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기장
2017. 11. 1. 05:13ㆍ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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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5년 계묘(1423) 7월 24일(임인)
05-07-24[03] 검은 기장의 종자를 전국에 보급케 하다
황해도 감사가 아뢰기를,
“옹진현(甕津縣)의 선군(船軍) 이철지(李哲之)의 밭에 한 껍질에 두 알이 든 기장이 있으므로, 그 유래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신축년에 채전(菜田) 가운데 한 개의 기장이 났으므로, 이를 길러 이삭을 피게 하였더니, 실제로 한 껍질에 두 알이 들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종자를 받아 해마다 심었습니다. 금년에 와서 작은 밭에 심어서 지금 20이삭을 위에 바칩니다.’고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호조에 명하여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창고 쌀로서 바꾸어 보내게 하여, 이를 적전(籍田)에 심었다. 이로 말미암아 검은 기장[秬黍]의 종자가 나라 안에 널리 퍼졌다.
【원전】 2 집 550 면
【분류】 농업-농작(農作)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재호 (역) | 1969
> 일성록 > 정조 > 정조 10년 병오 > 1월 22일 > 최종정보
[주-D005] 거서(秬黍) : 검은빛 기장으로, 옛날에 중간 크기의 것을 골라 척도의 표준으로 삼았다. 《漢書 卷21上 律曆志》
정조 10년 병오(1786) 1월 22일(정묘)
10-01-22[02]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박일원(朴一源)의 소회에,
“신은 전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맡은 바 있어 일찍이 태묘악(太廟樂)과 사전(祀典)에 대해 삼가 생각하던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은 아악(雅樂)을 사단(社壇)과 황단(皇壇), 문묘(文廟)에 두루 쓰면서 유독 태묘에만은 쓰지 않으니, 어째서입니까? 생각건대, 우리 세종조 을사년(1425, 세종7)에 거서(秬黍)가 해주(海州)에서 나고 병오년(1426)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자, 특별히 황종(黃鐘)을 만들어 악률을 바로잡게 하여 태묘의 제악으로 정하였습니다. 당상에서는 응종(應鐘)의 율을 쓰고 당하에서는 황종의 율을 써서 음이 올라가고 양이 내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천지의 기운이 교합하여 만물이 무성해지는 뜻을 취한 것으로, 순 임금의 소악(韶樂)과 은나라 탕왕의 호악(濩樂)에 아름다움을 짝하였으니, 만세에 이르더라도 실로 따라서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릉(英陵 세종)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속악(俗樂)을 쓰게 되었으니, 이른바 속악은 곧 당(唐)나라의 이원(梨園) 음악입니다. 명황(明皇 당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촉(蜀)에 행행한 시기에 특별히 신라(新羅)에서 문안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이원의 악부(樂部)를 하사하니 신라 왕이 영광스럽게 여겨 종묘(宗廟)에 올려 마침내 신라와 고려의 종묘악이 되었던 것인데, 장구(杖鼓)는 말갈(靺鞨)의 북이고, 필률(篳篥)은 오랑캐의 갈잎 피리이고, 해금(奚琴)은 해족(奚族)과 거란(契丹)의 거문고입니다. 당상에서 황종을 쓰고 당하에서도 황종을 써서 양뿐이고 음이 없어 오음(五音)이 조화롭지 못합니다. 나라에 아악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아악이 있는데도 도리어 속악을 쓰는 것은 실로 밝은 시대의 흠되는 일입니다.
우리 선대왕께서 일찍이 장악원(掌樂院)을 이원으로 칭하는 것을 금하셨고, 이원이라는 이름마저도 금하셨으니 어찌 이원의 음악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때 조정 신하들이 속악이 곧 이원의 음악이라고 진달하지 않았으니, 즉시 바로잡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아악을 쓴다면 필시 선대의 뜻을 계승하려는 우리 성상의 훌륭하신 효심에 빛이 날 것입니다.
경모궁(景慕宮)의 영신악(迎神樂)에 3성(成)을 쓰는 것은 더욱이 의의가 없습니다. 무(舞)에 6일(佾)을 쓰면 악(樂)에 9성을 쓰는 것이 예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례(周禮)》에 교단(郊壇)에서는 6성을 쓰고 사단(社壇)에서는 8성을 쓰고 조묘(祖廟)에서는 9성을 쓴다고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신이 감응하여 흠향하도록 하는 방도인데, 유사를 맡은 신하들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중사(中祀)에는 3성을 쓴다는 조문을 잘못 인용하여 무에 6일을 쓰고 악에 3성을 써서 무는 중하고 악은 가볍게 되어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예를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전(祀典)의 과품(果品)으로 말하더라도, 정(鼎)과 조(俎)에 기수(奇數 홀수)를 쓰고 변(籩)과 두(䇺)에 우수(偶數 짝수)를 쓰는 것은 모두 음양을 형상한 것이니, 땅에서 생산되는 과품은 마땅히 우수를 써야 합니다. 태묘 시향(時享)의 과(果)를 5품으로 하고 고제(告祭)의 과를 1품으로 하는 것만도 이미 우수를 써야 하는 의리에 어긋나는데, 승(升 되)과 약(龠 반홉)의 수도 각기 달라 태묘에서는 1승 5약을 쓰고 영희전(永禧殿)에서는 2승 3약을 쓰고 황단(皇壇)에서는 3승 2약을 쓰니, 모두 지극히 공경히 할 곳인데도 서로 들쑥날쑥하여 같지 않습니다. 저경궁(儲慶宮), 육상궁(毓祥宮), 의열궁(義烈宮), 연호궁(延祜宮)도 사체가 높은 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사전의 제수(祭需)를 마련하는 데는 간간이 차등이 있으니 또한 한결같은 예로 고르게 정해서 사전을 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진달한 두 조항은 막중한 전례에 관계되는 일이니, 널리 물어서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조 참의가 시원임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고, 이어 낭관을 보내어 예를 잘 아는 신하에게 문의해서 각기 헌의하도록 하며, 관각의 신하도 모두 의견을 갖추어 헌의하게 하라. 그것이 다 도착하면 본조에서 초기로 품처하라.”
하였다.
- [주-D006] 이원(梨園) :
- 당나라 현종(玄宗) 때 궁정의 가무(歌舞) 예인(藝人)들을 교련하던 곳이다. 《新唐書 卷22 禮樂志》
- [주-D007] 우리 …… 금하셨으니 :
- 영조 29년 9월 3일에 이원은 당나라 때의 바르지 못한 이름이었다는 이유로 장악원을 이원이라 부르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고, 30년 6월 28일(丙子)에도 이원은 당나라 현종 때의 일이라는 이유로 같은 명을 내린 것을 말한다. 《英祖實錄》
ⓒ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 (역) | 2006
> 해제 > 고전번역서 > 친경ㆍ친잠 의궤
친경ㆍ친잠 의궤(親耕親蠶儀軌)
박소동(朴小東) 한국고전번역원 교무처장(韓國古典飜譯院 敎務處長)
1. 머리말
이 책은 조선조 영조(英祖) 43년(1767) 2월 26일에 거행된 친경(親耕)과 3월 10일에 거행된 친잠(親蠶), 그리고 5월 26일에 거행된 장종(藏種)과 수견(受繭)에 대한 준비 과정과 의식 절차 등을 상세히 기록한 의궤(儀軌)를 국역한 것이다.
의궤란 국가에서 거행한 중요 행사와 관련된 준비 과정과 의전 절차, 행사 후 시상까지의 모든 문건을 행사가 끝난 다음 후일의 참고에 대비하기 위하여 의궤청(儀軌廳)에서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다. 의궤는 통상 임금이 참고할 어람용(御覽用)을 비롯하여 다섯 곳의 사고(史庫)와 의전 담당 부서인 예조 보관용을 포함하여 6, 7부를 제작하는데, 이 의궤도 당시 7부를 제작하여 보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친경은 왕이 종친 이하 문무 대신을 대동하고 적전(籍田)으로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에 제사한 다음에 거행하는 의식으로, 왕이 직접 쟁기를 다섯 차례 밀고 나면 이하 대신은 품계에 따라 일곱 차례, 아홉 차례를 밀게 된다. 친잠은 왕비가 중심이 되어 내외 명부(內外命婦)를 거느리고 궁궐 후원에 마련된 친상단(親桑壇) -채상단(採桑壇)이라고도 함- 에서 행하는 의식으로, 왕비는 다섯 가지의 뽕잎을 따고, 이하 명부들은 품계에 따라 일곱 가지, 아홉 가지의 뽕잎을 딴다. 다만 친잠의 경우 선잠단(先蠶壇)의 제사는 관원을 보내 대신 제사하게 한 것이 친경의 경우와 다른데, 이는 선잠단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 당시 거행된 친잠은 경복궁(景福宮) 강녕전(康寧殿) 옛터에다 재단과 채상단을 쌓고 거행한 것이 특색이다. 또 친경의 경우는 일반 서민들이 적전 주변에 모여 행사를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된 것에 비해 친잠은 궁궐 후원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행사를 볼 수 없었던 것이 다르다.
그러나 역대 왕들이 친경과 친잠을 동시에 거행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또 친경과 친잠을 거행한 뒤 적전에서 수확한 곡식을 받아 저장하는 의식인 장종과 누에를 쳐서 얻은 고치를 받는 수견 의식까지 동시에 거행한 기록은 영조 43년의 경우가 유일하다. 따라서 이번에 국역된 《친경ㆍ친잠 의궤》는 우리나라에서 거행한 친경과 친잠 의식의 전반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중요 자료이다.
2. 친경과 친잠의 의의
친경과 친잠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의식으로 조상 숭배 정신과 권농의 기능을 같이 겸하고 있는 통치자의 중요한 행사이다. 이를 옛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천자는 남교(南郊)에서 친경을 하여 제사 음식[粢盛] 마련에 이바지하고, 왕후는 북교(北郊)에서 친잠을 하여 예복[純服] 마련에 이바지하며, 제후는 동교(東郊)에서 친경하여 역시 제사 음식 마련에 이바지하고, 부인은 북교에서 친잠하여 예복[冕服] 마련에 이바지한다.”는 기록이 있고, 《예기》 월령(月令)에는 누에를 친 후 후비가 누에고치를 바친다[獻繭]는 기록이 있고, 《주례(周禮)》 지관(地官) 사도(司徒)에는 왕후가 봄에 곡식의 종자를 바친다[獻種]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예를 거행한 경우를 역사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14년 조에 “천자가 친경하여 제사 음식 마련에 이바지하고 왕후가 친잠하여 제복 마련에 이바지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 기록은 당시의 친경과 친잠의 의의가 통치자가 신을 숭배하는 도리를 다하는 데에 있음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문제(文帝) 2년에,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므로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친경하여 종묘 제사의 음식 마련에 이바지하고 아울러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이는 신의 숭배와 아울러 권농의 의미를 강조하는 행사로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조 역대 왕들의 반교문이나 전교를 통해 볼 때, 친경과 친잠에 역점을 둔 것은 조상 숭배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백성들에게 민생의 기초인 식량과 의복을 마련하도록 적극 권장하는 것에 더 주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친경과 친잠의 의식은, 행사 전에 농사를 처음 가르친 고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하는 것과, 누에치는 법을 처음 전수한 중국 황제(黃帝)의 비 서릉씨(西陵氏)를 선잠단(先蠶壇)에서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역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의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3. 우리나라의 친경과 친잠
1) 친경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입춘 후 해일(亥日)에 선농(先農)에 제사하고 입하 후 해일에 중농(中農)에 제사하고 입추 후 해일에 후농(後農)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고, 고려 성종 2년(983)에 비로소 적전을 두었으며, 태조를 배향한 원구(圜丘)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후직(后稷)을 배향한 적전에서 신농(神農)을 제사한 후 친경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성종 7년(988)에는 《주례(周禮)》를 근거로 왕후가 봄에 왕에게 헌종(獻種)하는 예를 거행하고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기 시작하였으며, 의종(毅宗) 때에 와서 선농 적전단에 대한 규모와 의식 등을 자세히 규정한 의주(儀註)가 마련되었다. 조선조에 거행되는 의식의 절차와 규모도 이때 마련된 의주와 큰 틀은 같음을 볼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조 1년(1392) 7월에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적전의 경작과 전곡 및 사제(祠祭)의 주례(酒禮)와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사농시(司農寺)가 담당하도록 하고, 정도전(鄭道傳)의 건의로 적전 영(籍田令)과 승(丞)을 두어 적전의 경작과 제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 5년(1405) 7월에는 개성에 있는 고려조 때부터 사용하던 적전(籍田)의 원구단을 없애고 새로 축조하였으며, 신경(新京)으로 온 이듬해에는 원구단과 적전 등을 보수하고 이를 관리하는 인원을 배치하였다. 태종 14년(1414) 10월에는 적전의(籍田儀)를 새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실제 왕이 친경하는 행사는 확인되지 않고, 다만 친경을 하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문종실록(文宗實錄)》 1년 5월 6일 기사에서 확인될 뿐이다.
세종조에 마련한 《오례의(五禮儀)》 길례(吉禮)에는 ‘친향선농의(親享先農儀)’에 대한 의주(儀註)와 친경에 대한 의주가 마련되어 있지만 세종조에는 실제로 친경을 거행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친경 장소인 적전에 대한 관리와 이용은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5년(1423) 7월에 옹진현(甕津縣)의 선군(船軍) 이철지(李哲之)가 자신의 밭에서 발견하여 재배한 한 껍질에 두 알이 여문 검은 기장을 바치자 이를 쌀로 보상하고 적전에 심게 하여 종자로 가꾸어서 온 나라에 보급하고, 한 해에 두 번 익는 올기장 씨앗을 적전에서 심어 보급하게 한 일련의 일들은 세종조의 적전 활용의 좋은 예이다.
세조조에는 3년(1457) 3월에 양성지(梁誠之)가 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친경을 거행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에 대해 세조는 “옛날의 훌륭한 예라 하여 모두 다 거행할 수는 없다.”고 하여 친경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제정되어 있는 적전 경작에 대한 규정을 수정하여, 해당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원래 정한 농군의 수대로 번갈아 가면서 농사를 짓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을 줄이고자 하는 뜻을 보였다.
성종조에 와서 6년(1475)에 적전단(籍田壇)을 보수하고 수호(守護)하는 인원을 배치하는 제도를 다시 마련하는 한편 친경을 거행하고, 이듬해에는 선농단 남쪽에 친경대(親耕臺)를 처음 쌓았다. 이후 19년(1488)과 24년(1493)에 각각 친경을 거행함으로써 조선조로는 처음 친경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를 활성화하는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후 연산군을 비롯하여, 중종ㆍ명종ㆍ선조ㆍ광해조에 각기 한두 차례 정도 거행하였다. 특히 광해조에는 친경 행사를 관장하는 봉상시(奉常寺)의 품계가 낮아 각 관아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친경도감(親耕都監)을 설치하여 점검하고 관장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친경 행사는 여러 대를 거치면서 친경을 전후한 다양한 부대 행사, 즉 노주연(勞酒宴)이나 문무 대신들의 진하(陳賀), 귀로(歸路)의 기로연(耆老宴), 유생(儒生)과 여기(女妓)들의 헌시(獻詩)와 헌가(獻歌) 등의 각종 뒤풀이 행사로 인하여 권농 행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유흥 행사로 전락하는 역기능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2년(1620) 3월 13일 기사를 보면 “상이 친경례를 동적전(東籍田)에서 거행하였다. 환궁할 때에 헌가(軒架)ㆍ산대(山臺)ㆍ잡희(雜戱)ㆍ침향산(沈香山)ㆍ여기헌축(女妓獻軸)을 하였는데, 곳곳에서 연(輦)을 멈추고 구경하느라 온종일 행차를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로도 계속된 듯하다. 효종조에는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친경시에 행해지는 각종 번다하고 사치스러운 겉치레 행사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그러한 부대 행사를 제거하고 실제로 친경에 역점을 두어 거행하더라도 이미 백성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데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하여 효종대에는 친경이 없었다. 숙종조에는 친경 당일 많은 비가 내려 거행하지 못한 기록이 한 차례 보인다. 그러나 ‘친경 당시 아홉 가지 곡식을 심는데 종자에 따라서는 심는 계절이 맞지 않아 제대로 자라지 않기 때문에 친경 행사가 끝난 뒤에 적전을 경작하는 백성들이 이를 갈아버리고 다시 심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므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휴(尹鑴)의 계사(啓辭)로 보면 실록에는 기록이 없지만 친경 행사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조에 이르러서는 영조 15년(1739)에 처음 거행한 이후 29, 40, 43년 등 4차례에 걸쳐 친경을 거행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영조 23년(1747)에는 적전에서 재배한 보리를 베는 것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인 ‘관예(觀刈)’를 거행하였고, 이후 거의 매년 이 행사가 계속되어 고종조까지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관예 의식은 명(明)나라 선종(宣宗) 때의 고사를 원용한 것으로 친경 행사를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국왕이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장종(藏種)과 헌종(獻種)으로 이어지는 친경 의식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행사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영조조에 왕세손으로 친경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던 정조는 관예는 거행하였으나 친경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고종조에는 친경과 관예를 한 차례 거행하였으며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조에도 2년(1908) 4월 5일에 동적전에서 친경을 거행하였는데, 이 행사에 궁내부 차관 소궁삼보송(小宮三保松)을 비롯하여 내부, 탁지부, 법부, 학부 등 일본인 차관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어 당시의 국세(國勢)를 말해 주기도 한다. -역대 친경과 친잠 사례표 참조-
2) 선농단과 적전
선농단은 적전단(籍田壇) 또는 교단(郊壇)이라고도 하는데, 고대에 농사짓는 법을 처음 가르쳤다고 알려진 중국의 제왕 신농씨(神農氏)를 주신(主神)으로 하여 북쪽에 남향으로 모시고 후직(后稷)을 동쪽에 서향으로 배향(配享)하여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적전을 처음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의종(毅宗) 때 와서 마련된 의주(儀註)에는 단의 규모에 대해, “사방 3장(丈), 높이 5자[尺]이고, 사면에 계단을 내고 양면에 담[壝]을 설치하되 25보(步)씩으로 한다.”고 정해 놓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동적전(東籍田) 북쪽에 마련하여 매년 이곳에서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 왔다. 성종 7년(1476)에는 이곳에 관경대(觀耕臺)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금은 옛 규모를 잃은 채 사방 4미터의 돌단만이 남아 있으며,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자나 제후가 위로는 신(神)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의미로 친경을 행하였던 농지를 ‘적전(籍田)’이라 하였는데, 적전이라고 한 이유로는, “경작 형태가 백성들의 힘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토지라는 뜻으로 ‘적(籍)’ 자는 ‘빌린다[藉]’ 또는 ‘돕는다[助]’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해석과, “천자나 제후가 직접 농사짓는다는 의미를 취하여 ‘전적(田籍)’ 또는 ‘도적(蹈藉)’의 의미로 해석하여 왕이 직접 밟고 갈아 농사짓는 농지라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해석이 있다. 어떤 해석이든 적전을 천자나 제후가 직접 관장하여 농사를 짓는, 국가 관리의 토지라는 의미로 해석한 점은 같다.
적전의 면적에 대해서는, 천자는 ‘천묘(千畝)’, 제후는 ‘백묘(百畝)’를 경작한다 하였다. 이 적전에 대한 제도는 친경 행사와 동시에 시작한 것으로, 중국 한나라 문제 때에 처음 적전 제도를 마련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고려 성종 때 처음 적전이 마련되어 친경이 시작된 이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이어져 오다가 현재의 서울로 천도한 뒤에는 동교(東郊)인 동대문 밖에 -현 동대문구 용두동 138번지 일대- 적전을 마련함으로써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개성부 동쪽 20리에 있던 적전을 ‘서적전(西籍田)’, 새로 마련한 서울의 적전은 ‘동적전(東籍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국왕의 친경 행사는 동적전에서만 거행하였다.
이 적전들은 공히 논[水田]과 밭[旱田]이 있었으며, 상ㆍ중ㆍ하 또는 1, 2, 3의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적전조를 보면 서적전은 “논이 상등지가 하종(下種) 62석 14말 3되지기, 하등지가 21석 12말지기로 벼 656석 3말 4되의 세를 받고, 밭은 상등이 15일 반나절 갈이이고 중등은 21일 갈이이고 하등은 53일 반나절 갈이로, 밭곡식 -메기장[黍]ㆍ찰기장[稷]ㆍ차조[粘粟]ㆍ보리[大麥]ㆍ밀[小麥]ㆍ콩[黃豆]ㆍ팥[赤豆]ㆍ녹두(菉豆)- 으로 47석 13말 5되를 세로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동적전은 “논이 1등급이 11석 8말 7되지기이고, 2등급이 22석 11말지기, 3등급이 12석 9말지기로, 벼 270석 9말 9되의 세를 받으며, 밭은 상등이 35일 반나절 갈이이고, 중등이 39일 반나절 갈이, 하등이 19일 반나절 갈이로 밭곡식 -메기장ㆍ차조ㆍ 당기장[唐黍]ㆍ율무[薏苡]ㆍ봄보리[春麥]- 으로 97석 13말 7되를 세로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개성에 있던 서적전이 동적전보다 면적도 넓고 비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실록의 기록에서도 서적전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았던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서적전은 동적전을 설치한 이후로 한때 관리가 소홀하여 상당한 면적을 주변에 사는 백성들이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中宗實錄)》 9년(1514) 4월 24일 기사를 보면 “나라에서 잃었던 적전을 다시 회수하고자 측량(測量)하여 경계의 둑을 쌓는데 백성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며 원성이 자자하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태종조에 300결이었던 적전이 세종조에는 겨우 70결밖에 남지 않았으니, 불과 20년 사이에 그렇게 줄었다는 것은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므로 신중히 처리하여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경연에서 개진되고 있다. 이는 적전 관리가 허술하여 주변 백성들이 상당수 차지하였다는 정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적전에서 수확한 곡물은 제사에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잉여 양곡을 별도로 관리하여 흉년이 들거나 국가에 갑작스러운 재용이 필요한 경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으며, 새로운 종자를 발견하면 적전에서 재배하여 보급하고, 또 흉년이 들어 농사지을 종자가 없을 적에는 적전에서 수확한 곡식을 종자용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적전은 친경을 하여 신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 권농을 하는 장소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 농민과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토지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농지를 경작함에 있어서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고 결국 백성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주변 백성들의 고통이 뒤따르는 문제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문제가 있으면 계속적으로 개선을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적전의 관리 관청과 경작 인원의 신분을 살펴보면, 태조 1년(1392)에 관청과 관리 제도를 제정하면서 적전은 사농시(司農寺) -후에 전농시(典農寺)로 고침- 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경작뿐 아니라 생산된 전곡(田穀)과 제사(祭祀)에 사용하는 술, 희생(犧牲), 진설(陳設)하는 일까지 담당하게 하여 적전과 관련된 모든 행사를 맡게 하고, 관원으로는 판사(判事) 2명, 경(卿) 2명, 소경(少卿) 2명, 승(丞) 1명, 겸승(兼丞) 1명, 주부(主簿) 2명, 겸주부(兼主簿) 1명, 직장(直長) 2명 등을 배정하였다. 태종 9년(1409)에는 전농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쳐 예조에 소속시켜 제례 의식을 맡게 하고, 봉상시(奉常寺)를 전농시로 고쳐 호조에 소속시켜 적전 경작과 둔전 관리 등을 맡도록 하여 의전(儀典)과 경작(耕作)을 분리하고, 그동안 경작과 의전 행사에 동원되었던 소속 노비도 필요한 만큼 다시 조정하여 두 부서로 분배하였는데, 서적전은 분전농시(分典農寺)를 두어 경작을 관리하였다.
동적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린 노비 200명으로 경작을 하였는데, 이들이 객지에서의 고통을 못 이겨 잇달아 도망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조에는 양주(楊州)의 민호(民戶) 중 10결(結) 이상을 농사짓는 자를 전농시에 소속시켜 경작하게 하였는데 대상자가 200호가 채 안 되어 이들로서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적전 30리 안에 있는 양주의 잘 사는 민호까지 동원하였다. 세조 때는 “동적전은 양주의 백성 100명에게, 서적전은 풍덕(豐德)의 백성 200명에게 주어 농군으로 삼되, 적전 부근 30리 안의 10결 이상을 경작하는 민호에서 1명씩 정하고 10결 미만인자는 다른 호와 아울러서 정하며, 모두 공부(貢賦) 이외의 잡역을 면제하여 농사에 전념토록 한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내용을, 농군이 어렵게 고생하는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두 고을의 경내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원래 정한 농군의 수대로 차례로 돌아가면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제도가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조 22년(1746) 8월에는 ‘동적전 100묘에 다시 구곡(九穀)을 심는 제도를 회복할 것’을 명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대리 경작하는 농민들이 적전(籍田)과 사전(私田)을 뒤섞어 경작하는 바람에 적전의 경계를 잃어 버릴 위험이 있고, 구곡의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태묘에 올릴 자성(粢盛)이 형편없어서 취한 조치이다. 12월에는 친경전을 경작하는 백성들에게 10분의 2만 면세해 주던 것을 3분의 2를 면세해 주고 3분의 1만을 세로 받도록 규식을 고쳤는데, 이는 적전 경작으로 인한 농민의 고통을 줄이고자 한 개선책이었다.
3) 친잠의 역사
신라 시대 박혁거세 17년(기원전 41)에 왕과 왕비에 의하여 누에치기가 권장되고 있는 기록이 보이고, 고려 시대에도 선잠단(先蠶壇)에 대한 규격과 의식에 대한 의주가 전해지고 있는 점을 보면, 국가 차원에서 누에치기를 권장한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 14년(1414) 6월에 선잠단의 규모를 정하는 기록이 보이고, 정종 2년(1400)에 선잠단에 처음 제사한 기록이 있지만 왕비가 직접 친잠을 한 것은 성종 8년(1477) 3월 14일 기록에 처음 보인다. 이에 앞서 성종 7년(1476)에는 친잠에 필요한 친잠의(親蠶儀)를 송(宋)나라 제도를 참작하여 마련하고 친잠단(親蠶壇)을 창덕궁 후원에다 마련할 것을 계획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친잠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선잠단에 제사하는 의식인데, 선잠단이 북쪽 교외에 있고 위치가 협소하여 바로 곁에다 친잠단을 설치할 수 없으므로 한(漢)나라 제도에 의하여 궁궐 후원에다 친잠단을 축조하고 거행한 것이다. 이후 성종 대에는 24년(1493)에 친잠을 거행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성종은 친잠에 많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내전에서 직접 베를 짜기 위해 베틀을 마련하고 직비(織婢)를 선발하여 들이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후 중종 8년(1513)과 24년(1529)에 친잠을 거행한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역대 왕들이 친경을 거행할 때마다 친잠도 반드시 같이 거행한 것은 아니며, 친경은 하지 않고 친잠만 거행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중종 이후 역대 왕 중에 친경과 친잠을 한 번이라도 같이 거행한 왕은 선조, 영조이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도 선잠단을 보수하였고, 선농단과 선잠단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렇듯이 친경과 친잠을 하지 않는 경우에도 선농제(先農祭)와 선잠제(先蠶祭)에 사용할 향과 축문을 왕이 친전(親傳)하여 관원을 보내 대리로 제사하는 것은 국가의 주요 행사로써 이어졌다.
친경에서 선농제와 관예, 장종, 헌종 등의 사전 사후의 의식이 있듯이 친잠에서도 선잠제를 비롯하여 친잠 의식 및 누에고치를 수확하여 바치는 것을 받는 수견(受繭)과 이를 조정 대신과 팔도에 반사하는 반견(頒繭) 의식이 있는데, 역대로 이런 의식을 다 갖추어 거행한 경우는 본 《의궤》가 이루어진 영조 43년(1767)의 경우에만 있었다. 반견의 경우는 중종 8년(1513)에도 있었으나 수견 의식은 영조 43년에 최초로 거행하여 이후 이러한 예가 정식이 되게 하였으며 영조 46년(1770)에는 친잠을 한 경복궁 터에 ‘정해년에 친잠한 곳[丁亥親蠶]’이라는 기념비를 친필로 써서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친잠 의식의 기록은 영조 이후 보이지 않지만 궁중에서 선잠제를 빠뜨리지 않고 지냈듯이 양잠도 꾸준히 이어져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 때에도 창덕궁 친잠실에서 수견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친경할 때와 같이 당시 일본 관원의 부인들까지 같이 참석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4) 선잠단과 친잠단
선잠단은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하였다는 중국 황제(黃帝)의 비 서릉씨(西陵氏)를 잠신(蠶神)으로 모셔 놓고 제사하던 단을 말하며, 친잠단은 왕비가 내외 명부들을 거느리고 뽕잎을 따는 의식을 거행하던 단이다. 고려조에 처음 정한 선잠단의 규모는, “사방 2장(丈), 높이 5자[尺]이며, 사방에 계단을 낸다.”고 되어 있고,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가려 제사하였다.
조선조에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동교(東郊)에 있으며 제도는 선농단과 같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후일까지 남아 있던 곳은 북쪽에 있었다. 조선조 들어 선잠제를 지낸 최초의 기록은 정종(定宗) 2년(1400)에 보인다. 그리고 최초로 친잠을 거행한 임금은 성종으로, 친잠단을 창덕궁 후원에 쌓고 8년(1477) 3월 14일에 친잠례를 거행하였는데, 이는 선잠단이 북쪽 교외에 있고 장소가 협소하여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채상단을 설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역대 왕들이 거행한 몇 번의 친잠은 중종이 경복궁에서 거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때 창덕궁에 쌓은 친잠단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가 300년 만에 처음 거행하는 것임을 강조한 43년(1767)의 친잠 때는 경복궁 강녕전 옛터에다 제단과 채성단을 축조하였는데, 이는 친잠의 의미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때 쌓은 제단의 규모 역시 선잠단의 제도를 모방하였음이 의궤에 의해 확인된다. 그러나 이 행사 이후에는 선잠제는 관원을 보내 대신 거행하지만 채상단에서 친잠의 행사를 거행한 일은 없었다. 선잠단은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어 유지만 남아 있으며, 채상단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친잠을 하였던 강녕전 옛터에 영조 46년(1770)에 친잠한 곳임을 알리는 ‘정해친잠(丁亥親蠶)’이라는 친필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4. 친경ㆍ친잠 의궤의 구성
1) 친경의궤
조선조에 거행된 친경에 대한 의궤는 현재 영조 15년(1739)과 43년(1767)의 《친경의궤》만이 남아 있는데, 15년의 《친경의궤》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1책씩이 소장되어 있고, 43년의 《친경의궤》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3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1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국역한 《친경의궤》의 대본은 영조 43년에 거행된 친경에 대한 의궤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
본 《의궤》의 구성은 친경시의 참여 인원에 대한 좌목(座目)과 관경대(觀耕臺)의 배치도가 앞에 있고, 이어서 전교(傳敎), 계사(啓辭),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 의주(儀註), 장종(藏種), 수견(受繭), 전교(傳敎), 의주(儀註)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의궤의 구성은 전교로부터 시작하여 의주와 상전(賞典)까지 있는 것이 전례지만, 본 《의궤》에는 친경에 대한 후속 행사로 처음 거행한 장종 의식과 친잠에 대한 후속 행사인 수견 의식이 같은 날 거행되었기 때문에 장종과 수견에 대한 내용이 전교와 의주에 덧붙여 같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견은 《친잠의궤》에 수록되어야 하지만 장종과 같은 날 거행되었기 때문에 《친경의궤》에 같이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내용의 《장종ㆍ수견 의궤》가 어람용으로 별도로 작성되어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존되어 있다.
순서대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좌목은, 이 친경 행사를 총괄 지휘하는 예의사(禮儀使) 예조 판서 신회(申晦)를 비롯하여 예방 승지 유한소(兪漢蕭), 종경 재신(從耕宰臣)으로는 판중추부사 김양택(金陽澤) 등 4인, 경적사(耕籍使)로 호조 판서, 제판서(諸判書)로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 2인, 대간으로 대사헌과 대사간 2인, 경기 관찰사 등이 특별히 참석하라는 전교에 따라 참여하고 있다. 이 좌목에 나오는 인원은, 국왕의 친경에 참여하는 31인과 왕세손의 시경(侍耕)에 참여하는 16인 등 총 47인이다.
관경대의 배치도는, 친경을 하는 적전 북쪽에 관경대가 있고 그 앞에 국왕이 친경하는 위치를 중심으로 이날 행사에 참석하는 모든 인원의 위치를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교와 계사는, 친경 행사를 위하여 예조 판서나 대신들과 같이 행사 제반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이에 대한 지시 사항을 전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때는 영조의 나이 74세로 이보다 9년 앞서 재혼한 정순왕후(貞純王后)와 같이 친잠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행사에 임하는 왕의 남다른 감회와, 치밀하게 의식의 규범을 만들고자 하는 왕의 뜻이 이 전교에서 잘 드러난다. 아울러 이때 이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뒤를 이은 후일의 정조가 16세의 왕세손으로 같이 동참하는 데 따른 감회도 잘 나타나 있다.
이문질은, 행사 주관 부서인 예조에서 행사에 필요한 각종 준비 사항에 대해 기일 안에 협조해 줄 것을 각 기관에 요청하는 공문의 묶음이다. 총 10개 기관에 보낸 17건의 협조 요청 공문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는데 기관별 공문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문질(10개처 17건)
수신처 | 협조 요청 내용 |
전라 감영 | 구곡 종자 담는 청상자 제작 장인 차출 건으로 담양부에 이첩 시행 요청 |
충청 감영 | 구곡 종자 담는 버들고리를 도내 생산 고을에 이첩 시행 요청 |
황해 감영 | 구곡 종자 담는 버들고리를 도내 생산 고을에 이첩 시행 요청 |
이조 | 각종 진행 요원 차출 건 |
공조 | 선농단 수축 건 |
한성부 | 행차하는 도로 보수 건 |
한성부 | 기로인 40인 선정 건 |
공조 | 소채찍 제작 건 |
도총부 | 좌우위 장군 도총관 2원 차출 건 |
병조 | 협시 비신 상호군 2인, 정의 부책 대호군 등 차출 건 |
병조 | 경근거 견부 20인 차출 건 |
경기 감영 | 종경 서인 50인, 쟁기, 소, 수우인, 평치인, 말먹이, 식량 등 차출 조달 건 |
경기 감영 | 종실 재신이 사용할 경우(耕牛) 20두, 말먹이, 식량 등 차출 조달 건 |
경기 감영 | 적전 세 차례 예비갈이와 이에 필요한 경우 6두와 쟁기 조달 건 |
공조 | 각종 청색 쟁기 및 싸개, 경근거 등 제작 수리 건 |
호조 | 각종 동원 인원에 대한 복장, 도구 등 마련 건 |
호조 | 어용 경우로 청우와 흑우 2두 실예차 마련, 왕세손용 마련 건 |
내관질은, 행사 준비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분담받은 기관들이 예조에 결과를 보고하거나 질의하는 내용 및 협조 요청을 하는 공문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역시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보내온 공문에 대하여 예조에서 처리한 결과가 ‘제사(題辭)’로 말미에 정리되어 있어 각 기관에서 요청한 각종 사항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총 5개 기관에서 보내온 17건의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내관질(5개처 17건)
송신처 | 내용 | 제사(題辭) |
봉상시 첩정 | 청상자 제작 장인 7인 파견 요청, 담양부에 공문 보낼 것 요청 | 3인으로 줄여 이문 |
봉상시 첩정 | 청상자 제작 재료 해장죽 및 각종 도구 제작 재료 등 보급 요청 | 호조에 이문 |
봉상시 첩정 | 공석(空石)을 각 고을에 배정하여 보급해 줄 것 요청 | 경기 감영에 이문 |
봉상시 첩정 | 예비용 대상자 제작 재료 요청 | 해당 각사에 이문 |
봉상시 첩정 | 가자(架子) 짐꾼, 청상자 짐꾼 등 배정 요청 | 병조에 이문 |
경기 감사 관문 | 경우(耕牛) 등 실예차 수효 지시 요청(實差 20, 預差 10) | 갑신년 예로 반감 |
경기 감사 관문 | 종경 서인ㆍ경우 등 보고, 평치인은 적전민 동원 요망, 동원되는 각종 인원의 사용 도구와 복장 등을 전례대로 서울에서 마련 할 것 요청 | 전례대로 시행 |
봉상시 첩정 | 파종 후 덮을 공석 800닢 요청 | 해당 고을에 이첩 |
이조 관문 | 차비관(差備官) 명단 마련 보고 | |
병조 관문 | 협시 학성군 이유ㆍ구선행, 정의 이광국ㆍ전광천, 왕세손 시경 집우편차비 김해주ㆍ신대겸으로 계하 사실 통보 | 접수함 |
봉상시 첩정 | 구곡종 10말 8리, 백포대 9개, 수우인이 착용할 강의(絳衣)ㆍ개책(介幘), 각종 도구와 인원 차출 등 요청 | 이문함 |
봉상시 첩정 | 적전 3차 예비갈이에 필요한 인원과 소, 쟁기 등 요청 | 경기 감영에 이문 |
경기 감사 관문 | 각 고을 배정 인원과 소 등 대기, 식량과 말먹이 지급할 것 요청 | 호조에 이문 |
봉상시 첩정 | 청상자 제작 장인의 식량과 급료 지급 요청 | 호조에 이문 |
뇌사 별공작 첩정 | 쟁기와 분삽 등 운반꾼 착용 의복과 청건 지급 요청 | 호조에 이문 |
봉상시 첩정 | 필요 잡물 물목 제시하여 마련하고 지급할 것 요청 | 해당 각사에 감결 |
병조 관문 | 기민에게 위로주를 베풀 적에 술잔 돌리는 군인을 배정하는 것이 부당하니 노비에서 뽑아 사용할 것 요청 | 접수함 |
특히 경기 감영에서 보내온 관문 중에는 친경 행사에 가장 중요한 소와 쟁기, 그리고 각종 인원을 경기 17개 고을에 배정하여 차출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이는 당시 친경 행사를 치를 적에 경기 지역 고을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로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만, 종경 서인, 호리 쟁기, 경우, 경부, 수우인 등은 동원 수효가 각각 50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배정된 수는 51로 확인된다.
* 경기에 배정한 소와 인원
구분 | 고을 | 소 | 쟁기 | 경부 | 수우인 |
종재 이하 소용 | 양주 | 20 | 10 겨리 쟁기 | 10 | 10 |
예차 20두 | 양근 | 8 | 4 겨리 쟁기 | 4 | 4 |
포천 | 6 | 3 겨리 쟁기 | 3 | 3 | |
영평 | 6 | 3 겨리 쟁기 | 3 | 3 | |
종경 서인 50명 호리 쟁기 50 경우 50 경부 50 수우인 50 | 삭녕 | 4 | 4 | 4 | 4 |
가평 | 4 | 4 | 4 | 4 | |
지평 | 4 | 4 | 4 | 4 | |
적성 | 4 | 4 | 4 | 4 | |
장단 | 4 | 4 | 4 | 4 | |
마전 | 4 | 4 | 4 | 4 | |
파주 | 4 | 4 | 4 | 4 | |
연천 | 3 | 3 | 3 | 3 | |
수원 | 4 | 4 | 4 | 4 | |
안성 | 4 | 4 | 4 | 4 | |
양성 | 4 | 4 | 4 | 4 | |
죽산 | 4 | 4 | 4 | 4 | |
남양 | 4 | 4 | 4 | 4 |
감결질은, 예조에서 각종 준비 사항을 해당 기관에 지시하는 내용의 공문을 모아 놓은 것으로, 총 53개처에 보낸 18건의 문건이 역시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이 감결질에서, 협조 사항이 있을 경우 행정 담당 부서에 공문을 보내 다시 하부 실행 기관으로 이첩하여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조에서 직접 호조나 공조, 병조, 이조 등 행정 담당 기관과 그에 소속된 예하 기관에 동일한 내용의 공문을 같이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기관별 지시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감결질(53개처 18건)
수신처 | 협조 요청 내용 |
호조, 공조, 장흥고, 선공감, 제용감, 예빈시, 사섬시, 풍저창 | 각종 소요되는 지필묵 및 채색용 안료 등 조달 건 |
호조, 공조, 봉상시, 제용감, 선공감, 평시서, 장흥고 | 용환차(用還次)로 청상자, 버들고리 등 조달 건 |
호조, 제용감, 봉상시 | 평치인 차출 및 필요 연장[쇠스랑] 조달 건 |
호조, 봉상시, 선공감, 제용감 | 경근거에 깔 자리 등 조달 건 |
사복시 | 적전 거름용 말똥 500짐, 덮개용 풀 조달 건 |
호조, 봉상시, 선공감, 별공작 | 경근거 보수 및 채색, 끌이용 바 등 조달 건 |
호조, 선공감 | 각 차비 인원의 품패(品牌) 마련 건 |
호조, 병조, 위장소, 제용감 | 기서민에게 위로주연을 베풀 적에 위군이 착용하는 자의(紫衣) 자건(紫巾) 마련 건 |
호조, 봉상시, 선공감 | 삼태기, 삽 등 조달 건 |
호조, 제용감, 사복시, 선공감 | 경우 굴레용 삼겹 청사 및 소코뚜레 청색 칠감 조달 건 |
호조, 내자시, 내섬시, 예빈시, 제용감, 선공감 | 친경 후 위로주연의 수우, 종경 서인, 평치인, 조경 집뢰인 등의 주안상(酒案床) 마련 건 |
호조, 장흥고, 제용감 | 위로주연을 베풀 적에 기서민 118인의 과유지(裹油紙) 마련 건 |
한성부, 공조, 선공감, 동부 | 선농단과 관경대 봉심시 해당 관원 참석 건 |
호조, 공조, 봉상시, 제용감, 선공감, 사복시 | 각종 소요 잡물을 점검시까지 선공감에 대령할 것 |
대전 사약, 세손궁 사약, 내시부, 액정서, 이조, 호조, 병조, 공조, 의정부, 종친부, 돈녕부, 의빈부, 사헌부, 사간원, 한성부, 도총부, 봉상시, 제용감, 전설사, 장악원, 시강원, 선공감, 통례원, 오위장청, 사복시, 내사복시, 내자시, 내섬시, 예빈시, 군자감, 광흥창, 자문감, 장흥고, 풍저창, 익위사, 의장고, 경기 감영, 의영고, 사도시, 동부 | 친경 습의시에 참여하는 각 인원과 이에 필요한 각종 도구 및 의복 등을 사전에 점검하여 습의 당일 차질없이 참여하도록 할 것 |
전의감, 호조, 병조, 공조, 장흥고, 선공감, 군기시, 사재감, 예빈시, 전설사, 사섬시, 풍저창, 와서, 사자관청, 도화서, 사기계, 군자감, 광흥창, 좌포청, 우포청, 위장소 | 어람용과 5개처 사고, 예조에 보관할 의궤 작성 의궤청을 전의감에 설치하는 데 필요한 보첨 차일과 깔자리 등을 조달하고, 의궤 작성용 지필묵과 각종 재료 및 잡물 등을 조달하고, 의궤청의 땔나무 및 사자관 10인, 화원 2인, 사환, 수직 군사 등 필요 인원 등을 차출 배정할 것 |
호조, 공조, 장흥고, 풍저창 | 《친경ㆍ친잠 의궤》에 《장종ㆍ수견 의궤》를 첨부하는데 필요한 지필묵 등을 실입차로 조달할 것 |
호조, 제용감 | 《친경ㆍ친잠 의궤》를 5개처 사고에 봉안할 적에 싸는 4폭 홍색 목면 보자기 10건 조달 건 |
의주질은, 친경시의 각종 행사에 대한 의전 절차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왕의 의전 절차로는 궁중에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의전 절차를 비롯하여, 친경하는 의전 절차, 친경 후 위로주를 내릴 때의 의전 절차 등이 있고, 수행한 왕세손의 각종 의전 절차가 함께 정리되어 있다.
장종과 수견은, 친경과 친잠의 후속 행사로 5월 26일에 거행하였는데 이를 정리하여 어람용으로 《장종ㆍ수경 의궤》를 만들어 대내에 들이고 아울러 이 《친경의궤》에 첨부해 놓은 것이다. 친경과 친잠은 역대 왕 중에 거행한 경우가 있었지만 장종과 수견을 거행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행하기 위하여 《주례》와 《예기》를 널리 상고하여 의식의 틀을 마련하고 이를 《속오례의(續五禮儀)》에 첨가하여 훗날에 대비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장종을 하기 위하여 왕이 친림하여 거행하는 ‘관예(觀刈)’는 우리나라에서는 거행한 전례가 없으므로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고사를 인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장종과 수견 의식을 거행한 후 중외에 반포한 교서와 이를 하례하는 왕세손을 비롯한 종친 대신들의 전문(箋文)과 치사(致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의주질은, 왕비가 곡식 종자를 바치는 ‘왕비헌종의(王妃獻種儀)’, 베어 온 곡식을 친히 받는 ‘친수예곡의(親受刈穀儀)’, 왕비가 곡식을 받아 저장하는 ‘왕비장종의(王妃藏種儀)’,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는 ‘진하반교의(陳賀頒敎儀)’, 교서 반포와 하례할 때의 왕세손 행례 절차인 ‘반교진하시왕세손입참행례의(頒敎陳賀時王世孫入參行禮儀)’, 중궁전에 하례를 드릴 때의 왕세손의 행례 절차인 ‘중궁전진하시왕세손행례의(中宮殿陳賀時王世孫行禮儀)’, 중궁전에 하례드릴 때의 백관들의 행례 절차인 ‘중궁전진하시백관행례의(中宮殿陳賀時百官行禮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수견 행사의 의식인 ‘왕비수견의(王妃受繭儀)’는 《친잠의궤》 의주질에 편집되어 있다.
2) 친잠의궤
조선조에 거행된 친잠에 대한 의궤는 영조 43년(1767)에 거행된 《친잠의궤》만이 남아 있는데, 규장각과 장서각에 1책씩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국역한 대본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
이 의궤의 구성은 목록 다음 첫 장에, “중궁전의 친림 작헌례는 3월 10일 진시(辰時)에 경복궁(景福宮) 강녕전(康寧殿)의 옛터 동편에 설치한 제단에서 거행하고, 친잠은 같은 날 오시(午時)에 강녕전 옛터의 동편에 설치한 채상단에서 거행하고, 진하는 같은 날 미시(未時)에 근정전(勤政殿) 옛터에서 거행하고, 조현례(朝見禮)는 같은 날 신시(申時)에 강녕전 옛터에서 거행하고, 습의는 2월 18일 덕유당(德遊堂)에서 전교에 따라 한 차례만 거행하였다.”는 행사의 일정과 시간, 장소가 정리되어 있어 친잠의 행사 개요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다음은 의궤의 일반적인 체제와 같이 전교, 계사, 이문, 내관, 감결, 의주의 순서로 되어 있고, 다음은 친잠에 사용한 제단과 제사의 진설도, 채상단, 갈고리, 광주리, 잠박 등 12판의 설명을 곁들인 그림이 있고, 다음에 친잠할 적에 새로 제작한 술잔 등 용기들의 품목이 있고, 끝에 수확한 누에고치를 반사받은 내외의 신하들이 사례하는 전문(箋文)이 첨부되어 있다. 차례대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교와 계사는, 정월 7일 인일제과(人日製科) 문제로 입시하였을 때 친경과 친잠의 행사 거행에 대한 전교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어 당시 친경을 거행하기 위한 준비와 함께 친잠도 같이 거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내용들은 《친경의궤》에 있는 내용과 같은 것도 있지만 친잠의 모든 의전 절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전교의 내용에 다 갖추어져 있다. 특히 이 전교의 내용 중에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300년 만에 다시 거행하는……” 등의 감회 어린 내용의 전교가 여러 번 나오는데, 이를 기준으로 거슬러 계산해 보면 성종 8년(1477)이나 성종 24년(1493)에 있었던 친잠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거행하는 친잠의 의의에 대한 영조의 생각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또 영조는 춘추관 당상과 낭청을 강화도 사고로 보내어 성종조와 중종조, 선조조의 실록 중에서 친경과 친잠을 거행한 내용을 등사해 오게 하여 참고하고 있는데, 이는 친경과 동시에 친잠을 같이 거행한 전조의 의전 절차를 참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행사에 동원되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인원과, 왕비를 비롯한 참여 인원들의 복장과 장비, 그리고 실제 뽕잎이 피는 시기에 맞추어 행사를 거행하도록 날짜를 조정하는 문제, 행사를 마치고 하례를 받고, 참여자에게 시상하는 등의 일까지 모두 한결같이 옛 전례를 원용하고 있다. 특히 왕비가 친히 거행하는 선잠신(先蠶神)에 대한 작헌례와 채상례를 중종조에 친잠을 거행한 바 있는 경복궁에서 거행하도록 하면서 영조는, “이번 이 예를 한 차례 거행함에 있어서 세 가지 감회가 깊다. 하나는 300년 된 옛 예를 다시 거행하는 것이고, 하나는 황조(皇朝)의 고사(故事)를 따라 시행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함께 창업(創業)한 고궁(故宮)에 간다는 것이다.”라고 하여, 친잠을 거행하는 의미와 상징성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전교와 계사의 끝 부분에 태묘에 지내는 고유제의 어제 제문과 서릉씨(西陵氏) 작헌례의 어제 제문 등을 비롯하여 전문과 치사, 반교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문질은, 진행 주관 부서인 예조에서 3개처에 보낸 3건의 공문이 날짜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한성부에 보낸 내용을 살펴보면 “가로와 세로가 각 3자인 잠판에 적당한 양의 누에 종자를 마련하라는 전교에 따라 누에 종자를 마련해야 하는데 근거할 데가 없어 중국의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중국에서는 순천부(順天府)에서 대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한성부가 거기에 해당되니 한성부에서 엄선하여 마련해 대령하라.”고 요청하였다. 또 공조에 보낸 각종 양잠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해 올리라는 공문, 그리고 호조에 보낸 친잠에 필요한 제반 절차와 준비물에 대한 지침을 전달하여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 등이 있는데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이문질(3개처 3건)
수신처 | 요청 내용 |
한성부 | 누에 종자를 마련하여 제공할 것(잠판은 가로와 세로가 각 포백척으로 3자임) |
공조 | 갈고리, 잠박, 시렁, 네모진 광주리 등 선공감과 협조하여 제작 대령할 것 |
호조 | 제단ㆍ채상단 수축(선공감), 신위판ㆍ제물 등(봉상시) 친잠에 관한 제반 의전 절차 통보 |
내관질은, 각 기관에서 예조에 보내온 보고서 및 질의서 등을 날짜 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5개처에서 보낸 10건의 협조를 요청하거나 질의하는 공문으로써, 4건은 제단과 채상단을 새로 축조하는 일을 담당한 경복궁 수리소에서 보낸 것이고, 3건은 친잠에 쓸 각종 대광주리와 잠박 등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친잠 별공작소에서 질의한 것이며, 나머지 3건은 내수사와 한성부, 봉상시에서 보낸 공문이다. 특히 내수사에서 보낸 공문은 양잠할 장소로 지정한 명례궁(明禮宮)이 비록 사대궁(四大宮)이기는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부적합하니 외대청(外大廳)을 수리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명례궁에서 보낸 수본(手本)을 이첩하여 조처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는 당시에 궁중에서 양잠을 한 지가 오래되어서 적당한 곳이 마련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역시 말미에 ‘제사(題辭)’가 있어 처리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내관질(5개처 10건)
송신처 | 내용 | 제사(題辭) |
경복궁 수리소 첩정 | 채상단, 제단 축조 등에 관한 명확한 지시 요망 | 토축보사(土築補莎), 곡장 대신 휘장 사용 |
친잠 별공작 첩정 | 친잠에 소용되는 각종 그릇 제작에 대한 명확한 지시 요망 | 양잠 도구는 잠모에게 물어서 할 것 |
친잠 별공작 첩정 | 광주리와 잠박의 재료, 색깔, 수효 등 지시 요망 | 색칠하지 말 것. 수효는 넉넉하게 할 것 |
내수사 첩정 | 양잠 장소로 지정된 명례궁이 부적합 하며, 외대청을 수리하여 사용할 것 을 요청한 명례궁의 수본을 이첩, 대 책을 세울 것을 요청 | 전교를 받들어 전했을 뿐이고, 수리하는 등의 일은 본조에서 알 바 아니니 살펴서 시행할 것 |
경복궁 잠단 수리소 첩정 | 제단, 채상단 축조 인부로 매일 150명씩 필요하므로, 호조와 병조에 이문 요청 바람 | 착공 일시 미정, 때에 맞춰 이문할 것임 |
경복궁 수리소 첩정 | 제단, 채상단 축조 공사를 시급히 착수할 필요 있으므로, 호조와 병조에 협조 이첩 요망 | 착공 일자 2월 20일로 분부함 |
경복궁 수리소 첩정 | 제단, 채상단 축조 공사시 감역관 전근(專勤)이 필요하므로 타 업무에 차출 말도록 이조 선공감에 이문 요망 | 요청대로 이문함 |
친잠 별공작 첩정 | 친잠시 사용할 광주리 크기에 대한 지시 요망 | 도형대로 제작할 것 |
한성부 관문 | 5부(部)에서 엄선한 누에 종자 10장 보냄(잡지 사용) | 접수함 |
봉상시 첩정 | 친잠 작헌례시 사용할 각종 물품과 인원 등을 대령하도록 각 해당 사에 지시할 것을 요청 | 이문하여 지시함 |
감결질은, 예조에서 행사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경복궁 강녕전 옛터에 새로 마련되는 제단과 채상단의 수축, 그리고 행사 보조 요원으로 차출되는 여자 차비들의 선정 등에 대한 준비를 지시하는 내용들을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총 38개 부처에 보낸 17건이다. 이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친경할 적에 동원된 53개 기관에 비해 적은 기관이 동원되고 있는데 이는 친경할 적에 동원된 의정부나 종친부, 돈녕부, 사헌부 등 중앙 기관과 대전에 관계된 기관이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친경할 적에 동원된 기관과 겹친 20개 기관은 주로 물품 조달이나 행사 준비를 지원하는 호조, 병조, 공조 등 행정 담당 기관과 장흥고, 선공감, 봉상시, 풍저창 등 물자 조달 등을 지원하는 기관이며, 이를 제외한 새로 동원된 18개 기관은 양잠하는 장소로 지정된 명례궁을 비롯하여 상의원이나 내의원, 혜민서, 내수사 등 내전에 관계되는 기관들이 협조 기관으로 동원되고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감결질(38개처 17건)
수신처 | 내용 |
어의궁, 수진궁, 명례궁, 용궁동, 내수사 | 양잠 장소, 잠모 등 선정 준비 건 |
선공감 | 제단, 채상단 수축 일시 통보 건 |
내수사 | 잠모 8인 등의 의복 지급 건 |
호조, 병조, 군기시, 군자감, 위장소 | 하인 4명이 부족하니 각 사령 1명씩을 차출하여 배정할 것을 요망 |
공조, 상의원, 내의원, 혜민서 | 의장 차비 의녀가 부족하니 공조 상의원 비자(婢子)를 차출하여 배정할 것 요망 |
호조, 병조, 장흥고, 풍저창, 예빈시, 선공감 | 공사에 소요되는 지필묵 등을 마련하여 제출할 것을 요망 |
향실, 호조, 공조 | 제기 등 용기를 새로 제작할 것 |
호조, 병조, 공조, 선공감, 봉상시, 제용감, 위장소, 전설사, 의영고, 경복궁 수리소, 의장고, 상의원 | 광주리, 갈고리, 채여 등을 제작할 관원을 미리 대령할 것 |
봉상시 | 제물 마련, 진설 등에 관한 절차 통보 |
통례원, 선공감 | 친제할 적에 참여하는 제집사의 품패(品牌) 를 마련하여 거행할 것 |
종묘서, 향실, 예문관, 전생서, 장흥고, 풍저창, 통례원, 동빙고, 사도시, 군자감, 광흥창, 금루 내시부, 사축서, 기인 | 종묘 고유제 거행시 담당한 각종 일을 거행하도록 준비 요망 |
호조, 제용감, 내자시, 예빈시, 내섬시, 선공감 | 잠모 등 사찬(賜饌) 기수(器數)와 시상에 관한 건 |
호조, 예빈시, 내수사 | 의장 차비 의녀의 아침과 점심 제공 건 |
호조, 제용감 | 누에 종자를 덮을 홍색 목면 3폭 보자기를 대령할 것 |
호조, 장흥고 | 잠모 등에게 사찬할 적에 포장할 유지(油紙)를 대령할 것 |
제단 별공작, 공조, 봉상시, 선공 감 | 제단 망료석과 소요 잡물, 그릇 등을 준비하여 대령할 것 |
호조, 공조, 제용감, 봉상시, 의영고, 선공감 | 작헌례를 올릴 적의 소요 물품인 향로, 수건, 화룡촉, 준소촉, 대거 등을 대령할 것 |
의주질은, 친잠 행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의전 절차로 모두 11가지의 의주가 정리되어 있는데 차례로 살펴보면, 먼저 친경 장소인 경복궁으로 거둥하였다가 당시 왕이 거처하던 경희궁(慶熙宮)으로 돌아오는 행차에 필요한 ‘경복궁거둥시출환궁의(景福宮擧動時出還宮儀)’와 왕세손이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복궁거둥시왕세손수가의(景福宮擧動時王世孫隨駕儀)’와 중궁전의 ‘중궁전예경복궁시출환궁의(中宮殿詣景福宮時出還宮儀)’와 혜빈궁과 빈궁이 수행하는 ‘중궁전예경복궁시혜빈궁빈궁수예의(中宮殿詣景福宮時惠嬪宮嬪宮隨詣儀)’로서 이동 중에 필요한 의전 절차가 있고, 다음으로 중궁전이 선잠신에 간단히 제사하는 ‘중궁전작헌선잠의(中宮殿酌獻先蠶儀)’가 있다. 이 작헌의는 이보다 앞선 3월 5일에 북쪽 교외에 있는 선잠단에 관리를 보내 대신 제사하는 것과는 별도로 친잠하기 전에 먼저 선잠신에 고유하는 형식으로 치르는 것이다. 영조는 전교에서, “근래에는 잠상(蠶桑)의 도에 대해 듣지 못해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여겼었다. 곤전(坤殿)으로 하여금 반드시 친잠을 하게 하려는 것은 깊은 뜻이 있으니 의식 절차에 관한 예문을 잘 갖추지 않을 수가 없다. 채상(採桑)만 행한다는 것은 역시 형식적인 행사에 가깝다.”고 하여 채상하기 전후에 직접 작헌례와 수견 등의 행사를 거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다음에 왕비와 혜빈ㆍ왕세손빈 및 내외 명부가 채상단에 나아가 왕비는 다섯 가지, 혜빈과 왕세손빈은 일곱 가지, 내외 명부는 아홉 가지의 뽕잎을 따고, 잠실로 나아가 뽕잎을 썰어서 누에에 뿌려 주는 행사인 ‘친잠의(親蠶儀)’가 있고, 다음에 왕세손을 비롯한 종친과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는 ‘진하반교의(陳賀頒敎儀)’가 있고, 이어 왕세손이 참례할 때의 ‘반교진하시왕세손입참행례의(頒敎陳賀時王世孫入參行禮儀)’, 중궁전에 진하할 때의 ‘중궁전진하시왕세손백관행례의(中宮殿陳賀時王世孫百官行禮儀)’가 있다. 그리고 친잠을 마치고 왕과 왕비가 미리 강녕전 옛터에 마련된 악차(幄次)에서 혜빈과 왕세손빈, 명부들의 하례를 받는 ‘조현의(朝見儀)’가 있다. 이 행사 역시 처음 거행하는 것으로 조알의(朝謁儀)를 참고하여 제정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영조가 조현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내린 전교에, “어째서 ‘조현’이라 말하는가 하면, 자고로 대전과 내전이 예를 받는 것을 조현이라 하는데, 이는 300년 만에 다시 있는 일이니, 이 역시 조상을 위로하는 깊은 뜻이 있다. 내전이 비록 이를 받지만 진실로 조상의 뜻으로 예를 행한 것이니, 이름은 조현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하례이다. 이는 우러러 기뻐하는 조상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맨 끝에 친잠 후 수확한 누에고치를 받는 ‘수견의(受繭儀)’가 있는데, 이 의식은 수확한 고치를 왕에게 보여 준 뒤 왕비에게 주면 왕비가 받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의식도 모든 의식과 같이 왕세손을 비롯한 혜빈, 왕세손빈, 내외 명부들이 도열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차도(行次圖)나 물품에 대한 기명도(器皿圖)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있어 실제로 당시의 사용 물품과 인원의 배치 등을 알 수 있는데, 앞에서 살펴본 《친경의궤》에는 관경대의 배치도만 있고, 이 《친잠의궤》에는 12판의 그림이 있다. 순서대로 살펴보면, 앞부분의 이 행사를 위해 경복궁 옛터에 새로 쌓은 제단과 제사 진설도, 그리고 왕비의 채상단과 혜빈궁과 빈궁의 채상단 그림이 설명과 함께 있다. 왕비의 채상단은 사방 12자 높이 1자이고, 혜빈궁 등이 사용하는 채상단은 사방 8자 높이 8치로 너비와 높이가 차이가 있다. 이어 갈고리[鉤]와 광주리[筐], 잠박[箔], 시렁[架], 잠판(蠶板) 등의 그림과 그 규모에 대한 수치가 기록되어 있고, 이어 제기(祭器)로 사용하는 변(邊), 두(豆), 작(爵), 점(坫), 산뢰(山罍), 용작(龍勺) 등의 그림이 있어 당시에 사용한 도구와 용기들의 규모와 형태를 알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른 의궤와 같이 행차도 등 좀 더 자세한 의식의 규모나 형태를 살필 수 있는 그림이 없다는 점이다. 《친경의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영조 15년(1739)에 거행한 친경 행사는 병풍으로 그려서 들였고, 40년(1764)에 거행한 친경 행사는 족자를 만들어 들였는데 이번의 친경도는 제작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이유에서 그림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다음은 작헌례를 올릴 적에 사용하기 위해 새로 제작한 기물(器物)들의 물목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전교 내용에 의하면, 다른 곳에 사용하던 기물들을 빌려다 사용하는 것을 습의(習儀) 때 보고서 특별히 새로 제작하도록 한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수확한 누에고치를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ㆍ종친과 지방관에게 반사(頒賜)한 데 대하여 사례하는 17건의 전문(箋文)들을 모아 놓은 ‘반견후경외사전문(頒繭後京外謝箋文)’이 있는데, 이 전문을 살펴보면, 영의정ㆍ판중추부사ㆍ좌의정ㆍ우의정ㆍ예조 판서ㆍ원임 예조 판서ㆍ부사직이 연명으로 올린 전문,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ㆍ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ㆍ밀안군(密安君) 이제(李焍)ㆍ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ㆍ하평군(夏坪君) 이무(李懋)ㆍ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ㆍ함계군(咸溪君) 이춘(李杶)ㆍ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의 연명 전문, 승정원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의 연명 전문, 홍문관 응교ㆍ수찬의 연명 전문, 치사 봉조하 3인의 연명 전문, 인양군(仁陽君) 이경호(李景祜)ㆍ완은군(完殷君) 이은춘(李殷春)의 연명 전문, 병조 판서의 전문, 개성부 유수의 전문, 강화부 유수의 전문, 경기 관찰사ㆍ양주 목사의 연명 전문, 평안도 관찰사의 전문, 황해도 관찰사의 전문, 강원도 관찰사의 전문, 충청도 관찰사의 전문, 전라도 관찰사의 전문, 경상도 관찰사의 전문, 함경도 관찰사의 전문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것으로 수확한 누에고치를 8도의 지방관을 포함한 39명에게 반사한 것이 확인된다.
5. 맺는말
친경과 친잠은 농경 시대 군주들이 직접 농사짓고 누에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조상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는 정성을 보이고, 아울러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우리나라는 신라 시대부터 그러한 의식이 있었음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고려 성종 때에는 친경을 거행한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성종 때 친경과 친잠을 동시에 거행하여 이후 역대 왕들이 본받는 기준이 되었다. 특히 이 《친경ㆍ친잠 의궤》를 구성하고 있는 영조 43년의 친경과 친잠은 역대 왕들이 하지 않았던 장종과 수견의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친경과 친잠이 모범을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끝까지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영조는 당시 74세로 경희궁에 거처하면서 동적전에 나아가 선농제를 지내고 친경을 하였다. 이때 5년 전에 죽은 사도세자 대신 그의 아들이자 훗날의 정조인 16세 된 왕세손과 함께 친경을 하면서 감회 어린 생각을 피력한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10일에 9년 전에 재혼한 정순왕후도 친잠을 하도록 하여 왕과 왕후가 조상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고 권장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역대 왕들이 친잠의 장소로 이용하였던 창덕궁이 아닌 경복궁 강녕전의 옛터에다 제단과 친잠단을 쌓고, 왕비가 직접 작헌례와 채상례를 거행하도록 하고 이곳에서 하례를 받는 조현례까지 거행함으로써 경복궁이 지니고 있는 왕조 창업의 상징성까지 기리고자 하였다.
본 《의궤》는 조선조에 거행된 친경과 친잠 중에 같은 해 함께 거행된 친경과 친잠을 끝까지 정리해 놓은 유일한 기록이다. 영조는 15년(1739)과 29년(1753), 40년(1764), 그리고 43년(1767)에 친경을 거행하여 역대 왕 중에서 친경을 가장 많이 거행하였다. 그리고 43년에는 친잠을 동시에 거행하여 《친경의궤》와 《친잠의궤》를 남겼다. 《친경의궤》는 영조 43년 4월 19일에, 《친잠의궤》는 24일에 수정이 완료되었다.
* 역대 친경과 친잠 사례
왕대 | 서기 | 친경 | 관예 | 장종 | 헌종 | 친잠 | 수견 | 반사 | 비고 |
신라 | 선농(先農)ㆍ중농(中農)ㆍ후농제(後農祭) 기록 | ||||||||
고려 성종 2년 | 983 | ○ | |||||||
고려 성종 7 | 988 | 헌종의주(獻種儀註) 마련 지시 | |||||||
고려 현종 22 | 1031 | ○ | |||||||
고려 문종 2년 | 1048 | 후농제(後農祭) 거행 | |||||||
고려 인종 12 | 1134 | 적전(籍田)에 제사 | |||||||
고려 인종 22 | 1144 | ○ | |||||||
고려 의종 | 친경의(親耕儀) 제정 | ||||||||
고려 공민왕 19 | 1370 | ○ | 이인임(李仁任) 대행 | ||||||
조선 태조 1 | 1392 | 적전 영(籍田令)ㆍ승(丞) 설치, 적전(籍田) 경작 | |||||||
조선 정종 2 | 1400 | 선잠단(先蠶壇) 제사 | |||||||
조선 태종 6 | 1406 | 적전단(籍田壇) 수치 및 수호 인정(守護人丁) 배치 | |||||||
조선 성종 6 | 1475 | ○ | |||||||
조선 성종 7 | 1476 | 친경대(親耕臺) 신축 | |||||||
조선 성종 8 | 1477 | ○ | 채상단(採桑壇) 창덕궁 후원에 신축 | ||||||
조선 성종 19 | 1488 | ○ | |||||||
조선 성종 24 | 1493 | ○ | ○ | ||||||
조선 연산군 10 | 1504 | ○ | 선잠단 보수 | ||||||
조선 중종 8 | 1513 | ○ | ○ | ○ | 정부와 승정원에 반사 | ||||
조선 중종 18 | 1523 | ○ | |||||||
조선 중종 24 | 1529 | ○ | 친잠단(親蠶壇) 창덕궁에 조금 옮겨 신축 | ||||||
조선 명종 8 | 1553 | ○ | |||||||
조선 선조 5 | 1572 | ○ | ○ | ||||||
조선 광해군 4 | 1612 | ○ | |||||||
조선 광해군 12년 | 1620 | ○ | |||||||
조선 숙종 3 | 1677 | 친경 계획 비로 인해 취소 | |||||||
조선 영조 15 | 1739 | ○ | 친경도(親耕圖) 병풍으로 제작 | ||||||
조선 영조 23 | 1747 | ○ | |||||||
조선 영조 29 | 1753 | ○ | |||||||
조선 영조 38 | 1762 | ○ | |||||||
조선 영조 40 | 1764 | ○ | |||||||
조선 영조 41 | 1765 | ○ | |||||||
조선 영조 43 | 1767 | ○ | ○ | ○ | ○ | ○ | ○ | ○ | 경복궁에 친잠단 신축, 조정과 팔도에 누에고치 반사 |
조선 영조 45 | 1769 | ○ | |||||||
조선 영조 46 | 1770 | 경복궁에 어필 친잠 기념비를 세움 | |||||||
조선 정조 5 | 1781 | ○ | |||||||
조선 고종 8 | 1871 | ○ | ○ | ||||||
조선 순종 2 | 1908 | ○ | |||||||
1913 | ○ | ||||||||
합계 | 20 | 7 | 1 | 1 | 6 | 2 | 2 |
참고 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춘관통고(春官通考)》
《예기(禮記)》
《주례(周禮)》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한서(漢書)》
1999년 12월 27일
ⓒ 한국고전번역원 | 박소동(朴小東) | 1999
> 경서성독 > 시경 > 대아생민지십 > 생민
1절
生民之什三之二생민지십삼지이
2절厥初生民궐초생민이時維姜嫄시유강원이시니生民如何생민여하오
克禋克祀극인극사하사以弗無子이불무자하시고履帝武敏이제무민하사歆攸介攸止흠유개유지하사
載震載夙재진재숙하사載生載育재생재육하시니時維后稷시유후직이시니라賦也부야라
3절誕彌厥月탄미궐월하야先生如達선생여달하시니不坼不副불탁불핍하시며
無菑無害무재무해하사以赫厥靈이혁궐령하시니
上帝不寧상제불녕가不康禋祀불강인사아居然生子거연생자삿다賦也부야라
4절誕寘之隘巷탄치지애항한대牛羊腓字之우양비자지하며誕寘之平林탄치지평림한대會伐平林회벌평림하며
誕寘之寒氷탄치지한빙한대鳥覆翼之조복익지로다鳥乃去矣조내거의어늘后稷呱矣후직고의하시니
實覃實訏실담실우하사厥聲載路궐성재로러시니라賦也부야라
5절誕實匍匐탄실포복하사克岐克嶷극기극억이러시니以就口食이취구식하사蓺之荏菽예지임숙하시니
荏菽旆旆임숙패패하며禾役穟穟화역수수하며麻麥幪幪마맥몽몽하며
瓜瓞唪唪과질봉봉하더니라賦也부야라
6절誕后稷之穡탄후직지색이有相之道유상지도로다茀厥豊草불궐풍초하고種之黃茂종지황무하니
實方實苞실방실포하며實種實褎실종실유하며實發實秀실발실수하며實堅實好실견실호하며
實穎實栗실영실율하더니卽有邰家室즉유태가실하시니라賦也부야라
7절誕降嘉種탄강가종하니維秬維秠유거유비며維穈維芑유문유기로다
恒之秬秠항지거비하니是穫是畝시확시묘하며恒之穈芑항지문기하니
是任是負시임시부하야以歸肇祀이귀조사하시니라賦也부야라
8절誕我祀如何탄아사여하오或舂或揄혹용혹유하며或簸或蹂혹파혹유하며釋之叟叟석지수수하며
烝之浮浮증지부부하며載謀載惟재모재유하며取蕭祭脂취소제지하며取羝以軷취저이발하며
載燔載烈재번재열하야以興嗣歲이흥사세로다賦也부야라
9절卬盛于豆앙성우두호니于豆于登우두우등이로다其香始升기향시승하니上帝居歆상제거흠이삿다
胡臭亶時호취단시리오后稷肇祀후직조사하시므로庶無罪悔서무죄회하야
以迄于今이흘우금이삿다賦也부야라
生民생민八章팔장이니四章사장은章十句장십구요四章사장은章八句장팔구라
1절
생민지십삼지이
2절 맨 처음 주(周) 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고신씨(高辛氏)의 세비(世妃)이신 강원(姜嫄)이니 어떻게 사람을 낳았는고
정결하게 교매(郊禖)에 제사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재앙을 물리치고 상제의 엄지발가락을 밟아 태기가 있었네 하늘의 은총이 머문 곳에 크게 여기고 머문 곳에 마음이 움직여
임신하고 조심하시어 아들을 낳아 키우시니 이가 후직(后稷)이시니라
3절 이윽고 산달을 채워 첫아기를 낳으시되 염소처럼 쉽게 낳으시니 찢어지고 갈라지는 아픔도 없고
모체에는 조금도 재해도 없으셔서 그 신령스러움을 빛내시니
상제(上帝)가 편안하지 않으실까 정성어린 제사를 어여삐 않으랴 수월하게 아들을 낳으셨도다
4절 그 아들을 좁은 골목에 버려두니 소와 양이 비호하고 사랑해주며 그 아들을 숲속에 버려두니 마침 나무를 베러온 자가 거두어주며
그 아들을 찬 얼음 위에 버려두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고 깔아주었네 새들이 마침내 떠나간 뒤에 후직(后稷)이 소리 높여 울어대니
울음소리가 실로 길고 커서 길에 가득히 울려 펴졌느니라
5절 실로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부터 유달리 숙성(夙成)하시더니 혼자서 스스로 밥을 먹게 되는 나이 되니 콩들을 심으셨네
콩잎들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벼들은 줄을 지어 아름다우며 깨와 보리도 무성하며 자라고
오이는 주렁주렁 달렸느니라
6절 후직(后稷)의 농사는 좋은 재배 방법이 있도다 무성한 풀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곡식을 심으니
씨앗을 물에 담가 싹이 틔우며 씨를 뿌려 점점 자라며 벼가 피어 긴 이삭이 나오며 여물어서 단단하고 아름다우며
이삭이 늘어지고 알차더니 태(邰) 나라에 집을 정하시니라
7절 좋은 종자를 가려 내려주니 검은 기장과 두알배기 검은 기장이며 붉고 흰 차조로다
검은 기장을 두루두루 심으니 이에 수확하여 가리질을 하였으며 붉고 흰 차조를 두루 심으니
어깨에 메거나 등짐을 져서 돌아와 비로소 제사드리네
8절 우리 후직(后稷)의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고 방아를 찧고 절구에서 퍼내고는 키로 까부르고 절구에 당겨 넣으며 물을 부어 쌀을 싹싹 씻으며
김이 뭉게뭉게 오르도록 찌며 날을 받고 몸을 정결히 하여 쑥을 취하여 기름을 발라 태워서 강신제(降神祭)를 올리며 숫양을 잡아 노제(路祭)를 지내며
불고기를 굽고 꼬치를 만들어 구워서 새해의 농사를 일으키고 잇는도다
9절 내가 제기(祭器)에 담으니 목기(木器)에는 김치를 도기(陶器)에는 갱을 담았네 그 향내가 비로소 올라가니 상제(上帝)가 편안히 흠향하시도다
어찌 향내가 때에 알맞을 뿐일까 후직(后稷)이 처음 제사함으로부터 거의 죄(罪)와 회한(悔恨)이 없어서
지금에 이르셨도다
생민 팔장이니 사장은 장십구요 사장은 장팔구라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7년 을사 > 2월 29일 > 최종정보
세종 7년 을사(1425) 2월 29일(기사)
07-02-29[04] 동서 적전에서 경작한 종자를 경기,충청 등의 각 고을에 보내어 경작하게 하다
호조에서 계하기를,
“동서 적전(東西耤田)에서 경작한 거서(柜黍) 17석 3두에서 금년 종자 각기 1석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는 정 3품 이상의 관원에게 반사(頒賜)하고, 명하여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황해 등의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경작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원전】 2 집 658 면
【분류】 농업-권농(勸農)
- [주-D001] 거서(柜黍) :
- 검은 기장과 기장.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임창재 (역) | 1969
>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57권 > 앙엽기 4 > 최종정보
청장관전서 제57권 / 앙엽기 4(盎葉記四)
고려(高麗)의 경쇠[磬]
세종조(世宗朝)에서는 남양(南陽)에서 나는 석경(石磬)과 해주(海州)에서 생산되는 거서(秬黍)로 악률(樂律)을 정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성세(盛世)의 상서로운 화응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고려경(高麗磬)은 이미 송 나라 조정에서도 유명했었다. 그러면 고려 때에 남양에서 이미 경쇠의 재목이 생산되었었는데, 중간에 폐절(廢絶)되었다가 세종조 때에 이르러서 다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또한 고려 때에는 다른 곳에 경쇠를 생산하던 땅이 또 있었던 것인가? 이제 고려경에 대한 한 토막을 기록한다. 《휘주록(揮麈錄)》 송(宋) 나라 왕명청(王明淸)이 지었다. 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초엽에 양강공(楊康功)이 고려(高麗)에 사신 갈 때에 금문(禁門)에 있는 제공(諸公)들을 작별하면서 그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느냐고 물으니 다 말하지 않았는데, 유독 채원도(蔡元度)가 ‘고려의 경쇠는 매우 아름다우니 돌아올 때 번거롭더라도 나를 위하여 경쇠 1구(口)만 가져다 주시오.’ 하였다. 오래지 않아 강공(康功)이 돌아올 적에 마침내 경쇠와 기교(奇巧)한 물건을 채원도 집에 가져다 주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강공이 웃으면서 ‘내가 바다를 건너갈 때에 제공들은 다 내가 큰 바다에 빠져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나에게 부탁도 않았지만 원도의 마음은 오히려 내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나는 애오라지 그 뜻에 보답한 것이다.’ 했다.”
- [주-D001] 거서(秬黍) :
- 검은 기장[黑黍]을 말한다. 《이아(爾雅)》 석초(釋草)에 “거(秬)는 흑서(黑黍)다.” 했고, 소(疏)에 “흑서(黑黍)는 일명 거서(秬黍)인데, 거(秬)는 바로 흑서중에 큰 것을 말한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12년 경술 > 9월 11일 > 최종정보
세종 12년 경술(1430) 9월 11일(기유)
12-09-11[01]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 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黃鍾)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확정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朝會)나 하례(賀禮)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그 제작의 적중(適中)을 얻지 못할 것 같고, 황종(黃鍾)의 관(管)으로는 절후(節候)의 풍기(風氣) 역시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나라가 동쪽 일각에 위치하고 있어 춥고 더운 기후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 나라의 대[竹]로 황종의 관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황종의 관은 반드시 중국의 관을 사용해야 될 것이다. 방금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의하고 있고, 또 역대의 응후(應候)를 상고한 것도 한둘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았으나, 악기의 제도는 모두 그 정당한 것을 얻지 못하였고, 송(宋) 나라 주문공(朱文公)에 이르러, 그의 문인(門人) 채원정(蔡元定)이 옛 사람들의 유제(遺制)를 참고해 악기를 만들어 내니, 문공이 잘 되었다고 이를 칭찬한 바 있다. 그 뒤에 원정이 외방으로 쫓겨났는데, 문공이 서신을 통하여 말하기를, ‘제작한 악기의 음률이 아직 미흡하니, 그대의 귀환을 기다려서 다시 개정하자.’고 한 것으로 보아, 송나라의 악기도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조정에 들어와 아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장적(長笛)ㆍ비파(琵琶)ㆍ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던 것이다.”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대답하기를,
“옛 글에 이르기를, ‘축(柷)을 쳐서 시작하고, 어(敔)를 쳐서 그치는데, 사이로 생(笙)과 용(鏞)으로 연주한다.’ 하였사온즉, 사이사이로 속악(俗樂)을 연주한 것은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연(朴堧)이 만든 황종(黃鍾)의 관(管)은 어느 법제에 의거해 재정(裁正)한 것인가.”
하니, 사성이 아뢰기를,
“송(宋) 나라와 원(元) 나라의 법제에 의하여 당서(唐黍) 1천 2백 개를 속에 넣어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거서(柜黍)를 가지고 황종의 관을 재정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본다. 중국 사람들은 황종의 관에 거서를 담아서 그 양(量)을 안다는 것이지, 거서를 가지고 황종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상당(上黨)의 서(黍)를 가지고 음률을 정한다.’ 하였은즉, 우리 나라의 서를 가지고 황종의 관을 정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한 것이다.”
하니, 사성이 아뢰기를,
“그 속에 담은 거서(柜黍)가 1천 2백 개라면 보통의 서(黍)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음악을 연습하는 자들이 관습 도감(慣習都監)의 사람들만 못할 것이니, 모름지기 관습 도감의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하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연(朴堧)ㆍ정양(鄭穰)은 모두가 신진 인사들이라 오로지 그들에게만 의뢰할 수 없을 것이니, 경(卿)은 유의하라.”
하고, 또 좌우 인사들에게 이르기를,
“사신이 만일 숙소(宿所)에서 자고 간다면 각 고을에서 금침(衾枕)을 갖추기가 어려울 것이니,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약간의 금침을 만들어 가지고 사신을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언(代言)들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금년 가을에 가뭄이 너무 심했는데 메밀의 결실은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랫동안 가물었기 때문에 모두 결실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의 심한 것이 금년 같은 해가 없는데 다른 곡식들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콩ㆍ팥도 모두 잘 안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들으니, 밭곡식이 논에 비해 민간에서는 식용에 가장 긴요하다고 하는데, 이제 생각하니 논에서 나는 곡식이 더욱 절실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과 민간에서 식량으로 쓰는 데 있어 어느 것이 중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사용하기는 논에서 나는 것이 중하고, 민간에서 식량으로 먹는 데는 밭에서 나는 것이 중합니다. 대체로 민간에서는 10월 이전에는 오로지 밭곡에 의지해 살고, 국가에서 쓰는 것은 쌀이 대부분이고 좁쌀은 적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원전】 3 집 25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외교-명(明) / 농업-농작(農作)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주-D001] 거서(柜黍) :
- 검은 기장.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임창재 (역) | 1969
近思錄集解(2)●근사록집해(2)
卷之四 存養5. 震驚百里에 不喪匕鬯
5. 震驚百里에 不喪匕鬯 震卦本義曰 鬯은 以秬黍酒로 和鬱金하니 所以灌地降神者也라 不喪匕鬯은 以長子言也라이라하니 臨大震懼하야 能安而不自失者는 唯誠敬而已니 此處震之道也니라
震卦彖傳이라 匕는 以載鼎實이요 鬯은 秬酒也라 雷震驚百里하니 可謂震矣로되 而奉祀者不失其匕鬯하니 誠敬이 盡於祀事면 則雖震而不爲驚也라 是知君子當大患難, 大恐懼하야 處之安而不自失者는 惟存誠篤至하야 中有所主면 則威震이 不足以動之矣니라
5. 〈伊川先生이 말씀하였다.〉
“‘우레가 震動하여 백리를 놀라게 함에 숟가락과 鬱鬯酒(울창주)를 잃지 않는다.’ 震卦의 《本義》에 말하였다. “鬯은 검은 기장으로 빚은 술에 鬱金을 섞은 것이니, 땅에 부어 降神하는 것이다. 不喪匕鬯은 長子로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큰 진동과 두려움〔震懼〕을 당하여 편안하고 스스로 잃지 않는 것은 오직 정성과 공경뿐이니, 이는 震懼에 대처하는 道이다.”
震卦 〈彖傳〉의 傳이다. 匕는 솥에 담겨있는 것을 꺼내어 〈도마에 올려놓는〉 물건이요, 鬯은 검은 기장으로 빚은 술이다. 우레가 震動하여 백리를 놀라게 하니, 震動이라고 이를 만하나 제사를 받드는 자가 숟가락과 울창주를 잃지 않으니,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하게 하면 비록 우레가 震動하더라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 이는 君子가 큰 환난과 큰 두려움을 당해서 편안히 대처하여 스스로 잃지 않는 것은 오직 誠을 보존함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마음속에 주장하는 바가 있으면 위엄과 진동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거서[秬黍], 검은 기장[黑黍], 흑서(黑黍), 기장의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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