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의 연경성은 바로 고구려의 남소성관할로 발해 막힐부이며 옛 동평군이자 옛 요양

2016. 2. 16. 07:15우리 역사 바로알기



       요나라의 연경성은 바로 고구려의 남소성관할로

발해 막힐부이며 옛 동평군이자 옛 요양이었다. | 발해영토

history author |  2014.02.14. 16:48


금나라때 제작된 거란지리도인데 남경이 유주에 있고 별도로 연경이 또 존재한다.

 혹시 금나라의 초기 남경을 표기했나 싶어 자료를 찾아봤는데 금나라의 초기 남경은 평주이다.

 

《요사》 본기(本紀)를 보면, “태조(太祖) 3년(909)에 요동에 행행(幸行)하였다. 신책(神冊) 3년(918)에 요양고성에 행행하였다. 4년에 동평군(東平郡)을 세웠다. 천현(天顯) 1년(926)에 비로소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격해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자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하였다. 이에 동단국(東丹國)을 설치하였다. 태종(太宗) 3년(928)에 동단국의 백성을 동평군으로 옮겼다해동역사 속집 제9권 > 지리고(地理考) 9 >

 

南京留守司。太宗天顯三年升東平郡為南京,治遼陽。十三年以幽州為南京

요사

928년에 동평군을 남경으로 했고 치소는 요양이다.938년에 유주를 남경으로 했다.

거란지리도와 요나라기록을 비교하면 해답이 풀린다. 남경이 2개인데 하나는 동평군이고 하나는 유주이다. 그럼 지도상의 연경은 바로 동평군임을 알수 있다. 왜냐면 요나라 남경이 연경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평군은 바로 요양의 옛성이다. 즉 구요양이다.거란국지에는 요나라는 발해의 부여성을 점령한뒤 동경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그곳이 동경요양즉 신요양이다.

명나라지리지에도 구요양과 신요양은 수백리의 거리이다. 그런데 조선말기에는 구요양과 신요양이 거의 바로 근처라고 착각하게 된다.

 

 

東平府,上,天平軍節度。宋東平郡,舊鄆州,後以府尹兼總管,置轉運司。產天麻、全蠍、阿膠、薄荷、防風、絲、綿、綾、錦、絹。戶一十萬八千四十六。縣六、鎮十九:須城有梁山、濟水、清河。

  東阿有吾山、穀城山、黃河、阿井。鎮五景德、木仁、關山、銅城、陽劉。

  陽谷有黃河、碻磝津。鎮二樂安、定水。

  汶上本名中都、貞元元年更為汶陽,泰和八年更今名。有汶水,大野陂。鎮一柴城。

  壽張大定七年河水壞城,遷於竹口鎮,十九年復舊治鎮一竹口。

  平陰有鬱蔥山、鴟夷山。鎮九但歡、安寧、寧鄉、翔鸞、固留、滑口、廣裏、石橫、澄空、傅家岸。

금사

동평부는 송나라 동평군이다.현이 6개 있다. 동아현에는 곡성산이 있고 황하가 있다. 양곡현에는 황하가 있다. 문상현은 본래 이름은 중도이다.1153년 문양으로 개명했다

  .

 

동평군은 고대 제나라즉 청주의 영역에서 봤을때  청주서부변경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인데 청주의 서쪽 최대변경은 면수의 동쪽이다. 

그럼 동평군은 당연히 면수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



 

  청나라고지도는 대부분의 지도가 그러하듯이 고적 위주로 그린다.

 즉 유명한 산이나 강 성곽등을 위주로 그리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산이 더 크다 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그리는데 주로 동이족과 연관된 것을 많이 그렸다.

지들도 동이족이니까.....


 

   저곳은 요나라 당시 소주와 복주의 동쪽부근이다. 요나라의 동평군이자 송나라에서도 동평군 금나라에서도 동평군이라고 불렀던 곳은 바로 곡성산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거란지리도상의 요나라의 연경이 바로 저곳이란 설명이 된다.

 

 䧺縣漢易縣。屬涿郡。後漢屬河間國。晉改易城縣。唐初置026_052d義州。貞觀州廢。宋置歸信縣。政和中。爲易陽郡。大明改州爲䧺縣。屬保定府。自任邱百里也。界東標。召公遺化。乃召公之封邑。而自保定界。燕地故也。䧺河源自安州。流經本縣東。合易水。達直沽河入海。易京城南臨易水。漢公孫瓚據幽州。有童謠。燕南垂。趙北際。中間不合帶如礪。唯有此中可避世。瓚以易京地當之。乃築城以自固。修營壘樓。積糓於中。尋爲袁紹所破。均樂亭。舊名望山亭

소전집(少痊集) >(조선중기문헌집)

웅현은 한나라때 역현이다.  탁군에 속했다. 당나라초기에 의주를 두었다가 정관연간에 주를 없앴다. 옛 망산정이 있다

 

   역현은 연나라의 하도(河都)라고 한다. 조그만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에  도읍지가 여러 곳있었다. 북평, 랑향(중도), 역현(하도)라고 한다. .  소전집은 조선중기문헌으로  명나라의 지명에 대한 옛기록들을 종합해서 적어놓은 것이다. 명나라의 역현이 낙양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청나라고지도에 곡성산 근처에 망산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럼 서쪽에 있는 함곡관이 원래는 거용관이거나 천진관일 수도 있다.

 

良鄕春秋時。燕中都地。漢爲良鄕縣。屬涿郡。晉屬范陽國。唐屬幽州。後改固節縣。尋改良鄕。大明因之。屬順天府。自涿州七十里也。遼石岡在東。金史作料石岡。上有佛㙮。金時建。其南有界河橋。連有琉璃橋。兩橋侈壯。與胡良巨馬兄弟也。金史作劉李河。舊志又謂古聖水。自旁山龍泉峪。流至覇州。入巨馬河者此也。南之廣陽城。卽東漢舊縣。齊省入縣。天王寺在東南。洪武建。永樂葺。塩溝水自龍門口東南流。與廣陽水合。縣東有高閣。揭蕭迓台。騶西026_054b之長楊店前。連有兩橋。白石雕欄極侈。普安寺。乃內願堂也。寺宇侈靡。墻構盈野。善慶宮。乃道觀之豪壯者。前有永福橋。橋之功用。與長陽一揆。天津關在北。至大龍門。凡十五關口。其間差大者。是天津也。樂毅墓在南之三里。

  소전집(少痊集) >>(조선중기문헌집)


랑향은 춘추시대에 연나라 중도이다.남쪽에 계하교가 있다. 염구수가 용문에서 동남으로 흐른다. 천진관이 북쪽에 있다. 악의묘가 남쪽3리에 있다.

게다가 랑향 역현(웅현)연경은 거의 바로근처의 지명인데 마침 랑향이 중도였다는 지명이 눈에 띈다. 왜냐면 금나라기록에 동평군 문상현의 본래이름이 중도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랑향 웅현은 원래 연과 제나라의 사이에 위치한 지명이다. 제나라가 연나라와 자주 전투를 벌여 서로 땅을 빼앗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같은 장소를 제나라에서는 문상현 연나라에서는 랑향현이라고 부른 것으로 봐야한다.

용문은 지금도 낙양에 남아있다 천진이란 지명도 남아있다. 계하는 현재 그보다 북쪽인 하남성 위현일대에 남아있고 악의묘는 청나라시기에 하북성 한단현에 세워졌다. (명과 청시대에 고적에 대한 수리와 자리배치가 많았는데 당시 자신들의 지리지와 고적을 비교해가며 설치했기에 강태공묘같은경우에는 최소 3개이상 지금도 남아있다. 황제릉도 하남성에도 있고 섬서성에도 있고 명나라고지도에는 산서성에도 있다. 심지어 지금 북경근처에도 있다. )

 

 蘇州,安複軍,節度。本高麗南蘇,興宗置州。兵事屬南女直湯河司。統縣二:

來蘇縣。  懷化縣

요사

소주 안복군은 본래 고구려 남소성이다. 현이 2개 있는데 래소현과 회화현이다.

  

 

 

夷賓州 乾封中,于營州界內置,處靺鞨愁思嶺部落,隸營州都督。萬歲通天二年,遷於徐州。神龍初,還隸幽州都督。領縣一,戶一百三十,口六百四十八。來蘇 自徐州還寄於良鄉縣之古廣陽城,為縣。

구당서697년

이빈주는 영주경계에 설치했는데 말갈 추사령부락이 사는 곳이다. 현이 1개 있는데 래소현은 랑양현의 옛 광양성에 설치했다

  .

   래소현을 고구려가 망한뒤  랑양현의 옛 광양성에 설치했는데 200년뒤인 요나라에서는 그곳을 고구려의 남소성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 발해가 그 땅을 수복하고 다시 고구려 남소성이라고 했으니 요나라가 지리지에 저런 내용을 남긴 것이다. 랑양이 바로 옛날 연나라의 중도이다. 즉 금나라에서 송나라의 동평군 문상현이 중도현이었다고 했는데 바로 그 땅인 것이다. 결국 낙양일대가 요나라가 연경으로 한 곳이 맞는 것이다.

 

   발해는 막힐부를 설치했는데 막주가 연경보다 남쪽이었다.

낙양을 왜 요나라의 연경성으로 추정했냐면 요나라기록에 연경성둘레가 현재 낙양고성둘레와 비슷하다 36리정도..

게다가 금나라 아골타가 요나라 연경성에서 조세로 6백만석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정도 곡창지대라면  장안 낙양 정주시 개봉시 정도 밖에 답이 안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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