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금 - 上
2017. 11. 3. 13:57ㆍ산 이야기
울 금 - 上
고전번역서 전체 (27)
번호 | 서명 | 권차 | 문체 | 기사 | 저/편/필자 | 간행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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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기언(記言) | 기언 제3권 상편 | 학(學) | 이기(理氣)를 논함 | 2006~2008 | ||||||||||||||
니, 사생과 종시와 흥멸과 성쇠가 원리는 하나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기가 위로 흩어져 환하게 밝은 기운이 되고 후끈한 기운이 되고 오싹한 기운이 된다. 울금향초(鬱金香草)에 거창주(秬鬯酒)를 합하여 강신하며 쑥에 서직(黍稷)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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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理氣)를 논함
論理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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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出於理。理行於氣。其本無聲無臭。不息不貳。往而復來。其著者。天地之化育。四時之代序。萬物之終始。人事之盛衰。至栽培傾覆而興滅係焉。此一往一來。消長之常也。無形者。氣之本。有形者氣之成。有形者。有時而生。有時而死。無形者。不死。神明變化。無終無始。不遺不窮。理外無氣。氣外無理。理不可見。推其著者而求其故則得矣。死生終始。興滅盛衰。其故一也。
人死則其氣發揚于上。爲昭明焄蒿悽愴。鬱合鬯而灌。蕭合黍稷而奠。腥肆焰腍。以致鬼神。皆氣之感。而其相感者。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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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권 상편 / 학(學)
이기(理氣)를 논함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로 행해진다. 근본은 소리도 냄새도 없으며 쉬지도 어긋나지도 않아 갔다가는 다시 온다. 현상은 천지가 화육(化育)하고 사시가 차례로 바뀌는 것과 만물의 종시(終始)와 인사의 성쇠로부터 심어진 것은 북돋워 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 버리는 것까지 흥망이 여기에 달려 있으니, 이는 한 번은 가고 한 번은 오는 소장(消長)의 상도(常道)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기의 본질이고 형체가 있는 것은 기가 이룬 것이다. 형체가 있는 것은 때로는 살고 때로는 죽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죽지 않으니, 신명의 변화가 시작도 끝도 없어 빠뜨리지도 다하지도 않는다. 이 밖에 기가 없고 기 밖에 이가 없다. 이는 볼 수 없으나 드러난 것을 미루어 그 원인을 찾아보면 알 수 있으니, 사생과 종시와 흥멸과 성쇠가 원리는 하나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기가 위로 흩어져 환하게 밝은 기운이 되고 후끈한 기운이 되고 오싹한 기운이 된다. 울금향초(鬱金香草)에 거창주(秬鬯酒)를 합하여 강신하며 쑥에 서직(黍稷)을 합하여 전을 올리고 날고기와 해체한 희생과 구운 고기와 삶은 고기를 차려 놓고 귀신을 이르게 하는 것은 모두 기가 감응한 것이니, 그 서로 감응하는 것은 이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하현주 (역) | 2006
> 고전번역서 > 동명집 > 동명집 제9권 > 칠언고시 > 최종정보
동명집 제9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68수
칠석에 수령으로 있는 한익명과 더불어 공진의 산에 있는 정자에 올라가 장구를 짓다〔七夕與韓使君翼明登貢津山亭作長句〕
오늘 무슨 저녁인가 바로 칠석 저녁으로 / 今夕何夕是七夕
우물가의 오동나무 잎사귀가 막 지누나 / 梧桐井上葉初落
늙은이가 거울 보매 허연 머리 서글프니 / 老夫覽鏡悲白頭
한 잎새에 온 천하가 가을로 물들었구나 / 爲是一葉天下秋
사군께서 보낸 서찰 마침 이때 왔거니와 / 使君手札適云至
공진 있는 산성에서 노닐자고 날 청했네 / 請我貢津山城遊
공진 본디 호서 지방 한 번화한 곳이거니 / 貢津湖西一都會
산 위 있는 성가퀴가 바닷가에 임해 있네 / 山上百雉臨海濱
서둘러서 수레 몰아 약속 장소 나아가니 / 倒衣命駕赴高會
당 가득히 모인 이들 뛰어나신 분들이네 / 滿堂盡是英俊人
술동이엔 울금향이 나는 술이 들었으며 / 鬱金之香樽美酒
소반에는 흰 눈 같은 생선회가 수북하네 / 白雪之高盤素鱗
사군께서 술에 취해 내게 수간 주었으나 / 使君中酒授簡我
내가 어찌 문장 솜씨 상여 같은 사람이랴 / 我豈文似相如者
곧장 하삭음을 따라 술잔 계속 들거니와 / 直從河朔繼含盃
고양에서 말을 타는 거를 묻지 마시게나 / 休向高陽問騎馬
저쪽 멀리 신령스런 영공암을 바라보니 / 越瞻載神令公巖
하늘 닿은 바위 모습 어쩜 그리 우뚝한가 / 石色入天何巉嵓
강 가르는 큰 물고기 물보라를 뿜어내고 / 橫江大魚噴雪浪
해가 지는 먼 바다에 돛단배가 돌아오네 / 落日遠海來風帆
부는 바람 화운 불어 더위 기운 흩트리며 / 風吹火雲散炎熱
까막까치 남쪽 날고 달은 동쪽 떠오르네 / 烏鵲南飛月東出
밤에 잔뜩 술 마시는 것도 역시 한때이니 / 夜飮厭厭亦一時
술에 취해 몽롱하게 된들 뭐가 해로우리 / 何妨酩酊無所知
길게 노래 부를 새에 벌써 새벽 되었으매 / 長歌且謠達五更
은하수가 흘러 정히 견우성을 적시누나 / 河漢正沈牽牛星
지난해에 전쟁터에 있었던 일 떠올리며 / 却憶往年征戰地
그때의 일 얘기하매 모두 눈물 떨구거늘 / 說着此事盡垂淚
어찌 술을 대해 잔뜩 취하지를 않으리오 / 胡爲對酒不盡醉
우물가의 오동나무 잎사귀가 막 지누나 / 梧桐井上葉初落
늙은이가 거울 보매 허연 머리 서글프니 / 老夫覽鏡悲白頭
한 잎새에 온 천하가 가을로 물들었구나 / 爲是一葉天下秋
사군께서 보낸 서찰 마침 이때 왔거니와 / 使君手札適云至
공진 있는 산성에서 노닐자고 날 청했네 / 請我貢津山城遊
공진 본디 호서 지방 한 번화한 곳이거니 / 貢津湖西一都會
산 위 있는 성가퀴가 바닷가에 임해 있네 / 山上百雉臨海濱
서둘러서 수레 몰아 약속 장소 나아가니 / 倒衣命駕赴高會
당 가득히 모인 이들 뛰어나신 분들이네 / 滿堂盡是英俊人
술동이엔 울금향이 나는 술이 들었으며 / 鬱金之香樽美酒
소반에는 흰 눈 같은 생선회가 수북하네 / 白雪之高盤素鱗
사군께서 술에 취해 내게 수간 주었으나 / 使君中酒授簡我
내가 어찌 문장 솜씨 상여 같은 사람이랴 / 我豈文似相如者
곧장 하삭음을 따라 술잔 계속 들거니와 / 直從河朔繼含盃
고양에서 말을 타는 거를 묻지 마시게나 / 休向高陽問騎馬
저쪽 멀리 신령스런 영공암을 바라보니 / 越瞻載神令公巖
하늘 닿은 바위 모습 어쩜 그리 우뚝한가 / 石色入天何巉嵓
강 가르는 큰 물고기 물보라를 뿜어내고 / 橫江大魚噴雪浪
해가 지는 먼 바다에 돛단배가 돌아오네 / 落日遠海來風帆
부는 바람 화운 불어 더위 기운 흩트리며 / 風吹火雲散炎熱
까막까치 남쪽 날고 달은 동쪽 떠오르네 / 烏鵲南飛月東出
밤에 잔뜩 술 마시는 것도 역시 한때이니 / 夜飮厭厭亦一時
술에 취해 몽롱하게 된들 뭐가 해로우리 / 何妨酩酊無所知
길게 노래 부를 새에 벌써 새벽 되었으매 / 長歌且謠達五更
은하수가 흘러 정히 견우성을 적시누나 / 河漢正沈牽牛星
지난해에 전쟁터에 있었던 일 떠올리며 / 却憶往年征戰地
그때의 일 얘기하매 모두 눈물 떨구거늘 / 說着此事盡垂淚
어찌 술을 대해 잔뜩 취하지를 않으리오 / 胡爲對酒不盡醉
- [주-D001] 한익명(韓翼明) :
-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 2월 5일 기사에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오며, 《해좌집(海左集)》 권25 〈통제사김공묘비음기(統制使金公墓碑陰記)〉에 김예직(金禮直)의 사위가 군수(郡守) 한익명(韓翼明)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 [주-D002] 공진(貢津) :
- 충청도 아산(牙山)에 있던 포구로, 1523년(중종18)에 이곳에 공진창을 설치하고 군향(軍餉)을 저적(儲積)하였다.
- [주-D003] 울금향이 나는 술 :
- 울금을 찧어서 기장과 섞어 빚은 술로, 아주 향기로운 술을 말한다.
- [주-D004] 사군(使君)께서 …… 사람이랴 :
- 옛날에 후한의 양왕(梁王)이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간찰을 보내어 흰 눈을 소재로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 고사가 있다. 수간(授簡)은 서찰을 준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文選 卷30 雪賦》
- [주-D005] 하삭음(河朔飮) :
- 무더운 여름철에 피서(避暑)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술자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에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자제와 하삭(河朔)에서 삼복(三伏) 무렵에 술자리를 벌이고 밤낮으로 정신없이 마셔 댄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初學記 歲時部上 夏避暑飮》
- [주-D006] 고양(高陽)에서 …… 마시게나 :
- 마음껏 취하도록 술을 마시자는 뜻이다. 진(晉)나라 때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을 맡고 있으면서 고양에 있는 습가지(習家池)에서 술을 자주 마셨는데, 그때마다 잔뜩 취하여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말을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簡列傳》
- [주-D007] 영공암(令公巖) :
-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 권2 〈영공암〉 시에 “영공암은 충청도 면천(沔川)의 대진(大津)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평택 대진항(大津港)을 지나는 서해대교 중간 지점에 있는 바위를 가리킨다.
- [주-D008] 화운(火雲) :
- 름의 더운 기운을 머금은 붉은 구름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15
論理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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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出於理。理行於氣。其本無聲無臭。不息不貳。往而復來。其著者。天地之化育。四時之代序。萬物之終始。人事之盛衰。至栽培傾覆而興滅係焉。此一往一來。消長之常也。無形者。氣之本。有形者氣之成。有形者。有時而生。有時而死。無形者。不死。神明變化。無終無始。不遺不窮。理外無氣。氣外無理。理不可見。推其著者而求其故則得矣。死生終始。興滅盛衰。其故一也。
人死則其氣發揚于上。爲昭明焄蒿悽愴。鬱合鬯而灌。蕭合黍稷而奠。腥肆焰腍。以致鬼神。皆氣之感。而其相感者。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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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권 원집 상편 / 학(學)
이기(理氣)를 논함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에서 행(行)하여지니, 근본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쉬지도 않고 어그러지지도 않아,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다. 드러난 것은 천지의 조화(造化)와 육성(育成)이요 사시(四時)가 차례로 교대하는 것이며, 만물의 시작과 끝이요 인사(人事)의 성쇠(盛衰)인지라, 심은 것을 북돋고 기울어진 것을 넘어뜨리기까지 흥(興)하고 멸(滅)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다. 이것은 한 번은 가고 한 번은 오는 소장(消長)의 일정한 원칙이다. 형체(形體)가 없는 것은 기(氣)의 근본이요 형체가 있는 것은 기(氣)의 이루어진 것이다. 형체 있는 것은 때로는 생(生)하고 때로는 사(死)하지만, 형체 없는 것은 죽지 않으니, 신명(神明)의 변화가 끝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남기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는다. 이(理) 밖에 기(氣)가 없고 기 밖에 이가 없어, 이를 볼 수는 없지만 이가 드러난 것을 미루어 그 까닭을 추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나니, 죽고 사는 것, 끝남과 시작, 흥하고 멸함, 성(盛)하고 쇠(衰)함이 원리는 한가지이다.
사람이 죽으면 기(氣)가 위쪽으로 퍼져 올라가서 밝게 드러나고, 향기가 위로 올라가 신령(神靈)의 기(氣)가 사람의 정신을 숙연케 하며, 울금향(鬱金香)의 거창주(秬鬯酒)로 강신(降神)하며, 쑥을 서직(黍稷)에 합(合)하여 전(奠)드리며, 성사염임(腥肆焰腍)으로 귀신에게 드리니, 이 모두가 다 기(氣)가 감동하는 것인데, 그 감동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사람이 죽으면 기(氣)가 위쪽으로 퍼져 올라가서 밝게 드러나고, 향기가 위로 올라가 신령(神靈)의 기(氣)가 사람의 정신을 숙연케 하며, 울금향(鬱金香)의 거창주(秬鬯酒)로 강신(降神)하며, 쑥을 서직(黍稷)에 합(合)하여 전(奠)드리며, 성사염임(腥肆焰腍)으로 귀신에게 드리니, 이 모두가 다 기(氣)가 감동하는 것인데, 그 감동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 [주-D001] 사람이 …… 숙연케 하며 :
- 향(香)을 피우면 그 향취가 위로 올라가 사람을 감동시켜 송연(竦然)하게 한다고 하였다. 《禮記 祭義》
- [주-D002] 울금향(鬱金香)의 …… 전(奠)드리며 :
- 울금향초를 찧어서 나온 즙을 거창주(秬鬯酒)에 섞어서 강신(降神)하면, 향기가 아래로 연천(淵泉)에까지 닿는다 한다. 이는 음(陰)에 구하는 것이다. 또 쑥과 희생(犧牲)의 기름을 서직(黍稷)에 합해서 태우면 냄새가 옆으로 온 집 안에 퍼지니, 이는 양(陽)에 구하는 것이라 한다. 《禮記 郊特牲》
- [주-D003] 성사염임(腥肆焰腍)으로 …… 드리니 :
- 성은 제사 지낼 때 날고기를 그냥 드리는 것이며, 사는 뼈를 발라 썰어서 드리는 것이며, 염은 끓는 물에 익혀서 그 탕국물과 함께 드리는 것이며, 임은 삶아 익혀서 드리는 것이다. 《禮記 郊特牲》
ⓒ 한국고전번역원 | 은정희 (역) | 1978
조선왕조실록 전체 (8)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7년 정유 > 12월 14일 > 최종정보
태종 17년 정유(1417) 12월 14일(을미)
17-12-14[02] 예조에서 친향하는 예절의 절차를 올리다
예조(禮曹)에서 친향(親享)하는 예절의 절차를 올리었다. 처음에 변계량(卞季良)이 아뢰어 청하기를,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하는 날에 실(室)마다 잔을 올리고 재배(再拜)를 행한 뒤에 소차(小次)에 들어가서 앉아 쉬다가 음복(飮福)할 때에 이르러 위차(位次)에 나와 음복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실(室)마다 재배를 행하는 것은 가하지마는, 소차에 들어가서 앉아 쉬는 것은 미편하다. 내 몸으로서 본다면 세자가 내게 잔을 올리고 소차에 들어가고, 그 아우가 차례로 잔을 올릴 때에 세자는 아랑곳없이 물러간다면 나와 세자의 뜻이 어떠하겠는가? 고문(古文)에 상고하여 아뢰어라.”
변계량이,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에 이 예가 있었습니다. 고종이 친히 종묘에 제사할 때에 조계(阼階) 동쪽에 소차(小次)를 설치하고, 헌작이 끝나면 소차에 들어가서 아헌(亞獻)ㆍ종헌(終獻)을 기다리고, 또 실마다 관창(灌鬯)과 작헌(酌獻)을 한 뒤에 지게문[戶]밖에 나와 재배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제의(祭儀)는 이미 정한 제도가 있는데, 대신이 집례(執禮)하면 각각 소견대로 다시 법제를 세우니, 어느 때에 정하여지겠는가? 고종이 참으로 현명한 임금이지마는 위(位)에 있는 것이 30여 년인데, 이 법은 고종이 늙었을 때에 만든 것이 아닌가? 하물며 소차에 들어가는 것이 조종(祖宗)의 명령이 아니니, 어찌 이 제도에 국한할 수 있겠는가?”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임금이 오래 당하(堂下)에 서 있으면, 아헌관(亞獻官)ㆍ종헌관(終獻官)이 마음에 반드시 미안하여 헌작하는 예를 빨리 행하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성과 공경이 온전하지 못할까 두렵고, 또 조종의 신령도 반드시 전하가 오래 서 있는 데에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이 법을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였다.
“경솔히 고칠 수 없으니, 아직 그대로 두라.”
【원전】 2 집 196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주-D001] 음복(飮福) :
-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제관들이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
- [주-D002] 관창(灌鬯) :
- 제사 때 울창주(鬱鬯酒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술)를 땅에 부어 강신(降神)하던 일.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식 (역) | 1977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5년 계묘 > 6월 21일 > 최종정보
세종 5년 계묘(1423) 6월 21일(경오)
05-06-21[06] 평만경이 단목ㆍ유황 등을 바치다
평만경(平滿景)이 사람을 시켜 단목(丹木) 1천 근, 유황(硫黃) 1천 9백 근, 향(香) 37근, 동철(銅鐵) 5백 근, 명(皿) 5백 개, 검(劍) 15자루, 서각(犀角) 2개, 상산(常山) 3근, 노감석(爐甘石) 5근, 울금(鬱金) 20근, 필발(蓽撥) 20근, 진피(陳皮) 5근, 상아향합(象牙香合) 5개, 침향(沈香) 10냥쭝을 바쳤으므로, 회사(回賜)로 정포(正布) 3백 80필을 내리고,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시켜 단목 1천 근, 감초(甘草) 10근, 유황 3천 근, 부채[扇子] 10자루, 동철(銅鐵) 2백 근, 호초(胡椒) 10근, 침향(沈香) 10근, 대도(大刀) 10자루를 바쳤으므로, 회사로 정포(正布) 3백 80필을 내렸다. 원의준(源義俊)이 사람을 시켜 동철(銅鐵) 1천 근, 대도(大刀) 15자루, 진피(陳皮) 50근, 주반(朱盤) 50편(片), 소면(素麪) 2백 근, 건매(乾梅) 1천 개, 사탕 50근, 갈분(葛粉) 30근, 유황 2백 근을 바쳤으므로, 회사로 정포(正布) 3백 50필을 내렸다. 원준신(源俊信)이 사람을 시켜 동철 6백 근, 단목 1백 근, 반(盤) 50편(片), 대도(大刀) 10자루, 소면(素麪) 1백 근, 갈분(葛粉) 30근, 동와(銅鍋) 10개, 건매(乾梅) 1천 개를 바쳤으므로, 회사로 정포(正布) 1백 70필을 내렸다. 상가(常嘉)가 사람을 시켜 유황 1천 근, 개(鎧) 1냥쭝, 대도자(大刀子) 10자루, 소목(蘇木) 5백 근, 동철 1천 근, 납촉(蠟燭) 1백 자루, 기린혈(麒麟血) 5근을 바쳤으므로, 회사로 정포(正布) 3백 70필을 내렸다.
【원전】 2 집 545 면
【분류】 외교-왜(倭) / 무역(貿易)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홍진표 (역) | 1969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지리지 > 전라도 > 최종정보
세종 지리지 / 전라도
전라도
◈ 전라도(全羅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의자왕(義慈王) 19년 경신에 【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멸하고 드디어 그 땅을 합쳤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전주(全州)ㆍ무주(武州) 두 도독부(都督府)로 나누었다. 진성왕(眞聖王) 5년 임자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 에 서면 도통(西面都統)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여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 【후진(後晉) 고조(高祖) 원복(元福) 원년.】 에 친히 후백제를 쳐서 이기고, 성종(成宗) 14년 을미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에 전주(全州)ㆍ영주(瀛州)ㆍ순주(淳州)ㆍ마주(馬州) 등 고을을 강남도(江南道)로 하고,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정주(靜州)ㆍ승주(昇州)ㆍ패주(貝州)ㆍ담주(潭州)ㆍ낭주(朗州) 등 고을을 해양도(海陽道)로 하였다가, 현종(縣宗) 9년 무오 【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에 전라도로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관청을 두고 있다.
동쪽은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에 이르고, 서ㆍ남쪽은 바다에 닿으며, 북쪽은 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에 이르는데, 동ㆍ서가 2백 33리요, 남ㆍ북이 4백 5리이었다.
관할은 유수(留守)가 1이요, 목(牧)이 2이요, 도호부(都護府)가 4이요, 군(郡)이 12이요, 현(縣)이 39이며, 계수관(界首官)이 4이니,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남원(南原)ㆍ장흥(長興)이다.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 【일명 지리(地理), 또는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 한다.】 인데 남원(南原)에 있으니, 그 동쪽은 진주(晉州)ㆍ곤남(昆南)이요, 북쪽은 함양(咸陽)ㆍ산음(山陰)이요, 서쪽은 구례(求禮)요, 남쪽은 광양(光陽)이다. 웅장하게 높이 하늘에 우뚝 치솟아, 산허리에 간혹 구름이 머물고,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그 위는 맑게 개어 평상시와 같으며, 가을철 서늘하면 매떼[鷹]가 모여들므로 잡아다가 나라에 바친다. 속설에 전하기를, “태을(太乙)이 그 위에 살고, 여러 신선(神仙)이 모이며, 여러 용(龍)이 살고 있다.” 고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소위 “방장은 삼한 밖이라.[方文三韓外]” 한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 이르기를,
“방장(方丈)은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 한 것은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에서 남악(南嶽), 중사(中祀)로 하였고, 고려와 본조(本朝)에서도 모두 그대로 따라 중사(中祀)로 하여서, 봄ㆍ가을에 향ㆍ축(香祝)을 내리어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는데, 제례(祭例)는 지리산과 같다. 무등산(無等山)은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 한다.】무진(武珍)에 있는데, 풍후하고 높고 커서, 신라에서는 소사(小祀)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나라 제사[國祭]를 지냈고, 본조(本朝)에서는 주(州)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천관산(天冠山)은 장흥(長興)에 있는데, 높고 험하고 풍후하여, 가끔 서기(瑞氣)가 흰 연기같이 하늘을 찔러서, 사람들이 자못 이상히 여기며, 제례는 무등산과 같다. 월출산(月出山)은 【일명 월내악(月柰岳)이라 한다.】 영암(靈岩)에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층층이 치솟아 섰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두 길이 넘으며, 곁에 한 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며, 그 구멍을 따라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하고,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어서 물이 담기기를 동이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九井峯)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전하기를,
“아홉 용[九龍]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홀로 층바위 위에 서서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서쪽으로는 산골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밑없는 구렁에 임하였는데, 한 사람이 흔들면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이 같은 바위가 또 둘이 있었다. 상산(裳山)은 무주(茂朱)에 있는데, 사면(四面)이 벽처럼 서서 층층히 끊어져 사람의 치마처럼 되었으므로, 상산이라 한다. 옛사람이 험한 것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는데, 겨우 두 길이 있어서 올라 다니며, 그 가운데는 평탄하고 넓으며, 샘물이 사방에서 나와 합하여 큰 내가 되어 동쪽 구렁으로 흘러 들어간다. 변산(邊山)은 【일명 영주산(瀛洲山)이라 한다.】 부안(扶安)에 있는데, 여러 겹으로 높고 크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고 으늑하며, 전함(戰艦)의 재목이 많이 이곳에서 난다. 마이산(馬耳山)은 진안(鎭安)에 있는데,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동서로 마주 서서 모양이 깎아 세운 듯하며,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꼭대기에 나무가 울창하며, 속설에 전하기를, “동쪽산 꼭대기에 작은 못이 있다.” 하나, 바라만 보일 뿐이요, 올라갈 수는 없다. 우리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임금이 산 아래에 행차(行次)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대천(大川)은 남포진(南浦津)이 나주(羅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담양(潭陽) 추월산(秋月山)의 물이 창평현(昌平縣)을 지나 무진(茂珍)의 북쪽으로 들어가 창평현(昌平縣)의 남쪽 물과 합하고, 또 무진성(茂珍城) 서쪽 물과 어울려 서쪽으로 흐르고, 그 하나는 장성(長城) 위령(葦嶺)의 물이 진원현(珍原縣) 서쪽과 나주 북쪽 경계를 지나 옛 내상성(內廂城) 남쪽을 거쳐서 생압진(生鴨津)에 이르러 무진 북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나주의 동쪽을 지나고, 그 하나는 능성(綾城) 쌍봉(雙峯)의 물이 남평현(南平縣) 북쪽을 지나 또 나주의 동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남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흘러서 남포진(南浦津)이 되어 나룻배로 사람을 건너게 되고, 무안현(務安縣) 동쪽에 이르러 대굴포(大堀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흘러서 영암군(靈岩郡) 운적산(雲積山)의 기슭을 지나 목포(木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하도(下道)의 조운(漕運)이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잔수진(潺水津)은 구례(求禮)에 있는데, 그 수원이 2가 있으니, 그 하나는 진안(鎭安) 중대산(中臺山)의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임실(任實)ㆍ순창(淳昌)을 지나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남원 남쪽 경계에 이르러 순자진(鶉子津)이 되며, 그 하나는 지리산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남원을 지나 순자진으로 들어가서, 그 하류가 압록진(鴨綠津)이 되며, 또 보성 정자천(寶城亭子川)의 물이 복성(福城) 옛 현(縣)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낙수진(洛水津)이 되고, 동북쪽으로 흘러 옛 곡성(谷城)을 지나 압록진으로 들어가서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 남쪽과 순천(順天) 북쪽 경계에 이르러 잔수진이 되고,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晉州)의 옛 임내(任內) 화개현(花開縣)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光陽縣)의 남쪽을 지나 섬진(蟾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신창진(新倉津)은 전주(全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부(府)의 남쪽 여현(礪峴)의 물이 성(城) 남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흘러 부(府)의 서남쪽 모산(母山) 여러 골짜기의 물을 합하고, 삼례역(蔘禮驛) 남쪽에 이르러 또 고산(高山)과 운제(雲梯)의 물과 어울려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回浦)가 되고, 비간장진(飛艮藏津)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이성(利城)의 옛 성(城) 북쪽에 이르러 신창진(新倉津)이 되는데, 나룻배가 있으며, 서쪽으로 흘러 만경(萬頃)과 임피(臨陂)를 지나 옥구(沃溝)에 이르러 고사포(古沙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진(東津)은 부안현(扶安縣)에 있는데, 태인(泰仁)과 정읍(井邑) 두 현(縣)의 물이 김제(金堤) 벽골(碧骨)의 물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興德) 동쪽에 이르러 고부(古阜) 눌제(訥堤)의 물과 어울려 동진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므로 다리를 놓아 행인을 다니게 하고, 만경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호수[戶]는 2만 4천 73호요, 인구[口]는 9만 4천 2백 48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1백 67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천 4백 24명이요, 기선군(騎船軍)이 1만 1천 7백 93명이다.
간전(墾田)이 27만 7천 5백 88결(結)이다. 【논이 10분의 4이다.】
그 부세(賦稅)는 볍쌀 【찹쌀ㆍ멥쌀.】 ㆍ콩 【누렁콩ㆍ팥ㆍ녹두.】 ㆍ밀[小麥]ㆍ참깨[芝麻]ㆍ차조기씨[蘇子]ㆍ모시[苧布]요, 그 공물(貢物)은 꿀ㆍ밀[黃蠟]ㆍ범가죽[虎皮]ㆍ표범가죽[豹皮]ㆍ곰가죽ㆍ쇠가죽ㆍ말가죽ㆍ이긴 사슴가죽[熟鹿皮]ㆍ이긴 노루가죽[熟獐皮]ㆍ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잘[山獺皮]ㆍ수달가죽[水獺皮]ㆍ활줄[弓絃]ㆍ표범꼬리[豹尾]ㆍ여우꼬리[狐尾]ㆍ족제비털[黃毛]ㆍ사슴ㆍ돼지ㆍ토끼ㆍ산돼지ㆍ말린 사슴ㆍ말린 노루ㆍ말린 돼지ㆍ정향(丁香)ㆍ포(脯)ㆍ사슴꼬리[鹿尾]ㆍ돼지털ㆍ쇠뿔ㆍ녹각(鹿角)ㆍ갖풀[阿膠]ㆍ힘줄[筋]ㆍ잡깃[雜羽]ㆍ가뢰[斑猫]ㆍ대모(玳瑁)ㆍ고니[天鵝]ㆍ상어ㆍ말린 숭어ㆍ전복ㆍ생복[生鮑]ㆍ말린 홍합ㆍ낙지ㆍ굴ㆍ감합(甘蛤)ㆍ대합조개ㆍ은어ㆍ붉은 큰새우ㆍ인포(引鮑)ㆍ조포(條鮑)ㆍ오징어ㆍ옥둥어[玉頭魚]ㆍ다시마ㆍ부레ㆍ칠(漆)ㆍ겨자ㆍ황밤[黃栗]ㆍ대추ㆍ곶감ㆍ연감[紅柿子]ㆍ모과ㆍ석류ㆍ배[梨]ㆍ개암ㆍ가시연밥[芡仁]ㆍ유자(柚子)ㆍ감자나무열매ㆍ비자[榧子]ㆍ유감(乳柑)ㆍ동정귤(洞庭橘)ㆍ금귤(金橘)ㆍ푸른귤[靑橘]ㆍ산귤(山橘)ㆍ마름[菱仁]ㆍ분곽(粉藿)ㆍ상곽(常藿)ㆍ올멱[早藿]ㆍ해모(海毛)ㆍ우무ㆍ해각(海角)ㆍ황각(黃角)ㆍ매산이(莓山伊)ㆍ김[海衣]ㆍ감태(甘笞)ㆍ오해자(烏海子)ㆍ송이ㆍ석이ㆍ느타리ㆍ표고ㆍ새앙ㆍ고사리ㆍ지초ㆍ회화나무꽃ㆍ치자ㆍ작설차[雀舌茶]ㆍ송화(松花)ㆍ소나무그을음[松煙]ㆍ송진[松脂]ㆍ목화ㆍ모시ㆍ삼[麻]ㆍ삼노ㆍ각색 종이 【표전지(表箋紙)ㆍ자문지(咨文紙)ㆍ부본단자지(副本單子紙)ㆍ주본지(奏本紙)ㆍ피봉지(皮封紙)ㆍ서계지(書契紙)ㆍ축문지(祝文紙)ㆍ표지(表紙)ㆍ도련지(擣鍊紙)ㆍ중폭지(中幅紙)ㆍ상표지(常表紙)ㆍ갑의지(甲衣紙)ㆍ안지(眼紙)ㆍ세화지(歲畫紙)ㆍ백주지(白奏紙)ㆍ화약지(火藥紙)ㆍ장지(狀紙)ㆍ상주지(常奏紙)ㆍ유둔지(油芚紙)ㆍ유둔(油芚).】 ㆍ자리[席] 【별무늬돗자리[別紋踏席]ㆍ보통무늬돗자리[常紋踏席]ㆍ흰무늬돗자리[白紋席]ㆍ왕골 자리[草席].】 ㆍ대껍질방석[竹皮方席]ㆍ가는 대[篠]ㆍ오죽(烏竹)ㆍ화살대[箭竹]ㆍ바닷대[海竹]ㆍ등상자[土藤箱子]ㆍ대껍질[竹皮]ㆍ말린 죽순[乾筍]ㆍ자기(磁器)ㆍ나무그릇[木器]ㆍ버들고리[柳器]이다.약재(藥材)는 우황(牛黃)ㆍ쇠쓸개[牛膽]ㆍ범의 뼈[虎骨]ㆍ고슴도치가죽[蝟皮]ㆍ곰쓸개[熊膽]ㆍ녹용ㆍ녹각상(鹿角霜)ㆍ토끼머리[兎頭]ㆍ녹각(鹿角)ㆍ담비쓸개[獺膽]ㆍ산양이뿔[羚羊角]ㆍ도아조기름[島阿鳥油]ㆍ두꺼비[蟾蛛]ㆍ뽕나무벌레[桑螵蛸]ㆍ자라껍데기[鼈甲]ㆍ오징어뼈[烏魚骨]ㆍ말린 잉어[乾鯉]ㆍ잉어쓸개[鯉膽]ㆍ지네[蜈蚣]ㆍ등에[蝱蟲]ㆍ매미허물[蟬脫皮]ㆍ거북껍데기[龜甲]ㆍ결명초[石決明]ㆍ인삼(人蔘)ㆍ영릉향(零陵香)ㆍ곽향(藿香)ㆍ박상(舶上)ㆍ회향(茴香)ㆍ가시연밥[鷄頭實]ㆍ연꽃[蓮花蘂]ㆍ겨우살이꽃[金銀花]ㆍ궁궁이[芎藭]ㆍ나팔꽃씨ㆍ으름덩굴[木通]ㆍ호라비좆뿌리[天門冬]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패랭이꽃이삭[瞿麥穗]ㆍ수자해좆뿌리[天麻]ㆍ택사(澤瀉)ㆍ새삼씨[免綠子]ㆍ탱알[紫莞]ㆍ탱알뿌리ㆍ연밥[蓮子]ㆍ회초미뿌리[貫衆]ㆍ파고지(破古紙)ㆍ삽주뿌리[蒼朮]ㆍ쪽[藍]ㆍ칠[漆]ㆍ감제뿌리[虎杖根]ㆍ당귀(當歸)ㆍ하국[旋覆花]ㆍ하눌타리[括婁]ㆍ작약(芍藥)ㆍ끼무릇뿌리[半夏]ㆍ부들꽃[蒲黃]ㆍ끼절가리뿌리[升麻]ㆍ도라지[桔梗]ㆍ꽃창포[馬藺花]ㆍ족두리풀뿌리[細辛]ㆍ칡꽃[葛花]ㆍ버들옷[大戟]ㆍ검화뿌리껍질[白蘇皮]ㆍ두여머조자기[天南星]ㆍ쇠무릎지기[牛膝]ㆍ범부채[射干]ㆍ쓴너삼뿌리[苦蔘]ㆍ구리때뿌리[白芷]ㆍ사양채뿌리[前胡]ㆍ바곳[草烏頭]ㆍ계소(鷄蘇)ㆍ병풍나물뿌리[防風]ㆍ숭나물[蒿本]ㆍ자리공뿌리[商陸]ㆍ다시마[昆布]ㆍ흰띠[芧香]ㆍ겨우살이덩굴[忍冬草]ㆍ아기풀[遠志]ㆍ갈뿌리[蘆根]ㆍ박새[莒蘆]ㆍ암눈바앗씨[蔚子]ㆍ진득찰[稀簽]ㆍ꽈리[酸醬]ㆍ검산풀뿌리[續斷]ㆍ할미씨깨비[白頭翁]ㆍ향부자(香附子)ㆍ심황[鬱金]ㆍ수자해좆씨[赤前子]ㆍ난향[蘭香]ㆍ지치[紫草]ㆍ현삼(玄蔘)ㆍ멧미나리[柴胡]ㆍ매자기뿌리[京三稜]ㆍ흰바곳[白附子]ㆍ등대풀싹[澤漆]ㆍ가위톱[白歛]ㆍ대왕풀[白芨]ㆍ오미자(五味子)ㆍ창이(蒼耳)ㆍ외나물뿌리[地楡]ㆍ창포(菖蒲)ㆍ자주연꽃[紫荷蕖]ㆍ개구리밥[水萍]ㆍ감국화(甘菊花)ㆍ더위지기[茵陳]ㆍ절국대[漏蘆]ㆍ수뤼나물[葳靈仙]ㆍ영생이[薄荷]ㆍ속수자[續隨子]ㆍ꼭두서니뿌리[茜草根]ㆍ두루미냉이씨[葶子]ㆍ단너삼[黃耆]ㆍ순비기나무열매[蔓荊子]ㆍ쥐방울[馬兜苓]ㆍ게로기뿌리[薺苨]ㆍ항가새[大薊草]ㆍ조방가새[小薊草]ㆍ사하(蓑荷)ㆍ파초ㆍ산해박[徐長卿]ㆍ익관초(益貫草)ㆍ초결명씨[決明子]ㆍ백작약(白芍藥)ㆍ모시잎[苧葉]ㆍ석골풀[石]ㆍ골풀[草]ㆍ말오줌나무[蒴藋]ㆍ마뿌리[山藥]ㆍ두룹뿌리[獨活]ㆍ속수자[蜀有子]ㆍ소태나무열매[川練子]ㆍ석류껍질[石榴皮]ㆍ흰매화[白梅]ㆍ매화열매[烏梅]ㆍ탱자껍데기[枳殼]ㆍ괴좆나무열매[枸杞子]ㆍ흰매화열매[鹽梅實]ㆍ복령(茯苓)ㆍ모란껍데기[牧丹皮]ㆍ닥나무열매[楮實]ㆍ솜대속껍질[竹茹]ㆍ괴좆나무뿌리껍질[地骨皮]ㆍ죽력(竹瀝)ㆍ황경나무껍데기[黃蘗皮]ㆍ조피나무열매[川椒]ㆍ백복령(白茯苓)ㆍ호도(胡桃)ㆍ오갈피[五加皮]ㆍ솜대잎[淡竹葉]ㆍ철쭉꽃[躑躅花]ㆍ쥐엄나무열매[皀莢]ㆍ쥐엄나무가시[皀角刺]ㆍ산이스랏씨[郁李仁]ㆍ말린 모과[乾木瓜]ㆍ살구씨[杏仁]ㆍ오배자(五倍子)ㆍ복숭아씨[桃仁]ㆍ삿갓나물[蚤休]ㆍ측백나무잎[側栢葉]ㆍ아가위[棠]ㆍ배[梨]ㆍ잣[松子仁]ㆍ묵은 귤껍질[陳皮]ㆍ엄나무껍질[海桐皮]ㆍ푸른 귤껍질[靑皮]ㆍ후박(厚朴)ㆍ두충(杜沖)ㆍ솔씨[松實]ㆍ팔각(八角)ㆍ복신(茯神)이다.
심는 약[種藥]은 생지황(生地黃)ㆍ장군풀[大黃]ㆍ건강(乾薑)ㆍ백변두(白萹豆)ㆍ검은 변두[黑萹豆]ㆍ우엉[惡實]ㆍ심황(深黃)ㆍ소야기[香薷]이었다.
조운창[漕倉]이 2이니, 영산창(榮山倉)이 나주(羅州) 목포(木浦)에 있고, 【나주ㆍ순천(順天)ㆍ장흥(長興)ㆍ담양(潭陽)ㆍ낙안(樂安)ㆍ보성(寶城)ㆍ해진(海珍)ㆍ영암(靈岩)ㆍ영광(靈光)ㆍ무진(茂珍)ㆍ강진(康津)ㆍ고흥(高興)ㆍ광양(光陽)ㆍ능성(綾城)ㆍ남평(南平)ㆍ화순(和順)ㆍ동복(同福)ㆍ곡성(谷城)ㆍ옥과(玉菓)ㆍ창평(昌平)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ㆍ흥덕(興德)ㆍ무장(茂長)ㆍ함평(咸平)ㆍ무안(務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덕성창(德成倉)이 함열현(咸悅縣) 서피포(西皮浦)에 있다. 【함열ㆍ전주(全州)ㆍ남원(南原)ㆍ익산(益山)ㆍ고부(古阜)ㆍ김제(金堤)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순창(淳昌)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ㆍ만경(萬頃)ㆍ부안(扶安)ㆍ정읍(井邑)ㆍ금구(金溝)ㆍ태인(泰仁)ㆍ임실(任實)ㆍ구례(求禮)ㆍ운봉(雲峯)ㆍ장수(長水)ㆍ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무주(茂朱)ㆍ고산(高山)ㆍ여산(礪山)ㆍ용안(龍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병마 도절제사 영(兵馬都節制使營)이 강진현(康津縣)에 있고, 【정군(正軍)이 4백 98명, 수성군(守城軍)이 51명, 조역군(助役軍)이 1백 63명, 장인(匠人)이 1백 41명이다.】 진(鎭)이 4이니, 옥구(沃溝)ㆍ부안(扶安)ㆍ무장(茂長)ㆍ조양(兆陽)이요, 【정군이 각각 3백명이다.】 수군 처치사 영(水軍處置使營)이 무안현(務安縣) 대굴포(大堀浦)에 있고, 【대선(大船) 8척, 중선(中船) 16척, 군사 1천 8백 95명, 뱃사공[梢工] 21명을 거느린다.】 좌도 도만호 선박처(左道都萬戶船泊處)가 보성군(寶城郡) 동쪽 여도량(呂島梁)에 있는데, 【중선 6척, 맹선(孟船) 12척과 군사 1천 12명과 뱃사공 19명을 거느린다.】 관내의 만호(萬戶)가 8이니, 내례(內禮)가 순천부(順天府) 남쪽 며포(旀浦)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別船) 6척과 군사 7백 66명과 뱃사공 6명을 거느린다.】 돌산(突山)이 순천부 남쪽 용문포(龍門浦)에 있으며, 【중선 8척과 군사 5백 1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축두(築頭)가 고흥현(高興縣) 남쪽 고흥포(高興浦)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5백 1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녹도(鹿島)가 장흥부(長興府) 북쪽 녹도량(鹿島梁)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8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회령포(會寧浦)가 장흥부 남쪽 주포(周浦)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7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마도(馬島)가 강진현(康津縣) 남쪽 원포(垣浦)에 있으며, 【중선 8척과 군사 5백 1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달량(達梁)이 영암군(靈岩郡) 남쪽에 있으며, 【중선 7척, 맹선(孟船) 2척과 군사 5백 1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어란(於蘭)이 해진군(海珍郡) 남쪽 삼촌포(三寸浦)에 있다. 【중선 4척과 군사 4백 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우도 도만호 선박처(右道都萬戶船泊處)는 함평현(咸平縣) 서쪽 원관(垣串)에 있는데, 【중선 8척, 별선 10척과 군사 1천 55명과 뱃사공 9명을 거느린다.】 관내 만호(萬戶)가 5이니, 목포(木浦)가 무안현(務安縣) 남쪽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다경포(多慶浦)가 무안현 서쪽 와포(瓦浦)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7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법성포(法聖浦)가 영광군(靈光郡) 북쪽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금모포(黔毛浦)가 부안현(扶安縣) 남쪽 웅연(熊淵)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55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군산(群山)이 옥구현(沃溝縣) 북쪽 진포(鎭浦)에 있다.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61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감목관(監牧官)이 3인이요, 【도(道)안에 1인이요, 제주(濟州)에 2인이다.】 역승(驛丞)이 7인이니, 창활도(昌活道)의 관할 역(驛)이 11이요, 【잔수(潺水)ㆍ갈담(葛潭)ㆍ오수(獒樹)ㆍ은령(銀嶺)ㆍ통도(通道)ㆍ인월(引月)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지신(知申).】 앵곡도(鶯谷道)의 관할 역이 5이요, 【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부흥(扶興)ㆍ내재(內才)ㆍ영원(瀛原).】 제원도(濟原道)의 관할 역이 2이요, 【달계(達溪)ㆍ소천(所川).】 벽사도(碧沙道)의 관할역이 9이요, 【파청(波淸)ㆍ진원(鎭原)ㆍ통로(通路)ㆍ낙신(樂新)ㆍ영보(永保)ㆍ별진(別珍)ㆍ녹산(祿山)ㆍ양강(陽江)ㆍ가신(可申).】 삼례도(參禮道)의 관할 역이 6이요, 【반석(半石)ㆍ양재(良才)ㆍ오원(烏原)ㆍ재곡(才谷)ㆍ소안(蘇安)ㆍ옥포(玉包).】 청엄도(靑嚴道)의 관할 역이 9이요, 【단엄(丹嚴)ㆍ선엄(仙嚴)ㆍ신안(新安)ㆍ녹사(祿沙)ㆍ청송(靑松)ㆍ영신(永申)ㆍ청연(淸淵)ㆍ경신(慶新)ㆍ가리(街里).】 경양도(景陽道)의 관할 역이 8이다. 【덕기(德基)ㆍ가림(加林)ㆍ인물(人物)ㆍ창신(昌新)ㆍ대부(大富)ㆍ금부(黔富)ㆍ오림(烏林)ㆍ광리(廣里).】
【원전】 5 집 654 면
- [주-D001] 영주(瀛州) :
- 고부.
- [주-D002] 순주(淳州) :
- 순창.
- [주-D003] 마주(馬州) :
- 옥구.
- [주-D004] 정주(靜州) :
- 영광.
- [주-D005] 승주(昇州) :
- 순천.
- [주-D006] 패주(貝州) :
- 보성.
- [주-D007] 담주(潭州) :
- 담양.
- [주-D008] 낭주(朗州) :
- 영암.
- [주-D009] 곤남(昆南) :
- 곤양.
- [주-D010] 산음(山陰) :
- 산청.
- [주-D011] 태을(太乙) :
- 옥황상제.
- [주-D012] 무진(武珍) :
- 광주.
- [주-D013] 남포진(南浦津) :
- 영산강.
- [주-D014] 무진(茂珍) :
- 광주.
- [주-D015] 진원현(珍原縣) :
- 장성.
- [주-D016] 능성(綾城) :
- 능주.
- [주-D017] 잔수진(潺水津) :
- 섬진강.
- [주-D018] 보성 정자천(寶城亭子川) :
- 보성강.
- [주-D019] 복성(福城) :
- 보성 복내면.
- [주-D020] 신창진(新倉津) :
- 만경강.
- [주-D021] 이성(利城) :
- 전주 땅.
- [주-D022] 동진(東津) :
- 동진강.
- [주-D023] 조양(兆陽) :
- 고창.
- [주-D024] 해진군(海珍郡) :
-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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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지리지 / 전라도
남원 도호부
⊙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는데, 후한(後漢) 건안(建安) 때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에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신라에서 백제를 병합하고 문무왕(文武王) 2년 계해 【당나라 용삭(龍朔) 3년.】 에,당(唐)나라 고종(高宗)이 명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고,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 【당나라 측천후(則天后) 수공(垂拱) 원년.】 에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이 남원 소경(南原小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 【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 에 남원부(南原府)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3년.】 에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가 뒤에 남원군으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 9년 경자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0년.】 에 남원부(南原府)로 승격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 【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거령(居寧)이요,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청웅현(靑雄縣)으로 고쳐서 임실(任實)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에서 거령현(居寧縣)으로 고쳤다.】 향(鄕)이 10이니, 보유(寶有)ㆍ거리(居利)ㆍ덕성(德城)ㆍ백파(白波)ㆍ수도(守道)ㆍ아인(阿仁)ㆍ도지(道知)ㆍ경도(京徒)ㆍ남안(南安)ㆍ미아(未阿)요, 소(所)가 10이니, 소화척(所火尺)ㆍ신내하(申內河)ㆍ두가(豆加)ㆍ금성(金城)ㆍ용봉(龍峯)ㆍ웅음(熊陰)ㆍ기어천(岐於淺)ㆍ치등보(置等保)ㆍ양천(陽川)ㆍ흥복(興福)이요, 부곡(部曲)이 4이니, 원천(原川)ㆍ금안(金岸)ㆍ산동(山洞)ㆍ고정(古丁)이다.
진산(鎭山)은 교룡(蛟龍)이요, 【부의 서북쪽에 있다.】 명산(名山)은 지리(地異)이다. 【부의 동쪽에 있다.】 순자진(鶉子津) 【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그 남북 언덕에 층루(層樓)가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운봉(雲峯)에 이르기 22리, 서쪽으로 순창(淳昌)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구례(求禮)에 이르기 40리, 북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1리이다.
호수가 1천 3백 호요, 인구가 4천 9백 1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백 17명이요, 진군이 86명이요, 순천 수호군(順天守護軍)이 63명이요, 선군이 5백 67명이다.
토성(土姓)이 11이니, 양(梁)ㆍ정(鄭)ㆍ진(晉) 【아전[人吏]의 성이 되었다.】 ㆍ윤(尹)ㆍ양(楊)ㆍ견(甄)ㆍ황보(皇甫)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황(黃)이요, 【백성(百姓)의 성(姓)이다.】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ㆍ임(林)ㆍ송(宋)이다. 【모두 향리(鄕吏)이다.】 거령(居寧)의 성이 5이니, 백(白)ㆍ장(張)ㆍ한(韓)ㆍ이(李)ㆍ황(黃)이다.
땅이 10분의 2가 기름지며, 풍속이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1만 2천 5백 8결이요,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목화ㆍ닥나무ㆍ감ㆍ모과ㆍ칠(漆)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ㆍ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족제비털[黃毛]ㆍ칠ㆍ석류ㆍ대추ㆍ감ㆍ배[梨]ㆍ지초ㆍ표전지(表箋紙)ㆍ자리요, 약재(藥材)가 새앙ㆍ쥐엄나무열매[皀莢]ㆍ녹각상(鹿角霜)ㆍ장군풀[大黃]ㆍ복령(茯苓)ㆍ곰쓸개[熊膽]ㆍ매화열매[梅實]ㆍ당귀(當歸)ㆍ밀[黃蠟]ㆍ연밥송이[蓮房]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패랭이꽃이삭[瞿麥穗]ㆍ모란뿌리껍질[牧丹皮]ㆍ심황(深黃)ㆍ인삼(人蔘)이다. 토산(土産)은 은어[銀口魚]다. 자기소가 1이요, 【부의 북쪽 아산리(阿山里)에 있는데, 중품이다.】 도기소가 2이다. 【하나는 부의 서쪽 초랑리(草狼里)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은령리(銀嶺里)에 있다.】
교룡산 석성(蛟龍山石城) 【서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25보이며, 성안에 샘이 6이 있고, 또 작은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군창이 있다.】 역(驛)이 4이니, 통도(通道)ㆍ은령(銀嶺)ㆍ오수(獒樹)ㆍ창활(昌活)이다. 만복사(萬福寺) 【부의 서남쪽에 있다. 그 동쪽에 오층전(五層殿)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二層殿)이 있으며, 전각 안에 철불(鐵佛)이 있는데, 길이 35척, 무게 1만 3천 근이며, 그 전각의 제도가 이상하다.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모른다.】
월경(越境)은 옥과현(玉果縣)의 동성평(東省坪)의 땅이 큰 내를 건너서 부의 서쪽에 들어와 있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1이니, 순창(淳昌)이요, 현(縣)이 9이니, 용담(龍潭)ㆍ구례(求禮)ㆍ임실(任實)ㆍ운봉(雲峯)ㆍ장수(長水)ㆍ무주(茂朱)ㆍ진안(鎭安)ㆍ곡성(谷城)ㆍ광양(光陽)이다.
【원전】 5 집 661 면
순창군
◎ 순창군(淳昌郡)
본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이었는데, 신라에서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순창현으로 고쳐서 남원(南原)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명종(明宗) 5년 을미 【송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2년.】 에 새로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숙왕(忠肅王) 원년 갑인 【원나라 세조(世祖) 연우(延祐) 원년.】 에 본토 사람 승(僧)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옥천(玉川), 또는 오산(烏山)이라 한다. 옛 속현(屬縣)이 2이니 복흥(福興)과 적성(赤城)이다. 【본래 백제의 역평현(礫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적성현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남원부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뒤에 본군에 내속(來屬)시켰다.】 소(所)가 5이니, 치등(置等)ㆍ유등촌(柳等村)ㆍ감물토(甘勿吐)ㆍ잉좌(芿佐)ㆍ고도암(古道巖)ㆍ궁진(弓津)이다. 【군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남원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담양(潭陽)에 이르기 13리, 남쪽으로 옥과(玉果)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18리이다.
호수가 3백 17호요, 인구가 1천 9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36명이요, 진군이 35명이요, 선군이 1백 99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설(薛)ㆍ염(廉)ㆍ임(林)ㆍ조(趙)ㆍ옹(邕)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복흥(福興)의 성이 2이니, 임(林)ㆍ조(趙) 【아전[人吏]의 성(姓).】 이요, 망성(亡姓)이 5이니, 예(芮)ㆍ호(扈) 【아전[人吏]의 성(姓).】 ㆍ이(李)ㆍ염(廉)ㆍ경(景) 【백성의 성(姓).】 이요, 적성(赤城)의 성이 5이니 송(宋)ㆍ이(李)ㆍ정(程)ㆍ황(黃)ㆍ현(玄)이요, 유등촌(柳等村)의 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丁)ㆍ송(宋)이다.
땅이 많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5천 7백 24결이요, 【논이 5분의 2가 못된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목화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ㆍ칠(漆)ㆍ꿀ㆍ밀[黃蠟]ㆍ대추ㆍ감ㆍ배ㆍ석류ㆍ차[茶]ㆍ자리ㆍ모시ㆍ여우가죽ㆍ잘[山獺皮]이요, 약재(藥材)는 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호라비좆뿌리[天門冬]ㆍ건강(乾薑)ㆍ복령(茯苓)이요, 토산(土産)은 심황(深黃)ㆍ왕대이다. 자기소가 1이요, 【군의 북쪽 18리 심화곡(深火谷)에 있다.】 도기소가 1이다. 【군의 동쪽 19리 취암산리(鷲巖山里)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대모산 석성(大母山石城) 【둘레가 2백 90보이며, 안에 작은 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이 있다.】 역(驛)이 1이니, 창신(昌新)이다.
월경(越境)은 담양(潭陽) 동촌(東村) 저동(猪洞)이 군의 남쪽 지경 목과동리(木菓洞里)에 들어와 있고, 임실현 임내(任內) 구고현(九皐縣) 남촌(南村) 장산리(長山里)가 큰 내를 건너서 군의 북쪽 노동리(蘆洞里)에 들어왔다.
【원전】 5 집 662 면
용담현
◎ 용담현(龍潭縣)
영(令) 1인.
본래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청거현(淸渠縣)으로 고쳐서 진례군(進禮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충선왕(忠宣王) 5년 계축 【원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 황경(皇慶) 2년.】 에 용담 현령으로 고쳤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옥천(玉川)이라고 한다. 옛 속향(屬鄕)이 1이니, 동향(銅鄕)이다.
마산담(馬山潭) 【현의 동쪽 곧 웅진분소(熊津濆所)에 있는데, 용왕신(龍王神)이 있다. 봄ㆍ가을에 그 고을에서 제사를 지낸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ㆍ북쪽이 금산(錦山)에 이르는데, 동쪽이 13리, 북쪽이 17리요, 서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진안(鎭安)에 이르기 11리이다.
호수가 86호요, 인구가 2백 74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명이요, 진군이 12명이요, 선군이 59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고(高)ㆍ문(文)ㆍ임(林)ㆍ염(廉)ㆍ가(賈)ㆍ임(任)이요, 동향(銅鄕)의 성이 1이니, 가(賈)이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이 1천 8백 51결이요, 【논이 9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닥나무ㆍ왕골이요, 토산(土産)는 송이이다. 토공(土貢)은 삵괭이가죽ㆍ자리ㆍ족제비털ㆍ지초ㆍ대추ㆍ석이ㆍ배[梨]ㆍ꿀ㆍ밀[黃蠟]ㆍ칠(漆)이요, 약재(藥材)가 백복령(白茯苓)ㆍ녹각상(鹿角霜)ㆍ바디나물뿌리[前胡]ㆍ복신(茯神)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산양이뿔[羚羊角]ㆍ흰바곳[白附子]이다.
역(驛)이 1이니, 달계(達溪)이다.
월경(越境)은 진안(鎭安) 주호며(走乎旀)의 땅이 현의 남쪽에 들어와 있고, 금산(錦山)의 소리(所理)ㆍ대곡(大谷) 등의 땅이 현의 동쪽에 들어와 있다.
【원전】 5 집 662 면
구례현
◎ 구례현(求禮縣)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구례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를 삼았다가, 인종(仁宗) 21년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13년.】 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봉성(鳳城)이다. 옛 속소(屬所)가 2이니, 남전(南田)ㆍ방광(放光)이요, 부곡(部曲)이 2이니, 사등촌(沙等村) 【혹은 사도(沙圖)라고 한다.】 ㆍ유곡(楡谷)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진주(晉州)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순천(順天)에 이르기 9리, 서ㆍ북쪽으로 남원(南原)에 이르는데, 서쪽이 39리, 북쪽이 10리이다.
호수가 1백 37호요, 인구가 6백 7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6명이요, 순천 수호군(順天守護軍)이 12명이요, 선군이 1백 15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이요, 【어떤 본에는 전(全)이 없고 진(陳)씨 성이 있다.】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양(梁)이요, 속성(續姓)이 2이니 박(朴) 【온 곳을 모른다.】 ㆍ황(黃) 【의창현(義昌縣)에서 왔다.】 이다. 【모두 향리이다.】 사등촌(沙等村)의 성이 1이니 임(任)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정(鄭) 【향리(鄕吏).】 이요, 남전(南田)의 망성(亡姓)이 1이니, 임(林)이요, 방광(放光)의 망성(亡姓)이 1이니, 유(劉)이다.
땅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1천 7백 35결이요, 【논이 조금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목화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족제비털[黃毛]ㆍ칠ㆍ대추ㆍ꿀ㆍ밀[黃蠟]ㆍ표고ㆍ석이ㆍ감ㆍ석류ㆍ배[梨]ㆍ심황(深黃)ㆍ가뢰[班猫]ㆍ작설차ㆍ호도[唐楸子]요, 약재(藥材)는 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요, 토산(土産)은 왕대ㆍ은어이다.
역(驛)이 1이니, 잔수(潺水)요, 요해(要害)가 2이니, 잔수진(潺水津)ㆍ미초율현(未草栗峴)이다. 【모두 구례(求禮)에서 남쪽으로 순천(順天)으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월경(越境)은 경상도 진주(晉州) 임내(任內)의 화개(花開)의 땅이 곤남(昆南)ㆍ하동(河東)ㆍ악양(岳陽)으로 1백 50여 리를 넘어서 현의 동쪽에 들어와 있다.
【원전】 5 집 662 면
임실현
◎ 임실현(任實縣)
본래 백제의 임실군이었는데, 신라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려 때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가 되었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 【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8년.】 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 계사에 감무를 고쳐서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구고(九皐)는 본래 백제의 돌평현(堗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구고현으로 고쳐서 순창군(淳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남원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본조 태조(太祖) 3년 갑술 【명나라 홍무 27년.】 에 이르러 그 부근이라 하여 내속(來屬)시켰다. 지소(紙所)가 1이니, 양등량(楊等良)이요, 부곡(部曲)이 1이니, 취인(醉仁)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진안(鎭安)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순창(淳昌)에 이르기 39리, 남쪽으로 남원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전주(全州)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1백 38호요, 인구가 8백 3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0명이요, 진군(鎭軍)이 24명이요, 선군이 1백 60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문(文)ㆍ전(全)ㆍ백(白)ㆍ진(陳)ㆍ신(申)ㆍ임(任)이요, 【위의 전(全)의 성이 혹은 김(金)으로도 되었으나, 김씨 성은 지금 없다.】 구고(九皐)의 성이 5이니, 호(扈)ㆍ신(申)ㆍ임(林)ㆍ전(田)ㆍ황(黃)이요, 취인(醉仁)의 성이 1이니, 신(申)이요, 양들량(楊等良)의 성이 3이니, 정(程)ㆍ이(李)ㆍ명(明)이다. 【어떤 본에는 양(梁)이 있고 명(明)은 없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이 5천 3백 92결이요, 【논이 9분의 2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여우가죽ㆍ족제비털[黃毛]ㆍ칠(漆)ㆍ배[梨]ㆍ석이ㆍ꿀ㆍ밀[黃蠟]ㆍ지초ㆍ자리요, 약재(藥材)는 건강(乾薑)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녹용ㆍ등에[盲蟲]ㆍ가뢰[斑猫]ㆍ인삼이요, 토산(土産)은 은어ㆍ고라니[麋]ㆍ사슴이다. 자기소가 1이요, 【현의 서쪽 사아곡(沙阿谷)에 있는데, 중품이다.】 도기소가 1이다. 【현의 북쪽 북곡(北谷)에 있는데, 품질이 하품이다.】
역(驛)이 2이니, 오원(烏原)ㆍ갈담(葛潭)이다. 【어떤 데에는 담(覃)이다.】
【원전】 5 집 662 면
운봉현
◎ 운봉현(雲峯縣)
본래 신라의 모산현(母山縣)으로서 아영성(阿英城),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운봉현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로 삼았다가,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옛 속부곡(屬部曲)이 1이니 아요곡(阿要谷)이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함양군(咸陽郡)에 이르기 20리, 서ㆍ남ㆍ북쪽으로 남원에 이르는데, 남쪽이 10리, 서쪽과 북쪽이 각각 7리이다.
호수가 1백 39호요, 인구가 5백 51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7명이요, 순천 수호군(順天守護軍)이 22명이요, 진군이 2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박(朴)ㆍ정(鄭)ㆍ문(文)ㆍ전(田)ㆍ신(辛)이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이 1천 7백 96결이요,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이요, 토산(土産)은 송이다.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족제비털[黃毛]ㆍ칠(漆)ㆍ오미자(五味子)ㆍ석이ㆍ감ㆍ삵괭이가죽ㆍ가뢰[斑猫]ㆍ자리요, 약재(藥材)는 녹각상(鹿角霜)ㆍ등에[蝱蟲]ㆍ흰바곳ㆍ복령(茯苓)ㆍ복신(茯神)ㆍ오갈피ㆍ겨우살이꽃[金銀花]이다.
역(驛)이 1이니, 인월(引月)이요, 요해(要害)가 1이니, 팔량현(八良峴)이다. 【현의 동쪽에서 경상도 함양(咸陽)으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원전】 5 집 662 면
장수현
◎ 장수현(長水縣)
본래 백제의 우평현(雨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택현(高澤縣)으로 고쳐서 장계(長溪)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장수현으로 고쳐서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로 하였고,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다시 나누어서 장수현으로 하여, 장계군(長溪郡)과 함께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였다가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두고 장계(長溪)를 혁파하여 내속(來屬)시켰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장계(長溪)는 본래 백제의 백이군(伯伊郡)이었는데, 【일명 해군(海郡)이라 한다.】 신라에서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장계현(長溪縣)으로 고쳐서 남원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시켰다. 소(所)가 3이니 천잠(天蠶)ㆍ양악(陽岳)ㆍ이방(利方)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안음(安陰)에 이르기 37리, 서쪽으로 진안(鎭安)에 이르기 23리, 남쪽으로 남원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금산(錦山)에 이르기 46리다.
호수가 3백 20호요, 인구가 8백 1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9명이요, 진군이 17명이요, 선군이 1백 59명이요, 방패(防牌)가 1명이다.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ㆍ정(井)ㆍ고(高)요, 망성(亡姓)이 1이니, 오(吳)요, 속성(續姓)이 1이니, 황(黃)이다. 장계(長溪)의 성이 5이니, 백(白)ㆍ배(裵)ㆍ유(柳)ㆍ오(吳)ㆍ현(玄)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며, 【향리(鄕吏)이다.】 양악(陽岳)의 성이 2이니, 이(李)ㆍ최(崔)요, 이방(利方)의 성이 1이니, 배(裵)이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춥다. 간전(墾田)이 1천 7백 73결이요,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이 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족제비털ㆍ칠(漆)ㆍ감ㆍ대추ㆍ배[梨]ㆍ오미장(五味子)ㆍ석이ㆍ인삼ㆍ지초ㆍ꿀ㆍ밀[黃蠟]ㆍ자리요, 약재(藥材)는 모란뿌리껍질[牧丹皮]ㆍ백복령(白茯苓)ㆍ복신(茯神)ㆍ백작약(白芍藥)ㆍ바디나물뿌리[前胡]ㆍ흰바곳[白附子]ㆍ당귀(當歸)ㆍ담비쓸개[獺膽]ㆍ건강(乾薑)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이다. 도기소가 1이다. 【현의 북쪽 판둔리(板芚里)에 있다.】
요해(要害)가 1이니, 육십현(六十峴)이다. 【현의 동쪽에서 경상도 안음(安陰)으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월경(越境)은 금산군(錦山郡)의 안성소(安城所)의 땅이 현의 북쪽 이흘음리(伊迄音里)와 양악소(楊岳所) 사이에 들어와 있다.
【원전】 5 집 662 면
무주현
◎ 무주현(茂朱縣)
무풍현(茂豊縣)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무풍(戊豊)으로 고쳐서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진례현(進禮縣)의 임내(任內)로 하였으며, 주계현(朱溪縣)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단천현(丹川縣)으로 고쳐서 진례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주계현으로 고쳐서 진례현의 임내로 하였다가, 명종(明宗) 7년 정유 【송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4년.】 에 무풍(茂豊)과 주계(朱溪)의 겸 감무(兼監務)를 두었고, 공양왕(恭讓王) 3년 신미에 두 현(縣)을 합하여 무풍 감무(茂豊監務)라 하였고, 본조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무주현으로 고쳤다.
명산(名山)은 상산(裳山)이다. 【주계현 남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지례(知禮)에 이르기 57리, 서ㆍ남쪽으로 금산(錦山)에 이르는데, 서쪽이 10리, 남쪽이 28리요, 북쪽으로 충청도 옥천(沃川)에 이르기 8리이다.
호수가 1백 72호요, 인구가 7백 15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4명이요, 진군이 6명이요, 선군이 9명이다.
무풍(茂豊)의 성이 6이니, 심(沈)ㆍ박(朴)ㆍ하(河)ㆍ전(田)ㆍ주(朱)ㆍ황(黃)이요, 주계(朱溪)의 성이 6이니, 양(梁)ㆍ박(朴)ㆍ하(河)ㆍ주(朱)ㆍ최(崔)ㆍ호(扈)이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은 1천 5백 1결이요, 【논이 9분의 2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감ㆍ호도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이 족제비털[黃毛]ㆍ칠ㆍ꿀ㆍ밀[黃蠟]ㆍ지초ㆍ배[梨]ㆍ가뢰[斑猫]ㆍ삵괭이가죽이요, 약재(藥材)는 백복령(白茯苓)ㆍ녹각교(鹿角膠)ㆍ모과(木瓜)ㆍ당귀ㆍ작약(芍藥)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인삼이다. 철장(鐵場)이 1이요, 【현의 동쪽 10리 봉촌(蓬村)에 있는데, 연철(煉鐵) 2천 2백 근을 선공감(繕工監)에 바치고, 9백 14근을 전주(全州)에 바친다.】 자기소가 1이다. 【현의 동쪽 가까운 산에 있는데, 하품이다.】
상산 석성(裳山石城) 【둘레가 2천 8백 20보(步)이며, 성안에 샘이 8, 큰 내가 2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작은 내가 3인데, 가물면 혹 마른다. 군창(軍倉)이 있으나 저장(儲藏)은 없다.】 역(驛)이 1이니, 소천(所川)이다. 【본래 무풍(茂豊) 지경에 있었는데, 중간에 금산(錦山)에 이속(移屬)시켰다가, 본조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도로 본현에 환속(還屬)시켰다.】
월경(越境)은 금산의 옛 임내(任內) 안성(安城)의 땅이 현(縣)의 서촌(西村) 소이진(召尔津)을 넘어서 우현(牛峴)에 들어와 있다.
【원전】 5 집 663 면
진안현
◎ 진안현(鎭安縣)
본래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진안현으로 고쳐서 장계군(長溪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전주(全州)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비로소 진안 감무(鎭安監務)를 두어 마령현(馬靈縣)을 겸하게 하였고, 태종(太宗) 12년 임진에 마령을 혁파하여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마령은 본래 백제의 마돌현(馬突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마령현으로 고쳐서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전주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소(所) 1이니, 강주(剛朱)이다.
명산(名山)은 마이(馬耳)이다. 【현의 남쪽에 있는데, 신라 때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 하여 소사(小祀)에 실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장수(長水)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전주(全州)에 이르기 25리, 남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6리, 북쪽으로 용담(龍潭)에 이르기 18리다.
호수가 1백 69호요, 인구가 7백 2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3명이요, 진군이 33명이요, 선군이 95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이(李)ㆍ전(全)ㆍ백(白)ㆍ한(韓)ㆍ유(庾)요, 마령(馬靈)의 성이 4이니, 한(韓)ㆍ송(宋)ㆍ장(張)ㆍ가(價) 【어떤 본에는 가(賈)로 되었다.】 요, 망성(亡姓)이 1이니, 김(金)이요, 속성(續姓)이 2이니, 전(全)ㆍ이(李) 【향리(鄕吏).】 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이 2천 7백 72결이요, 【논이 4분의 1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麻]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ㆍ칠(漆)ㆍ대추ㆍ석이ㆍ꿀ㆍ밀[黃蠟]ㆍ가뢰[斑猫]ㆍ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자리요, 약재(藥材)는 백복령(白茯苓)ㆍ녹각상(鹿角霜)ㆍ복신(茯神)ㆍ바디나물뿌리[前胡]ㆍ당귀ㆍ백작약(白芍藥)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이다. 자기소가 1이요, 【마령현 남쪽 두언리(豆彦里)에 있다.】 도기소가 1이다. 【마령현 동쪽 동림리(東林里)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역(驛)이 1이니, 단령(丹嶺)이다.
【원전】 5 집 663 면
곡성현
◎ 곡성현(谷城縣)
본래 백제의 욕내군(欲乃郡)이었는데, 신라에서 곡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승평(昇平)의 임내로 하였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욕천(浴川)이라 한다. 옛 부곡(部曲)이 1이니, 율곡(栗谷)이다.
진산(鎭山)은 동락(動樂)이다. 【현의 서북쪽에 있다.】 순자진(鶉子津) 【현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구례(求禮)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옥과(玉果)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순천(順川)에 이르기 50리, 북쪽으로 남원(南原)에 이르기 7리이다.
호수가 1백 48호요, 인구가 6백 5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1명이요, 진군이 10명이요, 선군이 1백 단(單) 10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임(任)ㆍ신(申)ㆍ여(呂)ㆍ오(吳)요, 망성(亡姓)이 1이니, 박(朴)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이(李)요, 【향리(鄕吏)이다.】 율곡(栗谷)의 성이 1이니, 하(河)이다.
땅이 많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2천 3백 52결이요, 【논이 5분의 2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ㆍ삼ㆍ목화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ㆍ칠(漆)ㆍ꿀ㆍ밀[黃蠟]ㆍ감ㆍ배ㆍ가뢰[斑描]ㆍ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자리요, 약재(藥材)는 모과ㆍ녹각교(鹿角膠)ㆍ바디나물뿌리ㆍ호본(蒿本)ㆍ건강(乾薑)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은어ㆍ송이다. 자기소가 1이요, 【현의 남쪽 우곡(牛谷)에 있다.】 도기소가 1이다. 【현의 서쪽 묘현(猫峴)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역(驛)이 1이니, 지신(知申)이다.
【원전】 5 집 663 면
광양현
◎ 광양현(光陽縣)
본래 백제의 마로현(馬老縣)이었는데, 신라에서 희양현(晞陽縣)으로 고쳐서 순천(順天)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에서 광양현으로 고쳤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감무(監務)를 고쳐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옛 속향(屬鄕)이 2이니, 본정(本井)ㆍ삼일(三日)이요, 소(所)가 12이니, 문현(蚊峴)ㆍ노을도(奴乙道)ㆍ골약(骨若)ㆍ거의포(車衣浦)ㆍ구량포(仇良浦)ㆍ공촌(孔村)ㆍ다사천(多沙川)ㆍ대곡(大谷)ㆍ실점(實岾)ㆍ오정(烏頂)ㆍ지암천(知巖川)ㆍ웅음(熊陰)이요, 부곡(部曲)이 4이니, 아마대(阿麻代)ㆍ사어곡(沙於谷)ㆍ아민(阿民)ㆍ율촌(栗村)이다.
진산(鎭山)은 백계(白鷄)이다. 【현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진주(晉州)에 이르기 43리, 서쪽으로 순천(順天)에 이르기 9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5리, 북쪽으로 경상도 진주에 이르기 20리이다.
호수가 2백 28호요, 인구가 1천 2백 2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6명이요, 순천 수호군(順天守護軍)이 15명이요, 진군이 2명이요, 선군이 1백 5명이다.
토성(土姓)이 10이니, 김(金)ㆍ서(徐)ㆍ전(田)ㆍ정(鄭)ㆍ이(李)ㆍ유(柳)ㆍ강(康)ㆍ신(辛)ㆍ박(朴)ㆍ황보(皇甫)요, 골약소(骨若所)의 속성(續姓)이 2이니, 차(車)ㆍ김(金)이요, 아마대(阿麻代)의 성이 1이니, 김(金)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차(車)요, 【어떤 본에는 최(崔)가 있고 차(車)가 없다.】 본정향(本井鄕)의 성이 2이니, 차(車)ㆍ최(崔)이다.
땅이 기름지다. 간전(墾田)이 2천 10결이요, 【논ㆍ밭이 반반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삼ㆍ목화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이 가뢰[斑猫]ㆍ족제비털[黃毛]ㆍ칠ㆍ느타리ㆍㆍ감ㆍ대추ㆍ배[梨]ㆍ석류ㆍ표고ㆍ자리ㆍ미역ㆍ석이ㆍ삵괭이가죽ㆍ여우가죽ㆍ꿀ㆍ밀[黃蠟]이요, 약재(藥材)는 흰매화ㆍ녹용ㆍ건강(乾薑)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차[茶]요, 토산(土産)은 왕대ㆍ은어다. 염소(鹽所)가 2이다. 【현의 동남쪽 노을도(奴乙道)와 고지포(古之浦)에 있다.】 염창(鹽倉) 【현의 동쪽에 있다. 염간(鹽干)이 34명인데, 봄ㆍ가을에 바치는 소금이 2백 14석이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3백 62보(步) 남짓하다.】 역(驛)이 2이니, 익신(益申)ㆍ섬거(蟾居)요, 요해(要害)가 1이니, 섬진(蟾津)이요, 【현의 동쪽에서 경상도 진주(晉州)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봉화가 1곳이니, 건대산(件臺山)이요, 【현의 동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순천(順天) 진례(進禮)에 응한다.】 해도(海島)가 1이니, 태안도(泰安島)이다.
【원전】 5 집 663 면
- [주-D001] 국통(國統) :
- 국사(國師).
- [주-D002] 진례군(進禮郡) :
- 금산.
- [주-D003] 곤남(昆南) :
- 곤양.
- [주-D004] 진례현(進禮縣) :
- 금산.
- [주-D005] 승평(昇平) :
-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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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지리지 / 경상도
진주목
⊙ 진주목(晉州牧)
백제 거렬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2년 계해에 【바로 당 고종(唐高宗) 용삭(龍朔) 3년이다.】 이를 탈취하여 주(州)를 만들고,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 【바로 당(唐)나라 수공(垂拱) 원년이다.】 거렬주(居列州)를 올려서 청주(箐州)로 하고 총관(摠管)을 두었으며, 【거렬(居列)은 일명(一名)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치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箐州)로 하였다. 고려 태조가 또 강주(康州)로 고쳤고, 성종 2년 계미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으니, 바로 그 하나이다. 을미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이름을 진주 정해군 절도사(晉州定海軍節度使)로 하였는데, 현종 3년 임자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무오년에 진주목(晉州牧)으로 정하여 8목(牧)의 하나로 삼았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 임신에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인 까닭으로 올려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를 삼았고, 태종 2년 임오에 도로 진주목(晉州牧)으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니, 반성(班城), 【삼국 시대의 칭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영선(永善)은 본디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상선(尙善)으로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악양(岳陽)은 본디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하동군(河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위의 세 현은 현종 무오년에 모두 본주(本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부곡(部曲)이 2이니, 화개곡(花開谷)ㆍ살천곡(薩川谷)이다. 【위의 두 부곡의 장(長)은 모두 머리를 깎아서 ‘승수(僧首)’라고 일컬었는데, 방언(方言)의 소리가 변하여 지금은 시내(矢乃)가 되었다.】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이 주(州) 서쪽에 있다. 【일명(一名) 두류산(頭流山)이다. 대천왕사(大天王祠)가 있다.】 옥산(玉山)은 주(州) 서쪽에 있다. 【가뭄을 만날 때마다 산 위에서 제사를 베풀고 섶[柴]을 태우면, 곧 비가 온다.】 본주(本州)의 성황(城隍) 【국초(國初)에는 춘추(春秋)로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행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대천(大川)은 남강(南江)과 【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라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 주(州)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두치진(豆恥津)이다. 【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서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라도 구례(求禮)에서 나온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전라도 구례(求禮)에 이르기 1백 2리, 남쪽으로 고성(固城)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진성(珍城)에 이르기 28리다.
본주(本州)의 호수는 1천 6백 28호, 인구가 5천 9백 6명이요, 반성(班城)의 호수는 2백 77호, 인구가 6백 87명이요, 영선(永善)의 호수는 2백 54호, 인구가 7백 48명이요, 악양(岳陽)의 호수는 60 단(單) 1호, 인구가 1백 80 단(單) 1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74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88명, 선군(船軍)이 9백 75명이다.
본주(本州)의 토성(土姓)이 4이니, 정(鄭)ㆍ하(河)ㆍ강(姜)ㆍ소(蘇)이요, 입주(立州) 후(後)의 성(姓)이 3이니, 유(柳)ㆍ임(任)ㆍ강(康)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김(金) 【예주(禮州)에서 왔다.】 ㆍ박(朴) 【근본은 알 수 없다.】 이다. 반성(班城)의 성이 4이니, 옥(玉)ㆍ성(成)ㆍ형(邢)ㆍ주(周)이요, 속성이 1이니, 김(金)이다. 【고성(固城)에서 왔다.】 영선(永善)의 성이 3이니, 임(林)ㆍ임(任)ㆍ양(陽)이요, 악양(岳陽)의 성이 5이니, 도(陶)ㆍ오(吳)ㆍ임(任)ㆍ손(孫)ㆍ박이며, 속성이 1이니, 김이다. 【김해에서 왔다. 이상 세 현의 속성은 지금 모두 향리가 되었다.】 없어진 복산(福山)ㆍ송자(松慈) 2향(鄕)의 성이 1이니, 문(文)이다. 인물(人物)은 지중추원사 병부 상서(知中樞院事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고려 현종 때 사람이다.】 ㆍ영의정부사 진산 부원군 문충공(領議政府事晉山府院君文忠公) 하윤(河崙) 【본조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묘(墓)는 주(州)에서 25리 동쪽 동방산(桐旁山)에 있다.】 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1만 2천 7백 30결이다. 【논이 조금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ㆍ메밀ㆍ감ㆍ배ㆍ석류ㆍ뽕나무ㆍ삼[麻]ㆍ목면(木綿)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녹포(鹿胞)ㆍ문어ㆍ은구어ㆍ표고버섯ㆍ석이(石茸)ㆍ송이버섯ㆍ지초ㆍ작설다(雀舌茶)ㆍ자리[席]ㆍ죽피방석(竹皮方席)ㆍ가는 대[篠]ㆍ왕대[簜]ㆍ칠ㆍ종이ㆍ돼지털ㆍ사슴가죽ㆍ노루가죽ㆍ여우가죽ㆍ수달피(水獺皮)ㆍ산달피(山獺皮)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우무[牛毛]ㆍ세모(細毛)ㆍ청각(靑角)ㆍ미역ㆍ해삼이다. 어량(魚梁)이 2이니, 하나는 김양촌(金陽村)에 있고, 하나는 강주포(江州浦)에 있다. 염소(鹽所)가 1이니, 곤양(昆陽) 경계에 있다. 【본주 사람이 내왕하면서 구워 온다.】 자기소(磁器所)가 3이니, 하나는 주(州) 북쪽 목제리(目堤里)에 있고, 하나는 주(州) 서쪽 중전리(中全里)에 있고, 하나는 주(州) 동쪽 월아리(月牙里)에 있다. 【모두 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주(州) 동쪽 유등곡(柳等谷)에 있고, 하나는 주(州)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있다. 【오로지 누른 옹기만을 만드는데,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2천 6보인데, 안에 못이 3, 우물 3이 있다.】 송대산 석성(松臺山石城)은 주(州) 동쪽 35리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7백 6보인데, 안에 샘 2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명루(鳳鳴樓)는 객사(客舍) 남쪽에 있고, 촉석루(矗石樓)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石崖] 위에 있다. 역(驛)이 10이니, 조촌(?村)ㆍ평거(平居)ㆍ정수(正守)ㆍ평사(平沙)ㆍ소남 신역(召南新驛)ㆍ금량 신역(金良新驛)ㆍ말문 신역(末文新驛) 【모두 주(州) 경계에 있다.】 ㆍ영선 신역(永善新驛)ㆍ부다(富多) 【반성(班城)에 있다.】 ㆍ신역(新驛)이 주(州) 경계에 있다. 적량(赤梁)은 주(州) 서쪽 창선도(彰善島)에 있다. 【주(州)에서 80리 거리인데 수군 만호가 수어한다.】 봉화가 5곳이니 망진산(望津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사천(泗川)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光濟山)에 응한다.】 광제산(光濟山) 【북쪽으로 단계현(丹溪縣) 입암(笠岩)에 응한다.】 각산향 주산(角山鄕主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고성(固城) 좌이산(佐耳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사천(泗川) 침지(針枝)에 응하며, 남쪽으로 금량 부곡(金良部曲) 양둔산(陽芚山)에 응한다.】 양둔산(陽芚山) 【남쪽으로는 남해도(南海道) 망운산(望雲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주(本州) 계화산(桂花山)에 응한다.】 계화산(桂花山) 【서쪽으로 전라도 건대산(件代山)에 응한다.】 단속사(斷俗寺)는 주(州) 서쪽 42리에 있고, 【선종(禪宗)에 속하며, 급전(給田)이 1백 50결이다. 절에 《한창려집(韓昌黎集)》 및 고려 《이상국집판(李相國集板)》 판(板)이 있다.】 쌍계사(雙溪寺)는 주(州) 서쪽 화개곡(花開谷)에 있다. 【전우(殿宇)는 허물어졌고 신라 때에 창건한 조사전(祖師殿)만이 있다. 절 앞에 문(門)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최치원이 그 위에 쓰기를,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어제 쓴 것과 같이 분명하다. 동변(東邊)의 한 돌에는 ‘쌍계’ 두 자를 새기고, 서변(西邊)의 한 돌에는 ‘석문’ 두 자를 새겼다.】 흥선도(興善島)는 본디 고려 유질 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고, 충선왕(忠宣王) 초에 왕의 혐명(嫌名)을 피하여 흥선(興善)으로 고쳤는데, 왜적으로 인해 인물(人物)이 전망(全亡)한 까닭으로 지금은 직촌(直村)을 삼았다. 수로(水路)로 10리이다. 【백성들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김해(金海)ㆍ창원(昌原)이요, 군(郡)이 3이니, 함안(咸安)ㆍ함양(咸陽)ㆍ곤남(昆南)이며, 현(縣)이 12이니, 고성(固城)ㆍ거제(巨濟)ㆍ사천(泗川)ㆍ거창(居昌)ㆍ하동(河東)ㆍ진성(珍城)ㆍ칠원(漆原)ㆍ산음(山陰)ㆍ안음(安陰)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진해(鎭海)이다.
【원전】 5 집 649 면
김해 도호부
◎ 김해 도호부(金海都護府)
본디 가락국(駕洛國)인데, 후한(後漢) 광무 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18년 임인에 가락(駕洛)의 장(長)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 등 아홉 사람이 그 백성을 거느리고 계음(禊飮)하다가 구지봉(龜旨峯)을 바라보니, 이상한 성기(聲氣)가 있기에 가서 보았더니, 금합(金榼)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글기가 일륜(日輪)과 같은 금빛 알[金色卵]이 있었다. 아홉 사람이 절을 하고 신령스럽게 여겨 아도간의 집에 봉치(奉置)하고 이튿날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합(榼)을 열고 보니, 한 아이가 껍데기를 벗고 나왔는데 나이는 열 다섯 살 가량 될 만하고, 용모가 매우 잘 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배하(拜賀)의 예(禮)를 다하였다. 아이가 날마다 크고 뛰어나서 10여일이 지나매 신장(身長)이 9척이었다. 그달 보름날에 아홉 사람이 마침내 받들어서 임금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나라 이름을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倻)로 일컫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즉위(卽位)한 지 1백 58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에 죽고, 9대손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양 무제(梁武帝) 대통(大通) 4년 임자에 국탕(國帑)과 보물(寶物)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으로부터 구충(仇衝)이 나라를 두기까지 무릇 4백 91년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미 구해(仇亥)의 항복을 받아 객례(客禮)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식읍(食邑)으로 삼고, 이름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하였는데,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김해 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김해부(金海府)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서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가, 또 올려서 군(郡)으로 하였고,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금주 안동 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고치고, 현종(顯宗) 3년 임자에 낮추어서 금주 방어사(金州防禦使)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 경오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아 공(功)이 있는 까닭으로, 올려서 금녕 도호부(金寧都護府)로 하고, 인해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都護)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여러 목(牧)을 없앰에 따라 다시 김해부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2니, 웅신현(熊神縣)은 본디 웅지현(熊只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 현종 무오년에 금주(金州) 임내로 붙였다. 완포현(莞浦縣)은 본디 고려의 완포향(莞浦鄕)인데, 뒤에 현(縣)으로 고쳤다. 부곡(部曲)이 2이니, 대산(大山)과 천읍(川邑)이다.
분산(盆山)은 부(府) 북쪽에 있고, 【부(府)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신어산(神魚山)은 부(府) 동쪽에 있다. 대천(大川)은 뇌진(磊津)이다. 【낙동강 하류인데, 부(府) 북쪽 지경으로 들어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이름은 해양강(海陽江)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산(梁山)에 이르기 32리, 서쪽으로 창원(昌原)에 이르기 58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6리, 북쪽으로 밀양(密陽)에 이르기 32리이다.
본부(本府)의 호수는 1천 2백 90호, 인구가 6천 6백 42명이요, 웅신의 호수는 63호, 인구가 3백 18명이며, 완포의 호수는 37호, 인구가 1백 7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47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20명, 선군(船軍)이 8백 40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김(金)ㆍ허(許)ㆍ배(裵)ㆍ손(孫)ㆍ송(宋)ㆍ유(庾)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정(鄭) 【해주(海州)에서 왔다.】 ㆍ맹(孟) 【장양(長陽)에서 왔다.】 이며, 웅신(熊神)의 성이 3이니, 서(徐)ㆍ주(州)ㆍ유(劉)요, 내성이 1이니, 김(金) 【금주(金州)에서 왔다.】 이며, 완포(莞浦)의 성이 1이니, 전(田)이요, 대산(大山)의 성이 1이니, 전(田)이며, 천읍(川邑)의 성이 1이니, 공(公)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7천 8백 9결이다. 【논이 약간 적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콩ㆍ보리ㆍ메밀ㆍ뽕나무ㆍ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녹포(鹿脯)ㆍ모래무지[沙魚]ㆍ건합(乾蛤)ㆍ우무[牛毛]ㆍ미역ㆍ어교(魚膠)ㆍ종이ㆍ가는 대[篠]ㆍ왕대[簜]ㆍ사슴가죽ㆍ여우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ㆍ수달피(水獺皮)이며, 약재는 오징어뼈ㆍ백복령이요, 토산(土産)은 사철(沙鐵)과 【부(府) 동쪽 감물야촌(甘勿也村)에서 난다.】 은석(銀石) 【부(府) 북쪽 사읍제산(沙邑梯山)에서 나는데, 시험해 보니 쓰기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다. 염소(鹽所)가 2이니, 모두 부 남쪽에 있고,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 동쪽 감물야촌(甘勿夜村)에 있다. 【하품이다.】
북산 석성(北山石城)은 부 북쪽 3리에 있다. 【둘레가 2백 60보인데, 안에 작은 못 4, 우물 3이 있다.】 수로왕의 궁전 터[宮殿遺基]는 부내(府內)에 있고, 묘(墓)는 부 서쪽 대기리(大岐里)에 있다. 【부에서 3백 보 거리이다.】 연자루(燕子樓)는 객사(客舍) 동쪽에 있고, 불훼루(不毁樓)는 금강사(金剛社)에 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거둥하였다가 여기에 머물렀다.】 초현대(招賢臺)는 부 동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가락국(駕洛國) 거등왕(居登王)이 여기에 올라서 칠점산(七點山)에 머물러 사는 참시 선인(旵始仙人)을 부르니, 참시가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서로 놀며 희롱하였으므로, 이름을 초현대라고 하였다.” 한다.】 역(驛)이 7이니, 남역(南驛)ㆍ덕산(德山)ㆍ금곡(金谷)ㆍ성법(省法)ㆍ적항(赤項)ㆍ대산 신역(大山新驛)ㆍ웅신 신역(熊神新驛)이다. 제포(薺浦)는 웅신현에 있다. 【본부(本府)와의 거리가 42리인데, 수군 만호가 수어한다.】 봉화(烽火)가 6곳이니, 가덕도 응암(加德島鷹嵓)은 부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성화야산(省火也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웅신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한다.】 성화야(省火也) 【동쪽으로 평석성(平石城)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부의 산성 타고암(打鼓巖)에 응한다.】 타고암(打鼓巖) 【북쪽으로 자암산(子巖山)에 응한다.】 ㆍ자암산(子巖山) 【북쪽으로 밀양 남산(南山)에 응한다.】 사화랑산(沙火郞山) 【북쪽으로 창원(昌原) 장복산(長卜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완포현 고산(高山)에 응한다.】 ㆍ고산(高山) 【동쪽으로 웅신현 사화랑에 응하고, 남쪽으로 창원 여포(餘浦)에 응한다.】 수락(水落)은 천읍(川邑)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물이 갈리어 흐르는데, 전라도가 가물면 동쪽으로 합류(合流)하고, 경상도가 가물면 서쪽으로 합류하고, 두 도가 다 가물지 아니하면 동서로 나누어 흐르니, 지방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오는 해[來歲]의 가물고 물질 것을 점친다.】 삼분수(三分水) 【고려에서 처음으로 동남해도 도부서사(東南海道都部署使)를 설치하고, 사(司)를 김해(金海)에 두었는데, 그 뒤에 도부서사 한충(韓沖)이, 동남해도가 땅이 넓은 까닭으로써 경상ㆍ전라ㆍ양광(楊廣) 세 도로 나눌 것을 아뢰어 청하여, 가하다고 보(報)하는 날에 부(府) 동쪽 황산강(黃山江) 물이 50여 리를 세차게 대질러 부딪쳐서, 세 포(浦)로 나누어 바다로 들어가니, 시속에서 세 갈래 물[三叉水]이라고 한다.】 취량도(鷲梁島)는 부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30여 리이다. 【펀펀한 모래[平沙]의 둘레가 20여 리 가량이다. 그 섬이 오래 가물다가 장차 비가 올려고 하면, 울고, 장차 개이려면 우는데, 그 소리가 우뢰와 같으니, 시속에서 명지(鳴旨)라고 이른다.】 가덕도(加德島)는 부 동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10여 리이다. 【춘추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마도(馬島)는 부 동남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1백 50여 보(步)다. 【백성들이 내왕(來往)하며 경작(耕作)한다.】
【원전】 5 집 649 면
창원 도호부
◎ 창원 도호부(昌原都護府)
의창현(義昌縣)은 본디 굴자군(屈自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치고, 회원현(會原縣)은 본디 골포현(骨浦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두 현을 모두 금주(金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각기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렬왕(忠烈王) 8년 임오에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를 회원(會原)으로 고쳐서 모두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시켜, 동정(東征) 때에 공억(供億)한 노고를 상주었다.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18년 신사에 황제가 원수(元帥) 흔독(欣篤)ㆍ다구(茶丘)를 보내어 일본(日本)을 치게 하고, 또 우리 나라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을 관고려군 도원수(管高麗軍都元帥)로 삼아서 흔독 등을 따라 출정(出征)하게 하였다. 4월에 충렬왕이 합포에 거둥하여 몽고ㆍ중국ㆍ고려의 군사를 크게 사열하고 5월에 모든 군사가 합포를 떠났고, 황제가 또 망한 송나라의 항복한 장수[降將] 범문호(范文虎)로 하여금 오랑캐 군사[蠻軍] 10만 명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을 떠나 일본에 모이기를 기약하였는데, 흔독 등이 패가대(霸家臺)에 이르러 왜군과 싸워서 패하고, 군중(軍中)에 큰 병이 있어 죽는 자가 잇따르고, 범문호가 기한이 지나도록 이르지 이르지 아니하니, 장차 회군(回軍)하기를 의논하던 차, 7월에 범문호가 전함(戰艦) 3천 5백 척을 거느리고 이르렀는데, 얼마 아니 되어 큰 바람을 만나, 배가 파손되어 오랑캐 군사가 모두 빠져 죽고, 8월에 흔독ㆍ다구ㆍ범문호및 김방경 등이 돌아와 합포에 이르니,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무려 천만이 넘었다. 이 달에 왕이 경상도로부터 이르고, 흔독 등 3인도 또한 원나라로 돌아갔다.】 본조 태종 8년 무자에 두 현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만들고, 을미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의창(義昌)은 별호(別號)가 회산(檜山)이고, 회원(會原)은 별호가 환수(還殊)이다.】 향(鄕)이 1이니, 내포(內浦)요, 소(所)가 1이니, 동천(銅泉)이다.
주물연진(主勿淵津)은 부 북쪽에 있다. 【낙동강 하류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해(金海)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김해(金海) 임내(任內) 웅신(熊神)에 이르기 32리, 북쪽으로 칠원(漆原)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는 1천 94호, 인구가 4천 9백 55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2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19명, 선군(船軍)이 6백 89명이다.
의창(義昌)의 성이 4이니, 공(孔)ㆍ황(黃)ㆍ박(朴)ㆍ현(玄)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김(金)ㆍ허(許)ㆍ정(鄭)이며, 촌성(村姓)이 2이니, 정(丁)ㆍ구(仇)이다. 회원(會原)의 성이 4이니, 감(甘)ㆍ유(兪)ㆍ정(鄭)ㆍ현(玄)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김(金)ㆍ문(文)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제(諸)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거칠고 사나우며 소송(訴訟)하기를 좋아한다. 간전(墾田)이 4천 6백 63결이다. 【논이 약간 많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기장ㆍ콩ㆍ보리ㆍ뽕나무ㆍ삼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모래무지[沙魚]ㆍ건합(乾蛤)ㆍ죽순(竹笋)ㆍ죽피방석(竹皮方席)ㆍ왕대[簜]ㆍ어교(魚膠)ㆍ돼지털ㆍ사슴가죽ㆍ여우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ㆍ수달피(水獺皮)ㆍ칠(漆)이며, 약재(藥材)는 궁궁이[窮芎]다. 토산(土産)은 미역ㆍ우무[牛毛]ㆍ세모(細毛)ㆍ대구어(大口魚)ㆍ굴조개[石花]ㆍ해삼(海蔘)과 사철(沙鐵) 【부(部) 남쪽 악상리(岳上里) 부을무산(夫乙無山)에서 난다.】 ㆍ연동석(鉛銅石) 【부(府) 동북쪽 배사동(背寺洞)에서 난다.】 이다. 염소(鹽所)가 3이니, 모두 부(府) 남쪽에 있고, 【염창(鹽倉)이 있고, 염장관(鹽場官)이 감독하고 지킨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府) 북쪽 산북촌리(山北村里)에 있다. 【하품이다.】
염산 석성(簾山石城)은 부(府) 남쪽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1천 70보인데, 안에는 내[川]가 1, 시내[溪] 1이 있다.】 온천(溫泉)이 부(府) 북쪽 18리 거리의 초미흘(草未訖)에 있다. 【욕탕이 3간, 주사(廚舍)가 3간이다.】 벽허루(碧虛樓)는 객사(客舍) 동쪽에 있고, 월영대(月影臺)는 회원(會原) 서쪽 바닷가에 있다. 역(驛)이 4이니, 자여(自如)ㆍ신퐁(新豐)ㆍ안민(安民)ㆍ근수(近殊)이다. 병마 절제사 영성(兵馬節制使營城)은 합포(合浦)에 있다. 【바다 어귀까지 4리인데, 둘레가 5백 88보이며, 안에 우물 3이 있다.】 봉화가 3곳이니, 장복산(長卜山)은 부(府)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웅신(熊神) 사화랑(沙火郞)에 응하고, 서쪽으로 회원(會原) 여포(餘浦)에 응한다.】 여포(餘浦) 【북쪽으로 김해(金海) 완포현(莞浦縣)의 고산(高山)에 응한다.】 성황당(城隍堂)은 예전 회원현(會原縣)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 완포(莞浦)에 응하고, 북쪽으로 칠원(漆原) 재곡산(在谷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칠원(漆原) 임내(任內)인 구산현(龜山縣)이 회원(會原)ㆍ진해(鎭海) 두 현 사이에 쑥 들어갔다.
【원전】 5 집 650 면
함안군
◎ 함안군(咸安郡)
본디 아시량국(阿尸良國)인데,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도 한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를 멸(滅)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김해주(金海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공민왕 22년 계축에 고을 사람 주영찬(周英贊)의 딸이 중국에 들어가서 명나라 황제의 시희(侍姬)가 되어 사랑을 받아서, 주영찬을 밀직사(密直使)로 임명하고,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금라(金羅)이다.
풍탄(楓灘)은 군(郡) 북쪽에 있다. 【진주(晉州) 남강(南江)에서 흘러 온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창원(昌原)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의령(宜寧)에 이르기 35리, 남쪽으로 진해(鎭海)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의령(宜寧)에 이르기 20리이다.
호수는 7백 32호, 인구가 3천 2백 66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4명, 영진군(營鎭軍)이 76명, 선군(船軍)이 3백 70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ㆍ조(趙)ㆍ채(蔡)ㆍ윤(尹)ㆍ유(劉)ㆍ정(鄭)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최(崔) 【죽산(竹山)에서 왔다.】 ㆍ김(金) 【금주(金州)에서 왔다.】 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강(姜)이다.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천 9백 76결이다. 【논이 6분의 2이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배ㆍ대추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표고버섯ㆍ지초ㆍ종이ㆍ왕대ㆍ삵가죽ㆍ여우가죽ㆍ노루가죽ㆍ수달피(水獺皮)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군(郡) 동쪽 대산리(代山里)에 있다. 【하품이다.】
방어산 석성(防禦山石城)가 1이니, 군(郡) 서쪽 26리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1백 63보인데, 안에 우물 2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신역(新驛)과 춘곡(春谷)이요, 봉화가 1곳이니, 소산(所山)이 군(郡)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진해(鎭海) 가을포(加乙浦)에 응하고, 북쪽으로 의령(宜寧) 가막산(可莫山)에 응한다.】
【원전】 5 집 650 면
함양군
◎ 함양군(咸陽郡)
본디 속함군(速含郡)인데,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成宗) 을미년에 허주 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올렸다가, 현종 임자년에 단련사(團練使)를 폐지하고 함양군(含陽郡)으로 낮추어서 합천(陜川) 임내(任內)에 붙였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 2년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 을해에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부곡(部曲)이 1이니, 고안(高安)이요, 소(所)가 1이니, 마천(馬淺)이다.
진산(鎭山)은 백암(白嵓)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음(安陰) 도현(桃峴)에 이르기 28리,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雲峯)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화개곡(花開谷)에 이르기 90리, 북쪽으로 안음(安陰)에 이르기 27리이다.
호수는 4백 28호, 인구가 1천 9백 48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8명, 진군(鎭軍)이 28명, 선군(船軍)이 1백 88명이다.
본군(本郡)의 토성(土姓)이 5이니, 여(呂)ㆍ오(吳)ㆍ서(徐)ㆍ박(朴)ㆍ조(曺)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이(李)이며,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마천(馬淺)의 성이 1이니, 조(曺)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추우며, 간전(墾田)이 2천 4백 73결이다. 【논이 약간 적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콩ㆍ감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석이(石茸)ㆍ칠ㆍ종이ㆍ녹포(鹿脯)ㆍ여우가죽ㆍ노루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연꽃술[蓮花蘂]ㆍ모란껍질ㆍ모향(茅香)이요, 토산(土産)은 은어ㆍ작설다(雀舌茶)ㆍ죽순ㆍ감이다.
읍 토성(邑土城) 【둘레가 4백 33보인데, 안에 작은 못 3, 우물 3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사근(沙近)ㆍ신역(新驛)이다.
【원전】 5 집 650 면
곤남군
◎ 곤남군(昆南郡)
본디는 곤명현(昆明縣)이다. 신라 때의 이름은 자세히 알 수 없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는데, 본조(本朝) 금상(今上)이 즉위한 원년(元年) 기해에 어태(御胎)를 현(縣)에서 20리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안치하고,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남해현(南海縣)은 본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인데,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지산국(轉也山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남해군(南海郡)으로 고쳤고, 현종 무오년에 현령관(縣令官)을 두었다. 공민왕이 무술년에 왜적으로 인하여 땅을 잃고,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대야천 부곡(大也川部曲)에 교거(僑居)하였는데, 본조 태종 갑오년에 하동(河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하동현(河東縣)을 설치하고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금양 부곡(金陽部曲)을 남해(南海)에 붙여서 해양현(海陽縣)으로 일컬었으며, 정유년에 금양(金陽)을 도로 진주(晉州)로 붙이고 다시 남해현(南海縣)을 삼았다가, 기해년에 곤명현(昆明縣)에 합하였다. 난포현(蘭浦縣)은 본디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디 서평산(西平山)이다. 【위의 두 현은 모두 바다 섬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남해군의 영현(領縣)을 만들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모두 없어지고 다만 토지만이 있을 뿐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하동(河東)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하동(河東)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9리이다.
호수는 2백 70 단(單) 1호, 인구가 1천 3백 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1명, 진군(鎭軍)이 9명, 선군(船軍)이 1백 36명이다.
곤명(昆明)의 성이 3이니, 유(兪)ㆍ전(全)ㆍ문(文)이요, 현(縣)을 세운 뒤의 성이 2이니, 현(玄)ㆍ백(白)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강(康)ㆍ유(柳) 【모두 진주(晉州)에서 왔다.】 ㆍ조(趙) 【함안(咸安)에서 왔다.】 이다. 남해(南海)의 촌락성(村落姓)이 1이니, 제(諸)요, 망성(亡姓)이 4이니, 배(裵)ㆍ김(金)ㆍ백(白)ㆍ진(陳)이다. 난포(蘭浦)의 성이 2이니, 정(鄭)ㆍ박(朴)이요, 촌락성이 1이니, 고(高)이며, 평산(平山)의 성이 3이니, 조(趙)ㆍ배(裵)ㆍ백(白)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조(曺)이다. 없어진 다음향(多音鄕)의 속성(續姓)이 1이니, 문(文)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8백 24결이다.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콩ㆍ조ㆍ감ㆍ송이(松茸)ㆍ목면(木綿)ㆍ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표고버섯ㆍ문어ㆍ홍합ㆍ지초ㆍ칠ㆍ사슴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생포(生鮑)ㆍ미역ㆍ은구어ㆍ해삼이다. 염소(鹽所)가 3이니, 모두 군(郡) 남쪽에 있다. 【염창(鹽倉)이 있고, 염장관(鹽場官)이 감독해 지킨킨다.】 자기소(磁器所)가 2이니, 하나는 군(郡) 남쪽 포곡리(蒲谷里)에 있고, 【중품이다.】 하나는 군(郡) 동쪽 노동(蘆洞)에 있다. 【중품이다.】
역(驛)이 1이니, 완사(浣沙)이다. 【본래는 남해도(南海島) 덕신역(德新驛)이었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육지로 나왔다.】 평산포(平山浦)는 남해도 남쪽에 있다. 【본군(本郡)에서 90리 거리인데, 노량(露梁)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한다.】 봉화가 3곳이니 금산(錦山)은 남해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所屹山)에 응한다.】 소흘산(所屹山) 【서쪽으로 망운산(望雲山)에 응한다.】 망운산(望雲山)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晉州) 금양 부곡(金陽部曲)의 양둔(陽芚)에 응한다.】 남해도(南海島)는 수로(水路)로 1리 2백 48보이다. 【백성들이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
【원전】 5 집 651 면
고성현
◎ 고성현(固城縣)
본디 소가야국(小伽倻國)인데, 신라에서 이를 취하여 고자군(古自郡)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고성군(固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현(縣)으로 고쳐서 현종 무오년에 거제(巨濟)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철성(鐵城)이다. 부곡(部曲)이 1이니, 곤의(坤義)이요, 【지금은 없어지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향(鄕)이 2이니, 곡산(曲山)ㆍ녹명(鹿鳴)이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거제(巨濟)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40리, 서쪽으로 사천(泗川)에 이르기 26리, 남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기 1리, 북쪽으로 진해(鎭海)에 이르기 33리이다.
호수는 5백 30 단(單) 1호, 인구가 2천 8백 85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0명, 영진군(營鎭軍)이 90명, 선군(船軍)이 3백 27명이다.
본현(本縣)의 토성(土姓)이 5이니, 이(李)ㆍ채(蔡)ㆍ박(朴)ㆍ김(金)ㆍ남(南)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등(登)ㆍ주(珠) 【중국에서 왔다.】 ㆍ오(吳) 【해주(海州)에서 왔다.】 이며, 【옛 문적의 한 군데에 이르기를, “등(登)ㆍ주(朱)ㆍ최(崔)는 해주에서 왔고, 오(吳)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였다.】 곤의(坤義)의 성이 2이니, 박(朴)ㆍ김(金)이요, 곡산(曲山)의 성이 1이니, 김이며, 녹명(鹿鳴)의 성이 3이니, 이(李)ㆍ김(金)ㆍ최(崔)이다. 인물(人物)은 문하 시중 철성 부원군 문정공(門下侍中鐵城府院君文貞公) 이암(李嵓)이다. 【고려 공민왕 때의 사람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다. 간전(墾田)이 3천 9백 41결이다.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콩ㆍ보리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표고버섯ㆍ송이버섯ㆍ작설다(雀舌茶)ㆍ모래무지ㆍ건합(乾蛤)ㆍ대구ㆍ문어ㆍ생포(生鮑)ㆍ도음어(都音魚)ㆍ미역ㆍ우무[牛毛]ㆍ세모(細毛)ㆍ어교(魚膠)ㆍ왕대[簜]ㆍ지초ㆍ종이ㆍ칠ㆍ사슴가죽ㆍ여우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ㆍ산달피(山獺皮)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麥門冬)ㆍ방풍(防風)이요, 토산(土産)은 녹반(碌磻)이다. 【현(縣) 남쪽 주악곶(住岳串)의 임해암산(臨海岩山)에서 나는데, 구워서 만든다. 품질이 좋다.】 염소(鹽所)가 2이니, 모두 현 북쪽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2백 85보인데, 안에 우물 4가 있다.】 역이 3이니, 송도(松道)ㆍ배둔(背屯)ㆍ춘원(春原)이다. 가배량(加背梁)은 현(縣) 남쪽 17리에 있고, 【수군 도만호(水軍都萬戶)가 수어한다.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로 옮겼다.】 당포(唐浦)는 현 남쪽 47리에 있으며, 【번계 만호(樊溪萬戶)의 병선(兵船)이 여기로 옮겼다. 번계는 본디 현 서쪽 33리에 있었다.】 사량(蛇梁)은 현 남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70리이다. 【구량량 만호(仇良梁萬戶)의 병선이 여기로 옮겼다. 구량량은 본디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각산향(角山鄕)에 있었다.】 봉화(烽火)가 5곳이니, 미륵산(彌勒山)은 현(縣)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거제(巨濟) 가라산(加羅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牛山)에 응한다.】 우산(牛山) 【서쪽으로 좌이산(佐耳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천왕점(天王岾)에 응한다.】 ㆍ천왕점(天王岾) 【동쪽으로 곡산(曲山)에 응한다.】 ㆍ곡산(曲山) 【동쪽으로 진해(鎭海) 가을포(加乙浦)에 응한다.】 ㆍ좌이산(佐耳山) 【서쪽으로 진주 각산향의 주산(主山)에 응한다.】 이다. 관음점사(觀音岾祠)는 현 서쪽에 있다. 【춘추(春秋)로 수령(守令)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상박도(上樸島)ㆍ하박도(下樸島)ㆍ욕질도(褥秩島)의 신(神)에게 이 사(祠)에서 망제(望祭)한다.】 박도(樸島)는 현 남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40리이다. 【구량량(仇良梁)의 영전 선군(營田船軍)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원전】 5 집 651 면
거제현
◎ 거제현(巨濟縣)
본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인데, 신라 문무왕이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거제군(巨濟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무오년에 현령관(縣令官)을 두었는데, 원종(元宗) 12년 신미에 【원나라 지원(至元) 8년이다.】 왜적으로 인하여 땅을 잃고 거창(居昌) 가조현(加祚縣)에 교거(僑居)하였다. 본조 태종 갑오년에 거창(居昌)에 합하여 이름을 제창현(濟昌縣)으로 하였다가, 을미년에 다시 쪼개어 거창현(居昌縣)을 만들고, 금상(今上) 4년 임인에 다시 구도(舊島)로 돌아가게 하여, 4품 이상을 지현사(知縣事)로 충당하였다. 아주현(鵝洲縣)은 본디 거로현(巨老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송변현(松邊縣)은 경덕왕이 남수(南垂)로 이름을 고쳐서, 모두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에서 남수(南垂)를 고쳐서 구명(舊名)대로 하여, 그대로 〈거제군〉의 임내(任內)로 삼았는데, 두 현의 인물(人物)이 모두 없어져서 지금 직촌(直村)을 삼았다.
진산(鎭山)은 국사 당산(國師堂山)이다. 【현 동쪽에 있다. 수군 처치사(水軍處置使)가 제사지낸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옥포(玉浦)에 이르기 25리,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31리, 남쪽으로 곡곶이[谷串]에 이르기 35리, 북쪽으로 영등포(永登浦)에 이르기 45리이다.
호수는 1백 53호, 인구가 4백 23명이며, 군정(軍丁)은 현 수호군(縣守護軍)이 1백 3명이다.
본현(本縣)의 토성(土姓)이 4이니, 정(鄭)ㆍ반(潘)ㆍ박(朴)ㆍ윤(尹)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나(羅)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신(辛) 【영산(靈山)에서 왔다.】 ㆍ이(李)이다. 【고성(固城)에서 왔다. 모두 향리가 되었다.】 촌락성(村落姓)이 2이니, 박(朴)ㆍ백(白)이요, 백성(白姓)의 성이 2이니, 손(孫)ㆍ조(曺)이며, 아주(鵝洲)의 성이 4이니, 신(申)ㆍ문(文)ㆍ갈(葛)ㆍ조(曺)이요, 송변(松邊)의 성이 2이니, 박(朴)ㆍ손(孫)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7백 9결이다.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콩ㆍ메밀이요, 토공(土貢)은 대구어ㆍ문어ㆍ생포(生鮑)ㆍ미역ㆍ우무[牛毛]ㆍ표고버섯ㆍ세모(細毛)이다. 염소(鹽所)가 4이니, 둘은 모두 현 동쪽에 있고, 하나는 현 서쪽에 있으며, 하나는 현 남쪽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3백 21보이다.】 역(驛)이 1이니, 오양(烏壤)이다. 오아포(烏兒浦)는 현 남쪽 29리에 있고,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가 수어한다.】 영등포(永登浦)는 현 동쪽 45리에 있으며, 【수군 만호가 수어한다.】 옥포(玉浦)는 현 동쪽 25리에 있다. 【가배량 도만호(加背梁都萬戶)와 견내량 만호(見乃梁萬戶)가 수어한다.】 봉화(烽火)가 1곳이니, 가라산(加羅山)이 현 남쪽 바닷가에 있다. 【서쪽으로 고성(固城) 미륵산(彌勒山)에 응한다.】
【원전】 5 집 651 면
사천현
◎ 사천현(泗川縣)
본디 사물현(史勿縣)인데, 경덕왕이 사수(泗水)로 이름을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초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는데, 현종 신해년에 사천(泗川)으로 고쳤으며,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사천 현감(泗川縣監)으로 고쳤고, 을미년에 비로소 병마사 겸 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다. 금상(今上) 5년 계묘에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이름을 고쳤다. 【4품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라 일컫는다.】
와룡산(臥龍山)은 현 남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고성(固城)에 이르기 12리, 서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말문향(末文鄕)에 이르기 17리, 북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16리이다.
호수는 3백 70호, 인구가 1천 8백 1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3명, 영진군(營鎭軍)이 17명, 선군(船軍)이 2백 28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이(李)ㆍ황(黃)ㆍ오(吳)ㆍ목(睦)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정(鄭)이며, 【진주에서 왔다.】 속성(續姓)이 2이니, 강(姜) 【진주에서 왔다.】 ㆍ김(金)이다. 【근본은 알 수 없다. 모두 향리가 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2천 77결이다.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조ㆍ보리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표고버섯ㆍ석류(石榴)ㆍ모래무지ㆍ건합(乾蛤)ㆍ어교(魚膠)ㆍ지초(芝草)ㆍ가는 대[篠]ㆍ왕대[簜]ㆍ사슴가죽ㆍ노루가죽ㆍ삵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녹용(鹿茸)이요, 토산(土産)은 미역ㆍ청각(靑角)ㆍ우무[牛毛]ㆍ세모(細毛)ㆍ해삼ㆍ생포(生鮑)ㆍ홍어(洪魚)ㆍ문어ㆍ황어(黃魚)ㆍ은구어ㆍ대구어이다. 염소(鹽所)가 2이니, 모두 현 서쪽에 있다.
성황당 석성(城隍堂石城)은 현 남쪽 2리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5백 88보인데, 안에 샘 1, 못 2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2이니, 관율(灌栗)ㆍ신역(新驛)이요, 봉화가 2곳이니, 침지(針枝)는 현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晉州) 각산향(角山鄕)의 주산(主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현 성황당(城隍堂)에 응한다.】 성황당(城隍堂) 【북쪽으로 진주(晉州) 망진산(望津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진주(晉州)의 없어진 향(鄕) 말문(末文)의 각산(角山)이 현(縣)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구량도(仇良島)는 수로(水路)로 1리 3백 40보이다. 【백성들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원전】 5 집 651 면
거창현
◎ 거창현(居昌縣)
본디 거렬군(居烈郡)인데,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갑오년에 거제(巨濟)와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나누어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하였다. 별호(別號)는 아림(娥林)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가조현(加祚縣)이다. 이는 본디 가소현(加召縣)인데 신라에서 감음(減陰)으로 이름을 고쳐서 거창군(居昌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예전 이름으로 다시 고쳐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옮겨서 거창(居昌)으로 붙였는데, 【소(召)가 변하여 조(祚)가 된 것은, 방언으로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원종(元宗) 신미년에 거제(巨濟)로 이속(移屬)시켰다가 본조(本朝) 금상(今上) 4년 임인에 도로 거창(巨昌)에 붙였다.
삼봉산(三峰山)은 현 북쪽에 있다. 남천(南川) 【그 근원은 감음현(減陰縣) 월성산(月星山)에서 나온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합천 임내(任內) 야로(冶爐)에 이르기 29리, 서쪽으로 안음(安陰)에 이르기 2리, 남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지례(知禮)에 이르기 51리이다.
호수는 5백 5호, 인구가 1천 6백 4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47명, 진군(鎭軍)이 39명, 선군(船軍)이 2백 68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5이니, 유(劉)ㆍ정(丁)ㆍ장(章)ㆍ신(愼)ㆍ주(朱)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최(崔)이며, 가조(加祚)의 성이 5이니, 사(史)ㆍ조(曺)ㆍ갈(葛)ㆍ유(劉)ㆍ신(辛)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천 4백 23결이다. 【논이 약간 적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기장ㆍ감ㆍ대추ㆍ배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호도(胡桃)ㆍ석이(石茸)ㆍ칠ㆍ종이ㆍ자리[席]ㆍ여우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현(縣) 남쪽 고천리(古川里)에 있다. 【하품이다.】
금귀산 석성(金貴山石城)은 현(縣) 동쪽 12리에 있다. 【둘레가 5백 91보인데, 안에 샘 2가 있다.】 역(驛)이 3이니, 무촌(茂村)ㆍ성기(星奇)ㆍ성초(省草)이요, 봉화(烽火)가 1곳이니, 금귀산(金貴山)이다. 【남쪽으로 합천(陜川) 소이현(所伊縣)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현 거을미(巨乙未)에 응하며, 또 지례(知禮) 산성(山城)에 응한다.】 험조처(險阻處)가 1곳이니, 성초현(省草峴)이다. 이는 현 북쪽 51리에 있는데, 전라도 무주(茂朱)의 지로(指路)이다. 험조(險阻)한 곳이 7리이다. 견암사(見庵寺)는 가조현(加祚縣) 우두산(牛頭山)에 있다. 【교종(敎宗)에 속하며, 급전(給田)이 1백 50결이다. 우리 태조가 명하여, 수륙사(水陸社)를 만들고, 매년 춘추(春秋)로 향(香)을 내려 재(齋)를 베푼다.】
【원전】 5 집 652 면
하동현
◎ 하동현(河東縣)
본디 한다사군(韓多沙郡)인데, 경덕왕이 하동군(河東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갑오년에 남해현(南海縣)을 합하여 하남 현령(河南縣令)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나누어서 하동 현감(河東縣監)을 두었다. 별호(別號)는 청하(淸河)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곤남(昆南)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악양현(岳陽縣)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임내인 금양(金陽)에 이르기 4리, 북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21리이다.
호수는 3백 46호, 인구가 1천 1백 8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5명, 진군(鎭軍)이 11명, 선군(船軍)이 1백 58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정(鄭)ㆍ곽(郭)ㆍ이(李)ㆍ하(河)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2백 72결이다. 【논이 3분의 2가 못된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조ㆍ뽕나무ㆍ삼[麻]ㆍ목면(木綿)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표고버섯ㆍ감ㆍ건합(乾蛤)ㆍ칠ㆍ종이ㆍ왕대[簜]ㆍ사슴가죽ㆍ노루가죽ㆍ삵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ㆍ방풍(防風)이요, 토산(土産)은 작설다(雀舌茶)ㆍ생포(生鮑)ㆍ은구어ㆍ문어ㆍ모래무지ㆍ홍어(洪魚)ㆍ우무[牛毛]ㆍ세모(細毛)ㆍ미역ㆍ주토(朱土)ㆍ대구어이다. 어량(魚梁)이 3곳이요, 염소(鹽所)가 1이니, 진주(晉州) 지경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내왕하면서 굽는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3백 79보인데, 안에 우물 5, 못 1이 있다.】 역(驛)이 3이니, 횡포(橫浦)ㆍ율원(栗原)ㆍ마전(馬田)이다.
【원전】 5 집 652 면
진성현
◎ 진성현(珍城縣)
강성현(江城縣)은 본디 궐지군(闕支郡)인데, 경덕왕이 궐성군(闕城郡)으로 이름을 고치고, 고려에서 강성현(江城縣)으로 고쳤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명진현(溟珍縣)은 본디 매진이현(買珍伊縣)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다. 경덕왕이 명진(溟珍)으로 이름을 고쳐서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원종(元宗) 신미년에 왜적을 피해 육지로 나와서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영선현(永善縣)에 교거(僑居)하였는데, 본조(本朝)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 두 현을 합하여 진성(珍城)이라 이름하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단계(丹溪)이다. 이는 본디 적촌현(赤村縣)인데, 경덕왕이 단읍(丹邑)으로 이름을 고쳐서 궐성군(闕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내속(來屬)시켰다.
신안진(新安津) 【그 근원이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와서 현(縣) 동남쪽을 지난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주(晉州) 토천(吐川)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진주(晉州) 단속(斷俗)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문천(文川)에 이르기 6리, 북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34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2백 34호, 인구가 8백 72명이요, 단계(丹溪)의 호수는 1백 39호, 인구가 4백 96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5명, 영진군(營鎭軍)이 29명, 선군(船軍)이 1백 62명이다.
강성현(江城縣)의 성이 4이니, 문(文)ㆍ송(宋)ㆍ여(呂)ㆍ이(李)이요, 내성(來姓)이 1이 니, 하(河)이며, 【진주에서 왔다.】 속성(續姓)이 6이니, 주(周) 【초계(草溪)에서 왔다.】 ㆍ김(金) 【용궁(龍宮)에서 왔다.】 ㆍ김(金) 【송림(松林)에서 왔다.】 김(金) 【계성(桂城)에서 왔다.】 ㆍ탁(卓) 【근본은 알 수 없다.】 ㆍ김(金) 【김해에서 왔다.】 이다. 명진(溟珍)의 성이 5이니, 임(任)ㆍ조(曺)ㆍ한(韓)ㆍ허(許)ㆍ하(河)이요, 속성이 1이니, 신(申)이며, 【아주(鵝州)에서 와서 지금 향리가 되었다.】 단계(丹溪)의 성이 6이니, 이(李)ㆍ하(河)ㆍ서(徐)ㆍ여(余)ㆍ사(史)ㆍ송(宋)이다. 인물(人物)은 좌사의 대부 증 참지의정부사 강성군(左司議大夫贈參知議政府事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이다. 【고려 말기 사람인데, 본조 태종 때에 추증(追贈)하였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7백 50결이다. 【논이 7분의 4가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피ㆍ뽕나무ㆍ삼[麻]ㆍ감ㆍ목면(木綿)이요, 【우리 동방에 오랫동안 목면(木綿)이 없었는데, 문익점이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들어갔다가 그 종자를 구하고, 또 가꾸고 길쌈하는 방법을 알아 가지고 와서, 화분에 심었다. 점점 고을[鄕曲]에 전하여 드디어 일국에 퍼졌다.】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은구어ㆍ왕대[簜]ㆍ칠ㆍ종이ㆍ사슴가죽ㆍ노루가죽ㆍ여우가죽ㆍ수달피(水獺皮)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단계현 동쪽 두곡리(豆谷里)에 있다. 【하품이다.】
강산 석성(江山石城)은 현(縣) 북쪽 6리에 있다.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 그 반이고, 둘레가 1백 50보이다. 안에 작은 못 2, 작은 샘 1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신안(新安) 【현(縣) 경계에 있다.】 ㆍ신역(新驛) 【단계에 있다.】 이요, 봉화(烽火)가 1곳이니, 입암(笠嵓)이 단계현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晉州) 광제산(廣齊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삼가현 금성(金城)에 응한다.】
【원전】 5 집 652 면
칠원현
◎ 칠원현(漆原縣)
본디 칠토현(漆吐縣)인데, 경덕왕이 칠식(漆湜)으로 이름을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칠원(漆園)으로 고쳐 현종 무오년 김해부(金海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원(園)’자가 바뀌어 원(原)이 되었다.】 별호(別號)는 구성(龜城)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구산(龜山)이다. 이는 고려 때에 성법 부곡(省法部曲)이라 일컬어 웅신현(熊神縣)에 붙였는데, 뒤에 구산현(龜山縣)으로 고쳐서 금주(金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내속(來屬)시켰다. 별호(別號)는 은산(銀山)이다.
진산(鎭山)은 청룡(靑龍)이요, 우질포진(亐叱浦津)은 현 서쪽에 있다. 【낙동강 하류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창원(昌原)에 이르기 11리, 서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진해(鎭海)에 이르기 17리, 북쪽으로 영산(靈山)에 이르기 24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3백 37호, 인구가 1천 3백 30 단(單) 1명이요, 구산의 호수는 1백 4호, 인구가 3백 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0명, 영진군(營鎭軍)이 28명, 선군(船軍)이 2백 25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3이니, 김(金)ㆍ윤(尹)ㆍ정(丁)이요, 구산의 성이 1이니, 제(諸)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고, 간전(墾田)이 1천 8백 19결이다. 【논이 4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보리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표고버섯ㆍ미역ㆍ지초ㆍ홍화(紅花)ㆍ칠ㆍ종이ㆍ왕대ㆍ사슴가죽ㆍ여우가죽ㆍ수달피(水獺皮)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ㆍ맥문동(麥門冬)이요, 토산(土産)은 감ㆍ대구어이다. 어량(魚梁)이 1소(所)이니, 구산현(龜山縣) 여음포(餘音浦)에 있다. 【주로 대구어가 잡힌다.】 염소(鹽所)가 1이니, 구산 현 남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창인(昌仁)ㆍ영포(靈浦)이요, 봉화가 1곳이니, 안곡산(安谷山)이 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창원(昌原)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북쪽으로 영산현(靈山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예전의 회원현(會原縣) 내포향(內浦鄕)이 구산현(龜山縣)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원전】 5 집 652 면
산음현
◎ 산음현(山陰縣)
본디 지품천현(知品川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궐성군(闕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산양(山陽)이다. 부곡(部曲)이 1이니, 개품(皆品)이다. 【예전에는 단계(丹溪)에 속하였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성(珍城) 임내(任內)인 단계(丹溪)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함양(咸陽)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진성(珍城)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23리이다.
호수는 2백 57호, 인구가 1천 1백 38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8명, 진군(鎭軍)이 14명, 선군(船軍)이 1백 88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5이니, 윤(尹)ㆍ서(徐)ㆍ조(曺)ㆍ심(沈)ㆍ여(余)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송(宋)ㆍ진(陳)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최(崔)ㆍ양(楊)이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개품(皆品)의 성이 2이니, 조(曺)ㆍ오(吳)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송(宋)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진(陳)이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5백 35결이다. 【논이 7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조ㆍ보리ㆍ뽕나무ㆍ삼[麻]ㆍ목면(木綿)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작설다(雀舌茶)ㆍ송이버섯ㆍ석이(石茸)ㆍ감ㆍ칠ㆍ왕대ㆍ녹포(鹿脯)ㆍ여우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당귀ㆍ백급(白芨)ㆍ인삼ㆍ오미자요, 토산(土産)은 은구어ㆍ사철(沙鐵)이다. 【현 북쪽 마연동(馬淵洞) 산에서 난다. 세공(歲貢)이 정철(正鐵) 7천 7백 94근이다.】
역(驛)이 1이니, 전곡(戩穀)이다. 【시속에서는 정곡(正谷)이라 한다.】
【원전】 5 집 652 면
안음현
◎ 안음현(安陰縣)
이안현(利安縣)은 본디 마리현(馬利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감음현(減陰縣)은 본디 남내현(南內縣)인데, 경덕왕이 여만(餘萬)으로 이름을 고쳐서 거창군(居昌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 무오년에 모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감음 감무(減陰監務)를 두고 이안(利安)을 이에 붙였는데, 본조 태종 17년 정유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안음현(安陰縣)으로 고쳤다. 소(所)가 1이니, 가을산(加乙山)이다. 【예전에는 함양(咸陽)에 붙였는데, 지금은 없어져 직촌(直村)이 되었다.】
지우산(知雨山)은 현 북쪽에 있고, 황석산(黃石山)은 현 서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거창(居昌)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에 이르기 41리, 남쪽으로 함양(咸陽)에 이르기 5리, 북쪽으로 거창(居昌)에 이르기 50리이다.
호수는 4백 81호, 인구가 7백 93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5명, 진군(鎭軍)이 34명, 선군(船軍)이 1백 88명이다.
이안(利安)의 성이 5이니, 조(曺)ㆍ임(林)ㆍ김(金)ㆍ표(表)ㆍ하(河)이요, 감음(減陰)의 성이 4이니, 공(孔)ㆍ황(黃)ㆍ서문(西門)ㆍ서(徐)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이(李)이다. 【우봉(牛峯)에서 왔다.】 가을산(加乙山)의 성이 4이니, 고(高)ㆍ윤(尹)ㆍ박(朴)ㆍ안(安)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송(宋)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춥고, 간전(墾田)이 1천 7백 93결이다. 【논이 약간 적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조ㆍ감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칠ㆍ종이ㆍ왕대ㆍ곰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안식향(安息香)ㆍ백급(白芨)이요, 토산(土産)은 은구어이다.
황석산 석성(黃石山石城)은 현 서쪽 25리에 있다. 【둘레가 1천 87보인데, 안에 시내 1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고, 함양(咸陽) 군창에서도 아울러 들여다 둔다.】 역(驛)이 1이니, 신역(新驛)이다. 【이안(利安)에 있다.】 험조처(險阻處)가 1이니, 육십현(六十峴)이 현(縣) 서쪽 41리에 있다.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으로 가는 지로(指路)인데, 그 험한 곳이 2리이다.
【원전】 5 집 652 면
삼가현
◎ 삼가현(三嘉縣)
삼기현(三岐縣)은 본디 삼지현(三支縣)인데, 【마장(麻杖)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삼기(三岐)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민왕 계축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갑술년에 왕사(王師) 자초(自超)의 고향인 까닭으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가, 태종 신사년에 현(縣)으로 낮추었고, 갑오년에 합천(陜川) 임내(任內)인 가수현(嘉樹縣)을 이에 붙여서 삼가(三嘉)로 이름을 고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는 기산(岐山)이다. 가수현(嘉樹縣)은 본디 가주화현(加主火縣)인데, 경덕왕이 가수(嘉壽)로 이름을 고쳐서 강주군(康州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로 이속(利屬)시켰다. 【‘수(樹)’자가 바뀌어서 ‘수(壽)’가 되었다.】 별호(別號)는 봉성(鳳城)이다.
황산(黃山)은 현 서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합천(陜川)에 이르기 9리, 서쪽으로 산음(山陰)에 이르기 16리, 남쪽으로 진성(珍城)에 이르기 46리, 북쪽으로 거창(居昌)에 이르기 23리이다.
호수는 3백 7호, 인구가 2천 2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7명, 영진군(營鎭軍)이 40명, 선군(船軍)이 1백 80 단(單) 1명이다.
삼기(三岐)의 성이 5이니, 박(朴)ㆍ염(廉)ㆍ오(吳)ㆍ조(曺)ㆍ공(公)이요, 가수(嘉樹)의 성이 4이니, 이(李)ㆍ노(魯)ㆍ박(朴)ㆍ삼(森)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9백 13결이다. 【논이 2분의 1이 못된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조ㆍ뽕나무ㆍ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감ㆍ송이버섯ㆍ석이(石茸)ㆍ칠ㆍ종이ㆍ왕대ㆍ지초ㆍ삵가죽ㆍ노루가죽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ㆍ사철(沙鐵)이다. 【삼기현 북쪽 모태역리(毛台亦里) 함정산(檻頂山)에서 난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가수현 서쪽 감한리(甘閑里)에 있다. 【중품이다.】
악견산 석성(岳堅山石城)은 현 동쪽 7리에 있다. 【험조(險阻)하며, 둘레가 8백 21보이다. 안에 샘 3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신역(新驛) 【삼기(三岐)에 있다.】 ㆍ유린(有隣)이요, 봉화가 1곳이니, 금성(金城)이 삼기현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단계현(丹溪縣) 입암(笠嵓)에 응하고, 북쪽으로 합천(陜川) 소을현(所乙峴)에 응한다.】
【원전】 5 집 653 면
의령현
◎ 의령현(宜寧縣)
본디 장함현(獐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고, 신번현(新繁縣)을 이에 붙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신번현(新繁縣)이다. 이는 본디 신이현(神尔縣)인데, 【주오(朱烏)라고도 하고, 천천(泉川)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의상(宜桑)으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었다. 부곡(部曲)이 1이니, 정골(正骨)이요, 【예전에는 곤명(昆明)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향(鄕)이 1이니, 지산(砥山)이다. 【예전에는 곤명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망하고 직촌이 되었다.】
자굴산(闍崛山)은 현 북쪽에 있고, 정암진(鼎巖津)은 현 남쪽에 있다.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하류이다. 나룻배가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초계(草溪)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29리, 남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24리, 북쪽으로 합천(陜川)에 이르기 18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5백 4호, 인구가 1천 6백 29명이요, 신번(新繁)의 호수는 5백 55호, 인구가 9백 8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0명, 영진군(營鎭軍)이 70명, 선군(船軍)이 3백 27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4이니, 남(南)ㆍ심(沈)ㆍ여(余)ㆍ옥(玉)이요, 속성(續姓)이 3이니, 임(林)ㆍ김(金)ㆍ강(姜)이며, 【모두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신번(新繁)의 성이 5이니, 진(陳)ㆍ서(徐)ㆍ임(任)ㆍ석(石)ㆍ오(吳)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며,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정골(正骨)의 성이 1이니, 옥(玉)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강(姜)ㆍ유(柳) 【모두 진주(晉州)에서 왔다.】 ㆍ조(趙) 【함안(咸安)에서 왔다.】 이며, 지산(砥山)의 성이 1이니, 여(余)요, 없어진 소(所)인 저지(楮旨)의 성이 1이니, 박(朴)이다. 인물(人物)은 좌의정 충경공(左議政忠景公) 남재(南在)와 참찬문하부사 강무공(參贊門下府事剛武公) 남은(南誾)이다. 【형제가 함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서 본조(本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천 5백 58결이다. 【논이 3분의 2에 약하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보리ㆍ뽕나무ㆍ삼[麻]ㆍ모시[苧]ㆍ목면[木綿]ㆍ감ㆍ배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지초ㆍ가는 대ㆍ왕대ㆍ칠ㆍ종이ㆍ사슴가죽ㆍ노루가죽ㆍ여우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麥門冬)ㆍ속단(續斷)ㆍ인삼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본현(本縣) 동쪽 원당리(元堂里)에 있고, 【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원당리에 있다. 【중품이다.】
역(驛)이 2이니, 지남(知南) 【현(縣) 경계에 있다.】 ㆍ신역(新驛) 【신번(新繁)에 있다.】 이요, 봉화가 1곳이니, 가막산(可莫山)이 본현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함안(咸安) 소산(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계(草溪) 미타산(彌陁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합천(陜川)의 남촌(南村) 어등화리(於等火里)와 초계(草溪) 다호점리(多乎岾里)가 신번현(新繁縣) 서촌(西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원전】 5 집 653 면
진해현
◎ 진해현(鎭海縣)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팔진(八鎭)이다. 【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 여항산(如航山)이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구산(龜山)에 이르기 13리, 서쪽으로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반성(班城)에 이르기 13리, 남쪽으로 고성(固城)에 이르기 11리, 북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10리이다.
호수는 2백 2호, 인구가 9백 53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명, 영진군(營鎭軍)이 2명, 선군(船軍)이 1백 7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김(金)ㆍ조(曺)ㆍ성(成)ㆍ신(申)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하(河) 【진주에서 왔다.】 ㆍ이(李) 【사천(泗川)에서 왔다.】 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정(鄭)이다. 【근본은 알 수 없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고, 간전(墾田)이 7백 65결이다. 【논이 7분의 3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ㆍ조ㆍ보리ㆍ석류(石榴)이요, 토공(土貢)은 꿀ㆍ밀[黃蠟]ㆍ칠ㆍ종이ㆍ사슴가죽ㆍ산달피(山獺皮)ㆍ여우가죽ㆍ표고버섯ㆍ작설다(雀舌茶)ㆍ왕대[簜]ㆍ어교(魚膠)ㆍ문어ㆍ모래무지ㆍ생포(生鮑)ㆍ홍합ㆍ대구어ㆍ분곽(粉霍)ㆍ세모(細毛)이다. 염소(鹽所)가 3이니, 둘은 현 동쪽에 있고, 하나는 현 서쪽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1백 66보인데, 안에 우물 1이 있다.】 역(驛)이 1이니, 상령(常令)이요, 봉화가 1곳이니, 가을포(加乙浦) 봉화가 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창원(昌原) 여포(餘浦)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성(固城) 곡산(曲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함안(咸安) 소산(所山)에 응한다.】 범의도(凡矣島)는 현 남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3리이다. 【백성들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원전】 5 집 653 면
- [주-D001] 혐명(嫌名) :
- 이름과 음이 비슷한 것.
- [주-D002] 계음(禊飮) :
- 음력 3월 3일에 수상(水上)에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구하는 계제(禊祭) 때의 주연(酒宴).
- [주-D003] 칠식(漆湜) :
- 《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칠원현(漆原縣) 편에는 칠식(漆湜)이 칠제(漆隄)로 나와 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익현 유제한 (공역) | 1972
> 조선왕조실록 > 단종실록 > 단종 2년 갑술 > 7월 2일 > 최종정보
단종 2년 갑술(1454) 7월 2일(신해)
02-07-02[01] 담제를 경희전에서 행하다
친히 담제(禫祭)를 경희전(景禧殿)에서 행하였다. 그 의식(儀式)은 이러하였다.
“기일(期日) 전 1일에 전사(殿司)가 그 요속(僚屬)을 거느리고 전(殿)의 안팎을 깨끗이 소제하고 나면 집례(執禮)가 전하(殿下)의 욕위(褥位)를 동계(東階) 동남쪽에 서향해 설치하고, 집례의 자리는 동계 아래 서쪽으로 가깝게 서향해 설치하고는 알자(謁者)ㆍ찬자(贊者)ㆍ찬인(贊引)은 그 남쪽에 있되 약간 뒤로 물려서 북쪽을 위로 삼아 설치하고, 종친(宗親)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자리는 전정(殿庭) 바깥에, 문반(文班)은 동쪽에, 무반(武班)은 서쪽에 설치하되, 모두 등급마다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 북향하여 상대하여 머리를 마주하게 하며, 【종친(宗親)은 품계마다 반두(班頭)를 따로 설치하였고, 대군(大君)은 특히 정1품 앞에 그 자리를 설치하였다.】 감찰(監察)의 자리 2개소를 문무반(文武班) 뒤에 북향하게 설치하였다. 【서리(署吏)는 각기 그 뒤에 배종(陪從)케 한다.】
예감(瘞坎)은 전(殿)의 북쪽 임방(壬方)인 곳에 파되 네모지게 깊게 파고 그 물건을 넣을 만하게 한다. 그날 축시(丑時) 5각(刻) 전에 【축시 5각 전이란 곧 삼경(三更), 삼점(三點)이며, 행사(行事)는 축시 1각(刻)에 한다.】 궁위령(宮闈令)이 신악(神幄)을 깨끗이 털고 종친 및 백관은 담복(禫服) 【진하게 물들인 옥색 단령(玉色團領)과 오사모(烏紗帽)ㆍ흑각대(黑角帶)ㆍ백피화(白皮靴)로 한다.】 을 갖추고 모두 문 밖의 자리로 나아간다. 집례(執禮)가 알자(謁者)와 찬자(贊者)와 찬인(贊引)을 거느리고 먼저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겹줄로 서쪽을 위로 삼고 북향해 네 번 절하고 나서 각기 그 자리로 간다. 봉례랑(奉禮郞)이 종친 및 백관을 나누어 인도해 각기 그 자리로 간다. 판통례(判通禮)가 그 재전(齋殿) 앞으로 나아가서 【그날 출궁(出宮)할 때 산(繖)ㆍ선(扇) 등의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평상시의 의절과 같다.】 부복하고 꿇어앉아 외판(外辦)을 아뢰고는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물러 나온다. 【뒤에도 같다.】
전사(殿下)께서 담복(禫服) 【참포(黲布)ㆍ익선관(翼善冠)ㆍ오서대(烏犀帶)ㆍ백피화(白皮靴).】 을 갖춘 뒤에 찬례(贊禮)가 임금을 인도하여 그 자리로 들어간다. 【근시(近侍)는 따라 들어가고 산선(繖扇) 및 호위관(護衛官)은 문 밖에 머무른다.】 집례가 ‘곡(哭)’ 을 말하여 찬례가 부복하고 꿇어앉아서 ‘부복하시고 곡하소서.’ 하고 계청(啓請)하여 전하께서 꿇어앉아 부복하고 곡(哭)하고, 종친 및 백관도 이와 같이 한다. 【찬자(贊者)도 역시 창(唱)한다. 무릇 집례의 말이 있으면 찬자는 모두 그 말을 전해 창(唱)한다.】 집례가 ‘지곡(止哭), 사배(四拜)’를 말하여 찬례가 ‘지곡하시고 일어나시어 사배하시고 다시 일어나셔서 평신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임금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 번 절하고 다시 일어나 몸을 바로 하며 종친 및 백관도 역시 이와 같이 한다. 【찬자가 역시 창한다.】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임시 재전(齋殿)으로 나아가고 봉례랑이 종친 및 백관을 인도해 나온 뒤에 상위원(尙衣院)에서 길복(吉服) 【현포(玄袍)ㆍ익선관(翼善冠)ㆍ오서대(烏犀帶)ㆍ백피화(白皮靴).】 을 바친다.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그 재전(齋殿)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전하에게 옷을 바꾸어 입을 것을 계청하여 전하가 옷을 바꾸어 입으면, 종친 및 백관도 옷을 바꾸어 입는다. 【흑색 단령(黑色團領)ㆍ흑각대(黑角帶)로 한다.】 집례가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의 자리를 전하의 욕위(褥位) 뒤 남쪽으로 가깝게 북쪽을 위로하여 서향해 설치하고 집사자(執事者)의 자리를 중문(中門) 안 서쪽에 동쪽을 위로하여 북향해 설치하며, 헌관(獻官)과 모든 집사(執事)의 문밖에서의 자리는 중문 밖 길동쪽에다가 남쪽으로 가깝게 겹줄로 서쪽을 위로하여 북향해 설치한다. 전사관(典祀官)과 전사(殿司)가 각기 그 요속(僚屬)을 인솔하고 들어가 축판(祝版)을 대왕 신좌(大王神座)의 오른쪽에 바치고 【점(坫)이 설치 돼 있다.】폐비(幣篚) 2개를 준소(尊所)에 진설(陳設)하며, 향로(香爐) 향합(香合)과 아울러 촉(燭)을 대왕 신좌 앞에 진설한다.
그 다음에 예찬(禮饌)을 진설하고, 또 예찬을 왕후 신좌(王后神座) 앞에도 진설한다. 【찬품(饌品)은 상제(祥祭) 때와 같다.】 준ㆍ이(尊彝)를 창문 밖 왼쪽에 진설하는데 각이(斝彝)가 1개 【명수(明水)를 채운다.】 황이(黃彝)가 1개 【울창(鬱鬯)으로 채운다.】 , 착준(着尊)이 2개 【하나는 명수(明水)로 채우고, 하나는 예제(醴齊)로 채운다.】 , 호준(壺尊)이 2개 【하나는 명수(明水)로 채우고 하나는 앙제(盎齊)로 채운다.】 , 산뢰(山罍)가 2개 【하나는 현주(玄酒)로 채우고, 하나는 청주(淸酒)로 채운다.】 로 네 줄이 되게 하여, 【첫째 줄은 각이(斝彝), 황이(黃彝)이고, 둘째 줄은 착준(着尊)이고, 셋째 줄은 호준(壼尊)이고, 넷째 줄은 산뢰(山罍)로 되어 있다.】 모두 작(勺)과 멱(羃)이 얹어서 서쪽을 위로하여 북향하게 설치한다. 【무릇 준(尊)에는 명수(明水)로 채워진 것이 위가 된다.】 또 찬반(瓚槃) 1개를 준소(尊所)에 설치하고 관세위(盥洗位)를 동계(東階)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한다. 【관세(盥洗)는 동쪽에 있고, 작(爵)은 서쪽에 있으며 반(槃)과 이(匜)가 있다.】 뇌(罍)는 세(洗) 동쪽에 있게 하여 작(勺)을 얹어 놓고 비(篚)는 세(洗)의 서남쪽에 있게 하여 수건[巾]을 채워 놓는다. 【만약 작세(爵洗)의 비(篚)같으면 또 찬(瓚) 1개와 작(爵) 2개가 채워져 있고, 점(坫)이 있다.】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의 세(洗)는 또 동남쪽에 북향해 있는데, 【관세(盥洗)는 동쪽에 있고, 작세(爵洗)는 서쪽에 있다.】 뇌(罍)는 세(洗)의 동쪽에 있어 작(勺)을 얹어 놓고 비(篚)는 세(洗)의 서남쪽에 있으며, 수건이 채워 놓는다. 【작세(爵洗)의 비(篚) 같으면 또 작(爵) 4개를 채워놓고 또 점(坫)이 있다.】 모든 집사(執事)의 관세(盥洗)도 아헌관과 종헌관의 세(洗) 동남쪽에 북향에 설치하며, 집준자(執尊者)ㆍ집뢰자(執罍者)ㆍ집비자(執篚者)ㆍ집멱자(執羃者)의 자리는 준ㆍ뇌ㆍ비ㆍ멱뒤에 설치한다. 3각(刻) 전에 종친 및 백관이 모두 외문(外門) 밖으로 나가고, 헌관(獻官)과 모든 집사(執事)들도 문 밖에 마련된 자리로 나아간다. 1각(刻) 전에 집례(執禮)가 알자(謁者)ㆍ찬자(贊者)ㆍ찬인(贊引)을 인솔하고 먼저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고, 찬인(贊引)ㆍ전사관(典祀官)ㆍ대축(大祝)ㆍ축사(祝史)ㆍ재랑(齋郞)ㆍ궁위령(宮闈令)이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겹줄로 북향해 서쪽을 위로 하여 선다.
집례가 ‘사배(四拜)’를 말하며, 이어 찬자(贊者)가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 을 창(唱)하면 전사관 이하 모두 몸을 구부려서 네번 절하고 일어나 다시 몸을 바로한다. 찬인이 전사관을 인도하여 그 자리로 나아가고 다시 대축과 축사ㆍ재랑ㆍ궁위령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서 손씻고 수건에 닦고 나서 각기 자기자리로 나아간다. 이에 봉례랑이 종친 및 백관을 나누어서 인도하여 각기 그 자리로 나가며, 알자가 아헌관과 종헌관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역시 그 자리로 나아간다. 대축이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 대왕 신위(大王神位) 앞으로 나아가서, 궤(匱)를 열고 신주(神主)를 받들어 내어 그 신좌(神座)에 설치하고는 백저건(白苧巾)으로 덮고, 궤(几)는 그 오른쪽에 설치하며 궁위령이 왕후 신좌(王后神座) 앞으로 나아가 궤를 열고 신주를 받들어 내어 신좌에 설치하고는 청저건(靑苧巾)으로 덮고 궤(几)는 그 오른쪽에 설치한다. 【대왕의 신좌는 서쪽에 있고, 왕후의 신좌는 동쪽에 있다.】
그 다음 집사자가 작세위(爵洗位)로 나아가 찬(瓚)을 씻어서 닦고 작(爵)을 씻고 닦아 비(篚)속에 넣고는 이를 받들고 준소(尊所)로 나아가 점(坫) 위에 놓는다. 판통례(判通禮)가 재전(齋殿) 앞으로 나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행례(行禮)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전하가 나오는데, 찬례(贊禮)가 전하를 인도하여 들어가서 그자리로 나간다. 【근시(近侍)가 따라서 들어간다.】 집례(執禮)가 ‘곡(哭)’ 하고 말하면, 찬례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전하에게, ‘궤하여 부복하고 곡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임금이 꿇어앉아 부복하고 곡을 하며, 아헌관(亞獻官) 이하 그 위차(位次)에 있는 자는 같이 한다. 【찬자(贊者)가 역시 창(唱)한다.】 집례가 ‘지곡(止哭)’ 하고 말하면, 찬례가 다시 임금에게 ‘지곡하시고 일어나시어 평신(平身)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임금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 자는 모두 같이 한다. 【찬자가 역시 창한다.】 집례가 ‘행전폐례(行奠弊禮)’ 하고 말하면 찬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 북향해 서고, 근시(近侍) 【승지가 한다.】 1인이 꿇어앉아 이(匜)를 가지고 일어나 물을 붓고 1인은 꿇어앉아 반(槃)을 가지고 물을 받는다. 이에 전하가 손을 씻고 근시가 꿇어앉아 비(篚)에서 수건을 가져다가 바친다.
전하가 손을 닦고 나면 근시가 수건을 받아서 다시 비(篚)에 놓는다.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 【근시도 따라서 올라 간다.】 준소(尊所)에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면 집준자(執尊者)는 멱(羃)을 들고 근시(近侍) 1인이 울창(鬱鬯)을 뜨면, 한 사람이 찬(瓚)을 가지고 울창을 받는다.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고 들어가 신좌(神座) 앞에 나아가 북향하고 서면, 찬례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전하에게 ‘궤(跪)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임금이 꿇어앉으면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 자도 같이 한다. 【찬자(贊者)가 역시 창(唱)한다.】 근시 4인이 향합(香合)을 받들어 꿇어앉아 바치고 또 1인은 향로(香爐)를 받들어 꿇어앉아 바친다. 찬례가 ‘삼상향(三上香)’ 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근시가 향로를 안(案) 위에 드린다. 근시가 찬(瓚)을 꿇어앉아 바치면 찬례가 ‘집찬(執瓚)하고 관지(灌地)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이를 마치면 찬을 근시에게 주어 근시는 다시 대축(大祝)에게 주어 이를 준소(尊所)에 두게한다. 근시가 폐비(幣篚)를 꿇어앉아 바치면 찬례가 ‘집폐(執幣)하여 헌폐(獻幣)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전하가〉 폐를 근시에게 주어 대왕 신좌(大王神座) 앞에 드린다.
또 근시가 〈다른〉 폐비(幣篚)를 가지고 꿇어앉아 바치면 찬례가 ‘집폐(執幣)하여 헌폐(獻幣)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전하가〉 폐를 근시에게 주어 이를 왕후 신좌(王后神座) 앞에 드린다. 【무릇 진향(進香)ㆍ진찬(進瓚)ㆍ진폐(進幣)를 할 때는 모두 동쪽에서 서향하여 하고, 전로(奠爐)ㆍ전찬(奠瓚)ㆍ전폐(奠幣)할 때는 모두 서쪽에서 동향하여 하며, 진작(進爵)ㆍ전작(奠爵)도 이에 준해 한다.】 찬례가 ‘부복하였다가 흥하고 평신(平身)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전하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고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 자도 모두 같이 한다. 【찬자(贊者)가 역시 창(唱)한다.】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지게문[戶]으로 나가서 내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면, 집례가 ‘행초헌례(行初獻禮)’를 말하여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동계(東階)로 부터 올라가서 준소(尊所)에 나아가 서향하면 집준자(執尊者)는 멱(羃)을 들고 근시(近侍) 1인이 예제(醴齊)를 뜨고 다른 2인이 작(爵)으로 그 술을 받는다.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들어가 신좌(神座)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서면 찬례가 꿇어앉아 부복하고는 ‘궤(跪)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전하가 무릎을 꿇는다.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 자도 모두 같이 한다. 【찬자가 역시 창한다.】
근시가 작(爵)을 꿇어앉아 바치면 찬례가 ‘집작(執爵)하고 헌작(獻爵)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전하가〉 작을 근시에게 주어서 대왕 신좌(大王神座) 앞에 드린다. 또 근시가 부작(副爵)을 꿇어앉아 바치면 찬례가 ‘집작(執爵)하고 헌작(獻爵)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전하가〉 작을 근시에게 주어 왕후 신좌(王后神座) 앞에 드린다. 찬례가 〈전하에게〉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 북향하여 궤하소서.’ 하고 계청하고 대축(大祝)이 대왕 신좌의 오른쪽으로 나아가 동향하여 무릎을 꿇고 축문(祝文)을 읽고 나면 찬례가 ‘부복하였다가 흥하여 평신하소서.’ 하고 계청하여 전하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한다.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 자도 같이 한다. 【찬자가 역시 창한다.】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지게문 밖으로 나가서 내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집례가 ‘행아헌례(行亞獻禮)’를 말하면, 알자(謁者)가 아헌관(亞獻官)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북향해 서서 손을 씻고 수건에 손을 닦고 나면 알자가 다시 아헌관을 인도하여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서 준소(尊所)에 나아가 서향하고 선다.
집준자(執尊者)가 멱(羃)을 들고 앙제(盎齊)를 뜨면 집사자(執事者) 2인이 작(爵)을 가지고 그 술을 받는다. 이에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대왕 신좌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서면 ‘궤(跪)하라.’ 하고 찬(贊)한다. 집사자가 작(爵)을 아헌관에게 주어 아헌관이 집작(執爵)하여 헌작(獻爵)하는데 그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대왕 신좌 앞에 드린다. 또 집사자가 부작(副爵)을 아헌관에게 주면 아헌관이 집작(執爵)하여 헌작하는데 그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대왕 신좌 앞에 드린다. 또 집사자가 부작(副爵)을 아헌관에게 주어 아헌관이 집작(執爵)하여 헌작(獻爵)하는 데 그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왕후 신좌(王后神座) 앞에 드린다. 알자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평신하라.’ 하고 찬(贊)하고는 아헌관을 인도하여 지게문 밖으로 나와서 내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집례가 ‘행종헌례(行終獻禮)’ 하고 말하면, 이에 알자가 종헌관(終獻官)을 인도하여 행례(行禮) 하기를 아헌(亞獻)의 의절같이 하고는 인도하여 내려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집례가 ‘곡(哭)’ 하고 말하면 찬례가 부복하여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궤하고 부복하여 곡(哭)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전하가 무릎을 꿇고 부복하여 곡을 하되 슬픈 정을 다한다.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 자는 모두 같이 한다. 【찬자가 역시 창한다.】 집례가 ‘지곡(止哭), 사배(四拜)’라고 말하면 찬례가 ‘지곡하시고 일어나시어 사배하시고 일어나시어 평신(平身)하소서.’ 하고 계청하면 전하가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번 절하고 다시 일어나 몸을 바로한다. 이때 아헌관 이하 그 위차에 있는자는 모두 이와 같이 한다. 【찬자가 역시 창하여 한다.】 찬례가 예필(禮畢)을 아뢰고는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전하를 재전(齋殿)으로 돌아가면, 상의원(尙衣院) 관원이 곤룡포(衮龍袍)와 옥대(玉帶)를 바친다. 【환궁(還宮)할 때 산선(繖扇)과 장위(仗衛)의 도종(導從)은 올 때의 의절과 같다.】
알자는 아헌관과 종헌관을 인도하여 나가고, 봉례랑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해 나가며, 찬인(贊引)은 전사관(典祀官) 이하를 인도하여 모두 배위(拜位)로 돌아 간다. 집례가 ‘사배(四拜)’ 하고 말하면, 찬자(贊者)가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 하고 창(唱)하여 전사관 이하가 모두 몸을 구부려서 네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한다. 이리하여 찬인이 차례로 인도해 나가고 대축(大祝)은 대왕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궤(匱)에 넣고, 궁위령(宮闈令)은 왕후의 신주를 받들어 궤에 넣기를 의절과 같이 한다. 집례가 알자ㆍ찬자ㆍ찬인을 인솔하고 배위(拜位)로 나아가 네번 절하고 나오고 전사관(典祀官)과 전사(殿司)는 각기 그 요속(僚屬)을 거느리고 예찬(禮饌)을 거두며 대축(大祝)은 축ㆍ폐(祝幣)를 받들고 가서 감(坎)에 묻는다. 종친 및 백관이 길복(吉服)을 입고 재전(齋殿) 앞에 나아가 차례로 서서 꿇어앉아 그 반수(班首)가 명단을 올려 봉위(奉慰)한다.”
【원전】 6 집 68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주-D001] 담제(禫祭) :
- 초상(初喪)으로부터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을 치른 그 다음 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제사를 말함.
- [주-D002] 예감(瘞坎) :
- 제물(祭物)을 묻는 구덩이.
- [주-D003] 임방(壬方) :
- 24방위의 하나.
- [주-D004] 상위원(尙衣院) :
- 조선조 때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쓰이는 일용품 및 보물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官廳).
- [주-D005] 축판(祝版) :
- 축문을 얹어 놓은 널조각.
- [주-D006] 폐비(幣篚) :
- 제향 때에 준뢰(樽罍)를 놓는 준상(樽床)을 차리는 곳.
- [주-D007] 예찬(禮饌) :
- 제사에 쓰이는 음식 물.
- [주-D008] 울창(鬱鬯) :
-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나는 술. 제사의 강신(降神)에 씀. 자주(紫酒).
- [주-D009] 앙제(盎齊) :
- 제사에 쓰던 색깔이 흰 술. 오주(五酒)를 만들 때 세번 째로 얻는 술임, 백차주(白醝酒).
- [주-D010] 작(勺) :
- 잔.
- [주-D011] 멱(羃) :
- 밥보자기.
- [주-D012] 반수(班首) :
- 우두머리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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