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대에 오른 정조

2016. 2. 5. 12:59茶詩



      

세심대에 오른 정조



요약 테이블

관련 장소 인왕산


   필운대와 세심대(洗心臺)의 위치는 오늘날 구분하기 어려운데 실록을 보면 그 자리를 어림할 수 있다. 1795년 3월 7일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혼례를 치른 기념일이다. 정조는 심란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영의정 홍낙성과 우의정 채제공을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세심대에 올랐다.

임금이 도총관 이민보에게 이르기를, 매년 경들과 함께 이곳에 올라오는데 신해년(1791년) 봄에 내가 지은 시 가운데 '자리에 앉은 많은 백발 노인들,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 들으리(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그다음 모임에 지은 시 가운데에도 또 '마음에 맞는 동서울 노인, 탈 없이 시 짓고 술잔 드누나(會心東洛老 無恙又詩樽)'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모두가 경을 가리킨 것이었다. 오늘 유흥도 역시 경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 《정조실록》, 1795년 3월 7일

정조는 편여(便輿)를 타고 선희궁(지금 이곳은 종로구 신교동 1-1번지로, 서울농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북문을 나섰다. 날씨도 맑게 개고 경치는 산뜻했다. 정조는 60세가 넘는 신하들에게는 모두 지팡이를 하사해 산을 편하게 오르도록 했다. 옥류천을 따라 수십 보를 걸으니 세심대에 당도했다.

매년 이때가 되면 꼭 세심대에 오르는데 이는 경치 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개 경모궁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한가하게 즐기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옛날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사도세자 탄생)가 있고 나서 영성군 박문수가 필운대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을 편 적이 있다. 그때 영성군이 지은 시 가운데 '해마다 태평주 들며 길이 취하리(每年長醉太平杯)'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다. 경들은 보았는가?

지금부터 10년 뒤의 갑자년은 바로 부모님이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10년이 지난 뒤에 경들이 다시 행차를 모신다면 어찌 희귀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 《정조실록》, 1795년 3월 7일

정조는 말을 맺고 세심대 밑에 거주하던 관리들과 유생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승지 이만수에게 쓰라 명하고 신하들도 회답하라 했다. 이어 남복래에게 주방에서 만든 음식 한 소반을 특별히 하사하며 "그대 아비가 일찍이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에 있던 일이 생각난다. 돌아가서 처자들과 함께 나눠 먹으라"라고 말했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아이들에게 종이와 붓과 먹을 나누어 주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나는 이곳을 이웃 동네처럼 여기고 있다. 이 뒤로 행차가 도착하면 서인(庶人), 사인(士人)이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와서 모이되 각각 그 가문의 어른이 이끌고 와서 나를 맞아라"라고 하였다.

이날 세심대에 오른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이 터는 선희궁(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이 있는 자리다." 오늘날 서울농학교 뒤편으로 짐작되는 세심대 부근에는 아직도 '후천(后泉)'이란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왕후의 샘물'이란 뜻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와 관련된 지역에는 항상 이렇게 '우물 천(泉)'이 표시돼 있는데, 궁궐에서 물을 긷던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를 추억하며 새긴 글자로 보인다. '천' 자는 창경궁 통명전 뒤나 경희궁 태령전 뒤편 작은 샘물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영조는 궁궐 우물가에도 '후천'이나 '열천(冽泉: 《시경》에 나오는 말로 '이가 시리도록 맑은 물'이란 뜻)'이란 글귀를 즐겨 새겨 넣었다.

정조는 그날 인왕산 주변 백성에게 자신의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이 동네와 깊은 관련이 있다며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마음이라고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임금과 백성이 모두 한동네 사람임을 강조한 것은 백성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정조는 물론 영조와 순조도 이곳에 거둥해 마을 백성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던 전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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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심대 부근으로 짐작되는 서울농학교 뒤편으로 올라가는 바위에 새겨진 ‘后泉(후천)’.



‘后泉(후천)’ 글자 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정조는 세심대를 필운대로 통칭해 불렀는데 정조가 지칭한 필운대는 오늘날 백사 이항복 집터로 알려진 곳보다 범위가 넓어 인왕산 동편 아래 상당 부분을 필운대로 부른 듯하다. 실제로 인왕산을 필운산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1537년(중종 32년) 명나라 사신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 요청했는데, 그때 인왕산을 '우필운룡(右弼雲龍: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에서 따와 '필운'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명칭은 오늘날 필운동과 필운대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세심대 올라가는 길 

                                        
세심대에서 바라본 남산 
                                        

   서울농학교 교정을 지나 학교 뒤편 동산에 오르면 선희궁 정자각이 보이고 그 뒤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 옛날 정조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나온다. 실록에 묘사된 풍경과는 다르지만 바위에 새겨진 후천이란 글씨는 여전히 또렷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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