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9) 근대식 의사의 역사

2016. 3. 19. 01:00건강 이야기



      

[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9) 근대식 의사의 역사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ㆍ서재필과 김익남, ‘근대서양식 의사’ 선구자로 대조적 행보


2008년 5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주미 워싱턴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서재필 동상 제막식. 워싱턴 | 연합뉴스

2008년 5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주미 워싱턴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서재필 동상 제막식.

 워싱턴 | 연합뉴스



▲ ‘한국인 1호’ 서재필, 미국서 의대 나온 후 국내 머문 2년6개월간 의사 활동 전혀 안 해… 김익남, 일본서 인턴 근무 후 돌아와 후진 양성 등 적극적 활동


   한국은 의사와 한의사 면허가 구분되어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한의사 대신 고려의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반면 일본은 전통식 의사가 아예 없다. <보건복지통계연보>(2013년 11월 발간)에 의하면 2012년 현재 의사 수는 10만7295명, 한의사 수는 2만668명이다. 해방 직후 의사 3569명(1948년), 한의사(의생) 1657명(1949년)에 비해 각각 30배, 12배로 크게 늘어났다.

의사 면허 제도가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이다. 1874년 ‘의제(醫制)’를 제정하면서부터 국가가 의사의 자격을 관장한 일본에 비해 4반세기 뒤진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의사 면허 제도를 실시한 나라는 영국으로 1858년부터이다. 국가에 의한 의사 면허 제도가 실시되기 전에는 사실상 ‘누구든지’ 의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1900년 1월2일 대한제국 내부(지금의 안전행정부)는 내부령 제27호로 ‘의사 규칙(醫士規則)’을 제정했다. 이 법령에는 의사, 한의사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정부(내부)가 자격 있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똑같이 ‘의사(醫士) 인허장’을 부여했다. 외국인 의사의 자격도 이 법령으로 규제했다. 모두 일본 제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 조선 전통 의료인 소멸을 노린 일제 규칙


   대한제국 시기 정부로부터 면허를 받은 의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총독부 통계요람>(1911년 11월 발행)에 의하면 일제강점 직전인 1909년 12월말 현재 등록된 한국인 의사 수는 2659명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요즈음 식으로 말해 한의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근대서양식 의사와 전통 의료인을 구분하고 차별하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15일 ‘의사 규칙’, ‘의생 규칙’을 제정하고 1914년 1월1일부터 시행했다. 이로써 전통 의료인은 의사(醫師)가 아닌 의생(醫生)으로 격하되었다. 의생 제도는 일본 본토에는 없는 것으로 1901년부터 일제 식민지인 대만에서 실시된 제도이다.

더욱이 일제는 법적 근거도 마련되기 전에 조선인 (전통)의사들의 면허를 박탈하고 대신 ‘의업자(醫業者)’로 등록시켰다. 그 결과 조선인 면허 의사 수는 1911년 479명, 1912년 72명으로 급감했다. (전통)의사들은 나라와 면허를 함께 빼앗긴 것이다.


   의생 규칙이 시행된 지 1년 뒤인 1914년 말 당국에 등록된 의생 수는 5827명이었는데 해방 직전인 1943년에는 3337명으로 30년 사이에 40% 이상 감소했다. 1914년 이후로는 새로운 의생 면허를 거의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본 본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1874년 ‘의제’ 제정 이후 전통 의료인들을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재생산은 철저히 억제했다. 세월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75년 전체 의사의 80%가 넘었던 일본의 전통 의료인은 1902년이 되면 50% 이하로 떨어지고 1916년에 이르면 15%로 급감하여 결국 사라지고 만다. 일제강점기가 더 지속되었다면 한국에서도 전통 의료인이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의생으로 불리던 전통 의료인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40년 만에 (한)의사 호칭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법 제정 당시 한의사(漢醫師)이던 호칭이 1986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한의사(韓醫師)로 바뀌었다.

성호 이익(1681~1763)을 비롯해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의학 서적들을 입수해 보는 등 서양 의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전에도 없지 않았지만, 근대서양 의료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쇄국에서 문호개방으로 국가정책을 바꾼 187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에 우선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우두술이었다. 당시 두창(천연두)이 가장 큰 보건 문제 가운데 하나였고, 또 우두로 두창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선에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두술의 보급에 관해서 주로 지석영을 언급하지만 당시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김인제 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간인들의 자발적 활동으로 시작된 우두 접종은 머지않아 국책사업이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근대서양 의료 전반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졌다.

1885년 4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세워진 것도 그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국왕과 정부가 제중원을 설립한 목적은 민중들의 질병을 근대서양식 의술로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병원을 통해 조선인 의사들을 양성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의사 양성이 새로운 의료 도입에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자격 있는 근대식 의사가 배출된 것은 훨씬 뒤인 1902년부터이다.



■ 서재필, 위생사상 보급 등 계몽활동


   최초의 근대서양식 한국인 의사는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탄생했다. 그는 누구일까? 두 사람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서재필(徐載弼·1864~1951)이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불과 20세에 병조참판(국방차관)을 지낸 서재필은 거사가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1892년 컬럼비안 의과대학(3년제)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옛 동료인 개화파 정부 인사들의 도움으로 1895년 말 조선으로 금의환향했다.


   1890년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은 서재필은 ‘미국 의사 서재필’ 또는 ‘닥터 필입 졔손’이라고 행세했지만 조선에 머문 2년 반 동안 의사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팔십 평생 대부분을 의사로 지낸 미국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서재필은 월급 300원(외국인 중에서도 많은 편이었다)의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신문’ 등을 통해 근대식 위생사상 보급을 비롯하여 계몽운동을 벌였다(독립신문사에서도 월급 150원을 받았다). 1898년 4월 서재필은 친러파 및 러시아 세력과 갈등을 빚어 중추원 고문을 그만두고는 7년치 봉급 2만5200원과 귀국 여비 600원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서재필이 일본과도 불화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독립신문을 일본 측에 팔아넘기려 한 것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일본 변리공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세 차례 공문을 보면 일본 측과 서재필 사이의 독립신문 매각 협상이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르렀는데, 어떤 이유인지 결렬되어 독립신문은 그 뒤 윤치호가 운영하게 되었다. 의사로서 조국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냈지만 서재필이 최초의 ‘한국계’ 근대서양식 의사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강원 춘천시 강원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정에 세워진 김익남 흉상. | 류영준 강원대 교수 제공

강원 춘천시 강원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정에 세워진 김익남 흉상.

 | 류영준 강원대 교수 제공




■ 김익남은 반일로 ‘개업 인허장’ 못 받아


   두번째 인물인 김익남(金益南·1870~1937)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최초로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사 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 교관(교수)으로 국내 최초의 의사들을 양성했고, 군의관으로 장병과 민간인들의 건강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의사단체 활동도 벌였다.

갑오개혁 정부의 학부(교육부)가 실시한 일본 유학시험에 합격한 김익남은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오늘날의 중학교 과정)를 거쳐 1899년 7월 도쿄 지케이(의원) 의학교(4년제)를 졸업했다. 김익남은 내무성이 주관하는 개업인허 시험은 치르지 않았는데 지케이 의학교 2년 후배인 안상호 등과 달리 일본에서 개업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케이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은 정부로부터 갓 설립된 의학교의 교관에 취임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의사이자 정부가 유학비용을 대었던 김익남에게 교관 취임을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익남은 정부의 제의를 일단 거절하고 1년 동안 모교인 지케이의원에서 당직의사(인턴/레지던트 격)로 근무한 뒤 귀국해서 교관에 취임했다. 교장 지석영이 의학교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김익남은 직접 교육을 맡은 의사 양성의 산파였다. 그리하여 1902년 7월4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방한숙, 유병필, 김교준 등 근대식 의사 19명이, 이어서 1903년에는 13명이 배출되었다.


   김익남은 1904년 9월부터 군의장(軍醫長)으로 군인과 민간인들의 질병 퇴치와 건강 증진에 진력했다. 러일전쟁 발발로 국권을 빼앗길 위기가 더 커짐에 따라 대한제국은 모든 역량을 군사 부문에 집중했는데, 김익남이 의학교를 떠나 군대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한 의학교 출신들이 군의관으로 복무한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국가의 필요와 더불어 김익남과의 인연도 크게 작용했다.

김익남은 1908년 11월15일 안상호(부회장) 등 유학 후배와 유병필(총무) 등 의학교 제자들과 함께 일본인들의 계림의학회에 대항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의사연구회는 1909년 4월 정부에 ‘의사법’ 반포를 요구하고 5월에는 의술연구조합소 설립을 시도했지만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에서 성과는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아 의사가 된 김익남은 일제의 중요한 이용 대상이었지만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 기도가 실패하자 자결한 정재홍을 추모하는 등 일제의 눈에 벗어난 행동은 뚜렷했다. 따라서 김익남이,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장악하기 위해 1908년부터 부여하기 시작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했던 것은 허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서재필과 김익남, 여러 모로 대조되는 삶이었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