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 다산시문집 제4권

2016. 2. 5. 06:29茶詩



      

 다산시문집 제4권
 
 시(詩)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여름철에 병들어 누워 있으려니 숨통이 꽉 막힌다. 한양에 있는 누각과 정자들, 바람이 소 리내며 문으로 솔솔 들어오던 일들이 그리워 왁하고 소리 지르며 발광을 해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 옛날을 생각하고 지금의 현실을 슬퍼할 때 옛날 두보(杜甫)가 가을을 흥겨워했던 그 뜻을 잊을 수가 없다 하겠다.


창의문 앞에는 돌길이 뚫려 있고 / 彰義門前石逕通
삼각산 봉우리가 중천에 꽂혀 있지 / 華峯三角揷天中
시냇물 돌아흘러 마음까지 시원하고 / 回溪不斷澄心水
높다란 버드나무 시원한 바람 불었는데 / 高柳長吹拂面風
명사들이 잔치 열어 국가 기상 결정짓고 / 名士開筵關氣象
영왕이 칼 씻은 곳 영웅호걸 따로 없지 / 寧王洗劍想豪雄
지금은 장독 서린 오랑캐 접경에 / 如今瘴熱鰕夷界
낮은 처마 대에 막히고 햇빛만 이글거리네 / 竹壓矬檐海日紅

이는 세검정(洗劍亭)을 읊은 시다. 세검정은 창의문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음.


성을 끼고 길게 뻗은 서교로 가는 길 / 西郊馳道夾城長
한여름에 그 길 따라 시원한 참에 댈라치면 / 朱夏追隨趁晩涼
사통오달 덩그런 집 깊은 골에 열려 있고 / 四達軒楹開僻巷
한 무리 말 탄 손님 꽃못에 비치느니 / 一群鞍馬照芳塘
사대에 날 다스워 잔디싹이 푸르르고 / 射臺日煖莎苗綠
어함에 부는 미풍 연꽃이 향기로워 / 魚檻風微菡萏香
오얏 담그고 외 띄우고 웃으며 즐기다가 / 沈李浮瓜欣笑傲
언제든지 석양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지 / 常時歸影逼斜陽
이는 천연정(天然亭)을 읊은 시다. 천연정은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음.
유하정이 중간에는 근신들에게 귀속되어 / 中歲流霞屬近臣
하얀 담에 화초들이 봄을 서로 시새웠지 / 粉墻花木媚靑春
용산에 비단 돛대 한도 없는 풍류였고 / 龍山錦帆風流遠
봉각의 황금패는 새로운 제도였어 / 鳳閣金牌制度新
묵은 약속 자연히 오징어 먹물 되어버려 / 宿約自然成鰂墨
마음이야 누구인들 농어 순채 생각 없으리 / 本心誰不憶鱸蓴
막다른 골에 유락한 신세 먼지나는 바닷가 / 窮荒落跡塵生海
고국 산천 생각하니 눈물이 수건 적시네 / 故國回頭淚滿巾

이는 유하정(流霞亭)을 읊은 시다. 유하정은 광희문(光熙門)에서 10리 거리인 두모포(豆毛浦) 가에 있는데, 선왕조 때에 그것을 내각(內閣)에 귀속시켜 용산 독서당(龍山讀書堂)으로 쓰게 했던 고사가 있음.


바위도랑 서쪽에 자그마한 서향각 / 書香小閣石渠西
밤마다 동쪽 벽에 별들이 나직하다네 / 東壁星辰夜夜低
언제나 자색 안개 용호 기운 서려 있고 / 紫霧常留龍虎氣
푸른 못은 봉황이 와 놀도록 하였다 / 碧池曾許鳳凰棲
옥섭을 보노라면 님의 얼굴 떠오르고 / 恭瞻玉躞天顔近
특별히 주신 상아 첨대 님이 손수 쓰신 거였지 / 密降牙籤御手題
듣기에 화영전을 새로 또 지었다는데 / 聞道華寧新象設
유대 앞 길가에는 풀빛이 무성하리 / 乳臺前路草萋萋

이는 서향각(書香閣)을 읊은 시다. 서향각은 춘당대(春塘臺) 북쪽에 있는데 내부(內府)의 서적과 어진(御眞)을 모셔둔 곳이고, 화영전은 화성(華城)에 있는데 역시 어진을 모셔둔 곳임.



파릉의 물빛이 검천까지 닿아 있고 / 巴陵水色接黔川
강 위의 붉은 누각 반공중에 솟아 있지 / 江上朱樓落半天
버드나무 밖에는 조군이며 돛대뿐이요 / 漕步帆檣煙柳外
들창 앞에 보이는 것 어촌이요 섬이었다 / 漁村洲嶼綠窓前
은대의 직책으로 난여 따라 가보았고 / 銀臺職從鸞輿日
아버지 교훈 받던 시절 지부관으로 오셨었죠 / 地部官臨鯉對年
님 계신 곳 아득하고 어버이도 아니 계셔 / 弓劍杳然風樹隕
객상에서 읊는 시에 눈물이 왈칵 솟네 / 客牀吟眺重汪然

이는 읍청루(挹淸樓)를 읊은 시다. 읍청루는 숭례문(崇禮門) 밖 10리 거리에 있는 용산(龍山) 위에 있는데, 선인(先人)께서 호부(戶部)에 계실 때 그 누각에 한 번 오르신 일이 있고, 왕조 시절 대가(大駕)가 거기 가실 때는 내가 또 승지(承旨)로서 호종(扈從)했던 일이 있었음.


노량진 작은 토성 강을 띠고 쌓여 있고 / 露梁津堡帶江橫
구불구불 연로가 화성까지 닿아 있지 / 輦路逶迆接華城
물가 언덕 정자 하나 구름 일어 장막 되고 / 水岸亭孤雲幕起
바다에 돛 사라지면 그림다리가 놓여졌지 / 海門帆落畫橋成
님 탄 수레 움직이려면 화살 셋이 날았으며 / 鸞鑣欲動飛三箭
타고가 울리면서 두 곳 영도 풀리었지 / 鼉鼓交鳴解兩營
병조에 있으면서 님의 행차 모셨을 때는 / 憶忝兵曹陪羽衛
내반에서 편미 들고 기둥 앞에 섰었건만 / 內班鞭弭列朱楹

이는 망해정(望海亭)을 읊은 시다. 망해정은 노량진에 있는데, 선왕께서 화성(華城)에 행차했다가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 정자에서 조금 쉬었다가 배에 오르곤 하였음.


서쪽으로 호문 나서면 북영이 거기 있고 / 虎門西出北營深
주합루를 동으로 보면 왕기가 서려 있어 / 宙合東瞻御氣臨
복도 밑을 흐르는 시내 대낮에도 요란하고 / 閣道溪聲喧白日
황단 주위 나무들은 녹음이 짙었었지 / 皇壇樹色暗濃陰
사장을 자주 열어 능피도 옮겨오고 / 數開射埒移綾被
곁에다는 서루 지어 한림으로 삼았었다 / 旁起書樓作翰林
연꽃에 늘 취해서 못가에 가 누웠었는데 / 每醉藕花池上臥
서글프게 동쪽 끝 바닷가에서 읊노라네 / 傷心扶木海邊吟

이는 군자정(君子亭)을 읊은 시다. 군자정은 요금문(耀金門) 밖에 있는데 황단(皇壇)ㆍ주합루(宙合樓)와 마주보고 있으며 거기가 바로 북영(北營)임.


인왕산이 비스듬히 세심대를 끼고 있어 / 仁王斜抱洗心臺
님 수레가 일년 일차 꽃구경을 오셨다네 / 玉輦看花歲一廻
구름이 산을 막아 그대로 막차이고 / 雲擁翠微開幕次
꽃시내를 흐르는 물 술잔 띄우기 알맞아 / 水流芳澖汎觴杯
고요한 이빈의 궁 드문드문 버들이요 / 李嬪宮靜垂疎柳
깊숙한 서씨 정원 매화가 비쳤었지 / 徐氏園深映遠梅
독보라는 휘호를 지척에서 하시면서 / 咫尺揮毫稱獨步
몇 번이고 님께서 이 비재를 인정했는데 / 幾回天語獎菲才

이는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시다. 세심대는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있는데 그 아래 선희궁(宣禧宮)이 있음.



[주D-001]명사들이 …… 결정짓고 : 세검(洗劍)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앞두고 김유(金瑬)ㆍ이귀(李貴) 등이 그곳에 모여 거사(擧事)를 모의한 다음 그 물에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기에 한 말임.
[주D-002]영왕 : 하늘의 명을 받아 국가를 안정시킨 왕. 여기서는 인조(仁祖)를 말한 것.

[주D-003]황금패 : 규장각(奎章閣)에서 쓰는 부신(符信). 나무조각에 금물을 도금하여 만든 패. 규장각을 출입할 때 쓰여졌음.
[주D-004]농어 순채 생각 없으리 : 향수(鄕愁)는 사람마다 다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진(晉)의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음. 《晉書 張翰傳》

[주D-005]편미 : 말채찍과 꾸미지 아니한 활. 왕의 행차 때 쓰던 도구들임.
[주D-006]능피 : 능견(綾絹)으로 만든 이불. 상서랑(尙書郞)으로서 입직(入直)한 사람에게 푸른색 비단 이불을 제공했다고 함. 《漢官典職儀》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4





 다산시문집 제14권


 
 발(跋)
갱재첩(賡載帖)에 발함

상(上 정조를 가리킴) 19년 봄 건륭(乾隆: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을묘년(1795)임. 2월에 대가(大駕)가 대비(大妃)를 모시고 화성(華城)에 거둥하여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陵)임)을 알현(謁見)하였다. 그리고 행궁(行宮)에 돌아와서 호종(扈從)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대비께 헌수(獻壽)한 다음 상이 시(詩)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밤에는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군대를 조련한 다음 상이 시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환궁(還宮)한 후 3월 상순(上旬)에 상이 태액정(太液亭)에서 꽃놀이와 낚시질을 하게 하고, 상이 시 한 수를 지은 다음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고, 며칠 뒤에는 세심대(洗心臺)에 거둥하여 꽃놀이하면서 상이 시 한 수를 지은 다음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신하 중에는 한두 번 화답한 자가 있고 두세 번 화답한 자도 있었으며, 끝까지 참여한 자는 나와 몇몇 사람이었다. 상이 여러 조각의 종이가 들쭉날쭉하다고 하여 나에게 한 종이에다 쓰라고 명하므로, 권축(卷軸)을 만들어 올린 것이 네 개였다. 얼마 후 규영부(奎瀛府)에 명하여 생생한 글자를 가지고 인쇄하여 바치게 하였는데, 책은 두 권이었다.
나는 삼가 생각하건대, 군도(君道)는 위에 높이 있는데, 신하가 아래에서 충(忠)ㆍ애(愛)의 뜻을 진달하지 못하면 천지(天地)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여 만물이 생(生)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빛나게 임어하시어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함으로써 조정이 이미 맑아지고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과 화락하게 연회(燕會)를 가지면서 소(韶 순 임금의 음악)ㆍ호(濩 탕 임금의 음악)를 먼저 듣고, 시골의 민요를 들은 다음 그것을 가지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좋아하는 심정을 표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외람되이 은총을 받은 전후로 하사받은 책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오래도록 전하여 어진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잘 만난 성대한 일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책뿐인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84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墓誌銘)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사(蔭仕)로 벼슬이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고,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용(鏞)을 낳으니 때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27년이었다.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고려 말엽에 배천에 살았는데, 본조(本朝 조선조를 말함)가 개국하여 도읍을 정하자 마침내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조상은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자급(子伋)이며, 이로부터 계승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언벽(彦璧), 병조 참의(兵曹參議)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峴)에 옮겨 살았는데 3세(世)가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부의 휘는 도태(道泰), 증조부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증조부만이 진사(進士)를 하였다.
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10세가 되어 비로소 학과에 힘썼는데 5년 간은 선고(先考)가 벼슬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냈으므로 용이 이 때문에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꽤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고, 또 시율(詩律)로 칭찬을 받았다.
15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마침 선고(先考)가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 이공 가환(李公家煥)이 문학으로 한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자부(姊夫) 이승훈(李承薰)이 또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모두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 익(瀷)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였다. 용(鏞)이 성호의 유저(遺著)를 보고는 흔연히 학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종 원년 정유에 선고(先考)가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가게 되어 그 이듬해에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하였다. 경자년(정조 4, 1780) 봄 선고가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겨져 그로 인해 드디어 진주(晉州)를 유람하고 예천으로 와서 황폐한 향교에서 독서하였다.
임인년(1782, 정조 6) 가을 봉은사(奉恩寺)에 깃들어 경의(經義)의 과문(科文)을 익히고, 계묘년(정조 9 1785) 봄에 경의로 진사(進士)가 되어 태학(太學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왕(王)이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를 내렸다. 이때 용의 벗 이벽(李檗)이 박아(博雅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함)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함께 의논하여 조대(條對)하였다. 그런데 이발(理發)ㆍ기발(氣發)에 대하여 벽은 퇴계(退溪)의 학설을 주장하였고, 용의 대답한 바는 우연히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珥)이 논한 바와 합치되었다. 주상이 보고 나서는 자주 칭찬하여 제일로 삼았다. 도승지(都承旨) 김상집(金尙集)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정모(丁某)가 이와 같은 포유(褒諭)를 얻었으니, 반드시 크게 떨칠 것이다.”
갑진년(1784, 정조 8) 여름 이벽(李檗)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에서 배를 내려 비로소 서교(西敎)를 듣고 한 권의 서적을 보았다. 그러나 오로지 변려문(騈儷文)을 공부하고 표(表)ㆍ전(箋)ㆍ조(詔)ㆍ제(制)를 익혀 수백 권을 수집하였다. 태학(太學)의 월과(月課)와 순시(旬試)에 번번이 고선(高選 높은 성적으로 선발됨)을 입어 서적과 지필(紙筆)을 상사(賞賜)받고, 근신(近臣)처럼 자주 사대(賜對)하여 등연(登筵)하니, 진실로 물외(物外)에 마음을 치달릴 겨를이 없었다.
정미년(1787, 정조 11) 이래 왕의 총애가 더욱 성대하였다.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강정(江亭)에 나아가 학업을 익혔다. 이기경 또한 서교(西敎)를 즐겨 들어 손수 1권을 뽑아 적었는데, 그가 갈라선 것은 무신년(1788, 정조 12)부터였다. 기유년(1789, 정조 13) 봄 용(鏞)이 표문(表文)으로 반시(泮試)에 수석을 차지하여 사제(賜第)받았고, 전시(殿試)에 나아가 갑과(甲科) 제2인을 차지하니, 희릉 직장(禧陵直長)을 제수하였다. 대신(大臣)의 초계(抄啓)로 규장각 월과문신(奎章閣月課文臣)에 들었다.
경술년(1790, 정조 14) 봄 용이 김이교(金履喬)와 한림(翰林)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는데, 이윽고 말썽이 있어 자퇴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월과(月課)에서 수석을 차지하니, 구마(廐馬)와 문피(文皮)를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왕이 내린 《모시강의(毛詩講義)》 8백여 조에 용이 대답한 것이 홀로 많은 점수를 얻었다. 어비(御批 임금의 비답)에,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蘊蓄)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랴.”
하고, 조목마다 평하고 장려하여 다 예기(預期)한 것보다 넘었다.
이때 호남(湖南)의 권상연(權尙然)ㆍ윤지충(尹持忠)의 옥사가 있었는데, 악인(惡人) 홍낙안(洪樂安) 등이 공모하여 이를 기화로 선류(善類)를 다 제거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에 번옹(樊翁 채제공(蔡濟恭)을 말함)에게 상서(上書)하기를,
“총명 재지(聰明才智)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열에 일여덟은 모두 서교에 젖어 장차 황건(黃巾)ㆍ백련(白蓮)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번옹을 시켜 공서(公署)에 앉아서 목만중(睦萬中)ㆍ홍낙안(洪樂安)ㆍ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그 허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기경이 대답하기를,
“그 서적에 간혹 좋은 곳이 있으므로 신이 이승훈과 일찍이 성균관에서 그 서적을 같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서적을 본 죄를 논한다면 신이 이승훈과 벌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하고, 곧 용에게 글을 보내어 그 대답하는 바에 권형(權衡 사물의 경중을 고르게 함)이 있음을 말하고 함께 구성(求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함)하자고 하였다. 용이 이치훈(李致薰)을 불러 말하기를,
“성균관에서 서교 서적을 본 것이 실로 취리(就理 죄 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음)할 일이니,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지 임금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이치훈은,
“밀고(密告)를 통해 이미 자수하였으니 옥사(獄詞)가 비록 차이나더라도 실로 임금을 속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밀고는 바른 것이 아니고, 옥사는 곧 임금에게 고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옥사만 볼 뿐이니 거실(巨室)과 명족(名族)의 공론(公論)이 두렵지 않습니까? 지금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고 정승이 정치를 보좌하니 이때에 미쳐서 종기를 터뜨리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치훈이 듣지 않았다. 이에 이승훈의 옥대(獄對)에서 ‘이기경(李基慶)이 사람을 무함했다.’고 말하여 마침내 백방(白放 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되었다.
이에 이기경이 초토신(草土臣 거상(居喪) 중임을 말함)으로 상소하여 대신이 일을 조사함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헐뜯고, 성균관에서 서교 서적을 본 일을 더욱 자세하게 증명하였다. 주상이 노하여 이기경을 경원(慶源)에 유배하니 방관자(傍觀者)는 이를 시원하게 여겼다. 그러나 용은 말하기를,
“그렇게 생각 마라. 우리들[吾黨]의 화(禍)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하였다. 용이 때때로 이기경의 집 이때 연지동(蓮池洞)에 있었다. 에 가서 그의 어린 자식을 다독거리고, 그의 어머니 상사에 1천 전(錢)을 부조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이 있었으나 이기경은 석방되지 못하였다. 용이 이익운(李益運)에게 말하기를,
“이기경이 마음씨는 불량하지만, 송사는 억울하게 졌습니다. 일시의 시원함이 다른날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주상께 들어가 고하여 석방시키는 게 낫습니다.”
하였다. 이익운은,
“내 의사도 이러합니다.”
하고, 드디어 내가 말한 대로 들어가 고하였더니, 주상이 특별히 기경을 석방하였다.
기경이 돌아온 지 이미 오래되어 차츰 조정 반열에 들어가니, 지구(知舊)들은 그와 함께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되 용만은 안부를 묻고 평소처럼 대하니 이른바 고구(故舊)란 그 고구된 것을 잃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이기경이 주모(主謀)하여 반드시 용을 죽이고야 말려고 하였다. 그러나 홍의호(洪義浩) 등 여러 사람들을 대할 적에 용에게 말이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니, 비록 대계(大計)에 몰린 바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 양심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이듬해 임자년(1792, 정조 16) 봄에 용이 홍문관에 뽑혀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어 내각(內閣 규장각)에 나아가 갱화한 시권(詩卷)을 편수하였다. 4월에 선고(先考)가 진주에서 연관(捐館 세상을 떠남)하였다. 급보를 듣고 운봉(雲峰)에 이르러 대성(戴星 밤낮 달림)하여 갔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충주에 반구(反柩)하고 장사를 마친 뒤에 마현(馬峴)에 반곡(反哭)하였다. 이때 주상이 연신(筵臣)을 통해 자주 존몰(存歿)을 물었다.
이해 겨울에 수원(水原)에 성을 쌓게 되었다. 주상이 이르기를,
“기유년(1789, 정조 13) 주교(舟橋)의 역사에 용(鏞)이 그 규제(規制)를 진달하여 사공(事功)이 이루어졌으니, 그를 불러 사제(私第)에서 성제(城制)를 조진(條陳)하도록 하라.”
하였다. 용이 이에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 문충공(柳文忠公) 성룡(成龍)의 성설(城說)에서 좋은 제도만 채택하여 모든 초루(譙樓)ㆍ적대(敵臺)ㆍ현안(懸眼)ㆍ오성지(五星池) 등 모든 법을 정리하여 진달하였다. 주상이 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ㆍ《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 인중법(引重法)ㆍ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용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써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주상이 일렀다.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계축년(1793, 정조 17) 여름에 채 문숙(蔡文肅 문숙은 시호) 제공(濟恭)이 화성 유수(華城留守)로서 들어와 영의정이 되어 상소하여 다시 임오년의 참인(讒人)을 논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말하기를,
“임오년의 연차(聯箚)가 있은 뒤에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 사람은 역적이다.”
하고, 채 문숙공을 극력 공격하였다. 주상이 영고(英考 영조를 말함) 금등(金縢)의 사(詞)를 내어 보임으로써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뛰어난 효도를 밝히니 아무 일이 없었다. 이때 홍인호(洪仁浩)가 한공 광전(韓公光傳)을 대해서 또한 문숙공(文肅公)의 소를 공격하였는데 망발된 말이 많았다. 그래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일제히 홍인호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인년(1794, 정조 18) 사건이다. 홍인호는 내가 논의를 주장한 줄로 의심하여 드디어 그와 틈이 있었는데, 그 뒤에 점차 저절로 의심이 풀렸으나 우리들의 참혹한 화는 대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갑인년 7월에 상을 마치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고 8월에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에 차임(差任)되었으며, 10월에 다시 옥당(玉堂)에 들어가 교리(校理)ㆍ수찬(修撰)이 되었다. 바야흐로 홍문관에 직숙(直宿)하다가 갑자기 왕지(王旨)를 받아 노량진별장 겸 장용영별아병장(露梁鎭別將兼壯勇營別牙兵將)으로 좌천되었다. 밤중에 침전(寢殿)에서 투자(投刺 윗사람을 볼 때에 미리 명함을 드림)를 행하였으니, 기실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에 명하였던 것이다.
이때 서 정승(徐政丞 서용보(徐龍輔)를 말함)의 가인(家人)으로 마전(麻田)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향교(鄕校)의 땅을 서 정승의 집에 바쳐 가성(佳城 묘지)으로 삼도록 도모하면서 거짓말로 땅이 좋지 못하다고 속이고, 향유(鄕儒)를 위협하여 학궁(學宮 향교의 별칭)을 옮기는데 이미 명륜당(明倫堂)을 뜯어버렸다. 용이 염탐해서 알고는 엄습하여 잡아서 징치(懲治)하였다.
또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칠중하(七重河) 연읍(沿邑)의 조속(糶粟 대여한 곡식)을 돈으로 만들어 고가(高價)로 거두고, 또 말하기를,
“이는 금천(衿川 시흥)의 도로 수치(修治)하는 비용이니, 조(糶)를 가볍게 하려 한들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소민(小民)들이 원망하여,
“괴롭다, 화성(華城)이여! 과천(果川)에도 길이 있는데 어찌하여 금천(衿川)으로 길닦이하는고.”
하였으니, 주상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침(陵寢)에 자주 거둥하였기 때문에 이런 번다한 비용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용이 돌아와서 이 일을 상주하였다.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삼고 지사(地師) 김양직(金養直)을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삼았는데, 모두 총애를 믿고 법을 범하여 탐욕함이 기탄이 없었다. 용이 탄핵하여 조율(照律)되었다.
12월에 주상이 명년에 장헌세자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기로 의논하였으니, 을묘년(1795, 정조 19)은 곧 장헌세자가 탄생한 회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비(太妃)와 태빈(太嬪)에게도 또한 존호(尊號)를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예조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채 문숙공(蔡文肅公)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용과 권평(權坪)은 도청랑(都廳郞)이 되었다.
이때 조신(朝臣)이 휘호(徽號) 8자(字)의 의(議)를 올렸는데 그 의에 금등(金縢)의 창효(彰孝)의 의(義)가 없으므로 주상이 개의(改義)하려 하나 탈잡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문숙공과 이가환(李家煥)에게 비밀히 자문을 구하니, 이 가환은,
“올린 휘호에 개운(開運)이란 글자가 있는데 이것은 석진(石晉)의 연호이니, 이것으로써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주상이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개의를 명하였다. 이에 휘호를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 올렸으니 ‘장륜 융범’이 곧 금등의 뜻이다.
대제학(大提學) 서유신(徐有臣)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또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응교(應敎) 한광식(韓光植)이 소를 올려 그 소루하고 잘못된 점을 논하였다. 주상이 한광식의 소를 도감제신(都監諸臣)에게 내려 개찬(改撰)하는 것이 마땅한지, 또는 혹 한두 구절만 고치는 것이 옳은지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때 도감제조 민종현(閔鍾顯)ㆍ심이지(沈頤之)ㆍ이득신(李得臣)ㆍ이가환(李家煥)이 모두 침음(沈吟 입속으로 웅얼거리어 깊이 생각함)하며 확정짓지 못했다. 용이 말하기를,
“모든 표전(表箋)이나 조고(詔誥) 등은 만일 그 자구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약간은 수정해도 되지만 지금 이 옥책문은 금등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명맥(命脈)이 도무지 잘못되었으므로 부득불 개찬하여 군부에게 근심을 끼침이 없어야 합니다.”
하였다. 도제조 채공이 드디어 개찬하기를 청하였다. 개찬하는 일이 끝나자 장차 봉함해서 바치려 하였다. 서리가 아뢰기를,
“태빈궁(太嬪宮)의 옥책금인(玉冊金印)은 장차 신근봉(臣謹封)이라 쓰리까? 아니면 신(臣)을 쓰지 않으리까?”
하였다. 채공이 의궤(儀軌)를 널리 상고하게 하였으나 모두 의거할 바를 얻지 못하여 한낮이 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용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근봉(臣謹封)이라 쓰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더니, 채공이 눈으로 주의를 주며 함부로 말하지 말게 하려 하였다. 민공(閔公)과 심공(沈公)이 말하기를,
“어째서인가?”
하기에, 용이 말하기를,
“지금 이 옥책ㆍ옥보(玉寶)ㆍ금인(金印) 등물을 도감제신(都監諸臣)의 이름으로 태비(太妃)와 태빈(太嬪)에게 올린다면, 조정에서 태빈께 평일에 칭신(稱臣)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신이라고 쓰지 않는 것이 가하지만, 지금 우리 제신이 주상의 명을 받들어 이 옥책 등물을 만들어 대전(大殿)께 올리면 대전은 스스로 그 효성으로 태비와 태빈께 바치는 것이니, 지금 우리가 대전께 어떻게 신이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채공이 크게 깨달아 좋다고 말하고, 온 좌중이 옳다고 일컬었다. 이날 모든 낭관(郞官)ㆍ서리(胥吏)로서 참관한 이는 모두 시원하게 여겼다.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다. 그 뒤 수일이 지나서 채공이 나에게 말하였다.
“신이라 쓰느냐 쓰지 않느냐 하는 것은 관계됨이 매우 크다. 추숭(追崇)하는 의의에 혐의로운 바가 있음을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었는데, 그 경위를 해석하는 말을 듣게 되어서야 개운해졌다.”
이때 내각학사(內閣學士) 정동준(鄭東浚)이 병이라 하고 집에 있으면서 음으로 조권(朝權)을 잡아 사방의 뇌물을 받아들이고, 귀신 명경(貴臣名卿)이 밤마다 백화당(百花堂)에 모여 연회를 베푸니 중외(中外)가 주목하였다. 용이 항상 정동준(鄭東浚)을 치고자 하다가 소를 초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내각(內閣)을 설치한 것은 곧 전하께서 선왕의 미덕을 계술(繼述)하고 문치(文治)를 떨치며 겸하여 원대한 정책을 담은 것입니다. 무릇 신료(臣僚)의 반열에 있는 이로서는 누가 우러러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뽑아 임명함에 있어 혹 적합한 사람이 아니고 총애가 그 분수에 넘침이 있으면 교만과 사치가 싹트고 비방과 물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각신(閣臣) 정 동준이 병이라 하고 집에 있으면서 밤낮없는 노고를 다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깁니다. 더구나 그 제택(第宅)이 제도에 넘치어 길가는 사람들도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이는 각신의 신분으로 아마도 좋은 소식이 아닌 듯합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조금 제재를 가하여 몸을 삼가고 분수를 지키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조야(朝野)의 의혹이 풀릴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에게도 복이 될 것입니다.”
갑인년 겨울에 다시 옥당에 들어갔으나 모두 곧 체직되어 그 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을묘년 봄 동준의 일이 발로되자 자결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정월에 특별히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곧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指)에 발탁되었으니, 도감(都監)의 공로 때문이다. 2월에 주상이 태빈(太嬪)을 모시고 또 군주(郡主)ㆍ현주(縣主)를 데리고 화성에 거둥하였다. 하루는 용에게 행장을 꾸리도록 명하였는데 그 직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특별히 병조 참의에 제수하여 시위(侍衛)로 따르도록 하였다. 화성에 있을 적에 잔치에 참여하여 갱화(和)하여 총애가 자못 깊었다. 환궁한 뒤에 병조의 직숙(直宿) 중 한밤에 칠언배율(七言排律) 1백 운(韻)을 짓게 하여 지어 올리니 주상의 뜻에 맞았다. 주상이 관각(館閣)의 학사(學士)들인 민종현(閔鍾顯)ㆍ심환지(沈煥之)ㆍ이병정(李秉鼎) 등에게 명하여 비평(批評)하여 올리도록 하고 내각학사(內閣學士) 이만수(李晩秀)를 시켜 낭독하도록 하고, 어비(御批)와 어평(御評)을 가하여 장유(獎諭)함이 융숭한 동시에 녹비(鹿皮) 1영(領)을 하사하여 영예스럽게 하였다. 주상이 근신(近臣)에게 일렀다.
“내가 장차 용을 관각(館閣)에 있게 하려고 짐짓 먼저 의사를 보이는 것이다.”
이해 봄에 용이 회시 일소(會試一所)의 동고관(同考官)이 되었는데, 방(榜)을 부르고 보니 남인(南人)으로 진사가 된 이가 50여 인이었다. 시배(時輩)들이 용이 사정을 두어 자기 편을 도와주었다고 그르게 퍼뜨렸다.
주상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서 하옥하여 10여 일에 이르고 책유(責諭)가 진첩(震疊 존귀한 사람이 몹시 성을 내어 그치지 아니함)하여 ‘방자무기(放恣無忌)하다.’하였다. 또 유시하기를,
“평생에 다시 주필(朱筆)을 잡지 못하리라.”
하고, 또 전조(銓曹)로 하여금 관직에 의망(擬望)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며칠 뒤에 주상이 춘당대(春塘臺)에 임어하여 선비를 시험보일 제 특별히 용을 명하여 대독관(對讀官)으로 삼으므로 용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상이 채홍원(蔡弘遠)에게 이르기를,
“내가 나중에 알고보니 남인이 합격한 자는 모두 이소(二所)에서였고, 정용(丁鏞)은 일소의 시험관이었으니 사정을 둔 일이 없었다.”
하고, 규영부(奎瀛府)에 들어가 이만수(李晩秀)ㆍ이가환(李家煥)ㆍ이익운(李益運)ㆍ홍인호(洪仁浩)ㆍ서준보(徐俊輔)ㆍ김근순(金近淳)ㆍ조석중(曺錫中) 등과 함께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짓게 하였는데, 용이 맡은 바가 특히 많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 상원(上苑)에 온갖 꽃이 활짝 피었다. 주상이 영화당(映花堂) 아래에서 말을 타고, 내각(內閣) 신(臣) 채제공(蔡濟恭) 이하 10여 인 및 신(臣) 용 등 6~7인이 모두 내구마(內廐馬)를 타고 호종하여 궁성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아서 도로 석거문(石渠門) 아래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돌아서 농산정(籠山亭)에 이르러 곡연(曲宴)을 베풀었다. 그리고 모든 금원(禁苑) 안의 수석(水石)과 화훼(花卉)의 승경(勝景)이나 비장된 궤안 도서(几案圖書)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윽고 또 어가(御駕)를 옮겨 서총대(瑞葱臺)에 이르러 주상이 활을 쏘고 신하들에게 구경하도록 하고 저녁 때에 부용정(芙蓉亭)에 이르러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그리고 용 등으로 하여금 태액지(太液池)에 배를 띄우고 분부에 응하여 시를 읊도록 하였다. 저녁 식사를 내린 뒤에 어촉(御燭)을 하사하여 원(院)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뒤 며칠이 지나서 주상이 세심대(洗心臺)에 거둥하여 꽃구경을 하였는데, 용이 또 시종하였다.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주상이 시를 읊고 여러 학사로 하여금 갱화(賡和)하게 하니, 내시(內侍)가 채전(彩牋) 1축(軸)을 올렸다. 주상이 용에게 어막(御幕) 안으로 들어와서 시를 쓰도록 명하였다. 용이 탑전(榻前)에서 붓을 뽑으니 주상은 지세가 고르지 못하다 하여 어탑(御榻) 위에 시축(詩軸)을 올려 놓고 쓰도록 명하였다. 용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니, 주상이 여러번 나오도록 명하였다. 용이 부득이 명대로 어탑에 나아가 붓을 휘둘러 써내려 가니, 주상이 가까이 다가와서 보고 잘 쓴다고 칭찬하였다. 그 대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變服) 차림으로 몰래 우리나라에 와서 북산(北山)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널리 선전하였다.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이를 알고 이석(李晳)에게 고하였는데, 용도 그 말을 들었다. 이석이 채상공(蔡相公 채제공을 가리킴)에게 고하니, 공은 주상에게 비밀히 고하였다. 그래서 주상은 포장(捕將) 조규진(趙奎鎭)에게 명하여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문모는 달아나고 최인길(崔仁吉)ㆍ윤유일(尹有一)ㆍ지황(池潢) 등 3인을 잡아 장살(杖殺)하였다. 목만중(睦萬中) 등이 뜬말로 선동질하여 이를 기회로 선류(善類)를 다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몰래 박장설(朴長卨)을 사주(使嗾)하여 소를 올려 이가환(李家煥)을 논하도록 하되, 무함하여 말하기를,
“정약전(丁若銓)의 경술년(1790, 정조 14) 대책(對策)에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하였으나, 이가환이 장원으로 뽑았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그 대책을 보고 그것이 무고임을 살펴 알고는 하유(下諭)하여 분변하고 박장설을 사예(四裔)에 유배(流配)하였다. 그러나 악당의 비어(飛語)는 날로 심하여졌다. 그래서 시재(時宰)와 세가(勢家)가 그 말을 익히 들었으므로, 이가환 등이 실지로 그 근기이어서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니 주상이 괴롭게 여겼다. 가을에 이가환을 내쳐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보임하고, 용은 금정역 찰방(金井驛察訪)에 보임하고 이승훈(李承薰)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하였다. 그리고 그날 하유하기를,
“그가 만약 눈으로 성인의 글이 아닌 서적을 보지 않고 귀로 경전(經典)의 뜻에 어그러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죄없는 그의 형이 어찌 공거(公車)에 올랐겠는가. 그가 문장을 하려 한다면 육경(六經)과 양한(兩漢)에 제대로 좋은 전지(田地)가 있는데, 반드시 기이함을 힘쓰고 새로움을 찾아서 몸과 이름을 낭패하기에 이르는 것은 또한 무슨 기욕(嗜慾)인가? 비록 종적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나 조야(朝野)에서 이런 소문을 얻었으니 이것이 곧 그의 단안(斷案)이다. 설사, 이미 선으로 향하였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스스로 분발하면 그에게 있어서 옥성(玉成)이 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전 승지 정용을 금정도 찰방으로 제수하니 길을 떠나면서부터 살아서 한강을 넘어올 방도를 도모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정역은 홍주 땅에 있으니, 역(驛)의 이속(吏屬)이 서교를 많이 익혔다. 주상의 의도는, 용으로 하여금 효유하여 그것을 금지하게 하려 한 것이다.
용이 금정에 이르러 호족(豪族)을 불러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 이르고 제사지내기를 권하니, 사림(士林)이 이 말을 듣고 면목이 일신되는 효험이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을 청하여 온양(溫陽)의 석암사(石巖寺)에 모였다. 이때 내포(內浦)의 명가의 자제로 이를테면 이광교(李廣敎)ㆍ이명환(李鳴煥)ㆍ권기(權夔)ㆍ강이오(姜履五) 등 10여 인이 또한 소문을 듣고 와서 모여 날마다 수사(洙泗)의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리고 성옹(星翁)의 유저(遺著)를 교정하고 10일 만에 파하였다. 또 북계(北溪) 윤취협(尹就協)과 방산(方山) 이도명(李道溟)을 방문하였으니, 모두 뜻이 있는 선비였다.
겨울에 특지(特旨)로 내직에 옮겨졌다. 이때 이정운(李鼎運)이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로 나갔다. 전 관찰사 유강(柳焵)이 이존창(李存昌)을 체포하고 용이 그를 잡는 일에 참여한 바가 있다 하여 용에게 공을 돌려 그 공으로 발탁되도록 하려 하였다. 주상이 듣고 이정운에게 밀유(密諭)를 내려 도임하는 즉시 주문(奏聞)하도록 분부하고, 용으로 하여금 이로 인하여 드디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이 또 주상의 유지를 전하되, 용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이정운에게 부치도록 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옳지 못합니다. 사군자(士君子)가 입신(立身)하여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비록 이 징옥(李澄玉)이나 이 시애(李施愛)를 잡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으로 공을 삼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이 이존창 같은 하찮은 자인데이겠습니까. 또 일찍이 계책을 내거나 세운 적이 없는데 지금 버젓이 그를 잡은 일을 과장하여 임금의 은혜를 요구하겠습니까? 죽어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주상의 뜻을 따름으로써 나로 하여금 부끄러워서 죽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였더니, 이 익운이 무색하여 갔다. 대개 이 때문에 주상의 뜻에 거슬렸다고 한다.
그 뒤 김이영(金履永)이 또 금정 찰방(金井察訪)에 보임되었다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용이 금정에 있을 적에 성심껏 서교의 무리를 깨우치고 금지하였으며 또 벼슬살이함에 있어 청렴하고 근신하였습니다.”
하고, 심환지(沈煥之)가 주달하기를,
“정용(丁鏞)이 군복(軍服)의 일로 인하여 특명으로 정망(停望 허물 있는 사람에게 벼슬시키는 일을 정지함)되어 지금까지 풀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쓸 만하고 또 금정에서 깨우치고 금지한 바가 많았으니, 다시 수용(收用)하소서.”
하니, 주상이 윤허하였다.
병진년(1796, 정조 20) 봄 형조의 녹계(錄啓)로 인하여 하유하기를,
“요즘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외직에 보임된 찰방(察訪)이 내포(內浦) 일대를 성심껏 가르치고 금지한 일로 괄목(刮目)할 만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하고, 특별히 중화척(中和尺)을 내리고 이어서 어시(御詩) 2수를 내려 용에게 갱화(賡和)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가을에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을 보내어 《규장전운옥편(奎章全韻玉篇)》의 의례(義例)를 이가환 및 용에게 물었다. 겨울이 되자 용을 불러 규영부(奎瀛府)에 들게 하여 이만수(李晩秀)ㆍ이재학(李在學)ㆍ이익진(李翼晋)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하고 자주 사대(賜對)하고 서명(書名)을 의정(議定)하였다. 날마다 진기한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또 쌀ㆍ시탄(柴炭)ㆍ꿩ㆍ젓갈ㆍ감ㆍ귤 등속 및 기향 진물(奇香珍物)을 자주 하사하였다. 12월 병조 참지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옮겨지고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정사년(1797, 정조 21) 봄 대유사(大酉舍)에서 사대(賜對)하고 선반(宣飯)한 다음, 화식전(貨殖傳)ㆍ원앙전(袁盎傳)의 의의(疑義)를 하순(下詢)하였다. 명을 받들고 외각(外閣)에 나아가 이서구(李書九)ㆍ윤광안(尹光顔)ㆍ이상황(李相璜) 등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교정하였다. 또 명하여 반시대독관(泮試對讀官)으로 삼고 하유(下諭)하여 주필(朱筆)을 잡고 시권(試券)을 고평(考評)하게 하였으니, 모두 특이한 은총이었다. 6월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본말(本末)을 환하게 진술하여 비방을 초래하게 된 이유를 아뢰었으니, 대략에,
“말이 박절하지 않게 하여 ‘책을 보았다.[看書]’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책을 보는 데에만 그쳤다면 어찌 갑자기 죄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으로 흔연히 좋아하고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거론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 심술에도 일찍이 기름이 배어들고 물이 스며들며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우거지듯 하였으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반복하여 수천 글자로 지어 설명하였더니 주상이 비답하기를,
“선단(善端)의 싹이 애연(藹然)하기가 마치 봄에 훈김이 돌아 만물이 자라나는 것과 같아서 종이 가득히 스스로 열거하니 말이 족히 듣는 이를 느끼게 할 만하다.”
하고, 연신(筵臣)들도 또한 용을 위해 말하는 자가 많으니, 주상이 가장(嘉獎)하였다.
마침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폄체(貶遞 강등되어 갈림)되었다. 주상이 어필(御筆)로 용의 이름을 써서 제수하므로 용이 폐사(陛辭)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저번날의 소는 문사(文詞)가 좋고 심사(心事)가 밝았으니 실로 쉽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일단 진용(進用)하려 하나 의논이 매우 많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한두 해 늦더라도 손상될 것이 없다.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이때 당시 귀신(貴臣)들로서 참소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으니, 주상의 의사는 용으로 하여금 외직에 수년 간 있게 함으로써 냉각기를 두려 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주상이 김이교(金履喬)ㆍ김이재(金履載)ㆍ홍석주(洪奭周)ㆍ김근순(金近淳)ㆍ서준보(徐俊輔) 등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사기선(史記選)》을 찬주(纂註)하게 하였는데 찬주가 올려지자, 그 번다한 것을 못마땅히 여겨 산정(刪正)하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주상이 이르기를,
“곡산은 한가한 고을이니, 가서 그 찬주를 산정하라.”
하였다. 용이 명을 받고 물러나서는 공문서를 살피는 여가에 깊이 연구하여 수정하였다. 책이 완성된 뒤에 내각(內閣)을 통하여 올렸더니, 이만수가 회보하였다.
“책이 상주되자 주상의 뜻에 맞았다.”
곡산 백성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자가 있었는데, 본성이 백성의 폐단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전관(前官) 때에 포수보(砲手保) 면포 1필을 돈 9백 전(錢)으로 대징(代徵)하였다. 이계심이 소민(小民) 1천여 인을 거느리고 관부(官府)에 들어가서 다투었다. 관에서 그를 형벌로 다스리려 하니, 1천여 인이 벌떼처럼 이 계심을 옹위하고 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떠드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이노(吏奴)가 막대를 휘두르며 백성을 내쫓으니 이계심은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오영(五營)에서 수사하였으나 그를 잡지 못하였다.
용이 경내에 이르니, 이계심이 민막(民瘼) 10여 조를 쓴 소첩(訴牒)을 가지고 길 옆에 엎드려 자수하였다. 좌우에서 그를 잡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이미 자수하였으니 스스로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이윽고 석방하면서 말하였다.
“관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한 계책을 잘하여 폐단을 들어 관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천금(千金)으로 사들여야 할 것이다.”
이에, 무릇 경영(京營)에 상납하는 포목은 용이 친히 면전에서 재어 보고 받았다. 향교에 《오례의(五禮儀)》가 있었는데, 포백척도(布帛尺圖)가 실려 있었다. 그것을 시용척(時用尺)과 비교해 보니 2촌(寸)이 차이가 났다. 이에 도(圖)를 상고하여 자를 만들어 기필코 경영(京營)의 동척(銅尺)과 합치시켜 백성의 포목을 받아들이니, 백성이 편리하게 여겼다. 그 이듬해 포목이 더욱 귀하여졌다. 용이 칙수전(勅需錢) 및 관봉전(官俸錢) 2천여 냥을 내어 관서(關西)에서 포목을 사서 경납(京納)에 충당하고 그 대가를 백성에게서 거두어 갚으니, 모두 2백 전에 불과하므로 백성들은 집에 송아지 한 마리를 얻었다고 하였다.
국법(國法)에 모든 창고 곡식은 반드시 순(巡)을 나누어 나눠주도록 하니 혹 8~9순에 이르렀다. 용이 매양 하루에 서너 향(鄕)의 백성을 불러 일시에 다 바치게 함으로써 그 항례(恒例)의 비용을 줄이고 그 내왕을 간편하게 하였다.
무오년(1798, 정조 22) 겨울에 양곡의 수납을 거의 마치자, 장재신(掌財臣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주달하여 곡산의 미곡 7천 석을 팔아 작전(作錢)하기를 청하였다. 이해는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어 쌀값이 1섬[斛] 15두(斗)에 2백 전에 불과한데 상정가(詳定價)는 4백 20전이었다. 용이 이해(利害)를 조목조목 열거하여 상사(上司)에 보고하고, 백성에게 독촉하여 다 수납하게 한 다음 양곡은 창고에 봉하여 두고 기다렸다. 정공(鄭公)이 아뢰기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기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청하고 전하께서 윤허하시고 감사가 포고하였는데, 수령이 완악하게 따르지 않으니 어찌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정약용을 죄주어 후인을 징계하소서.”
하니, 주상이 원보(原報)를 가져다 보고 일렀다.
“옛날 장재신(掌財臣)은 팔도(八道)의 시장 가격을 두루 알아, 천하면 사들이고 귀하면 파는 것이 법이었다. 지금 경이 천한 곡식을 팔아 귀한 돈을 장만하려 하니, 용이 따르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무릇 호적 정리 기간이 되면 아전이 백성을 을러서 호수를 늘리니,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뇌물을 바쳐 호구를 늘임이 없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피폐한 마을은 날로 조잔(凋殘)해지고 부유한 마을은 날로 넉넉해져서 백성의 재용이 고르지 않았다. 용이 먼저 침기부(砧基簿)를 작성하여 종횡표(縱橫表)를 만들고, 또 지도를 작성하여 경위선(經緯線)을 두어 백성의 허실 강약(虛實强弱) 및 지역의 활협 원근(濶狹遠近)을 두루 알았다. 이 때문에 적감(籍監)ㆍ적리(籍吏)를 파하고 관에서 부유한 마을과 잔폐한 마을에 따라 신축성 있게 호구를 증감(增減)하니, 호액(戶額)이 다 실정에 맞았다. 며칠이 못 되어 호적 단자(戶籍單子)가 일제히 도착하였는데, 한 사람도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없었다.
향갑(鄕甲)이 군정(軍丁)을 천보(薦報)할 적마다 용이 그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것을 미리 알고서 곧 소리에 응하여 꾸짖기를,
“아무 백성은 새로 모군(某郡)으로부터 와서 홀아비에 다리 병신인데 무슨 방법으로 군포(軍布)에 응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향갑이 깜짝 놀라며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는 모두 침기표(砧基表)를 이용하여 알게 된 것이고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절도사(節度使) 정학경(鄭學畊)이 신칙하여 허록(虛錄)ㆍ백골(白骨)의 군정(軍丁)을 찌붙이게 하므로, 용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입니까? 군포(軍布)는 허록(虛錄)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고 군첨(軍簽)은 백골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니, 절대로 일을 만들지 마시오.”
하였더니, 정(鄭)이 깨닫지 못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군포계(軍布契)가 있고 역근전(役根田)이 있으니 이것이 호포(戶布)입니다. 호포란 국가에서 서둘러 시행하려 하던 바이었으나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백성이 스스로 행하는데 무엇하러 이를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정당(政堂)을 세우고 공해(公廨)를 수리하는 데에 제고(諸庫)ㆍ제청(諸廳)의 사례와 절목(節目)을 가져다가 죄다 폐기(廢棄)하고 새로 조례(條例)를 세워 행하였다. 이전에는 비용이 부족할 적마다 다시 민호(民戶)에서 거두어 들였는데 이로부터 충족하여 여유가 있었다. 그뒤에 수령이 그것을 고치려는 자가 있으면 이민(吏民)이 모두 불가하다고 고집하므로 마침내 한 조목도 고치지 못하였다.
무오년(1798, 정조 22) 늦겨울에 역질(疫疾)이 서로(西路)로부터 들어왔다. 용이 먼저 병에 결렸고, 읍중의 늙은이가 이 병에 걸리면 반드시 죽고 마니, 며칠이 안 되어 곡소리가 온 경내에 진동하였다. 용이 백성에게 권하여 서로 치료하게 하고 미곡으로 그 위급함을 구휼하며 또 주인 없는 시체를 장사지내 주었다. 새해가 되자 용이 바야흐로 이불을 쓰고 있으면서 칙수 감리(勅需監吏)를 재촉해 불러 배천(白川) 강서사(江西寺)에 빨리 가서 젖은 땅에 깔 문석(紋席)을 사오라고 명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깨닫지 못하고, 칙사(勅使)가 오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니니 어서 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감리(監吏)가 배천에 가서 문석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평산부(平山府)에 이르니, 의주의 파발마(把撥馬)가 나는 듯이 달려 지나가며,
“황제가 붕서(崩逝)하여 칙사가 온다.”
하였다는 것이었다. 감리가 돌아오자 온 부중(府中)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용이 말하였다.
“이상할 것이 없다. 병이 서방으로부터 와서 노인이 모두 죽으니, 이 때문에 알았다.”
봄에 가함(假銜)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황주 영위사(黃州迎慰使)가 되어 황주에 50일 동안 머물렀다. 주상이 밀유(密諭)로 용에게 도내 수령의 선악과 빈객 접대하는 모든 폐해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수령으로서 수령을 염찰(廉察)하는 것은 또한 드문 일이었다.
이에 앞서 도내에 의옥(疑獄)이 2건 있었는데 용이 밀주(密奏)하였더니, 주상이 감사에게 하유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용을 차임(差任)하여 조사하게 하여 두 옥사가 모두 해결되었다.
마침 여름 가뭄이 들었다. 주상이 여러 옥사(獄事)를 심리하고자 하였는데 용의 옥사(獄詞)가 뜻에 맞는다 하여 마침내 병조 참지에 제수하였다. 올라오는 도중에 동부승지에 제수하고, 도성에 들어오니 형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어연(御筵)에 나아가니, 주상이 형조 판서 조상진(趙尙鎭)에게 일러 말하기를,
“경은 지금 늙었고 참의는 연소하고 꽤 총명하니 경은 편히 쉬고 일체 참의에게 맡기도록 하오.”
하였다. 판서가 이 하유를 받고는 모든 옥사의 처결을 일체 용에게 위임하였는데 용이 평번(平反)한 바가 많았다.
어떤 백성 하나가 억울하게 옥사에 걸리었는데 이미 늙어서 밝히려 하지 않았다. 용이 초검(初檢)ㆍ복검(覆檢)의 공안(公案)을 거슬러 상고하여 그 원통함을 밝혀내니, 주상이 곧 형조(刑曹)의 뜰에서 의관(衣冠)을 주어 백방(白放)하도록 명하였다.
무신(武臣) 이성사(李聖師)가 여종 하나를 샀었는데, 이성사가 죽자 송사가 있었다. 마침 대간(臺諫)의 말이 있어 주상을 격노시켰다. 주상이 명하여 그 손자 모(某)를 잡아서 형장(刑杖)으로 1백대를 때려 문초하게 하고, 천위(天威)가 매우 진첩(震疊)하여 그 고문하는 상황을 살피게 하니 온 조중(曹中)이 두려워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진실로 고문으로 혹독하게 하면 죽을 뿐이니, 선비를 죽이는 것은 성상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주의시켜 곤장 수만 채운 다음 무죄함을 주달하였더니, 주상의 뜻이 풀어졌다.
어떤 간민(奸民) 하나가 공물(貢物)을 거듭 팔고 핑계하기를,
“주권(朱券)은 화성(華城)에 있어서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이었다. 용이 국문하기를,
“하찮은 소민이 감히 화성을 빙자하여 성사(城社)로 삼으려 하니 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틀 만에 주권(朱券)이 이르렀다.
하루는 주상이 이르기를,
“네가 해서(海西)로부터 왔으니 읍폐(邑弊)와 민막(民瘼)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므로, 용이 초도(椒島)에 방목하는 소의 일에 대해 주달하였더니, 주상이 곧 하유하여 우적(牛籍)을 다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또 칙사(勅使) 영접에 대한 모든 폐단을 주달하였더니, 주상이 이르기를,
“이상 시수(李相時秀)가 원접사(遠接使)를 갓 지냈으니 가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낭비될 만한 것은 모두 보고하여 없애도록 명하였다.
이때 주상의 권주(眷注 왕이 특별히 돌보심)가 날로 깊어져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가 시기하였다. 홍시보(洪時溥)가 용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삼가시오. 내 하인에 옥당(玉堂)의 서리를 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정공(丁公)의 야대(夜對)가 파하지 않으면 옥당이 서리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고 조심하여 잠을 못 잔다.’ 하니, 그대가 견딜 수 있겠소?”
하였다. 얼마 못 가서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권철신(權哲身)을 계론(啓論)하고 드디어 용의 형도 논급하였다. 아룀이 끝나기도 전에 주상이 노하여 견책(譴責)하였는데, 조보(朝報)에도 싣지 않아 용은 알지 못하였다.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이 또 용이 혐의를 무릅쓰고 행공(行公)한다고 논하였다. 그래서 용이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더니, 한 달이 넘어서야 체직되었다.
겨울에 서얼(庶孼) 조화진(趙華鎭)이란 자가 상변(上變)하기를,
“이가환과 정용 등이 음으로 서교(西敎)를 주장하여 불궤(不軌 모반)를 도모하는데, 한영익(韓永益)이 그의 심복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그것이 무고임을 살피고 변서(變書)를 이가환 등에게 선시(宣示)하고 또 이르기를,
한영익이 북산(北山)의 일을 고발하였는데, 어떻게 복심이 될 수 있으랴.”
하였다. 그리고 각신(閣臣) 심환지(沈煥之)와 충청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모두 무고(誣告)라 하니 그 일이 정지되었다. 조화진이 한영익에게 구혼(求婚)한 적이 있는데, 한영익이 듣지 않고 그의 누이동생을 용의 서제(庶弟) 황(鐄)에게 출가시켰었다. 이 때문에 한영익을 죽이기를 도모하면서 용에게까지 미치도록 한 것이다.
주상이 매양 한 질의 책을 다 읽고 나면 태빈(太嬪)이 음식을 갖추어 세서례(洗書禮)를 행하여 여염의 어린아이들의 풍속을 따르니 주상이 이를 위해 시를 짓고 용으로 하여금 갱화(賡和)하게 하였다.
경신년(1800, 정조 24) 봄 용이, 참소하고 시기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전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를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옛마을로 돌아갔다. 며칠이 못 되어 주상이 듣고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재촉하여 불렀다. 신이 조정에 돌아오자, 주상이 승지를 통하여 하유하였다.
“규영부(奎瀛府)는 지금 춘방(春坊)이 되었으니, 처소가 정해지기를 기다려서 모름지기 들어와 서적을 교정하라. 내가 어찌 그를 버리겠는가.”
6월 12일 달밤에 한가로이 앉았는데,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맞아들이니 곧 내각의 서리였다. 《한서선(漢書選)》 10건을 가지고 와서 하유(下諭)를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를 불러 서적을 편찬하려 한다. 주자소(鑄字所)를 새로 개수하여 벽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믐께라야 들어와서 등연(登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며, 자상히 위문해 주셨다. 또 이르기를,
“이 《한서선》 5건은 가전물(家傳物)로 남겨 두고, 5건은 제목을 써서 도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내각의 서리가 말하기를,
“하유하실 때에 안색이 몹시 그리워하시고 사지(辭旨)가 온순(溫諄)하였으니,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서리가 나간 뒤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동요되어 스스로 편치 못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옥후(玉候 임금의 안후)가 편치 못하여 28일에 이르러 주상이 마침내 승하하였다. 바로 그날 밤 서리를 보내어 서적을 하사하고 존문(存問)한 것이 드디어 영결(永訣)이 되었으니, 군신(君臣)의 정의가 그날 저녁에 영원히 종결된 것이다. 용이 매양 이 일에 생각이 미칠 적마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금할 수 없었다. 승하하던 날에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가슴을 치며 목놓아 통곡하였다. 찬궁(欑宮)을 바르던 날 숙장문(肅章門) 옆에 앉아 조석중(曺錫中)과 슬픔을 말하였다.
공제(公除)한 뒤 점차 들리는 말은 악당이 기뻐 날뛰며 날마다 유언 비어와 위태로운 말을 지어내어 듣는 자들을 의혹시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이가환(李家煥) 등이 장차 난을 일으켜 4흉(凶)ㆍ8적(賊)을 제거하려 한다.”
라고까지 하였다. 그 4흉ㆍ8적의 명단은 매양 반은 당시 재상과 명사를 열거하고, 반은 스스로 그들의 붕당(朋黨)으로 숫자를 채워 시배(時輩)들의 노여움을 격동시켰다.
용은 화색(禍色)이 날로 급해짐을 헤아리고는 곧 처자를 마현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시변(時變)을 살피고 있었다. 겨울에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 한강 가 소내[苕川]로 아주 돌아오고 삭망(朔望)에만 곡반(哭班)에 나아갔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태비(太妃)가 하유(下諭)하여, 코를 베어 멸망시키겠다[劓殄滅之]는 경계가 있었다.
정월 그믐날에 이유수(李儒修)ㆍ윤지눌(尹持訥)이 편지로 책롱(冊籠)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으므로 용이 빨리 말을 달려 도성에 들어갔다. 이른바 책롱은 곧 5~6인의 문서가 혼잡된 것인데 그 가운데 용의 집 서찰(書札)이 들어 있었다. 윤행임(尹行恁)이 그 상황을 알고서 이익운(李益運)과 의논하고 유원명(柳遠鳴)을 시켜 상소하여, 용을 나문(拿問)하기를 청함으로써 화봉(禍鋒)을 누그러뜨리려 하였고, 최헌중(崔獻重)ㆍ홍시보(洪時溥)ㆍ심규(沈逵)ㆍ이석(李晳) 등도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극력 권하여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용은 모두 듣지 않았다.
2월 8일에 양사(兩司)가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정용ㆍ이승훈을 국문하기를 청하니 모두 하옥하고, 용의 형 약전(若銓)ㆍ약종(若鍾) 및 이기양(李基讓)ㆍ권철신(權哲身)ㆍ오석충(吳錫忠)ㆍ홍낙민(洪樂敏)ㆍ김건순(金健淳)ㆍ김백순(金伯淳) 등이 모두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문서 더미 가운데 도리어 용의 누명을 밝게 벗길 만한 증거가 많았으므로 곧 형틀을 벗기고 금부(禁府) 안에서 보방(保放)되었다. 여러 대신이 때때로 나를 불러 함께 옥사를 의논하였다. 위관(委官)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곧 백방(白放)할 것이니 식사를 많이 들고 자중하라.”
하고,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허, 혼우(婚友 혼인한 집안의 벗)여! 믿을 수 없군.”
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이서구(李書九)와 승지 김관주(金觀住)가 평번(平反)하여 너그러이 용서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참국 승지(參鞫承旨 죄인 국문에 참여하는 승지) 서미수(徐美修)는 기름파는 노파를 몰래 불러 옥(獄)의 사정을 용의 처자에게 통지하여, 용의 죄정(罪情)이 가벼워서 죽을 염려가 없음을 알게 하고, 식사를 많이 들며 살라고 권하였다.
여러 대신이 모두 백방(白放)하기를 의논하는데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그래서 용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定配)되고 그의 형 약전(若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定配)되었으나 약종(若鍾) 및 나머지는 모두 중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오직 이기양은 단천(端川)으로 귀양가고, 오석충(吳錫忠)은 임자도(荏子島)로 귀양갔다.
이때 악당(惡黨)이, 용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 흐트러진 문서 더미 가운데 삼구(三仇)의 설을 찾아내어 어거지로 정씨(丁氏)의 집 문서로 정하고 또 무함하여 드디어 약종(若鍾)에게 극률(極律)을 가하여 용의 재기(再起)의 길을 막았다. 이 삼구(三仇)의 설은 고(故) 익찬(翊贊) 안정복(安鼎福)의 저서에 분명 삼구(三仇)의 해설이 있으니, 그것이 무함임이 분명하다. 이해 여름에 옥사가 더욱 만연되어 왕손(王孫) 인(裀), 척신(戚臣) 홍낙임(洪樂任),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이 모두 사사(賜死)되었다.
용이 장기(長鬐)에 이르러서는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짓고, 《삼창고훈(三倉詁訓)》을 고증하고, 《이아술(爾雅述)》 6권을 짓고, 끊임없이 시를 읊으면서 스스로 소일하였다.
겨울이 되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었다. 악인 홍희운(洪羲運)과 이기경(李基慶) 등이 온갖 계책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들어가기를 요구하고, 발계(發啓)해서 용 등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여 반드시 죽이고야 그만두려 하였다. 홍희운이란 홍낙안(洪樂安)의 변명(變名)이다.
이때 정일환(鄭日煥)이 해서(海西)로부터 돌아와서 용이 해서 지방에 유애(遺愛)가 있으므로 죽여서는 안 됨을 극력 말하고, 또,
“죄수의 초사(招辭)에 나오지 않으면 발포(發捕)하는 법이 없다.”
하고, 심환지에게 동요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심환지가 이에 태비(太妃)에게 청하니, 태비가 윤허하였다. 봄에 대계(臺啓)가 있었다. 이에 약전ㆍ용 및 이치훈(李致薰)ㆍ이관기(李寬基)ㆍ이학규(李學逵)ㆍ신여권(申與權) 등이 또 체포되어 옥에 들어갔다. 위관(委官)이 흉서(凶書)를 용에게 보였다. 용이 말하였다.
“역변(逆變)이 이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도 또한 어찌하여 생각이 미치지 않습니까?”
무릇, 서양 서적을 한 글자라도 본 사람은 죽음은 있어도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을 안험(按驗)해 보니 모두 그들과 관여된 형상이 없고 또 여러 대신들도 입수한 문서를 보니, 예설(禮說)ㆍ이아설(爾雅說) 및 전에 지은 시율(詩律)이 있는데, 모두 안한(安閒)하고 정밀하며 적과 교통한 흔적이 없었으므로 마음에 불쌍히 여겨 그 무죄함을 입주(入奏)하였다. 태비도 대계(臺啓)가 무고임을 살피고 6인을 아울러 작방(酌放 참작하여 놓아줌)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호남(湖南)은 아직 남은 걱정거리가 있다 하여, 용을 강진현(康津縣)에 정배하여 진정하게 하고, 약전(若銓)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도 모두 양남(兩南 호남과 영남)으로 정배하였다.
이때 윤영희(尹永僖)가 용의 생사를 알려고 대사간 박장설(朴長卨)을 방문하여 옥정(獄情)을 묻는데, 홍희운이 마침 오므로 윤영희가 피하여 협실(夾室)로 들어갔다. 홍희운이 말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와서는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천 사람을 죽이더라도 용을 죽이지 않으면 죽이지 않느니만 못한데, 공은 어찌 힘껏 간쟁(諫爭)하지 않습니까?”
하니, 박장설이 말하기를,
“그가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죽이겠소.”
하였다. 홍희운이 가고 나서 박장설이 윤영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답답한 사람이오. 죽일 수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큰 옥사를 다시 일으키고 또 나에게 간쟁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구려.”
용이 강진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아 걸고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다.
임술년(1802, 순조 2) 여름에 현감 이안묵(李安黙)이 또 하찮은 일로 무고하였는데 사실이 없자 곧 중지되었다.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특명으로 용과 채홍원(蔡弘遠)을 같이 석방하려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저지하였다.
무진년(1808, 순조 8)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화목(花木)을 벌여 심고 물을 끌어들여 비류폭포(飛流瀑布)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암(東庵)과 서암(西庵) 두 암자를 수리해 1천여 권이나 장서하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박(尹博)의 산정(山亭)이었다.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2자를 새겨 표지하였다.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 용의 아들 학연(學淵)이 징을 울려 나라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더니, 형조 판서 김계락(金啓洛)이 상재(上裁 주상의 재결)를 청하여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다. 그런데 홍명주(洪命周)가 소를 올려 그것이 불가함을 논하고 또한 이기경이 발론한 바의 대계(臺啓)가 있어서 끝내 석방되지 못하였다.
갑술년(1814, 순조 14) 여름 대신(臺臣) 조장한(趙章漢)이 정계(停啓 전계(傳啓) 가운데 죄인의 이름을 삭제함)하니, 금부(禁府)에서 관문(關文)을 보내려다가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지독하게 말하므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집두(李集斗)가 두려워하여 감히 보내지 못하였다. 무인년(1818, 순조 18) 여름 응교(應敎)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대계가 정지되었는데도 금부의 관문을 보내지 않는 것은 국조(國朝) 이래에 없던 일이니, 유폐(流弊)가 무궁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상신 남공철(南公轍)이 금부의 제신(諸臣)을 나무라니, 판의금부사 김희순(金羲淳)이 곧 관문을 보내었다. 그래서 용이 향리에 돌아오게 되니 곧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무인년 9월 보름날이다.
당초 신유년(1801, 순조 1) 봄 옥중에 있을 적의 일이다. 하루는 시름에 젖어 있는데 꿈에 한 노부(老父)가 꾸짖기를,
소무(蘇武)는 19년 동안 참았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가?”
하였다. 그때 옥에서 나오게 되어 계산해 보니 옥에 있은 지 19일이었고, 또 향리로 돌아오게 되어 계산해 보니 경신년(1800, 정조 24)에 유락(流落)한 뒤부터 또 19년이었다. 그러니 인생의 비태(否泰 막힘과 트임)함이 정명(定命)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향리로 돌아오자, 서용보가 바야흐로 서쪽 이웃에 물러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고 친절한 뜻을 표했다. 기묘년(1819, 순조 19) 봄 다시 상부(相府)에 들어갔는데, 가고 옴에 있어 모두 위문하고 은근한 뜻을 전하였다. 겨울에 조정의 논의가 경전(經田)하는 일에 용을 다시 쓰려하여 논이 이미 정해졌는데, 서용보가 극력 저지하였다.
이해 봄 용이 배를 타고 습수(濕水)를 거슬러 충주(忠州)의 선산을 성묘(省墓)하고, 가을에 용문산(龍門山)에 노닐었다. 경진년(1820, 순조 20) 봄 배를 타고 산수(汕水)를 거슬러 올라가 춘천(春川)의 청평산(淸平山)에 노닐고, 가을에 용문산에 노닐어 산택(山澤) 사이를 소요(逍遙)하며 세월을 보냈다.
용이 해상(海上 강진을 말함)으로 유배되어 가서 생각하기를 ‘소싯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0년 동안 세로(世路)에 빠져 다시 선왕(先王)의 대도(大道)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 여가를 얻게 되었다.’ 하고 드디어 흔연히 스스로 경하하였다.
그리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침잠(沈潛)하여 탐구하고, 한위(漢魏) 이래로 명청(明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유자(儒者)의 학설로 경전(經典)에 보익이 될 만한 것은 널리 수집하고 두루 고증하여 오류를 정하고 취사(取捨)하여 일가(一家)의 서(書)를 갖추었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정조를 말함)이 비정(批定)한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을 머리로 삼고 따로《강의보(講義補)》 3권을 짓고, 또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상례외편(喪禮外編)》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악서고존(樂書孤存)》 12권, 《주역심전(周易心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권,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당대학강록(熙政堂大學講錄)》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을 지었는데, 이상은 경집(經集)으로 모두 2백 32권이다.
《시(詩)》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시(詩)란 간림(諫林)이다. 순(舜) 임금 때 오성(五聲)육률(六律)로 오언(五言)을 받아들였으니, 오언이란 육시(六詩) 중의 다섯 가지이다. 풍(風)ㆍ부(賦)ㆍ비(比)ㆍ흥(興)이 아(雅)와 함께 다섯인데 묘송(廟頌)은 포함하지 않았다. 이를 악관(樂官)이 조석으로 풍송(諷誦)하였다. 노래(歌)란 금슬(琴瑟)에 창화(唱和)하여 왕으로 하여금 그 선(善)을 듣고 감발(感發)하며 그 악을 듣고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詩)의 포폄(褒貶)이 《춘추(春秋)》보다 더 엄하여 임금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시(詩)가 없어져서 《춘추》가 지어졌다고 한 것이다. 풍ㆍ부ㆍ비ㆍ흥은 풍자(諷刺)한 것이고, 소아(小雅)ㆍ대아(大雅)는 바른말로 간한 것이다.
《서(書)》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매색(梅賾)의 《상서(尙書)》 25편은 위작(僞作)이다. 《사기(史記)》ㆍ《전한서(前漢書)》ㆍ《후한서(後漢書)》 및 《진서(晉書)》ㆍ《수서(隋書)》의 유림전(儒林傳)과 경적지(經籍志)를 상고해 보니 그것이 위작임이 현저하여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선기옥형(璇璣玉衡)이란 하늘을 형상한 의기(儀器)가 아니고, 우공(禹貢)의 3지적(底績)은 9년에 3번 고적(考績)한 것이고,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는 정전(井田)의 형태이므로 2와 8이 서로 응하고 4와 6이 서로 이어 받는다.
예(禮)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정현(鄭玄)의 주석은 전습(傳襲)의 오류가 없지 않건만, 선유(先儒)가 성경(聖經 성인의 경전)처럼 받드니 그것은 잘못이다.
상의광(喪儀匡)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질병(疾病)이란 목숨이 이미 끊어진 것이고, 남녀 개복(男女改服)이란 담소(淡素)한 의복(衣服)으로 고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자ㆍ제후(諸侯)의 상(喪)에는 먼저 성복(成服)하고 뒤에 대렴(大斂)을 하며, 천자ㆍ제후ㆍ대부(大夫)ㆍ사(士)는 각기 말우(末虞)졸곡(卒哭)으로 삼으니 졸곡에는 따로 제(祭)가 없다. 부(祔)란 신도(神道)로써 합부(合祔)할 뿐이요, 주(主)에 합부하거나 묘(廟)에 합부하는 것은 아니다. 길제(吉祭)란 사시(四時)에 상례(常例)로 행하는 일이요, 소목(昭穆)을 심정하는 것은 아니다.
상구정(喪具訂)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모(冒)이금(夷衾)과 같고 자루[橐]에 넣는 것이 아니다. 악수(握手)는 둘이 아니고 가운데를 흰 댕기로 매어 둘이란 것을 상징한 것이다. 이미 엄수(掩首)가 있는 만큼 복건(幅巾)은 폐기해야 한다. 그러나 수첩(竪㡇 세로로 세운 옷깃 끝)은 불가하고 횡첩(橫㡇 가로로 뻗은 옷깃 끝)을 만들어야 한다. 심의(深衣)는 12폭인데 앞이 3폭이고 뒤가 4폭임은 다른 아래옷과 같이 하며, 그 3폭은 앞 옷깃에 겹치고 폭은 두 겨드랑 아래에 주름잡혀[袧] 들어간다. 구변(鉤邊)이란 곧 구변(袧邊)이다. 수장납거(遂匠納車)는 널을 싣는 것이다. 신거(蜃車)란 신회거(蜃灰車)로 네 바퀴가 땅에 닿는 것은 바른 제도가 아니다.
상복상(喪服商)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수질(首絰)을 맞잡아 맨 것이 마땅히 목 뒤에 있어야 한다. 만약 맺음이 좌우(左右)에 있으면 곧 왼쪽 머리[本]는 왼쪽 끝을 겸하고 오른쪽 머리는 오른쪽 끝을 겸한다. 요질(要絰)수갈(受葛)해야 세 가닥[三糾]이 있는 것이니 교대(絞帶)를 세 겹으로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상관(喪冠)무(武)가 있으니, 참(斬)에도 베 한 가닥 끈으로 무(武)를 삼는 것은 예가 아니다. 오복(五服)최(衰)는 모두 제복(祭服)을 본뜬 것이니, 최(衰)란 방심(方心)이고 적(適)이란 곡령(曲領)이고 부(負)란 후수(後綬)이다. 벽령(辟領)에 조각하는 것은 예제(禮制)가 아니고 경복(輕服)에 최(衰)ㆍ적(適)ㆍ부(負)를 버리는 것은 예가 아니다. 대하척(帶下尺)횡란(橫幱)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임(衽) 바로 옆에 연미(燕尾)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소렴(小斂) 때의 환질(環絰)은 곧 조복(弔服)의 갈질(葛絰)이다. 천자(天子)가 국군(國君) 이하를 조문할 때 모두 환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군(君)ㆍ대부(大夫)ㆍ사(士)가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
소렴에는 곧바로 규질(繆絰)을 착용한다. 질(絰)은 둘이 없는 것이다.
상기별(喪期別)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기년상(期年喪)에는 11개월 만에 연(練)을 하니, 조부모ㆍ백숙부모(伯叔父母)ㆍ형제ㆍ형제의 아들을 위하여도 모두 연(練)이 있어야 한다. 연(練)을 하지 않는 경우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어머니를 위해 연(練)을 하게 되면 그 복(服)이 도리어 가벼워져서이다. 남의 계자(繼子)가 된 자는 그 본생(本生)의 조부모나 백숙부모를 위하여 불강복대공(不降服大功)을 입고, 강복(降服)하는 경우는 형제로부터 그 이하이니, 마융(馬融)의 유의(遺義)이다. 남의 계자가 되는 자는 혹 아우가 형의 후사가 되기도 하고, 혹 손자가 조부의 후사가 되기도 하므로 명칭은 변하지 않고 자기 부모를 부모로 한다. 조부모를 위하여 승중(承重)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망이 소렴(小斂)ㆍ즉위(卽位)의 예(禮)를 치르기보다 앞서 있는 경우에는 승중(承重)하고, 소렴ㆍ즉위의 예를 치르기보다 뒤에 있는 경우에는 승중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조부가 살아있는데 조모가 죽은 자는 승중하지 않는다. 첩자(妾子)의 아들이 그 첩조모(妾祖母)를 위하여 승중하지 않는다. 천자ㆍ제후의 상에는 모후(母后)도 참죄(斬衰)를 한다. 소원(疎遠)한 자로서도 모두 참(斬)을 하니 친근한 자는 먼저 참(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례고정(祭禮考定)》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제후(諸侯)ㆍ나라의 대부(大夫)의 제사는 3세(世)를 넘을 수 없다. 태조(太祖)는 옮기지 않는 것이니, 별묘(別廟)에 옮길 수 없다. 지자(支子)는 제사를 받들지 않는 것이니. 최장방(最長房)이 신주를 옮겨 모시는 것은 예가 아니다. 대부는 제사를 두 차례 지낼 뿐, 사시(四時)에 거행할 수는 없다. 합호(闔戶)상제(殤祭)의 예이니 이미 유식(侑食)하고 삼헌(三獻)을 하였으니 또 합호(闔戶)해서는 안 된다.
태뢰(太牢)소뢰(小牢)특생(特牲)특돈(特豚)에는 그 변두궤형(籩豆簋鉶)의 수효는 각각 정례(定例)가 있으니, 삼례(三禮 《예기(禮記)》ㆍ《주례(周禮)》ㆍ《의례 (儀禮)》)와 《춘추(春秋)》에 간혹 보인다. 군(君)ㆍ대부ㆍ사(士)가 각기 차등이 있으니 마음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또 술잔[爵]과 국그릇[鉶]ㆍ조[俎]는 기수(奇數)를 사용하고 궤(簋)와 변두(籩豆)는 우수(偶數)를 사용하니,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악(樂)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오성(五聲)과 육률(六律)은 곧 한가지 물건이 아니다. 육률로 악기를 제작하니 악가(樂家)의 선천(先天)이고 오성으로 가락을 나누니 악가의 후천(後天)이다. 추연(鄒衍)ㆍ여불위(呂不韋)ㆍ유안(劉安) 등의 ‘율을 불어 소리를 정한다.[吹律定聲]’는 사설(邪說)을 분변하였다.삼분 손익(三分損益)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과 괘기 월기(卦氣月氣)정반 변반(正半變半)의 설은 모두 취하지 않는 바이다. 육률을 각각 3등분하여 1분을 빼어 육려(六呂)를 낳는 것은 영주 구(怜州鳩)의 대균(大均)ㆍ세균(細均), 3기(三紀)ㆍ6평(六平)의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다.
《역(易)》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역(易)에 세 가지 오의(奧義)가 있으니, 첫째 추이(推移), 둘째 효변(爻變), 셋째 호체(互體)이다. 12벽괘(辟卦)로써 사시(四時)를 상징하고 중부괘(中孚卦)와 소과괘(小過卦)로써 두 윤월(閏月)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추이(推移)하여 50연괘(衍卦)를 만드니 이것을 추이라 한다.
건괘(乾卦) 초구(初九)란 건괘가 구괘(姤卦)로 변[之]한 것이다. 손괘(巽卦)는 입(入)과 복(伏)이 되기 때문에 잠룡(潛龍)이라 한 것이다. 건괘(乾卦) 구사(九四)란 건괘가 소축괘(小畜卦)로 변한 것이다.
손(巽)이 다리[股]가 되니, 아래에서 위로 오르므로 혹약(或躍)이라 한 것이다.
곤괘(坤卦) 초륙(初六)이란 곤괘가 복괘(復卦)로 변한 것이다. 1음(陰)이 비로소 교합(交合)하여 장차 순건(純乾)이 되고, 건(乾)은 괘상이 얼음이 되므로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履箱堅氷至]’ 한 것이니, 이것을 효변(爻變)이라 한다.
태괘(泰卦)의 두 호괘(互卦)가 곧 귀매괘(歸妹卦)가 된다. 4효(爻)가 동하면 또 임괘(臨卦)가 되므로 ‘펄펄 날아서 자기가 부유하지 아니함은 다 부자인 실지를 잃었기 때문이다.[翩翩不當皆失實也]’ 한 것이다. 비괘(否卦)의 두 호괘(互卦)가 곧 점괘(漸卦)가 된다. 5효(爻)가 동하면 또 중간(重艮)이 되므로 ‘망할까 망할까 두려워하여야 뽕나무에 맨다.[其亡其亡繫于桑也]’한 것이다. 물(物)을 잡(雜)함과 덕(德)을 찬(撰)함이 모두 호상(互象)에서 취하였으니, 이것을 호체(互體)라 한다.
세 가지 오의(奧義)가 갖추어져 물상(物像)이 묘합(妙合)하고, 세 가지 오의가 갖추어져 승강(升降)ㆍ왕래ㆍ소장(消長)ㆍ기멸(起滅) 등 오만 변화가 그 안에 붙여 있는 동시에 성인의 정(情)이 사(辭)에 나타난다. 팔(八)을 팔(八)로 곱[乘]하는 것은 목강(木强 변통수 없음을 말함)의 사법(死法)이다.
시괘(蓍卦)의 수는 하늘에서 천수(天數 홀수)를 취하고 땅에서 지수(地數 짝수)를 취하였다. 천수(天數) 1(3)에 지수(地數) 2(2×2=4)이면 소양(少陽) 칠(七)이 되고, 지수(地數) 1(2)에 천수 (天數)2(3×2=6)이면 소음(少陰) 팔(八)이 된다. 그리고 천수(天數)가 3(3×3=9)이면 노양(老陽) 구(九)가 되고, 지수(地數) 3(3×2=6)이면 노음(老陰) 육(六)이 된다. 노양(老陽)ㆍ노음(老陰)은 변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구(九)와 육(六)을 효(爻)라 한다. 6획(畫)은 효가 아니고 6획의 동(動)이 효가 된다.
역괘(易卦)에 있어서 반대(反對)되는 경우란 역(易)의 차례이다. 그 반대가 없는 것은 또 도체(倒體)에서 취하였으므로 대과괘(大過卦)는 전도(顚倒)되었다고 하고 전도하여 기르나 길하다[顚頭吉也] 하였고, 감괘(坎卦)의 육삼효(六三爻)가 손괘(巽卦)의 들어옴[入]이 되고,이괘(離卦)의 초구효(初九爻)가 진괘(震卦)의 도체(倒體)가 된다는 것이다.
역(易)에는 역수(逆數)가 있고 본디 순수(順數)는 없다. 선천도(先天圖)의 괘위(卦位)는 이치에 합하지 않으니, 주자(朱子)가 ‘왕자합(王子合 자합은 우(遇)의 자(字))에게 답한 편지’에 드러내 밝힌 바가 있다.
《춘추》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제후(諸侯)가 주왕(周王)의 정월(正月)을 받든 것은 예(禮)이다. 비록 주(周) 나라가 쇠퇴하였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주왕의 정월을 써야 한다. 그리고 당시의 열국(列國)이 하(夏) 나라 역법(曆法)을 혼용하였으므로 ‘여름에 온(溫)의 보리를 취하고 가을에 성주(成周)의 벼를 취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왕정월(王正月)’이라고 써서 자월(子月)이 됨을 밝힌 것이다.
한 글자의 포장[褒]이 혹 선은 같으나 용례(用例)가 다르고 한 글자의 폄출[貶]이 혹 악은 다르나 용례는 같았다. 하오(夏五)의 유는 사서(史書)의 궐문(闕文)을 따른 것이니 선유(先儒)처럼 곡해할 필요가 없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 사책(史策)의 단행본임)는 춘추의 전(傳)이 아니니. 그 경의(經義)를 해석 한 것은 한유(漢儒)가 몰래 증보한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을 폐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제(郊祭)는 상제(上帝)를 제사하는 것이니 오방(五方)의 상제(上帝)를 제사하는 것은 한유(漢儒)가 진(秦) 나라 사람의 오류를 답습한 것이다. 체(禘)란 오제(五帝)의 제사이니, 《주례(周禮)》에 체(禘)라 말하지 않았는데 ‘오제(五帝)를 제사한다.[祭五帝]’ 한 것이 체(禘)이다. 그러므로 관사보(觀射父)가 매양 체(禘)ㆍ교(郊)에 관한 일로써 연달아 말한 것이다. 동지(冬至)에 원구(圜丘)에 지내는 제사는 별도로 회례(禬禮)이고 곧 교외(郊外)에서 하늘을 제사하는 제례가 아니다. 춘추 시대에는 상기(喪期)가 변하지 않았는데, 두예(杜預)양암(諒闇)의 뜻을 세워 단상(短喪)의 잘못을 문식(文飾)하였으니 따를 수 없다.
《논어(論語)》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의(異義)가 더욱 많다. 이를테면 효제(孝弟)는 바로 인(仁)이니, 인(仁)이란 총명(總名)이고 효제는 분목(分目)이다. 인(仁)은 효제로부터 비롯되므로, 인(仁)의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이다.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있음으로써 남극(南極)을 바로 하니 인주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상징이다. 한 마음이 바름으로써 백관과 만민이 함께 운화(運化)되니 이른바 ‘모든 별이 함께 돈다.’는 것이다. 공(拱)을 ‘향하다'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없는 말이다. '털이 붉고 뿔이 났다.[騂且角]’ 한 것은 소의 천품(賤品)이다. 소는 유생(黝牲)을 귀히 여기고 견율(繭栗)을 귀히 여기고 악척(握尺)을 귀히 여긴다. 이를테면, 붉고 뿔이 난 것은 산천(山川)의 제사에 돌릴 뿐이다. 중궁(仲弓)의 어짊이 백우(伯牛)만 못하므로 폄하(貶下)하지만 그대로 존속시킨 것이다.
곡삭(告朔)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곡삭(告朔), 둘째 제삭(祭朔), 셋째 시삭(視朔)이다. 네 번 시삭(視朔)하지 않았으나, 제사는 거른 적이 없는 것이다. 네 번 시삭하지 않았는데 그를 몰라서 ‘백년 동안 시삭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치에 당치 않다. 사당[廟]에 제사하는 희생(犧牲)을 희(餼)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희(餼)란 빈희(賓餼 손님에게 대접하는 고기 등을 말함)이다. 주실(周室)이 쇠미해져서 왕인(王人)이 제후(諸侯)에게 곡삭(告朔)을 다시 반포하지 못하였으므로 자공(子貢)이 그 희양(餼羊)을 없애 버리려 한 것이다.
동주(東周)란 동로(東魯)의 은어(隱語)이다.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계씨(季氏)를 배반하여 공실(公室)을 유지하려 하였으므로, 공자(孔子)가 공실(公室)을 옮기고 비읍(費邑)에 웅거하여 동로(東魯)로 삼기를 동주(東周)처럼 하려 한 것이다.
승당(升堂)이란 당산악(堂山樂)이니 아송(雅頌)이 그것이요, 입실(入室)이란 방중악(房中樂)이니 이남(二南)이 그것이다. 자로(子路)의 슬(瑟)은 아송(雅頌)은 잘하나 이남(二南)은 잘하지 못하므로 부자(夫子 공자를 말함)가 비유한 것이다.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본 것괴외(蒯聵)를 불러와서 모자(母子)의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도록 권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대부(大夫)가 소군(小君 제후(諸侯)의 부인)을 만나보는 일은 당시의 항례(恒禮)였다.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란 성품(性品)의 명칭이 아니다. 선(善)을 지키는 사람은 비록 악한 사람과 서로 가까이 지내도 습관이 변해지지 않으므로 상지(上智)라고 이름한 것이고, 악(惡)을 편안히 여기는 사람은 비록 선한 사람과 서로 가까이 지내도 습관이 변해지지 않으므로 하우(下愚)라 이름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성이 원래 변하지 않는 품등(品等)이 있다고 한다면, 주공(周公)이,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고 한 것은, 성(性)을 모르고 한 말이 되는 것이다.
영 무자(甯武子)가 처음에 위 성공(衛成公)을 따라 몸이 젖고 발이 부르트도록 갖은 험난을 겪었으니, 이것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직한 충성이요, 성공(成公)이 초(楚)에서 환국(還國)하여 공달(孔達)이 정치를 하게 되어서는 권요(權要)의 자리를 피하였으니, 이것은 자신을 편안히 하고 집을 보전하는 지혜이다. 자신을 편안히 하는 지혜는 오히려 따를 수 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직함은 따를 수 없다. 지금 도회(韜晦 재지나 학식을 감추는 것)하는 것으로써 어리석음으로 여긴다면 인주(人主)가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구제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맹자(孟子)》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천자(天子)의 신하가 천승(千乘)을 소유할 수 있다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이 각각 천승을 얻으니 남는 바는 천승뿐이다. 천자가 구신(九臣 삼공(三公)ㆍ육경(六卿))과 각각 천승을 얻으면 10경(卿)의 녹봉(祿俸)이 아닌 소재(小宰)ㆍ소사도(小司徒) 이하는 또 조그마한 녹봉도 받을 수 없다. 만승(萬乘)이란 진(晉)ㆍ제(齊) 등속이고 한(韓)ㆍ위(魏)ㆍ조(趙)ㆍ전씨(田氏 전화(田和)가 세운 제(齊)) 등은 곧 천승의 집[家]으로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니, 맹자가 본디 연(燕)과 제(齊)를 만승의 나라로 여긴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정치로써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바로 흉년에 진구(賑救)하는 유이고 한 고조(漢高祖)와 송 태조(宋太祖)처럼 도륙(屠戮)을 즐겨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이른 것은 아니다.
하후씨(夏后氏)는 50묘(畝)를 경작하고 은(殷)나라 사람은 70묘(畝)를 경작하였다는 것은, 도랑을 메우고 밭두둑을 헐어 정전(井田)을 고쳐 만든 것은 아니다.
이 기(氣)는 의(義)와 도(道)를 짝하니 의와 도가 없으면 기가 쭈그러든다고 한 것은, 여자약(呂子約)과 이숙헌(李叔獻)의 유의(遺義)이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이다. 형체의 기호가 있고 영지(靈智)의 기호가 있으니, 다같이 성(性)이라 한다. 그러므로 《서경(書經)》 소고(召誥)에 ‘성을 절제하라.’하였고, 《예기(禮記)》왕제(王制)에 ‘백성의 성을 절제케 한다.’ 하였고, 《맹자(孟子)》에는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을 참는다.[動心忍性]’고 하였고, 또 이목(耳目)과 구체(口體)의 기욕(嗜欲)을 성(性)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형체의 기호이다. 하늘이 부여한 것이 성(性)이라는 성(性)과 천도(天道)ㆍ성선(性善)ㆍ진성(盡性)의 성(性)은 곧 영지(靈知)의 기호이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원래 불서(佛書)에서 나와서 우리 유가(儒家)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 서로 빙탄(氷炭)의 처지이니,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서(恕)를 힘쓰고 인(仁)을 구하라는 경계이다. 자식의 도리, 아비의 도리, 형ㆍ아우ㆍ남편ㆍ아내ㆍ손ㆍ주인의 도리로 경례(經禮) 3백 가지와 곡례(曲禮) 3천 가지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니 자신에 돌이켜 성실하면 곧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와서 천하가 다 인(仁)으로 돌아오는 것이요, 만물(萬物)은 일체이고 만법(萬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맹자(孟子)가 성(性)을 논함에 있어 이목(耳目)과 구체(口體)에까지 아울러 논급하였으니, 이(理)는 논하고 기(氣)는 논하지 않은 병통은 없다. 왕망(王莽)과 조조(曹操)는 기질(氣質)이 대체로 청(淸)하고, 주발(周勃)과 석분(石奮)은 기질이 대체로 탁(濁)하다. 선악(善惡)은 힘써 행하는 데에 달려 있지 기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용(中庸)》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순(舜) 임금이 명하여 악(樂)을 맡겨서 주자(冑子)를 가르치되 곧되 온화하며 너그럽되 씩씩하며 강하되 포악하지 말며 간이하되 거만하지 말라고 한 것과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 국자(國子)를 가르치되 그들로 하여금 중화(中和)하고 지용(祗庸)하게 한 것이 곧 유법(遺法)이고, 고요(皐陶)가 구덕(九德)으로 사람을 쓴 것주공(周公)이 입정(立政)에서 구덕의 행실을 충실히 행할 줄 알았다고 한 것이 곧 그 유법(遺法)이며, 《서경》 홍범(洪範)에 ‘높고 밝은 이는 유(柔)로 다스리고, 깊고 잠긴 이는 강(剛)으로 다스린다.[高明柔克 沈潛剛克]’는 것은 모두 중화(中和)의 뜻이고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允執厥中]’한 것은 오히려 대강(大綱)을 말한 것이다.
용(庸)이란 항구히 끊어지지 않는 덕이다. '도(道)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용(庸)이고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은 지가 오래다.’는 것은 용이고 ‘한 달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은 용이고 ‘나라에 도가 행해져도 궁색(窮塞)했던 때의 마음가짐을 변치 않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죽어도 지조를 변치 않는다.’는 것은 용이고 ‘군자(君子)가 도에 좇아 행하다가 중도에서 폐하고 말기도 하는데 나는 하다 말 수는 없다.’ 한 것은 용이고 ‘평상(平常)의 덕을 행하고 평상의 말을 삼간다.’는 것은 용이고 ‘지극한 정성은 그침이 없다. 그치지 않으면 영구하다.’ 한 것은 용이고 ‘문왕(文王)의 순일(純一)함도 또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용이며 '회(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두고 인(仁)을 어기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하루 아니면 한 달 동안 인(仁)에 있을 뿐이다.’한 것은 용이고 '제대로 종일토록 제(帝 하늘)의 열어 줌을 힘쓰지 아니한다.’고 한 것은 용이다. 곧 고요(鼻陶) 구덕(九德)의 조목에서 ‘그 유상(有常)을 빛내소서.’라고 끝맺음하였고, 《서경(書經)》 입정(入政)의 구덕(九德)의 경계에 거듭 말하기를, ‘오직 상덕(常德)으로 하라.’ 하였고, 《역경(易經)》항괘(恒卦)에 ‘능히 중(中)에 오래한다.’ 하였는데 모두 중용(中庸)의 의(義)이다. 중(中)을 하되 능히 용(庸)을 하면 성인일 따름이다.
보지 못한다[不睹]는 것은 곧 내가 보지 못하는 바이고 듣지 못한다[不聞]는 것은 곧 내가 듣지 못하는 바이니, 하늘의 일이다. 은(隱)이란 하늘의 체(體)이고 미(微)란 하늘의 자취[跡]이다. 은암(隱暗)하되 은암한 곳보다 더 드러나는 곳은 없고, 미세하되 미세한 일보다 더 뚜렷해지는 일은 없으므로 두려워하고 삼간다. 하늘이 앎이 없다고 여기므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한다.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발(發)하지 않았다.’는 말은 평거(平居)의 항경(恒境)이고 심지(心知)와 사려(思慮)가 발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그물ㆍ덫ㆍ함정[罟獲陷阱]’이란 유사(有司)에게서 받는 형벌의 화가 아니다. 소은(素隱)이란, 까닭없이 은거(隱居)함을 말함이고, 백이(伯夷)나 태백(泰伯)처럼 인륜(人倫)의 변고를 만난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고치면 그친다.[改而止]’란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보되, 길면 고치고 짧으면 고치고 크면 고치고 작으면 고치어, 예전 도끼자루와 같아진 뒤에 그만두는 것이다. 사람의 강서(强恕)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사람으로서 허물을 고치게 함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다.
도심(道心)ㆍ인심(人心)은 《도경(道經)》에서 나왔고 유일(唯一)ㆍ유정(唯精)은 《순자(荀子)》에서 나왔으니, 의가 서로 연결될 수 없다. 도(道)와 인(人)의 사이에 그 중(中)을 잡을 수 없다. 전일하고 나서 정밀한 것이고 양쪽을 잡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大學)》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태학(太學)이란 주자(冑子)와 국자(國子)의 학궁(學宮)이다. 주자(冑子)와 국자(國子)는 아랫사람을 대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이 있으므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하는 방책을 가르친 것이고, 서민(庶民)의 자제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명덕(明德)이란 효(孝)ㆍ제(弟)ㆍ자(慈)이고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이란 근본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이 있는 사물(事物)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란 그 먼저하고 나중할 바를 아는 앎을 투철히 하는 것이다. 성(誠)이란 사물의 마침과 비롯함을 말함이니 뜻을 성실하게 함[誠意]이 나아가서 위에 있게 된 까닭이다. 정심(正心)이란 곧 몸을 닦음이다. 몸에 노여워하는 바를 둔다.[身有所忿懥]는 글의 몸이니 고칠 수 없다.
'늙은이를 늙은이로 여긴다.[老老]’는 것은 태학에서 천자가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이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긴다.[長長]’는 것은 태학에서 세자(世子)가 어른에게 공경하는 것이고, ‘고자(孤子)를 불쌍히 여긴다.[恤孤]’는 것은 태학에서 고자를 잔치하는 것이다. 백성은 나면서 욕심이 있으니 부(富)와 귀(貴)다. 군자는 조정에 있으면서 귀히 되기를 목표하고, 소인은 초야에 있으면서 부자되기를 목표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씀에 있어 공정하지 아니하여, 어진이를 어진이로 여기고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지 않으면 군자가 떠나가며, 재부(財賦)를 거두어들임에 있어 절도없이 하여 백성의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삼고 백성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으면 소인이 배반하는 동시에 나라도 따라서 망한다. 그러므로 편말(篇末)에 거듭 되풀이하여 이 두 가지의 일을 경계한 것이다.
선왕(先王)의 도(道)를 배우는 소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마음의 허령(虛靈)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감히 본연(本然)이라 하지 못하고 ‘비롯함이 없다.[無始]’라고 하지 못하고 순선(純善)이라 하지 못한다. 마음의 기관은 생각[思]이니, 발(發)하지 아니한 그 이전의 기상을 돌이켜 보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선(善)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은 재질(才質)이고, 선해지기는 어렵고 악해지기는 쉬운 것은 형세이고,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성(性)이다. 이 성(性)을 따라서 어김이 없으면 도를 향해 갈 수 있으므로 성선(性善)이라 한 것이다.
두 사람[二人]이 인(仁)이 된다.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는 것이 인(仁)이고 형을 공손으로 섬기는 것이 인이고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 인이고 벗과 신의로 사귀는 것이 인이고 백성을 자(慈)로 다스리는 것이 인이며, 동방(東方)이 물(物)을 낳는 이치와 천지(天地)의 지공(至公)한 마음은 인(仁)이라고 주해(註解)할 수 없다. 서(恕)를 힘써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데에 그보다 가까운 길은 없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도(道)를 배움에는 일관(一貫)으로 답하였고,자공(子貢)이 도(道)를 물음에는 일언(一言)으로 답하였다. 경례(經禮) 3백과 곡례(曲禮) 3천이 서(恕)로써 일관된다. 인(仁)을 함이 자기에게서 비롯되나니,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는 것이 곧 공문(孔門)의 바른 뜻이다. 성(誠)이란 서(恕)를 성실히 행하는 것이고 경(敬)이란 예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인을 하는 것은 성(誠)과 경(敬)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삼가서 상제(上帝)를 밝게 섬기면 인(仁)을 할 수 있거니와 태극(太極)을 헛되이 높여서 이(理)를 하늘로 삼으면 인을 할 수 없고 하늘만 섬기는 데에 돌아가고 말 뿐이다.
처음에 용(鏞)이, 역(易)을 익히고 예(禮)를 연구하여 모든 경서(經書)에까지 미쳤는데, 한 가지를 깨달을 적마다 마치 신명(神明)이 말없이 깨우쳐 줌이 있는 것과 같아서 남에게 고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형 전(銓)이 흑산도(黑山島)에서 귀향살이하고 있었다. 한 편(編)이 이루어질 적마다 보이면, 형은 보고 말하였다.
“네가 이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너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이다. 아, 도(道)가 천년 동안 없어져서 온갖 부(蔀)로 가려져 있으니, 헤쳐내고 끓어내어 그 가려진 것을 환하게 하는 것이 어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랴.”
《시경(詩經)》 판장(板章)에,
“하늘이 백성을 깨우침이 훈(壎)과 지(篪)가 어울리듯 하네.”
하였으니, 성(性)이 기호(嗜好)임을 알겠고 인(仁)이 효제(孝弟)임을 알겠고 서(恕)가 인(仁)의 방도임을 알겠고 하늘이 강림(降臨)하여 살핀다는 것을 알겠다. 경계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서 몸이 늙어지는 것도 모르는 것이 하늘이 용(鏞)에게 내려준 복이 아니겠는가?
또 내가 지은 시율(詩律) 18권이 있는데 산정(刪定)하면 6권은 될 수 있고, 잡문(雜文)으로 전편(前編)이 36권이고 후편(後編)이 24권이며, 또 잡찬(雜纂)이 있는데 문목(門目)이 각각 다르다.
《경세유표(經世遺表)》가 48권이니 편찬의 일을 마치지 못하였고, 《목민심서(牧民心書)》가 48권이고 《흠흠신서(欽欽新書)》가 30권이다.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는 30권인데 완성되지 못하였고,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0권, 《전례고(典禮考)》 2권, 《대동수경(大東水經)》 2권, 《소학주관(小學珠串)》 3권,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의령(醫零)》 1권이다. 이를 통틀어 문집(文集)이라 하니, 모두 2백 60여권이다.
경세(經世)란 무엇인가? 관제(官制)ㆍ군현지제(郡縣之制)ㆍ전제(田制)ㆍ부역(賦役)ㆍ공시(貢市)ㆍ창저(倉儲)ㆍ군제(軍制)ㆍ과제(科制)ㆍ해세(海稅)ㆍ상세(商稅)ㆍ마정(馬政)ㆍ선법(船法)ㆍ영국지제(營國之制 도성을 경영하는 제도) 등을 시용(時用)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 우리의 오랜 나라를 새롭게 하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목민(牧民)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법을 인하여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율기(律己)ㆍ봉공(奉公)ㆍ애민(愛民)을 기(紀)로 삼고, 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을 6전(典)으로 삼고, 진황(振荒) 1목(目)으로 끝맺음하였다. 편(篇)마다 각각 6조씩을 통섭(統攝)하되 고금(古今)을 조사하여 망라하고, 간위(奸僞)를 파헤쳐 내어 목민관(牧民官)에게 주니, 한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입는 자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용(鏞)의 마음이다.
흠흠(欽欽)이란 무엇인가? 인명(人命)에 관한 옥사는 잘 다스리는 자가 적은 것 같다. 경사(經史)로써 근본을 삼고 비의(批議)로써 보좌를 삼으며 공안(公案)을 증거로 삼되 다 상정(商訂 헤아려 평함)하여 옥관(獄官)에게 주어서 원왕(冤枉)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용의 뜻이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고 1표(表)와 2서(書)로써 천하ㆍ국가를 다스리니, 본말(本末)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이는 많으니, 만약 천명(天命)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횃불로 태워버려도 좋다.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니, 아버지는 덕렬(德烈), 조부는 두서(斗緖), 증조부(曾祖父)는 이석(爾錫)인데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이다. 아내는 풍산 홍씨(豊山洪氏)이다. 아버지는 화보(花輔)이니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경북 절도사(慶北節度使)이고, 조부는 중후(重厚)이ወ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이며, 증조부는 만기(萬紀)이니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이다.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요사(夭死)한 자가 3분의 2이다. 아들로 맏이 학연(學淵)이요, 다음은 학유(學游)이며,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학연의 아들은 대림(大林)이다.
용(鏞)은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임오년(1762, 영조 38)에 태어나서 지금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임오년(1822, 순조 22)을 만났으니, 한 갑자(甲子) 60년은 모두 죄와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지난날을 거두어서 정리하고 일생을 다시 시작하니, 금년부터 정밀히 닦고 실천하며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드디어 집 뒤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광(壙)의 형태를 그어놓고 그 평생의 언행(言行)을 대략 기록하여 광중(壙中)의 지문(誌文)으로 삼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네가 네 선행(善行) 기록하되 / 爾紀爾善
연편 누독(連篇累牘) 장황하니 / 至於累牘
네 숨은 사특(邪慝) 기록하면 / 紀爾隱慝
책에 다 적을 수 없으리 / 將無罄竹
너는 말하기를, 나는 / 爾曰予知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을 안다 하지만 / 書四經六
그 행실 상고하면 / 考厥攸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 能不傀忸
너는 명예 구하나 / 爾則延譽
찬양은 없도다 / 而罔贊揚
몸으로 증명하여 / 盍以身證
나타내고 빛내지 아니하랴 / 以顯以章
네 분운함을 거둬들이고 / 斂爾紛紜
네 창광함을 중지하라 / 戢爾猖狂
힘써 상제(上帝)를 밝게 섬겨야 / 俛焉昭事
마침내 경사 있으리라 / 乃終有慶


보유(補遺)


경술년(1790, 정조 14) 겨울 명을 받아 밤에 상의원(尙衣院)에 있으면서 《논어(論語)》를 읽고 있는데, 홀연히 규장각(奎章閣)의 서리가 와서 소매 속에서 종이 하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내일 강장(講章)입니다.”
한다. 내가 깜짝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강원(講員)으로서 엿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니, 서리는,
“걱정할 거 없습니다. 이것은 주상의 분부이십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감히 엿볼 수 없다. 마땅히 전편(全篇)을 읽으리라.”
하였더니, 서리가 웃으며 가버렸다. 그 이튿날 경연에 나아가니, 주상이 각신(閣臣)에게 이르기를,
“정모(丁某 정약용을 가리킴)는 모름지기 다른 장(章)을 별도로 명하라.”
하였다. 강을 하게 되어서 틀리지 아니하니, 주상은 웃으며 말하였다.
“과연 전편을 읽었구나.”
그 뒤 며칠 지나서 밤중에 눈바람이 몰아치고 매우 추웠는데, 대내(大內)에서 독서(讀書)하는 제신(諸臣)에게 음식을 내렸다. 용이 상의원에서 내각(內閣)으로 나아가는데, 밤이 칠흑 같아서 담에 부딪쳐 얼굴을 다쳤다. 그 이튿날 춘당대(春塘臺)에 입시(入侍)하였더니, 얼굴에 납지(蠟紙)를 붙인 것을 주상이 보고 말하기를,
“납지는 왜 붙였는가? 어젯밤에 술을 과음하여 취해 넘어진 것이나 아닌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감히 과음한 것이 아니오라, 밤이 칠흑 같아서입니다.”
하였더니, 주상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취학사(醉學士)가 있었고 또한 전학사(顚學士)가 있었으니 만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도리어 전학사(顚學士)가 아니겠는가?”
계축년(1793, 정조 17) 무렵, 대정(大政) 며칠 전에 주상이 채공(蔡公)에게 밀유(密諭)를 내려 ‘남인(南人) 중에 대통(臺通)에 급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묻고, 아울러 이 가환(李家煥)ㆍ이익운(李益運)ㆍ정용(丁鏞) 등에게까지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였다. 채공과 이가환ㆍ이익운이 모두, 권심언(權心彦)이 가장 급하다고 아뢰었다. 대체로 1백여 년 이래로 남인이 오래도록 기색(枳塞 사정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함)을 당하여 한 차례의 대통(臺通) 때마다 1인에 불과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용(鏞)은 28인을 소록(疏錄)하고 그 세벌(世閥)ㆍ과명(科名) 및 문학(文學)ㆍ정사(政事)의 우열을 자세히 적어 올리며,
“이 28인은 시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누구를 먼저하고 누구를 뒤로 하느냐는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감히 간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며칠 뒤 대정(大政)하는데, 특별히 전관(銓官) 이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에게 유시하여 무릇 소록(疏錄)에 들어간 사람이 8인이 통과하게 되었다. 며칠 뒤에 또다시 통과되어 수년 사이에 거의 다 시행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 3월에 주상이 용산(龍山) 읍청루(挹淸樓)에 거둥하여 왕손(王孫) 인(䄄)을 심도(沁都 강화의 옛 이름)에서 불러 풍악을 잡히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금군(禁軍)이 철벽처럼 그 북문(北門)을 지키니 대신ㆍ근신(近臣)이 모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특별히 읍청루 위에서 용을 불러 우부승지에 제수하고, 환궁(還宮)하고 나서는 밤중에 용을 불러 어전에 이르게 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머리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니 쟁그랑거리며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보니 상방검(尙方劍)이었다. 하유(下諭)하기를,
“이가환과 이익운 등이 속습(俗習)으로 심적(沁謫)을 토죄(討罪)하니 상소하여 자수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상방검으로 두 사람의 목을 베리라.”
하였다. 용이 생각하기에 주상의 하유가 지당하므로 거역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물러나서 재촉하여 상소하게 하였더니, 그 일이 중지되었다.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용이 바야흐로 살아서 돌아오니 목태석(睦台錫)의 상소가 매우 혹독하였다. 용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 할아버지가 당시에 나를 논함에 있어서도 ‘그만한 지처(地處)와 그만한 문화(文華)로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하랴만, 들어와서는 군부(君父)에게 딱 잘라 말하고 나가서는 예전대로 따라다니며, 스스로 서교(西敎)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네가 지금 어찌 이렇게까지 독설을 퍼붓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집안의 계략이다.”
얼마 뒤에 영남(嶺南) 사람 신석림(辛碩林)이 소를 올려 목태석을 공격하였으니 이태순(李泰淳)을 위해 변론한 것이다.
용(鏞)이 《주례(周禮)》에 익숙하여 새로운 뜻을 많이 세웠다. 육향(六鄕)의 제도를 논함에 있어서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육향(六鄕)은 왕성(王城) 안에 있다. 장인(匠人)이 국성(國城)을 경영함에 있어 9개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왕궁(王宮)은 중앙에 위치하고 앞에는 조정의 관서가 있고 뒤에는 시전(市廛)이 있으며, 좌우에 육향이 둘씩 서로 향하고 있다. 향(鄕)이란 향[嚮]한다는 뜻이다. 하관(夏官) 양인(量人)이 무릇 도비(都鄙 도성과 시골)를 구획함에 있어 모두 구주(九州)로 만들었다. 기자(箕子)가 평양성(平壤城)을 만들 적에 성중에 정형(井形)을 그어 만든 것이 모두 이 법이다. 정현(鄭玄)이 육향을 교외(郊外)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향삼물(鄕三物)로 만민(萬民)을 가르쳤다는 말은 모두 시행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승지 신작(申綽)이 오히려 정현(鄭玄)의 해의(解義)를 고수하므로 용이 서너 차례 왕복하며 논란하여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밝혔다.
직각(直閣) 김매순(金邁淳)이 용의 《상서평(尙書平)》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은미(隱微)한 것을 밝히 알고 유암(幽暗)한 것을 꿰뚫음은 비위(飛衛)가 이[蝨]를 보는 것과 같고,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굳은 것을 쪼개는 것은 포정(庖丁)이 소를 잡는 것과 같고, 독수(毒手)로 간위(奸僞)를 처형함은 상군(商君)이 위수(渭水)에 임한 것과 같고, 혈성(血誠)으로 정도(正道)를 보위한 것은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운 것과 같다. 한편으로는 어지러움을 정리한 공벽(孔壁)의 원훈(元勳)이 되고 한편으로는 업신여김을 막는 주문(朱門)의 직신(直臣)이 되었다. 유림(儒林)의 대업(大業)이 크게 떨치지 못한 지 오래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적적한 천년 이후 거칠은 구이(九夷) 가운데에 이처럼 뛰어난 기사(奇事)가 있단 말인가?”


[주D-001]주저하기를 …… 두려워하듯 한다 : 《노자(老子)》13장에,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네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 하였다.
[주D-002]이발(理發)ㆍ기발(氣發) :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발현(發現)에 대해 이기(理氣)와 연관지어 논한 성리학설(性理學說). 퇴계(退溪)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의 우주관(宇宙觀)에 입각하여 “사단은 이(理)가 발하는데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氣)가 발하는데 이(理)가 타는 것(주재)이다.”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율곡(栗谷)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모두 기(氣)가 발하는데 이(理)가 이에 타는 것(주재)이다.[四端七情皆氣發而理乘之]” 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다산(茶山)의 의견은 그의 저술인《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2집 4권에 수록된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와 동 1집 12권 (辨)에 수록된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에 나타나 있다.
[주D-003]월과(月課)와 순시(旬試) : 태학(太學)의 유생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보이는 시험을 월과(月課), 열흘에 한 번씩 보이는 시험을 순시(旬試)라 하였다.
[주D-004]호남(湖南)의 …… 옥사 : 진산(珍山) 출신인 윤지충(尹持忠)이 외사촌 권상연(權尙然)과 천주교를 신봉하였는데, 정조 15년(1791)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천주교 의식에 따라 혼백(魂帛)과 위패(位牌)를 폐지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권상연도 같은 교도로 그 고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이들의 체포를 명하고 심문하였으나, 배교(背敎)를 거부하여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진산사건(珍山事件).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도 함. 윤지충(尹持忠)은 다산의 외사촌이다.
[주D-005]황건(黃巾)ㆍ백련(白蓮)의 난리 : 황건은 후한(後漢) 말기의 난당(亂黨). 영제(靈帝) 때 장각(張角)이 황제(黃帝)ㆍ노자(老子)의 설을 받들어 부수(符水)의 주문으로 병을 치료한다고 말하고 태평도(太平道)라 하였다. 제자를 보내어 서로 속이고 유혹시키니 신도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이들은 뒤에 난리를 일으켰는데 이를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렀다. 백련은 백련교(白蓮敎)를 말함. 원(元) 나라 난성(欒城)의 한산동(韓山童) 부자가, 백련이 꽃이 피자 미륵불(彌勒佛)이 강세(降世)하였다고 일컫고 불교에 의탁하여 백련회(白蓮會)를 일으켰는데, 기도ㆍ치병(治病) 등으로 백성을 유혹하여 크게 당세를 확장하였다. 뒤에 난리를 일으켰다.
[주D-006]신유옥사(辛酉獄事) : 순조 1년 신유(1801)에 정조 때 눌려지냈던 벽파(僻派)가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손을 잡고 천주교에 관련된 시파(時派)를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
[주D-007]갱화한 시권(詩卷) : 임금의 시에 신하들이 화답한 시축(詩軸).
[주D-008]임오년의 참인(讒人) : 영조 38년(1762) 임오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김한구(金漢耈)ㆍ홍계희(洪啓禧)ㆍ윤급(尹汲) 등 노론 일파를 말한다.
[주D-009]금등(金縢)의 사(詞) :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간인의 모함에 빠져 죽이고는 후회하였다. 금등(金縢)의 글은 곧 “동혜동혜 혈삼혈삼(桐兮桐兮 血衫血衫)"의 사(詞)이다.《茶山年譜 18年 甲寅》금등이란 금띠로 봉함한 것. 비적(祕籍)을 간직할 때 엄중하게 봉한 궤를 말한다.
[주D-010]태비(太妃)와 태빈(太嬪) : 태비(太妃)는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 태빈(太嬪)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빈(嬪) 혜빈(惠嬪) 홍씨(洪氏).
[주D-011]석진(石晉) : 오대(五代) 후진(後晉)의 별칭.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석진이라고도 했다. 2대 11년에 망함. 개운(開運)은 944~946년간으로 후진의 출제(出帝) 연호임.
[주D-012]오행(五行)을 …… 하였으나 : 오행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다섯 가지 원기(元氣)로, 즉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 서양인의 설을 받아들여 오행을 사행으로 하였다고 무고한 것이다. 이에 관한 말은 다산 연보(茶山年譜) 을묘년 7월 조에 자세히 나온다.
[주D-013]사예(四裔) : 나라의 사방 끝. 정조는 박장설(朴長卨)의 상소가 무고임을 알고 박장설을 먼저 두만강, 다음으로 동래, 다음으로 제주(濟州), 다음으로 압록강으로 정배(定配)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다. 《다산 연보(茶山年譜)》 을묘년 7월 조에 보인다.
[주D-014]공거(公車) : 관서(官署)의 이름. 천하의 상서(上書) 및 징소(徵召)의 일을 맡고 조령(詔令)을 기다리는 자가 명을 기다리며 거처하는 곳. 여기서는 상소와 주대(奏對)에 오르내림을 뜻한다.
[주D-015]양한(兩漢)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서한(西漢: 장안)과 동한(東漢: 낙양). 문장은 한당(漢唐)을 표준으로 삼음.
[주D-016]수사(洙泗)의 학문 : 공자(孔子)의 학문. 공자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의 지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곧 유교(儒敎)를 말함.
[주D-017]침기부(砧基簿) : 가좌표(家座表). 즉 토지와 재산을 기록한 장부.《牧民心書 戶典 田政》
[주D-018]허록(虛錄)ㆍ백골(白骨)의 군정(軍丁) : 허록은 장부에 거짓 기록한 것이고, 백골은 죽은 사람을 그대로 등록한 것이다. 즉 거짓 기록한 군정과 죽은 사람을 그대로 등록한 군정.
[주D-019]군포(軍布) : 군보포(軍保布). 정병(正兵)을 돕는 조정(助丁)에게 역(役)을 면제하여 주는 대가로 받던 삼베나 무명. 정포(丁布)라고도 한다.
[주D-020]군첨(軍簽) : 군정으로 등록하는 것.
[주D-021]군포계(軍布契) : 조선조 때 군포(軍布)를 납부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조직한 계.
[주D-022]역근전(役根田) : 조선 중기 이후에 도망간 자의 세금을 부담하기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경작하던 토지.
[주D-023]호포(戶布) : 호(戶)를 단위로 면포(綿布)나 저포(紵布)를 징수하던 세제. 조선조 때에는 서민의 각호(各戶)에 대하여 요역(徭役) 대신으로 포를 징수하였는데, 충청ㆍ황해ㆍ강원ㆍ경상ㆍ전라도 등의 민호(民戶)에 부과하였다.
[주D-024]평번(平反) : 원죄(原罪)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하거나 감형(減刑)함.
[주D-025]성사(城社) : 성호사서(城狐社鼠)의 준말. 성에 있는 여우를 없애려 하나 성이 무너질까 두렵고, 사(社)에 근거한 쥐를 소탕하려 하나 사가 탈까 두렵다는 말로 당로의 세력을 빙자하여 나쁜 짓을 함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당시 정조의 특명으로 시행하는 화성(華城)의 성역(城役)을 빙자하여 공물을 농간질하는 간민(奸民)을 말한다.
[주D-026]한영익이 …… 고발하였는데 : 정조 19년(1795) 여름에 소주(蘇州) 사람 천주교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변복하고 몰래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선전하였는데,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이 사실을 알고 이석(李晳)에게 고하고 이석은 정승 채제공에게 고하고 채제공이 왕에게 고하자 그들을 엄습하여 체포하였는데, 주문모는 달아나고, 최인길(崔仁吉)ㆍ윤유일(尹有一) 등을 잡아 장살(杖殺)하였다.
[주D-027]세서례(洗書禮) : 책례(冊禮). 글방에서 학동이 책 한 권을 다 읽어서 떼거나 베껴 쓰는 일이 끝난 때에 선생과 동료들에게 한턱 내는 일.
[주D-028]찬궁(欑宮) : 빈전(殯殿) 안의 임금의 관(棺)을 둔 곳. 찬실(攢室).《禮記 喪大記》
[주D-029]공제(公除) : 천하를 공(公)으로 삼아 복(服)을 벗는 것. 여기서는 5개월 만에 장례를 마치고 졸곡(卒哭)함을 말한다.
[주D-030]코를 베어 멸망시키겠다[劓殄滅之] : 《서경(書經)》 반경(盤庚) 중편에, “선한 마음 없이 도(道)를 배반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등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중형에 처하여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하고 그 자손도 길이 존속하지 못하도록 처분할 것이다.”라는 은왕(殷王) 반경의 말을 인용하여, 천주교에 관련된 사람을 처형하겠다는 뜻으로 유시를 내린 것이다.
[주D-031]삼구(三仇)의 설 : ‘세 가지 원수’에 관한 말. 서교(西敎)에서 말한 것으로, 첫째 자기 몸[自己身], 둘째 세속(世俗), 셋째 마귀(魔鬼). 이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이 해설을 하였는데, 다산(茶山)이《순암집(順菴集)》에서 보고 자기 중형인 약종(若鍾)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이를 인용하여 약종이 무함당한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茶山年譜 純宗肅皇帝 元年 辛酉 2月》
[주D-032]유애(遺愛) : 인애(仁愛)스러운 덕정(德政)이 남아 있는 것. 정조 21년(1797)에 다산이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茶山年譜 正祖皇帝 21年丁巳 閏6月》
[주D-033]정석(丁石) : 정약용(丁若鏞)의 석벽(石壁)이라는 뜻이다.
[주D-034]소무(蘇武) : 한 무제(漢武帝) 때 지조를 지킨 신하.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匈奴)에 사신 갔다가 억류당하여 눈[雪]과 깃발의 가죽을 먹으며 연명하고, 양을 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항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소제(昭帝) 때 흉노와의 화친으로 19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의 절개를 소무절(蘇武節)이라고 한다.《漢書 卷54》
[주D-035]간림(諫林) : 간쟁(諫諍)에 관한 글을 모은 것이라는 뜻.
[주D-036]오성(五聲) : 다섯 가지의 소리. 즉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
[주D-037]육률(六律) : 12율(律) 중 양성(陽聲)의 율(律). 즉 황종(黃鐘)ㆍ태주(太簇)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으로 육려(六呂)와 상대됨.
[주D-038]묘송(廟頌) : 종묘[廟]에서 아뢰는 송덕(頌德)의 노래.《시경(詩經)》에는 주송(周頌)ㆍ노송(魯頌)ㆍ상송(商頌)이 있다.《시경》은 풍(風)ㆍ부(賦)ㆍ비(比)ㆍ흥(興)ㆍ아(雅)ㆍ송(頌)의 육의(六義)로 되어 있다. 시(詩)의 성질에 따라 풍(風)ㆍ아(雅)ㆍ송(頌)으로 나누고, 표현법에 따라 흥(興)ㆍ부(賦)ㆍ비(比)로 나눈다.
[주D-039]시(詩)가 …… 지어졌다 : 《맹자(孟子)》 이루(離累) 하에, “성왕(聖王)의 태평한 정치의 흔적이 사라지고 난 뒤에 시(詩)가 없어졌고, 시가 없어지고 난 뒤에《춘추(春秋)》가 지어졌다.” 하였다.
[주D-040]매색(梅賾) : 진(晉) 나라 서평(西平) 사람. 자는 중진(仲眞), 벼슬은 예장 태수(豫章太守)를 지냈다. 인종(仁宗) 때《고문상서(古文尙書)》의 〈위공전(僞孔傳)〉을 올렸다. 혜동(惠棟)의〈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와 염약거(閻若璩)의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에 매색의 위작임이 밝혀져 있다.《매씨상서(梅氏尙書)》25편에 대해서는 다산의《매씨서평(梅氏書平)》에 자세히 보인다.
[주D-041]선기옥형(璿璣玉衡) : 고운 주옥으로 꾸민 천문 측량기.《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선기옥형으로 살피시어 이로써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하시다.” 하였다.
[주D-042]3지적(底績) : 지적은 공적을 이룬다는 뜻.《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지적(厎績)이 세 번 보이는데, 즉 기주(冀州) 조에서 “담회(覃懷)에 공을 이루시어 형장(衡漳)에 이르시다.” 하였고, 양주(梁州) 조에서 “화이(和夷)에 공을 이루시다.” 하였고, 옹주(雍州) 조에서 “평원(平原)과 습지(濕地)에 공을 이루시다.” 하였다.
[주D-043]홍범(洪範)의 구주(九疇) : 홍범(洪範)은《서경(書經)》주서(周書)의 편명, 구주(九疇)는 홍범이 아홉 개 조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주라 이름한 것이다. 다산은 주(疇)를 정전(井田)의 구역이라 해석하고 있다. 구주는 즉 1.오행(五行), 2.오사(五事), 3.팔정(八政), 4. 오기(五紀), 5.황극(皇極), 6. 삼덕(三德), 7. 계의(稽疑), 8.서징(庶徵), 9.오복(五福)이다.
[주D-044]2와 8이 …… 이어 받는다 : 2의 오사(五事)와 8의 서징(庶徵)이 좌우로 조응(照應)하고, 4의 오기(五紀)와 6의 삼덕(三德)이 상하로 이어받는다고 해석하고 있다.《與猶堂全書 尙書古訓 卷4》
[주D-045]정 현(鄭玄) : 후한(後漢) 고밀(高密) 사람. 자(字)는 강성(康成). 벼슬은 대사농(大司農)에 이르렀다.《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의 주가 있다.《後漢書 卷35》
[주D-046]상의광(喪儀匡) : 다산(茶山)이 지은《상례사전(喪禮四箋)》의 편명.《상례사전》은 상의광ㆍ상구정(喪具訂)ㆍ상복상(喪服商)ㆍ상기별(商期別)로 60권이다.
[주D-047]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일.
[주D-048]대렴(大斂) : 소렴(小斂)을 행한 다음날 송장에게 옷을 거듭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일.
[주D-049]말우(末虞) : 우제(虞祭)의 마지막 제사. 즉 삼우(三虞).
[주D-050]졸곡(卒哭) :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또는 다섯 달(제후의 장사), 일곱 달(천자의 장사) 만에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해 지내는 제사.
[주D-051]소목(昭穆) :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천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세ㆍ4세ㆍ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ㆍ5세ㆍ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3소(昭)ㆍ3목(穆)의 7묘(廟)가 되고, 제후는 2소ㆍ2목의 5묘, 대부(大夫)는 1소ㆍ1목의 3묘가 됨.
[주D-052]모(冒) : 시체를 덮는 이불.
[주D-053]이금(夷衾) : 시체를 덮는 이불. 대체로 이불은 접어서 몸을 감싸기 때문에 모두 5폭으로 사용하는데, 이금은 위에만 덮을 뿐 접는 것이 없으므로 이평(夷平 편편함)하다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주D-054]악수(握手) : 두 손의 팔뚝을 잇대어 서로 맺음.
[주D-055]엄수(掩首) : 시체의 머리를 싸는 것.
[주D-056]복건(幅巾) : 치포(緇布)로 만든 머리에 쓰는 건(巾)으로 시체의 머리를 싼다.
[주D-057]심의(深衣) : 선비의 웃옷. 흰 베로 만드는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두름. 치마는 12폭, 여기서는 시체를 싸는 데 사용하는 옷을 말함. 고례(古禮)에는 심의로 시체를 싸지 않았는데,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주D-058]수장납거(遂匠納車) : 《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에, “수인(遂人)과 장인(匠人)이 구거(柩車)를 섬돌 사이에 들인다.[遂匠納車于階閒]” 하였다. 수인(遂人)은 도역(徒役)을 주관하고 장인(匠人)은 널을 싣는 일을 주관하는데, 장사를 주관하는 직임이다.
[주D-059]신거(蜃車) : 널을 싣는 수레.
[주D-060]수질(首絰) : 상제가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과 삼으로 만든 띠.
[주D-061]요질(腰絰) : 상복을 입을 때 허리에 매는 띠. 짚에 삼을 섞어서 굵은 동아줄같이 만든다.
[주D-062]수갈(受葛) : 상복의 수질(首絰)이나 요대(腰帶)에 마질(麻絰)이나 마대(麻帶)를 착용하기도 하고 갈질(葛絰)이나 갈대(葛帶)를 착용하기도 하는데, 칡을 넣은 질(絰)이나 대(帶)를 착용하는 것을 수갈(受葛)이라 한다.《喪禮四箋 卷8 喪服商一 受服三》
[주D-063]교대(絞帶) : 상복에 쓰는 삼띠.
[주D-064]상관(喪冠) : 상기(喪期)에 쓰는 관(冠).
[주D-065]무(武) : 관을 매는 띠. 관권(冠卷).
[주D-066]참(斬) : 상복에 도련을 하지 않은 것. 애통이 심함을 나타낸 것.
[주D-067]오복(五服) : 다섯 가지의 상복(喪服). 참최(斬衰 3년)ㆍ재최(齊衰 1년)ㆍ대공(大功 9개월)ㆍ소공(小功 5개월)ㆍ시마(緦麻 3개월).
[주D-068]최(衰) : 상복으로 상의(上衣)를 최(衰)라 하고 하의(下衣)를 상(裳)이라 한다. 효자가 애최(哀摧)의 뜻이 있음을 말한다.《喪禮四箋 卷8 喪服商一總制》
[주D-069]방심(方心)이고 …… 곡령(曲領) : 방심과 곡령은 제복(祭服)의 하나로 목에 걸어 가슴에 늘어뜨리는 흰 깁. 목은 고리로 되고 가슴에 속이 빈 네모꼴이 붙음.
[주D-070]후수(後綬) : 예복(禮服)이나 제복(祭服)을 입을 때 뒤에 늘이는 끈.
[주D-071]대하척(帶下尺) : 질대(絰帶) 아래에 한 자 길이의 옷깃을 늘려서 상(裳)과 상의(上衣)의 어울림을 덮을 수 있는 상복.
[주D-072]횡란(橫幱) : 가로 댄 철릭.
[주D-073]임(衽) : 옷고름.
[주D-074]연미(燕尾) : 제비 꼬리처럼 만든 것.
[주D-075]환질(環絰) : 소렴(小斂) 때 상제가 쓰는 사각건(四角巾)에 덧씌워 쓰는 삼으로 꼰 둥근 테두리.
[주D-076]규질(繆絰) : 수질(首絰).
[주D-077]연(練) : 연복(練服) 또는 연제(練祭)의 준말. 상제가 소상을 지내고 대상 전에 빨아 입는 상복을 연복이라 하고, 아버지가 살아 있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갔을 때 한 돐 만에 지내는 소상을 1개월 앞당겨 지내는 제사를 연제라 한다.
[주D-078]마융(馬融) : 후한 안제(後漢安帝) 때의 학자. 벼슬은 의랑(議郞)에 이름. 삼례(三禮) 등의 주석이 있다.《後漢書 卷93》
[주D-079]즉위(卽位) : 사문(私門)에서는 즉위하는 예가 없고 소렴 때에 섬돌에 나아가는 것을 곧 즉위라 한다.《喪禮四箋 卷11》,《喪期別4 承重6》
[주D-080]《제례고정(祭禮考定)》 : 다산(茶山)의 저술로 제법고(祭法考)ㆍ제기고(祭期考)ㆍ제의고(祭儀考)ㆍ제찬고(祭饌考).
[주D-081]합호(闔戶) : 제사를 마치고 문을 닫는 것. 즉 신주를 넣고 사당문을 닫는 것.《喪禮四箋 喪儀匡 虞祭五》,《祭禮考定 祭儀考》
[주D-082]상제(殤祭) : 미성년자의 상제(喪祭)를 말함. 나이 16~19세에 죽은 것을 장상(長殤), 12~15세에 죽은 것을 중상(中殤), 8~11세에 죽은 것을 하상(下殤)이라 한다.《儀禮 喪服傳》
[주D-083]유식(侑食) : 제사지낼 때에 삼헌작(三獻酌)과 상시(上匙 숟가락을 올림)한 뒤에 제관들이 문 밖에 나와 문을 닫고 귀신이 와서 음식을 들도록 기다리는 일.
[주D-084]태뢰(太牢) :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예로 상하 두 등급이 있다. 아래의 소뢰ㆍ특생ㆍ특돈도 같다.《祭禮考定 祭饌考》
[주D-085]소뢰(小牢) : 대부(大夫)의 예다.
[주D-086]특생(特牲) : 주례(主禮)로, 한 마리의 돼지를 제물로 바침. 하대부(下大夫)의 우제(虞祭)에도 씀.
[주D-087]특돈(特豚) : 선비의 예로,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침.
[주D-088]변두궤형(籩豆簋鉶) : 변(籩)은 실과ㆍ건육(乾肉)을 담는 죽기(竹器), 두(豆)는 김치ㆍ젓갈을 담는 목기(木器), 궤(簋)는 서직(黍稷)을 담는 대 제기(祭器), 형(鉶)은 국그릇.
[주D-089]추연(鄒衍) …… 분변하였다 : 추연(鄒衍)은 전국(戰國) 제(齊) 나라 사람. 연 소왕(燕昭王)이 갈석궁(碣石宮)을 지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소왕이 죽자 아들 혜왕(惠王)이 참소를 믿고 추연을 하옥시켰는데, 그가 하늘을 쳐다보고 통곡하니 5월인데 서리가 내렸다 한다. 율(律)을 잘 불었고, 오운(五運)의 학을 주창하였다. 여불위(呂不韋)는 진 양왕(秦襄王) 때 승상이 되었고, 시황제(始皇帝) 때는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가《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유안(劉安)은 한 고조(漢高祖)의 손자로 회남왕(淮南王)에 습봉(襲封) 되었으며,《회남자(淮南子)》를 지었다. 변증은 다산(茶山)의《악서고존(樂書孤存)》에 자세히 나온다.
[주D-090]삼분 손익(三分損益) : 음악 율관(律管) 길이의 계산법. 황종관(黃鐘管)의 길이 9촌(寸)을 표준으로 삼아, 차례에 따라 12율(律)을 계산하는 방법 황종 9촌을 3분하여 1분을 빼면 6촌이 되는데 이것이 임종(林鐘)이 된다. 또 그 6촌을 3분하여 그 1분을 더하면 8촌이 되는데, 이것이 태주(太簇)가 된다. 다른 것도 이 방법을 미루어 계산한다.《漢書 律曆志》,《樂書孤存 辨三分損益上下相生之法始於五聲昉於管子》
[주D-091]취처 생자(聚妻生子) : 양(陽)의 율(律)이 음(陰)의 아내를 맞이하고, 음의 여(呂)가 아들을 낳는 것. 예컨대 황종(黃鐘)인 일양(一陽) 복(復)이 유빈(蕤賓)인 일음(一陰) 구(姤)와 교합하여 이음(二陰) 둔(屯)을 낳아서 임종(林鐘)이 되는 것. 자리가 같은 것은 부부를 상징하고 자리가 다른 것은 아들과 어머니를 상징한다.《五洲衍文長箋散藁 經史編 樂樂律候氣辨證說》,《樂學軌範 卷1 班志相生圖說》다산(茶山)의 견해는 위와 다르다. 황종(黃鐘)의 짝은 대려(大呂), 태주(太簇)의 짝은 협종(夾鐘)의 순으로 주장하고 있다.《樂書孤存一 辨十二律 無娶妻生子之法》
[주D-092]괘기 월기(卦氣月氣) : 1년 12월을《역경(易經)》의 괘(卦)에 배합시킨 것. 예컨대, 정월은 태(泰), 2월은 대장(大壯), 3월은 쾌(夬), 4월은 건(乾), 5월은 구(姤), 6월은 둔(遯), 7월은 비(否), 8월은 관(觀), 9월은 박(剝), 10월은 곤(坤), 11월은 복(復), 12월은 임(臨). 다산(茶山)은 이를 변증하고 있다.《樂書孤存一 辨十二律 不可以配月氣》
[주D-093]정반 변반(正半變半) : 12율(律)에 정반성(正半聲)ㆍ변반성(變半聲)을 배정한 것.《樂書孤存二 辨十二律 無半聲變半聲之用》
[주D-094]육률을 …… 낳는 것 : 예컨대, 황종(黃鐘) 81을 3등분하여 1분을 빼서 대려(大呂) 54를 낳고, 태주(太簇) 78을 3등분하여 1분을 빼서 협종(夾鐘) 52를 낳는다. 나머지 4율이 4여(呂)를 낳는 것도 이와 같다.《樂書孤存三 査六律皆三分損一各生一呂》
[주D-095]대균(大均)ㆍ세균(細均) : "균(均)이란 조(調)이니, 대조(大調)를 대균(大均), 소조(小調)를 세균(細均)이라 한다.”고 영주구(伶州鳩)가 말하였다.《樂書孤存二 辨大豫樂之均鐘木卽樂家之蟊賊》영주구는 주(周) 나라 악관(樂官).
[주D-096]3기(三紀)ㆍ6평(六平) : 음률을 고르는 데 있어 3으로 기율을 삼고, 6으로 고르게 하는 것. 율(律)에는 3기가 있으니, 대율(大律)은 황종(黃鐘), 중률(中律)은 고선(姑洗), 소율(小律)은 이칙(夷則)으로 상고에는 이 3율뿐이었다 함. 상률의 수는 81, 중률의 수는 75, 소율의 수는 69로, 대ㆍ중ㆍ소 서로의 사이에 각기 6으로 차이를 두고, 3기 아래에 각기 1률(律)씩 낳아서 그 성조(聲調)를 고르게 하였다. 즉 3기의 사이에 각기 6의 수로 차이를 두고는 그 두 기 사이에 각기 1률씩을 꽂는 것이 6평(平)이고, 대평(大平)은 태주(太簇), 중평(中平)은 유빈(蕤賓), 소평(小平)은 무역(無射)인데, 3평이 3기와의 사이에 각기 3으로 차이를 두면서 6률이 열을 이루게 됨.《樂書孤存三 査律有三紀六平》
[주D-097]12벽괘(辟卦) : 동지(冬至)에 일양(一陽)이 비로소 생겨나니, 그 괘(卦)는 복(復)이 되고 임(臨)이 되고 태(兌)가 되어 건(乾)에 이르면 육양(六陽)이 이루어진다. 하지(夏至)에 일음(一陰)이 생겨나니 그 괘는 구(姤)가 되고 둔(遯)이 되고 비(否)가 되어 곤(坤)에 이르면 육음(六陰)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사시(四時)의 괘인데 경 방(京房)이 12벽괘라 하였다.
[주D-098]잠룡(潛龍) : 잠겨 있는 용.《역경(易經)》 건괘(乾卦) 초구(初九)에,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지니라.[潛龍勿用]” 하였다.
[주D-099]손(巽)이 …… 혹약(或躍)이라 : 《역경(易經)》 설괘전(說卦傳) 제9장에, “손이 다리가 된다.[巽爲股]” 하였는데, 다리이므로 혹 “뛰기도 한다.[或躍]”고 한 것이다. 건괘에 “구사(九四)는 혹 뛰거나 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或躍在淵無咎]” 하였다.
[주D-100]건(乾)은 …… 되므로 : 문왕(文王)의 후천팔괘(後天八卦)에는, 건이 방위로는 서북(西北), 계절로는 겨울이므로 겨울에 얼음이 어는 것을 상징한 것.
[주D-101]태괘(泰卦)의 …… 된다 : 호괘(互卦)란 태괘로 예를 들면, 상ㆍ하의 1효씩을 제외한 4효에서 아래 3효인 2ㆍ3ㆍ4효. ☱(兌), 위 3효인 3ㆍ4ㆍ5효는 ☳(震)괘가 되는데 이 두 괘가 합하여 (歸妹)괘가 됨을 말한다.
[주D-102]펄펄 날아서 …… 때문이다.[翩翩不富皆失實也] : 《역경(易經)》 태괘(泰卦) 육사(六四) 상(象)에 나온다.
[주D-103]중간(重艮) : 팔괘(八卦)의 간괘(艮卦)가 겹쳐 64괘 중 간괘(艮卦)가 되었다는 뜻이다.
[주D-104]망할까 …… 뽕나무에 맨다.[其亡其亡繫于桑也] : 《역경(易經)》 비괘(否卦) 구오에(九五) 나오는 말.
[주D-105]물(物)을 …… 찬(撰)함 : 《역경(易經)》 계사 하전(繫辭下傳) 제9장에 나온다.
[주D-106]도체(倒體) : 예컨대, 손하(巽下 ☴) 태상(兌上 ☱)의 대과괘(大過卦)가 전부 변하여 진하(震下 ☳) 간상(艮上 ☶)의 이괘(頤卦 )로 전도되는 것.
[주D-107]전도하여 …… 길하다.[顚頤吉也] : 《역경(易經)》 이괘(頤卦) 육사(六四)와 상사(象辭)에 나온다.
[주D-108]감괘(坎卦 ☵)의 …… 되고 : 감괘(☵)의 육삼효(六三爻)가 변하여 손괘(☴)가 됨을 말한다.
[주D-109]이괘(離卦)의 …… 도체(倒體)가 된다 : 이괘(離卦)의 초구(初九)가 변하여 진괘(震卦)의 도체(倒體)가 됨을 말한다.
[주D-110]역수(逆數) :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것.《역경(易經)》 설괘전(說卦傳) 제2장에, “지나감을 헤아림은 순하고 미래를 앎은 거스르니, 이러므로 역(易)은 역수(逆數)이다.” 하였다.
[주D-111]선천도(先天圖)의 괘위(卦位) : 송(宋)의 소옹(邵雍)이 진단(陳摶)의 책을 얻어 만든 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圖), 건(乾)은, 남(南), 곤(坤)은 북(北), 이(離)는 동(東), 감(坎)은 서(西), 진(震)은 동북(東北), 태는 동남, 손(巽)은 서남, 간(艮)은 서북(西北).《皇極經世書 心易發微一》
[주D-112]하(夏) 나라 역법(曆法) : 하 나라는 인월(寅月) 즉 정월, 은(殷) 나라는 축월(丑月) 즉 12월, 주(周) 나라는 자월(子月) 즉 11월로 세수(歲首)를 삼았다.
[주D-113]여름에 …… 취하였다 :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하(夏) 4월 조에 보인다. 즉 제후인 정(鄭)의 제족(祭足)이 군사를 거느리고 천자의 나라 주(周)를 쳐서 온(溫) 땅의 보리와 성주(成周) 땅의 벼를 취하였던 사실이다.
[주D-114]왕정월(王正月) : 주(周) 나라 천자(天子)의 정월이라는 뜻.《춘추(春秋)》의 서례(序例).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제후가 각각 주권자로 자임하여 역법(曆法)을 달리하다가, 공자(孔子)가 특히 존왕(尊王)의 대의(大義)를 명시하여, 노(魯)의 각 공들의 연기(年期)가 시작될 적마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이란 4자를 썼다.
[주D-115]자월(子月) : 음력 11월. 주(周) 나라는 자월(子月)을 세수(歲首)로 삼았다.
[주D-116]하오(夏五) : 하오월(夏五月)의 뜻.《춘추(春秋)》 환공(桓公) 14년 조에, “하오(夏五)"라 하여 월(月) 자가 빠졌는데, 그것은 궐문(闕文)의 뜻을 붙인 것이다.《춘추(春秋)》 장공(莊公) 24년 조에, “하오곽공(夏五郭公)"이란 문구가 있는데, 전항의 하오(夏五)와 아울러 궐문의 뜻을 말함.
[주D-117]교제(郊祭) : 제사 이름. 천자(天子)가 교외에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하는 것. 동지(冬至) 때 천자가 스스로 남교(南郊) 밖에 가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지(夏至) 때 스스로 북교(北郊) 밖에 가서 땅에 제사지낸다. 교사(郊祀).
[주D-118]오방(五方)의 상제(上帝) : 다섯 천제. 동방의 청제(靑帝), 남방의 적제(赤帝), 서방의 백제(白帝), 중앙의 황제(皇帝), 북방의 흑제(黑帝).《漢書 郊祀志 下》
[주D-119]관사보(觀射父) : 춘추(春秋) 때 초(楚)의 대부(大夫). 소왕(昭王)을 섬겼다. 관련된 기사는《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춘추고징(春秋考徵) 사삼(社三)에 나온다.
[주D-120]원구(圜丘) : 원형의 구릉. 동지(冬至)에 천자가 하늘에 제사하는 단(壇).
[주D-121]회례(禬禮) : 재난을 물리치는 제사.
[주D-122]두예(杜預) : 진(晉) 나라 사람. 자는 원개(元凱).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오(吳)를 쳐서 평정하였다.《좌전(左傳)》을 몹시 좋아하였고,《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및 《춘추장력(春秋長歷)》을 지었다.《晉書 卷34》두예가 단상(短喪)의 의의를 세운 일에 대해서는 다산의《춘추고징(春秋考徵)》흉례조(凶禮條) 소서(小序)에 나온다.
[주D-123]양암(諒闇) : 천자가 복상(服喪)하는 집. 은 고종(殷高宗)은 아버지 소을(小乙)의 상에 상려(喪廬)에서 3년 동안 말하지 않았다.《史記 魯世家》
[주D-124]효제(孝弟)는 …… 인(仁)이니 : 이 말은《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주D-125]북극성(北極星)이 …… 있음으로써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주D-126]털이 …… 났다 :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주D-127]유생(黝生) : 제사에 바치는 검푸른 산짐승.
[주D-128]견율(繭栗) : 갓 낳은 송아지. 송아지의 작은 뿔이 고치나 밤 같음을 말함.《禮記 王制》
[주D-129]악척(握尺) : 악(握)은 네 치 정도. 소의 뿔의 길이가 네 치 정도. 《禮記 王制》척(尺)은 한 자. 즉 소의 뿔이 아직 네 치나 한 자 정도로 밖에 자라지 않았음을 말한다.
[주D-130]곡삭(告朔) : 천자가 정삭(正朔)을 제후(諸侯)에게 반포하는 것. 늦겨울에 천자가 내년 12개월의 정삭(正朔)을 제후에게 반포하면, 제후는 받아서 조묘(祖廟)에 간직하였다가 매달 초하루가 되면 양을 제물로 바치고 사당에 고하여 이를 시행한다.《論語 八佾》,《與猶堂全書 論語古今註 卷2 八佾 下》
[주D-131]제삭(祭朔) : 곡삭(告朔)을 마치고 나서 소뢰(小牢)의 제물로 조녜(祖禰)에게 제사하는 것. 조향(朝享).
[주D-132]시삭(視朔) : 조향(朝享) 즉 제삭(祭朔)을 마치고 나서 임금이 피변(皮弁)을 쓰고 정삭(正朔)의 일을 태묘(太廟) 안에서 듣는 것.
[주D-133]네 번 시삭(視朔)하지 않았으나 : 춘추 시대 2백 40년 동안에 노 문공(魯文公)이 우연히 한 번 병이 있어서 네 번 시삭(視朔)하지 않았다 한다.《與猶堂全書 論語古今註 卷2 八佾 下》,《左傳 文公 6年》
[주D-134]동주(東周)란 …… 것이다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권9 양화(陽貨)에 자세히 나온다.《논어》 양화(陽貨)에,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비읍(費邑)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공자를 부르거늘 공자가 가려 하였다. …… 만일 나를 쓰는 자가 있으면 나는 주도(周道)를 동방에 행하겠다.” 하였다. 동주(東周)에 대해서는 다산은 달리 해석하고 있다.
[주D-135]승당(升堂)이란 …… 그것이다 :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중유(仲由)는 어찌 나의 문에서 비파를 타는고?' 하니, 문인이 자로(子路)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는, ‘중유의 학문은 당(堂)에는 오를 수 있으나 아직 방에 들 만하지 못하다.’ 하였다.” 아송(雅頌)은《시경(詩經)》의 대아(大雅)ㆍ소아(小雅)와 주송(周頌)ㆍ노송(魯頌)ㆍ상송(商頌), 이남(二南)은《시경》의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을 말한다.
[주D-136]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본 것 :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남자(南子)는 위 영공(衛靈公)의 부인으로 음행(淫行)이 있었다.
[주D-137]괴외(蒯聵) : 위 영공(衛靈公)의 아들. 괴외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를 죽이려 하자, 영공이 노하여, 진(晉) 나라로 달아났다. 뒤에 위(衛)의 임금이 되어 진(晉)을 배신하였는데 진 나라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다.
[주D-138]상지(上智)와 하우(下愚) :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상지와 하우의 사람은 기질을 바꿀 수 없다.” 하였다.
[주D-139]주공(周公)이 …… 성인이 된다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있는 말이다. 다방(多方)은 여러 지방 의 제후(諸侯)를 뜻하는데,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대신해서 모든 제후에게 고한 말을 기록하여 이를 편명으로 삼은 것이다.
[주D-140]영 무자(甯武子) : 위(衛)의 대부(大夫) 영유(甯愈). 무(武)는 시호.《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말하기를, ‘영 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은 척했으니, 지혜로운 척함은 따를 수 있으나 어리석은 척함은 따르지 못하노라.’ 하였다.” 했다.
[주D-141]천자가 …… 여긴 것이다 : 《맹자》 양혜왕(梁惠王) 상에, “만승(萬乘)의 나라에 그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의 집이다.” 하였다. 승(乘)은 수레의 수로 만승은 병거(兵車) 1만 대를 출동시킬 수 있는 대국(大國)을 말한다. 만승(萬乘)ㆍ천승(千乘)에 대해서 다산은 자신의 저서인《맹자요의(孟子要義)》에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까지 부정하며 논변하고 있다.
[주D-142]사람을 …… 않는다 : 《맹자》 양혜왕(梁惠王) 상에 나오는 말이다.
[주D-143]하후씨(夏后氏)는 …… 경작하였다 : 《맹자》 등문공(膝文公) 상에, “하후씨는 50묘(畝)를 경작함에 5묘의 전조(田租)를 공(貢)으로 바치고 은 나라 사람은 70묘(畝)를 경작함에 7묘를 공가의 조(助)로 한다.” 하였다. 10분의 1을 조세로 받음을 말한다.《與猶堂全書 孟子要義 滕文公 第三章以下》
[주D-144]이 기(氣)는 쭈그러든다 : 《맹자》 공손추(公孫丑) 상에, “이 기(氣)는 의(義)와 도를 짝하니 이 의와 도가 없으면 쭈그러든다.[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하였다.《與猶堂全書 孟子要義 公孫丑第二 公孫丑問不動心章》
[주D-145]여자약(呂子約)과 …… 유의(遺義)이다 : 여자약(呂子約)은 송(宋)의 학자 여조검(呂祖儉). 자약은 그의 자(字)다. 이숙헌(李叔獻)은 이이(李珥). 숙헌은 그의 자(字)다. 전항의 이[是]에 대해 여자약(呂子約)이 주자(朱子)와 답문(答問)한 편지를 다산은《맹자요의(孟子要義)》에서 인용하여 정리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의견은 “호연(浩然)한 기(氣)가 없으면 몸이 쭈그러든다.”고 여긴 것이고, 여자약의 의견은 “도의(道義)가 없으면 기가 쭈그러든다.”고 여긴 것이라 말하고, 결론적으로 주자가 여자약의 설을 부정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이의 설은《맹자요의》에 인용하지 않았다.
[주D-146]마음을 …… 참는다.[動心忍性] : 《맹자》 고자(告子) 하에 나온다.
[주D-147]모든 사물의 …… 갖추어져 있다 : 《맹자》 진심(盡心) 상에 나오는 말이다.《맹자요의(孟子要義)》 진심(盡心) 제7장에도 나온다.
[주D-148]경례(經禮) …… 곡례(曲禮) 3천 가지 : 경례(經禮)는 대강(大綱)의 예, 곡례(曲禮)는 기목(紀目)의 예.《禮記 禮器》 예경(禮經) 3백과 위의(威儀) 3천과도 같다. 예경(禮經) 3백은《주례(周禮)》3백 60관(官)을 말한다. 일설에는 상행(常行)의 예(禮)인《의례(儀禮)》의 관례(冠禮)ㆍ혼례(昏禮)의 따위라고도 하며 또는《의례》 중의 사관례(士冠禮)ㆍ제후관례(諸侯冠禮)ㆍ천자관례(天子冠禮) 등 3백 가지 대절목(大節目). 위의(威儀) 3천은 관혼길흉(冠昏吉凶)의 유에《의례(儀禮)》의 일에 해당하는 사의(事儀) 3천 가지.
[주D-149]자기를 …… 돌아오는 것이요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말이다.
[주D-150]왕망(王莽)과 조조(曹操) : 왕망은 전한(前漢) 말엽 신(新) 나라의 임금. 한(漢)의 애제(哀帝)를 물리치고, 평제(平帝)를 독살하여 스스로 가제(假帝)라 부르고 나라를 신(新)이라 하였음.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멸망됨. 조조는 후한 때 사람. 헌제(獻帝) 때 승상이 되어 정권을 전단하고 위왕(魏王)에 봉해짐. 권모(權謀)에 능하였다. 아들 조비(曹)가 한(漢)을 찬탈하고 무제(武帝)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소인의 대명사가 되었음.
[주D-151]주발(周勃)과 석분(石奮) : 주발은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공신. 강후(絳侯)에 봉해짐. 여녹(呂祿) 등 여씨(呂氏)들이 모반하였을 때 주발이 이들을 베어 한실(漢室)을 편안히 하였고, 문제(文帝) 때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석분(石奮)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ㆍ경제(景帝) 때 사람. 문제(文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오르고, 경제 때에 구경(九卿)에 이름. 사람이 공근(恭謹)하기로 유명하여 그의 아들 4형제도 모두 효도하고 근신하며 벼슬이 2천 석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그를 만석군(萬石君)이라 불렀다.《史記 卷103》이 두 사람은 성실한 사람으로 불리었음.
[주D-152]순(舜) 임금이 …… 말라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보인다. 주자(冑子)는 맏아들.
[주D-153]지용(祗庸) : 공경하고 떳떳함.
[주D-154]고요(皐陶)가 …… 쓴 것 : 고요는 요(堯) 임금 때의 법관. 고요가 우(禹) 임금에게 한 말. 구덕(九德)은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것.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것, 성실하면서도 공손한 것, 다스리면서도 공경하는 것, 온순하면서도 굳센 것, 곧으면서도 온화한 것, 간이하면서도 청렴한 것, 강하면서도 착실한 것, 날렵하면서도 의로운 것.《書經 皐陶謨》
[주D-155]주공(周公)이 …… 알았다 : 《서경》 주서(周書) 입정(立政)에 나오는 말이다.
[주D-156]진실로 …… 잡으라[允執厥中]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이다.
[주D-157]도(道)는 …… 그치지 않았다 : 여기에 인용된 8조(條)는《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들인데, 위에서부터, 1장, 3장, 7장, 10장, 11장, 13장, 26장, 26장 등에 각각 나온다.
[주D-158]회(回)는 …… 있을 뿐이다 :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회(回)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 회(顔回).
[주D-159]제대로 …… 아니한다 : 《서경》 다방(多方)에 나온다.
[주D-160]보지 못한다[不睹] …… 듣지 못한다[不聞] : 《중용(中庸)》 제1장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에 삼가고 들리지 않는 바에 두려워한다.”는 것에 대해 다산이 논한 것이다.
[주D-161]《도경(道經)》 : 도덕(道德)의 일을 논한 책.《荀子 解蔽》
[주D-162]주자(冑子)와 국자(國子) : 주자는 천자(天子)로부터 경대부(卿大夫)에 이르기까지의 맏아들을 말하고, 국자는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
[주D-163]동방(東方)이 …… 이치 : 《역경(易經)》 설괘전(說卦傳) 제5장에, “만물이 진(震)에서 나오니 진(震)은 동방이다.” 하였다.
[주D-164]서(恕)를 …… 길은 없다 : 《맹자》 진심(盡心) 상에 나온다. 서(恕)는 나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 즉 남을 내 마음같이 여겨 사랑함.
[주D-165]증자(曾子)가 …… 답하였고 :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孔子)가 ‘삼(參 증자의 이름)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했다.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는 것은 충서(忠恕)를 말한다.
[주D-166]자공(子貢)이 …… 답하였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자공(子貢)이 ‘한마디 말로 평생 동안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니, 공자는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했다.
[주D-167]인(仁)을 …… 돌아오는 것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데, 다산(茶山)이 재구성하였다.
[주D-168]온갖 부(蔀) : 부는 차양이니 정도를 가리는 온갖 장애물을 말한다.《학부통변(學蔀通辨)》이란 책 이름의 유래도 같다.
[주D-169]자좌 오향(子坐午向) : 자방(子方)을 등지고 오방(午方)을 향함. 곧 정남방으로 앉은 자리.
[주D-170]대정(大政) : 해마다 12월에 행하는 도목 정사(都目政事). 도목 정사는 벼슬아치의 성적이 좋고 나쁨에 따라서 영전ㆍ좌천 또는 파면시키는 일로 6월과 12월에 두 차례 행하는데, 12월의 것이 규모가 커서 대대적으로 행하므로 이를 대정이라 함.
[주D-171]대통(臺通) : 한 사람의 대간(臺諫)을 뽑을 때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일.
[주D-172]왕손(王孫) 인(禋) : 은언군(恩彦君).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 정조(正祖)의 이복 동생. 정조 10년(1786) 아들 상계군 담(常溪君湛)이 홍국영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자살하자 왕명으로 강화(江華)에 이사하였다. 1797년 강화에서 탈출하려다 체포되어 그곳에 안치(安置)되었다. 순조 1년(1801)에 천주교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손자 철종(哲宗)의 즉위로 신원되었다.
[주D-173]심적(沁謫) : 강화(江華)에 귀양살이하던 은언군 인(恩彦君禋)을 말한다.
[주D-174]네 할아버지 : 목태석(睦台錫)의 할아버지 목만중(睦萬中).
[주D-175]육향(六鄕) : 《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와 다산의《경세유표(經世遺表)》에 보인다.
[주D-176]향삼물(鄕三物)로 …… 가르쳤다 : 《주례(周禮)》 지관대사도(地官大司徒)에 보인다.
[주D-177]비위(飛衛)가 …… 보는 것 : 비위(飛衛)는 옛날 활 잘 쏘는 사람. 기창(紀昌)이란 사람이 비위에게 사술(射術)을 배울 적에 비위가 말하기를, “ …… 작은 것을 보아도 큰 것 같고, 은미(隱微)한 것을 보아도 현저한 것 같은 뒤에 나에게 고하라.” 하였다. 기창이 털로 이[蝨]를 바라지에 달아두고 남쪽으로 향해서 보니 열흘 사이에 점점 커졌고, 3년 뒤에는 수레바퀴만하여졌다. 이에 활을 쏘니 이[蝨]의 가슴을 꿰뚫고 나가되 달아맨 것은 끊어지지 않았다 한다.《열자(列子)》 양문(湯問)에 보인다. 미세한 것까지 환하게 꿰뚫음의 비유.
[주D-178]포정(庖丁)이 …… 잡는 것 : 여기서 포정(庖丁)은 그 솜씨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백정을 말한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뼈와 살을 잘 발라내는 솜씨가 있었다.《莊子 養生主》기술의 묘함을 찬미한 말.
[주D-179]상군(商君)이 …… 임한 것 : 상군(商君)은 진 효공(秦孝公) 때의 정승 공손앙(公孫鞅)을 가리킴. 상앙(商鞅)이라고도 한다. 상군(商君)이 진(秦) 나라 정승으로 있으면서 법을 시행함이 엄혹하여 위수(渭水)에 임하여 죄수를 논정(論定)할 때에 위수(渭水)가 죄다 벌겋게 되었다 한다.《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180]변화(卞和)가 …… 운 것 : 변화(卞和)는 주대(周代) 초왕(楚王)에게 보옥(寶玉)을 헌상한 사람. 초(楚) 나라 변화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인(玉人)에게 감정하게 하였더니, 옥인은 돌이라고 판정하였다. 여왕은 변화가 속였다 하여 왼쪽 발을 베었다. 변화는 무왕(武王)에게 이 박옥을 바치니, 역시 옥이 아닌 돌로 감정되어 오른쪽 발이 잘렸다.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그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에서 밤낮 3일을 울어대니, 눈물이 다 나오자 피가 나왔다. 문왕이 듣고 옥인을 시켜 다시 쪼개어보게 하여 보옥을 얻었다 한다.《韓非子 和氏》
[주D-181]공벽(孔壁)의 원훈(元勳) : 공벽은 한 무제(漢武帝) 말엽에 노 공왕(魯共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의 벽에서 발견한 고문(古文)의 경전(經傳).《고문상서(古文尙書)》ㆍ《예기(禮記)》《논어(論語)》ㆍ《효경(孝經)》 등이 있었다고 함. 공벽에서 나온《고문상서》 등을 바르게 논증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뜻.
[주D-182]주문(朱門)의 직신(直臣) :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의 제자 중에서 직신이라는 뜻으로 주희의 학문을 바로 지켰다는 말이다.
[주D-183]구이(九夷) :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아홉 종족. 여기서는 우리 조선조(朝鮮朝)임.


ⓒ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섭 (역) ┃ 1985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 신해(1791,건륭 56)

 3월17일 (신묘)
15-03-17[01] 육상궁을 참배하고 봉안각을 봉심하다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봉안각(奉安閣)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선희궁(宣禧宮)·연호궁(延祜宮)·의소묘(懿昭廟)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보각(藏譜閣)을 살펴보았다. 상이 근신들과 함께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잠시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상이 오언근체시(五言近體詩) 1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오년에 사당을 지을 땅을 결정할 때 처음에는 이 누각 아래로 하려고 의논하였으나, 그때 권흉(權兇)이 그 땅이 좋은 것을 꺼려서 동쪽 기슭에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경모궁(景慕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곳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선희궁을 배알할 때마다 늘 이 누대에 오르는데, 이는 아버지를 여윈 나의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누대는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백여 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
【원전】 46 집 211 면
【분류】 *왕실(王室)


[주D-001]임오년 : 1762 영조 38년.






  정조 16년 임자(1792,건륭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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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20일 (기축)
16-03-20[02] 각궁에 배알후 동행한 신하들과 세심대에 오르다

가마를 길에 멈추고 여러 각신들로 하여금 용방(龍榜)에 합격한 자들을 거느리게 하고 여러 장수들은 호방(虎榜)에 합격한 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말과 푸른 일산을 새로 과거에 급제한 남공철(南公轍)에게 주어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청공(文淸公)의 아들에게 특별한 은전을 내리는 것이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도총관 이민보(李敏輔)는 아들 이조원(李肇源)을, 형조 판서 홍억(洪檍)은 아들 홍대협(洪大協)을,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는 아들 조기(趙岐)를 거느리고 아울러 앞에서 인도하며 갔다. 각궁의 참배가 끝나자 심류사(心留舍)에 나아가 근신들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상이 이민보에게 이르기를,
“작년 봄 나의 시에 ‘좌중에 백발이 많으나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을 기울이세.’란 구절이 있었는데, 지금 또 경들과 함께 이 모임을 가졌으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날씨 또한 매우 화창하니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다시 전날 놀던 곳을 찾아보련다.”
하고는, 편여(便輿)를 타고 세심대(洗心臺)에 올랐는데 연로한 여러 신하에게 각각 구장(鳩杖)을 하사하여 오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상이 직접 율시(律詩)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 때마다 반드시 이곳에 오는 것이 어찌 단지 꽃을 구경하는 즐거움 때문이겠는가. 내가 특별히 이곳에 대해서 은근히 잊지 못할 것이 있는데, 여러 신하들은 과연 모두 아는가?”
하였다.
【원전】 46 집 282 면
【분류】 *왕실(王室)




  정조 16년 임자(1792,건륭 57)

 윤 4월9일 (정축)
16-윤04-09[02] 우의정 박종악이 유성한의 처벌을 청하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금일 역적 유성한(柳星漢)의 변고는 저 혼자 꾸민 것이 아니고 반드시 소굴과 근본이 있을 것입니다. 발본 색원(拔本塞源)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 번 엄격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만약 참으로 소굴과 근본이 있는 줄 알면 끝까지 추궁하는 것을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당초부터 소굴과 근본이라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근래에 이 일로 소장이 날로 쌓이니 현재의 상황이 매우 고민스럽다. 그러나 처음에는 금일의 여러 신하들이 당시의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논계(論啓)하도록 맡겨 두었는데, 지금은 점차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의리인데 이처럼 어려움 없이 말하는가. 만약 성한의 정상과 자취가 모두 탄로났다면 사형에 처하든 주벌을 하든 옳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은데 반신반의하는 중에 두어 억지로 사형의 법률을 사용한다면 어찌 이와 같은 형정(刑政)이 있겠는가. 내가 처음에는 그 상소를 범연히 보았기 때문에 근래에 이런 작문이 없었다는 비답을 하였다가, 형조 판서의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렇게 된 까닭[所以然]이니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不必然]느니 하는 등의 글귀가 무심히 쓴 것이 아닌 듯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래 이런 작문은 없었다 하겠다.[可謂近來無此作]’는 7자의 비답은 참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지난번에 빼버리라고 명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정상과 자취를 이미 목격하지 못하였고 또 말이 막중한 자리까지 범했으니, 지금 만약 끝까지 조사하지 않고 급하게 법을 적용한다면 참으로 죄를 상세히 살피는 의리가 아닐 것이다. 설령 세밀하게 캐묻는다 하더라도 어찌 공초를 바칠 리가 있겠는가. 그의 상소 한 장도 오히려 차마 볼 수 없는데 더구나 어떻게 차마 다시 이것으로 문목(問目)을 내어 국문하겠는가.
지난 선조(先朝) 을해년에 여러 역적들을 반드시 모두 한 번 심문한 뒤에 처리한 것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이었다. 내가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한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다. 그가 만약 한결같이 변명한다면 강제로 자백을 받겠는가. 지난번 형조 판서 상소의 비답에서 ‘이에 《춘추》의 필법(筆法)을 빌리고 이에 태아(太阿)의 자루를 시험하였다.’고 한 것은 곧 병신년 이후 처음 있었던 비답이다. 내가 어찌 아무 뜻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병신년의 여러 역적들은 바로 만고(萬古) 이래 천지(天地)가 끝날 때까지의 극악한 역적이지만 저 무리들이 한 짓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금번 일에서 말이 막중한 자리까지 핍박한 것은 곧 병신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형조 판서에게 내린 비답에서 부득이 언급한 바가 있었다.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팔의(八議)의 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또한 제왕가(帝王家)의 성법인데,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 여러 역적이 내가 정사를 보는 일을 가지고 나를 핍박하였을 때도 나는 오히려 한마디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가 그들의 자취와 정사을 알아낸 뒤에 미쳐서 내가 부득이하여 처결하였다. 지금 그의 상소에서 윗조항의 일을 막중한 자리에 연관시킨다면 더욱 경솔히 먼저 처결할 수 없고, 아랫조항의 말로 말하더라도 이처럼 논계(論啓)할 일이 아니니, 이후로 상소에서 빼버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종악이 아뢰기를,
“유생들의 상소에서 이미 ‘성한이 집에 있으면서 흉악한 말을 한 것은 상소에서 보다 더 심하였다.’고 하니, 반드시 들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조사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생들을 어찌 함문(緘問)할 수 있겠는가. 만약 남을 무고했다고 꾸짖으면 반드시 권당(捲堂)하는 조처가 있을 것이니 이러므로 내가 곤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근래에 경조사(慶弔事)를 폐지한 것은 문득 쓸쓸한 뜻이 있어서였는데, 이는 태평 성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지난번 주교(舟橋)를 완성한 뒤에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게 특별히 놀이를 하게 한 것은 노고를 보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부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세심대(洗心臺)를 설치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평범하게 등림(登臨)하는 곳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이었으니 병조 판서의 서문(序文)에서도 그 대략을 말하였다. 대저 사람이 화합하면 천지의 조화(調和)도 응하는 것이니, 놀이를 하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세도(世道)에 관련된 것이다. 근일 풍속이 자못 소조(簫條)함을 깨닫겠으니, 잔치도 벌리고 놀이도 하여 화기(和氣)를 인도할 수 있는 잔치나 놀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다. 이후로는 경들부터 힘써 화합하고 즐기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6 집 294 면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정조 19년 을묘(1795,건륭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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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7일 (무오)
19-03-07[02] 세심대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다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상이 도총관(都摠管) 이민보(李敏輔)에게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에 경들과 함께 올라왔었다. 신해년 봄에 내가 지은 시(詩) 가운데 ‘자리에 앉은 많은 백발 노인들,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 들으리.[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라는 구절이 있었고, 그 이듬해의 이 모임에서 지은 시 가운데에도 또 ‘마음에 맞는 동서울 노인, 탈없이 시짓고 술잔 드누나.[會心東洛老 無又詩樽]’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모두가 경을 가리킨 것이었다. 오늘의 놀이 역시 경이 전담케 해야 하겠다.”
하고, 이어 편여(便輿)를 타고서 선희궁(宣禧宮) 북문(北門)을 나갔다. 나이 6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모두 지팡이를 하사하여 산을 오르는 데에 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옥류천(玉流泉)을 따라 수십 보(步)를 지나가서 세심대에 이르렀다. 상이 장막을 친 자리에 올라가 앉아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매년 이 때가 되면 꼭 이 세심대에 오르는데 이는 경치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은 대개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한가하게 즐기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옛날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가 있고나서 고(故) 중신(重臣) 영성군(靈城君)이 여러 경재(卿宰)와 함께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을 편 적이 있었다. 그때 영성군이 지은 시 가운데 ‘해마다 태평주(太平酒) 들며 길이 취하리.[每年長醉太平杯]’라는 구절이 있었는데,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이다. 경들은 혹시 그런 일을 들어 알고 있는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경사스러운 해이다. 경들이 고사(故事)를 엮어 기술하면서 옛사람들과 아름다움을 짝하여 오늘날의 태평스러운 기상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이달 안으로 날을 잡아서 이곳에 와 모였고 보면 올해의 이 놀이 또한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부터 10년 뒤의 갑자년은 바로 경모궁의 중근(重巹)이 되는 해이다. 그 때에 자궁(慈宮)께서 현륭원(顯隆園)에 가시어 참배하는 일이야말로 정리상으로나 예법상으로나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번에 자궁의 행차를 모시고 갔다가 환궁한 뒤에 수라(水剌)에 사용하는 기명(器皿) 등속을 그냥 본부(本府)에 놔두도록 하였는데 이것도 나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뒤에 경들이 다시 행차를 모신다면 어찌 희귀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경들의 근력(筋力)을 보건대 모두 걱정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이어 초계 문신(抄啓文臣) 김근순(金近淳)에게 명하여 세심대 밑에 거주하는 조관(朝官)과 유생들을 불러와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또 승지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상이 직접 지은 소서(小序) 및 칠언(七言)의 소시(小詩)를 쓰라고 하고, 신하들에게 회답하도록 명하였다. 또 세심대 남쪽에 작은 표적을 설치한 뒤 자리에 참석한 무신 및 문신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또 세심대 아래에 거주하는 무신 및 행차를 따라 온 장교(將校)들도 모두 활쏘기 시합을 벌이게 하고 상을 나눠주도록 명하였다.
꽃을 넣어 지진 떡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이우진(李羽晋)·유사모(柳師模) 등에게 명하여 유생 등 여러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한껏 취하고 배불리 먹게 하는 동시에 이 날의 즐거움을 기록하게 하였다. 남복래(南復來)에게 대내(大內)의 주방에서 만든 음식 한 소반을 특별히 내리면서 하교하기를,
“그대의 아비가 일찍이 계방(桂坊)에 있었던 일이 특별히 생각난다. 돌아가서 처자들과 함께 나누어 먹도록 하라.”
하였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종이와 붓과 먹을 아동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나는 이곳을 이웃 동네처럼 여기고 있다. 이 뒤로 행차가 도착하면 서인(庶人)이나 사인(士人)이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와서 모이되 각각 그 가문의 어른이 이끌고 와서 지영(祗迎)토록 하라.”
하였다. 이날 날씨가 맑게 개이고 경치도 산뜻하였는데, 의장(儀仗)을 구경하고 음악 소리를 들으려고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양쪽 기슭에 빽빽히 모여들었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이 해에 이 놀이를 하면서 골고루 혜택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떡과 밥을 나누어 먹이게 하였다. 또 영상과 우상에게 각각 법악(法樂) 1부(部)씩을 보내 집까지 인도하게 하였다.
【원전】 46 집 565 면
【분류】 *왕실(王室)


[주D-001]신해년 : 1791 정조 15년.
[주D-002]중근(重巹) : 결혼 60주년을 말함. 회혼(回婚).
[주D-003]계방(桂坊) :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의 별칭.



 정조

 부록
정조 대왕 행장(行狀)


- 전략


선희궁(宣禧宮)을 배알하고 세심대(洗心臺)에 나아가 제신들에게 술을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해마다 이때면 내가 꼭 이 대에 오는 것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정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옛 을묘년 나라 경사 때 고 중신 박문수(朴文秀)가 여러 경재(卿宰)들과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쁨과 축의를 표했었는데 그때 영성군(靈城君)의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는 운대가 바로 이곳이다. 금년 역시 천재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이니 경들도 전인(前人)들이 했던 것처럼 이 태평 연월을 한번 빛나게 장식해보게나.”
하였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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