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청자마을 백자고을] '고려' 세운 태조 왕건, 백성의 마음을 얻다 / 소년한국일보

2016. 2. 24. 11:53도자 이야기



       [역사 탐방 청자마을 백자고을] '고려' 세운 태조 왕건, 백성의 마음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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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정북동 토성-견훤과 궁예가 패권을 다툰 격전지로 추측되는 곳. 예전에는 토성의 건축연대를 후삼국 시대로 보았는데 돌창·돌칼 등의 유물이 새로 발굴되면서 지금은 삼국 시대 초기와 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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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단군이래 반만년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을 합한 시기는 5분의 1인 1000년을 차지합니다.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왕국을 이어 온 고대 나라도 고려와 조선 뿐이지요. 특히 조선의 경우, 일제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기 전까지 왕이 지배한 우리 민족의 마지막 나라예요. '역사 탐방 청자마을 백자고을'에선 근대 이전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두 왕조를 여러 사료와 지도를 곁들여 재미나게 안내합니다. <편집자>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918년, 왕건은 개경을 도읍으로 한 나라를 세웠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였지. 그리고 936년에는 통일 신라, 후백제를 모두 아우르는 민족 통일을 이뤘단다. 지방 호족에 불과했던 왕건이 통일 신라보다 더 넓은 땅에 더 큰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 힘을 하나하나 살펴볼 거야.


왕건의 고려 건국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성ㆍ이후 현재 지명)을 지배하던 대호족 왕융과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어(877년). 왕건은 스무살 때였던 896년 아버지 왕융과 함께 궁예 밑으로 들어갔어. 그 무렵 궁예는 강원도 지역을 휩쓸고 송악까지 넘보는 등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지. 왕융은 자신의 군사력으로는 궁예를 당해 내기 힘들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가문의 안전을 위해 미리 궁예 밑으로 들어간 거였지. 5년 후, 궁예는 충청북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양길을 무찌르고 송악을 도읍으로 정해 (후)고구려를 건국했단다(901년).

   왕건은 정기대감(기병을 지휘하는 지휘관)에 임명되어 궁예의 장군으로 활약했어. 그는 경기도 광주, 충주, 청주, 당성(남양), 괴양(직산) 등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여러 군현을 차지하는 공을 세웠지. 또 수군을 거느리고 후백제의 영토인 전라도 지방을 공격해 금성군(나주)을 점령하고, 주변의 군현 10여 개를 빼앗기도 했어. 이뿐만 아니라 점령한 지역의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도 힘써 백성으로부터 큰 신망을 얻었단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왕건은 최고 벼슬자리인 시중에까지 오르게 됐지(913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궁예 다음가는 2인자가 된 거야. 한편 궁예는 세력이 커지면서 점점 교만해졌어. 그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부르며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신하와 장수들을 잔인하게 죽였어. 심지어는 왕비 강씨와 두 아들까지 죽였지.

   궁예는 905년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태봉'이라고 고쳤어. 도읍을 옮긴 궁예는 신라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짓겠다며 많은 백성을 동원하고 세금을 마구 거둬 들였어.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지.

   결국 궁예의 포악한 정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장수들은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어. 왕건은 그해 6월 새로운 나라인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어.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지은 나라 이름이야.

   새 왕조를 세운 왕건 앞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어. 궁예를 섬기던 신하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호족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 또 민심을 다독거려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도 중요했어. 왕건은 나라를 세운 다음 해에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어. 그리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나갔지.

   먼저 궁예가 가혹하게 거둬들였던 세금을 덜 내게 하고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의 마음을 얻었어. 또 세력이 강한 호족과는 혼인 관계를 맺었지. 각 지역에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호족과 장인ㆍ사위 관계가 됨으로써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든 거야. 왕건은 무려 스물 아홉 번이나 혼사를 치렀는데, 이는 왕건이 죽은 후에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어.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이 왕의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다퉜거든.


왕건과 견훤의 대결 ①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맞섰던 후삼국 초기에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가장 강했어. 궁예가 죽은 후에는 견훤의 후백제 세력이 가장 강했지.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를 세운 견훤 사이에는 치열한 세력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어.

왕건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인 920년, 견훤이 신라 땅인 합천을 공격했어.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고, 왕건은 군사를 보냈지.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대결의 신호탄이 되었다고나 할까? 924년 견훤은 고려 땅인 조물성(경북 구미에 있는 금오산성으로 추정)을 직접 공격했단다. 그러나 고려군에게 패하였지. 견훤은 이듬해에 다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조물성을 공격했어. 왕건도 친히 정예군을 이끌고 후백제군과 맞서 싸웠지.

싸움은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어. 두 나라는 결국 인질을 교환하고 휴전에 들어갔지. 그런데 6개월 후 후백제에서 인질로 보낸 견훤의 처조카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어 버렸어. 견훤은 진호가 독살됐다는 의심을 품었어. 그러고는 927년, 고려의 인질인 왕건의 사촌 왕신을 죽이고 고려를 공격했단다.

/자료 제공: 공부가 되는 흐름 한국사(아름다운사람들 펴냄)

입력시간 : 2015/03/05 15:4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