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시와 그림] 3. 정조와 신료들의 갱화시(賡和詩) 抄錄

2016. 2. 5. 09:04茶詩



          [차, 시와 그림] 3. 정조와 신료들의 갱화시(賡和詩)    原稿 資料 抄錄


     갱화시(賡和詩) : 임금이 어제시(御製詩)를 짓고 신료들이 어제시의 운에 따라 화답하는 시





         登洗心臺賞花口占示諸臣和之以茗熟

          등세심대상화구점시제신화지이명숙위령


                                                /    정 조<正祖 1752(영조 28)∼1800(정조24) >

                                                                           재위 1776∼1800


                - 정조 15년(辛亥 , 1791년) 춘삼월 왕은 신하들과 세심대에 올라 꽃을 완상하면서

                  찻자리를 펼쳐놓고 차화로에 불을 피우고 차솥을 올려놓고 시 한수 짓고 나서,

                  여러 신하들에게 차(茗)를 달이면서 차가 뜸이들어 익을(熟) 때까지

                  과인이 지은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 갱화시회(賡和會)에는 75세의 공조판서(工曺判書) 이민보(李敏輔), 65세의 제학(提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수어사(守御使)가 참석하였다.




        가일방춘절   暇日芳春節            꽃이 만발한 어느 한가로운 봄날에

        심대세속훤   心臺洗俗暄            세심대의 따사로움으로 속진을 씻어보자.

        양산진일호   兩山眞一戶            두 산은 마치 한 집과 같이 가까웁고

        천수역동원   千樹亦同園            이어진 숲으로 한 원림내에 있는 것 같구나!!

                        

        염염청광정   豔豔天光靚            하늘빛은 봄날의 농염함으로 단장하고

        등등지세존   登登地勢尊            오르고 또 올라도 지세 또한 포근하네.

        좌간다호발   坐間多皓髮            자리에 앉은 老臣들의 백발이 늙어가니

        내세우금준   來歲又今樽            내년에도 오늘처럼 찻잔을 기울이세.


       *** 명숙(茗熟) : 정조의 어제시 제목에 차가 뜸이들어 익을 때까지라는 의미인 명숙(茗熟)

                     쓴 것과 어제시를 짓고 이에 화운(和韻)하여 신료들이 갱화시(賡和詩)를 지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사용한 다법은 차를 오래 달이는

                     전다법(煎茶法)으로 보인다. 또한 명(茗)은 차싹이 어느 정도 자라나서 상당히 큰 찻잎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당시 궁중에서도 어린 찻잎으로 만든 작설차 계통의 차가 아니라

                     차싹이 자라 광합성이 충분히 작용하여 풍미가 완연한 찻잎으로 만든 차를 상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조판서 홍양호 洪良浩의 화답시>


         辛亥三月上詣宣禧宮歷臨洗心臺賞花御製命侍臣賡和

            신해삼월상예선희궁역임세심대상화어제명시신갱화


              이날 찻자리에 참석한 열여섯 명의 재신(宰臣)들 중의 한 사람인 이조판서 홍양호 洪良浩가

              지은 정조의 명에 의한 화답시이다. 본관은 풍산 豊山, 초명 初名은 양한 良漢,  자 字는 漢師,

              호 號는 이계 耳溪이다. 경종 4년(1724년)에 태어나 순조(純祖) 2년(1802년)에 졸 卒하였다.



     일난용기전      日暖龍旂轉          햇살 따사로운 봄날에 용깃발은 나부끼고

     화영봉취훤     花迎鳳吹喧           꽃들은 떠들썩한 생황소리를 맞이하네.

     청란수곡수     淸鑾隨曲水           맑은 차 담긴 방울잔 유상곡수를 따라 흐르니

     행악항명원     行幄抗名園           이동식 차일막이 아름다운 원림에 거슬리누나.

                           

      백악신도장    白嶽神都壯           백악동천의 기세가 비롯 장엄하고

      홍운보탑존    紅雲寶榻尊           저녁노을 임금의 탑상 앞에 비끼어 있네.

      신장모희기    宸章侔喜起           임금님의 싯귀에 모두들 기뻐하며 따르니

      화기일구준    和氣溢衢樽           화기 또한 십자모양의 찻잔에 넘쳐납니다.

    


    *** 봉취(鳳吹) : 생황은 그 모양이 봉황을 닮고 그 소리가 봉황의 울음소리를 닮은 

                       여러개의 대나무로 만든 국악기 중에 유일한 화음악기(和音樂器)이다.

        청란(淸鑾) :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물위에  뜨고 쉽게 가라앉지 아니하게

                       만든 찻잔(또는 다완茶椀)이나 술잔.

        행악(行) :  원행 갈 때 야외에 설치하는 이동식 천막.

        신장(宸章) : 임금, 스승 ,윗어른의 문장에 대한 존칭어.                      

        구준(衢樽) : 윗부분을 열십자 모양으로 만든 찻잔이나 술잔으로 쓰이는 잔.





     <승지 이만수 李晩秀가 지은 화답詩>



                            洗心臺賡韻

                         세심대갱운


      

                승정원 承政院 승지 承旨 이만수 李晩秀가 정조의 명에 의해 지은 화답시구이다.

              본관은 연안 延安, 자는 성중 成中, 호 號는 극원 屐園, 서소주인 書巢主人이다.

              영조 28년(1752년)에 태어나 순조 20년(1820년)에 졸하다.




       제신관례수       諸臣寬禮數        여러 신하들은 모두 예의에 억매이지 말고

       천허취중헌       天許醉中喧        성상님께서 차와 술에 취하여 떠들석함을 허락하셨으니.

       일세농화절       一歲弄花節        일생에 한번 이 꽃피는 계절을 희롱하며 놀아봅시다.

       천가방수원       千家芳樹園        여러 집들이 보이는 꽃나무 많은 정원에서

       춘선신조득       春先宸藻得        봄날 먼저 성상님께서 내리신 순채국을 마셨네.

       대자가림존       臺自駕臨尊        누대에 임금님의 수레가 임하셨도다.

       경회지다일       慶會知多日        이런 경사스러운 모임은 앞으로도 여러 날이 있겠지만

       봉래유법준       蓬萊有法樽        전하께서 내리신 술잔이 있으니 선경이 따로 있을소냐!!


   - 최지영 著 <조선왕궁과 사림 士林의 다도 茶道>  참조

                                               민속원, 2009년 8월 발간

  




정조가 할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사묘(祠廟)가 있던 선희궁터에 

부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지을 계획으로 자주 찾았으며,

아버지를 여윈 애통한 마음을 달래려고 인근에  세심대(洗心臺)설치하고 

누대에 올라 비운에 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사모의 정을 기렸다.



아래 <참고 자료>에 인용한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의 4개 기사와

다산 정약용의 한시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다산시문집 제4권)>

"세심대 상춘(洗心臺賞春)" 庚辰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정조가 말하는 세심대는 당시 필운대(현 서울농학교 인근)라고 부르고 있으나,

지금의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현 배화여고 인근)와는

동북쪽으로 서로 약 1km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


정조는 세심대를 필운대로 통칭해 불렀는데 정조가 지칭한 필운대는

오늘날 백사 이항복 집터로 알려진 곳보다 범위가 넓어 인왕산 동편 아래 상당 부분을

필운대로 부른 듯하다. 실제로 인왕산을 필운산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1537년(중종 32년) 명나라 사신  오희맹吳希孟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 요청했는데, 그때 인왕산을

'우필운룡(右弼雲龍 :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에서 따와 '필운'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인왕산 전체 이름으로 채택되지는 않고 다만 인왕산 동쪽 기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 필운봉으로 남았다.


이 명칭은 오늘날 필운동과 필운대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백사 이항복의 옛 집터인 배화여자고등학교 본관 뒤뜰에 필운대라는 암벽으로 된

누대樓臺 이름은 그 뒷산인 인왕산의 필운봉에서 취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6년 임자(1792,건륭 57) 3월20일 (기축)  기사

“작년 봄 나의 시에 ‘좌중에 백발이 많으나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을 기울이세.’란 구절"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위의 갱화시회를 연 날은 한해 전 꽃피는 봄날인

 정조 15년(1791년) 봄 음력 3월 17일이다.





정선鄭敾(1676-1759) <필운대 상춘弼雲臺賞春>



     정조의 즉위(재위 1776∼1800) 이전에 겸재 정선이 졸(卒 1759년)하였으므로

 아래 그림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은 당시의 갱화시회를 그린 기록화가 아니나

이 그림을 통하여 당시의 광경을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정조는 이 세심대 즉 필운대에서 마을 사람들과도 자주 잔치를 벌였다.                                    

                                        



정선鄭敾(1676-1759)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27.5x33.5cm


그림 왼쪽 상단부에 미점준으로 소나무를 짙은 농묵으로 그린 산은 남산이고,

남산 너머로 일부가 보이는 산은 청계산.

그림 오른쪽 상단부에 있는 뾰죽뾰죽한 암산은 관악산,

관악산 앞에 가까이 보이는 이층누각은 숭례문인 남대문이다.


                                                                                             사진 자료 : 한국미술정보개발원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 중 세심대(洗心臺)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에 세심(洗心臺) 그림이 한 폭을 차지한다.

그림 왼쪽 중상단에 그려진 창의문 인근의 한양성곽으로 보아

지금의 서울농학교 뒷산에 있는 세심대를 그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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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팔경(壯洞八景)’은 청송당(聽松堂) · 취미대(翠微臺) · 백악산(白岳山) · 청하동(靑霞洞) ·

청풍계(淸風溪) · 수성동(水聲洞) · 인왕산(仁王山) · 세심대(洗心臺)





필운대(弼雲臺)

 


 


선조 때 백사 이항복은 장인인 권율의 집에 기거하면서 호를 필운(弼雲)이라 하였고

그 바위에 필운대(弼雲臺)라 각자를 새겼다고 한다.


현재는 배화여고 본관 뒷편에 위치한 곳으로 필운대 각자가 남겨져 있고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항복의 9대손 이유원이 조상의 집을 찾아와

그 감흥을 시로 써서 필운대에 기록을 남겼다.






                          <참고 자료>



"洗心臺賞春" 庚辰

                                茶 山   丁若鏞


인왕산이 비스듬히 세심대를 끼고 있어 / 仁王斜抱洗心臺
님 수레가 일년 일차 꽃구경을 오셨다네 / 玉輦看花歲一廻
구름이 산을 막아 그대로 막차이고 / 雲擁翠微開幕次
꽃시내를 흐르는 물 술잔 띄우기 알맞아 / 水流芳澖汎觴杯
고요한 이빈의 궁 드문드문 버들이요 / 李嬪宮靜垂疎柳
깊숙한 서씨 정원 매화가 비쳤었지 / 徐氏園深映遠梅
독보라는 휘호를 지척에서 하시면서 / 咫尺揮毫稱獨步
몇 번이고 님께서 이 비재를 인정했는데 / 幾回天語獎菲才


   이는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시다. 세심대는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있는데 그 아래 선희궁(宣禧宮)이 있음.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다산시문집 제4권



- 선희궁 터이 터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사묘(祠廟)인 선희궁이 있던 자리로, 처음 의열묘였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선희궁이라 개칭되었고, 육상궁에 모셨던 영빈의 신주를 1908년(융희 2)에 이곳으로 옮겼다. 1975년 5월 12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위(神位)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된 사묘(祠廟)의 자리이다. 사묘는 조선시대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이 그의 모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1764년(영조 40)에 영빈이씨가 죽고 이듬해 의열(義烈)이라는 시호에 추증되면서 사당의 명칭을 의열묘(義烈廟)라고 불렀다. 뒤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며 영빈이씨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 1788년(정조 12)에 그 격을 높여서 선희궁이라 개칭되었다. (중략) 이 터는 서울선희학교에서 개칭된 현재 서울농학교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심대의 의미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봉안각(奉安閣)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선희궁(宣禧宮)·연호궁(延祜宮)·의소묘(懿昭廟)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보각(藏譜閣)을 살펴보았다. 상이 근신들과 함께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잠시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상이 오언근체시(五言近體詩) 1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오년에 사당을 지을 땅을 결정할 때 처음에는 이 누각 아래로 하려고 의논하였으나, 그때 권흉(權兇)이 그 땅이 좋은 것을 꺼려서 동쪽 기슭에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경모궁(景慕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곳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선희궁을 배알할 때마다 늘 이 누대에 오르는데, 이는 아버지를 여윈 나의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누대는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백여 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 - 정조 15년 신해(1791,건륭 56) 3월17일 (신묘)  <조선왕조실록>



 - 상이 이민보에게 이르기를,
“작년 봄 나의 시에 ‘좌중에 백발이 많으나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을 기울이세.’란 구절이 있었는데,  지금 또 경들과 함께 이 모임을 가졌으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날씨 또한 매우 화창하니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다시 전날 놀던 곳을 찾아보련다.”

하고는, 편여(便輿)를 타고 세심대(洗心臺)에 올랐는데 연로한 여러 신하에게 각각 구장(鳩杖)을 하사하여 오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상이 직접 율시(律詩)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 때마다 반드시 이곳에 오는 것이 어찌 단지 꽃을 구경하는 즐거움 때문이겠는가. 내가 특별히 이곳에 대해서 은근히 잊지 못할 것이 있는데, 여러 신하들은 과연 모두 아는가?”
하였다.  - 정조 16년 임자(1792,건륭 57) 3월20일 (기축) <조선왕조실록>




- 또 전교하기를, "근래에 경조사(慶弔事)를 폐지한 것은 문득 쓸쓸한 뜻이 있어서였는데, 이는 태평 성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지난번 주교(舟橋)를 완성한 뒤에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게 특별히 놀이를 하게 한 것은 노고를 보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부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세심대(洗心臺)를 설치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평범하게 등림(登臨)하는 곳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이었으니(卽寓慕之意) 병조 판서의 서문(序文)에서도 그 대략을 말하였다. 대저 사람이 화합하면 천지의 조화(調和)도 응하는 것이니, 놀이를 하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세도(世道)에 관련된 것이다. 근일 풍속이 자못 소조(簫條)함을 깨닫겠으니, 잔치도 벌리고 놀이도 하여 화기(和氣)를 인도할 수 있는 잔치나 놀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다. 이후로는 경들부터 힘써 화합하고 즐기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 - 정조 16년 임자 (1792, 건륭57), 윤 4월9일 (정축)   <조선왕조실록>

 



- 상이 이르기를, “매년 이 때가 되면 꼭 이 세심대에 오르는데 이는 경치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은 대개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한가하게 즐기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옛날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가 있고나서 고(故) 중신(重臣) 영성군(靈城君)이 여러 경재(卿宰)와 함께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을 편 적이 있었다. 그때 영성군이 지은 시 가운데 ‘해마다 태평주(太平酒) 들며 길이 취하리.[每年長醉太平杯]’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이다. 경들은 혹시 그런 일을 들어 알고 있는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경사스러운 해이다. 경들이 고사(故事)를 엮어 기술하면서 옛사람들과 아름다움을 짝하여 오늘날의 태평스러운 기상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이달 안으로 날을 잡아서 이곳에 와 모였고 보면 올해의 이 놀이 또한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 정조 19년 을묘(1795,건륭 60) 3월7일 (무오) <조선왕조실록>


***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 : 사도세자의 탄생을 지칭함

     고(故) 중신(重臣) 영성군(靈城君) : 암행어사로 이름난 박문수.



                                                                                                - 한국고전종합DB 자료 db.itkc.or.kr


<초록숲이의 문화재 이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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