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임(赴任) 제3조 사조(辭朝) 임금을 하직하고 궐문을 나서게 되면 개연(慨然)히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

2016. 3. 2. 16:19다산의 향기



      

[14] 부임(赴任) 제3조 사조(辭朝) 임금을 하직하고 궐문을 나서게 되면 개연(慨然)히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다짐해야 한다. 목민심서 / 일표이서

2015.02.0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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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을 하직하는 날에는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임금 앞에서 외거나 혹은 승정원(承政院)에서 강론하기 마련이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전폐(殿陛)에서 오르내리는 절차와 연석(筵席)에서 엎드리고 일어나는 태도를 마땅히 아는 자에게 익숙히 들어 두어야만 거의 실수가 없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우왕(禑王) 원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수령의 고적(考績)을 다섯 가지 일로써 하니, 전야(田野)가 넓어지고, 호구(戶口)가 늘고, 부역(賦役)이 고르게 되고, 소송이 간편하고, 도적이 종식되는 것 등이었다. - 이보다 앞서 현종 9년(1018)에 주부(州府)의 지방 관원이 봉행해야 할 6조를 정했는데, 1.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2. 수령의 능부(能否)를 살피고 3. 도적과 간활(奸猾)의 무리를 살피고 4. 백성들이 금법을 범했는가 살피고 5. 백성의 효제염결(孝悌廉潔)한 자를 살피고 6. 향리(鄕吏)의 전곡(錢穀) 손실을 살피는 일 등이 있었다. -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조준(趙浚)이 글을 올려, 전야의 확장, 호구의 증식, 소송의 간편, 부역의 균평, 학교의 진흥 등 다섯 가지 일로써 주군을 순찰하여 지방관을 내치고 승급시키는 기본을 삼자고 청하였다. 본조(本朝)의 《경국대전》에는 더 보태어 일곱 가지 일로써 하니, 농상(農桑)의 번성, 호구의 증식, 학교의 진흥, 군정(軍政)의 정비, 부역의 균평, 소송의 간편, 간활의 종식 등이다.
《당서(唐書)》 〈순리열전(循吏列傳)〉의 서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치민(治民)의 근본이 자사(刺史)보다 중한 것이 없는 까닭에 자사는 대궐에서 임명을 받는데, 그날에 편전(便殿)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면 임금이 옷을 주어 떠나보낸다.”

서거정(徐居正)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살피건대, 성상(聖上)께서 백관의 간택을 신중히 하시되 수령의 선발을 더욱 중히 여기사 그 선발에는 반드시 의정부와 전조(銓曹)가 함께 천거하도록 하여 문리(文理)와 이치(吏治)에 통하는 자를 품계와 국량(局量)을 살피어 임명하시고, 이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내전에 들라 하여 따뜻하고 자상하게 타이르시며, 다섯 가지 일로써 힘쓰게 하고, 십고(十考)에 다 상(上)을 맞는 사람은 반드시 등급을 뛰어서 중용(重用)하시니, 내직의 관리에게는 이러한 예가 없음은 수령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살피건대, 서사가(徐四佳)는 세조 때의 사람인데, 오히려 다섯 가지 일로써 말하였으니, 수령칠사는 대개 성종(成宗) 이후에 개정된 바일 것이다.
우연릉(于延陵)이 건주(建州)의 자사(刺史)로 임명받고 들어가 임금에게 하직하자, 임금이,

“건주가 서울에서 얼마나 먼가?”

하고 물으매,

“8천 리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경이 거기에 도착하여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짐(朕)이 모두 다 알 수 있으니, 그곳이 멀다고 생각지 말라. 이 섬돌 앞이 바로 만 리다.”

하였다.
《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되어 - 가경(嘉慶) 정사년(1797) 7월 - 하직하는 날 들어가 희정당(熙政堂)에서 임금을 뵈오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 법률에 수령이 탐욕 불법하거나 나약하여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관(銓官)에게 죄가 돌아간다. 그러므로 중비(中批)로써 임명된 자는 더욱 삼가고 두려워하니, 전관에게 죄를 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중비로 임명했다가 여러 번 후회를 하고서도 또 경계치 아니하고 이름을 더 써 넣어 낙점(落點)했으니, - 이때 전조(銓曹)에서 세 번이나 다른 사람을 천거했으나 임금이 내 이름을 더 써 넣었다. - 이는 중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가서 잘하여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황공하여 진땀이 등에 배었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감히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임금을 하직하고 대궐 문밖에 나와서는 곧 몸을 돌려 대궐을 향하고 마음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여 속으로 말하기를,

“임금께서 천 사람 만 사람의 백성들을 오로지 나 소신(小臣)에게 맡기어 사랑해서 다스리게 하시니, 소신이 그 뜻을 공경히 받들지 아니하면 죽어도 죄가 남으리라.”

하고 몸을 돌이켜 말을 타야 할 것이다.


[주B-001]사조(辭朝) : 관원으로 임명된 자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주D-001]전폐(殿陛) : 임금이 거처하는 전각(殿閣)의 섬돌이다.


[주D-002]연석(筵席) :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자문하고 주답(奏答)하는 자리이다.
[주D-003]고려사(高麗史) :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 등이 지어 올린 고려 시대의 정사(正史)를 말한다.


[주D-004]고적(考績) : 관리의 성적을 조사하는 것이다.
[주D-005]조준(趙浚) : 1346~1405. 고려ㆍ조선의 문신.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ㆍ송당(松堂),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평양이다. 벼슬은 고려조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지냈고,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개국 공신(開國功臣) 1등이 되고 뒤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이르렀다. 저서에 《송당집(松堂集)》이 있다.


[주D-006]당서(唐書) 순리열전(循吏列傳) : 《당서(唐書)》는 《신당서(新唐書)》ㆍ《구당서(舊唐書)》 2종이 있는데, 《구당서》는 오대(五代) 석진(石晉) 때 관찬(官撰)으로 유후(劉昫) 등이 지었다. 《신당서》는 송(宋)의 구양수(歐陽脩)ㆍ송기(宋祁)가 지었다. 통례로 《신당서》를 당서라 한다. 순리전은 열전(列傳)의 하나. 순리는 벼슬살이 특히 목민관이 되어 법을 잘 지키고 백성을 잘 다스린 선량한 관리. 인용문 ‘치민의……떠나보낸다’는 《당서》 197권에 나온다.
[주D-007]서거정(徐居正) : 1420~1488. 자는 강중(剛中), 초자(初字)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ㆍ정정정(亭亭亭), 본관은 달성(達城),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벼슬은 대제학(大提學)ㆍ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동인시화(東人詩話)》ㆍ《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고, 저서에는 《사가정집(四佳亭集)》ㆍ《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 등이 있다.


[주D-008]전조(銓曹) : 조선조 때 문무관(文武官)을 전형(銓衡)하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통칭. 수령의 인사는 이조의 소관이다.
[주D-009]이치(吏治) : 백성을 다스리는 실무이다.


[주D-010]십고(十考) : 관원의 근무 성적을 해마다 두 번씩, 경관(京官)은 각 관아의 장관이, 지방관은 감사가 상ㆍ중ㆍ하 세 등급으로 매기는데 10고(考)는 곧 5년이다.
[주D-011]우연릉(于延陵) : 미상(未詳)이다.


[주D-012]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것이다.
[주D-013]가경(嘉慶) :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이다. 1796~1820.


[주D-014]희정당(熙政堂) : 창덕궁(昌德宮)에 있는 전각(殿閣)의 하나이다.
[주D-015]중비(中批) : 전관(銓官)의 천거를 거치지 않고 왕의 특지(特旨)로 관직에 임명하는 일을 가리킨다.


[주D-016]낙점(落點) : 관원을 선임(選任)할 때에 삼망(三望)의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임금이 친히 점을 찍어 뽑는 일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