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의 유래

2017. 11. 1. 11:18산 이야기










        

전라도 백의종군로 중 가장 뚜렷한 유적 세 곳

익산 여산 동헌, 구례 석주관과 손인필 비각


17.08.23 11:32        l 최종 업데이트 17.08.23 11:32 l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들어온다. 전라도로 들어온 첫날 여산 동헌의 관노 집에서 잔다. 사진은 여산 동헌의 모습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들어온다. 전라도로 들어온 첫날 여산 동헌관노 에서 잔다. 사진은 여산 동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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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년 11월 12일, 이순신은 통제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11월 28일, 군대 문제를 총지휘하는 비변사'두 장군의 극심한 불화 때문에 조선 수군 전체의 지휘력과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면서 '성상(임금)께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시거나, 아니면 한 사람을 육군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 라고 선조에게 건의한다.

12월 1일, 선조는 원균충청 병사로 보내는 대신에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히면 좋겠느냐고 대신들에게 묻는다. 대신들은 곽재우, 배설, 이광악을 추천한다. 12월 9일, 진주 목사 배설에게 경상 우수사 임명장이 떨어진다.

소서행장과 고니시 유키나가


외래어 표기법은 小西行長을 '소서행장'이 아니라 '고니시 유키나가'로 쓰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인은 침략군을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 식으로 부른 바가 없다. 1597년 1월 3일자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소서행장을 '왜추(倭酋, 왜군의 대장)'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이 글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라 '소서행장', '가등청정', '직전신장'으로 적는다.

조선 수군 와해를 시도한 소서행장의 음모

   조선 수군의 본격적인 와해는 1596년 12월 1일 소서행장의 사신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소서의 밀사는 '내년 1∼2월 중에 가등청정이 현해탄을 건너온다' 면서,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죽이면 전쟁이 끝날 것' 이라고 속삭인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명한다. 이순신은 임금의 지시를 거부한다. 적의 꾀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일본군의 계략에 넘어간 선조, 이순신에게 출정을 지시

   선조가 계속 출정 명령서를 보낸다. 이순신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마침내 도원수 권이 직접 한산도를 향해 말을 달린다. 그래도 이순신은 왕명을 듣지 않는다.


 이순신이 가등청정을 부산 앞바다에서 격퇴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의 가상 지도. 대마도에서 올라오는 가등청정과 육지 왜성들에서 쏟아져 나온 일본군 사이에 저절로 포위된다.
 이순신이 가등청정을 부산 앞바다에서 격퇴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의 가상 지도. 대마도에서 올라오는 가등청정과 육지 왜성들에서 쏟아져 나온 일본군 사이에 저절로 포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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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3일, 가등청정의 군대가 부산에 상륙한다. 선조는 '왜추(소서행장)가 모든 것을 손바닥 보이듯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왜추보다도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면서 '그런 자는 가등의 목을 베어와도 용서할 수 없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분노한다.

2월 6일 이순신 검거령이 떨어지고, 3월 4일 이순신은 감옥에 갇힌다. 원균통제사가 된다. 선조와 조정은 원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여 신속히 왜적들을 무찌르라고 독촉한다.

선조, 이순신을 투옥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

   그 무렵 남해안은 일본군들이 성을 쌓은 채 점령하고 있었다. 만약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가면, 앞에는 부산항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 수군, 뒤에는 남해안 왜성들에서 나와 배를 타고 따라온 일본 육군 사이에 저절로 포위되는 꼴이 된다. 원균은 망설인다.


 전북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812-9 석불영상랜드에 풍신수길 직전의 일본 최고 권력자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이 본영으로 썼던 기후성 천수각을 영화 촬영용으로 재현해 둔 왜성이 있다. 실물은 울산 서생포 왜성, 복원한 것은 순천 왜성이 가장 볼 만하다.
 전북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812-9 석불영상랜드에 풍신수길 직전의 일본 최고 권력자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이 본영으로 썼던 기후성 천수각을 영화 촬영용으로 재현해 둔 왜성이 있다. 실물은 울산 서생포 왜성, 복원한 것은 순천 왜성이 가장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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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투옥된 지 28일 지난 4월 1일 석방된다. 1597년 4월 1일자 난중일기의 첫 문장은 '옥문을 나왔다'이다. 4월 3일 이순신은 권율 도원수 진영으로 가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에 따라 남해안을 향해 출발한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거쳐 간 길과 만난 사람들의 면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4월 3일 수원, 4일 독산성, 평택, 오산을 거쳐 5일 충남 아산에 닿는다. 아산에서 이순신은 음봉면 어라산의 조상들 산소, 외가·친가·형 요신 등의 사당에 참배한다. 이어 12일 영광 법성포에 닿는다. 13일 아침 이순신은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16일 일기에 이순신은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쓴다. 19일 일기에도 '어서 죽는 것이 낫다'라고 쓴다.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이 전라도에 처음 들어온 때는 1597년 4월 21일로, 지금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이다. 일기에는 이날 여산 동헌의 관노 집에서 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여산 동헌(유형문화재 93호)의 일부와 기념물 116호 느티나무가 보이는 풍경이다.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이 전라도에 처음 들어온 때는 1597년 4월 21일로, 지금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이다. 일기에는 이날 여산 동헌의 관노 집에서 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여산 동헌(유형문화재 93호)의 일부와 기념물 116호 느티나무가 보이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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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면서 전라도 경내로 처음 들어서는 날은 4월 21일이다. 일기에는 '저녁에 여산 관노에서 잤다'라고 되어 있다. 이순신이 여산으로 들어와 곧장 관노의 집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터, 여산 동헌부터 먼저 들렀을 터이다.

전라도로 들어온 이순신, 첫날을 여산에서 숙박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445-2의 여산 동헌을 답사한다. 유형문화재 93호인 동헌은 거대한 느티나무들과 선정비·척화비가 뜰에 줄지어 서 있어 오랜 관청다운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동헌 서쪽의 기념물 116호 느티나무는 6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거대 고목이다. 나무는 백의종군 중인 충무공이 동헌에 들어오는 광경과,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동헌 마루에 앉아 느티나무를 바라본다. 충무공도 이곳에서 저 느티나무를 망연히 바라보았으리라.

아마도 관노의 집은 동헌 뒤편에 있었을 듯하다. 지금도 건물 뒤 돌축대 위에 넓은 빈 터가 남아 있다. 관노의 숙소는 흙집이었으니 목조인 동헌보다 먼저 무너졌을 성싶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 '한밤중에 홀로 앉아 있으니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고 썼다. 느티나무에 이는 바람이 어쩐지 슬픈 소리를 내는 것만 같다.

 손인필 비각 : 전남 구례읍 봉북리 271-7 조선 수군 재건 출정 공원
 손인필 비각 : 전남 구례읍 봉북리 271-7 조선 수군 재건 출정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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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22일 전주 남문 에서 잔다. 이어 23일 임실, 25일 남원 운봉에 닿는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순천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듣는다. 이순신은 다시 26일 구례 손인필의 집을 거쳐 27일 순천에 도착한다. 권율 '군관 권승경을 보내 안부를 묻는데 위로하는 말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칠천량 패전 소식에 통곡하는 이순신

   이순신은 5월 26일 석주관(전남 구례 토지면 송정리 525-1)을 거쳐 악양(경남 하동 평사리)으로 간다. 이후 줄곧 경상도에 머무르던 이순신은 7월 18일 '16일 새벽에 수군이 적의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 여러 장수 다수가 피해를 입고 크게 패했다' 라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참지 못한다.'

   원균도 통제사가 된 초기에는 이순신처럼 부산 앞바다 출정을 불가능하다고 인식했다. 원균이 출정을 미루자 도원수 권율은 병사들 앞에서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다. 치욕을 참지 못한 원균은 7월 5일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출발한다. 그러나 갑자기 몰아닥친 풍랑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함 20여 척 잃고 거제도 북서쪽 칠천량으로 후퇴한다.


7월 16일, 일본군의 기습에 전멸하는 조선 수군

   7월 16일 새벽 4시, 칠천량의 사방에 매복해 있던 일본 육군과  일본 수군야습이 벌어진다. 이런 일을 염려하여 경상 우수사 배설,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 대장들이 한결같이 칠천량 주둔을 반대했지만, 원균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이 큰 화근이었다. 칠천량은 물이 얕아 크고 무거운 조선 판옥선은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년 전인 1576년(선조 9) 무과에 장원 급제했고, 함경도 병마사 등을 역임한 무장 최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군대를 홍주 목사 홍가신 등과 함께 홍산(부여 홍산면)과 임천(부여 임천면)에서 크게 무찔러 1604년 청난 공신 2등에 책봉된 최호였지만 사방이 포위된 상태에서는 적들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최호 사당(군산)
 최호 사당(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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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칠천량에서 충청 수사 최호와 전라 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한 조선의 장졸들이 한꺼번에 전사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구출해낸 10여 척의 판옥선(뒷날 이순신에게 인계되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의 바탕이 된다)을 제외한 조선 수군의 대부분 전함들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통제사 원균은 탈출하여 육지에 올랐지만 매복해 있던 일본 육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임진왜란 전체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하게, 그리고 최초로 당한 조선 수군의 패전, 그것이 바로 칠천량 전투이다. 그 전투에서 최호는 끝까지 왜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여 경상도로 갈 때에도, 다시 통제사로 임명을 받아 전라도로 올 때에도 석주관을 지났다. 사진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525-1에 있는 석주관을 7의사 묘 입구에서 본 모습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여 경상도로 갈 때에도, 다시 통제사로 임명을 받아 전라도로 올 때에도 석주관을 지났다. 사진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525-1에 있는 석주관을 7의사 묘 입구에서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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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이던 1597년 5월 26일 석주관을 거쳐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간다.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7월 16일 거제도 서북쪽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을 당한 후 8월 3일 다시 통제사로 임명을 받아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돌아올 때도 석주관을 거친다. 이는 석주관이 군사 요충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오며가며 이순신이 들렀던 석주관

   일본군은 전군을 몰아 진격한다. 석주관을 지키던 구례 현감 이원춘은 6만 일본 대군이 밀려오자 남원으로 물러난다. 8월 7일 구례를 점령한 일본군은 9월 25일 남원성까지 점령한다.

구례의 왕득인은 300여 의병을 모아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 차단을 시도하던 중 11월 1일 전사한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 화엄사·연곡사 등의 승려 153명도 의병으로 참여한다.

 석주관 7의사 묘 : 사적 106호, 석주관 사당 맞은편 산비탈
 석주관 7의사 묘 : 사적 106호, 석주관 사당 맞은편 산비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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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6일 의병들은 석주관에 집결한다. 12월 17일 의병군은 연곡골 일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60명을 죽이고 200여 명의 포로를 구출한다. 그 후에도 병군하동에서 구례로 전진하는 일본군을 공하는 등 활약을 거듭한다. 의병군의 기습 공격으로 무수한 일본군이 죽어 그 피가 계곡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해서 '피아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피아골 지명 유래는 임진왜란 석주관 전투

   1598년 봄 일본군은 대군을 동원해서 석주관을 공격해온다. 군사의 수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자 아군은 결국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 다섯 의병장을 포함 아군의 대부분이 전사하면서 석주관 전투는 막을 내린다. 이원춘 구례 현감도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다.

   석주관 칠의사(七義祠) 맞은편 산비탈에 일곱 의병장과 이원춘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모두 8기이지만 통칭 '석주관 7의사 묘'라 부른다. 오늘도 의사들은 하동 쪽을 응시하고 있다.


 칠의사 : 석주관 사당
 칠의사 : 석주관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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