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13. 18:11ㆍ도자 이야기
[스크랩] [오픈지식] 재현된 조선다완에는 긴장이 있다 지식, 교양, 수양
지난주 토요일(2005. 7. 8), 가족과 함께 ‘井戶大展’(대구 봉산문화회관)에 다녀왔다. 이도다완(井戶茶碗)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은 지상(대구일보 2005. 7. 4)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신문에는 한국에서 '막사발'로 불리고,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도다완이 마침내 한국에서 재현에 성공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도다완은 하동의 흙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동찻사발’로 명명해야 된다는 기사를 읽고 곧바로 기자(윤석원)와 통화했다. 그리고 전시회에 가서 ‘하동찻사발’ 재현에 성공한 길성(吉星)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다음은 조선다완, 이도다완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서 정리한 글을 소개한다.
◇ ◇ ◇
일본어에 '다완은 고려', '이치이도(一井戶), 니라쿠(二樂), 산카라츠(三唐津)'라는 말이 있다. 모두 조선다완(통상 일본에서는 ‘高麗茶碗’으로 표현함)을 극찬하는 말이다.
'이치이도(一井戶)' 조선다완을 대표하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키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는 너무나 유명하다.
'니라쿠(二樂)'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쿄토 생활을 위해 세운 호화로운 저택 쥬라쿠다이(聚?第)에서 나는 흙으로 만든 것이 그 시초다. 빨강과 검정 두 가지 색이 있다. 센 리큐(千利休)가 창시이고, 초대 쵸지로(長次郞), 2대 죠케이(常慶)가 히데요시로부터 '라쿠(樂)'라고 하는 금인을 하사받았다. 이후 가호(家號)를 '라쿠야키(樂燒)'로 했다.
'산카라츠(三唐津)'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일본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에 의해 많은 가마가 만들어졌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질박하고 자유분방한 작풍은 많은 다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조선다완은 본래 생활잡기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즉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하던 생활잡기였다. 그 중에서도 이도차완(井戶茶碗)은 아주 거친 잡기였다. 이도다완(井戶茶碗)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인 상어껍질 모양의 매화피(梅花皮)는 가마의 온도가 낮아 유약이 제대로 녹지 않아서 생기는 터짐과 엉김 현상이다. 그런 거칠고 무작위스러움이 금욕과 절제를 추구하는 일본의 다도인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조선다완의 아름다움은 아츠지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지배한 1568년-1600년경) 다도의 명인으로 추앙받았던 센 리큐(千利休)의 심미안에 의해 발견되었다. 즉, 조선다완이 가지고 있는 소박하고 무작위의 아름다움이 일본 다도에서 추구하는 '와비(고요)'의 세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무로마치시대의 서원(書院: 무사들의 집 거실 겸 서재)에서는 화려한 당나라 다완이 주로 쓰였다.
그러던 것이 모모야마시대로 들어오면서 초가로 지어진 검소한 다실에서의 다도가 유행하면서 조선다완과 라쿠차완(樂茶碗)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조선다완은 이전의 송나라 다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맛 때문에 토속적인 자연미와 개성적인 풍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도공들이 미를 의식하지 않고 무심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다완을 만드는 도공의 마음에는 미추(美醜)에 대한 구별이 없었다. 즉, 미에 대한 집착이나 추에 대한 혐오도 없는, 미추(美醜)의 대립을 초월해서 만들어진 것이 조선다완이다.
선(禪)이 차로 통한다는 의미를 조선다완의 아름다움에서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무비(無比)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센 리큐는 '와비=고요(寂)'라고 하고, 선(禪)에서 추구하는 '무심무작(無心無作)'의 아름다움을 조선다완에서 찾은 것이다. 조선다완이 지금까지 일본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려청자는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 정설이며,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전래되었다. 그 아름다움은 중국의 청자를 '에메랄드그린(秘色)'이라고 하고, 고려청자를 '비색(翡色)'이라고 해서 그 색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비(翡)'은 구슬의 비취색 또는 물총새의 날개색이라고도 한다.
청자는 귀족사회에서 식기, 방의 장식, 불구, 제기, 청자와 등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었다. 불교 번성기인 고려에서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그릇은 맑게 개인 가을하늘을 연상케 하는 고려청자가 최고였으며, 또한 귀족사회의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청초한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미술에 대한 민중의 참가와 문화생활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인위적인 기교가 가미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강조되었다. 그런 사회적 배경에서 분청사기가 등장하고, 기법도 분인(粉引: 백토액에 담구어 전체를 희게 하는 기법), 소락(搔落: 전체에 백토액을 바른 다음, 문양의 배경이 되는 부분을 긁어내는 기법) 등이 등장한다.
쇠퇴하는 고려청자는 분청사기의 모태가 되었고, 그 형태는 조선시대의 생활에 맞는 서민적인 감정이 넘쳐나는 생활잡기로 바뀌게 된다. 분인(粉引)은 백자에 대한 동경이 강해서 생긴 것이고, 이런 분청에서 백자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태어난 것이 바로 조선다완이다.
● 출처: http://www.asahigallery.com/information/rekisi.htm
再現された高麗茶碗...「有心有作」の緊張がある
先週土曜日(2005. 7. 8)、「井戸大展」(大邱・鳳山文化会館)に家族と一緒に参観した。井戸茶碗展示会が開かれるという新聞記事(大邱日報 2005. 7. 4)には、「韓国でマクサバル(粗なる器という意味)」とも呼ばれている井戸茶碗が遂に韓国で復活された」という内容とともに、さらに「井戸茶碗は韓国の河東(ハドン)で採れた土でしか作れないから、河東茶碗と呼ばれるべきだ」という記事を読んで、さっそく記者(ユン・ソクウォン)と通話した。そして、展示会で河東茶碗を再現した吉星先生に会いたいと頼んだら、こころよく承諾された。
展示会の当日、オープン式では、国会議員や河東郡守が吉星先生の芸術性を高く評価した上で敬愛した。しかし、いざ本人は「(再現成功に対して)運が良くて、土を発見しただけ」と謙遜した。ユン記者のお陰で、私は吉星先生に紹介させてもらえる光栄に恵まれた。やっぱり、謙遜な方だった。
私は、高麗茶碗が分かりたくて、先生の作品を手で触ったり、裏返してみたりした。そして、近くで見たり、離れて見たりした。その結果、「感じは?」と問われたら、一言で「さあ、よく分からない」。ただ、こんなモノが高麗茶碗で、河東茶碗かと言う感じだけで満足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高麗茶碗は、その用途が庶民の生活雑器で、さらに韓国人である私には何気なく馴染んだものだった。そのため、高麗茶碗を見て一目で惚れた千利休や柳宗悦が感じた美しさを感じることはぜったい無理だった。それは自分の文化に対する無関心と言うより自然なマンネリズムだと言えよう。
美の基準は絶対的ではない。味と同じく、視覚的美しさは自然環境、生活習慣、宗教的慣習、社会的価値観などによって多様である。したがって、朝鮮人(韓国人)はとうぜん高麗茶碗の美しさが分か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は理不尽である。用途も同じである。高麗茶碗が、庶民の生活雑器に使われたにしろ、犬の餌箱に使われたにしろ、ともかく禁欲と節制を求めた16世紀日本の茶人に見立てられて茶碗で使われたといって、可笑しいことではない。
真の美しさを観る審美眼を持つためには、優劣の先入観や偏見を捨てなければならない。高麗茶碗が日本の茶道で使われたからといって、日本茶道が朝鮮茶道になるわけにはいかない。力道山が北朝鮮出身だからといって、日本のレスリングが北朝鮮のレスリングになるわけにはいかない。力道山は空手を得意技にした時、一番力道山らしい。同じく、高麗茶碗は人為的ではなく、ただ「無心無作」だから、一番美しいだろう。しかし、吉星先生には申し訳ないですが、再現されたという高麗茶碗、河東茶碗は、私にはどうも「無心無作」のモノに感じられなかった。それは、陶芸家の再現追求という「有心有作」の緊張があったからであろうか。それとも、物事を見て美醜を区分しようとする私のマンネリズムから脱せなかったからであろうか...
次は高麗茶碗、井戸茶碗の歴史と特徴をまとめた文を紹介する。
◇ ◇ ◇
戦国時代(室町時代の終わりごろの時代。ふつう,応仁の乱から織田信長が入京あるいは室町幕府滅亡までの、約100年にわたる戦乱の時代。室町幕府の力がおとろえ,家臣が実力で主君に代わる下剋上の風潮が広がり、戦国大名たちが領土を拡大しようとして、各地で戦いを展開した)には、高麗茶碗一碗が、領土一国にも匹敵するほど武人の間で珍重されました。高麗茶碗は現在に至るまで、特に日本の茶道の歴史の中で広く茶人に愛され続けられています。
「茶碗は高麗」、「一井戸、二楽、三唐津」どちらも茶人の間で高麗茶碗を賞賛する言葉として有名です。
一井戸とは 高麗茶碗の代表とされる井戸茶碗のことで、特に日本の国宝に指定されている喜左衛門井戸(きざえもんいど)はあまりにも有名です。
二楽とは 豊臣秀吉が、京都での生活のために建築した華麗壮大な邸宅、聚楽第(じゅらくだい)で、聚楽土を使って焼かれた焼き物が始まりです。赤・黒の二種があり、千利休の創始で初代長次郎(当時の瓦焼職人)を使い焼かし、二代常慶が秀吉から「楽」の字の印を賜り以来家号とし楽焼としたものです。
三唐津とは 文禄慶長の役(豊臣秀吉の朝鮮出兵)後、渡来または引き連れてこられた朝鮮人陶工によって、多くの窯が開かれ現在に至っています。素朴で自由奔放な作風は、多くの茶人に喜ばれています。
高麗茶碗は本来、当時の李朝時代の人々が日用雑器として使っていたものでした。すなわち、その茶碗でご飯を食べ、汁椀として日常使っていた生活雑器でした。その中でも、井戸茶碗はもっとも粗悪品の雑器といわれていました。井戸茶碗の典型的な鮫肌状の梅花皮(かいらぎ)は、窯の温度が低いため、釉薬が溶けなかった出来損ないと見なされていました。それが日本では、その素朴な器形が、侘び・寂の象徴として高く評価されたのだから面白いですね。
その生活雑器を、安土桃山時代の茶人である千利休の審美眼によって、高麗茶碗の持つ素朴で無作為の美が、日本の茶の湯の侘び・寂の世界で茶道具として見立てて使われ始めました。それまでは、室町時代の書院飾り(武家屋敷の居間兼書斎の称)の世界で、中国の唐物茶碗が主役でした。しかし桃山時代に移り、草庵(小間の茶室)での茶の湯が盛んになるにつれ、高麗茶碗と楽茶碗が主流を占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とりわけ高麗茶碗は、それまでの宋の唐物茶碗にはまったく示されなかった、粗なる器ゆえに土俗的な自然美と、言いようのない個性的な風格を備えていました。それは、陶工たちが美を意識して作ったものでは表せない、無作為によるがゆえに生み出された美であるといえるでしょう。
彼らの心は美醜の二見にわたっていない。美の執着や醜への嫌悪はなく美醜の相対する以前のところで、そえれを越えたところから生み出された美であります。禅が茶の意に通じるのは実はこのところにあり、これが無比の美を与えるのであります。
この様を寂といい、利休は高麗茶碗の中に禅の説く「無心無作」の美を見出し寂を発見したのであります。ここが高麗茶碗が日本人に愛されつづける所以です。
高麗青磁は中国の越州窯にその源を発していることはもはや定説ですが、9世紀から10世紀にかけて伝来されました。その美しさは、中国の青磁を「秘色」と呼び、高麗青磁を「翡色」と称し、その色の素晴らしさを讃えました。「翡」とは、玉の翡翠の色とも、又、カワセミの羽の色ともいわれています。
貴族社会では青磁を、食器、部屋飾り、仏具、祭器、青磁瓦など、日常生活のあらゆる面で使われました。高麗王朝は仏教の力が盛んで、このセレモニーに備える器物は、澄み切った秋の空を思わせる高麗青磁が最適であり、貴族社会の力の象徴として用いられました。しかし仏教は敗退し、儒教の教えが支配する李氏朝鮮の時代となり、白磁の清楚な美こそ儒教の心と唱える新政策をもって、白磁主流へと変わって行くのでした。
朝鮮時代になり、美術に対する民衆の参加と、文化生活の享受という理想が生まれ、人為的技巧の加わらない自然の美が反映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ような背景から、粉青沙器(青磁、白磁のような磁気を除く陶器の総称)が登場し、技法も粉引(白土液に器を浸して全体を白くする)、掻落(かきおとし=地に白土を塗った後、文様の背景となる部分の白土を取り除く)等が登場してきます。
衰勢しつつある青磁は、新たな時代で生まれる粉青沙器の母体となり、形を変えて、李朝時代の生活に合う、庶民的な感情にあふれた一般生活雑器に変わっていきました。粉引は白磁への憧れが強まったもので、このような粉青から白磁への過渡期に生まれた焼物が、いわゆる「高麗茶碗」として日本にもたらされたのです。
● 出所: http://www.asahigallery.com/information/rekisi.htm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외톨늑대
* 외톨늑대라는 분이 직접 번역하여 등록하신 글입니다. 차와 일본어 공부에 도움이 많이 보탬이 되겠기에 옮겨 왔습니다. 요즘은 일본어 잘하는 분이 엄청 부럽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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