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복숭아꽃과 미인
모든 꽃은 여인을 상징하지만 특히 복숭아꽃은 맑고 아름다운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도검(桃瞼)이니 도화검(桃花瞼)이니 말한다. 또 뛰어난 미인을 "복숭아꽃이 부끄러워하고 살구꽃이 사양을 한다(桃羞杏讓)"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여인들의 아름답고 진한 화장을 도화장(桃花粧)이라고 한다.
또한 미인의 양협(兩頰)의 색차(色差)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예외없이 도화색에 비유하고 있다.
복숭아꽃의 미를 사랑하여 여자 이름에 쓴 것으로 신라 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도화랑(桃花娘)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화랑은 자용염미(姿容艶美)하여 진지왕(眞智王)이 반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기녀의 이름에는 '도(桃)'자가 흔함을 볼 수 있다. 홍도(紅桃)라는 이름은 기생 이름의 대명사격이다.
구한말 고종이 사랑했다는 기생의 이름도 도화라고 했다. 엄귀비(嚴貴妃)는 도화를 질투하여 왕 몰래 도화를 불러 그 얼굴을 바늘로 찔러 상처를 내고는 악질에 걸렸다고 쫓아냈다고 한다.
도화라지 도화라지 네가 무슨 도화냐 복숭아꽃이 도화지
이 노래는 엄귀비와 도화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 도화를 풍자한 것이다.
복숭아를 먹으면 여인의 얼굴이 예뻐진다고 한다. 특히 달밤에 복숭아를 먹다가 복숭아에 기생하는 벌레를 자신도 모르게 먹으면 미인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복숭아는 밤에 먹고 배는 낮에 먹으랬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을 먹으면 아름다워진다는 이류보류(以類補類)의 생각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복숭아나무를 집안에 심는 것을 꺼려했다. 복숭아꽃은 그 아름다운 분홍색 때문에 집안에 심으면 부녀자의 치마폭 안에 봄바람이 일어난다고 해서다. 즉 복숭아꽃이 여인들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화사한 봄기운에 마음이 들떠 있는 과년한 여식이 복숭아꽃의 화사함에 자극받아 바람이 들까 걱정한 부모의 마음이 작용했을는지 모른다.
판소리 사설 〈춘향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춘향 모 월매의 독백이다.
"달도 밝다, 달도 밝다, 야속하게 달도 밝다. 나 젊은 과수댁들 문고리 벗겨 놓고 과혼(過婚)처녀들은 일 없이 마을 돈다. ······ 우리 처녀 시절에는 이십 먹은 계집애도 서방생각 안 하더니, 요샛년들 무섭구나. 열다섯 안팎 되면 젖통이가 똥또도름 장기(將棋) 궁(宮)짝 되어 가고 궁둥이가 너부데데 소쿠리 엎어 논 듯, 복숭아꽃 벌어지면 머리 긁고 딴 화 내고······."
위 글은 복숭아꽃이 처녀의 마음을 자극한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월매의 집에는 금기를 깨고 담 밑에 벽도화를 심어 놓았다. 〈춘향가〉에는 월매의 집 정원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벽도화 뻗은 가지 담 밖을 덮었는데······"라는 구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생의 집이기에 이 금기를 지켜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금기를 스스로 깨고 싶었던 것일까?
《산림경제》에서는 우물 가에도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좋지 않다고 했다. 우물 가에는 많은 부녀자들이 모인다. 그래서 우물 가에 복숭아나무를 심는 것은 기생집 옆에 딸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기피했던 것이다.
매화꽃이 담화장(淡化粧)한 여인이라면 복숭아꽃은 화장이 짙은 여성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복숭아꽃은 아름다운 여인 가운데서도 요염한 여자, 신라의 진지왕이 도화녀에게 반한 것처럼 남자의 정신을 산란하게 할 정도로 색감(色感)이 있는 여인에 비유되었다.
문일평(文一平)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살구꽃이 요부형(妖婦型)이라면 복숭아꽃은 염부형(艶婦型)이라고 했다. 《화암수록(花菴隨錄)》의 〈화품평론〉에서는 홍벽도를 평하여 "문에 기대서서 웃으면 말타고 지나가는 손들이 손에 쥔 말채찍을 놓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매화나 난초를 즐기던 옛 선비들은 복숭아꽃을 가리켜 "천한 계집에게 별안간 지분단장을 시키고 찬란한 차림새로 꾸몄지만 어색하기 이를 데 없고 목덜미의 솜털은 감출 수 없구나"라고 깎아서 말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그 요염한 아름다움을 시샘하여 빈정댄 말이라고 할 것이다.
다음 시에서 도화는 미인, 특히 남자를 유혹하기에 족할 성적 매력을 지닌 여인을 상징하고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48세 때에 유배지의 다산초당에서 꿈에 한 미인을 만난다. 11월 6일 다산(茶山) 동암(東菴) 청재(淸齋)에서 홀로 잠을 자는데 꿈에 한 미녀가 나타나 나를 유혹하였다. 내 또한 감정이 동하였으나 잠시 후 사양하고 보내면서 절구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그 시를 적으니 다음과 같다.
눈덮힌 산속 깊은 곳에 한송이 꽃 雪山深處一枝花 연분홍 복사꽃이 비단에 싸였는가 爭似緋桃護絳紗 이내 마음 어쩌다가 금강철로 굳어버려 此心已作金剛鐵 네가 비록 풍로라도 어찌 녹일 수 있으리오 縱有風爐奈汝何
눈덮인 깊은 산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은 자연계의 현상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꿈속의 세계를 은유하고 있다. 다음 구의 복숭아꽃은 요염한 미인의 자태를 말한 것이고, 금강석은 시인의 도덕성으로 무장된 흔들림 없는 마음을, 그리고 쇠를 녹이는 풍로는 미인의 유혹이다. 시적 동기는 로맨틱하나 결국 도덕성으로 귀일하고 있다.
다음의 시 구절은 복숭아꽃처럼 요염한 여인에 대해서 남자는 결코 무관심할 수 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술에 곯아 오장이 피로하여 身上五勞仞病酒 창 아래 복사꽃 요염하건만 모른 체 잠을 자도다 夭桃窓下背花眠
여기에서 요도(夭桃)는 복숭아꽃처럼 어여쁜 젊은 여인이다. 그리고 남자를 한눈에 유혹할 만큼 요염한 여인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병고로 해서 상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점술이나 사주에서 중요시되는 살(煞) 중의 하나에 도화살(桃花煞)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의 도화는 호색과 음란을 뜻한다. 이 살이 있으면 남자는 호색하는 성질이 있어 주색(酒色)으로 집안을 망하게 하는 수가 있고 여자는 음란한 성질 때문에 일신을 망침은 물론 한 집안을 망친다는 이유로 남녀를 불문하고 혼인에 있어서는 이를 기피하는 사례가 많았다. 속담에 여자의 얼굴이 불그스레한 홍조가 돌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도화살이 끼었다고 하는데 이 도화살은 인간의 본능인 성욕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여자의 개가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이 살은 멸문의 살로 인식되었는데 도화살이 있는 여자는 성욕이 강해서 한 남자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인식되어 남편과 사별하는 원인이 된다고 믿었다.
도화살은 태어난 해와 태어난 날의 두 가지를 적용하여 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자·진(申子辰) - 유(酉) 인·오·술(寅午戌) - 묘(卯) 사·유·축(巳酉丑) - 오(午) 해·묘·미(亥卯未) - 자(子)
즉 신년·자년·진년이나 그날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유(酉)가 도화살이 되는 것이다. 그 아래도 방법은 같다. 그러나 일설에는 도화살이 공망(空亡, 흉일 또는 악일)을 만나면 그 작용이 중지된다고 한다.
도화운(桃花運)은 남녀간의 교제가 문란해지기 쉬운 것을 말한다. 또는 미인을 만날 행운을 뜻하기도 한다.
미인을 복숭아꽃에 비유한 것은 중국에서도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춘추시대 약소국의 하나였던 식(息)나라의 왕비 규씨(嬀氏)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미녀로 소문이 났었는데 주위에서는 그녀를 도화부인(桃花夫人)으로 형용하였다. 당시 강력했던 초(楚) 문왕(文王)은 규씨를 탐내어 식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녀를 차지했다. 그러나 식나라를 지배할 수는 있었지만 규씨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살을 한 것이다. 훗날 한나라 시대에 재색(才色)을 겸비했던 도화부인을 애석하게 여겨 호북성 한양현(漢陽縣) 도화동에 그를 기리는 묘(廟)를 건립하였다.
호방하고 풍류적인 시풍을 지닌 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은 〈도화부인의 묘에 부침(題桃花夫人廟)〉이라는 시를 읊고 있다.
세요궁에는 복숭아꽃 새롭게 피었는데 細腰宮裏露桃新 한마디 말없이 얼마나 많은 봄을 맞았던고 脉脉無言度幾春
여기에서 세요(細腰)는 미녀의 대명사이다. 초왕(楚王)이 가는 허리를 가진 여인을 좋아하여 궁녀들이 다투어 다이어트를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세요궁'은 왕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방의서인 《여의방(如意方)》에는 미색세요(美色細腰)로 만드는 처방이 소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의서는 수나라 이전에 원본이 없어지고 세요술은 개략적인 것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처방은 세 그루의 복숭아나무에서 꽃을 따서 음건하여 체(蒒)로 선별해서 식전에 1일 3회 복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술은 효능이 별로 없었던지 보급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처방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고 있다.
4세기 진(晋)나라 때의 서예가 왕헌지(王獻之)는 애첩을 도엽(桃葉) 또는 도근(桃根)이라 불렀다. 여기에 도화(桃花)까지 포함해서 도(桃)자가 들어간 세 가지 이름은 그 이후에도 유녀(遊女)의 애칭으로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춤을 출 때 손에 쥐는 부채를 도화선(桃花扇)이라 했다 한다.
그리고 《시경(詩經)》의 〈도요(桃夭)〉라는 시는 최고의 여성찬가이고 최대의 복숭아꽃 찬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278&docId=1837208&categoryId=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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