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속의 민화 ‘궁화’에 대하여 /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2017. 4. 11. 20:54美學 이야기


궁중회화에 대하여 (1) | 이런저런 그림이야기

비밀의바다 2009.07.15 17:31
   


         

궁궐 속의 민화 ‘궁화’ 에 대하여 /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궁궐의 한글서체를 민간의 한글서체와 구별하여 궁체라고 불러왔고,


또 궁궐의 보자기를 민간에서 사용된 보자기와 구별하여 궁보宮褓라고 불러온 전통을 고려할 때


궁궐 속의 ‘민화’를 민간민화와 구분하여 ‘궁화宮畵’ 라 부르는게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조선시대 후기의 실용장식화는 궁궐의 그림과 민간에서 유통된 그림 둘 다


제작의 수준과 특정한 소재만 제외하면 병풍이란 고전적 형태, 소재 그리고 양식에서


별 차이가 없고 이 모든 작품에는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불문율처럼 지켜져왔다.



   궁궐의 그림들이 외부로 유출된 것들 외에는 대부분 창덕궁 유물로서


2004년 국립고궁박물관에 귀속되어 전시되고 있어 그들을 중심으로


궁화의 성격과 특징을 민화와의 관계 속에서 알아본다.


궁화는 민화와 마찬가지로 감상 위주의 순수회화가 아닌 장식적, 상징적 목적의 실용화이고


 대부분 작가미상이며, 그 주제와 양식의 기원은 멀리는 중국에 있으나 한국인의 습속에


오랫동안 뿌리내리면서 한국적인 정서와 미의식에 맞춰 단순하고 소박한 양식으로


한국적인 건축공간에 맞게 발전한 민속적 그림이라고 할 수있다.




궁화의 성격과 의미



   첫째, 궁화는 주제뿐만 아니라 그 기능과 상징성에서 민화와 같이 한민족의 민속전통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공통적으로 부부화합을 기원하기 위해 음양의 조화와 번식을 상징하는


암수의 금수禽獸와 초충草蟲 등을 꽃과 함께 배치하였다. 다복과 부귀영화를 염원하며


화려하고 풍요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모란도’를, 多男을 기원하기 위해서는


보다 직설적으로 남자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백동자도’ 를,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불멸의 신선들이 사는 세계를 상징하는 10개의 장생상징물을 그려낸 ‘십장생도’ 등을 그렸다.


즉, 궁궐에서나 민간에서나 한국 민족의 민속적 기원내용과 상징요소, 그리고 그 예술적 표현은 다름이 없다.


궁화는 기능면에서도 민간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람을 막고 시선을 차단하는 가리개와


한 장소와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신성화하기 위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


궁궐 그림에서는 국태민안 등 국가적 기원을 위한 상징성을 더했을 뿐이다.



   둘째, 궁화는 민화의 대다수에서 보이는 주제와 양식을 공유하고 그 영향관계가


일방적이기보다는 양방향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조도, 십장생도, 모란도,


백동자도, 책가도 등은 궁궐에서나 민간에서나 가장 광범위하게 실용화되어 있었으나,


일월오봉도 같은 주제는 궁궐에서 발원하여 궁내에 한정 사용된 것도 있고 경직도耕織圖나 오륜행실도


같은 주제는 궁화로 시작하여 민간에서 유행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구운몽도, 평생도平生圖, 어해도魚蟹圖, 감모여제도感慕如在圖 등과 같은 주제는


민간에서 발원하여 민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거나 일부는 궁궐로 유입되어 궁화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높다. 특히 궁화의 민속적 속성을 본다면 어떤 주제들은(백동자도, 책가도등)


민간에서 발전하여 유행하다가 영조대왕처럼 민간에서 생활하던 미래의 왕이나 왕후들을 통해


궁궐로 유입되어 민간 출신 화원화가들에 의해 궁화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셋째, 궁화도 민화도 주술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한국에 일단 들어오면 모든 외래종교가


벽사구복의 주술성을 띠게 되는 사실로 보아 궁화와 민화의 발전 배경에도 한국인의 의식 깊이


내재되어 있는 무속 전통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궁화는 천보와 천명, 태평성대, 부국강병등


국가적인 상징성을 추구하고 있는데, 임금의 공식석상에서만 사용된 조선 최고의 의장인


일월오봉도를 제외하고는 궁화의 모든 주제가 민간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궁궐의 실용적 장식 그림은 화원화가들의 업무로서 본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작되었고


관례적으로 서명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더욱이 대부분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또 목적이 순수 감상에 있지 않았으며 보존과 수집에 가치를 두지 않고


훼손되면 폐기하고 다시 제작해 사용하였던 것이다.




궁화와 민화의 공유양식과 차이점



   궁궐민화와 민간민화는 주제에서 보이는 많은 공통성 외에도 근본적인 미학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형태(병풍), 도식적인 성향, 사실주의 기법의 결여, 평면성, 대칭적인 성향, 원근법의 결여,


장식기능의 중요성, 기능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제작 수준과 표현의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성향의 결여와 도식성, 그리고 추상 성향은 민간민화의 戱畵性, 소박미와 더불어


한국 민화에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를 부여하였다.



   궁화와 민화는 주로 병풍의 형태로 전해지는데 한국만큼 병풍그림의 전통을 고집하고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 전통 건축은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흙벽이 주이고 실내가 좁고 천장이 낮은 공간을 이루고 창이 많아 항시적인 족자보다는


휴대하기 좋고 크기 조절이 가능한 병풍이 실용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또 마당문화가 발전하여 많은 예식과 굿 등이 마당에서 진행된 관계로 주 무대에 상징적이고


실용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고 또 지역의 마을에서는 가난한 집이 혼례 등에


격식을 갖출 수 있도록 공동체가 공용으로 사용하려면 운반의 용이성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궁화와 민간민화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궁화 제작에 고급 바탕과 안료를 사용한 점,


섬세한 세부묘사, 균형적인 구성이 돋보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기할 차이점은,



   첫째, 궁화는 ‘五彩’와 ‘靑綠山水’ 의 색채 전통이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민화와 달리 수묵계열의 궁화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이런 것들은 궁화 뿐아니라


건축의 단청과 의관복식, 자수공예 등에서도 일상화되어 있었다.


광물성 안료인 ‘청록’은 대체로 도교 전통의 선계를 상징하는 색채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뿌리내린 장식성이 강한 산수화 전통으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도,


한궁도, 요지연도 등의 배경산수에 사용되었다.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화목에서


거의 예외없이 등장하는 紫雲도 선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궁궐민화에서는 민간민화가 보이는 대담한 생략, 붓과 먹의 無法적 사용,


구도의 예기치 않은 변형, 오채의 다양한 변용과 과감한 부분적 생략이 보이지 않는다.



   셋째, 민화에서 보이는 익살스러운 모티프의 등장과 희화적 표현과 재치 등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예술적인 결과물은 한 사회가 걸어온 문화적 흔적들이 응축되어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중 민속예술은 생활관습, 신화와 전설, 종교와 미신, 미의식, 정서 등을 대대로 공유해온 한


 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표현하는 물질문화로서 특히 미술과 건축, 그리고 공예품들을 포괄한 예술을 말한다.


궁화와 민화는 분명히 민속예술에 속한다. 앞으로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좀 더 적극적이고


세밀한 연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도록<민화와 장식병풍>] 중에서

 

       

<십장생도>







궁중회화에 대하여 (2) | 이런저런 그림이야기

비밀의바다 2009.07.23 16:15

 

궁중회화는 궁중에서 제작·감상·배포된 그림으로 왕실과 국가가 주관하여 제작되었다.

조선시대동안 공적인 예술은 유학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고, 그림의 경우 유학적인 본말론이

적용되어 말기末技 중 한 가지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국가적인 경영을 위하여 그림이 필요하였고,

사회적인 공리성과 효용성에의해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궁중회화는 국가적인 권위와 위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궁중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는데 도화서라는 관아에 소속된 직업화가인 畵員이 제작하였다.

화가로서 가장 영예로운 지위이지만 실력이 모자라거나 태만하면 곧 관직에서 쫓겨났다.

따라서 이들을 최고의 수준으로 유지하게 하려는 제도적 장치와 개인적인 노력이 존재하였고,

그 결과 높은 수준의 궁중회화가 제작될 수 있었다. 이런 그림에는 화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거나,

화가의 개성이 자제된 경우가 많았다. 조선 왕조가 없어짐에 따라 이런 격조높고 고급스러운 회화

또한 계승되지 못하였다. 궁중회화는 기능과 주제, 화풍을 감안하여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보면


1. 감계화

   효용성과 공리성을 강조한 교훈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것이 왕의 어진인데 수많은 전란과 화재로 인하여 온전이 보전된 것이 없고

1872년(고종9)에 이모된 태조대왕의 어진(전주 경기전)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상’(1783)은 정조대왕이 총애하던 신하(강세황)로 왕명에 의해 그려진 공신상이다.


 

태조대왕의 어진(전주 경기전)



2. 기록화

   궁중의 주요한 행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기 위하여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화성원행도>이다.


 

    

 <봉수당진찬도>


   이 그림은 정조가 1795년(정조19, 을묘년) 윤2월 11일부터 16일 까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부친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을 방문한 행사를 그린

기록화로 기념비적 명작이고 대작이다. 그림은 모두 여덟 장면으로 구성되어

각 행사의 특징을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그렸다.


   오른쪽으로부터 <화성성묘전배>,<봉수당진찬>,<낙남헌방방>,<낙남헌양로연>,<서장대야조>,

<득중정어사>,<환어행렬>,<한강주교환어> 등 현릉원이 있는 화성(지금 수원)의

행사장면들을 먼저 다루었고, 그 다음으로 행사가 끝난 뒤 한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선정되었다.

이 기록화는 웅장한 규모, 정교한 묘사, 화려한 채색으로 궁중회화의 특징과 격조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흔히 능행도로 알고 있지만 당시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으므로 원행도가 맞다.


   이 을묘년 행차는 여느 때와 달리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있는 해여서 화성에서 열린

그 회갑연의 그림도 그려져있다. ( 혜경궁 홍씨는 왕비가 아니므로 한양 궁궐에선 회갑연을

열 수 없어서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화성에 가서 회갑연을 성대히 열어 드렸다 함.

위 그림은 그 때를 그린 것임. 비단에 채색. 호암미술관 소장) 이 그림 중

특히 노량진 다리를 건너는 <한강주교환어>(비단에 채색. 호암미술관 소장. 1795.윤2.16.

환궁하는 정조의 행렬을 용산 쪽에서 보고 그렸다. 36척의 배를 서로 얽어 만든 주교 위를

모친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건너고 있는 광경으로 난간은 물론 세 개의 홍살문까지 갖추었다)와

시흥 행궁에 이르는 <환어행렬>(비단에 채색. 호암미술관 소장. 1795. 윤2.15. 화성에서 출발해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르려는 장대한 어가행렬이다. 당시 6천여 명의 인원과

1천4백여 필의 말이 동원되었던 장관을 갈之(지)자 처럼 꺾인 길을 따라 교묘하게 배치했다.

구경꾼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그림)은 이 그림의 하일라이트가 되고있다.

 

          

     

<무신진찬도戊申進饌圖> (1848. 국립전주박물관)  


8폭 병풍그림은 1848년(헌종14년, 무신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육순과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망오(望五, 41세가 되는 것)를 기념하여 열린 궁중의 진찬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왕을 위한 연회는 진연이라 하였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를 위한 잔치는 진찬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병풍의 제목이 진찬도이다.

1,2 폭에는 3월 16일 창덕궁의 인정전에서 헌종이 주관하여 거행된 진하례를 그린 <인정전진하도>가,

3,4폭에는 <통명전진찬도>가, 5,6폭에는 <통명전야진찬도>가, 7폭에는 <통명전헌종회작도>가,

8폭에는 행사를 진행한 진찬소의 당상과 낭청의 좌목이 적혀있다.

이런 그림들에는 어좌에 왕의 모습은 그려져있지 않는데 실제로는 왕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우리 궁중회화에서는 왕, 왕비, 왕세자 등 중요한 인물은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3. 장식화


   직접적인 공리성은 아니지만 삶의 상서로움과 길상을 기원하는 효용성을 가진 그림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일월오봉도>이다.(따로 설명되어 있음)

<십장생도> (10폭 병풍.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장수와 기복을 상징하는 십장생을 그린 것이다. 아름답고 신비한 영물들이 꽉 차 있는 화면은

이 시대 사람들이 영원한 삶과 무한한 행복이 깃든 공간으로 꿈꾸었던 환상의 세계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늘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 삶.

이러한 소망을 상징하는 열 가지 상징물을 모아 十長生이라 불렀는데

숫자나 종류는 유동적이어서 장생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장생을 상징하는 것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해, 구름, 산, 바위,물은 천지자연 가운데 선택된 것이고,

학, 사슴, 거북은 동물 가운데 뽑힌 것이며, 소나무, 불로초, 천도복숭아 등은 식물 가운데

선택된 것이다. 때로는 대나무 등도 포함되기도 한다.



 

 

 <모란도> (8폭, 국립고궁박물관)


   모란은 꽃 중의 왕, 花王이라고도 불리는,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이다.

괴석위에나 화병에 담긴 모란을 그리는데 이는 장수부귀를 염원하기도 하고 평안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궁중에서 평소에도 생활공간을 장식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고

중요한 행사 때에도 자주 쓰였다.



 

  

 <노안도> (강필주. 1917년. 국립고궁박물관


   갈대와 기러기는 화조화 가운데 장 자주 그려진 소재이다.

그것은 갈대의 한자어인 노蘆가 중국어에서는 늙을 로老와 발음이 같고,

기러기의 한자어인 안雁이 평안의 안安과 발음이 같아 이 두 소재를 합하면

늙어서 평안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기러기는 안서雁書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로 사랑을 받았다. 강필주는 생몰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1911년 안중식, 조석진 등을 중심으로 서화미술회가 발족하여 후진을 양성할 때

교수진으로 함께 활동했고,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에도 13인의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역시 전통화풍을 구사한 원로로서 인정된 것으로 짐작된다.



 

  

 <동리가경도東籬佳景圖><옥당부귀도玉堂富貴圖> (이한복. 1917. 국립고궁박물관)



   이 두 그림은 2폭 병풍으로 가리개 용도로 궁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기명절지器皿折枝

분류되는 그림이다. 기명절지란 말 그대로 각종 그릇류와 절지 즉, 각종 화훼류를 모아 그린 것으로

대개는 여러 소재들이 상징하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기물은 대부분 길상적인 의미를 가진 것들이어서

그 의미적인 측면에서도 즐겁고 행복한 그림이다. 마치 여러 가지 기물과 절지를

그저 아름답게 나열한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각 소재가 지닌 의미를 전달하는 

상징체계가 작용하고 있다. 이런 기명절지도는 19세기 이후 유행하였는데,

기명절지가 가진 상징성은 일종의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옥당부귀> 는 목련에서 상징되듯이 에 해당되는 장면으로 불감, 모란, 장미는 모두 복락과 장수가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소재이다. 기명류 가운데 병甁은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평안의 평平과 발음이 같아 평안을 의미한다. 여의如意는 뜻대로 이루어지라는 기원이니

이 그림에 나타나는 소재들을 모아보면 언제나 평안, 행복, 장수하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라는 기원인 셈이다.


   <동리가경> 은 국화에서 나타나듯이 가을을 시사하여 봄과 대칭되는 계절을 그린 것이다.

그림 중의 여의와 호로병, 괴석, 고동기 등은 대부분 장수를 의미하고, 국화와 붉은 감, 단풍은 계절을

의미하며 포도와 석류는 자손 번창과 다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두 폭에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가장 중요한 기원들이 다 담겨졌다. 화가는 중요한 소망을 담은 소재들을

정교한 선묘와 세밀한 묘사, 아름다운 채색을 동원하여 정성껏 그렸다. 그리고 각각의 기물을

지그재그로 포치하여 아무 배경도 없는 공간에 깊이감과 변화감을 자아내고 있다.


   <총석정절경도> (김규진, 1920, 비단에 채색, 창덕궁 희정당 동벽 벽화)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에 위치한 명승이다. 관동팔경 중 한 경치로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것이다.

금강산으로의 여행은 보통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관동팔경의 순서로 진행되곤 하는데

이 곳은 내외금강을 본 뒤 동해가로 방향을 돌려 해금강을 감상할 경우 반드시 들르는 명소이다.

금강산의 줄기가 바닷가로 솟구쳐 오른 기이한 돌기둥들은 여행객으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절경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궁중의 벽화로 그려진 그림이다. 1917년 11월 창덕궁에 큰 불이 나서

대조전과 희정당 등 여러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근근이 맥을 유지하던

조선의 왕실은 두 재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는 사업으로 희정당과 대조전, 경훈각 내벽에

새로운 장식화를 그려 붙이는 일을 했는데 이를 관장한 조선 최후의 왕 순종은 여러 화가들에게 명하여

각 전각의 성격과 기능에 따라 적절한 주제의 장식화를 제작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순종이 응접실로 사용하던 희정당에는 금강산의 절경을 장식하도록 명하였다.

당시는 일제 침략으로 국권이 찬탈된 때였는데 순종은 우리의 상징인 금강산을 가까이 두고

늘 보고자 했던 것 같다. 이 때 김규진의 나이 53세이다. 그는 또한 순종에게 글씨를 가르친 사부로

당시 서예와 사군자에 능했다. 이것은 벽화이기는 하지만 비단 바탕에 그려 벽에 붙인 것이다.



<총석정절경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1920. 김규진. 비단에 채색. 창덕궁 희정당 서벽)

희정당의 서쪽 벽 위를 장식한 벽화이다. 10미터에 가까운 대규모 화면위에 펼쳐진 萬物肖의 모습은

웅장하고 격렬하며 신비스럽다. 금강산의 봉우리들 가운데 만물초의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인데

외금강을 대표하는 봉우리 중 하나인 만물초는 화강암의 봉우리들이 마치 병풍처럼 우뚝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다양해서 세상 만물의 생김새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그림은 <총석정절경도>의 건너편에 위치하여 순종이 남쪽을 향하여 앉았을 때

그 왼쪽으로는 총석정도가 오른쪽에는 만물초가 보이게 된다.

왕은 이 곳에 앉아 우리나라 자연과 역사의 아름다움과 유구함을 생각하고

작금의 시절를 안타까워하며 왕조의 무궁함을 꿈꾸었을 것이다.


   <봉황도> (오일영, 이용우. 1920 창덕궁 대조전 동벽)

왕비의 침전대조전에 봉황도를 그린 것은 봉鳳은 왕, 황凰은 왕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붉은 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한낮에 오동나무가 서있는 물가의 언덕과 바다 위에서

화려한 깃털을 가진 열 마리의 봉황들이 노닐고 있다. 바다, 구름, 해, 폭포, 바위, 오동나무,

대나무, 난초, 작약등이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아주 화려하고 정교하여 장식성이 돋보인다.



<봉황도>

   

<백학도>



<백학도> (김은호. 1920년 창덕궁 대조전 서벽)  

왕과 왕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吉祥圖이다.

인물화를 잘 그린 김은호이기에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웅장하다.

화면의 왼쪽에는 무성한 소나무가 서 있는 언덕을 두고

그 오른쪽 중앙에는 출렁이는 파도와 너른 하늘이 나타나며

그 위로 열여섯 마리의 학이 날개를 치며 나르거나 언덕으로 날아든다.

언덕 위에는 노송과 푸르른 소나무, 활짝 핀 작약, 영지들이 나타나 상서로움을 더해 준다.

하늘에는 하얀 달이 떠 있어 낮의 경치인 <봉황도>와 대비되도록 밤의 경치 그렸다.

순종은 대가들은 드물고 전통적인 회화를 배우고 가르치는 기관은 없어지고

조정의 힘은 약해진 상황에서도 조선 왕실의 재건을 위해 벽화를 제작하는

원대한 계획을 진행해 오랜 전통을 되살리려 애썼던 것이다.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노수현. 22세. 1920. 창덕궁 경훈각 서벽)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산과 연이어 나타나는 너른 호수가 있고,

그 위로 네 마리의 학이 나는데 학과 산 사이의 공간에서 붉은 해가 솟고 있는 장면이다.

무성한 소나무 숲 속에는 신선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고, 누각 안에도 해를 바라다보고 있는 인물이 있다.

신선나라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했다.


<조일선관도>

 

<삼선관파도>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 (이상범. 24세. 1920. 창덕궁 경훈각 동벽)  

세 신선이 왼쪽에 전개되는 호수를 보면서 서로 나이 자랑을 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노수현과 함께 그 시대 대가인 안중식의 제자로 고사인물도를 대규모 벽화로 표현했다.

신선처럼 무병장수 하시라는 뜻이 담겨있다.


2   005년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내 역대 조선 임금과 왕비의 거실인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등의 내벽에 장식된 대형 벽화 6점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곳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에 완공돼 14명의 임금이 살았으며, 1926년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한 바 있다. 여기에 그려진 벽화 그림들은 보통 사방 2m에서 9m 까지의 비단에 채색되어

벽에 부착된 그림들인데 이 그림들이 그려졌던 1920년대 즈음 화단에서는 많은 변화가 모색되고 있었고

서화협회를 중심으로 전통회화를 이어가는 연구회가 있었는가 하면 서양회화를 배운 화가들이 나타났고

일본 화가들이 건너와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여서 조선의 전통화풍은 위축되는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 벽화들의 제작은 전통화풍과 문화를 이어가고자 하였던 왕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합심하여 이룬 대역사였으며 당대 최고 화가인 해강 김규진과 황실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 1,2기 출신인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등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들로 전통화법에서 현대화법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매우 진기한 작품들이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사연을 간직한 창덕궁은 얼마전

정전인 경복궁을 제치고 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그림] 중에서 박은순 지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화인열전2 고독한 나날 속에서도 붓을 놓지않고] 유홍준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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