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의 몽유도원도|안견선생자료실 소강 | 조회 39 |추천 0 |2005.06.29. 15:23 http://cafe.daum.net/ANGYUN/2HK8/4
| 몽유도원도 |
자는 가도, 득수, 호는 현동자, 주경. 세종(1419-1450)과 문종(1451-1452)전후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화원의 신분이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안평대군의 절대적 후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소장품을 감상하면서 더욱 더 식견을 넓혀 중국의 여러 유파를 직접 대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안견이 자성일가하고 오랫동안 조선시대의 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타고난 재주 이외에도 안평대군 소장의 명품들을 깊이 연구하고 수용할 수 있었던 데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화풍은 이른바 이곽파라고 불리우는 북송대 북방산수의 독특한 수지법과 준필을 즐겨 구사하였으며 험준한 산세의 포치나 대국적인 스케일에 의한 화면 운용등은 그가 당시 중국의 화풍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감지케 한다. 참고로 조선초기의 화단은 고려시대에 축적된 중국 회화가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을 중심으로 하여 명과의 회화 교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당시의 화단에는 다음과같은 몇가지 화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1) 북송의 이성과 곽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소위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 2) 남송의 화원이었던 마원과 하규가 형성한 마하파를 위시한 원체화풍 3) 명대의 원체 화풍 4) 절강성 출신인 대진을 중심으로 하여 명초에 이룩된 절파 화풍. 5) 북송의 미불, 미우인 부자에 의해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 등에 의해 발전된 미법산수화풍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역시 곽희파 화풍이었으며, 곽희파 화풍은 조선 초기의 산수화단에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안견화풍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안견의 화풍에는 비단 곽희파 화풍뿐만 아니라 남송의 원체 화풍과 원말 명초의 매너리즘의 영향도 다소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된 기반은 역시 곽희파 화풍에서 찾아볼 수 가 있다. 유명한 '몽유도원도'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몽유한 후 안견에게 꿈에 본 바를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1447년 4월 20일에 착수하여 3일만인 23일에 완성을 본 장권형식의 그림이다. 이곽파의 강렬한 영향 이후에 형성된 그의 필의를 엿볼 수 있으며 환영적 감각으로 묘출해낸 관념경의 신비를 전개했던 비경의 산수인 이 작품은 안평대군의 제발을 비롯하여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등 20여명의 대학자와 문인들이 쓴 제문이 씌어있는 이유로 더 더욱 유명하다. 그의 화풍은 이른바 안견파라고까지 불리울 정도로 조선시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과 함께 조선시대 4대화가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으로 몽유도원도 외에 안견 사시팔경도, 안견 적벽도 등이 있다.
<작품감상>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1447년(세종 29) 작.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106.5×38.7 cm.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이 그림은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양식도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 큰 특징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세계는 부감법을 구사하였다.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한 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림과 그들의 시문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이들 시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은 안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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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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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몽유도원도 : <안평대군>의 "발문(跋文)" 晛溪亭 2017.02.05 19:54
안견의 몽유도원도 : 夢遊桃源記 몽유도원기<안평대군>의 "발문(跋文)"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서문(序文)▣
❶歲丁卯四月二十日夜,余方就枕,精神蘧栩,睡之熟也,夢亦至焉,忽與仁叟,至一山下,層巒深壑,崷崒窈窅.
❶세정묘사월이십일야,여방취침,정신거허,수지숙야,몽역지언,홀여인수,지일산하,층만심학,추줄요요.
➀정묘년(1447)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이 들려고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叟)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❷有桃花數十株,微徑抵林表而分岐.
❷유도화수십주,미경저림표이분기.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❸徊徨竚立,莫適所之,遇一人山冠野服.
❸회황저립,막적소지,우일인산관야복.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❹長揖而謂余曰.ㆍ"從此徑以北,入谷則桃源也."ㆍ
❹장읍이위여왈.ㆍ"종차경이북,입곡칙도원야."ㆍ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라 하였다.
❺余與仁叟,策馬尋之.崖磴卓犖,林莽薈鬱,溪回路轉,蓋百折而欲迷.
❺여여인수,책마심지.애등탁락,림망회울,계회로전,개백절이욕미.
내가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갔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❻入其谷則洞中曠豁,可二三里.
❻입기곡칙동중광활,가이삼리.
골짜기에 들어서니 동천이 탁 트여 넓이가 2, 3리 정도 되어 보였다.
❼四山壁立,雲霧掩靄,遠近桃林,照暎蒸霞.
❼사산벽립,운무엄애,원근도림,조영증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이 일고 있었다.
❽又有竹林茅宇,柴扃半開,土砌已沈,無鷄犬牛馬,前川唯有扁舟,隨浪游移,情境蕭條,若仙府然.
❽우유죽림모우,시경반개,토체이침,무계견우마,전천유유편주,수랑유이,정경소조,약선부연.
그리고 대나무 숲 속에는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졌으며, 닭이나 개•소•말 등은 없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 싶었다.
⑨於是踟躕瞻眺者久之.謂仁叟曰.ㆍ"架巖鑿谷,開家室,豈不是與!ㆍ實桃源洞也."ㆍ
⑨어시지주첨조자구지.위인수왈.ㆍ"가암착곡,개가실,기불시여!ㆍ실도원동야."ㆍ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바라보다 인수에게 말하기를 “암벽에 기둥을 엮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짓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라 하였다.
⑩傍有數人在後,乃貞父,泛翁等,同撰韻者也.
⑩방유수인재후,내정부,범옹등,동찬운자야.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범옹(泛翁) 등이 운을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⑪相與整履陟降,顧盻自適,忽覺焉.
⑪상여정리척강,고혜자적,홀각언.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⑫嗚呼通都大邑,固繁華,名宦之所遊,窮谷斷崖,乃幽潛隱者之所處.
⑫오호통도대읍,고번화,명환지소유,궁곡단애,내유잠은자지소처.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이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 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⑬是故紆身靑紫者,迹不到山林,陶情泉石者,夢不想巖廊.
⑬시고우신청자자,적부도산림,도정천석자,몽불상암랑.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는 발걸음이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는 또 꿈에도 솟을대문과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⑭蓋靜★{足+參:조}殊途,理之必然也.
⑭개정★{족+참:조}수도,리지필연야.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⑮古人有言曰,"晝之所爲,夜之所夢."
⑮고인유언왈,"주지소위,야지소몽."
옛사람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을 꾼다”고 하였다.
⓰余托身禁掖,夙夜從事,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ㆍ ⓰여탁신금액,숙야종사,하기몽지도어산림야야ㆍ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던 말인가?
⓱又何到而至於桃源耶ㆍ ⓱우하도이지어도원야ㆍ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⓲余之相好者多矣,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ㆍ ⓲여지상호자다의,하필유도원이종시수자호ㆍ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서 나를 따른 사람이 하필 이 몇 사람이었는가?
⓳意其性好幽僻,素有泉石之懷,而與數子者交道尤厚,故致此也. ⓳의기성호유벽,소유천석지회,이여수자자교도우후,고치차야.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⓴於是令可度作圖. ⓴어시령가도작도. 이에 가도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㉑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亦若是乎ㆍ ㉑단미지고지소위도원자,역약시호ㆍ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았을까?
㉒後之觀者,求古圖,較我夢必有言也. ㉒후지관자,구고도,교아몽필유언야.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
㉓夢後三日,圖旣成,書于匪懈堂之梅竹軒. ㉓몽후삼일,도기성,서우비해당지매죽헌.
꿈을 꾼 지 사흘째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
「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
⇒歲丁卯四月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數十株, 微徑抵林表而分岐. 徊徨竚立, 莫適所之, 遇一人山冠野服. 長揖而謂余曰: “從此徑以北, 入谷則桃源也” 余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蕭條, 若仙府然. 於是踟躕瞻眺者久之, 謂仁叟曰: “架巖鑿谷, 開家室, 豈不是與! 實桃源洞也” 傍有數人在後, 乃貞父•泛翁等, 同撰韻者也.
⇒相與整履陟降, 顧盻自適, 忽覺焉. 嗚呼通都大邑, 固繁華, 名宦之所遊, 窮谷斷崖, 乃幽潛隱者之所處. 是故紆身靑紫者, 迹不到山林, 陶情泉石者, 夢不想巖廊. 蓋靜★{足+參:조}殊途, 理之必然也. 古人有言曰: “晝之所爲, 夜之所夢”
⇒余托身禁掖, 夙夜從事, 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 又何到而至於桃源耶, 余之相好者多矣, 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 意其性好幽僻, 素有泉石之懷, 而與數子者交道尤厚, 故致此也. 於是令可度作圖. 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 求古圖, 較我夢必有言也. 夢後三日, 圖旣成, 書于匪懈堂之梅竹軒.
「夢遊桃源圖」
歲丁卯四月二十日夜,余方就枕,精神蘧栩,睡之熟也,夢亦至焉,忽與仁叟,至一山下,層巒深壑,崷崒窈窅.有桃花數十株,微徑抵林表而分岐.徊徨竚立,莫適所之,遇一人山冠野服.長揖而謂余曰.ㆍ"從此徑以北,入谷則桃源也."ㆍ余與仁叟,策馬尋之.崖磴卓犖,林莽薈鬱,溪回路轉,蓋百折而欲迷.入其谷則洞中曠豁,可二三里.四山壁立,雲霧掩靄,遠近桃林,照暎蒸霞.又有竹林茅宇,柴扃半開,土砌已沈,無鷄犬牛馬,前川唯有扁舟,隨浪游移,情境蕭條,若仙府然.於是踟躕瞻眺者久之.謂仁叟曰.ㆍ"架巖鑿谷,開家室,豈不是與!ㆍ實桃源洞也." ㆍ傍有數人在後,乃貞父,泛翁等,同撰韻者也.相與整履陟降,顧盻自適,忽覺焉.嗚呼通都大邑,固繁華,名宦之所遊,窮谷斷崖,乃幽潛隱者
之所處.是故紆身靑紫者,迹不到山林,陶情泉石者,夢不想巖廊.蓋靜(조=足+參성급하다)殊途,理之必然也.古人有言曰. ㆍ"晝之所爲,夜之所夢."ㆍ余托身禁掖,夙夜從事,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ㆍ又何到而至於桃源耶ㆍ余之相好者多矣,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ㆍ意其性好幽僻,素有泉石之懷,而與數子者交道尤厚,故致此也.於是令可度作圖.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亦若是乎ㆍ後之觀者,求古圖,較我夢必有言也.夢後三日,圖旣成,書于匪懈堂之梅竹軒.
◎안견(安堅)-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安平大君)찬시▰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시(題詩):제첨(題簽)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내게 왜 푸른 산에서 사냐고 물으면
빙긋 웃고 대답 안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세간하처몽도원世間何處夢桃源)
(야복산관상완연野服山冠尙宛然)
(저화간래정호사著畵看來定好事)
(자다천재의상전自多千載擬相傳)
(후삼일정월야後三日正月夜)
(재치지정인고유작청지在致知亭因故有作淸之)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은자(隱者)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 그려 보아 오니 참으로 좋을씨고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한마디 적어 맑은 정취를 기리노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찬시
1.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서문
#安平大君 (안평대군) : (1418~1453) 世宗大王(세종대왕)의 三子(삼자)로 이름은 瑢(용), 字(자)는 淸之(청지), 號(호)는 匪懈堂(비해당) 또는 梅竹軒(매죽헌), 諡 號(시호)는 章昭(장소)
2.신숙주의 시
申叔舟 (신 숙주) : {1417~1475} 字(자)는 泛翁(범옹), 號(호)는 保閑齋(보한재)
希賢堂(희현당), 諡號(시호)는 文忠(문충), 功臣(공신)의 號(호)는 高靈君(고령군).
當年(당년) 31 歲(세)
3.이개의 시
李 塏(이 개) : (1417~1456 )死六臣(사육신)의 한사람, 字(자)는 淸甫(청보) 伯高(백고), 號(호)는 白玉軒(백옥 헌), 諡號(시호)는 義烈 (의열) 뒤에 忠簡(충간)으로 고침. 當年(당년) 31歲(세)
4.河演의 시
河演(하연) ; 1376(우왕 2)∼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대표관직(경력)영의정,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5.凊城 宋處寬(송처관)
宋 處寬 (송처관) : (1410~1477) . 當年(당년) 38歲(세)
6.김담(金淡)의 시
金 淡 (김 담) : (1416~1468) 세종 때의 천문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字(자)는 巨源(거원), 號(호)는 撫松軒(무송헌), 天文(천문)에 뛰어나 簡 儀(간의) 渾天儀(혼천의)를 만드는데 공헌, 諡號 (시호)는文節 (문 절). 當年(당년) 32 歲(세)
7.강석덕의 시
姜 碩德 (강 석덕) : (1395~1459) 字(자)는 子明(자명), 號 (호)는 玩易齋(완역재)諡號(시호)는 戴民(재민). 當年(당년) 53歲(세)
8.정인지의 시
정인지(鄭麟趾) ; 1396(태조 5)∼1478(성종 9).조선 초기의 문신.병조판서|좌의정|영의정부사,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1446년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하였고 훈민정음 서문을 찬진하였다.
9.박연의 시
박연(朴堧) : 고려 우왕4년~조선 세조4년(1378.8.20-1458.3.23) 堂號는 松雪堂 初名은 然, 字는 탄보(坦父), 아호(雅號)는 蘭溪, 본관은 밀양,
10.김종서의 시
金 宗 瑞 (김종서) : (1390~1453 } 字(자)는 國卿(국경), 號(호)는 節齋(절재), 諡號(시호)는 忠翼(충익), 癸酉靖難(계유정난)으로 禍(화)를 당함. 當年(당년) 58 歲(세)
11.이적의 시
李迹(이적) : 세종 20년 (1401~1438) 본관은 驪州. 호는 부훤당거사(負喧堂居士)
진실로 비번한 기골이 아니어든 어찌 선경에서 노닐 수 있으리오
밤마다 영혼이 교유하는 일은 아침마다 마음이 꾀한 바로다.
중니(仲尼-공자의 자)는 주나라 성현을 꿈꾸었고, 장자는 꿈에 호랑나비가 됐으니
존귀한 왕자께서 대장부임을 이제야 비로서 알겠도다.
몸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 뜻은 오히려 신선 세계에 두고 있네.
12.최항의 시
崔 恒 (최항) : (1409~1474)字(자)는 貞 父(정보), 號(호)는 太虛亭(태허정) 㠉 梁(동량), 諡號(시호)는 文靖(문정). 當年(당년) 39 歲(세)
13.朴彭年의 夢 桃源 序
朴 彭 年 (박팽년) : (1417~1456)死六臣(사육신)의 한 사람, 字(자)는 仁叟(인수),號(호)는 醉琴軒(취금헌), 諡號(시호)는 忠正(충정). 當年(당년) 31 歲(세)
14.윤자운의 시
윤자운(尹子雲) ; 1416(태종 16)~ 1478(성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15.이예의 시
陽城 李 芮 (이예) : (1419~1480) 字(자)는 可 成(가성), 號(호)는 訥齋(눌재), 諡號(시호)는 文質(문질). 當年(당년) 29 歲(세)
16.이 현로의 몽 도원도 부 (李 賢老 夢 桃源圖 賦)
李 賢老 (이현로) : ( ~1453)
17.서거정의 시
徐 居正 (서거정) : (1420~1488 )字(자)는 剛中(강중) 號(호)는 四佳亭(사가정),
諡 號(시호)는 文忠(문충). 當年(당년) 28 歲(세)
18.성심문의 시
成 三問(성삼문) : (1418~1456)字(자)는 謹甫(근보) 訥翁(눌옹), 號(호)는 梅竹 軒(매죽헌), 諡號(시호)는 忠文(충문). 當年(당년) 30 歲(세)
19.김수온의 시
金 守溫 (김수온) : (1409~1481)字(자)는 文 良(문량), 號(호)는 乖崖(괴애)
諡號(시호)는 文平(문평), 當年(당년) 39 歲
20.만우 천봉선사의 시
만우(卍雨) : 고려 공민왕 6년(1357 ~ ?) 號(호)는 천봉(千峰)
21.최수의 시
성균 사예 최 수. (成均 司藝 崔 脩)
22.고득종의 시
高 得宗.
하늘이 돌보시어 동방에 성주가 임하시니 위대한 오얏나무에 서린 뿌리 깊기도 하도다.
금비옥엽의 자손들 번창하고 빼어나니, 위대하고 아름다운 덕을 찬양하도다.
온화하고 단정한 안평대군 참으로 天人이니,
사람들에게 바람처럼 미치는 덕으로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네.
참되고 바르게 자신을 딖아 그 마음 거울 같으니, 티끌 하나라도 어찌 범할 수 있으리오.
대궐에서 임금님 모시다가 퇴청하여 한가로이경전을 논하고 유생들을 불러들이니
아전(아정)한 생각은 표표히 인간세상 뛰어넘고, 높은 의기는 구름보다 높아 화려한 생활 단념하네.
[역사의교훈: 어제와오늘]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칼럼과수필♣┓ 윤준호 | 조회 31 |추천 0 | 2017.03.15. 08:09
[역사의교훈: 어제와오늘]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비단에 담채. 38.7×106.5cm,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안견(安堅)은 세종과 문종 전후에 활약한 화원(畵員)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조선 시대의 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은 자신의 타고난 재주도 있었지만,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소장하고 있던 명품(名品)들을 깊이 연구하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세종임금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어느 여름밤에 꾸었던 도원을 안견이 그려낸 그림이다. 여기서 도원(桃源)은 이상향(理想鄕)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나타낸 것이며,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되었다. 내용은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나른하여 잠이 깊이 들었고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멧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소박한 복장)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하므로 나는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 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내 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트여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여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박팽년에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 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작품의 기본 축(基本軸)은 오른편 위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가로지르는 대각선이다. 보조 축(補助軸)은 오른편 아래에서 왼편 위쪽을 향해 점차 상승하는 대각선이 교차한다. 이 교차는 무릉도원을 표현하는데 복잡한 산수(山水)의 경관을 내비치는 것과 같다. 두루마리로 말려있고 이것을 하나씩 풀면서 그림을 보게 되는데 왼쪽에는 현실(現實)의 세계를, 중간에 동굴을 그려 넣음으로 현실과 꿈의 세계를 연결하는 장치를 만들고, 오른쪽은 복숭아가 있는 무릉도원의 모습을 표현한다. 또한, 오른쪽을 부감법(俯瞰法·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리는 기법)으로 표현하며 자연스럽게 도원(桃源)을 강조한 것은 안견이란 화가의 치밀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무릉도원은 안개가 자욱하고, 산 위는 진하고 끝으로 갈수록 연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안개의 효과는 흐릿하게 그려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황홀한 심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신선의 세계처럼 우리를 꿈속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또 복숭아의 붉은 잎과 반짝이는 금분의 꽃망울은 마치 향기가 사방에 퍼지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위에서 아래로 보는듯한 시선은 하늘에 떠서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절벽은 마치 나무의 껍질처럼 굽어져 있다. 그 기암(奇巖)은 환상적으로 물결 모양을 만들어 청렴한 선비의 자태를 뽐내는 듯하며 신비감을 보여준다. 푸근하기도 하면서 기괴한 문양 또한 건드리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기암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삼각형 구도의 그림은 안정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안견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치켜 올려다보는 산의 형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시점(視点)을 반영한 것인데 그것은 마치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한 환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곳에는 집이 세 채(오른쪽 위편), 강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빈 배가 흔들거린다. 꿈에서 볼 수는 있지만 갈 수 없는 외로운 심상(心想)을 표현하는 듯하다. 하지만 안평대군의 글에서 박팽년과 식숙주, 최항도 함께 있었다 하니 이것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아른거리는 모습을 표현했을 것이며, 기암(奇巖)의 기괴하고 으스스한 표현은 쓸쓸하기까지 하니 그것은 안평대군이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안견의 호가 ‘현동자(玄洞子)’로 ‘그윽한 골짜기에 사는 늙은이’란 뜻으로 해석해보면 이 그림은 도가(道家)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부터 보인다. 꽃망울 하나하나를 세세히 그리고 강물을 고요히 바라보며 그곳을 통해 무릉도원으로 들어온다. 시원스러워 보이는 물 두 줄기(도원 왼편)가 소박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다. 큰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속에서 보았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단순한 이상향(理想鄕)이 아니라 현재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지금 우리나라에 없다. 이 그림은 일본 천리대학교(天理大學校)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탈취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음이 확실해 보인다. |
안견 몽유도원도 찬시문 재해석 한서대 상기숙교수 한시 21편 새 역주 < 입력 : 2007-03-22 00:00 > < 서산=임붕순 기자> 서산 출신으로 조선시대 대표적 산수화가인 안 견의 `몽유도원도`에 적힌 21편의 찬시문이 새롭게 재해석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는가.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완연하거늘…(안평대군)" 한서대 중국학과 상기숙(여.53)교수는 최근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기문을 비롯해 신숙주, 이 개, 김종서, 박팽년, 서거정 등 당대를 풍미하던 문사들이 몽유도원도를 찬미하며 지은 21편의 한시를 새 역주를 달아 재해석했다. 이번 작업은 서산시 안견기념관의 의뢰로, 일반인들도 참고해 시문을 읽어 볼 수 있도록 주석을 상세히 달았고 쓰임새에 따라 달리 읽혀지는 한자의 특성을 감안, 음도 일일이 적어놨다. 또 안평대군과 21명의 작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면서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 ▲ 서산 안견기념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의 찬시문이 재해석돼 관심이다. 사진은 몽유도원도와 찬시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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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숙 교수는 "원문에 충실해 올바른 번역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소홀한 점이 많다"며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문들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상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시는 상 교수로부터 새 번역문을 건네받아 안견기념관에 원문과 함께 전시키로 했으며 연말에는 사진설명 등을 곁들여 책자로도 펴낼 계획이다.
시 사적지관리사무소 김도형 소장은 "그동안 서울대 이병한 교수 등이 풀이한 번역문이 있었으나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이번에 새롭게 찬시문을 번역하게 됐다"며 "새 번역문은 원문과 함께 포켓용 홍보 책자로도 만들어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몽유도원도는 조선 세종 29년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세계를 안 견에게 얘기 해 3일 만에 완성한 작품으로, 폭 38.6㎝ 길이 106.2㎝의 그림과 안평대군의 제첨, 4행시문을 비롯해 21명의 찬시문이 자필로 쓰여 있는 길이 19.69m의 거작이다.
서산시 안견기념관에 있는 몽유도원도는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원본을 모사 복원한 것으로 1996년 이 대학으로부터 국립 중앙박물관과 함께 기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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