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왕산 자락의 잊혀진 "조선의 문화공간" ③세심대(洗心臺)

2016. 2. 5. 05:52茶詩




7.인왕산 자락의 잊혀진 "조선의 문화공간" ③세심대(洗心臺) | 찾아본 문화유산2013-09-16  | 조회수 570
조장빈

 

 

7.인왕산 자락의 잊혀진 "조선의 문화공간" ③세심대(洗心臺)

 

   정선의 ‘장동팔경’ 일부. 왼쪽부터 청풍계·수성동·인왕산·세심대(▼)로 크기는 각 58×37㎝다. 덕성여대 박은순 교수는 “둔탁한 필치로 보아 장동팔경 중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사진 공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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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중앙일보.2013.08.30.

 

기사의 내용과 도록에 보면 "겸재의 ‘장동팔경(壯洞八景)’이 있다. 백악산·인왕산과 두 산의 명소 각 세 곳씩을 그린 작품이다. 청송당(聽松堂)·취미대(翠微臺)·백악산(白岳山)·청하동(靑霞洞·자하동)·청풍계(淸風溪)·수성동(水聲洞)·인왕산(仁王山)·세심대(洗心臺)..."라고 한다. 여기서 "인왕산"은 청풍계 상단(청하동)과 벽련봉의 부침바위를 그렸다. 청하동은 자하동이라 부연키보다는 청하동이 청풍계에 있슴을 그리고 세심대는 위치는 아래로 생각된다. 이곳에 가보면 전망대에 정선의 그림 "한양전경"을 그린 곳이라 안내판이 있다.

 

 

임오년(1762 영조 38년)에 사당을 지을 땅을 결정할 때 처음에는 이 누각 아래로 하려고 의논하였으나, 그때 권흉(權兇)이 그 땅이 좋은 것을 꺼려서 동쪽 기슭에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경모궁(景慕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곳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선희궁을 배알할 때마다 늘 이 누대에 오르는데, 이는 아버지를 여윈 나의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누대는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백여 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洗心臺洗心臺。北隣我家靑楓溪" -洗心臺歌 茅洲集 김시보(金時保) 

 

"洗心臺賞春 庚辰

인왕산이 비스듬히 세심대를 끼고 있어 / 仁王斜抱洗心臺
님 수레가 일년 일차 꽃구경을 오셨다네 / 玉輦看花歲一廻
구름이 산을 막아 그대로 막차이고 / 雲擁翠微開幕次
꽃시내를 흐르는 물 술잔 띄우기 알맞아 / 水流芳澖汎觴杯
고요한 이빈의 궁 드문드문 버들이요 / 李嬪宮靜垂疎柳
깊숙한 서씨 정원 매화가 비쳤었지 / 徐氏園深映遠梅
독보라는 휘호를 지척에서 하시면서 / 咫尺揮毫稱獨步
몇 번이고 님께서 이 비재를 인정했는데 / 幾回天語獎菲才


   이는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시다. 세심대는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있는데 그 아래 선희궁(宣禧宮)이 있음.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다산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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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대의 의미

 

-또 전교하기를, "근래에 경조사(慶弔事)를 폐지한 것은 문득 쓸쓸한 뜻이 있어서였는데, 이는 태평 성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지난번 주교(舟橋)를 완성한 뒤에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게 특별히 놀이를 하게 한 것은 노고를 보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부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세심대(洗心臺)를 설치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평범하게 등림(登臨)하는 곳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이었으니(卽寓慕之意)병조 판서의 서문(序文)에서도 그 대략을 말하였다. 대저 사람이 화합하면 천지의 조화(調和)도 응하는 것이니, 놀이를 하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세도(世道)에 관련된 것이다. 근일 풍속이 자못 소조(簫條)함을 깨닫겠으니, 잔치도 벌리고 놀이도 하여 화기(和氣)를 인도할 수 있는 잔치나 놀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다. 이후로는 경들부터 힘써 화합하고 즐기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정조 16년 임자 (1792, 건륭57), 조선왕조실록

 

-상이 이르기를, “매년 이 때가 되면 꼭 이 세심대에 오르는데 이는 경치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은 대개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한가하게 즐기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옛날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가 있고나서 고(故) 중신(重臣) 영성군(靈城君)이 여러 경재(卿宰)와 함께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을 편 적이 있었다. 그때 영성군이 지은 시 가운데 ‘해마다 태평주(太平酒) 들며 길이 취하리.[每年長醉太平杯]’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이다. 경들은 혹시 그런 일을 들어 알고 있는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경사스러운 해이다. 경들이 고사(故事)를 엮어 기술하면서 옛사람들과 아름다움을 짝하여 오늘날의 태평스러운 기상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이달 안으로 날을 잡아서 이곳에 와 모였고 보면 올해의 이 놀이 또한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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