성된 판본체와 궁중에서 체계화되고 여성사회에서 발전시킨 궁체 그리고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살려 우리 민족의 얼과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숨쉬어온 민체등으로 구분해 생각 할 수 있다.


   한글서체와 한문서체를 비교해 보면 판본체에 있어서 원필과 방필은 한문서예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하고, 궁체의 정자와 흘림 은 한문서예의 해서와 행서 그리고 봉서 혹은 서찰은 초서에 해당된다.
판본체는 문자의 효용면에서 그 기능을 다했을 뿐 서예술로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판본은 판각된 형태이므로 각공에 의해서 판각되는 과정에서 글씨의 생명력이 상당히 저하되고 판각되기 이전의 원글씨가 지녔던 생동감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성격이 다소 상실되어 그 형태와 획이 도식적이고 단순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글서예는 판본체의 획의 묘를 살려서 쓴 고체와 궁궐안에서 쓴 궁체 그리고 (서)민체가 있다. 이중에서도 궁체는 한국적 고유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궁체의 발달은 약 35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필사된 서찰과 서책의 유품에 의해 증명된다. 서찰은 주로 왕후와 상궁 그리고 궁녀들의 필적 인데, 능숙한 필치로 단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씌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서책은 궁중의 내서인데 미려하고 우아하며 한결같이 고르다. 궁체가 발달된 이유는 왕실과 외척사이에 편지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봉서를 쓸 기회가 많았으며 또 왕후와 공주의 교양서 로 책을 많이 필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중의 문화가 외부로 나와서 귀족계급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파급되어 보존되고 닦여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궁체가 정제되어졌다.


   궁체는 그 글자 구성이 한문 문자에 비해 단순한 만큼 서선내의 함축미와 글씨 짜임에 있어서 고차원의 균형미를 요구한다. 필 법에서 중봉행필을 엄수하고 붓털의 오묘한 탄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까다로운 궁체의 균형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궁체는 너무 곡선미가 짙고 여성적이며 지나친 기교로서 미서에 이어지는 흠이 있다. 또한 서법이라는 준비된 질서 속 에 구속되어 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그 조형성과 예술성의 격조가 낮은 느낌이 있다.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필사본으로 되어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이는 서예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소설, 가사 , 서간 등 읽고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다. 글씨로 쓴 민체는 필사자, 필사연대를 간혹 밝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 명시되 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궁중 이외의 백성들에 의해서 필사되었다는 것과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간행된 것이라는 정도 밖에 추측할 수 없다.
   민체의 특징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며 자유분방하게 서사(書寫)함으로써 우리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광 개토왕비와 울진 봉평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예술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민체의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자의 시간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표현인 즉 통일성, 강조, 균형, 비례, 선, 형태, 재질감, 공간의 환영리 등의 조형성이 잘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체는 민간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體)'라 일컬을 만한 기준이 서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 나라 고유의 민화가 우리서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립된 화풍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조선 중.말기에는 서사상궁의 글씨 쓰기 교육용으로 연습교본이 있었으나 한글 글씨쓰기를 정식으로 교본화 한 것은 1910년에 한서 남궁억이 쓴 신언문체법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1958봄에 갈물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예 단체를 발족하고 가을에 제1회 갈물한글서예회 회원전을 열었는데 이는 행사 이전에 많 은 후학들에게 한글 궁체쓰기를 지도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59년에 동방연서회(이사장 김충현)가 창립되어 후진양성에 치중하는 한편 서예 특강, 학생휘호대회 등을 통하여 한글 서예 보 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70년대에 이르러 비교적 깊게 이루어 졌으나 일부인만이 참여하는 실정적인 것인데 반해 80년대에는 많은 서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한글서예 교본을 출간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알아본 한글서예에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현대문 표기가 가로 행을 하고 있으므로 장법에 있어 가로 쓰기를 연구해 보아야 겠으며, 한글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는 그 내용이 되는 문학성(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글서예는 자칫 조형화하기 쉬운 한문서예에 비하여 많은 과제와 함께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는 우리글이다.

 

 

 

 

대자 결구 84법

 

 

天覆 : 宇宙宮官 ---要上面蓋盡下面宜上淸而下濁
윗면이 아랫면을 모두 덮을 수 있어야하며 위는 맑고 가볍고 경쾌하게 하여야하고 아래는 무겁고 탁하게 해야한다. 



地載 : 直且至里 ---要下 載起上 宜上輕而下重 
아래획이 윗획을 싣고 있는 듯이 해야하고 위에는 가볍게 아래획은 무겁게 처리하여야 글씨가 어우러진다. 



讓左 : 助幼卽却 ---要左高而右低右邊須讓左邊 
왼쪽이 높고 오른쪽은 낮아야 하는데 우변은 반드시 왼편에 양보를 하는 것처럼 왼편은 크게 오른편은 작게 해야한다. 



讓右 : 晴 績峙 ---要右高而左平左邊須讓右邊 
우측은 높고 좌측은 우측과 평평하게 해야하는데 좌변이 우측에 양보를 하는 것처럼 좌측을 작게 써야하는 것이다. 



分疆 : 體輔願順 ---左右平不相讓如兩人幷立 
좌우를 고르게 하여 서로 양보하는 것이 없도록 하여 마치 두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것처럼 하여야한다. 



三勻 : 謝樹衛術 ---中間正而勿偏左右致拱揖之狀 
중간은 바르면서 치우치지 말아야하며 좌우의 것들은 공손하게 읍하고 있는 모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二段 :  嚮需留 ---要分爲兩半相其長短略加饒減 
두부분으로 나뉘어지게 하여야하는데 서로 그장단을 맞추기 위하여 획이 적은 것은 크게하고 획이 많은 부분은 줄여서 작게 써야하는 것이다. 



三停 : 章意素累 ---要分爲三截量其疏密以布勻停 
세마디로 나뉘어지게 써야하는데 그 성글고 빽빽한 것을 생각하여 고르게 배치되도록 하여야한다. 



上占地步 : 雷雪普昔 ---要上面闊而 輕下面窄而 重 
윗면은 활달하게 하면서 획이 가볍게 해야하고 아랫면은 좁으면서 획을 무겁게 하여야한다. 



下占地步 : 衆界要禹 ---要下面闊而 輕上面窄而 濁 
아랫면을 활달하게 하면서 획이 가볍게 하여야하고 상면은 좁으면서 획이 탁하고 무겁게 하여야한다. 



左占地步 : 數敬劉對 ---要左邊大而 細左邊小而 粗
좌변이 크면서 획이 가늘게 하여야하고 우변은 작으면서 획이 굵어야한다. 



右占地步 : 騰施故地 ---要右寬而 瘦左邊窄而 肥 
오른쪽은 넓으면서 획이 마르고 왼쪽은 좁으면서 획이 살쪄있어야 한다. 



左右占地步 : 弼辦衍仰 ---要左右都瘦而長中間獨肥而短 
좌우가 모두 마르면서 길어야하고 중간부분만이 통통하면서 짧아야한다. 



上下占地步 : 鸞鶯 叢 ---要上下寬而稍扁中間窄而勿長
위아래가 넓으면서 조금 납짝하게 하여야하고 중간은 좁으나 길게하지 말아야한다. 



中占地步 : 蕃華衝擲 ---要中間寬大而 輕兩頭窄小而 重
중간부분을 관대하게 하면서 획을 가볍게 해야하고 위아래나 좌우는 좁으면서 획이 무거워야한다. 



俯仰勾  : 冠寇密宅 ---要上蓋窄小而勾短下腕寬大而勾長
위의 덮개는 좁고 작게하고 구<갈고리>를 짧게하고 하완은 관대하게 하면서 구를 길게 하여야한다. 



平四角 : 國固門  ---上兩角要平下兩角要齊忌挫肩垂脚
위의 양각을 평평하게 하여야하고 아래 양각은 가지런하게 하여야하는데 어깨가 뒤틀리거나 다리부분이 축늘어진 것은 좋지않다. 



開兩肩 : 南丙兩而 ---上兩肩要開下兩脚要合忌直脚却肩
위의 양어깨는 벌어지게 하여야 하고 아래 양다리는 모이도록 해야하는데 곧게 나란히 내려온 다리나 좁은 어깨를 만들면 어울리지 않는다. 



勻畵 : 壽疆 量 ---黑白點 須要均勻 
흑백점획을 모름지기 고르게 해야한다. 



錯綜 : 馨聲繁繫 ---要三部交錯均勻不致互相障碍 
세부분의 교착을 고르게 해야하는데 서로 장애가 되게 하여서는 안된다. 



疏排 : 瓜介川不 ---疎排要疎闊各 要開展 
소배는 성글고 활달하게 해야하며 각 삐침획은 펼쳐지는 듯이 하여야 한다. 



縝密 : 繼 纏  ---點 要緊縮若疏開則 散 
점획을 긴밀히게 하여야한다. 만약 벌려놓으면 흩어져보이게 된다. 



懸針 : 車申中巾 ---懸針須鋒不宜中 中 則無精神
현침은 반드시 봉이 드러나게 해야하는 것이니 중수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중수로하면 정신이 없어 보인다. 



中  : 軍年單畢 ---中 不宜懸針懸針則不穩重
중수는 현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현침으로 하면 온중하지 않다. 



上平 : 師明牡野 ---上平是小的在左邊上面要平齊
상평은 작은 것이 좌변에 있는 것인데 상면을 평평하게 맞추어서 써야한다. 



下平 : 朝敍叔細 ---下平是小的在右邊下面要平齊 
하평은 작은 것이 우변에 있는 것인데 하면을 평평하게 맞추어서 써야한다. 



上寬 : 守可亨市 ---下面不宜過大上面要疎展
하면을 너무 크게 쓰지 말아야하며 상면은 넓고 시원하게 해야한다. 



下寬 : 春卷夫太 ---上面緊小短促下面要開展
상면을 줄여서 좁게하고 하면을 넓고 시원하게 벌려줘야한다. 



減捺 :  癸食黍 ---複捺要減少不減少則主客不分
파책이 두개이상 있게 되는 경우에는 그중에 하나는 줄여서 점이나 작은 파책으로 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객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減勾 : 禁  懋 ---複勾要減少不減則輕重不辨
갈고리가 두개이상 있을 경우에는 줄여서 철주처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중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讓橫 : 喜婁吾玄 ---橫 都要長才不像걸擔
횡획을 모두 반드시 길게 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들려지는 모양이 되지 않는다. 



讓直 : 甲干平市 ---要直 正長而不偏短
직획을 바르고 길게 해야하니 그래야 너무 작아지지 않는다. 



橫勒 : 此七也  ---橫勒若過於放平則無筆勢
횡평이 만약 방평보다 지나치게 되면 곧 필세가 없어진다. 



均平 : 三云去不 ---長短須平均相配相齊則失威
장단이 반드시 고르게 서로 어울려야 한다. 길이를 서로 같게하면 위엄을 잃게된다. 



縱波 : 丈尺吏臾 ---縱波的波須要藏頭收尾
종파의 파책은 장두로 해야하고 수미로 해야한다. 



橫波 : 道之是足 ---橫波的波先要拓頸寬胸 
횡파의 파책은 목부분을 넓게하고 가슴부분을 시원하게 해야한다. 



縱戈 : 武成幾夷 ---縱戈的戈過彎曲則無力
종과의 과는 지나치게 구부러지게되면 힘이 없게 되는 것이다. 



橫戈 : 心思志必 ---橫戈的戈不宜挺直勾平
횡과의 과는 몸이 곧으며 구가 평평해서는 않된다. 



屈脚 : 烏馬焉爲 ---屈脚的勾要共包兩點
굴각의 구는 두개의 점을 감싸고 있도록 해야한다. 



承上 : 天文支交 ---承上的 要使叉對正中
승상의 삐침은 교차되는 부분이 정중앙에 있도록 해야한다. 



曾頭 : 曾善英羊 ---曾頭的字要上開下合
증두의 점은 위는 벌어지고 아래는 모여야한다. 



其脚 : 其具與典 ---其脚的字要上合下開
기각의 점은 위는 모이고 아래는 벌어져야한다. 



長方 : 罔周同冊 ---長方的字四面要直而寬大
장방의 글자는 사면이 곧으면서 넓고 커야한다. 



短方 : 西曲回田 ---短方的字兩肩要平開
단방의 글자는 양어깨가 평평하고 벌어져야한다. 



搭勾 : 民衣良長 ---搭勾的字要 搭否則筆勢苟且
탑구의 갈고리는 다른 갈고리보다 더욱 올려서 써야하니 그렇지 않으면 필세가 구차하여진다. 



重  : 友及反  ---重 的 宛轉勿使兩 平行
중별의 별획은 모름지기 완만하게 구부러지게 해야한다. 두개의 삐침을 나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點 : 采孚妥受 --- 點的點須朝向否則像 石 
찬점의 점은 반드시 조회를 받듯 아랫쪽을 향하여 모이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섬돌과 같이 된다. 



排點 : 無照點然 ---排點的點勿平板如布棋要貴變化
배점의 점은 평평한 판에 바둑돌을 놓는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勾努: 菊 蜀曷 ---勾努不宜向內 內 則外難方圓
구로는 안으로 향하여 싸려고 하지 마라. 안으로 싸는 모양이 되면 밖으로 방원을 만들기 어렵다. 



勾  : 甸句勾勺 ---勾 不宜用直努直努則外難飽滿
구과에는 직노를 사용하지 마라. 노획을 곧게 하다보면 안으로 포만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中勾 : 東束米未 ---中勾的字但求偏正生硏
중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다만 치우치고 바르게되는 것을 잘 생각하여 할것인데 갈고리가 보통의 각도처럼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綽勾 : 乎手予于 ---綽勾的字亦喜硏生偏正
작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역시 치우치고 바른 것에 대하여 잘생각하여 할 것인데 갈고리가 보통의 각도보다 조금 느슨하게 좌측방향으로 올라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伸勾 : 紫 旭勉 ---伸勾的字惟在屈伸取體
신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오직 굽어진 곳에서 몸을 취해야한다. 



屈勾 :  鳩輝  ---屈勾的字要知體力屈伸
굴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체와 힘과 굴신을 알아야 한다. 



左垂 :  幷亦弗 ---左垂的字右邊不得太長
좌수가 들어가는 글자는 우변을 너무 길게 해서는 안된다. 



右垂 : 升叔拜卯 ---右垂的字左邊須要縮短
우수가 들어가는 글자는 좌변을 짧게 해야한다. 



蓋下 : 會合金舍 ---蓋下的蓋左右要平均分
개하의 개는 좌우가 고르게 배분되어야한다. 



 下 : 琴谷呑吝 --- 下的 兩邊要平展
진하의 진은 양변이 모두 고르게 벌어져야한다. 



縱腕 : 風鳳飛氣 ---縱腕要長但 蜂腰鶴膝
종완은 길게 해야하나 봉요나 학슬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橫腕 : 見毛尤兎 ---橫腕也要梢長亦忌蜂腰鶴膝
횡완 또한 조금 길어야하나 또한 봉요나 학슬이 되지 말아야한다. 



縱  : 尹戶居庶 ---縱 忌短 牛頭鼠尾
종별은 짧은 것을 꺼리나 우두 서미가 되는 것을 꺼린다. 



橫  : 考老省少 ---橫 喜長也 牛頭鼠尾
횡별은 길은 것이 좋으나 또한 우두 서미가 되는 것을 꺼린다. 



聯  : 參彦形  ---聯 在以下 之首對上 的胸
연별은 하별의 머리부분이 상별의 가슴부분을 대하고 있어야한다. 



散水 : 沐波池海 ---散水在以下一點之起鋒應上一點之尾
산수는 아래 한점의 기봉하는 부분이 상일점의 꼬리 부분에 상응하여한다. 



肥 : 土止山公 ---此等字宜肥然忌擁腫擁腫則顯更肥
이러한 등등의 글자는 도톰하게 써야하나 부어있는 느낌은 좋지 않다. 부어있는 느낌이 들면 살찐 것이 더욱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瘦 : 了卜才寸 ---此等字瘦瘦忌枯削枯削則形更瘦
이러한 등등의 글자는 수척하게 써야하나 수는 삐쩍마른 것을 꺼린다 삐쩍마르면 모양이 더욱 수척해보이기 때문이다. 



疏 : 上下士千 ---疎本稀排乃用豊肥碩壯
소는 본래 드문드문하게 배열하는 것이나 풍비석장함을 사용하여야한다. 



密 :  齎龜  ---密要安疎須知輕細勿宜粗重
밀은 성글게 쓰는 것이 편안한 것인데 가볍고 가늘게 써야함을 알고 두텁거나 무겁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堆 : 晶品 磊 ---堆重 勻注意結合的地方勿使過疎過密
퇴는 골고루 배치시키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그러나 결합하는 곳은 너무 성글거나 너무 조밀하게 하지말라. 



積 :  靈 鬱 ---繁複中取均勻整潔否則形體刺眼難看
복잡하고 중복이되는 획이 많은 경우는 고르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체가 눈을 자극하여 보기싫게 된다. 



偏 : 入八乙己 ---偏中要能勻稱勻稱則其形勢始相安
편중이된 글자는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니 균형이 맞아야 그자세가 비로소 편안해진다. 



圓 :  巒樂欒 ---圓是要圍滿成圓形不要露鋒芒
원은 주위가 꽉차서 원형을 이루어야하니 봉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斜 : 毋勿乃力 ---斜中須取方正如不能方正則形體更斜
기울어진 속에서 반듯한 것을 취해야하니 반듯하지 못하면 형체가 더욱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正 : 主王正本 ---正要四方不偏如磐石泰山之安而不搖動
정은 사방 어느 곳으로든 치우침이 없어야한다. 반석이나 태산과 같이 편안하여 동요되는 것이 없어야한다. 



重 : 哥昌呂圭 ---重的字下半要大亦不可太大上面宜梢小
중첩된 글자는 아래에 있는 것을 크게 해야하는데 너무 크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상면은 약간 작게 해야한다. 



倂 : 竹林羽弱 ---倂的字右邊要梢寬左邊要梢窄能讓
같은 모양으로 나란한 글자는 우변을 조금 더 크게 해야하는데 좌변은 약간 작으면서 양보하는 기분으로 써야한다. 



長 : 自目耳葺 ---長的字不要使短使短則變原形
긴 글자는 억지로 짧게 쓰려고 하지 마라. 짧아지면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다. 



短 : 白曰工四 ---短的字不要求長求長則不成體
납짝한 글자는 길게 쓰려고 하지마라. 길게 쓰면 원래의 형체를 만들지 못하다. 



大 :   囊戇 ---大的字要 簇如 散則不能站立
큰글자는 모아서 긴밀하게 써야하니 흩어지게 되면 서있을 수도 없게 된다. 



小 :  口小工 ---小的字要豊厚莊嚴否則更形小
작은 글자는 豊厚하고 莊嚴하게 써야하니 그렇지 않으면 모양이 더욱 작아지게 된다. 



向 : 妙舒飭好 ---向的字雖相向但手足仍須廻避得當 
향세의 자형으로된 글자는 비록 서로 향세를 이루고 있더라도 수족에 해당되는 부분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피하여서 알맞도록 해야한다. 



背 : 孔乳兆非 ---背的字雖相背而脈絡仍是貫通
背勢로된 글자는 비록 서로 배세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서로 어울어져 그맥이 관통할 수 있어야한다. 



孤 : 一二十  ---孤的字筆 忌輕浮枯瘦否則更孤
획이 별로 없는 글자는 필획이 가볍고 들뜨고 마르고 수척한 것을 꺼리나니 그렇지 않으면 더욱 외로와지게 되는 것이다. 



單 :日月弓乍 ---單的字筆 要俊麗淸長亦忌枯瘦
간단한 글자는 필획이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맑고 길어야하는데 이것 또한 마르고 수척한 것을 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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