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첫 수도 졸본은 지금 요양이다- 광개토왕 비문

2016. 2. 16. 06:56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첫 수도 졸본은 지금 요양이다- 광개토왕 비문| ☆ 역사 탐방

최민주 | 2001.12.16. 13:32


   

   첫 수도 졸본은 지금 요양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광개토왕비문에 있는 홀본(忽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고구려사 연구자들은 홀본과 졸본이 음운학적으로 같은 것이라 하여 같은 말로 보아 넘기고 더 깊이 그 의미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홀본과 졸본은 전혀 다른 말이고 다른 뜻을 갖고 있다. 홀본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홀(忽)의 의미부터 찾는 것이 순서이다. 홀은 우리가 단군조선사를 검토하려 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문자이다. 그것은 낙랑홀·숙신홀·엄려홀 등 홀자가 붙은 명칭이 국가명칭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시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제정일치시대였다. 단군조선은 4개 제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군왕검이 있는 중앙의 조선국과 동남쪽을 다스리는 동남제후국인 낙랑국 그리고 동북쪽을 다스리는 동북제후국인 숙신국과 서남쪽을 다스리는 서남제후국인 람국(연나라) 등 4개의 제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의 조선국에 머물며 왕권을 행사하던 왕검은 일정한 시기에 한 번씩 3개 제후국을 차례로 돌면서 하늘에 제사하고 소속을 확인하며 단합행위를 했다. 제사행위를 거행할 때에는 왕검이라는 왕이 단군이라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바뀌어 그 나라에 건립되어 있는 천신당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 때 단군과 제후국의 왕이 제사 드리는 대상은 천지를 창조한 개벽신과 단군조선을 개창한 국조신 그리고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지씨, 전쟁신 치우씨, 곡식을 주관하는 고시씨였다. 이를 위해 낙랑국에서는 소루달이라는 곳에 사당을 세워 그 이름을 낙랑홀이라 하고 고시씨를 모셨고, 숙신국에서는 숙사달이라는 곳에 사당을 세워 숙신홀이라 하고 신지씨를 모셨으며, 람국(연국)에서는 엄려달에 사당을 세워 엄려홀이라 하고 치우씨를 모셨다.(이상 규원사화 참조) 이상의 내용에서 기동성이 빠른 기마 유목민의 수장이 왕명을 전달하는 신지씨였고, 만주벌판과 한반도의 곡창지대의 수장이 곡식을 주관하는 고시씨였으며, 서쪽의 외침세력을 막는 전쟁터의 수장이 전쟁을 주관하는 치우씨였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서쪽은 전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쟁지대이고 동북쪽은 기마민의 유목지였으며 동남쪽은 정착민이 평화롭게 농사짓는 곳이었다. 목축과 농경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전사들, 이들을 다스리는 왕검, 상당히 분업화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인류가 해 뜨는 곳을 바라보며 동으로 동으로 신천지를 찾아 최후로 도착하여 정착한 땅, 이 곳을 전문집단으로 분리통치한 단군조선은 비록 에덴동산은 아닐지라도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사회를 만들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또 지켜준 데 대한 감사의 제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사당을 짓고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제천의식이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곳 즉 신이 모셔져 있는 사당을 ××홀이라 이름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시기에 와서는 이 ××홀이 지명과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을 명칭과 ××홀이 뒤섞여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자들까지도 고구려군현다칭홀(高句麗郡縣多稱忽)이라 한 이 ××홀은 군·현 명칭이 아님은 물론 고을 명칭이나 지명도 아니다. 그것은 이 ××홀이 한 고을에 많게는 4개까지 있고, 2 ∼ 3개의 ××홀이 있는 고을도 몇 곳 있기 때문이다. 또 ××홀이 있는 곳은 거의 모두가 반전맥의 끝 부위 또는 반전맥의 가지맥의 끝 부위에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반전맥은 회룡고조란 전문용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기준으로 보면 북위 39。선 이북에는 단 한 곳도 ××홀이 없다. 39。선 이북에는 굵고 크게 반전한 맥이 거의 없다. 고구려왕실은 풍수지리상 명당혈이 있는 곳에 왕릉을 구축하고 그 위에 사당을 짓고 사당 당호를 지을 때 단군조선 시대의 개벽신들을 모신 성스러운 곳의 칭호를 살려 ××홀이라 이름함으로써 성골이 모셔진 곳을 성역화 하려 했다. 따라서 ××홀이 있는 고을엔 고구려왕릉과 왕릉에 달린 사당이 있다. 이들 여러 곳에 많이 흩어져 있는 사당들은 모두가 시조왕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여러 사당의 근본이 되는 사당은 시조사당이며 고구려왕릉에 달린 사당을 ××홀이라 했으므로 '모든 ××홀의 근본'은 제홀근본(諸忽根本)이다. 이를 약해서 홀본(忽本)이라 했고 이것을 비문에서는 비류곡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곡은 비류수변의 골짜기를 말하고 비류수와 졸본천은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졸본천변이 더 넓게 펼쳐져 사람이 많이 살게 되어 후일 이 곳을 졸본이라 범칭하게 되었다. 비류곡은 졸본의 일부분으로 흡수되었다. 따라서 시조사당(홀본)이 있는 비류곡도 후일에는 졸본이라 했다. 마치 궁성이 있던 한성이 한양 속에 흡수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시조사당이 있는 곳이 곧 졸본이다. 시조사당은 동명왕묘라 하기도 하고 또 주몽사당이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몽사당은 요동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성은 지금 요양을 말함으로 첫 수도 졸본은 지금 요양이다. 혹은 주몽사당이 고구려민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여러 곳에 있었다고 보고 이 주몽사당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한 보장왕 4년조의 기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난 주몽사당은 단 한 곳 이 요동성 뿐이다. 그리고 이 요동성에 있는 주몽사당에는 [섬모와 쇄갑이 있는데 '전연' 때에 하늘에서 내려보낸 것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연'을 모용수가 세운 전연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의 '전연'을 그렇게 보면 안되고 '전의 연나라' 즉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의 연나라로 보아야 한다. 섬모와 쇄갑은 시조가 착용하고 또 휴대했던 무구를 시조사당에 함께 모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섬모와 쇄갑은 흔한 무구이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시조왕을 생각하게 하는 기념물이다. 그런데 그것을 고국원왕 19년 서기 349년에 모용준에 의해 개창된 전연 때의 무구로 해석하면 크게 어긋난다. 고구려의 방방곡곡에 주몽사당을 짓고 백성들이 시조왕을 경배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좋은 발상이고 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대 왕 중 몇몇이 일부러 찾아가 시조묘(주몽사당)에 제사올린 그 사당은 바로 졸본에 있는 사당이었고 그것은 지금 이 요동성에 있는 주몽사당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했다]는 기록이 자주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왕이 제사한 시조묘 즉 주몽사당은 이 요동성에 있는 주몽사당을 말한다. 따라서 졸본은 요동성 즉 지금 요양이다. 환인이 아니다. 


   첫 수도 졸본은 환인이 아니라 요양이다. 한국이나 이북의 역사연구자들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의 위치를 지금 중국 요녕성 환인현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그 내용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제작하여 교육시키고 있다. 이북의 교과서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그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남·북 역사학계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의 위치를 환인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 본 결과 '고구려의 첫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어야 하니 환인에 비정한다' 라는 내용 외에 다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첫 수도의 위치를 정하려면 문헌학적 고고학적 자료로 뒷받침할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사를 조명함에 있어 저명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닌데 왜 하필이면 환인만을 저명한 곳이라 하고 그 곳을 졸본으로 정했는지 알 수 없다. 문헌학적 고고학적 자료를 찾을 수 없으면 첫 수도는 중요한 것이니까 위치미상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닌 가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첫 수도를 위치미상이라 하여 그 위치를 정하지 않고는 고구려사를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단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첫 수도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절박한 문제였다. 그래서 선행연구자들 몇몇이 모여 논의를 거듭하다 '저명한 곳'으로 분류되는 몇 군데 후보지를 놓고 삼국사기 기사들과 견주어 가장 그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환인을 선택하게 되고 이를 '비정'이라 표기하기로 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후 이 비정은 정설처럼 굳어져 이를 바탕으로 해서 고구려사를 연구하게 되고 이런 연구의 실적들이 쌓이고 모여서 이제는 이 '비정'을 고쳐서는 안될 정설, 아니 정설이어야 하고 정설이 아니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대강 감으로 정한 첫 수도 졸본의 위치인데 이에 대해 자료를 찾아 정확한 위치를 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55년여가 경과했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고구려사를 연구하면서 첫 수도의 위치를 환인에다 고정시키고 전·후 또는 좌·우를 살피다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고전의 기록을 무시하곤 했다.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이론을 개발한 것만큼이나 큰 연구성과를 얻은 것처럼 대접받게 되었고 이에 맛 들린 연구자들이 너나없이 기존의 기록물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경쟁대열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기록물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면 할 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 누구도 이에 맞설 수 없으며 맞서려는 자는 가차없이 협공하여 제자리를 보존하기 힘들게 하는 풍조가 은연중에 자리잡은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부탁으로 행해진 것도 아니지만, 다른 나라는 이들에게 연구의 기회를 준다고 불러 학위를 주고 더욱 돈독하게 대접함으로서 이들을 고무했다. 이런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열등감을 갖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민족을 외면한 이런 소수의 집단이 유구한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에도 내 알 바 아니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에만 열심을 다하는 것이 과연 오른 일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들이 정한 고구려의 첫 수도 위치가 환인이라면 유리왕이 서쪽으로 양맥을 친 기사도 양맥에서 더 서쪽으로 진군하여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쳐 빼앗은 것도 만주벌판에서의 일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거기에 이의를 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첫 수도의 위치는 중요한 것인데 선행연구자들이 너무 서둘렀거나 아니면 서로에게 미루었거나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구려사를 해석하다 보면 3대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친 기사도 동부여의 위치혼돈으로 함경북도 쪽에서의 일로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동남쪽으로 내려와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있으므로 졸본의 서북쪽에 동부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물들로 보면 환인을 졸본으로 하고 함경도 방면에서 동부여의 위치를 찾아 논하고 있다. 환인이 졸본이라 하더라도 서북쪽에 동부여가 있었으니까 심양 방면에서 동부여를 찾는 것이 순리이다. 이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인데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만큼 초기연구자들의 명성에 눌려 버린 탓일 것이다. 


    학문적 이론은 뒤집히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뒤집는 세상에서 왜 우리라고 선행한 특정연구자의 주장을 뒤집지 못하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이제부터라도 새 이론을 받아들이고 새 이론을 바탕으로 그동안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나가면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해 나가면 어느 이웃 나라보다도 앞서 갈 수 있다. 따라서 이 중요한 첫 수도 졸본의 위치가 환인이 아니라 요양이라는 사실을 하루 빨리 공인되어야 한다. 고고학적 견해로도 환인과 집안(국내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곳)에는 "2세기를 포함 2세기 이전의 고구려문화 유물은 하나도 없다"고 길림성박물관장 왕건군씨가 말했다. 


  오종철 참고 문헌; (한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신주해](구미서관, 2000) 

           다시찾은[고구려 정사(正史)](을지서적, 1993)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인식(김정배·유재신, 대륙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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