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원교體는 비학(碑學)의 선구

경향신문 | 입력 2006.11.24. 15:57

   원교 글씨가 동시대나 이전 작가와 다른 것은 해서나 행초 등에서 왕희지법을 고수하면서도 전·예서까지 두루 겸했다는 점이다. 특히 원교의 전·예 수련은 친구인 김광수가 청대 학자 임본유·임개 부자로부터 들여와 수장한 한·위의 전서나 예서비, 특히 그중에서도 '역산각비' '석고문'이나 '예기비' '수선비'에서 전적으로 힘을 입었다.

이를 통해 원교는 왕희지법만을 글씨 기준으로 인식해온 시류에서 탈피하여 이왕(二王) 중심의 위·진시대의 고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전서와 예서를 함께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그림3), 이것 또한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의 진전 속에 배태되었다.

그림 3. 이광사, ‘초학장지해법종요’(草學張芝楷法鍾繇),
 각 17×12cm, 한빛문화재단 소장.

  17세기 조선에서 이 방면의 선구인 허목은 중국의 삼대고문에서 글씨의 이상을 미수체로 실천해냈다면, 동시대 조속은 우리나라 역대 금석문을 모아 '금석청완'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방면에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예서 중 팔분예서의 명가인 김수증·김창숙 부자는 우리나라와 중국 금석문 수집에 열을 올렸으며, 이우·이간 형제는 신라~조선의 명비탁을 모아 '대동금석첩'을 엮어냈다. 이것은 조선금석학의 발전은 물론 우리 글씨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나 서학(書學)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우리 글씨의 기준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후 김재로·유척기·김광수와 함께 홍양호가 금석학 연구 수집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박지원 문하의 북학파인 이덕무·유덕공·박제가·남공철 등은 중국 청대 금석학의 성과를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성과는 청의 금석학이 조선학계에 이식되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토대로 추사의 금석학이 완성되고 다시 오경석·오세창 부자로 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요컨대 추사의 금석학 연구와 그 실천으로서 '진흥이비고'나 전·예필법을 해서와 행서에 혼융시켜내는 추사체의 경지는 원교는 물론 당시 이한진·유한지·이인상 등 전·예의 명가들도 이룩하지 못한 영역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은 선대 연구자와 서가들의 업적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의 원교비판은 원교 당시의 시대적 한계나 서예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가해진 만큼 지나치다고 할 것이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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