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 솟아 오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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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작품: 백두-봉황- 정다기 外

2017. 4. 12. 10:40ㆍ美學 이야기

   

정다기 민화 작가 개인전 '백두-봉황'작품 감상글 | 전시작품감상글


2012/03/23 18:53 
  http://art.misulban.com/simple4230/7512  

민화 작품: 백두-봉황- 정다기

 

 글: 백두-봉황 앞에서... 오재순

 

   며칠 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삐리리"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바로 민화 개인전을 여는 정다기 작가의 전화였는데 순간 폰에서 다가오는 작가의 이미지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은 봉황을 단번에 떠올렸다. 곧이어 상대방 폰을 타고 들려오는 말, "내가 왜 전화를 했을까요?" 물어 오길래 느낌으로 글 써달라는 부탁이란 것을 알면서도 귀찮아 일언지하에 미리 글을 쓰지 못하겠고 거절하려고 이야기의 화제를 얼른 다른 데로 몰고 갔다.

 

   그러나 계속 감상 글을 써 달라 하기에 정다기 작가에게 '민화에 대한 관심은 갖고 있지만(신사임당의 초충도 같은 작품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기억이 있고, 책으로도 자주 접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보랏빛 가지 그림을 지금까지도 좋아한다.(가지 속에서 가지가지 많은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아서^^) 민화를 그리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았기에 민화에 대한 깊은 감상글은 쓸 수 없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냥 개성껏 써 달라 부탁을 한다. '그러마' 하겠다며 승낙을 하고 나는 잠시 이마에 손을 올리며 생각을 했다. '으- 나도 개인적으로 할 일이 산더미인데 '흐흑' 또 승낙해버렸네. 이것 참...' 하며 약간의 부담감이 오는 순간, '아, 아니다! 어찌 되었든 감상글을 쓰다보면 작가가 그려낸 작품들을 아니 볼 수 없고(사실 수도 없이 보곤 한다. 아마도 작가 본인보다도 이때만큼은 내가 더 작품들을 들여다 볼 것이다.), 또한 작가 화실에 들어가 그간 수도 없이 그렸던 민화 작품들을 산책 하듯 여러 번 훑는다. 그리고 작가의 글이 있으면 '작품 감상글'을 참고 하기 위해 대충 글까지 훑어본다.

 

   또한 그동안 전시했던 작가의 사이버 갤러리에도 들어가 '퐁당퐁당' 물장구도 치고, 나무 위로 올라가 새처럼 하늘을 날아보기도 한다. 그런 다음, 감상글 써 줄 작품에, 내 딴엔 온통 집중을 하며 며칠간 작품과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눈다. 이렇게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으면 생각지도 않은 공부를 하게 되어 나로서는 더욱 시야를 넓히게 되는 계기가 되어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소득(?)을 얻곤 한다.(색즉시공,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요'^^) 그러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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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봉황 / 170×74cm / 종이에 수채 / 2009

 

  '백두 봉황' 작품을 들고 며칠을 생각에 잠기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 덧 꽃샘추위는 저만큼 달아나고 집 앞, 뜰 앞에 봄 햇살이 가득하다. 아니 진달래 꽃밭에 서 있는 기분이다.

 

   '백두 봉황'을 펼치는 순간, 하늘에 꽃이 피었다. 봉황이 피어 낸 천지가 진달래 꽃밭이다. 백두산 천지가 온통 진달래 꽃밭이다. 출렁이는 바다 물결 위에도 진달래가 꽃물결을 이루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가 보다. 아니, 대한해협을 13시간 16분 횡단했다던 조오련 선수처럼 진달래꽃도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하나보다. 온통 물결이 꽃분홍 진달래 물결이다. 그야말로 고개 저을 만큼 판타지가 따로 없을 성 싶다.

 

   한참 눈을 감고 작품에 취해 있는데 이번엔 눈뜸과 동시에 진달래 꽃밭이, 아기를 업는 꽃분홍 포대기로 '촥!' 펼쳐진다. 난데없이 웬 아기 포대기일까? 아기 포대기라... 어쩌면 생명이 움트는 봄을 병풍처럼 하늘에 펼쳐 주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어느 봄, 차를 타고 가다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는데 산마다 가득 핀 진달래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몰려 피어 있는 꽃분홍 진달래를 보는데 난 그 곳이 어쩐지 물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진달래가 산 속에 핀 것이 아니라 '첨벙첨벙' 물속에 핀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뭐, 착각해도 상관없는 일, 산 속에 핀 진달래만 보다가 물속에 핀 진달래의 황홀한 풍경을 떠올렸으니 이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겠는가.

 

   난 또 다시 작품을 접었다 펼쳐 본다. 이번에는 선녀들이 하늘에서 꽃분홍 부채춤을 추고 있다. '아, 이럴수가!' 그렇다면 유년 시절, 가을 운동장에서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었는데 그 부채가 바로 봉황이 피어낸 진달래꽃이란 말인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이미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상상의 동물인 봉황을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벅찬 마음에 금방이라도 저 봉황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오를 것만 같다.

 

  전설 속에 나오는 신령한 새인 봉황, 상상의 동물 봉황을 접한 뒤, 예전에 얼핏 스쳐간 글 중에 봉황(김지하 글)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닭이 집을 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빨리 달리게 되고, 날기도 하면서 봉황이 되었다는 글을 보면서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닭인가, 봉황인가? 한번쯤 생각해봐도 재밌을 것 같다... ^^)

 

   봉황하면 벽오동 나무가 생각난다. 봉황은 벽오동 나무가 아니면 절대 둥지를 틀지 않는다는 전설을 접했던 기억이 있는데 사실 오동나무와 벽오동 나무는 다르다 한다. 벽오동 꽃은 층층나무꽃을 연상시키는데 노랗게 핀다고 한다. 평소에 본 것도 같고, 아니 본 것도 같고... '벽'자가 '푸를 벽'이라 한다. 나무(줄기)가 온통 푸른색을 띄고 있어서 벽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그래도 나는 벽오동의 '벽'자가 가로막힌 벽인 듯 왠지 낯설어 ‘나무’ 검색을 해보니 북한에서는 ‘청오동’이라 하는데, 훨씬 친근감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오동나무의 꽃은 보랏빛인데 주위에서 참 많이 보았다. 키 큰 오동나무꽃을 올려다보다 보면 고개가 아플 지경인데 하늘 아래 보랏빛 꽃송이들은 마치 샹들리에 조명을 연상 시켜주어 참으로 볼 만한 풍경이다.

몇 년 전, 오월 중순이던가? 차를 타고 가는데 멀리서 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보여 한참 눈을 떼지 못한 기억이 있다. 어찌 되었든 오월이 되면 나는 오동나무 꽃을 찾아 나설 참이다. 어쩌면 진달래 꽃밭 저 작품 속 봉황이, 오동나무에 ‘퍼드득’ 날아 와 둥지를 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IMG_4251.jpg
오월, 강가의 오동나무가 강물을 마시고 있나 보다.

 

 

Img_4238.jpg

보라빛 오동꽃

 

Img_4247.jpg
오동나무 열매

 

 

정다기 민화 개인전 사이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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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조선 궁중벽화 실물 공개

송고시간 | 2015/04/27 09:46

    창덕궁 대조전 장식 봉황도·백학도 보존처리 완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한제국이 망했지만 조선 왕조는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했다. 이 무렵인 1920년 왕비의 생활공간인 창덕궁 대조전에는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 두 그림이 그려졌다.

    대조전은 그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17년 재건하니, 이에 즈음해 이왕가는 내부를 장식하고자 이들 그림을 당대 촉망받는 젊은 화가들에게 그리게 하고는 벽에 붙인 것이다. 


    대조전 봉황도
    대조전 봉황도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 벽화라고 할 만한 이들 그림 실물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조전 벽화 2점을 제1회 궁중문화축전을 맞아 오는 28일부터 5월31일까지 박물관에서 공개한다.

    문화재청은 대조전 벽화가 훼손됨에 따라 보존관리 차원에서 2013년 이후 벽화를 떼어내 보존처리를 하고는 원래 이들 벽화가 있던 대조전 벽에는 모사본을 제작해 부착하는 사업을 2년에 걸쳐 진행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벽화는 보존처리를 완료한 다음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이에 이번 특별전에서는 실물 외에도 벽화 보존처리와 모사본 제작 모습을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준다.


    대조전 백학도
    대조전 백학도

        이들 두 벽화는 대조전 내부 동쪽 벽과 서쪽 벽면 상단을 장식했으며, 크기는 같아 폭 214㎝에 길이는 578㎝에 달한다. 비단에 그려 벽에다 붙인 이른바 부벽화(付壁畵) 형식이다.

    동쪽 벽을 장식한 봉황도는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가 그렸다. 등록문화재 제242호인 이 그림은 봉황을 주제로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리꽃, 청록화풍으로 표현한 바위 등을 극채색(極彩色)으로 함께 표현했다.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산해경(山海經)의 관련 내용을 소재로 삼아 그렸다. 



    대조전 봉황도

    대조전 봉황도

        그 맞은편 백학도는 김은호(金殷鎬) 작품이다. 등록문화재 제243호인 이 벽화는 16마리 백학이 달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향해 날아와 앉는 모습을 표현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대조전에는 애초 봉황도와 함께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라는 그림을 장식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백학 그림으로 대칭을 이루게 됐다.

    백확도에 등장하는 학, 사슴, 소나무, 영지, 바위, 물, 해, 달, 산, 거북은 십장생(十長生)에 속해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대조전 백학도
    대조전 백학도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5/04/27 09:46 송고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 벽화 공개된다···창덕궁 대조전 봉황도·백학도 한국의 역사                                        

    2015.04.27. 18:37

              http://blog.naver.com/khlim1973/220343135670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 벽화 공개된다···창덕궁 대조전 봉황도·백학도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 벽화라고 할 만한 그림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조전 벽화 2점을 제1회 궁중문화축전을 맞아 오는 28일부터 5월31일까지 박물관에서 공개한다고 27일 밝혔다.

    대한제국이 망했지만 조선 왕조는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1920년 왕비의 생활공간인 창덕궁 대조전에는 봉황도와 백학도 두 그림이 그려졌다. 화재로 소실된 대조전을 1917년 재건하면서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당대 촉망받는 젊은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해 벽에 붙인 것이다.


    대조전 봉황도

      창덕궁 대조전 내부 모습.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다.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해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갖췄다. |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훼손된 대조전 벽화를 관리하기 위해 2013년 벽화를 떼어내 보존처리를 했다. 원래 이들 벽화가 있던 대조전 벽에는 모사본을 제작해 부착하는 사업을 2년에 걸쳐 진행했다.이번에 공개되는 벽화는 보존처리를 거쳐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실물 외에도 벽화 보존처리와 모사본 제작 모습을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준다.

    두 벽화는 대조전 내부 동쪽 벽과 서쪽 벽면 상단을 장식했다. 크기는 같다. 폭 214㎝, 길이 578㎝에 달한다. 비단에 그려 벽에다 붙인 부벽화 형식이다.

    대조전 봉황도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왕실이 후원한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교육받은 대표적 신진 화가인 오일영과 이용우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대조전에 부착된 벽화.

    채색 화조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형상의 표현과 기술묘사에 충실한 그림이다 | 문화재청 제공


       동쪽 벽을 장식한 봉황도는 오일영과 이용우가 그렸다. 등록문화재 제242호인 이 그림은 봉황을 주제로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리꽃, 청록화풍으로 표현한 바위 등을 극채색으로 표현했다.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산해경의 관련 내용을 소재로 그렸다.

    대조전 백학도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왕실이 후원한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교육받은 대표적 신진 화가인 김은호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대조전에 부착된 벽화이다. 채색 화조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형상의 표현과 기술묘사에 충실하여 화려한 구성을 담고 있다. 궁중 벽화로는 다른 5점과 더불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닌 전각의 기능과 연계되어 추락한 왕실의 안녕 및 권위의 회복, 왕실의 역량을 재확인하는 길상적(吉祥的),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 문화재청 제공

       그 맞은편 백학도는 김은호 작품이다. 등록문화재 제243호인 이 벽화는 16마리 백학이 달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향해 날아와 앉는 모습을 표현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대조전에는 애초 봉황도와 함께 천보구여도라는 그림을 장식할 예정이었지만, 백학 그림으로 대칭을 이루게 됐다. 

    백학도에 등장하는 학, 사슴, 소나무, 영지, 바위, 물, 해, 달, 산, 거북은 십장생에 속해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창덕궁 대조전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편액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편액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창호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창호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전경 |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 대조전 전경 | 문화재청 제공


     사진자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71511491&code

    =960201#csidx8e9badee190d060a886d7de69e577c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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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 벽화 공개된다···창덕궁 대조전 봉황도·백학도|작성자 들풀

    blog.naver.com/khlim1973/220343135670   산과 테니스를 사랑하..





    [스크랩] 창덕궁 대조전 장식 봉황도·백학도 보존처리 완료_(5월31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공개)| 민화 힐링

    eggy | 조회 123 |추천 0 | 2015.05.06. 23:38


     

     

     창덕궁 대조전 벽화  고궁박물관  전시관람  꼭 부탁드립니다^^ 

     


     

     

     

     

     

     

     

     

     

     

     

    창덕궁 대조전 장식 봉황도·백학도 보존처리 완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한제국이 망했지만 조선 왕조는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했다. 이 무렵인 1920년 왕비의 생활공간인 창덕궁 대조전에는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 두 그림이 그려졌다.

    대조전은 그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17년 재건하니, 이에 즈음해 이왕가는 내부를 장식하고자 이들 그림을 당대 촉망받는 젊은 화가들에게 그리게 하고는 벽에 붙인 것이다. 



    대조전 봉황도
    대조전 봉황도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 벽화라고 할 만한 이들 그림 실물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조전 벽화 2점을 제1회 궁중문화축전을 맞아 오는 28일부터 5월31일까지 박물관에서 공개한다.

    문화재청은 대조전 벽화가 훼손됨에 따라 보존관리 차원에서 2013년 이후 벽화를 떼어내 보존처리를 하고는 원래 이들 벽화가 있던 대조전 벽에는 모사본을 제작해 부착하는 사업을 2년에 걸쳐 진행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벽화는 보존처리를 완료한 다음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이에 이번 특별전에서는 실물 외에도 벽화 보존처리와 모사본 제작 모습을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준다. 


    대조전 백학도
    대조전 백학도

     


       이들 두 벽화는 대조전 내부 동쪽 벽과 서쪽 벽면 상단을 장식했으며, 크기는 같아 폭 214㎝에 길이는 578㎝에 달한다. 비단에 그려 벽에다 붙인 이른바 부벽화(付壁畵) 형식이다.

    동쪽 벽을 장식한 봉황도는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가 그렸다. 등록문화재 제242호인 이 그림은 봉황을 주제로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리꽃, 청록화풍으로 표현한 바위 등을 극채색(極彩色)으로 함께 표현했다.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산해경(山海經)의 관련 내용을 소재로 삼아 그렸다. 



    대조전 봉황도
    대조전 봉황도

     


       그 맞은편 백학도는 김은호(金殷鎬) 작품이다. 등록문화재 제243호인 이 벽화는 16마리 백학이 달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향해 날아와 앉는 모습을 표현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대조전에는 애초 봉황도와 함께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라는 그림을 장식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백학 그림으로 대칭을 이루게 됐다.

    백학도에 등장하는 학, 사슴, 소나무, 영지, 바위, 물, 해, 달, 산, 거북은 십장생(十長生)에 속해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대조전 백학도
    대조전 백학도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관련

    출처 :미술은 영원히 원문보기▶   글쓴이 : 조미영

       

    cafe.daum.net/minwhart/ITG2/63   민화창작








    민화열전-21..주작도-봉황을 형상화한 남쪽의 수호신 | 휴게실


    2016.05.07 09:45:09


    김선업

     

    주작(朱雀), 봉황인듯 장닭인 듯….

    지혜와 용기 상징…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瑞鳥)

     


     ▲ 주작도(김혜경 作). 주작은 봉황을 형상화한 그림으로 남방의 수호신을 뜻하며 지혜와 용기를 상징한다.

    (21)주작도-봉황을 형상화한 남쪽의 수호신

       동물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호랑이나 백곰처럼 우리에게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신비로움과 더불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사방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믿음직한 그들이 바로 사신(四神)으로 청룡(靑龍), 백호(白虎), 현무(玄武), 주작(朱雀)입니다.

       상상속의 신령한 동물인 사신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뿐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하늘 사방의 스물여덟 별자리와도 관련이 있으며 벽사와 음양조화를 이루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 사신 중 그 첫 번째로 주작(朱雀)에 관하여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주작은 남방을 지키는 화(火)기운을 맡은 신으로 붉은 봉황을 형상화 하여 무덤이나 관(棺) 앞에 그렸습니다. 계절로는 화(火)기운에서 알 수 있듯이 여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봉황이 도를 깨우치면 온 몸이 붉게 물들어 '붉은 봉황' 즉, 주작이 됩니다.

    그 때문인지 형태는 봉황과 거의 비슷하며, 주작의 모습에 공작과 비슷하며 은빛을 띄고 있어 불새라고도 불리며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작은 강한 양기를 지녀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존재로도 유명한데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주작을 '불사조'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붉은 색과 강한 양기로 인해 '불새'라는 명칭도 가지나 실제로는 서양의 '피닉스'처럼 몸이 불꽃으로 타오르지는 않습니다.

    봉황이 왕을 상징하는 것과는 달리 주작은 재주나 수호를 담당 하는 새로 현자나 기술자 등 재주를 가진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주작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4신중 심판을 담당하는 재판관이기도 합니다.


       이들 4신은 하늘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작은 남쪽의 수호신(守護神)이며, 남쪽에는 28수(宿) 중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의 7개 성좌(星座)가 있습니다.

    그 형상은 시대마다 약간의 양식적인 변화는 있지만 현실과 상상의 동물이 복합된 봉황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현재 주작도를 쉽게 접할수 있는 장소로는 경복궁 광화문의 홍예문에 가보시면 천장에 선명하게 그려진 주작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화 속에서는 주작도를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 선조들은 민화 속에서 주작을 상상속의 동물인 만큼 환상적으로 그렸으나 현실속의 늠름한 장닭으로 그려놓아 친근감이 넘치게 하였습니다.

    닭은 여명을 알리고, 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瑞鳥)로 여겼습니다. 장닭이 훼를 길게 세 번 이상 치고 꼬리를 흔들면 산에서 내려왔던 맹수들이 돌아가고 잡귀들이 모습을 감춘다고 믿어왔습니다.

    닭은 흔히 다섯가지의 덕(德)을 지녔으며, 닭의 벼슬(冠)은 문(文)을, 발톱은 무(武)를 나타내며, 적을 앞에 두고 용감히 싸우는 것은 용(勇)이며, 먹이를 보고 무리를 부르는 것은 인(仁 ), 때를 맞춰 울어 새벽을 알리는 것을 신(信)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닭의 모습을 보고 상상속의 주작으로 멋들어지게 그려내었던 우리 선조들의 풍류가 바로 주작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www.daeguyak.net/rest/view.phm?num=1897&gubun=22..  








    김형국의 미학산책 〈6〉 탄생 100주년 맞은 장욱진 화백

    글 :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 선생이 재능 발견, 집안에서 반대해 매 맞고 반년 동안 정양하기도
    ⊙ 장욱진, “(나는)심플하다”
    ⊙ “그림 이외는 완전 무능해서 두 손에서 붓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 죽을 사람”
        (김원용)

    김형국
    194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 저술


    강운구, 〈수안보시절의 장욱진〉, 1983.

    화가는 사진작가 강운구(姜運求, 1941~)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찍은 얼굴 사진이 꽤 많다.

      

       올해는 기인(奇人)으로도 소문났던 1917년생 서양화가 장욱진(張旭鎭)의 탄생 백년이다. 그는 내가 처음 만났던 1973년, 연세를 여쭙자 “나이는 왜? 일곱 살!”이라고 단호하게 반응했던 쉰일곱의 화가였다. 사람은 어린 나이의 순진무구를 잃지 말아야 마땅한데 그러자면 나이는 먹을 게 아니라 뱉어야 한다 했다. 
      
      모든 세속인들이 받기를 바라는 것이 이름난 상이 아닌가. 예술원상 유력 후보자라는 말을 장욱진이 엿듣자마자 “그런 상, 받으면 재수 없다!”고 일축했다. 상 주는 기관에서 대상자를 엄밀히 가려서 정하는 게 아니라 그럴듯한 이에게 미리 귀띔하면 당사자가 직접 이력 자술서를 적어야 하고 거기에다 찬성 투표를 해달라고 기성 회원들에게 ‘운동’도 좀 해야 하는 관행이 대한민국 예술원도 한통속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전쟁의 참혹에서 평화를 꿈꾸던 화가
     

    장욱진, 〈봉황〉, 1979. 공판화 No.13/20, 32 x 25cm. 


    2017년 정유년은 닭띠 해. 화가의 수탉은 봉황이란 인상을 풍긴다. 꼬리가 마치 민화에 나타나는 봉황새 꼬리털처럼 아주 길고 화려하다.


      6·25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 고향에서 몸을 숨기던 시절에 벼가 익어 가던 나락밭 사이로 영국 신사복 차림이 당신 평생의 도반이던 참새 네 마리와 개 한 마리를 이끌고 유유자적 걸어 나오던, 평화 갈구 염원의 모습을 그린, 그래서 〈나락밭〉 또는 〈자화상〉이라 알려진 그림으로 이름난 화가이기도 하다. 일제 때 도쿄로 그림 유학을 했고, 돌아와서 징용에 끌려갔다가 운좋게 살아 돌아왔다. 잠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요원으로 있다가 대학 교단으로 나갔다. 
      
      그것도 불과 6년. 창작과 교육의 병행이 어렵다며 신분보장의 철밥통인 서울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야인(野人)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남한강가 덕소, 이어서 충북 수안보,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에다 화실을 짓고 면벽(面壁) 수도승처럼 화필을 들다가 1990년 말 ‘새처럼 푸드덕 훌쩍 떠난’ 선종(善終)이었다.
     
     
      우여곡절의 그림 입문
     
      초등학교에 들기 전부터 붓장난을 좋아했다. 당신 아버지는 아들의 습자(習字)가 좋다며 방벽에 붙여 놓고 즐겼다. 그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갑자기 타계하자 지금은 세종시 한 귀퉁이가 된 옛적 충남 연기군 동면 내판들의 천석(千石)지기 종가를 떠나 일가는 서울에 살던 큰고모 슬하로 들어갔다. 
      
      경성사범부속국민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에 들어서도 ‘그림 장난’은 계속되었다. 가족들은 그림 그리기도 어린이 놀이라 여겨 신경 쓰지 않았고, 살만한 집안의 자제인지라 그때만 해도 천형(天刑)에 다름 아니던 환쟁이 짓거리는 꿈꿀 리 없다고 가볍게 치부했다. 학교의 도화(圖畵) 성적도 갑을병 순서에서 꼬래비 병(丙)이었다.
     
      3학년에 올랐을 때 교육발전용 실험을 계속하던 학교에 미술 전담 교사가 부임했다. 그 교사의 눈에 들었다. 도화 시간에 그려 낸 그림 한 점을 그때 교사 양성으로 일본에서 제일이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한 전국아동미술대회에, 그러니까 조선도 일본 땅이던 시절의 전국대회에 선생이 몰래 출품했다. 거기서 최고상에 뽑혀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상을 전해 받았다.
      
      이후로 장욱진의 도화 성적은 줄곧 ‘갑상’이었다. 갑(甲)이면 오늘의 A 성적이고 거기에 상(上)이 붙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A 플러스’가 자동으로 주어졌다. 미술교사가 가정방문도 왔다. 우리 전통이 환쟁이를 무척 천시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교사는 장욱진 집안 어른에게 그 재능을 계속 키워야 한다고 설득하려던 발걸음이었다.
     
      이후로 장욱진의 미술공부 환경은 어떠했는지는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진 일화가 되었다. 중학에 들어서도 다락방에 숨어서, 또는 어른들이 잠든 사이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다가 어느 날 큰고모에게 들켰다. 그 당장에 매타작을 맞았고 후유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반년이나 충남 수덕사에서 정양을 해야 했다. 
      
      다시 양정고보에 복학했다. 그리고 스물두 살이던 1938년에 《조선일보》 주최 ‘전국학생미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드디어 일본 그림유학이 허락되었다.
     
     
      그 사람에 그 그림
     

                  장욱진, 〈수안보화실 속 자화상〉, 1980. 한지에 먹, 60 x 32cm.

    수안보의 담배 말리던 토방에 마련된 화가 집이 투시도처럼 엄밀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 집 가운데에 평소의 자세대로 화가는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있다.


       애호가들은 서화만 말하지 않고 그걸 제작한 인격도 살피곤 한다. ‘그 사람에 그 그림(其人其畵)’이란 말이 우리 풍토에서 좋게 통용되었음은 선비 취향의 문인화를 중시했던 문화전통의 일단이었다. 장욱진 일대(一代)가 바로 ‘그 인격에 그 그림’이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게 장욱진의 확신이었다. “미술은 가장 보편적인 언어다.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도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작업”이라 했다.
     
      장욱진은 그 보편성을, “(나는)심플하다”가 화가의 ‘전매특허’ 말이 되었을 정도로, 단순함에서 찾았다. 영어의 심플(simple)은 단순함이란 뜻과 함께 순전함, 수수함, 소박함, 조촐함, 순진함, 성실함, 천진난만함을 포괄하는 다의적(多義的)인 말이다. 장욱진의 심플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기실, 장르에 관계없이 예술이 끝까지 가면 만나는 경지가 바로 심플인데, 영국 시인 엘리어트의 풀이도 설득력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느긋해질 수 있음은 예술이 복잡하게 얽힌 사람의 삶을 단순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 단순화를 통해 사람의 삶은 넉넉하고 신선해질 수 있다.”
     
      그 인격이 그려낸 장욱진의 그림도 한마디로 고졸(古拙)하면서 단순하다. 단순함은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좋아하고 그림감상의 연조(年條)가 깊은 어른들도 애호한다.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었음은 역시 사람이었다. 장욱진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하고 치열했던 사람인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도 한결같았다. 이를테면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지냈던 김원용 교수의 말인즉 “언제 보나 순진무구하고 그림 이외는 완전 무능해서 두 손에서 붓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 죽을 사람 같다. 타고난 예술가라고 다시 한 번 감탄한다” 했다. 
      
       
      사람을 알아본다면
     

    장욱진, 〈사인도〉, 1985. 동판화 2/8, 39 x 28cm.

    화가가 즐겨 그렸던 참새는 항상 네 마리였다. 가족들에겐 넉 사(四)자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죽을 사(死)가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참새 말고도 멍석 주위로 네 사람이 앉거나 서기도 한다. 화가가 정색으로 말해 준 연유는 “적은 숫자 중에서 가장 조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숫자가 넷”이라고. 넷은 일정 간격(****)으로 나란히 포치할 수 있고, 아니면 하나와 셋(* ***), 셋과 하나(*** *), 둘 둘(** **)로 배열할 수 있다는 것.

     

       장욱진 그림 일대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일본인 미술교사가 그의 천품(天稟)을 미리 간파했음이었다. 최근 일본여행에서 들었던 일화도 그렇게 인재가 자랄 수 있겠구나 싶어 기대감으로 나 혼자 기쁜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 일본 규슈의 깊은 시골로 함께 여행한 고향 선배의 손자 이야기였는데, 그 아이는 만나 보지 못했지만, 그 전후 사정은 듣기만 해도 감동이었다.
     
      주인공은 지금 일본 규슈의 대도시 후쿠오카 바로 아래 구루메(久留米)시의 한 초등학교의 6학년생. 2학년 때 미술시간에 그려 낸 것을 학교 선생이 몰래 출품했는데, 초·중·고 학생들이 겨루는 ‘아오키 시게루 주니어부’ 입상으로 구루메문화연합회장 상을 받았다. 가장이 그곳 생활 8년차의 고급 오토바이 정비 기술자인 가족은 상의 내력을 몰랐다는 것. 우연히 그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여고 미술교사가 크게 감탄하고는 “아이를 미술교육의 어떤 틀에 넣겠다는 생각은 말고, 대신 그냥 자유롭게 자라게 하다가 언제 당사자가 무언가 결정할 날이 오면 그때 지난 수상 경력을 참고하면 되겠다”고 훈수했다.


       미술상이 제정된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1882~1911)가 누구인가. 구루메 출신으로 희대의 천재로 소문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 일본 화단의 안타까움을 더했던 이다. 요절한 나이가 우연히 같다는 점에서 굳이 우리로 비유하자면 “그의 시화는 당세(當世)에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상하(上下) 100년을 두고 논할 만하다” 했던, 추사 김정희 문하의 고람 전기(古藍 田琦, 1825~54)에 비견된다 할까.
     
      아오키 신화엔 그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점도 이야깃거리였다. 도쿄미술학교에 다닐 적에 프랑스 유학도 했던 일본 서양화의 아버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도 지도교수였다.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구로다가 다가가자 아오키는 고개를 돌리면서 그만 문을 힘차게 닫고 나갔다. ‘내 그림을 어찌 네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라는 뜻이었단다(나와 구네타쓰·出久根達郞, “百貌百言”, 2001). 그를 기념하는 아오키 대상(大賞)은 규수 일대 서(西)일본을 대표하는 미술상이기도 하다. 

      
      어릴 때 그림에 특장(特長)을 보인 아이가 반드시 미술 쪽으로 나아가 두각을 발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학습심리학에 따르면 그림에 대한 좋은 감각은 공간지각의 발달이고, 이 재능은 수학도 잘할 수 있는 자질이라 했다.
     
      화제의 어린이는 문재(文才)도 예사롭지 않았단다. 3학년 땐가 4학년 땐가 학교에서 지은 하이쿠(徘句)가 뽑혀서 후쿠오카의 제일 유력지 《니시니혼신분(西日本新聞)》에 게재되었다. ‘해학적이고 응축된 어휘로 인정(人情)과 사물의 기미(機微)를 재치 있게 표현’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가 하이쿠인데 그 형식은 5·7·5의 17음(音) 형식이다. 그렇게 똑 떨어지지 않지만 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여름이 온다/ 하늘가재가 온다/ 즐겁도다’가 신문에 실렸다.


       나름으로 이 시를 감상해 보면 하늘가재를 보았으면 내 어린 시절은 필시 그놈을 어떻게 붙잡을까를 궁리했겠지만, 하이쿠를 지은 어린 마음은 그 벌레는 잡을 게 아닌, 더불어 놀 상대로 바라보고 있음이었다. 글이라면 좀 ‘안다(知)’고 적은 글이 대부분이고, ‘좋아해서(好)’ 적은 글은 별로 많지 않고, 더더구나 피아(彼我)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즐기며(樂)’ 적은 글은 무척이나 드물다. 이 어린 하이쿠 작자의 시구는 벌레와 더불어 즐기는 경지에서 쓰여진 것이 여간 신통치 않다.
     
     
      함께 감동하는 감정이입
     

    장욱진, 〈觀魚堂(관어당)〉, 1975. 나무현판 한지 탁본, 1987, 30 x 66cm.

    1975년, 명륜동 양옥 뒤에 한옥 한 채도 사들였다. 마당 가운데 샘터 자리에 물이 고임을 방비하려고 연못을 팠고, 덧붙여 작은 정자도 하나 모았다.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 1897~1989)이 그 정자를 보고 ‘觀魚堂(관어당)’이라 이름 지었다. 그걸 새긴 나무현판은 화가의 ‘그림글씨’였는데, ‘관(觀)’ 자는 눈과 귀로, ‘어(魚)’ 자는 물고기로, ‘당(堂)’ 자는 초가지붕의 집으로 그렸다. 이 그림글자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이 ‘관’ 자인데 눈과 함께 귀도 그렸다는 점이었다.


      소박화(素朴畵) 스타일의 그림이 아동화와 닮았다 해서 1950년대인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어린이 미술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장욱진이 초치되었다. 여느 미술대회가 그러하듯, 강당 같은 널찍한 곳에 수많은 응모작을 펴 놓으면 심사위원들이 작대기를 들고 그림 옆을 슬슬 지나가면서 찍어 내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우열을 가려 낸다. 
      
      그런데 장욱진의 행동거지로 말미암아 심사를 진행할 수 없었단다. 쭉 펴 놓은 그림더미 앞에 그냥 쪼그려 앉아서는 “참 좋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다 보니 심사가 진척될 수 없었다는 것. 짐작컨대 아이들이 붓을 들고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의 ‘흥취 또는 정감이 그대로 이입(移入)’되어 장욱진도 따라서 흥겨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초년에 그림과 문자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아이의 근황인데, 지금은 그림이 좀 시들해졌다 한다. 아이는 색면(色面)을 넣어 그림을 바로 그려내고 싶은데 학교 교사는 데생을 먼저 해야 한다고 ‘지도’하는 것이 마뜩잖아서라 한다. 하지만 지금도 일본 사회가 명소라고 자랑하는 곳의 도처에 흐르는 물에 노니는 흔하디 흔한 금잉어를 만나면 마치 친구를 만난 듯 거동한다.

      
      해방 직후 박물관 직원이던 장욱진은 경복궁 안의 직원 관사 뜰에 매여 있는 염소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단다. 그 시절 동료 일부가 염소를 닮았다며 장욱진의 콧수염을 흉보았다는데 지금 내가 추정해 보면 아마 화가는 또 다른 생명체인 염소와 대화를 나누던 광경이 그 아니었을까.
     
      사람의 천진난만한 생각은 좋은 환경 속에서 그리고 한가한 마음속에서 깃들고 싹튼다. 오늘의 우리 아이들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 정글인 아파트에 살면서 일주일 이레를 학원에 붙들려 다녀야 하는 형국에서 무슨 창의의 마음이 깃들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자라는 아이들을 좀 놀릴 수 없을까가 오늘의 내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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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국의 미학산책 〈6〉 탄생 100주년 맞은 장욱진 화백 2017.04.03 | 월간 조선






    닭 그림의 유래와 민화적 표현 – 민화 속 닭, 다시 보다| 韓民族 傳統文化

    관운 | 조회 14 |추천 0 | 2017.04.06. 23:14
      

             

    *** 전재자 註 : 그림은 인터넷 파도타기에서 보완하여 원문의 그림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닭 그림의 유래와 민화적 표현 – 민화 속 닭, 다시 보다

     

     


     

       민화류 영모화초도翎毛花草圖에 나타나는 닭의 이미지에 대하여, 이 글은 그 도상圖像을 탐구하여 유래한 내용을 밝히고자 한다. 민화의 닭은 수탉雄鷄과 암탉이 모두 그려지는데, 수탉은 홀로 그려지는 도상에서 전개되고, 암탉은 병아리와 함께 자모계子母鷄의 모습에서 전개되어, 이들이 합하여져 가족의 이미지를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백동자류 그림에는 두 마리 수탉이 마주서서 싸움을 하려고 하는 투계鬪鷄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닭의 소재는 민화의 영역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화 속 도상들의 의미와 기능이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다는 점이나 민화가 고전의 전통을 응축시켜 전달하는 특성이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대상으로 유효하고 또한 흥미롭다.

     

       수탉과 암탉의 이미지들은 조선후기 화원화가의 영모화초화나 혹은 풍속화風俗畵에서도 흔하게 등장하지만, 이러한 닭 이미지의 유래는 그 이전으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소재이며 주제이다. 그림 속 나타난 웅계, 자모계, 투계의 의미와 유래를 살펴본다.


     

    한 해의 무탈함을 소망하다, 웅계雄鷄


       의례용품이나 회화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수탉의 위풍당당한 이미지는, 수탉 그림이 가진 전통적 기능과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수탉은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빛을 여는 위력의 새로 인정받았으며, 수탉의 덕으로 일컬어진 오덕五德(文, 武, 勇, 仁, 信)은 군주를 숙연하도록 하는 의로운 덕목이었고, 조정의 문신과 무신이 모두 조아려 배워야 할 덕목으로 고대로부터 인정되었다. 닭은 또한 풍요로운 농촌을 표현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서 농경유토피아의 표상적 존재였다. 나아가 붉은 벼슬은 벼슬이 높아지고 싶은 축복을 뜻하게 되었고, 온갖 일을 달통케 한다는 만사대길의 기복적 코드로 통하게 되었으며, 악귀를 물리치는 강력한 벽사의 주술적 코드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웅계의 원형原型적 코드는 제의적, 주술적 성격을 동반하는 의례성儀禮性에서 출발한다. 이에 수탉을 ‘웅계雄鷄’로 칭하고자 한다. 웅계는 제사의 희생犧牲일 때 ‘한음翰音’이라고 불렸다. 당나라의 오랜 무덤 속에서 발굴된 물건 들 중에는 짐승의 토우들이 무더기로 등장하곤 한다. 그 가운데 닭, 오리, 개, 돼지, 소 등이 세트로 발굴된다. 이들은 제사의 희생으로 쓰이던 대표적 동물들이었다. 『곡례曲禮』에서 “무릇 종묘에 제사하는 예禮는, 소는 일원대무一元大武라 하고, 큰 돼지[豕]는 강렵剛鬣이라 하고, 작은 돼지[豚]는 돌비腯肥라 하고, 양은 유모柔毛라 하고, 닭은 한음翰音이라 하고, 개는 갱헌羹獻이라 하고…”로 이어지는 구절이 그 문헌적 증거이다. 조선시대의 축문祝文이나 제문祭文 등에서 ‘청작한음淸酌翰音’을 올린다고 표현이 적지 않다. 이는 ‘맑은 술과 닭고기’를 올리며 조상의 영혼이 흠향할 것을 기원하는 표현이다.


      웅계의 이미지가 종묘의 제기에 장식되었고, 이 제기는 ‘계이鷄彝’라 불렸다(도1). 조선시대 왕실의 종묘에서 사용한 계이는 닭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동이로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사용되었다. 세종조 『오례의』는 『예서禮書』의 구절을 인용하여 그 쓰임을 명시하고 있다. “계이鷄彝와 조이鳥彝는 술잔에 닭과 봉鳳의 형상을 새겨 만든다. 봄 제사[春祀]와 여름 제사[夏禴]의 관향祼享에 계이와 조이를 사용한다. 대저 닭은 동방東方의 생물生物이니 인仁이요, 새[鳥]는 남방南方의 생물生物이니 예禮이다. 이것이 선왕께서 봄 제사와 여름 제사에 사용하는 까닭이다. 봄에는 계이鷄彝에 명수明水를 채우고, 조이鳥彝에 울창鬱鬯을 채우며, 여름에는 조이에 명수明水를 채우고, 계이鷄彝에 울창鬱鬯을 채운다. 가이斝彝와 황이黃彝의 서로 사용됨도 역시 이와 같다.” 이 기록을 미루어 봄 제사에는 맑은 물을 담고 여름 제사에는 술을 담고자 계이가 사용되면서 ‘仁’의 덕목으로 그 의미화된 오랜 전통을 조선왕조가 준수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도 1. 계이(鷄彛)

    술을 담는 술통으로 표면에는 닭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봄제사에는  명수를 담고 약제라고 부르는 여름제사에는 울창주를 담아 씁니다.

    닭은 동방의 생물이니 음(陰)에 속하여 오행의 인(仁)을 뜻하며 비슷한 제기인 조이(鳥彛)·와 한쌍으로 사용합니다.


    계이에 담는 다는 울창주는?

    울금이라는 향초를 넣고 검은 기장인 거와 함께 빚은 술로 검은 빛이 나고 독특한 향내가 나는 술로

    지하에 있는 혼백이나 신을 모실 때 쓰인다고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닭 그림의 풍속적 의례기능은 새해 첫날에 붙이는 그림으로서의 의미였다. 조선전기 성현(成俔, 1439~1504)은 “세시의 날들에 행사할 일은 한둘이 아니다. 섣달 그믐밤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모아 진자로 삼아 붉은 옷을 입히고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으로 들여 관상감은 북과 피리를 준비하고 방상씨는 새벽을 기다렸다가 이들을 몰아낸다. 민간에도 이 일을 본 따서 한다. 비록 진자는 없으나 푸른 댓잎과 자색 가시나무의 가지와 익모초 줄기, 복숭아나무 가지 등을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고 대문을 두드리는데, 북을 치고 방울을 울려 문 밖으로 몰라 가며, “귀신을 쫓는다”고 말한다. 새벽에는 그림을 문과 창문 등에 붙이는데 처용, 각귀, 종규, 복건관인, 개주장군, 경진보부인 등이며, 닭을 그리고 호랑이를 그린것 따위이다. 이 내용은 19세기의 『동전고東典考』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홍석모洪錫謨(1781~1850)도 “여항閭巷의 벽 위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이고 액을 물리치고자 빌었다. 동훈董勛의 『문례속問禮俗』에 의거하면, ‘1일은 닭이다’라고 하였으며, 『형초세기기荊楚歲時記』에 의거하면, ‘정월 1일은 닭을 그려 문에 붙인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닭 그림을 그려 붙이는 의례는 매우 오랜 전통이다.


       조선시대 왕은 수십 장의 <화계畵鷄>와 <화호畵虎>를 제작하도록 하여 연말에 신하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규장각에 전하는 필사본기록 『내각일력內閣日曆』을 보면, 17세기 말 정조(正祖)가 한 해의 그믐날에 신하들을 불러 <화계>와 <화호>를 거의 해마다 나누어 준 것을 알 수 있다. 정조 5년에 적어도 10여 명에게 한 쌍씩의 <화계>와 <화호>를, 14년에 14명에게 한 장씩, 15년에 13명에게 한 장씩 주는 등 이러한 세화선물의 연례행사는 18년, 19년, 20년, 21년, 23년, 24년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장이 아니라 ‘<화계> 한 쌍[畵鷄一雙]’, 즉 두 장씩 나누어 준 경우도 많다. 정조의 왕실에서 민간으로 유포되어 나간 <화계>는 대략 어림잡아도 200여 폭 남짓하다.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전반기의 국왕 순조純祖대의 기록에 다시 나타난다. 순조도 해마다 닭 그림과 호랑이그림을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내각일력』에 따르면, 순조 7년 12월 27일에는 7명의 신하들에게 <화계>와 <화호>를 각각 1장씩, 즉 14장의 그림을 선물하여 주었고, 그 다음 해 12월 29일에는 여러 신하들에게 <화계>만 2장씩, 그 다음 해에는 다시 <화계>와 <화호>를 모두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보면, 민화나 문배그림으로 현전하고 있는 호랑이 그림과 닭 그림들 중에는 도화서 화원들이 제작하고 왕의 손을 거쳐 나온 것들이 제법 섞여 있으리라 추정되며,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도화서 화원들이 제작하여 궁 밖으로 유포된 <화계>와 <화호>가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화원화가 백은배白殷培(1820-?)의 수탉 그림(도2)이 그러한 화풍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도2. 수탉. 백은배(조선말기 화원화가)



       민화로 그려지고 남아서 전해지는 당당한 수탉 측면상들(도3, 도4)은 이후 조선후기 18세기와 19세기에 집집마다 새해 아침을 장식했던 수탉의 이미지들이었다.


    도 3. 민화 수탉 그림


    도 4.장욱진 <닭과 아이> 1990 / <수탉> 스미스소니언 소장 작품 / <닭과 모란> 19세기, 150×136.5㎝ / 김기창 <화조도> 1977, 68.5x61cm



       한편, 수탉은 봉황鳳凰과 짝을 이루어 민화에 그려지기도 했다. 그것은 의례적 제기에서 수탉의 문양과 봉황이 동일 등급으로 올려진 전통과 당사주唐四柱류의 해석에서 수탉을 봉황의 격으로 두는 분위기에 조응한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미닭의 자애로움을 담다, 자모계子母

     



     

       한국회화사에서 ‘자모계’의 이미지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변상벽卞相璧이 그린 <암탉과 병아리>일 것이다(도5). 이 그림은 정겹고 토속적인 한국의 시골풍경으로서의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 매우 오래된 도상의 그림이다. 변상벽과 동시대의 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변상벽의 자모계 그림에 긴 시를 부쳐 사실적 측면을 높이 평가한 바 있으므로, 이 그림의 조형성에 대하여 사실적 우수성 외의 다른 측면에 관한 회화사적 요구가 별로 제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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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6. 「자모계도(子母鷄圖)」, 왕응(王凝), 42.4×32.3cm, 송나라



       회화사에서 ‘자모계’ 이미지의 본격적 등장에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문헌기록은, 당말唐末에서 오대五代에 걸쳐 활동하며 남당南唐의 대조待詔를 지냈던 매행사梅行思의 화적이다. 『선화화보宣和畵譜』에 의하면, 매행사의 닭그림 30점이 중국황실에 소장되어 있었다. 제목으로 보면, <촉규자모계蜀葵子母鷄圖> 3점, <인추계도引雛鷄圖> 5점, <자모계도子母鷄圖> 3점, <부추계도負雛鷄圖> 1점 등의 12점은 모두 암탉과 병아리를 조합한 ‘자모계’로 분류된다. 총 30점 가운데 자모계가 12점이니, 자모계가 거반의 비중을 차지한 셈이다. 이로 미루어, 닭그림의 전통이 이미 당나라 황실에서 마련되어 있었고, 자모계도의 위상이 자못 높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회화작품으로 ‘자모계도’의 가장 오랜 예는, 북송北宋대 화원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다. 화원 최고의 직급 대조待詔를 지낸 왕응王凝(11세기 활동)이 그린 <자모계도> 한 폭이 대만 대북고궁박물원에 전하고 있다(도6). 그의 <자모계도>는 공필채색의 치밀한 필묵법으로 어미닭의 건실한 깃털과 병아리들의 보드라운 깃털의 대비를 보여주고, 또한 어미닭의 자상한 행위와 병아리들의 다양한 행위를 치밀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와 거의 유사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북송대 작품으로 작가미상의 <자모계도>가 있다(도7). 이 또한 유능한 화원이 그린 것이 분명하며. 이 그림에는 명대明代 황제 헌종憲宗의 어필御筆 제화시가 함께 표구되어 있어, 황실의 오랜 소장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은 공통된 조형특성을 보여준다. 몸을 수그린 어미닭, 주둥이로 먹이를 물어 병아리들을 주려는 그 행위, 주변 병아리들의 다양한 몸짓, 깃털묘사의 치밀한 세필 등이다. 이러한 조형성은 놀랍게도 조선후기 변상벽의 <암탉과 병아리>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어미닭 꽁지 아래로 기어드는 병아리의 위치가 북송의 그림과 변상벽의 그림에서 일치하는 점은 자모계 이미지의 일정한 유형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멀리 후대로 전달되어온 지속성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당송대 자모계도의 전통은 원대元代로 계승되어, 명대明代 문인 왕회(王淮, 1436년 전후활동)의 제화시題畵詩, 「전선이 그린 ‘화석자모계도’(錢舜擧畵花石子母鷄圖)」가 있다. 원대 초기의 저명한 문인화가 전선(錢選, 1239~1299, 字舜擧)이 꽃과 바위를 배경으로 ‘자모계’를 그렸으며 이것이 명대로 전달되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어미 닭과 병아리」, 41.9×33.0cm, 송나라, 타이완 고궁박물원



    도7. 「어미 닭과 병아리」, 41.9×33.0cm, 송나라, 타이완 고궁박물원



       한편 왕회의 시 구절과 조선후기 정약용이 변상벽의 닭그림을 논한 시 구절에서는 각각 어미닭의 자애로움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두 마리 병아리 의지하며 어미 겨드랑이에 끼었고, 어미닭 벌써 힘들지만 병아리는 만족해.

    두 마리 병아리 촉촉대며 어미 앞에 가니, 마치 귀여운 아이가 엄마말 듣는 듯.

    두 마리 병아리 찍찍대며 어미 뒤를 따라가며, 불러도 앞서지 않고 입을 다물지 않네.

    한 마리 머리 끌어 어미가 주는 벌레에 가까이 하더니,어 린 배 벌써 부르고 어미 배는 비었지.

    아, 귀여운 병아리들이 어찌 이럴까. 너희 병아리들 어찌 보답할지, 모르겠구나.

    전선 노인 이를 그려 생의(生意) 기쁘신데, 나는 홀로 그림 보다가 몰래 눈물짓노라.

    수고스러움 갚기 어려워라 자비로운 어머니 은혜, 강호에 매인 몸이 어찌 건너가리.


    – 왕회의 시 구절

     


    변상벽이 변고양이로 일컬어짐은, 고양이 잘 그려 사방에 이름났는데.

    이젠 또 새끼 거느린 닭을 그리어, 하나하나 붓털에서 살아났구나.

     

    ……중략

    두 마리 병아리 어미 따라가니, 어이하여 급급하게 저리 뛰는고.

    앞선 놈 부리에 물린 것이 있어, 뒤엣 놈이 그것을 빼앗고자 하여

    한 지렁이를 다투느라, 서로 물고 놓지 아니하도다

    한 마리 병아리는 새끼 하나는 어미 등에 타고 앉아 가려운 곳 한창 스스로 긁어 대고

    한 마리 병아리는 홀로 안 따르고 채소의 싹을 한창 쪼아 먹누나.

    형형색색 세밀하여 실물과 똑같고 도도한 기상 또한 막을 수 없네.


    – 정약용의 시 구절

     

       정약용의 시와 왕회의 시를 비교하면, 어미닭에 대한 묘사, 병아리에 대한 묘사 및 어미닭의 자애로움에 대한 그림의 주제에서 유사점이 확실하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15세기 명나라에 마련되어 있던 자모계도의 감상코드가 19세기 초 조선 문인에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미닭의 자애로움 특히 자신의 배를 굶주리며 새끼의 배를 채워준다고 구체화되는 지극한 모성애가 어미닭이 먹이를 먹이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병아리들의 천진난만한 마음(혹, 천성으로 어미를 따르는 상황)이 귀엽고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조형화가 그것이다. 자모계의 주제는 어미닭의 자애로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에 유입되어 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중국화보, 『고씨화보顧氏畵譜』(원명『歷代名人畵譜』, 顧黯然 模本)에, 당대唐代 화가 변란邊鸞이 화조화에 능했노라고 소개하는 글과 함께 도면에는 자모계와 웅계가 조합되어 있다. 16세기 말 ~ 17세기 초의 조선시대 문사 유숙柳潚, 홍명원洪命元, 홍서봉洪瑞鳳이 모두 『고씨화보』의 판화도에 제화시를 지을 때 변란의 닭그림도 빠뜨리지 않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닭장에서 벗어난 닭가족을 읊을 뿐 자모계에 특별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후 황호黃㦿(1604~1656)가 중국그림 <화계畵鷄>에 시를 부치며 그림이 극묘極妙하다고 했던 그림은 아마도 『고씨화보』의 판화도와 유사한 이미지였다고 생각된다. 황호의 이 시는 모두 6수나 되지만 자모계보다는 수탉의 덕목에 관심을 두었다. “홰치는 데 절로 법도가 있어, 비바람이 불어도 시간을 어김이 없도다.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함께 일어나, 하는 일이 달라도 바쁘게 애쓰지.(鳴聲自有度, 風雨不違時. 善惡皆同起, 孜孜異所爲)”라며 수탉을 중시하였다.



     「영모화조도」, 종이에 채색, 98.0×33.0cm, 가회민화박물관

    도8. 「영모화조도」, 종이에 채색, 98.0×33.0cm, 가회민화박물관


       우리 민화 속의 자모계는 웅계와 함께 그려진다(도8). 웅계가 독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다르다. 자모계는 웅계와 함께 그려지면서 가족의 이미지를 만든다.

    가족이 된 웅계와 자모계는 혹은 암수의 조류가 각 화면에 등장하는 화초영모병의 한 화면이 된다. 또한 봉황이 오동을 배경으로 하고 학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듯이 닭의 가족은 석류石榴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많다.


     

    은유의 지혜를 담다, 투계鬪鷄

     

       중국 명明나라에서 편찬된 사전류의 서적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정리하기를, 『열자列子』에 근거하면 주周나라 선왕(宣王, 재위 기원전 736-782)의 오락이었으니 투계는 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조선초기의 기록에 한식寒食의 풍속으로 거듭 언급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이미 한식의 풍속으로 투계를 행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투계는 고려시대 혹은 그 이전에 하나의 풍속으로 한반도에 전래되어 있었다.


       투계를 회화적으로 묘사한 이미지가 중국과 한국의 회화작품이나 공예품에 담겨 전하고 있으며 그 역사가 오래다. 투계가 그려진 그림을 ‘투계도’라 부른다. ‘투계도’라는 명칭은 중국의 당唐나라 회화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송나라 매행사梅行思의 그림목록에 <투계도> 6폭이 있다. 그의 닭그림 목록 전체를 보면 투계도鬪鷄圖의 비중은 ‘자모계도子母鷄圖’류와 ‘웅계도雄鷄圖’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화목이었다. 이로 미루어 당나라 닭 그림의 서너 갈래 중 이미 ‘투계도’가 한 갈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림뿐 아니라 명나라 도자기의 배에 보기 좋게 투계가 시문되어 있으니, 이 역시 다른 주요한 닭 그림 갈래와 유사한 대우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투계도>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조선후기 신윤복申潤福(1758년~?)의 그림인데(도9),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이익(李瀷, 1681~1763)이 <투계도>를 보고 시를 읊은 바 있으니, 18세기에는 투계만이 주제로 그려진 ‘투계도’가 그려졌던 상황을 알려준다.




     도9.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영모화(翎毛畵)인 투계도(鬪鷄圖)


       또한 17세기 중국인이 그린 《백동자도百童子圖》를 묘사한 유득공柳得恭(1749~?) 시에는, 아이들의 투계놀이를 주제로 한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백동자도》 속 투계 장면은, 작은 한 폭 투계도가 큰 화면의 부분으로 점철된 경우이다. 현전하는 조선후기 《백동자도》들에서 이런 식의 투계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투계도’라 할 만한 그림은 계속되어, 철종哲宗 때에는 왕실에서 화원을 뽑는 시험제목 중에도 중국 봄날교외의 투계장면을 그리도록 한 경우가 있었다. 옛 그림의 <투계도>는 무엇을 위하여 그려졌을까? 당나라 시인두엄(杜淹, ?~628)이 장안長安에 만연하는 투계를 보며, “날개 깃털이 푸른 들녘을 덮고 흩뿌려진 선혈이 봄꽃을 적신다. 비록 백번을 싸워 이길지라도 일찍이 스스로 공功을 논해 본 적이 없도다 (飛毛遍綠野, 灑血淸芳叢. 雖然百戰勝, 曾自不論功.)”라는 시구는, 주인을 위하여 싸우고 공을 챙기지 않았던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하여 쌈닭의 승리를 시로 읊었다.


       신윤복이 그린 <투계도>에 당시唐詩가 얹혀 있다. “거들먹거리며 걷는 것은 잘난 척하는 것 같고, 곁으로 듣는 것은 위태한지 살피는 것 같구나!”(高行若矜豪, 側聽如伺殆). 한 녀석은 잘난 척 폼을 잡았고 또 한 녀석은 슬슬 곁눈질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시는 당나라 한유韓愈와 맹교孟郊가 번갈아 이어가며 합작한 시에서 서두 부분이며, 한유의 구절이다. 맹교는 한유의 이 구절을 받아서 급박하게 태세를 전세戰勢로 몰고 간다. “정미한 빛으로 눈을 서로 쏘아보고, 마음을 오로지 전투에 집중했도다!”(精光目相射,劒戟心獨在). 이렇게 두 시인은 주거니 받거니 투계의 혈전을 중계하는 듯 시를 썼다. 두 마리 닭은 낭자한 피를 흘리며 엎치락뒤치락 기력이 다할 때까지 싸운 뒤, 결국에 닭이 고개를 떨구고 날개를 끄는 지경으로 싸움을 종식시킨 이는 한유였고, 이후에 의미를 찾아 시의 말미를 맡은 이는 맹교였다. 맹교의 구절이 이러하다. “영웅의 마음은 싸워 죽기를 달게 여기고, 의로운 살이라 고기반찬 되기는 부끄럽게 여겼지”(英心甘鬭死,義肉耻庖宰). 죽어가는 쌈닭의 최후에 대한 시인들의 측은지심일까. 영웅의 비장한 마음을 담은 것일까. 그렇다면 《백동자도》 속 아이들의 투계놀이는 어떠할까(도10). 어린아이들이 걱정 없이 유유자적 어른흉내를 내고 있는 풍광의 하나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장유張維(1587~1638)의 시 중에 “닭싸움 놀이하는 아이들이 있고, 집안에는 황금이 가득가득 있네” 라는 시구가 이러한 해석에 적절한 단서가 될 수 있고, 철종 때 화원의 시험문제로 풍속의 한 장면 투계를 그리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도 10. 백동자도 10폭 병풍 중 아이들의 투계놀이 - 맨 오른쪽 그림


       추정하자면, <투계도>로 생활의 풍족을 표현하고자 하여 두 마리 수탉이 마주 선 이미지에는 투계의 잔인한 속성이 드러나지 않고 흥미로운 놀이의 순간만이 노정된다. 민화 영모화초화에는 웅계의 늠름함과 자모계의 자상함이 오랜 이미지의 도상으로 그려져 있다. 민화 속 이미지들은 웅계와 자모계의 전통적 가르침과 감동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오늘날 민화 닭 그림의 다복多福성, 복록 및 만사대길의 축복적 의미만 해석하는 것은 민화 속 닭 그림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없다. 이 연구는 웅계의 당당한 측면상과 자모계 속 암탉의 자애롭게 수그린 형상이 매우 오래된 상징적 의미를 수반하며 정착된 도상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아가 민화의 이미지들 속에 역사적 의미가 반영되어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백동자도의 아이들 속에 등장하는 투계는 풍요로운 생활 속 오락의 하나로 작은 모티프로 반복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 작은 투계 모티프에도 오랜 역사와 의미가 반영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글 고연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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