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4. 04:50ㆍ산 이야기
울 금 - 下
영조 33년 정축(1757) 11월 7일(을미)
33-11-07[03] 유신과 교서관 제조 홍계희를 불러 윤음과 간행에 대해 묻다
- [주-D001] 현주(玄酒) :
- 제사 때 술 대신으로 쓰는 냉수. 무술.
- [주-D002] 주고(酒誥) :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 [주-D003] 울창주(鬱鬯酒) :
-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나는 술로 제사의 강신(降神)할 때 썼음.
- [주-D004] 오제(五齊) :
- 제사에 쓰는 다섯 가지의 술. 곧 범제(泛齊)ㆍ예제(醴齊)ㆍ앙제(盎齊)ㆍ제제(緹齊)ㆍ침제(沈齊)인데, 범제ㆍ예제는 탁한 술이고 앙제ㆍ제제ㆍ침제는 맑은 술임.
○上召儒臣及校書提調洪啓禧, 問綸音刊行事。 啓禧言: "古者獻酬, 尙用玄酒, 則太廟之用醴, 不爲過矣。 而向者臺臣李敏坤上書爭之, 臣嘗以爲非矣。 近者酒禁蕩然, 心甚憤惋, 及見宣傳官摘奸之擧, 喜不自勝。 殿下嘗以因酒刑人爲難, 而《酒誥》, 亦有 ‘予其殺語’, 不嚴其法, 將何以禁之? 且殿下不許法司之譏察, 夫譏字出於《周禮》, 此乃聖人之法。 行之苟得其道, 則可無弊矣。" 具允明曰: "法司譏察, 一任吏胥耳, 雖欲無弊, 得乎?" 啓禧曰: "惟在擇人。" 允明曰: "擇吏胥難於擇官長矣。" 上曰: "不禁麯, 則不可禁也。" 啓禧曰: "醴酒亦非麯不成, 麯不可禁也。"
臣謹按宗廟之用酒尙矣, 三代以來未之或改, 今之用醴, 雖出於聖上祛酒之苦心, 終恐無益於禁, 而大有缺於享祀之禮也。 李敏坤之書, 備論聲臭歆格之理, 其曰 ‘鬱鬯、五齊, 古禮不可廢’ 者, 是誠不易之論。 而啓禧急於將順, 反加非斥, 至引《酒誥》之 ‘殺’、《周禮》之 ‘譏’, 傅會爲說, 導人主於嚴刻之政, 可謂以經文奸者矣。"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67면
- 【분류】왕실(王室) / 식생활(食生活) / 사법-법제(法制) / 출판(出版)
영조 37년 신사(1761) 6월 2일(기사)
37-06-02[02] 우의정 홍봉한이 전례없는 차왜를 쫓지 않은 동래 부사 홍명한 등의 처벌을 청하다
○上引見大臣備堂。 右議政洪鳳漢, 以無前例之差倭, 尙不據理逐送, 東萊府使洪名漢請重推, 任譯令萊伯, 決棍懲礪, 上從之。 禮曹判書李益炡曰: "故判書朴師益謚號以章孝落點, 有犯章陵徽號, 令弘文館改謚爲宜。" 上命入前望, 其時議謚人竝重推。 戶曹判書尹東度曰: "儲慶宮ㆍ毓祥宮ㆍ孝章宮ㆍ懿昭廟仲朔祭, 皆用鬱金酒, 昭顯廟獨不用, 事或斑駁矣。" 上曰: "孝章宮ㆍ懿昭廟, 與昭顯廟同, 竝勿用可也。" 上因洪鳳漢之奏, 許遞禮曹參議宋明欽之職, 仍下諭曰: "今日國事人心, 其惟何恃? 只讀書之士, 予之眷眷, 豈徒爲爾? 今聞相臣所奏, 爾祖先正文正公, 曾於此任, 終不承命云, 今爾固辭, 不無所執, 知此相持, 非徒欠於致誠, 亦近閉門。 特遞本職, 以開進身之道, 欲見之意, 寔由方寸, 若今日之望雨。 爾祖昔旣承召, 體爾祖之意, 豈不欲一見予乎?"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67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외교-왜(倭)
부록
영조 대왕 행장(行狀)
- [주-D001] 불곡(不穀) :
- 왕후(王侯)의 겸칭.
- [주-D002] 경자년 :
- 1720 숙종 46년.
- [주-D003] 입년(立年) :
- 30세.
- [주-D004] 양암(諒闇) :
- 임금이 여묘살이하는 것.
- [주-D005] 보력(寶曆) :
- 임금의 나이.
- [주-D006] 무진년 :
- 1688 숙종 14년.
- [주-D007] 신충(宸衷) :
- 임금의 뜻.
- [주-D008] 정유년 :
- 1717 숙종 43년.
- [주-D009] 복합(伏閤) :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들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 상소(上疏)하고, 임금의 재가(裁可)가 날 때까지 엎드려 청하던 일.
- [주-D010] 기사년 :
- 1689 숙종 15년.
- [주-D011] 임인년 :
- 1722 경종 2년.
- [주-D012] 치학(齒學) :
- 세자가 국학에서 나이의 순서에 따라 예양(禮讓)하는 것. 여기에서는 입학하는 것을 뜻함.
- [주-D013] 갑진년 :
- 1724 경종 4년.
- [주-D014] 계묘년 :
- 1723 경종 3년.
- [주-D015] 근밀(近密) :
- 임금의 측근.
- [주-D016] 경자년 :
- 1720 숙종 46년.
- [주-D017] 문산(文山) :
- 문천상(文天祥)의 호.
- [주-D018] 기사년 :
- 1689 숙종 15년.
- [주-D019] 정표(旌表) :
- 선행을 칭찬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리는 것.
- [주-D020] 기복(起復) :
- 기복 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이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
- [주-D021] 운대(雲臺) :
-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功臣)을 추념하여 장수 28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대(臺)의 이름. 운각(雲閣).
- [주-D022] 철권(鐵券) :
- 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던 녹권(錄券). 겉에는 이력과 은상(恩賞)을 기록하고, 속에는 면죄(免罪)와 감록(減錄)의 수를 새겼는데, 글자를 속에 파서 넣었기 때문에 철권이라 함. 좌부(左符)는 공신(功臣)에게, 우부(右符)는 내부(內府)에 두었다가 감합(勘合)하였음.
- [주-D023] 망예(望瘞) :
- 제사를 끝마치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을 때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가 이를 지켜보던 일을 말함.
- [주-D024] 위전(位田) :
- 관청의 경비(經費)나 제사의 비용(費用)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 [주-D025] 고계(高髻) :
- 높은 상투.
- [주-D026] 경신년 :
- 1680 숙종 6년.
- [주-D027] 기사년 :
- 1689 숙종 15년.
- [주-D028] 무신년 :
- 1728 영조 4년.
- [주-D029] 우서(友壻) :
- 동서.
- [주-D030] 태복(太僕) :
- 사복시(司僕寺).
- [주-D031] 악 무목(岳武穆) :
- 무목은 악비(岳飛)의 시호(諡號).
- [주-D032] 갑진년 :
- 1724 경종 4년.
- [주-D033] 추조(秋曹) :
- 형조(刑曹).
- [주-D034] 경조(京兆) :
- 한성부(漢城府).
- [주-D035] 백부(柏府) :
- 사헌부(司憲府).
- [주-D036] 강희(康熙) :
-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 [주-D037] 용만(龍灣) :
- 의주(義州).
- [주-D038] 서전(西銓) :
- 병조(兵曹).
- [주-D039] 탁지(度支) :
- 호조(戶曹).
- [주-D040] 을사년 :
- 1725 영조 원년.
- [주-D041] 임자년 :
- 1732 영조 8년.
- [주-D042] 신해년 :
- 1731 영조 7년.
- [주-D043] 경조(京兆) :
- 한성부(漢城府).
- [주-D044] 신축년 :
- 1721 경종 원년.
- [주-D045] 약제(禴祭) :
- 종묘의 여름 제사.
- [주-D046] 임진년 :
- 1592 선조 25년.
- [주-D047] 정묘년 :
- 1627 인조 5년.
- [주-D048] 임자년 :
- 1732 영조 8년.
- [주-D049] 구식(救食) :
- 일식(日食)이 있을 때 해가 먹히는 것을 구원하는 의식. 흉변(凶變)으로 생각하여 임금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월대(月臺) 위에서 각사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해와 달이 다시 완전해질 때까지 기도하였으며, 좌우에 악기(樂器)를 벌려 놓으나 연주하지는 아니하였음.
- [주-D050] 자목(字牧) :
-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림.
- [주-D051] 신축년 :
- 1721 경종 원년.
- [주-D052] 임인년 :
- 1722 경종 2년.
- [주-D053] 무신년 :
- 1728 영조 4년.
- [주-D054] 법강(法講) :
- 경연(經筵).
- [주-D055] 옥서(玉署) :
- 홍문관(弘文館).
- [주-D056] 법연(法筵) :
- 경연.
- [주-D057] 광(筐) :
- 폐백을 담는 죽기(竹器).
- [주-D058] 정문(程文) :
- 과거를 보일 때 독권관(讀券官)이 채점을 하기 위하여 만들던 모범 답안지.
- [주-D059] 거서(秬黍) :
- 검은 기장.
- [주-D060] 서합(噬嗑) :
- 《주역(周易)》에 나오는 괘(卦)의 하나로, “턱 가운데 물건이 있는 것을 서합(噬嗑)이라 한다.[頣中有物曰噬嗑]” 하였는데, 서로 물어 뜯는다는 뜻으로, 형옥 죄수(刑獄罪囚)의 상(像)임.
- [주-D061] 경녈(黥涅) :
- 살을 째고 먹물로 죄명을 써 넣는 형벌.
- [주-D062] 국자(國子) :
- 성균관(成均館).
- [주-D063] 식(式) :
- 수레 앞턱에 가로 댄 나무에 의지하여 경례함.
- [주-D064] 계유년 :
- 1693 숙종 19년.
- [주-D065] 위포(韋布) :
- 성균관 유생.
- [주-D066] 후원(喉院) :
- 승정원(承政院).
- [주-D067] 구경(九經) :
- 아홉 가지 정치에 중요한 일로서, 《중용(中庸)》에 보면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족을 친히 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신하를 체찰하는 것[體群臣], 서민을 돌보는 것[子庶民], 모든 공장(工匠)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를 따르게 하는 것[懷諸侯]이라 하였음.
- [주-D068] 급암(汲黯) :
- 한대(漢代)의 간신(諫臣). 경제(景帝) 때에 태자 세마(太子洗馬)가 되고 무제(武帝) 때에 동해(東海)의 태수(太守)를 거쳐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음. 성정(性情)이 심히 엄격하여 직간(直諫)을 잘하여 무제(武帝)로부터 옛날의 사직(社稷)의 신하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음.
- [주-D069] 현주(玄酒) :
- 물.
- [주-D070] 기해년 :
- 1719 숙종 45년.
- [주-D071] 포은(圃隱) :
- 정몽주(鄭夢周)의 호.
- [주-D072] 상용(商容) :
- 은(殷)나라 때 사람. 주왕(紂王)의 대부(大夫)로서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폄출(貶黜)되었음.
- [주-D073] 비간(比干) :
- 은대(殷代)의 사람.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데, 주왕의 악정(惡政)을 간하다가 피살되었음.
- [주-D074] 신축년 :
- 1721 경종 원년.
- [주-D075] 임인년 :
- 1722 경종 2년.
- [주-D076] 양옥(梁獄) :
- 양왕(梁王)의 옥사(獄事).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제위(帝位)를 아우인 양왕(梁王)에게 전수(傳授)하겠다는 대화를 들은 대신들이 부자 상전(父子相傳)의 약조를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에 양왕이 사람을 시켜 원앙(袁盎) 등 여러 의신(議臣)들을 죽였음. 경제가 이에 전숙(田叔)에게 양왕의 죄안(罪案)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전숙이 말하기를, “양왕의 일은 묻지 마소서. 바른 대로 말하면 처단해야 되고, 처단하면 태후(太后)의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하니, 양왕의 신하 몇 사람에게만 죄를 돌려 처단하였음.
- [주-D077] 무신년 :
- 1728 영조 4년.
- [주-D078] 정책 국로(定策國老) :
- 당(唐)나라 때 경종(敬宗)부터 선종(宣宗)까지 그 폐립(廢立)을 환관들이 마음대로 행하고 국가의 원로로 자처하였으므로 정책 국로라 하였음.
- [주-D079] 문생 천자(門生天子) :
- 당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정권을 전횡하여 천자 보기를 시관(試官)이 문생을 보듯이 하였으므로 문생 천자라 하였음.
- [주-D080] 접혈(蹀血) :
- 금정 접혈(禁庭蹀血)의 준말로, 대궐의 뜰에 유혈이 낭자하여 그것을 밟고 건널 정도였다는 뜻.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정자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 세웠는데, 이건성이 당나라 건국에 공이 많았던 아우 이세민(李世民)이 자기 자리를 넘볼까 염려하여 미리 제거하고자 하니, 이세민이 군사를 동원하여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가 이건성을 죽였음. 이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자치통감(資治通監)》에서 ‘접혈 금정’이란 말로 묘사했는데, 아우가 형을 잔인하게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뜻을 내포함.
- [주-D081] 행배(行盃) :
- 한(漢)나라 때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내인 곽현(霍顯)이 태후(太后)로 하여금 술을 장만하게 하고는 이어 천자(天子)를 폐하려고 도모한 일을 말함.
- [주-D082] 수진(袖珍) :
- 소매 안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책.
- [주-D083] 기성(箕城) :
- 평양(平壤).
- [주-D084] 태상(太常) :
- 봉상시(奉常寺).
- [주-D085] 불면(黻冕) :
- 슬갑(膝甲)과 갓. 모두 제복(祭服).
- [주-D086] 을해년 :
- 1695 숙종 21년.
- [주-D087] 번영(繁纓) :
- 제후(諸侯)의 마식(馬飾).
- [주-D088] 임인년 :
- 1722 경종 2년.
- [주-D089] 갑신년 :
- 1704 숙종 30년.
- [주-D090] 숭정(崇禎) :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 [주-D091] 병자년 :
- 1636 인조 14년.
- [주-D092] 울창(鬱鬯) :
-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로, 제사의 강신(降神)할 때 썼음. 울창주(鬱鬯酒).
- [주-D093] 장망(長望) :
- 관원(官員)을 추천(推薦)할 때에 다수(多數)의 후보자를 선정(選定)하는 것. 대개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함.
- [주-D094] 홍문록(弘文錄) :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ㆍ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함. 관록(館錄). 본관록(本館錄).
- [주-D095] 한림 소시(翰林召試) :
-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 적임자를 선정하여 상주(上奏)하면, 왕명으로 불러 위원(委員)을 시켜 시(詩)ㆍ부(賦)ㆍ논(論)ㆍ책문(策問) 등 시험을 보여 합격한 자를 임용하는 것.
- [주-D096] 을사년 :
- 1725 영조 원년.
- [주-D097] 신축년 :
- 1721 경종 원년.
- [주-D098] 임인년 :
- 1722 경종 2년.
- [주-D099] 병오년 :
- 1726 영조 2년.
- [주-D100] 장(場) :
- 제사하는 곳.
- [주-D101] 경자년 :
- 1720 경종 즉위년.
- [주-D102] 우주(虞主) :
- 궁중에서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 쓰는 뽕나무 신주(神主).
- [주-D103] 운관(雲觀) :
- 관상감(觀象監).
- [주-D104] 결채 가요(結彩歌謠) :
- 죽은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로 모실 때 행하는 행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ㆍ기생 등이 각각 색종이를 길 좌우에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요를 올리며 돌아간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함.
- [주-D105] 경자년 :
- 1720 숙종 46년.
- [주-D106] 고사(故事) :
- 경(耿)과 박(亳)은 은(殷)나라의 도읍으로, 은나라 제17대 왕 반경(盤庚)이 비가 많이 내려 경의 제방이 무너져 물이 넘치게 되자 박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탕임금의 덕화를 따라 탕임금이 베풀었던 정치를 다시 베풀어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회(朝會)하고 상도(商道)가 부흥되었다는 고사(故事).
- [주-D107] 인일제(人日製) :
- 인일인 음력 정월 초7일에 가절(佳節)이라고 하여 보이는 과거(科擧). 성균관(成均館) 유생이 주대상임.
- [주-D108] 단주(丹朱) :
- 요(堯)의 아들. 부질없이 놀기를 좋아하고 포학스런 행동을 하여 불초(不肖)했으므로, 제위(帝位)를 순(舜)에게 전한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 [주-D109] 등준시(登俊試) :
- 조선조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7월에 종친과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文官)으로서 자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김수온(金守溫)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武科登俊試)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 [주-D110] 계사년 :
- 1773 영조 49년.
- [주-D111] 이비(吏批) :
- 이조(吏曹)에서 주청하여 임금의 비답(批答)을 받은 벼슬.
- [주-D112] 병비(兵批) :
- 병조(兵曹)에서 무관의 벼슬을 골라서 뽑는 일.
- [주-D113] 온실수(溫室樹) :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명신(名臣)인 공광(孔光)은 경학(經學)에 더욱 밝았으며, 퇴청(退廳) 후 형제 처자들과의 사담에 조정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았음. 혹자가 장락궁(長樂宮) 안의 온실전(溫室殿)에 어떤 나무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잠잠하게 있다가 다른 화재로 돌려 대답하며, 궁중의 일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음.
- [주-D114] 신축년 :
- 1721 경종 원년.
- [주-D115] 임인년 :
- 1722 경종 2년.
- [주-D116] 기해년 :
- 1659 효종 10년.
- [주-D117] 계축년 :
- 1673 현종 14년.
- [주-D118] 경인년 :
- 1770 영조 46년.
- [주-D119] 임자년 :
- 1732 영조 8년.
- [주-D120] 임진년 :
- 1772 영조 48년.
- [주-D121] 병신년 :
- 1776 영조 52년.
- [주-D122] 갑신년 :
- 1764 영조 40년.
○行狀曰: 維英宗大王升祔之越七月甲辰, 嗣王殿下, 進臣等敎曰: "於戲! 我先王盛德大業, 在今在臣民, 在後在方策, 固非有待於狀, 乃若宮中之事, 外人不與知者, 予不穀不言之, 夫孰能宣昭乎? 肆予不穀, 永思前烈, 萬幾之暇, 綴遺事六十六, 則咨爾太史之臣, 旁采訓謨, 撰次爲狀, 以附實錄之後。" 臣命膺稽首對曰: "敢不唯命?" 謹按 王姓李, 諱昑, 字光叔, 顯宗大王之孫, 肅宗大王第二子也。 和敬淑嬪 崔氏, 以肅宗二十年甲戌九月十三日戊寅, 誕王于昌德宮, 前三日紅光亘于東方, 白氣罩其上。 是夜宮人夢白龍, 飛入寶慶堂, 堂卽王誕降之室也。 王生有異質, 右腕累累龍蟠文者九。 纔學步, 進見肅宗, 必斂膝危坐, 肅宗不命之退, 雖至竟晷無難色, 淑嬪恐王久跪拘攣, 爲製廣襪, 以舒其筋骸。 凡書畫之屬, 皆不學而能, 每遊翰墨, 神彩動人目。 肅宗嘉其天成, 爲詩以寵之。 六歲封延礽君, 九歲聘郡守徐宗悌女爲達城郡夫人, 十九歲出閤。 肅宗賜軒名養性, 又親爲花押與之。 庚子肅宗昇遐, 景宗卽位, 違豫久嗣續且無望, 明年八月正言李廷熽上疏, 引祖宗故典, 請豫建儲位, 以繫人心, 景宗命大臣議。 領議政金昌集、左議政李健命、判府事趙泰采及六卿兩司長求對, 請告慈聖, 早定大計。 景宗命群臣, 退俟閣門外, 有頃復召入, 宣示慈聖手札, 有曰: "孝宗大王血脈, 先大王骨肉, 只有 主上與延礽君而已, 豈有他議乎?" 諸臣皆涕泣而退。 遂冊封王爲王世弟, 郡夫人徐氏爲世弟嬪, 王上疏辭, 景宗報曰: "已過立年, 尙無嗣續, 又有奇疾, 念國事無計可施。 仰稟慈聖, 俯從群情, 委以儲位之重, 小心翼翼, 以副國人顒望。" 會賊臣柳鳳輝上疏曰: "殿下再聘中壼僅數年, 嘗藥憂遑, 仍居諒闇, 嗣續無可論也。 今寶曆方盛, 中壼年纔踰筓, 日後螽斯之慶, 擧國所顒望。 或兩宮有疾, 妨於誕育, 則保護之地, 竭誠醫治, 靡不用極, 而乃於卽阼元年, 爲此擧何哉? 始使廷熽疏請, 有若嘗試, 更皷已深, 登對力請, 而旣請入稟, 旋請出宣, 便同使令催督, 可謂無人臣禮耳。 戊辰殿下之誕生也, 立嗣非不急矣, 而諸臣以姑觀數年爲言。 人臣事君當如此, 今忙急草率, 人心疑惑, 久而靡定。 願自今凡於事爲, 斷自宸衷, 毋使威福下移, 仍正大臣以下愚弄迫脅之罪, 以謝國人。" 景宗乃下敎于朝廷曰: "先大王日月之明, 深慮予之無嗣, 今予疾無期斯男, 敬承付托, 夙夜憂懼。 日昨臺疏, 爲宗社定國本, 正合先大王盛慮及予之志, 仰稟慈聖, 旣定國本, 實宗社無疆之福。 柳鳳輝之疏, 此何人斯? 卿等論以啓。" 大臣三司, 請鞫鳳輝以正王法, 景宗可之, 尋改爲遠竄, 大臣、宰臣、三司、政院、宗臣、館學生, 執前請愈力。 時賊臣趙泰耉以右議政在近畿, 忽陳箚借引孝廟承儲日, 故相李敬輿守經之論, 以爲鳳輝忠赤, 不當撲殺也。 先是肅宗上賓, 弔勑言有皇旨, 欲竝慰世子及弟子姪, 廷議拒不從。 泰耉上疏言: "上國行之爲失禮, 陪臣受之爲冒嫌, 王子諸宗, 豈敢安於此哉?" 嗛王無顧忌。 至是復箚救鳳輝不遺力, 三司齊聲論泰耉罪, 請先削黜。 於是王再上疏固辭, 景宗慰諭備至, 九月王始受冊寶於仁政殿, 步趨進止, 咸中規度。 開冑筵, 講《小學》、《綱目》, 難疑問答, 夜繼晷不倦曰: "宮僚朋友也。 朋友將以責善, 必情志流通, 然後方盡其言也。" 嘗以《心經》筆墨, 賜兼說書趙顯命曰: "說書誠心開導, 伯禽、襄子之言, 余不忘也, 孝廟大志之言, 余不忘也, 宮闈和氣之言, 余不忘也, 近習愼擇之言, 余不忘也, 牽牛過堂圖揭壁之言, 予不忘也。 夫言而忘之, 是棄言也。 薄物以示不忘之意, 《心經》以謝心學之勸。" 當是時景廟疾益甚, 以酬接萬幾, 火升不覺察, 屢見意於絲綸, 諸有忠慮於國者, 欲王參決庶務, 以分聖勞, 宰臣李台佐廷語戶曹判書閔鎭遠曰: "此時代理, 烏可已也?" 士大夫私相酬酢, 其言如出一口無異辭。 有金一鏡者, 爲人凶譎多悖行, 見利忘恥, 與李師尙、尹就商等, 爲世擯棄者, 深相結納, 通宦者朴尙儉、文有道, 宮人石烈、必貞爲奧援。 以王英明, 恐悉燭其奸宄狀, 遂張目攘臂於外庭, 凡言代理者, 輒驅之逆, 群臣瑟縮不敢言。 是年十月, 執義趙聖復上疏, 請臣僚延接, 政令裁決, 引世弟侍側參聽, 隨事訓習, 一如先朝丁酉故事。 景宗是其言, 遂下敎曰: "予有奇疾十餘年, 丁酉聽政之命, 爲先朝靜攝, 不暇顧予躬, 及自登極, 症尤沈痼。 世弟年壯英明, 若使聽政國事有托, 予得安意調便, 自今大小國事, 令世弟裁斷。" 是夜, 賊臣崔錫恒, 與入直承旨、玉堂求對, 寢成命。 賊臣韓世良陳疏, 請加聖復邦刑曰: "天無二日, 地無二王。
雖不直請, 使世弟臨朝, 而參聽, 非臨朝而何? 爲人臣敢懷陰移天位之計, 罪不容於覆載也。" 都承旨洪啓迪爲言, 世良疏指意凶悖, 兩司隨請世良絶島安置, 復請拿鞫嚴問。 景宗命時ㆍ原任大臣、二品以上及三司, 來會賓廳, 敎曰: "早定儲位, 本欲代理, 已稟慈聖, 依前下敎擧行。" 於是王四上疏力辭, 大臣以下, 詣閣求對, 不得請, 率百官庭籲, 請寢代理者凡三日。 景宗又敎曰: "予病若可酬應, 何至是耶? 近者火升一日頻發, 使左右考例而行, 左右可乎, 世弟可乎, 卿等思之, 使我兄弟, 分苦分痛, 以扶將亡之國。" 領議政金昌集、左議政李健命、領府事李頤命、判府事趙泰采等聯名箚言: "大小國事, 竝命裁斷, 此國朝未之有者, 中外驚惑。 臣等雖萬被誅戮, 不敢奉承, 而至於細務分理, 旣有丁酉裁定, 爲殿下臣庶者, 豈敢以輕遽爲拘, 一竝違拒哉?" 箚上, 泰耉自鄕馳入宣仁門求對, 政院謂: "臺閣方論泰耉罪, 泰耉不宜求對也。" 拒不納。 有頃, 司謁傳命泰耉入侍, 復傳命政院三司入侍, 復傳命時ㆍ原任大臣、重宰臣入侍, 入侍, 悉收前後下敎寢不行。 旣退, 三司啓: "臣隣晉接, 關由喉司, 乃三百年定規, 今泰耉自何逕稟旨乎? 此路一開, 後雖有北門之變, 無以隄防, 請承傳色司謁拿問嚴覈。" 景宗可之。 兩司復論泰耉平日交通宦寺罪, 請極邊遠竄, 不報。 十二月, 賊臣金一鏡、朴弼夢、李眞儒、李明誼、鄭楷、尹聖時、徐宗厦等七人聯名上疏, 有云: "伏閤庭籲, 止於三日。 己巳大臣半日庭請, 尙斥以造、訒、仁弘之科, 則彼輩固難逭冀、顯、莾、操之誅。 原降明旨, 賊復四凶, 一以三尺斷之。" 遂結之曰: "身佩安危之大臣, 進死一步, 爲臺閣者, 敢以陰機等說, 勒成罪案, 其設心凶且慘矣。" 指泰耉也。 疏入四大臣胥命, 是夜承旨三司卿宰將臣, 或罷或黜, 一鏡爲吏曹參判, 弼夢、眞儒、明誼等爲三司, 就商爲訓鍊大將。 未幾尙儉與有道、石烈、必貞閉塞王朝見之淸暉門, 謀害王益急, 王夜召宮僚, 欲出閤辭位, 輔德金東弼力陳其不可。 明日大妃下封書于賓廳曰: "儲嗣之定, 奉先王遺敎, 而主上親書爵號, 予又下敎於大臣, 不幸宮人、宦寺, 交構兩宮。 比予與主上, 招宮人責諭, 則宮人敢肆凶悖, 是必有當律。 卿等亦宜調護我主上及東宮, 以保我三百年宗社, 毋負我先王遺敎。" 於是大臣二品以上政院三司, 求對論之, 尙儉、有道、石烈、必貞竝伏誅。 凡王在儲位, 奸凶表裏交構, 處前古帝王所難處, 而王不形色辭, 應之有道, 卒使宮闈之內, 和氣藹然, 人以是知王有聖德焉。 壬寅九月王齒學。 甲辰八月景宗疾大漸。 初李光佐爲藥院都提調, 以聖候久沈綿, 而李公胤業醫名國中, 遂除公胤主簿, 入藥院議劑, 公胤爲人悖妄, 自癸卯夏, 日試峻攻劑, 朝廷以公胤善醫, 不之疑也。 至是聖候益沈篤, 光佐不卽設議藥廳, 王不脫冠帶, 一飯亦一飯, 再飯亦再飯, 泣謂公胤曰: "眞元日下, 此豈立已見之時耶? 急以蔘附回陽。" 光佐、公胤執前見愈固, 竟不多用蔘附。 景宗薨, 王哀毁踰節, 群臣請嗣位, 却不從, 大臣、三司、政院、宗親、文武百官, 屢啓不得請。 王大妃手札勸進, 然後王始御冕服, 至仁政門, 猶哀號不陞座, 改卜時行禮, 尊王大妃金氏爲大王大妃, 王妃魚氏爲王大妃, 嬪徐氏進爲王妃。 王將受冊寶時, 宦寺宮人, 尙多儉、貞黨, 肆詆不道, 擲寶盝砌隅聲, 徹御座, 王若無聞也。 朝夕哭奠必躬臨, 嘗患風痺試鍼, 藥院以鍼忌喪側, 請停哭臨, 終不聽。 暇則孜孜萬幾, 不少休, 或言: "勤勞太過, 非所以保嗇也。" 王曰: "沃土之民不才, 逸也; 瘠土之民莫不有才, 勞也。 況三代之君, 以勞爲治, 未聞以逸豫爲治也。" 先是肅宗季年, 至景宗四年, 皆以違豫不得行經筵次對, 王旣公除, 卽講行之。 賞獻替之承宣, 以開言路, 罷虎贖之綿布, 以紓民力, 申禁閭舍之橫占, 疏放囹圄之幽滯, 久任京外官, 責以成效, 每一令出, 四方拭目。 會有雷異, 王親爲文下政院, 使代撰求言之敎, 其略曰: "修己之未能歟? 虛受之未盡歟? 自奉過侈歟? 待臣不誠歟? 賢人在野, 有未用歟? 窮民抱冤, 有未達歟? 朝著不和, 傷天氣歟? 私意橫流, 閼公議歟? 咨爾近密, 代予草敎, 廣求直言。 言而過中, 予當不罪也。 噫! 生民之水火方亟, 黨習之干戈日尋, 念及於此, 丙枕何安? 廊廟之臣, 擧直措枉, 方伯之臣, 黜陟惟明, 欽乃職事, 上答旻天之警告。" 政院請毋代撰, 以所下絲綸, 布告中外。 王曰: "‘文拙也, 宜更代撰’, 政院復言臣等代撰, 必不如王言也。" 王曰: "‘覆難非禮, 使之道如其言。" 十二月葬景宗大王于懿陵。 始卜陵, 王必稟大妃, 得旨乃決。 凡民田宅在局內者, 飭有司, 厚價斥之, 不使有怨。 時新經庚子大喪, 有司猶未知宮中故事, 眩於擧行, 王考据指授, 細大不遺, 必誠必信, 終始罔愆。
元年乙巳春正月, 王下敎勸農, 飭方伯勿奪民時, 守令辭陛者, 輒召見, 戒以安民。 又敎曰: "我國褊小, 用人不廣, 而舊臣盡逬, 仕朝端者, 不如往昔, 予庸痛恨。 方今歲籥已改, 理宜與物皆春, 被謫人其令大臣金吾, 參輕重疏釋。" 初一鏡諸賊, 旣疏斥聯箚四大臣, 比之冀、顯、莾、操, 自知勢不兩立, 欲網打一隊, 絶其根芽。 乃嗾市井無賴人睦虎龍上變, 遂起大獄, 盡殺四大臣及其族黨, 株連親知, 編配幾遍於八道, 仍歃血頒赦。 其敎文一鏡撰也, 用事造語, 備極凶悖, 與七賊疏辭相表裏, 矯誣先王, 以及聖躬, 人皆憂憤, 然畏鏡、夢氣焰, 莫敢言。 前年冬正言李倚天上疏論之, 王遂鞫一鏡、虎龍正刑, 孥籍如法, 弼夢等六賊, 初削黜後幷栫棘, 而被誣諸人未及疏釋, 故有是命。 亡何慶尙道士人金麟壽等, 疏請先正臣宋時烈復享道峰書院, 且復先正臣權尙夏官, 亦一鏡等所黜奪也。 王曰: "斯文是非, 在儒林, 不在朝廷, 可令該曹, 復其官。" 是月王將幸懿陵, 天氣尙峭寒, 藥院請竢和暖。 王曰: "《禮》云: ‘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況不得隨詣因山乎! 卒不從, 謁陵還。 會有鞫獄, 有司請施壓膝刑, 王曰: "昔漢 文帝除肉刑, 唐 太宗觀明堂圖, 謂人五臟係於背, 遂除笞背法, 我朝世宗亦除笞背, 況壓膝五刑所無乎? 其永除之。" 三月右議政鄭澔言四大臣冤死狀, 王命復官致祭贈諡。 李晩成、洪啓迪、金雲澤、金民澤、李弘述、趙聖復等竝復其官, 故贊善李喜朝亦贈諡。 嘗召對謂筵臣曰: "諷諫微諫, 固爲人臣格君之要, 若自人君而言, 則使其臣不能正諫, 乃反規規於諷與微, 不亦可愧之甚乎?" 夏四月命鈔巖穴求志士, 以充經筵官, 將欲招延備顧問也。 右議政閔鎭遠白王曰: "宮人必選於內婢, 不侵及良家者, 先朝德政也。 今往往侵及良家云, 果然否?" 王驚曰: "今掖庭少縱, 不能法唐宗之放出, 豈容益其選也? 況良家女, 爲其父母辛勤長養, 一朝幽閉深宮, 非仁政也。" 立命拿問中官, 杖配宮奴。 五月刑曹覈奏諸道强盜罪, 王謂刑官曰: "好生惡死, 人孰無此心? 迫飢寒困侵漁, 不自覺其陷溺至此, 皆予敎不及民而然也。 卿等宜哀矜勿喜, 酌量遄決, 不令久滯囹圄也。" 秋七月大旱, 王下敎求言, 親禱社稷, 不雨, 將復親禱北郊, 有司曰: "無例也, 請改以南郊。" 王曰: "先朝特祀農壇, 顧不當法耶?’ 遂積誠致潔, 禱于北郊。 旣祼, 密雲四集, 雨滂沱下, 冕服盡濕, 王秉珪愈恭, 始終無失容, 與祭者莫不欽歎。 八月命忠淸道臣, 竪故忠臣洪翼漢、尹集、吳達濟等墓石, 聖祖嘗賜三忠田畝, 有司因循久不與, 至是飭令盡與之。 冬十一月三南饑, 王減宮納米補賑曰: "先朝有北關貢銀, 故多以銀補賑, 今銀變爲布, 雖欲體先朝遺意, 不可得也。" 十二月有以煥章庵所藏毅宗皇帝御墨獻之者。 王感涕曰: "皇明再造之恩, 沒世不可忘也。 然歲月寖久, 人心易狃, 倘非我聖祖闡明大義, 則東土生靈, 豈知尊周之義乎?’ 仍命致祭于南漢 顯節祠, 又祭于江都忠烈祠, 又祭于統制營忠武公 李舜臣祠, 又祭于華陽洞 文正公 宋時烈祠。 尋以萬東祠賜額御墨刻之石, 親序其下, 印賜文正之孫, 藏石本于內府。 嘗夜對, 天甚寒, 承旨請於臥內, 召儒臣講。 王曰: "人情嚮晦易倦, 正衣冠庶幾振發精神也。" 二年丙午春正月, 行常參經筵, 命王世子開書筵。 舊例祁寒盛暑, 停兩筵, 至是王敎曰: "大禹惜寸陰, 衆人當惜分陰。 今三陽已開, 何待日暖乎?" 上辛親祈穀于社稷, 歲以爲常。 二月王因三南荒政, 敎曰: "昔在先朝, 嶺東監賑御史上飢民圖, 是有御製詩。 予嘗披見其圖, 餓殍者顚連者匍匐歠粥者, 宛在目前, 今三南之民, 奚異是哉? 設賑邑民, 其蠲一年糴庸, 次者半之。" 夏四月, 增建宗廟景宗室成, 宗臣上疏言: "太祖始建宗廟, 至於今而重建慶也, 宜稱慶。" 王曰: "君臣一心謹守祖宗成憲, 使深仁厚澤, 淪浹民肌髓, 勝豫大之擧遠矣。 何庸稱慶爲也?" 秋八月司諫李秉泰上疏, 指陳袞闕甚切直, 王賜虎皮奬之。 九月命贈故副提學權忭諡。 忭自肅宗中年, 絶意榮塗, 士大夫高其風采, 故有是命。 冬十月景宗大王、端懿王后祔太廟。 禮成, 王還御仁政殿受賀, 以三條飭諭百官, 一戒朋黨, 二戒奢侈, 三戒崇飮。 十一月王謁文廟酌獻, 御明倫堂親策多士曰: "‘予欲得經綸才, 祛習俗之文華, 效文山之精忠, 其各務實, 毋孤予意。"
三年丁未春正月, 王將親祈穀于社稷, 敎曰: "爲民祈穀, 敢自逸乎?" 乃步至齋殿, 諸承旨固請乘輦, 不聽。 有儒臣將歸覲其親, 以親病謁告, 王曰: "誠病也, 情固當然, 若無病而爲有病, 非惟告君不誠, 其於子道何如哉?" 命改其語予告。 三月, 武臣之特進經筵者 命各陳文義。 先是一武臣陳文義, 被承旨察推, 自是武臣特進者, 相戒不敢言, 故有是命。 時巖穴士被選經筵官者身歿, 筵臣請贈官。 王曰: "生不以爵祿羇縻, 歿何必贈官乎? 可遣禮官致祭, 令本道庇其喪葬。" 夏五月, 左議政洪致中以京外錢貨匱竭, 請鑄錢以益之, 王以爲鑄錢之弊, 倍於錢貴也, 竟不許。
四年戊申春三月, 嶺南賊李麟佐、鄭希亮等反, 王師討平之。 先是逆一鏡、虎龍伏誅, 弼夢諸賊悉栫棘, 其徒自度逆節難容於覆載間, 弼夢從父弟弼顯、一鏡之子寧海、虎龍之兄時龍等, 與沈維賢之爲鏡、夢腹心者, 締結己巳罪死人閔宗道、李義徵子若孫及諸失志怨國者, 譸張凶言, 誑惑人心。 推麟佐、希亮爲元帥, 李有翼、李河爲謀主, 約平安兵使李思晟倡亂於西, 摠戎使金重器、禁軍別將南泰徵和應於內, 欲以是月二十日犯京, 推戴密豐君 坦, 蛇糾蚓結, 醞釀頗久, 朝廷漠然不知。 至是奉朝賀崔奎瑞, 方退居龍仁, 因隣人安鑮, 始知賊情, 疾馳入告, 水原府使宋眞明, 續又械送上變人。 王乃命兵曹判書吳命恒, 爲四道都巡撫使, 朴文秀、趙顯命爲從事官佐之, 使率京營兵, 徇安、竹南下問罪, 以李汝迪、朴東樞爲繼援將, 率京營兵及開城馬軍, 爲都巡撫後援, 張鵬翼爲鎭禦大將, 陣北漢城下, 以防西憂, 尋代金重器爲摠戎使, 出鎭水原。 鄭纉述爲捕盜大將, 李廷濟爲京畿監司, 防守漢江 銅雀津, 金東弼爲經略使, 開府、南漢分兵遮截龍仁等諸要路。 兪拓基爲楊州牧使兼東路鎭禦使, 領兵進守皷巖, 金在魯爲忠州牧使兼湖西安撫使, 控扼鳥嶺等處。 權?代權詹爲忠淸監司, 李匡德代鄭思孝爲全羅監司, 黃海監司金始㷜率三千軍, 遮守洞仙嶺, 兵使元百揆率親騎衛三百人, 遮守靑石嶺, 待思晟就拿後罷兵。 朴師洙爲嶺南安撫使, 徇安東等左道, 慰諭召募, 尹淳爲監護諸軍使, 察嶺隘分兵防守, 而宋寅明爲大司諫備局提調, 使處禁中議事。 皆王屈群策剖分, 投機制勝, 間不容髮, 國人倚以爲安。 王師未及發, 賊夜入忠淸兵營, 殺兵使李鳳祥。 於是營將南延年及鳳祥褊裨洪霖, 罵賊不屈死之, 王褒延年曰疾風勁草, 立命贈兵曹判書, 旌其閭, 起復鳳祥子漢弼、延年子德夏, 陞其品從軍復讎, 人人皆思奮勵。 王嘗御帳殿鞫囚, 屛左右, 召寅明密語之曰: "俄者囚援引思晟也, 侍衛宣傳官李思弼蒼黃出去, 是於思晟誰也?" 對曰: "從父弟也。" 是夕以闕直拿囚思弼, 及思晟伏法, 梟示軍前。 思晟素以才稱, 朝廷遣金吾郞捕之, 疑有變。 未幾西倅上思晟寄其家書, 皆瑣細婦女語。 王喜曰: "無憂也。" 言未已, 金吾郞捕思晟至。 凡王籌度機宜多此類, 故措置軍事無闕漏。 王師至安城、竹山, 遇賊如摧枯拉毁, 一皷盡勦, 檻送賊魁麟佐等於京師。 慶尙監司黃璿檄星州牧使李普赫爲右防將, 誓師入陜川郡, 掩擊賊兵, 斬獲甚衆, 善山府使朴弼健爲左防將, 昆陽郡守禹夏亨領兵屬弼健軍, 據牛旨嶺, 斬賊酋希亮、熊輔首, 諸賊望風自潰。 於是凶逆悉平, 遂命罷兵歸農。 命恒班師, 王御南門樓受馘, 論功有差, 圖像雲臺, 賜鐵券。 乃諭侍衛將士曰: "爾等雖親屬凶逆、故舊凶逆者, 不知其謀, 勿懷疑懼。 予雖涼德, 豈面諭而貳之乎?" 將士莫不感泣。 是月王與世子, 謁淑嬪廟, 暬御丘史所嘗使令於潛邸者, 欲得間進見伺候於廟內。 弘文館上箚言: "不當以非禮之視, 示東宮也。" 王嘉奬之, 立命驅出陣門外。 秋九月王幸靖陵, 見除道毁民塚, 王怒曰: "民不有國法, 犯葬御路傍罪也。 然毁民塚, 豈王者之政乎?" 遂罪地方官。 時大熟, 進宴于大王大妃、王大妃, 賜朝士年八十以上, 庶民年九十以上, 酒米魚肉有差。 冬十月, 王將親行大享, 會不豫, 天且甚寒, 大臣請代攝。 王曰: "昔皇明 仁宗皇帝强疾親享, 汗透衣疾愈, 顧不當法耶?" 竟親享。 自晨祼至望瘞, 誠敬藹然, 升降步趨, 望之若神。
五年己酉春正月, 下敎勸農, 飭守令助民種糧, 歲以爲常。 王方招徠巖穴士, 一諫官言恩禮太過, 王怒曰: "此啓人主輕視巖穴士之心也。" 遂罪之。 時王銳意矯良役弊, 任事者病經用無以充。 王敎曰: "諸臣期予不淺, 而予之政猶泄泄也。 且如漢 文給田租半者, 前後相望, 無他焉節約也。 國誠有裕, 一民二匹, 何難蠲乎? 宮田定制外免稅, 悉令出稅, 各衙門書院位田視此。" 尋諭廷臣曰: "古語云: ‘宮中好高髻, 四方高一尺。’ 慕效之本故在也。 昔我宣祖衾與袴皆木綿布, 宮中傳爲美事。 予素不喜奢華, 且以聖祖爲法, 故令尙方製黑布笠。 夫金珠錦繡, 非我國之貨, 國俗樂趨之若是, 而何能使黃金同土價乎? 老臣已矣, 年少之臣, 他日必見予志之少展也。" 右議政李台佐曰: "孔子道千乘, 節用愛民, 不過如此。 今日行一善政, 明日行一善政, 回否爲泰, 夫何難乎? 但其進銳者其退速, 此又聖心之所當勉也。", 王曰: "善。 予在東宮, 宮僚陳戒, 未嘗厭聞, 卿言切中予病, 當佩服也。" 三月朝廷新經戊申亂, 凡凶逆近族, 不擧擬於職任, 王曰: "晋 王導非王敦之近族乎? 往者名出賊招, 亦分其黑白疏釋之。 況國法之所不坐者, 置諸疑似之中乎? 非王政也, 其自今調用。" 夏四月, 王親禴, 入齋殿敎曰: "京外生民, 皆我祖宗赤子, 然都民不耕不蠶, 事育皆仰貢米。 爲有司者, 不體予臨門駐橋之諭, 徒以惜費爲心, 豈自近及遠之道乎? 其飭所司, 毋孤予入太廟起感, 亦令八道兩都, 恪遵首春之敎。" 五月戶曹請北關設銀礦, 王曰: "唐御史權萬紀, 以採銀爲請, 太宗曰: ‘與其多得數百萬緍, 何如得一賢才, 可謂有帝王之體矣。’ 其已之, 毋俾唐宗專美有昔。" 秋九月, 誕彌節, 儒臣效《金鑑錄》陳戒, 王賜《近思錄》以賞之。 十二月奉肅宗廟入世室, 從時原任大臣之請也。
六年庚戌春正月, 王講《東國通鑑》, 謂筵臣曰: "孔子作《春秋》, 必尊天王, 所以正君君臣臣之義也。 高麗嘗臣事有宋, 則徽、欽之名, 直書國史可乎? 我國自孝廟、聖考尊周以後, 一隅靑丘, 獨保大明日月, 爾等其不忘先朝大義也。" 先是設纂輯廳, 命大提學李德壽撰《肅廟寶鑑》, 至是上之, 王三復感涕, 以善繼自勉。 二月王將幸寧陵時, 驪、利間往往有癘氣。 然群臣恐以癘氣爲言, 不摡〔槪〕王心, 遂托他事, 弘文館上箚諫止, 王責曰, ‘爾等讀聖賢書, 職在經幄, 乃以婦人之拘忌, 勸其君, 予竊恥之。" 大臣、三司、二品以上, 相率力爭, 王終不聽, 飭所過路耕民, 皆令播植不輟曰: "此亦春省耕之意也。" 回鑾至廣州, 登西將臺, 感聖祖之志事, 俯仰太息。 三月羅弘彦謀推戴廢宗垓、圻, 事覺伏誅。 垓、圻庚申罪死逆宗楨、柟之從孫, 己巳罪死人閔就道之外孫, 弘彦戊申賊崇坤、崇大之親屬, 逆鄭思孝之友壻也。 頒《三綱》、《二倫行實》等書于八道, 命刊印廣布, 俾民觀感, 二書皆世宗朝所撰也。 時北關饑, 遣御史監賑, 又遣督運御史於嶺南, 輸浦項倉穀于都連浦, 浮海以濟之, 太僕牧場可墾之地, 許民起墾。 於是北民無一捐瘠。 夏五月, 王覽《肅廟寶鑑》, 至致祭崇仁殿、武烈祠, 歎曰: "‘吾東方免左袵之俗, 賴有箕子八條也, 微寶錄, 幾忘之矣。" 遂遣禮官致祭于殿祠, 尋命購岳武穆 《精忠錄》以進。 先是戊申賊崔必雄亡命, 爲宦官所捕納, 王賞宦官, 不許錄勳。 至是筵臣以爲言, 王曰: "中官策勳, 其漸不可長也。" 竟不許。 六月宣懿王后 魚氏薨, 王宅憂一如甲辰。 大王大妃以爲過禮, 大臣重臣亦以爲言, 王曰: "歷觀前代帝王, 能知繼體之重者尠矣。 予所以爲此者, 欲後王知繼體之重也。"
七年辛亥春三月, 王講《周禮》, 至司寇掌邦禁曰: "禁者, 禁於未然也。 今秋曹京兆柏府, 惟收贖爲務, 恐犯者之不衆, 禁之設, 旣亶然哉? 其飭之。" 夏五月旱, 王遍禱南北郊, 輒雨, 雨不沛然, 王曰: "噫! 歲且歉矣, 議所以賙賑者。" 大臣請鑄錢, 以代經費, 而儲其穀賙賑。 王曰: "不然。 穀不在官則在民。 與其飢而後賑之, 曷若預散於民, 使民無飢也? 百姓足, 君誰與不足, 其是之謂乎?、 諸臣皆頓首稱善。
秋八月, 遷長陵于交河。 先是有言舊長陵多蛇虺, 王命大臣相視, 果然王遂決意遷厝。 遷厝日, 幸舊陵, 隨至新陵, 事巨細躬親蕫飭, 旣卒事, 敎曰: "民勞矣。 爲民父母, 豈可曰非遊畋, 民敢言勞云爾乎? 交、坡、楊、高四邑民貢稅調布減其半, 郵卒令廟堂施惠。、 初舊陵松栢, 皆孝廟手植, 王取其子, 手自播新陵曰: "‘使予子孫, 感予手澤, 如予之感寧陵手澤也。" 九月筵臣言《五禮儀》有誕日賀, 王不受誕日賀過也, 王喟然嘆曰: "程子云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 使予得如世宗聖祖之時, 何辭於賀? 在東宮則辭之, 在今日則受之可乎?" 卒不從。 先是召經筵官梁得中至, 擧止樸野, 所對太闊, 不適用, 筵臣皆笑, 然王優禮遣之。 至是筵臣復以爲言, 王曰: "山野之人, 無怪其如此。 可貴不可忽。 忽之恐他人不肯來也。" 終王之世, 未嘗一言其短。 冬十二月, 行三覆, 敎曰: "唐 太宗中主也, 然貞觀之間, 囹圄空, 鵲巢于樹, 寡人臨御七年, 無德以施化, 京外慮囚, 厥數過十, 殆德化未能及民而然也。 咨方伯毋曰予否德, 恪勤宣化, 欽乃申諭。"
八年壬子春正月, 命修崇靈殿、崇德殿, 遣近臣致祭, 調用前朝王氏後。 崇靈殿, 檀君祠也; 崇德殿, 高麗王祠也。 時五道大饑, 王屢飭廟堂議賑, 久未得善策, 王讓曰: "卿等若以民吾同胞爲心, 而凡諸爲民之政, 常如學問之士, 無疑者有疑, 有疑者無疑, 則豈有不濟乎? 今乃玩愒如此, 哀我赤子, 徒受困於下也。" 群臣皆愧謝。 至是賑五道, 有司欲爲粥以賑京民, 王曰: "與之乾餱, 俾歸與妻子共之。" 三月飭三南, 餓殍在道路者, 官收痤之。 夏四月, 王行次對, 諸臣議賑爭不已, 臺諫以爲言, 王從容謂曰, 天地交泰, 然後萬物成, 上下交孚, 然後庶事理。 秦皇懲周末頹弛, 以刑法繩之, 群臣救死不贍, 何暇交孚? 和氣索然, 上下怨叛, 比及二世而亡。 漢 高懲秦苛法, 濟以寬簡, 故朝儀不嚴, 至有劍擊柱者, 及叔孫通制禮, 乃曰始知皇帝貴也。 自晋、唐 以訖我朝, 皆文勝其質, 至於今則君臣之間, 幾乎否隔, 故予欲損有餘補不足, 此所以有矯枉過正之弊也。 然臺臣之同入次對, 非欲備位, 實兼糾察, 可自今隨事剌擧。’ 五月辨誣奏請使洛昌君 樘等, 回自燕京, 進新修《明史》。 先是國朝宗系事, 太祖得國事, 仁祖登極事, 傳聞訛謬, 皆誤紀於《大明會典》等書, 列朝屢遣使辨誣, 未之盡正。 及王七年, 始聞淸國自康熙季年, 命王鴻緖修《明史》列傳, 未及卒業而鴻緖卒, 乃使張廷玉、徐乾學等, 集天下文學之士, 續修本紀諸志, 歷三十餘年, 至是垂畢。 王曰: "噫若過此會, 雖悔曷追? 亟遣樘等奏請。" 及樘等還, 諸誣盡昭晣於新史。 命給米一千石于江華府, 俾糶糴取耗, 爲千把摠以下較射賞格費, 從留守尹游請也。 閏月, 王親書尊聖廟正士習務誠實九言, 復爲綸音三十行, 命近臣宣諭太學諸生且宣饌, 明日太學生等上箋謝。 遂命久任大司成, 以責成效。 六月旱, 王親禱于社稷北郊, 不雨。 乃敎曰: "連年亢旱, 民將盡劉, 減膳豈足以盡責己之道? 昔晋大旱, 縣子所對, 得禳災之要, 其令遷市三日。" 冬十月, 上番軍薄衣者, 命有司製襦衣賜之, 飭所過州縣富戶, 隨見收接, 不令凍餓於街上。 十一月賜京畿、三南、嶺東民米租四萬五千石, 減庸調一年之半, 盡蠲糴耗, 乃敎曰: "孟子云: ‘保民而王, 莫之能禦。’ 今之民, 卽我祖宗赤子, 而況聖考恤民之盛意, 予素見聞者乎? 連年荐饑, 蓄積枵如, 然民若盡劉, 雖有穀億萬斛, 將安用哉?" 遂分遣御史, 監賑宣諭, 且令搜訪文武才及巖穴求志士。
九年癸丑春正月, 王下敎飭朝廷, 聚精會神, 惟才是用, 祛舊日之習, 廓本然之公, 與歲俱新。 二月, 王視學。 初命酌獻文廟, 右議政金興慶上箚言: "酌獻文廟, 例當試士, 非荒歲所宜行也。" 王報曰: "漢 高開創之初, 以太牢祀先聖, 我聖祖自龍灣回鑾, 掃地爲壇, 首祀先聖。 今國家多事, 且三年甫畢, 斯禮之曠, 比及八年, 於予心不其歉乎? 雖然節用愛民, 先聖攸訓, 今不可違先聖之訓, 而祗謁先聖, 亦不可因試士之費, 而不謁先聖, 一依《五禮儀》視學禮, 祛進酒進饌, 從簡行禮, 其酌獻試士之禮, 則退以來秋。" 王遂至文廟, 親獻于先聖, 退御明倫堂, 以朝士習《周禮》者, 充講書官, 與諸生之能通一經者, 皆各進講, 討論文義, 賜掌議二人《中庸》各一部。 夏四月, 王癉心憂民, 減膳久不復, 有司以爲言, 王愀然曰: "予對玉食, 心不能安, 欲以玉食, 遍饋饑民而不可得, 況可遽議復膳乎? 冬至使齎來紋緞, 悉以賜賑廳補賑。" 有司請減百官軍兵祿, 以梁代米, 王曰: "荐饑由予涼德, 忍獨享玉食乎?" 命減御供五分一, 顧謂筵臣曰: "斯民也, 祖宗至誠愛恤之民也, 予不能法祖宗保斯民, 後世將以予爲何如主也?" 由是任事者, 亦莫敢不盡誠。 五月, 王召對語筵臣曰: "君臣與朋友異, 朋友猶難責善, 況君乎? 傅說戒高宗曰: ‘有言遜于汝心, 必求諸非道,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此人君聽言之要也。 予於諸臣進言, 有忼慨激切者, 不能無咈於心, 然事過之後, 平心思之, 未始不慨然歉愧也。" 又嘗於晝講, 因文義敎曰: "昔緹縈以爲: ‘死者不可復生, 刑者不可復續。’ 千載之下, 其言猶令人惻傷矣。 講學之道, 當鑑古而戒今, 討捕營治盜, 專尙嚴酷, 往往玉石俱焚, 故曩嘗累飭, 近復因循踵謬, 殆營將不擇人而然也。 其諭西銓, 自今必歷營將然後, 方擬閫帥, 凡討捕營承款之類, 一如京捕廳移送秋曹者, 送巡營盤問處決, 仍著爲令。" 會有鞫獄, 王親臨訊囚, 按獄之臣, 請令捕廳先問罪人得實, 然後上于金吾, 王始難之, 按獄之臣固請, 王不得已從之。 有頃悔曰: "獄有體, 罪人訊于秋曹, 上于金吾固也, 今治盜之廳, 反爲治逆之廳, 而捕廳遂成金吾之幕府, 此路一開, 予知後來搢紳, 亦難免其禍也。 亟寢前命, 以爲後日法。" 六月, 王因事謂度支曰: "節儉實體, 行之甚有味。 予在內則衣以紵, 傘以紬, 及至動駕, 然後袞與傘皆錦, 蓋動駕之時, 固自有體貌在也。 咨爾有司, 其悉此以防尾閭。" 秋七月, 王將親享, 大臣以日熱請代攝, 王曰, ‘事先何可擇時? 勿復言。" 八月, 王敎曰: "自古制刑, 俱有其法, 法外之刑, 雖或取快一時, 終非先王欽恤之意也。 予於乙巳, 旣除壓膝刑, 壬子又除捕廳剪周牢刑。 今只餘烙刑而已, 頃當親鞫亦循用之, 然肉刑笞背, 五刑之一, 而漢帝唐宗, 猶且除之, 況無於刑之刑乎? 咨金吾, 其永除烙刑著爲令。" 冬十月, 命設壇東門外, 索祭辛亥餓殍。 召對宣饌, 命有父母者歸遺之。 於是諸臣爭取盈袖, 其無父母者, 空手而退, 王爲之悽咽, 諸臣亦莫不感泣。 十一月, 平安監司權以鎭啓: "鴨綠江把守卒, 冬月撤罷古也。 前監司宋眞明承聖敎創設, 然氷雪呵凍恐傷人, 請罷之。" 王曰: "冬月氷合, 乃把守之時。 然苟其非古也, 而把守卒或有凍死者, 則是自我開死人之路, 何忍爲也? 其罷之。" 時, 大臣、宗臣爭體例, 胥囚下吏, 而曲實在大臣, 王是宗臣而非大臣。 於是大臣呈告求遞, 弘文館上箚言, 非所以尊朝體也。 王曰: "人孰無過, 改立爲貴。 予於敬大臣失之矣。" 遂罷宗臣, 敦勉大臣, 復以相敬之義, 飭宗府朝廷。 尋遣禮官, 致祭文純公 李滉於陶山書院, 命畫陶山書院以進。 十二月, 王患風眩, 猶孶孶機務, 至夜分不寢, 筵臣勸王節損, 王曰: "予見先朝季年違豫之中, 酬應萬機無少滯。 此我家法, 敢自逸乎?" 亡何, 謂筵臣曰: "始勤終怠, 人主之通患, 而唐 明皇開元、天寶, 判爲二人, 尤其甚者也。 昔我世宗朝, 命撰《明皇戒鑑》者, 聖意有以哉。" 命廣求其書以進。 召對講《陸宣公奏議》, 王愀然曰: "昔故左相李㙫, 勸予講是書, 故相臣洪致中、趙文命亦以爲言, 其意蓋以予量狹, 而欲借是書, 以開發聽納之量也。 夫呂祖謙, 一介學問之士, 能因《論語》變化其氣質。 予講是書, 若不能恢其量, 豈特負是書? 亦所以負三相也。 然三相已亡, 不及見予之講是書, 傷哉悲乎!" 遂親製綸音三十餘行, 命政府求言, 補闕拾遺。 尋以諸道, 歲末薦孝行卓爾之士, 而京師則否, 非一內外之道也, 命京兆歲末薦擧如諸道。
先是王語筵臣曰: "予自辛丑承儲, 慨然欲以大布大帛, 挽回世道, 自近以來, 事不從心, 徒剋減爲政, 其流之弊, 將使史臣無日曆而後已。 豈予前日立志之過哉? 大抵亡國之本, 奢侈是已。 然祛奢崇儉, 亦惟在人君導率之如何。 予好阿諛, 而使群下忠直, 則不能行矣, 予着錦綺, 而使群下着木綿, 則亦不能行矣。 端其本正其原, 量力而漸進, 倘庶幾乎!" 至是復下敎曰: "古者燔黍捭豚, 可以致敬鬼神; 茹毛飮血, 可以辨別尊卑。 茅茨土階, 可以平章百姓, 三代以降, 人文繁而奢侈盛, 然猶未若近世也。 方今過年未婚者, 奢侈也; 踰月未葬者, 奢侈也; 祭先不以禮者, 亦奢侈也。 夫草偃知風, 影正知表。 故匹庶效朝士, 朝士效貴戚, 貴戚本王宮, 予其敢曰惡奢乎哉? 尙方織錦坊, 可自今永撤, 勿復請設。"
十年甲寅春正月, 命八道監司兩都留守, 廣印《農事集成》, 均布民間, 俾知世宗朝導民務本之盛意。 親行祈穀祭, 旣誓戒, 會有鞫獄, 命過祭乃鞫。 弘文館上箚言, 非所以嚴鞫體也。 王曰: "爲民祈年, 顧不重耶?" 竟不從。 過祭明日, 行朝參於明政門, 蠲軍民已故者之丁布, 然後始親鞫訊。 一罪人無其實, 遂命宥釋, 出獄而斃, 王悔曰: "予殺不辜也。 史官書予之過, 使後世人主鑑戒也。" 尋以備邊司提調, 分差各道句管堂上, 察所管道內豐歉弊瘼, 與方伯預講而經理之。 王方行次對, 有鵲來啄右史毛席。 王歎曰: "微物亦知毛席之不可食, 而猶且啄之者, 迫於飢也。 哀我赤子, 無衣無食, 顚連道路, 安知不如彼微物乎?" 遂飭京兆及諸道方伯, 勸農安集, 去擾民之政, 鰥寡孤獨廢疾者, 訪問軫恤。 二月, 王將幸懿陵, 時鞫獄未罷, 群臣請停幸。 王曰: "宋 太祖臥榻之側, 他人鼾睡, 尙不憚行。 幸予方君臨一國, 以卿等爲臣. 何憚之有乎?" 不聽。 三月親祀大報壇, 遣官致祭于楊經理祠。 夏四月, 親禴後, 凡一事而屢見者, 皆不書。 五月, 王講《李忠定奏議》, 命以議軍政、敎車戰兩箚, 頒示三軍門大將。 尋敎筵臣曰: "公而不明, 則以賢爲愚, 以愚爲賢; 明而不公, 則雖知其賢, 不能用, 雖知其愚, 不能舍。 用舍之分, 不亦難哉?" 六月, 有以故參議安邦俊所撰《抗義新編》進之者, 王覽趙憲壬辰倡義事, 嗟歎不已, 賜祭憲祠及七百義塚, 復命兩南營, 刊印憲所手證《朝天錄》日記等書, 分賜錦山、沃川兩書院。 秋九月, 王飭諸道監司守令, 民之避役者, 招徠安集, 新歸者減稅蠲徭, 務盡蘇息之道, 因講《詩》之《鴇羽》而興感也。
十一年乙卯春正月, 陳奏副使朴文秀言, 故兵使襄武公 鄭鳳壽丁卯却敵事, 且進皇明所賜鳳壽銀牌票文, 王嗟歎久之, 致祭鳳壽, 錄其後。 夏四月, 以冬至使讀來紋緞, 賜京畿營, 買穀儲積。 先是壬子賑飢, 病京畿穀不足, 及前夏時雨降。 王曰: "人情得雨則弛。 迨此有年, 宜思備預之道也。" 遂命京畿儲穀, 至是賜緞以助之。 五月, 咸鏡監司論犯越民五十人罪, 王遣御史按査。 臨筵敎曰: "寧失之寬, 毋失之猛。" 仍命采訪文武士可用者, 且訪見北鄙徵士李載亨, 使傳願見之意也。 秋八月, 王始欲謁禧、孝二陵, 俄而謂有司曰: "夜夢侍先朝如平昔。 漢 明帝夢園陵, 按曆卜月, 正好爲法也。" 遂幸明陵。 九月, 日有食之, 王親救食。 儒臣陳故事勉戒, 嘉納之。 冬十二月, 王聞四學舍頹圮, 歎曰: "‘都內王化之本, 而學舍乃如此, 不可聞於隣國。 其令俟春修葺。" 嘗夜宣饌于入直玉堂曰: "先朝嘗敎以寒夜念玉堂, 而撤御饌宣賜。 予夜不設饌, 故自御廚具以賜, 可與左右史同飮食也。"
十二年丙辰春正月, 京民已故者, 悉蠲免其債, 而公限十五年, 私限二十年, 從大臣言也。 東萊多士疏言: "壬辰死節人宋象賢文也, 鄭撥武也。 不可同享一祠, 請二之。" 王曰: "兪應孚豈不是武, 同享六臣祠。 不可以武而貶其節也。" 斥不納。 二月幸光陵, 蠲楊州民役一等。 飭銓曹, 錄高麗王遺裔, 立碑于永柔縣 岳飛祠。 尋命二品以上, 各薦才堪字牧者二人。 辛壬歉歲, 嶺南沿海民全家死者, 悉免其田租。 夏五月, 錄戊申死節人南延年、李述原子孫。 下敎于監司守令曰: "凶年之顚連者, 監司守令知賑救之, 樂歲之顚連者, 不復置心, 任其餓死道路, 何其與一夫不獲, 若撻于市者異乎?" 大臣言: "編配遭父母喪者, 許令歸葬, 法無其文也。" 王曰: "王者以孝爲治, 如之何其不歸葬也? 可令歸葬。" 六月, 讓寧、孝寧兩大君墓立祠, 其下給田置守塚, 復其戶。 冬十月, 守令犯贓者, 禁錮終身, 薦主論罪, 著爲令。
十三年丁巳春正月, 王以五事飭廟堂方伯, 務寅協也, 擇字牧也, 勉循良也, 勸農桑也, 修堤堰也。 二月, 王自首歲開法講, 討論不倦, 會玉堂多不充, 久未開講。 王曰: "上雖倦怠, 下猶當勸勉。 以予晩學, 因春煦漸長, 欲補前工之闕, 而玉署之門長鎖, 法筵之開無期, 淸燕顧問, 未有其人, 求諸往牒, 有是否?、 遂命備員, 日橫經講讀。 三月王患臂手不仁, 猶欲親享皇壇, 群臣力止之。 王曰: "崇報皇恩, 惟在數尺崇壇, 予曷敢以小疾曠禮乎? 予病妨屈伸, 秉珪承筐, 懼有失儀, 燕居之中, 試肄習之, 粗可以如禮也, 勿復言。" 尋命政院飭六曹, 修明《大典》法, 違者察推。 慶尙監司閔應洙疏言故參判曹偉之冤死, 故左尹郭再佑之勳業, 故郡守趙宗道之立殣, 請竝賜謚, 從之。 復命公洪監司, 建鄭忠信廟, 錄其後。 夏六月, 天甚熱, 王猶講學不輟, 至夜皷四下乃罷, 大臣言太勞神用。 王曰: "人主一心, 萬化所本, 豈可以日熱怠乎? 祖宗朝必不爾, 故予使承旨溯考古事, 盛暑開講, 未有考祁寒則有之, 寒與暑奚擇哉? 況一月六對, 尤可見祖宗勤政之盛意也。" 是後季年, 王竟行六對, 未嘗一有闕焉。 秋七月, 王將祈雨社稷, 時王不豫, 筵臣言在誠不在禮, 王曰: "成湯非不足於誠, 何爲代犠桑林乎?" 竟親行。 還至金吾門前, 命承旨放釋輕囚。 越二日, 復親祈太廟, 不乘輦不張傘至廟門, 雨下袞冕盡濕, 達宵祗事, 明日還宮, 遣宣傳官勞問軍兵。 八月王幸健元陵, 歷謁顯、穆、徽、懿、惠五陵, 召見京畿監司及守令于齋室, 駕還。 明日行晝講, 犒饋軍兵。 九月, 命調用孔氏。 初王未詳國中之孔爲先聖裔, 至是筵臣言: "先聖五十三世孫紹, 仕元爲翰林學士, 當高麗末魯國長公主來嫁恭愍王, 紹陪而來, 因家東土, 東土之有孔氏始此, 故有是命。 考講館學生, 同分者令試製前庭, 較其優劣, 承旨言夜黑不可寫卷, 王爲撤御座燭與之。 閏月蠲京畿湖西湖南災損邑軍保米布。 時六鎭饑, 特賜 奴貢米三千石, 復益以嶺南儲置米二千石, 遣御史監賑, 卒無一人流亡。 冬十月, 王旣親享, 謂掌樂院提調尹淳曰: "昔人占國隆替必於樂。 今廟樂繁促宜正之。" 遣承旨放釋輕囚, 飭是後遇祁寒盛暑, 按例稟行。 命大臣備局堂上三司長兩局大將八道道臣兩都留守, 各擧人才。 十一月, 禁旅以行伍試藝陞之, 著爲令。 是月王慮囚, 謂筵臣曰: "先朝每當御膳進供, 有雉鷄獐兎之生者, 必放諸禁苑, 予亦倣而行之, 蓋聞其聲, 不忍食其肉之意也。 禽獸尙然, 況人乎?" 十二月。 王語大臣曰: "宋 李沆慮人主侈大封禪, 常以水旱奏, 誠得大臣體也。 予素無學術, 粗聞聖狂之分, 在於一念, 且經歷世故者多, 不待卿等之奏, 常自儆惕, 每夜睡覺, 幸今日之無侈大也。" 筵臣以程文之弊爲言。 王曰: "蘇軾賢矣哉! 得失置之度外, 憂君德不進也。 雖然亦惟在上者之道率而已。"
十四年戊午春正月, 遣官致祭于故忠臣金應河, 以殉節之歲也。 夏五月, 安東人私毁文正公 金尙憲祠, 王曰: "文正大節, 百世炳然, 敢私毁其祠乎? 亂民也, 首倡者刑配。" 秋九月, 賜高麗忠臣吉再諡, 仍命致祭。 時慶尙監司李箕鎭以爲言。 王曰: "種竹賜田, 罔僕之志, 確乎不可拔。 逝者有知, 豈以賜謚爲有光耶?" 筵臣言: "鄭夢周、朴尙衷皆前朝忠臣, 而我朝賜諡也。" 王可之, 命錄三人後。 冬十月, 王講丘濬 《衍義》, 至《明禮樂篇》。 謂儒臣曰: "猗我世宗朝, 天降秬黍, 地出磬石, 遂與名臣碩輔, 制作粲然可觀。 今雖世變風移, 豈曰無樂? 顧未有解聲律者, 繁音促節, 非復祖宗之舊。 且如《與民樂》, 古稱來往東西闕一章方終, 今亦不能然。 嗚呼惜哉!" 良久, 復曰: "我朝之《五禮儀》, 卽皇朝之《大明集禮》。 然朝士無人習熟, 凡有大禮, 一委鴻臚吏, 顚倒變亂。 禮尙如此, 樂何論乎?" 亡何禁方伯守令之濫刑者。 京畿、三南大同米, 命留其半于各邑曰: "古者有司之臣, 不以錢穀之數, 白于上者, 恐人主知其裕, 反生豫大心也。 予常因月終所上會要, 以爲安得儲積殷富, 效漢 文盡給天下田租也, 今之儲留, 雖不能當給租, 庶可省轉輸費也。" 十一月, 命文正公 趙光祖、故參判鄭蘊, 皆立後奉祀, 錄故府尹林慶業及皇朝提督李如梅後。 十二月, 大臣以伊川、谷山多盜, 請易以武倅。 王曰: "爲治能否, 不係文與武。 況盜本良民, 使仁漸義, 摩龍蛇化爲赤子可也, 豈容以緝捕杖殺爲務哉? 宜先飭兩府。"
十五年己未春正月, 王親耕籍田, 飭方伯守令, 助民種糧及牛, 廣闢田野。 禁宗戚僕隷, 侵漁京民, 民有貧不能婚嫁者, 有司助之。 夏四月, 王講丘濬 《衍義》, 至郊祀皇帝親省牲誓戒百官, 歎曰: "敬祀典, 顧不當若是耶?" 命禮官議大臣。 大臣皆以爲累百年不行之禮, 不必創也, 王曰: "無於禮之禮, 固不可創, 禮所有者, 若之何不行也?" 遂命自有親享, 省牲誓戒, 亦皆親之。 進宴于大王大妃, 朝士年七十, 庶民年八十以上者之子若孫, 官與資各宴其親。 五月, 追上中宗元妃愼氏諡曰端敬, 祔于太廟。 先是肅宗時申奎上疏, 請復莊陵位號, 又請復愼妃位號, 肅宗但復莊陵位號, 至愼妃事猶難之, 建祠置守戶。 是年春, 王因事起感, 命中官守祠。 未幾, 士人金台南上疏, 請復愼妃位號。 王曰: "君心趨向, 不可不愼。 漢 武好理財, 則理財者進, 好開邊, 則開邊者進。 今台南必因中官守祠而爲此疏也。 然人君用言, 但觀其當否而已。" 遂命百官雜議, 皆曰: "台南之言是也。" 從之。 秋八月, 王幸溫陵, 端敬后新陵也。
十六年庚申春三月, 王幸明陵, 追思肅宗朝建置大報壇, 爲之感慨。 回鑾至宣武祠, 俯仰涕泗, 命官致祭, 親賦感皇恩詩, 刻揭于壁。 夏四月, 王講《周易》, 至《噬嗑》之大象, 歎曰: "人君講學, 非爲尋章摘句, 蓋將欲體行也。 聖人云, 古之聽獄者, 求所以生之, 今之聽獄者, 求所以殺之, 此豈非萬世龜鑑乎?" 仍飭八道, 務詳愼庶獄。 右議政兪拓基請續《典錄通考》, 王可之。 且敎曰: "創業中興之君尙寬大, 故國祚綿永, 繼體守成之主務苛刻, 故子孫促亡, 輯是書者, 不可不知也。" 未幾王覽啓狀有剌字語, 疑黥剌尙存於今, 以問拓基, 拓基對曰: "我國循用《大明律》, 《大明律》竊盜者刺字, 故議讞引其文, 實未嘗刺字也。" 筵臣言: "法曹尙有黥涅具, 往往刺其臂, 不刺其面也。" 王曰: "身體髮膚, 同受父母, 其爲毁傷, 面與臂一也。 一傷之後, 雖或自新, 何能爲平民乎? 黥刺之具遄焚之, 刺臂之法且禁之。 比律引用, 雖曰空名, 安知後來不有實其名者乎? 宜去此名勿稱也。" 五月, 大同米田租減其半, 有司以經用不足爲言, 王曰: "君臣以草衣草食爲心, 何憂經用乎?" 遂命罷九營繕。 六月, 加上孝宗大王諡曰明義正德, 親享太廟, 還御仁政殿受百官賀。 秋七月, 群臣以王孝悌之德, 與凡祛黨禍掃逆亂修祀典懷黎庶, 求諸載籍, 尠有倫比, 屢請尊號, 王固讓不許。 大王大妃勸之受, 王泣曰: "請先進號慈聖, 然後謹受敎。" 大妃許之。 遂上大妃尊號曰顯翼, 王尊號曰至行純德英謨毅烈, 王妃尊號曰惠敬。 王受冊寶於仁政殿, 受百官賀於明政殿。 明日命承旨詢貢市民弊, 飭各道采民瘼以聞。 八月, 王親行釋菜于文廟, 退御明倫堂, 設科取士, 命大司成, 月三至國子, 與諸生會饌, 課其業倣《周禮》州陞學之法, 每式年諸道各薦能通五經士一人, 入太學作成。 九月, 王幸齊、厚二陵, 路過坡州 文簡公 成渾墓, 王駐轎而式以致敬焉, 遣官致祭于渾及文成公 李珥墓。 旣謁陵, 遂幸開城府御滿月臺, 設文武科取士, 飭甄用文武沈滯人。 其當通淸顯者, 通淸顯。 至成均館, 行謁聖禮, 周覽學舍, 歎曰: "美哉基也。 勝國好佛不好儒, 以至於亡惜乎。" 遂親書尊聖道, 刻揭明倫堂, 賜三經四書各一部, 貯尊經閣。 復敎曰: "先朝癸酉, 幸故都也, 欲視學未果, 但依兩朝故事, 賜綿布, 今亦賜綿布一百匹。" 乃竪碑于善竹橋, 褒高麗忠臣鄭夢周之節, 又竪碑于不朝峴, 以勖不朝人子孫之忠貞, 過四孝子碑, 命承旨問金嶪等子孫有乎無乎, 遂回鑾。 冬十二月, 諭巖穴求志之士, 出而造朝, 造朝者皆命乘傳。
十七年辛酉春正月, 關東饑, 遣御史監賑, 蠲騎步兵布, 其尤甚邑竝免庸調。 時關北亦饑, 凡東北道方物物膳朔膳, 限秋成悉免。
二月, 擢前副提學金鎭商爲大司憲, 嘉其出處, 有本末語默以節也。 三月命儒名者, 勿施治盜刑, 著爲令。 初前參判李春躋, 冠其子, 使庶弟夏躋掌具盛饌, 遍邀公卿韋布宴之。 與宴者多中毒歸死, 不死亦病, 群怨擊皷, 請治夏躋比死者一洗, 王矜而可之。 於是群怨以爲, 秋官常刑, 不足以取服, 送捕廳雜施治盜刑, 備極酷烈, 夏躋竟死捕廳。 至是王親試講館學生, 謂命官宋寅明曰: "治夏躋, 所以慰孝子慈父心也。 然傳有之士可殺而不可辱。 夏躋曾以講生入此庭, 乃以治盜之律治之。 此路一開, 或爲後日法, 則滔滔之弊, 豈不自予始乎?" 蓋寅明子亦死於宴, 故王及之。 尋命有司, 洗滌囹圄, 除其不潔。 夏四月, 革吏曹郞通淸法, 改翰林薦爲圈。 王痛惡黨習, 以爲: "黨習皆由新進士, 躁競相傾軋也。" 命罷二薦。 諸嘗爲翰林者, 上疏引李爾瞻都堂會圈事, 以爲非所以重史官也。 王曰: "執藝之陳, 夫誰曰不可? 然予惡黨習, 熟思而審處之, 小官敢沮戲乎?" 遂盡罷陳章諸臣。 五月, 以《五禮儀》宮殿門橋古名異, 命不便行禮也, 命前大提學李德壽正之, 待書成送于嶺南營刊行。 六月, 停關東掘白土之役, 仍命司饗院輟秋燔, 從御史言也。 秋七月, 召太學生于廣達門外, 賜饌饋酒, 命都承旨宣諭, 尊聖務本之道, 遵肅廟故事也。
十八年壬戌春正月, 王以黨議分爭, 多起於書院也, 命撤諸道五十年後新創書院。 贊善朴弼周上疏, 請勿毁箕子、孔子、朱子三聖影堂, 王曰: "草野之言, 可不從歟?" 遂許之。 三月, 王親書‘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賜太學, 刻石竪于泮水橋。 夏五月日有食之。 王前一日, 齋戒救食仍著爲令。 時癘疫熾甚, 多死亡, 王命兩醫司, 分掌醫之, 全家死者, 自官收瘞。 六月, 築江華外城, 從留守金始㷜之請也。 秋七月, 以李延德兼掌樂院正, 使考正雅樂。 國家經亂以後, 雅樂散軼, 笙簫管琴皆不備, 皇壇樂器, 太半以俗樂代。 亦不能備宮軒之制, 王慨然, 命掌樂院提調閔應洙, 購得四器於燕京, 然其彈吹曲譜無知之者, 或薦延德知樂, 故有是命。 王且欲復世宗朝報漏閣制, 命延德與巧思人崔天若講究之。 八月, 有人得古圭於平壤土中, 以獻曰: "此箕子圭也。" 王以問筵臣。 筵臣對曰: "殷尙玄, 箕子圭必玄, 而今弗玄伊靑非也。" 王曰: "然。 此必皇明 高皇帝所賜與我國, 而失於壬辰西狩者也。 享皇壇時, 秉此圭不亦可乎?" 九月, 慶州大水, 毁新羅 憲德王陵, 王遣香祝, 命道臣修之。 先是嶺南民運穀關北, 至海中渰沒。 王曰: "爲北民而死南民, 仁之難全也如是夫。" 命道臣設壇祭之。 冬十月, 命刊《兵將圖說》, 廣布中外。 十一月, 王悶京華士, 不肯入太學居齋, 命增上齋生額百人, 爲率以會饌, 一日爲一點, 滿五十點者, 許赴泮試。 遂成講製節目, 命太學遵行, 明日召見太學生於崇文堂曰: "先朝建此堂, 名崇文爲右文也。 今見爾等於此堂, 亦右文之意也。"
十九年癸亥春正月朔朝, 王率百官陳賀于東朝, 以王卽阼後母臨二十年也。 三月命撰《受敎輯錄續編》。 敎曰: "是後非軍務, 而予或用棍, 喉唍執奏。" 刑曹參議柳復明上疏, 請禁酒。 王曰: "往者禁酒, 擾民而無實效。 予所以爲文戒之, 不設禁者此也。 且予見徒流案, 以酒充軍者多, 是乃齊之以刑也。 不先敎化, 徒繩法爲快, 民何以措手足乎?" 不聽。 召贊善朴弼周至, 王曰: "大臣方請見, 然九經之序, 尊賢在敬大臣上, 故先召見卿矣。" 仍問: "三代後不復有三代何也?" 弼周對曰: "行與不行也。" 王曰: "何爲不行?" 弼周對曰: "氣稟累之也。" 王曰: "齊宣對孟子, 不諱好貨色, 予何獨諱卿乎? 予喜怒之發, 常失其中, 雖自知爲病, 莫能改也。" 弼周對曰: "先儒云知如此是病, 不如此是藥。 殿下旣知其病, 何爲不改?" 王曰: "非知之艱, 行之惟艱。" 弼周對曰: "誠意不足, 未免於自欺也。" 王曰: "善哉言乎! 予之自欺已過半生, 今而後當以不自欺爲勉也。" 弼周仍陳李縡、韓元震不宜斥累年。 王曰: "是予之過。" 立命元震勿削逸, 縡陞正卿。 夏四月, 王享太廟, 回鑾望仁祖舊宮, 感天時三周於龍興, 遂命歷臨, 倉卒陣不得成列, 仗衛多失序。 掌令尹植諫曰: "不令於出廟時, 而令於路中, 無乃抑制群下之諫止乎?" 王曰: "抑制非其情也。 然言則是, 予當受而不辭。" 遂擢植通政階。 尋以享祀時群臣祭服不中度, 命有司考《大明會典》正之, 且親釐改儀註中節文之繁縟者, 下所司。 閏月, 王酌獻文廟, 試士於明倫堂, 行大射禮於下輦臺, 王獲三矢。 遵成宗故事也。 命文衡記其事, 揭之明倫堂, 建閣于享官廳東, 藏弓矢器服。 明日召太學生於崇文堂, 賜酒設饌, 饌凡五品酒凡三行。 先是王每祗事廟中, 默數樂之章節, 其紀第一室功德者, 或奏第五室, 紀第六室功德者, 或奏第九室, 王甚疑之。 至是以問筵臣, 筵臣莫能對, 遂命禮官議大臣。 領議政金在魯對曰: "世宗朝制樂時, 晨祼及三獻樂章, 各除引入引出以九爲節, 而其八章歷述穆祖至太宗及元敬王后功德, 然後以第九章總敍以終之, 此其制樂之微旨也。 及至仁祖朝, 群臣不悟廟樂九成之旨, 遂以爲逐室各一其章, 追製宣廟樂章, 以十其九, 而今之樂師, 又不知其理, 亦以一章各奏一室, 所以功德不合於所奏之室也。" 王曰: "然。 宣祖樂章, 今不可去之, 其以太宗室之《顯美章》, 元敬后室之《貞明章》合爲一詩, 俾不違九成之數。 且以今日釐正始末, 詳載議軌, 爲後日考。 五月, 王祈雨社稷, 不雨, 將復祈于北郊, 謂近臣曰: "祈雨不乘輦古也, 日者元老大臣苦爭, 故勉從之, 若是而何能感天神乎? 遂步輿至北郊, 祭畢雨, 王露坐良久乃還。 秋七月, 王因事敎曰: "國之用善人, 其利博哉! 漢廷有汲黯, 則准南不敢叛也。" 九月, 群臣請稱觴上壽於東朝, 東朝欲王亦宴群臣於廷, 王曰: "謹受敎。" 遂以誕彌節, 宴群臣, 樂用雅樂, 酒用玄酒, 饌品減其數。 冬十月, 贈嚴興道下大夫, 官給祭需, 從禮官言也。
二十年甲子春正月, 纂《小學宣政殿訓義》。 王謂儒臣等曰: "《小學》一部, 是予平生尊信之書也。 予欲倣世宗朝《思政殿訓義》, 以音訓事實, 與先儒姓名出處, 分釋集解之下, 以便觀覽也。 於是蚤夜召儒臣, 親自參證。 旣成, 示贊成朴弼周, 重加校正, 行于世。 夏五月, 命纂《續大典》, 除全家徙邊律。 先是成宗朝纂修《經國大典》, 規模甚正, 條貫猶未詳, 歷代增修, 各爲一書, 有《前續錄》、《後續錄》、《典錄通考》、《受敎輯錄》等書, 門煩戶衆, 不便考据。 至是王命設纂輯廳, 差九堂上九郞廳, 分授六典, 刪繁就簡, 日引對於前席, 親自勘定, 至全家徙邊律, 歎曰: "犯者罪矣, 妻子何辜?" 遂命除之。 秋七月, 命纂《續五禮儀》。 《五禮儀》亦成於成宗朝, 後多損益, 未有成書, 至是續之。 九月, 王入耆社, 從群臣請也。 王至耆社, 拜靈壽閣, 召見潛邸舊洞父老年八十以上, 賜米布有差。 明日名耆社諸臣宣法醴, 敎曰: "先朝己亥, 錫宴于耆社臣, 今但宣醴, 以不敢先於東朝進宴也。" 冬十月進宴于大王大妃。 王親爲詞侑歡, 其詞曰: "瞻彼寶閣兮, 受几杖來。 奉歡長樂兮, 禮宴大開, 頌祝岡陵兮斯萬歲盃。" 極歡而罷, 退語群臣曰: "親在不稱老, 然靈壽閣所受几杖, 奠于東朝座右, 歌此詞, 聊代斑斕戲也。"
二十一年乙丑春正月, 關西御史歸奏, 寧邊府有毓祥宮折受, 潁爲民弊。 王曰: "宮中府中, 俱爲一體, 況先朝至誠愛恤之民乎? 其罷之。" 三月, 王欲親享大報壇, 群臣止之。 王曰: "予若益衰, 欲躬行得乎?" 竟親享。 命修萬東祠, 給免稅田。 夏六月, 減關東貢蔘, 給續田, 以補民役。 秋七月, 敎曰: "吾東方道學文章, 高麗 圃隱實倡之, 可遣禮官致祭。 頃年予幸松京, 表章不朝峴 杜門洞, 以追式商閭, 封比墓之義, 今聞杜(洞門)〔門洞〕遺裔多販商, 宜甄用之。" 冬十一月, 稱觴東朝。
二十二年丙寅春二月, 王召文學臣語之曰: "昔人以讀書爲求放心, 有旨哉。 予自纂《小學訓義》, 每端居躬念世宗以東方聖人, 制作禮樂, 今予何敢望? 惟有略記平日見聞與繼述之意, 以自警省, 且以示後世子孫而已。" 遂日引對于便殿, 撰內外編, 至戒飮食, 謂諸臣曰: "昔我宣祖新承大統, 宮人欲試度量, 飮食故不潔, 聖祖一不形於色辭, 宮人皇恐乃止, 至今宮中傳爲美事。 予於飮食, 未嘗揀擇, 有所受也。" 書成名《自省編》, 仍戒群臣曰: "自今言動政令, 有違於《自省編》者, 其以《自省編》陳戒也。" 亡何, 王召接儒臣頗簡, 儒臣引《自省編》以爲戒, 王嘉奬賜豹皮。 夏四月, 王下敎曰: "土地之生財有限, 軍國之需用無節。 一使之行, 費礦銀十萬, 以充王公卿大夫匹庶所需之綾羅, 今窮村僻野, 亦皆綾羅, 竭一國之財, 助一時之侈。 嗚呼! 可勝歎哉? 夫上有好者, 下必有甚焉, 始自今節使, 上而袞衣, 下而朝衣所需綾羅, 一切嚴禁, 軍用不在此限。 如有否者, 書狀官當罪以不職也。" 是夜召承旨玉堂, 語之曰: "予素有志於大布大帛, 欲自宮中先之, 然而上奉慈聖故未敢也。 今適起感, 洞陳平素志於慈聖。 慈聖喜曰: "昭儉, 列朝盛事。 爾若有意, 夫何難乎? 華美非吾好也。 從此宮中可以不高髻, 可以不廣袖, 又可以衣不曳地。 咨! 中外臣庶, 咸體此意, 俾民如影之惟形。" 王復以《陸宣公奏議》中六條語, 書付座右以自戒, 曰好勝人, 恥聞過, 騁辦給, 衒聰明, 厲威嚴, 恣剛愎。 命諸臣仰視而敎曰: "予犯六病者, 卿等宜戒之。" 且曰 "魏徵戒唐宗云: ‘初則諫者多, 今則諫者少。’ 此無他, 樂聞故諫者多, 不樂聞故諫者少也。" 秋八月, 王召儒臣, 講《詩》之《關雎》, 謂儒臣曰: "理義者, 天下萬世之公物也。 雖生師之間, 不必苟同, 況君臣之際, 豈苟合爲是乎?" 初王以《關雎》爲文王作, 而非宮中人作, 及是筵臣謂以宮中人作, 故有是敎。 王將欲觀刈, 有司奏曰: "凡親耕後籍田, 任民耕種, 不藝九穀, 亦未嘗供粢盛也。" 王曰: "神可欺乎? 自今藝九穀, 以充粢盛也。" 九月, 追奪趙泰耉、柳鳳輝、崔錫恒、鄭楷、權益寬等官。 初王招延前大司憲朴弼周, 進秩爲吏曹判書, 咨訪治道, 弼周進袖箚, 請先正辛壬諸賊罪, 王沈吟曰: "會當與大臣熟議而處之。" 至是三司啓曰: "泰耉自殿下潛邸, 陰懷畏忌, 創冒嫌二字。 及儲位已定, 則箚救賊輝, 奬以忠赤, 代理有命, 則不有臺言闖入北門。 虎龍之變上, 則敢陳毋究梁獄之說, 白望之招出, 則諉以死中求生之言。 其前後凶言, 一轉爲鳳輝之疏, 再轉爲一鏡之敎文, 三轉爲戊申諸賊之詬天罵日。 請泰耉追奪官爵。 辛丑建儲, 卽我景廟體肅考之遺意, 承慈聖之明命, 手書面授, 處分光明, 而鳳輝則謂之忙急草率, 使令催督, 宗社有托, 八域同歡, 而鳳輝則謂之人心疑惑, 久而靡定。 至若無人臣禮四字, 是漢御史劾廢立之語, 而景廟之終無嗣續, 渠豈獨不知, 乃以顒望螽斯爲言, 此諱疾之論所毋始也。 請鳳輝追奪官爵。" 又論: "光佐之粧出誣獄, 盡露白望之招, 賊鏡敎文後, 擢擬本兵, 有若酬勞者然。 李潜凶言, 賊鏡比之茂陵, 光佐沿襲, 至請褒贈, 泰徵、思晟輩, 皆光佐所汲引卵育, 而戊申稱亂, 亦非別入。 錫恒之主張誣獄, 與泰耉同一凶心, 誣獄旣成, 必請賊虎之錄勳, 又欲奏聞彼中, 借勢脅持。 至若緩儉獄, 以致徑斃, 則盤問路絶, 以代理比之傳禪, 則語意凶慘。 泰億之敎文, 指意與一鏡相表裏, 定策國老門生天子之奏, 引用唐宦擁立昏辟之事。 且一鏡敎文蹀血行盃等語, 視爲當然, 一任騰播。 請竝追奪官爵。" 從之。 光佐、泰億以施律過多不從, 楷、益寬因憲府啓追奪。 命生員進士, 以幞頭襴衫放榜, 遂爲定制。
先是王欲復中朝進士科, 幞頭襴衫戴蓮花聞喜宴等制, 然襴衫未知其式。 筵臣有言, ‘故吏曹參判金玏當皇明 神宗時奉使朝天, 皇帝宣賜幞頭襴衫及《大學衍義》一部, 玏歸以巾衫, 藏之安東學舍, 《衍義》亦有御寶眞蹟, 今兵曹正郞權萬云。" 王曰: "萬無乃忠定公 權橃後耶? 昔我中廟, 與宰樞爲賞花宴于慶會樓下, 旣罷內侍捨得袖珍《近思錄》, 進于中廟, 中廟敎曰: "此必權橃袖中物也。’ 命還之。 是亦千載稀有之盛事。 咨政院公移嶺南營, 二書與衣冠, 使二臣之後領來也。" 至是萬與玏之孫弘渾領至, 時王弗豫, 强起盥櫛, 衣服冠而坐, 召見二人曰: "侍鄒、魯之士, 不宜效漢 高箕踞, 況皇朝舊物, 尤宜尊敬乎?’ 遂命賜三經《近思錄》 《大學衍義》, 飭所司幞頭襴衫, 得其式, 還歸弘運。 於是生進衣冠, 悉復明制, 其戴蓮花聞喜宴, 議不一乃止。 冬十月, 濟州貢枳實, 王曰: "予聞官數枳樹, 責出其實於民, 故民或撼樹自枯云, 豈不哀哉? 其還送濟州, 勿復貢。" 十一月, 王下敎曰: "親耕、觀刈, 皆所以重祀典也, 君耕而民取, 與民農而君刈, 俱不便。 箕城井田, 雖難復古, 然若因此會以王城東之籍田, 倣遺制爲井形, 取公田之一, 以供粢盛, 其餘八區, 盡蠲其稅, 則‘雨我公田, 遂及我私’之詩, 可復詠於千載之下。 其令太常, 講定節目以奏。" 十二月, 命復金宗輲、皇甫仁、鄭苯等官, 感肅廟復六臣官也。
二十三年丁卯春正月, 上大王大妃尊號曰康聖, 王率百官進箋稱賀, 以大妃周甲也。 敎曰: "太廟之錦不紋, 而予儀仗尙紋, 豈致美黻冕之義乎? 紅涼傘去其紋, 日傘以紬, 他儀仗視此。" 三月, 王謂筵臣曰: "東朝偶檢集祥殿舊藏, 得一玉帶賜予。 卽宣廟所嘗御, 而肅廟乙亥御此帶朝參, 今忽得之, 亦異矣哉!" 明日遂御古玉帶, 焚香于璿源殿, 是年秋亦以此帶, 試士于勤政殿。 是月王御禁苑之觀豊閣, 觀種稻歎曰: "是猶用人乎! 才雖可任, 讒說惎間, 則種稻乾土而望有秋也。 是猶納諫乎! 雖有忠讜, 不能見容, 則踈棄老農而任私智也。 是猶爲學乎! 非不講學, 有時間斷, 則灌漑不勤而欲成實也。" 復下敎, 禁巫覡淫祀曰: "太學古有李穆, 予之耳目, 亦有李穆者乎?" 飭京兆五部, 惑世誣民之類, 送法曹施刑。 秋七月王臨筵, 語諸臣曰: "予每恐如唐 玄宗之初晩兩截。 寒花晩香, 亦有時凋枯, 終不如芙蕖之出淤泥不染也。" 尋因事辭敎頗不平, 旣而悔曰: "《自省編》成, 予戒諸臣, 以將此編規勉, 當時之校正者、編次者, 亦如今筵, 而無一人敢諫, 此固予自反處。 然亦豈無交勉之道乎? 竝問備。" 先是命國陵封標之地, 未葬者禁葬, 已葬者遷移, 而士大夫已葬者勿論。 至是承旨奏: "封標八十, 士大夫犯葬已三十。 國祚綿遠, 將不知爲幾百代, 則八十猶少, 況五十乎? 士大夫犯葬遷移便也。" 王曰: "漢 光武自言安知踰年而享國長久, 秦 始皇必欲傳之萬世, 而二世遂亡。 國祚脩短, 唯在保民, 豈名山衆寡之云乎? 誠使盡用五十亦已多矣, 何必廣其封標, 害及白骨也?" 時有以蔭同樞者乘軒。 王曰: "繁纓小物也, 而夫子惜之, 朝著等威, 不可紊也, 非曾經京兆亞尹同、敦寧者, 毋得乘軒著爲令。" 八月, 有淫獄, 王下敎曰: "《周南》之化及於江漢, 先正趙光祖爲都憲, 男女異路, 涼德臨御, 不能敎化, 淫風肆行, 此無他, 學校之政廢, 而《小學》之敎弛也。 京之太學四學, 外之鄕校書院, 皆講習《小學》以爲常, 敎官之誨童蒙, 守令之敎小民, 亦必以《小學》之道。" 當是時, 王春秋高, 恐志氣衰而政事惰, 益奮勵爲治, 又慮群臣隨聖心所向, 務爲變更。 乃敎曰: "先儒譏漢 文不能改正朔易服色, 然人人輕議典章, 則一事更張, 百弊紛起。 咨廷臣須知予之奮勵, 只欲修擧舊章而已。" 九月, 遣禮曹郞, 遍審高麗王陵, 毁者修之, 犯耕者科治之。 命復安平大君 瑢官, 視金宗瑞、皇甫仁等例。 先是國典, 大王嫡孫, 不限代勿充軍役, 支孫限九代, 景宗壬寅, 廷議減其代數。 及王卽位, 命一遵舊典, 備邊司講定令式有曰: "限代中稍有士夫樣子者, 勿定軍役。" 至是王始聞之, 歎曰: "今諸臣登顯仕於朝廷, 則其先之嫡長爲守令者, 不敢充軍役, 況大王嫡孫, 豈容以士夫子有無, 而爲之取舍乎? 甚無謂也。" 令宗簿寺, 關飭外方, 亟去此一句。 冬十月, 王下敎曰: "《禮》云: ‘刑不上大夫。’ 今也朝侍從於禁闥, 夕決杖於囹圄, 惡在其禮使之道乎? 自今關係贓汚外, 凡侍從讞議杖律, 以贖論。"
二十四年戊辰春正月, 命殿講武臣以兵書, 其年限講規, 一如文臣殿講例著爲令。 二月, 改摸肅宗眞容, 王親奉于永禧殿。 還至慶熙宮之景賢堂, 召蕫事諸臣賜餕餘, 奏軒架以勞之, 親爲辭戒太康, 命諸臣和, 夜分乃罷。 明日入直儒臣金尙喆等上箚言: "我朝用樂之節, 非朝賀進宴, 則宮庭未嘗擧也。" 王手書賜批, 錫馬奬之。 夏五月, 命閣光化門舊鐘, 以有世祖封號也。 秋八月, 以倭貢繒紬彩綾七百餘疋, 分賜戶曹、三軍門、京畿營及市廛民。 冬十一月減冗費。
二十五年己巳春二月命纂《度支定例》。 夏四月, 竝享皇明 太祖高皇帝、毅宗皇帝于大報壇。 先是肅宗甲申, 築壇墠于北苑, 祀神宗皇帝, 以報壬辰再造恩。 至是王覽《明史》, 有曰: "崇禎丙子正月, 毅宗皇帝因我國被圍請援, 命摠兵陳洪範, 調各鎭舟師赴救。 是年三月山東巡撫顔繼祖奏: ‘朝鮮已失守, 皮島、鐵山且危, 宜飭洪範及沈世魁二鎭, 堅守皮島。’ 皇帝以繼祖不能協圖匡救, 切責之。" 王於是感泣曰: "使正史而出於先朝甲申也, 其竝祀毅皇必矣。 又況我東之封典國號, 皆高皇賜, 而禮遇之隆, 逈越前代者乎? 竝祀三皇, 我國家崇報之禮, 亦宜之。" 遂命刻日擧行。 王親享以妥之, 方灌鬯始事, 白雲一道, 起自北方, 蜿蜒逗于壇上, 有風颼颼, 引靈雨微灑, 比第一位獻畢, 風恬雲淨, 月星明穊, 與祭群臣, 相與竊歎, 以爲感應捷矣, 擧悽然有神州之思。 旣卒事, 遣禮官致祭于宣武、武烈祠及江都忠烈祠、南漢顯節祠。 秋七月, 左議政趙顯命, 請吏曹參議長望差除, 弘文錄亦如翰林召試, 以熄傾軋之弊。 王曰: "譬如防水, 壅于東則決于西, 豈更法可矯乎? 況玉堂人君所以講學求助者, 不可召試也。" 八月, 王親政, 飭兩銓恢公, 歎曰: "政與學, 只在爲 人、爲己之分。 苟其爲人也, 雖公亦私, 唯濟人, 不可避要譽之嫌。 所謂作之不已乃成君子是也。" 九月, 飭士大夫婚娶必親迎, 自國婚至士婚, 禁油蜜果於同牢卓。 十二月, 王下敎勸學曰: "學之爲道, 不肖者可以賢, 不能者可以能, 世俗甘自暴棄, 昏其鏡、沙其珠, 何哉? 咨! 搢紳大夫, 賢關多士, 莫曰言敎勤乃學問。"
二十六年庚午春正月, 王以正風俗, 當先崇儒, 乃遣官致祭于故贊成鄭齊斗ㆍ朴弼周、故贊善金榦, 擢前執義閔遇洙、朴弼傅通政階。 時癘疫熾, 禁衛御營上番軍多死亡, 王命兩營助之葬, 其寡妻孤兒, 令所在邑撫恤。 二月, 使燕還者, 以宋丞相文天祥像獻之。 王以六鎭五國城, 有宋帝陵, 欲建祠其下, 以文天祥、陸秀夫竝享之, 詢于大臣, 大臣以爲不便。 遂命配其像于臥龍祠, 遣承旨致祭。 罷生員、進士物色之規。 先是生員、進士會圍坼名, 諸考官先窺覘入格封彌, 擇其有地閥文望者, 擢置壯元, 其生員之第三, 進士之第六, 俗稱: "居是序者, 無命蚤死。" 故又擇鄕谷賤士以充。 至是王曰: "此公乎私乎? 嚴科場之道, 不當爾也。 自今永罷, 犯者以用情律論。" 秋七月, 行均役法。 初肅宗欲矯良役弊, 屢命群臣雜議, 而戶布、結布、游布、丁錢, 互持甲乙, 卒未能行。 及王卽位, 設良役廳, 擇任堂上數人, 專精講究, 以未得善策, 尋罷之。 是年四月, 王御弘化門, 召五部士庶詢曰: "生民之弊, 良役爲大, 不早更張, 莫知稅駕何地。 肆我聖考, 必欲矯救, 群臣竟不能奉承德音, 予庸痛慨, 今强疾臨門。 游布、口錢已知其不可行, 戶布結布, 何便何否? 外此亦有可以矯救者乎?" 士庶皆對曰: "戶布便。" 其以爲結布便者又十之二三。 王以問群臣, 戶曹判書朴文秀對曰: "戶布不能當經費之數, 其惟戶錢乎。 大戶一百文, 中戶五十文, 小戶三十文, 可以行也。" 王曰: "咄哉瑣瑣, 非國體也。" 文秀曰: "臣始欲汰冗縣, 以補經費, 而殿下難之, 諸臣又難之, 故思其次也。 無已則戶布立其本, 而未足者以魚鹽足之, 庶乎其可也。" 領議政金在魯曰: "戶布不如結布。 結布竝田租出稅, 官易收而民不撓也。" 王猶未決, 命諸備堂, 直宿備邊司, 講確便宜, 旣月未得長策。 至是左議政趙顯命, 爲陳洪啓禧均役之策, 王始難之, 竟從其言, 盡蠲國中良役一匹, 別設均役廳, 專管魚鹽結錢選武布等稅。 又益以儲置常定米及外邑隱餘結, 以充經費, 分遣均稅使於八道, 釐正魚鹽稅, 査鉤隱餘結, 遂嚴立科條, 飭今與後, 毋得妄議變更。 及季年, 王語人曰: "倡均役之論者子孫繁衍, 然後方信均役之有實效也。" 九月, 王幸文廟, 酌獻試士。 尋幸溫陽之溫泉, 浴疾也。 所過路儒賢名相忠節人墓, 皆遣官致祭。 設道科取士, 蠲湖西民租稅, 遂回鑾。
二十七年辛未春二月, 加上大王大妃尊號曰貞德。 王率百官陳賀頒赦。 停諸道方物, 不新儀仗輦輿, 慈敎也。 北關饑, 命移關東、嶺南穀三萬石, 載之戰兵船, 浮海輸北, 遣御史賑之。 三月, 王省牲于大報壇。 以是月十九日爲毅皇殉社日, 命有司停樂。 王率時ㆍ原任大臣、九卿, 至後苑之映花堂前, 北向四拜。 仍命禮曹, 當高皇ㆍ神皇禮陟日, 亦行望拜禮以爲常。 秋九月頒守城節目。
二十八年壬申夏五月, 加上大王大妃尊號曰壽昌, 王尊號曰章義弘倫光仁敦禧, 王妃尊號曰莊愼, 以王有皇壇格神之德也。 六月, 命設編輯廳, 纂《喪禮補編》, 斟酌損益, 皆出王睿斷。 秋九月我主上殿下誕降, 封爲元孫。 冬十二月, 置貢市堂上三人, 釐正貢市民弊。
二十九年癸酉春正月, 王親耕籍田, 耕牛減其半, 除從耕宣醴設科等節。 夏五月, 王祈雨北郊。 旣初獻有聲蕭颯, 命撤帟雨立, 比卒事, 冕黻盡濕。 後三日, 以雨未足, 復親禱于先農壇, 霈然乃止。 六月, 禁三江數罟。 王命釐正江民弊, 任事者成節目進之, 中有密網語, 王曰: "密網盡取, 豈王政乎? 其禁之, 犯者徒配。" 秋八月, 昭寧墓改稱爲園, 毓祥廟改稱爲宮, 置守衛官守僕守護軍, 祭享一惟宮園例。 追上淑嬪諡曰和敬, 以淑嬪封爵之周歲也。 王謂宗伯曰: "漢、唐以來, 中朝皆追崇所生, 而我朝家法嚴, 且有聖考下敎, 故予意未嘗及於追崇。 唯此一事, 庶乎斟得宜, 然外人不諒, 必曰尙有餘事也。" 九月, 敎曰: "今俗稱樂院爲梨園, 梨園唐 明皇所名, 奚爲於法樂之府乎? 其禁之。" 尋命講書院所藏《楞嚴經》, 移置北漢 中興寺, 以示闢異端之意。 冬十一月, 惠局奏: "紅腐米積之久, 反傷新米, 宜輕其價, 賣與畿民, 以無用爲有用也。" 王曰: "善。 然若其不可食也, 豈容欺元元乎? 予當爲民先嘗, 速取紅腐來。" 十二月, 加上肅宗大王尊號曰裕謨永運洪仁峻德, 仁敬王后尊號曰宣穆, 仁顯王后尊號曰淑聖, 大王大妃尊號曰永福, 以明年爲仁顯王后再正壼位之年, 且爲王周甲也。
三十年甲戌春正月朔朝, 群臣以聖壽請賀, 王不納, 遂謁太廟、靈壽閣、毓祥宮。 二月, 嶺南釐正使返命, 王從容問民疾苦, 以及風土俗尙。 釐正使盛陳採鰒漢, 佩瓢潛海狀, 王誦聶夷中詩曰: "辛苦過於粒遠甚, 忍令登盤乎?’ 立命停生鰒魚貢獻。
三十一年乙亥春正月上元日, 王率百官賀東朝, 以明年東朝壽七旬也。 三月, 尹志、李夏徵等伏誅, 追施趙泰耉、柳鳳輝、李師尙、尹就商及一鏡疏下諸賊等逆律, 追奪李光佐、崔錫恒、趙泰億等官。 志, 就商之子也。 先是乙巳鞫, 就商拷掠死, 志竄羅州, 日夜怨國, 使其子光哲交結羅之吏鄕爲稧, 募衆圖不軌, 掛書于客館望華樓, 以撓人心, 監司趙雲逵鉤得之以聞。 王鞫志等, 詞連諸賊誅竄有差, 事在《闡義昭鑑》。 志篋笥中, 多夏徵牧羅州時往復書, 綢繆甚密, 遂鞫夏徵。 夏徵辛壬賊明誼、明彦姪也, 敢稱一鏡等七賊疏以爲有臣節, 廷臣莫不駭憤, 請誅之。 且以耉ㆍ輝等爲諸賊根柢, 請竝施追律, 從之。 錫恒丙午追奪, 後因光佐入相復官, 至是與光佐、泰億同追奪。 秋八月, 命設編輯廳, 纂《闡義昭鑑》, 紀逆變源流也。
三十二年丙子春正月, 加上大王大妃尊號曰隆化, 王尊號曰體天建極聖功神化, 王妃尊號曰康宣。 王親行祈穀誓戒於明政殿。 訖, 召大臣宗伯太學生, 宣降絲綸, 以文正公 宋時烈、宋浚吉從祀文廟。 二月, 王酌獻文廟, 退御明倫堂, 親誦大學序, 命講書官太學生, 以次講《詩傳》、《中庸》, 討論文義, 下綸音勸學。 遣承旨致祭於麗朝名賢鄭夢周墓, 以東方道學之宗也。 夏五月, 飭諸道勸農。 王親御苑觀耘, 以爲民先。 六月, 命圖畫文成公 李珥 石潭書院及幽居以進, 因《聖學輯要》曠感也。 秋七月, 王以東朝七旬, 召耆社臣宣饌以飾慶, 東朝亦以王六旬有三, 具饌以賜之。 及諸臣醉歸, 王至東朝侍話, 以悅東朝心。 比退則天巳明矣, 不脫法服, 直詣正堂, 召儒臣, 講《中庸》。 越數日, 率耆社臣及宗親文武卿宰年六十以上, 進賀于東朝。 旣而又欲與士庶同慶, 爲設耆老科, 試儒武年六十以上, 坼號唱名如例。 八月, 王復親率百官賀東朝, 以東朝誕彌節也。
三十三年丁丑春正月, 文武堂下官沈滯者, 疏其名爲帖進之, 以備甄用。 遣官致祭于壬辰戰亡場之在安邊者, 又祭于江華 忠烈祠, 命不祧文忠公 金尙容廟, 嫡長世其官。
時淮陽、金城饑民, 多流入京師, 王命惠局, 資其糧回籍, 遣安集使安集淮、金民賑之, 蠲淮、金租庸調。 二月, 貞聖王后 徐氏薨, 王命喪禮從略, 自公除前, 勿禁士庶葬。 三月, 設兩賑廳, 分賑饑民二萬餘口。 是月仁元王后薨。 初后違豫旋瘳, 王喜甚稱慶, 蠲諸道舊逋, 親自疏決, 宥死罪以下。 未幾后復沈篤, 王遣官祈于山川, 卽下庭俛伏, 涕泣禱天, 願以身代, 哀動左右。 及后薨, 王思慕不已, 名其堂曰永慕。 夏四月, 遣御史, 安集丹陽、懷仁流民, 以置米賑之。 五月, 旱, 王責己減膳, 飭濫杖, 遣官祈雨于山川, 天乃雨。 六月, 葬貞聖王后于弘陵。 國制陵寢設四方大石, 調僧民運輸, 往往有壓死者。 至是王命悉去之, 事在《喪禮補編》。 秋七月, 葬仁元王后于明陵, 事大小王躬自照檢, 必誠必信, 克遵后志。 凡陵殿費減庚子三之一, 免京畿結錢及北道田租亦三之一。 八月, 王御經筵, 命錄故相臣盧守愼後, 以講《夙夜箴註解》而起感也。 冬十月, 飭銓曹, 疏擧淹滯。 遣御史安集淸安流民, 運耽羅穀販之。 十一月, 遣官致祭于成三問等六臣祠。 十二月改修仁宗冊諡, 奉于仁宗室。 凡諡冊與寶, 必奉于太廟當室之傍, 而仁宗諡冊, 失不傳焉。 至是將埋貞聖后虞主於廟庭, 掘地得玉札一片, 諦視之, 乃仁宗諡冊也。 王甚異之, 親寫全文, 鐫于玉, 合成完篇, 藏于仁宗室。 命堂下官紅袍, 易以靑祿, 從《大典》也。
三十四年戊寅春正月, 王將親祈穀于社稷, 大臣以王春秋高, 不可以筯力爲禮, 力請代攝, 王曰: "天爲民立君, 豈爲君生民乎?’ 竟親行之。 三月, 王下敎雲觀曰: "山頂封胎, 與一縣藏一胎, 不其謬乎? 今考實錄, 光廟與諸大君王子胎封, 同在一岡, 法祖宗, 當由此始。 自今勿拘代之遠近, 藏胎一山, 相距無過二三步, 以岡盡爲限, 而嫡子衆子元孫郡主勿貳之。" 秋七月, 命諸道, 錄上皇朝人遺裔, 飭守令之誤充軍役者, 施以制書有違律。 八月, 王幸明陵, 回鑾見秋霖傷稼。 歎曰: "是吾過也。"’ 命減膳十日, 以謝農民。 冬十二月, 命禮曹撰《皇壇奉室儀》。
三十五年己卯春三月, 命關西道臣, 悉焚債券, 增江界貿蔘之價。 夏五月, 祔仁元王后于太廟肅宗室, 頒赦。 命軒架陳而不作曰: "昔夫子於子張、子夏皆許以君子, 而我朝結彩歌謠, 聖祖除之, 前後皷吹, 聖考陳而不作, 非敢過也, 是亦禮爾。" 六月, 以王封爵之周甲, 御正殿受群臣賀。 冊鰲興府院君 金漢耉女爲王妃。 秋七月, 冊我主上殿下封王世孫。 是月王謁太廟, 拜皇壇。 酌獻文廟, 敎曰: "漢 高四百年基業, 實本於太牢祀孔子。 其禮不可略也。" 仍命四聖位, 亦竝親獻, 啓聖祠行再拜禮。 八月, 王下敎曰: "人君以法御下, 若隨意低昻, 人何能措手足乎? 庚子以前, 未有不待結案而正法者, 一番行之, 遂以爲例, 甚或以一傳旨正法。 日後爲君者, 任氣循襲, 爲臣者, 逞黨循襲, 其流之弊, 自我導之, 興惟及此, 不覺懍惕。 今後不待結案者, 軍門梟示者, 傳旨正法者, 追施逆律者, 一切永除, 君或有犯, 執法之臣, 將此敎爭之。 苟爲不然而迎合承順, 此宵小苟容之流, 王章昭昭, 天網恢恢, 安敢逃其罪乎? 遵之則興, 不遒之則亡, 咨金吾、秋曹兩司, 刊印藏府, 永垂諸後。"
三十六年庚辰春二月濬川。 川合白岳、仁王、木覔之水, 襟帶都城中, 東出五間水門, 又東爲永濟橋東南會中梁川, 入于漢江, 《輿地勝覽》所謂開川是也。 當世宗時李賢老[李善老], 請禁投穢物, 以淸明堂之水, 集賢校理魚孝瞻上疏, 斥其勢不能行, 世宗是孝瞻而不用賢老[善老]言。 歷代尊信世宗朝事, 遂竝疏濬不擧者, 且三百有餘年, 川漸壅閼, 幾與隄平, 霖潦之餘, 往往有汎濫之患。 王用耿、亳故事, 屢臨門詢衆庶, 僉曰: "濬之便。" 王曰: "是雖爲民, 豈可煩民力乎?" 乃捐累萬緍, 雇丁夫濬之, 戒勿催督, 不月功告訖。 於是設濬川司, 以兵曹判書、漢城判尹、三軍門大將, 兼濬川堂上, 置都廳、郞廳各一人, 每歲濬川以爲常。 夏五月, 王祈雨南壇, 回鑾至太常, 見神室有一位版題曰大明東征官軍, 遂命忠武公 李舜臣之孫泰祥爲獻官, 皇朝提督李如松之孫萱爲大祝, 設壇致祭于露梁, 仍以位版配食宣武祠。 冬十二月, 王命大司成, 率國子生入侍。 又命替直儒臣入侍。 敎曰: "君師之責, 予敢云然, 耄朞也月三講《中庸》, 未見實效, 欲與卿等及諸生問難, 以補予涼學也。 於是自夫天人性命, 以至存養省察, 出幽入微, 洋洋討論, 其言皆可書也。 凡在筵諸臣, 怳疑身在回琴點瑟之間, 非辟之心, 無自而生。 同起身請曰: "人才作成, 講說爲大, 觀於洙泗濂洛可驗也。 今玆之擧, 其爲風動觀感, 固不淺尠, 然不有定制, 使民自化, 雖堯、舜不能也, 敢請所以定制者。" 王曰: "善。 師儒之長, 與國子生, 月三講會於明倫堂, 毋綴章句, 專尙理義也。"
三十七年辛巳冬十一月, 命輦輿用金者, 悉易以銅。 十二月, 敎曰: "我東之禮樂文物, 侔擬中華, 皆箕聖之遺澤也。 特遣重臣, 致祭箕聖墓。 尋命閫帥決杖, 亦如侍從例以贖論。
三十八年壬午夏四月, 飭京兆五部, 幼失父母, 冒他姓以爲姓者, 令各自陳, 凡六十餘人, 悉復其姓。 冬十月, 遣安集使, 安集畿甸三南民。 罷南、北、江都御供米。
三十九年癸未春正月, 王御勤政殿舊址, 受群臣賀, 以聖壽七旬也。 尋朝參於延和門, 以六典飭六官曰: "何以用人? 恢公祛私。 何以擬守令? 爲官擇人。 咨吏房承旨飭吏曹。 戶口紊矣, 宜正之; 生民倒矣, 宜拯之; 國儲竭矣, 宜節之。 咨戶房承旨飭戶曹。 祀而不潔, 罔以格神; 禮而失序, 罔以爲國。 咨禮房承旨飭禮曹。 戎政踈虞, 責惟司馬, 武夫多滯, 咎在西銓。 咨兵房承旨飭兵曹。 囹圄之囚, 非人非鬼, 傷天和多矣。 細考文案, 夫豈無求生於必死者乎? 咨刑房承旨飭刑曹。 工匠亦民耳, 悁悁且不保朝夕。 莫曰水部閒局, 修乃職事。 咨工房承旨飭工曹。 三月, 湖南道臣, 啓饑民死者四百五十三人。 王曰: "予之過也。" 命減膳三日。 秋八月, 敎曰: "昔宋 仁宗見貴妃首开皆珠, 有滿頭白紛紛之語, 貴妃皇恐去珠, 仁宗大喜, 剪牧丹花賜之。 不數日京師珠價賤, 上行下效, 蓋如是捷矣。 予則曰蕃商之賈 珠售市, 此奢侈之本也。 不揣其本, 惡乎齊其末哉?" 於是命賈珠倭館者, 以潛商律論。
四十年甲申春正月, 王設人日製, 親策多士, 對者無切直語。 王乃敎曰: "烏鳶破卵, 鳳凰不至。 是必由李顯弼也。 予雖否德, 粗聞無若丹朱之語, 禹戒之, 舜受之, 外施仁義之語, 黯言之, 武容之。 獨於一顯弼也, 不施寬假之典乎? 顧其用心不正, 故因臺請處分, 而不虞士氣之摧沮。 今當白首暮年, 豈不思裕昆之道乎? 李顯弼給牒敍用。" 二月, 王與宗親文武年七十以上人, 行大射禮。 明日親耕籍田。 三月, 王親享于大報壇。 旣卒事, 餘誠未已, 露伏壇前, 至天明, 有白氣彌亘黃幄上, 見者異之。 夏四月, 禁中外巫卜雜術。 五月以文純公 朴世采從祀文廟。 冬十月, 飭士大夫親迎禮, 因講《詩》之《齊風》而興感也。
四十一年乙酉春二月, 王率大臣備局堂上, 至于南郊省耕臺省耕, 助畿民種。 三月, 王親享于大報壇。 旣撤語諸臣曰: "亞獻而氣益淸, 殆若神助也。" 夏四月, 王親禴。 秋九月, 王命印麗陵禁標受敎, 分藏五史庫, 頒于開城、江華、京畿營, 禁民耕葬, 犯者竝地方官科罪。
四十三年丁亥春二月, 王與世孫, 親耕籍田。 前一日祀先農, 王初獻, 世孫亞獻, 王五推, 世孫七推。 王妃亦與嬪御, 親蠶于景福宮採桑壇。 三月, 全州火, 延燒二千三百餘戶, 命給米二千三百餘石, 貸結錢一萬兩。 夏四月, 頒繭于政府喉院八道兩都。 冬十月, 命錄文正公 趙光祖、文純公 李滉後。
四十五年己丑夏五月, 王幸籍田觀刈回鑾, 明日召國子生, 誦《夙夜箴》以自儆。 越數日親受小麥。 飭京外同斗斛權衡。
四十六年庚寅春正月, 設編輯廳, 纂《文獻備考》。 國朝典章, 有金櫃石室, 藏之名山, 外此無徵, 凡祖宗禮樂文物, 老師宿儒, 莫或知其沿革, 六官庶職, 皆憑胥史傳說, 轉輾訛謬, 漸失其舊。 於是王令纂是書, 篇目一惟馬端臨之《文獻通考》, 而稍加檃括。 自是國有事, 据考多賴是書。 夏四月頒測雨器。 王得世宗朝測雨器之制, 命度支製置兩闕及雲觀, 且分送兩都八道, 每雨澤以尺寸報, 因編《象緯考》有是命。 六月州府郡學, 同配六賢如文廟位次, 因編《學校考》有是命。 永除捕廳之亂杖刑, 因編《刑考》有是命。 秋七月, 王與世孫, 幸弘文館, 講學宣饌。
四十七年辛卯冬十月, 建肇慶廟于全州。 初七道士李得履等, 上疏請建國朝始祖新羅司空祠, 王命宗伯就大臣議, 議不一。 復召問廷臣, 廷臣皆莫能對, 王曰: "禮緣人情, 今朝鮮士大夫, 猶且尊敬始祖而飾其禮, 況國之始祖乎? 高句麗、新羅亦皆有始祖廟, 禮固有因俗義起者也。" 於是遣有司, 建廟於全州、慶基殿北, 命世孫題祠版, 稱先公。 奉于資政殿日, 具袞冕展拜, 命大臣宗伯, 具儀仗奉至廟妥之。 蠲湖南十一邑結錢選武布及舊逋, 京畿、湖西輦過邑視此。
四十八年壬辰春正月, 王召見國子生於便殿宣饌, 賜四民米有差, 京外貧不能婚葬者, 官與資婚葬。 三月, 王率皇朝人遺裔及宣廟壬辰死節人後孫, 詣勤政殿舊址, 行望拜禮, 以重逢再造之甲子也。 冬十月, 加上顯宗大王尊號曰昭休衍慶敦德綏成, 明聖王后 金氏尊號曰禧仁, 以功德當入世室也。 尋加上王尊號曰大成廣運開泰基永, 貞聖王后 徐氏尊號曰恭翼, 王妃金氏尊號曰睿順, 群臣請之也。
四十九年癸巳春正月, 王御崇政殿, 世孫率百官賀, 以聖壽八十卽位五十年也。 懸申聞皷於建明門, 令民抱冤者, 擊皷以聞。 賜四民米有差。 二月, 行養老宴, 世孫請之也。 夏六月, 石築開川。 先是濬川, 病兩岸爲潦壞缺闋于川, 乃植楊柳以防之, 然猶不能堅完。 至是王命以石隄之, 牢固精緻, 儼成王居之體勢。 功旣竣, 王與世孫臨廣通橋, 顧謂世孫曰: "有志者事竟成。 凡欲有爲, 當先立志, 勉之哉!"
五十年甲午春正月, 王御勤政殿址, 行登俊試, 修國初故事也。 三月, 王下敎曰: "我國奴婢法, 創自箕聖, 然箕聖特設此, 以禁竊盜而已。 豈使其世世子孫, 長爲奴婢乎? 又況調庸租之法, 男有役而女無役。 今奴婢竝役, 甚無謂也。 今後婢貢, 亡論公私盡革之。 其取給經用者, 備局惠局商碓以聞。" 先是三十一年, 王憫內寺奴婢, 不得婚娶, 欲盡革其名, 病經用無以充, 只命奴貢減一匹, 婢貢減半匹, 至是悉革公私婢貢, 其經用以糴代之。 是月王幸玉堂春坊, 親講《聖學輯要》, 世孫侍講, 宣饌于玉堂春坊。 夏五月, 旱。 遣官祈雨, 以十事自責求言, 開囹圄釋囚, 天乃雨。 秋七月王受賀于崇政殿, 減今年田租之半, 撤九營繕, 蠲貢市民征, 士庶年八十以上, 各加一資。 尋與世孫幸彰義宮, 召耆社臣及洞民年八十以上者, 賜帛有差。
五十一年乙未夏四月, 王行朝講朝參。 歎曰: "親事講學, 人君之職。 故曰一日二日萬幾也。 予思癸巳朝講朝參事, 强起臨筵, 而及夫講書, 已不能成聲。 雖欲復爲此事, 何可得也?" 冬十月, 王有疾弗豫。 十二月, 命王世孫代聽機務。 時王居不能坐, 坐必令世孫扶視, 亦不能辨物, 世孫常在傍告之。 由是太醫晝夜不離, 藥院提調, 晨入三進湯, 至夕乃歸者已有年, 及冬氣益綴痰升降不已。 嘗命行常參, 令旣具, 世孫請止之。 王曰: "是予夢語也, 然旣命矣, 不可不實其言也。"’ 遂命左右, 扶以出, 欲陞座, 氣昏還內, 語世孫曰: "欲令汝代聽者久。 祀典攝行爲之兆也。" 且戒以自今夢語, 汝可勿布。 亡何, 敎曰: "今日陳賀, 百官入集慶堂行禮。" 時夜已五皷, 中官傳于政院。 賊臣洪麟漢方爲左議政, 必欲宣旨, 世孫屢遣人謂麟漢曰: "待天明痰降, 頒此敎未晩也。" 麟漢終不聽, 竟夜促百官會, 都人莫不驚駭。 詰朝左右以告, 王歎曰: "百姓皆謂予耄荒之君也。" 於是以不稟世孫, 罪中官, 仍命行禮, 罷遣百官。 自是王益決代聽志, 執世孫手語之曰: "予欲傳禪於汝, 予衣紫臨汝, 汝衣紅事, 予不亦樂乎? 然恐傷汝心, 思其次, 欲令汝代聽, 而代聽必稟大朝, 反益煩撓, 予欲因代聽, 盡付國事於汝也。" 當是時賊臣鄭厚謙, 以和綏翁主所後子, 與其母用事張甚, 麟漢自以世孫外黨, 意望不淺, 然世孫常鄙其爲人, 貪暴無知識, 未嘗假以色辭, 麟漢怏怏怨望, 遂附厚謙母子, 圖爲平安監司, 歸又攀援入相。 三人者以世孫英明, 恐他日罪將不測, 與洪趾海、尹養厚等結爲死友, 日夜造蜚語, 謀傾儲位, 且欲引趾海與之幷力。 乘王疾甚, 屢薦趾海爲相。 王輒不答, 謂世孫曰: "左相必以洪趾海爲右議政, 尹泰淵爲訓鍊大將, 然後快於心乎。" 尋又曰: "世安有政丞請也?" 麟漢聞之大懼, 與養厚及厚謙母子, 謀益急憚, 世孫宮洪國榮, 守死不去, 與鄭民始常左右之, 乃數讒國榮等於世孫, 欲以孤其勢, 然世孫終不納。 至是王召時、原任大臣, 諭以代聽之意, 麟漢挺身言其不可。 王曰: "我朝代聽前後相望, 非惟分勞, 欲使儲貳, 明習國事。 如老論少論所當知也, 吏判兵判所當知也。" 麟漢忿形於色曰: "東宮不必知吏判, 兵判不必知老論少論, 又不必知國事。" 時王綿惙不自振, 但噓唏叩閾曰: "卿等可退去。" 諸大臣將退。 王猶不能自已, 復召入曰: "予疾如此, 就中痰升譫語發輒亟 或夜半出寸紙召卿等, 予不辨領左相之爲何人, 則將置國事於何地耶? 然不足與卿等論此事, 毋寧以我心法, 傳之東宮也。" 仍命東宮, 講《自省編》、《警世問答》。 及大臣退, 王又叩閾曰: "大臣如此, 朝事無可爲矣。 奈宗社生靈何?" 越十日, 王命行常參, 倚世孫坐, 有頃疾作還臥。 召大臣厲聲責其不從命, 命承旨書下代聽之敎, 麟漢身蔽承旨, 使不得聞王言, 且曰: "臣子孰敢書此敎乎?" 王怒叱曰: "卿等速退。" 退, 王乃下敎政院曰: "巡監軍入東宮點下, 吏兵批稟而後入東宮點下。"
於是麟漢復倡諸大臣求對, 請寢成命, 王誦景廟‘左右可乎, 世弟可乎’ 之批曰: "予近者視昏不能點政望, 中官代爲之付標, 萬一中官顚倒予命, 予何能覺乎? 無寧付諸我孫之爲當然也。" 領議政韓翼謩曰: "聖明在上, 今之中官, 保無此也。" 王復噓唏曰: "將使我孫, 代勞於內也。,’ 麟漢復爲緩辭曰: "內事非臣等所知也。" 是夕王命中官以啓寶, 送于東宮, 世孫涕泣固辭曰: "啓寶豈朝臣國人所不知而授受者乎?" 王曰: "予之氣, 汝所知也。 難與彼大臣爭, 故爲是不得已之擧, 予於汝雖內授, 後世豈有非之者乎? 不過曰罪在時相也。 雖然予當昭汝志也。" 遂命承傳色傳于政院曰: "沖子若陳章, 當下二字之敎。" 二字指禪位也。 由是世孫不敢陳章, 然聖候自此益劇, 代聽事方在然疑之中, 而麟漢與厚謙母子, 表裏沮戲, 爲計千百, 宗社危亡, 迫在呼吸。 國榮憂憤, 欲與民始聯章請討, 世孫以爲不可, 力止之。 前參判徐命善乃上疏曰: "惟我聖上機務之煩, 有妨賾養, 繼先朝之故事, 有今日之下敎。 而前月二十日入侍也, 左議政洪麟漢敢曰: ‘東宮不必知。’ 夫謂儲君不能, 則當作何如人也? 肆無嚴極矣。 及夫常參也, 前領相韓翼謩又曰, ‘左右不足憂。’ 夫身居首相之位, 質言閹竪之事, 古之大臣亦有是否? 至若麟漢所奏: ‘自內爲之, 臣不爭執。’ 云者, 驚且駭尤萬萬。 此爲國家大事何如也? 乃秘之於宮衛之內, 行之於深嚴之中, 萬姓不得知, 八方不得聞? 以殿下今日之擧, 明正磊落, 卓越千古, 而職具瞻者, 視爲虛文, 專以彌縫爲事, 豈不痛哉? 乞降明命, 亟正大臣罪。" 疏入王召命善, 褒以滿腔血忱, 進其秩二級。 事在《明義錄》。 於是王命世孫代聽庶政, 朝參用法駕, 儀仗設水晶杖、金釜鉞, 受賀時百官朝服行禮, 幷奏軒架。 展拜太廟, 自殿庭乘輿, 駕出城外, 訓鍊禁衛御營兵隨輿, 凡竄配以下不稟裁斷, 皆特敎也。 世孫三上疏辭, 王縷縷慰諭。 越八日, 告廟社頒赦。 王扶至景賢堂與世孫同受賀, 顧世孫甚樂也。 蠲貢市人徭役, 賜四民米有差。 亡何, 賊臣沈翔雲上書小朝, 以陳戒爲名, 巧設機關, 指斥宮僚, 有溫室樹語。 以命善筵奏, 有曰: "因宮僚聞世孫以三不必知之說, 欲陳章引義。" 云。 故翔雲將以宣洩內言文, 致國榮等之罪, 以售其網打之計也。 翔雲本師淳所後子一鎭之子, 而師淳又以益昌之孫, 爲後於廷輔者也。 益昌嘗爲逆宦朴尙儉塾師, 當辛壬時, 與金一鏡、尹就商日夜聚會於尙儉家, 與聞交通宮禁事, 及尙儉謀逆事覺詞連益昌, 累拷掠得釋, 禁錮以死。 翔雲之弟翼雲登第, 坐益昌久不調。 翔雲患之, 以其旣死之父一鎭罷所後於師淳, 又以旣死之祖師淳, 罷所後於廷輔, 而直以一鎭之父繼廷輔, 凡兩世再易其父。 於是淸議益唾鄙之, 翔雲遂謟附厚謙, 曲事惟謹。 至是厚謙、麟漢等, 見其事敗露, 與養厚募翔雲以逞辛丑鳳輝之凶肚, 先講宮僚罪案, 將起大獄, 世孫察其狀, 歎曰: "事關忠逆, 非可以漫漶彌縫也。" 判府事金陽澤具奏于王。 王曰: "逆竪之孫, 敢爾耶?" 命拷掠, 栫棘于黑山島。 尋命翔雲兄弟, 永爲庶民。
五十二年丙申春正月, 加上王尊號曰堯明舜哲乾健坤寧, 貞聖王后 徐氏尊號曰仁徽, 王妃金氏尊號曰聖哲。 三月, 王疾大漸, 世孫遣官遍禱于廟社山川。 乃顧命, 大寶傳于王世孫, 以初五日卯時, 王昇遐于慶熙宮之集慶堂, 壽八十有三, 在位五十有二年。 輿儓旄倪, 波奔闕下, 號呼雨泣, 朝士婦女, 各哭其家, 聲宸街巷, 絶域遐陬, 聞喪之日, 男女老少, 皆爲孺子慕。 群臣議王德行功業, 上諡曰翼文宣武熙敬顯孝, 廟號曰英宗。 是年七月二十七日葬于元陵亥坐之原, 卽健元陵西岡也。 先是己亥孝宗不諱, 大臣鄭太和、金壽興等, 奉孝宗葬于此, 術者皆言壯麗明秀如健元而反復勝也。 顯宗癸丑, 以水由屛石滲漉, 有異議, 啓舊陵見和, 重臣閔鼎重, 躬封築舊陵, 戒相役者曰: "善治之。 後必復爲國陵也。" 及景宗大喪, 王甚欲奉景宗於此, 一鏡時爲山陵都監堂上, 極言國朝未嘗以遷厝地爲陵也, 遂不果。 至是竟爲王陵, 嗚呼! 豈偶然哉? 王英明特達, 凡於君德, 得其大者, 孝敬勤儉公恕, 君德之大也。 王幼事仁顯后至孝。 方五歲, 手擷禁苑百種花, 爲酒以獻后。 后歎曰: "孝悌固所性, 何其夙就也。" 及肅廟違豫七年, 左右扶將, 王皆親之, 夜不安寢, 首尾如一日, 肅廟常曰: "異哉兒也。 何無寐乎?" 事仁元后, 雖登極入耆社後, 常如爲王子時。 每進見拱手疾趨, 侍坐則曲腰俛首, 有問以袖掩口而對, 備物養志, 始終無違。
錫賚國舅慶恩家甚隆渥, 以悅后心, 然亦不令干預朝政, 仁元后常曰: "孰謂主上非已出乎?" 事景廟如事肅廟, 事宣懿后如事仁元后, 人不知爲兄弟嫂叔。 大小享祀, 必親莅之, 誠敬備至, 洋洋如臨于上。 璿源殿在宮中, 有節祭誕日祭忌日祭, 王輒躬眂齍鑊, 戒膳婦極其潔。 有新物先朝所嗜者, 必先薦于殿, 乃御掌膳者, 嘗以松蕈進之。 王曰: "薦乎?’ 對曰: "時尙蚤未也。" 王曰: "未薦而使予食, 由予誠敬不足也, 於汝何責焉?" 却不御。 及春秋篤老, 値先王先后忌日, 猶素食齋居, 倂湯藥不御。 享祀雖不得躬親, 祭之日必齊, 明達曙露伏中庭, 聞已撤乃止。 晩移御慶熙宮, 宮之北有暎翠亭, 密邇毓祥宮。 王每朝夕, 小輿戾止, 望廟露伏, 以代定省禮, 泫然而還, 祁寒盛暑不廢也。 嘗夢侍肅廟, 肅廟命取簡紙來, 未及進而覺焉, 自是不復用簡紙書。 雖當大耋沈綿時, 常誦《蓼莪》、《陟岵》之詩, 誦訖, 嗚咽涕涔涔下。 故國人皆曰: "王之孝也。 王一念敬天, 無所不用其極。 故紙中見有天字, 手自洗濯, 不令人踐躁。 雖尋常酬酢, 語及於天, 必加尊敬曰: "君代天理物, 臣代君理事, 君之敬天, 當如臣之事君也。" 遇有災異, 至誠警懼, 減膳求言, 反躬自責。 庚寅春客星見, 王夜召編輯臣及雲觀司曆, 講究消弭之策, 每夕躬測候月臺曰: "願毋移於民國。" 如是者三日, 客星乃消。 或有 疾風甚雨, 雖夜必衣服冠而坐, 有時獨語曰: "予有何咎, 天之警告若是也?’ 轉輾憂慮, 坐而待朝。 天旱祈雨, 未嘗命官, 親秉圭以孚格爲期。 故壬子以後, 幾乎無歲不親禱, 禱輒得雨大有年, 史不勝書。 及其季年, 遣官代攝, 亦必露伏闕庭, 得雨然後, 始返燕寢, 或未得雨, 則解衣曝烈日曰: "曷不焦予之躬乎?" 故國人皆曰: "王之敬也。 王卽位之初, 己以祁寒盛暑, 增添講日, 晝必移晷, 夜輒趁鍾, 雖當陵幸親耕之後, 亦不以勞倦或曠。 方春秋七旬, 以三伏日, 開朝晝夕三講, 討論不倦。 比及于頤, 視昏不能辨字, 猶親誦《小》、《大學》以爲講, 一月六對, 晉接臣隣, 裁決國事, 細大不遺。 或廟謨簡, 則從容論閭里疾苦宮府故事, 對罷日已夕, 而寺人復燃燭于堂。 承旨抱章疏啓狀以入, 王聽奏, 呼判無少滯, 比退則夜漏下四五皷, 故國人皆曰: "王之勤也。" 王性不喜奢華, 凡百玩好泊如也。 及登寶位, 欲以大布大帛, 易風俗。 所居宮闕壁塗之墁泐者, 窓楹之剝缺者, 黼筵鋪席之破弊者, 經歲不改, 或有司請修, 亦不許。 燕居集慶堂, 以破屛數疊, 隔內外廳軒, 樸陋褊隘, 雖淸修士室廬, 殆不如也。 嘗以先朝寢殿側, 搆一茆舍, 讀書其中, 欲追述故事, 竟以重煩民力, 不果焉。 服御唯袞冕法服, 按制致美, 自餘中衣貼裏之屬, 往往澣濯補綴, 冬雖甚寒, 未嘗御裘, 故群臣侍王者, 亦不敢挾裘。 夜不設衾褥, 有時支木枕倦寐, 則宮人恐寒氣逼王躬, 以小被加之。 國典內膳夫日五進王膳, 而王一日三膳, 膳亦未嘗飽, 故宮中遂廢午夜二膳。 其他戒豐亨務抑損, 多此類。 故國人皆曰王之儉也。 王嘗言, ‘王者爲政, 當自宮闈始。" 非公事, 未嘗與宦官宮女語。 古例罷朝後大小公事, 或令宦官讀奏臥內, 王恐宦官因此暗習國事, 干預朝政, 雖夜深必召承旨讀奏。 嘗謂世孫曰: "古則宦官十餘人, 猶以爲多, 今過百餘人。 多則難制, 汝其識之。" 待臣隣常推赤心, 凡厥有罪, 始雖譴責極於嚴厲, 及其甄敍之後, 任用如舊, 若初無是事者。 承辛壬黨禍之餘, 深知黨論爲殺戮之本, 殺戮爲亡國之本, 以消朋黨保世臣, 爲立治先務。 方在銅闈, 校理趙文命封事, 景廟言三黨之後, 當以蕩平捄弊, 王悅其言而心識之。 及登極, 首擢主蕩平之論者二三臣, 雖瑕摘左右交至, 王終如不撓而倚任之, 其有持論峻者, 輒斥不用。 每誦宣廟御製詩, ‘諸臣今日後, 寧復更西東。" 曰: "此我家法也。 孰敢沮敗乎?" 嘗宅仁元后憂, 王親爲文, 極言保世臣, 安宗國之謨, 命儒臣告于孝昭殿曰: "予所以爲此者, 遠效周公之藏金縢, 近效趙抃之焚香告天也。" 由是雖當水火胥分, 干戈相尋之時, 勝殘去殺, 垂五十年, 及壬辰戚黨事起, 王罪金龜柱甚嚴。 謂世孫曰: "朝黨尙爲世道患, 況戚黨乎? 不戢將滔天。 予老矣不及見, 乃汝他日之憂也。" 其思深慮遠如此。 故國人皆曰: "王之公也。 王處潛邸久, 閭里艱難, 民生疾苦, 委巷荒野, 至微細事, 無不遍知, 及承儲, 博講經傳, 灼見保民爲治國之要。 凡貢民、市民、耕種民、販商民、軍保民, 無不曲察其飢飽寒煖, 蠲免之政, 無歲不下。 或有司以經費難之, 王輒誦肅宗何惜肌膚之語, 趣頒旨施惠, 故卽位五十年間, 所蠲免無慮累百萬。 初北關民, 困交濟錢, 有賣妻鬻子自縊死者。 會王遣御史按廉, 民遮道泣曰: "但願歸奏吾王, 使赤子之情, 達于父母也。" 御史如其言歸奏, 王失聲流涕曰: "予嘗病人君廣廈細氈, 厚享玉食, 不能察蔀屋之情, 豈謂吾豐沛之鄕, 有此事乎? 予不能矯弊安民, 誠無顔可以入高廟也。" 立命蠲免。 其他無告者, 赴愬於王, 得遂其生, 不可勝紀。
丙申春王疾益亟。 當是時濟州饑, 遣御史賑之, 王憂念不置, 諄諄夢語, 皆濟州事。 其仁民惻怛, 出於至誠者然也。 故國人皆曰: "王之恕也。" 王旣具此六德, 以爲立治之經, 而監成憲、革流弊、愼庶獄、裕國用, 又無非爲緯於六德。 是以高年天位, 邦內乂安, 臣世其祿, 民樂其利。 凡在朝野黃髮鮐背太半, 而是亦有年過百歲者, 庸詎非人事修於下, 天運應於上哉? 傳曰: "大德必得其壽, 必得其位, 必得其祿。" 王庶幾焉。 王有二男, 曰孝章世子, 以左議政趙文命女爲嬪, 無嗣。 曰莊獻世子, 以領議政洪鳳漢女爲嬪, 實誕我嗣王殿下。 甲申命我嗣王殿下爲孝章世子後, 及王祔太廟時, 追尊孝章世子爲眞宗大王, 孝純賢嬪爲 孝純王后, 同祔太廟, 皆王遺命也。 今嗣王殿下, 不以臣不文, 命因遺事攛掇爲狀, 臣惶恐隕越, 不知所以稱塞, 獨竊聞帝王大節, 惟付托之得人是已。 故《虞史》爲《堯典》, 其言傳舜以位之事, 反復詳悉蓋一篇而半之, 世稱《虞史》爲千古史臣之宗, 以此也。 臣敢以景廟之全付於王, 王之全付於殿下者, 該載一篇之上下, 以追《堯典》之斷例而尊其所聞云。
大提學徐命膺製進。
- 【태백산사고본】 83책 127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4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승정원일기 전체 (1)
>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2년 을축 > 2월 24일 > 최종정보
고종 2년 을축(1865) 2월 24일(경인) 맑음
02-02-24[32] 적임자가 아니므로 삭직해 주기를 청하는 부제학 이호준의 상소
“삼가 아룁니다.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선택함은 밝은 조정의 급선무이며 헤아린 후에 들어감은 옛 철인의 경계한 바입니다. 울금으로 빚은 좋은 술은 나쁜 그릇에 담을 수 없고 비단에 수놓은 옷은 흙 인형에 입힐 수 없는 것은 그 이치가 매우 밝으며 옛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신은 자품이 용렬하고 학식이 고루하여 남보다 가장 하등임은 품평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외람되게도 선인의 음덕을 빌어 녹사(祿仕)에 나가게 되어 고을의 다스림을 조금 시험하여 보았으나 이미 조그만치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며, 용렬한 것이 집안에 들어 앉아 잡목처럼 버려짐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고 보니 평소의 기대가 이미 분수를 넘었는데, 과방(科榜)의 먹이 마르지도 않아서 화려한 고명(誥命)이 줄을 이었습니다. 홍문관과 승정원의 벼슬을 차례로 특별히 제수하여 은혜로운 영광을 입음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신이 말한 관직을 위하여 인재를 선택하고 헤아린 후에 들어간다는 계책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어그러져 기롱하는 물의가 뒤를 따를 것이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헤아려 보았으나 미련한 고집을 꺾을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속마음을 드러내어 성상께 아뢰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간절한 마음이 거짓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려 동조에 여쭈신 다음 신에게 새로 제수된 직명을 속히 삭제하여 관직을 중하게 하고 사사의 분수에 편하게 하소서. 신은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임를 살피라.”
하였다.
강황과 심황은 마늘류라고 하던데, 그럼 마늘인지 아닌지 알고싶고요.
또, 피부질환에 효과가 있다고해서 호기심이 가더라고요.
평소 피부트러블이 많고, 생리불순인데,
강황이나 심황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고싶고요.
그리고, 강황과 심황중에 어느것이 더 좋은것인지 알고싶습니다.
추가 질문 -
카레에 강황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던데, 얼마나 많이 함유되어있나요?
- 답변
둘의 차이를 말씀 드릴께요.
강황은 생강과에 속하는 식물이고요, 약재로 쓰이는 것은 강황의 뿌리 줄기를 말려서 쓰는거예요다른 이름으로 황강, 모강황, 보정향, 편강황, 편자강황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강황은 한국에는 없는 약초이기에 중국의 사천성과 복건성 등지에서 자란답니다.
개화기는 8월~11월이며 평원, 숲이나 관목의 수풀 속에서 자생하고, 재배도 가능하지요.
강황의 괴근을 말린 울금도 약으로 쓰입니다.
심황은 [울금] 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강황과 울금은 같은 식물로 울금은 강황의 뿌리줄기를 말린 것이 심황(울금)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피부질환이나 생리불순을 완화시켜줍니다.
혈액순환을 잘되게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위장이 좋지 않을 때도 좋은 약재입니다.
그래서인지, 인도네시아에선 이것을 첨가한 화장수를 쓴다하니,
여성분들에겐 참 좋죠?
추가질문으로 말씀하신 카레에는 강황이 많이 첨가되어있죠.
인도의 요리인 카레엔 각종향신료들이 여러가지지요.
근데, 이 강황이 빠져서는 카레가 아니라 할정도로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추천 - 답변
약성의 차이가 있습니다.
혈행에 좋은 것으로 비슷하지만 열성과 냉성의 차이가 있습니다.
강황은 비와 간에 작용하는 열성이고, 울금은 신폐간에 작용하는 냉성입니다.
한방에서는 몸의 냉성과 열성에 따라 약성을 맞게 써야 합니다.
물론 가격도 많은 차이가 있어 ..바꿔서 팔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 약이 되는열대과일
울금
심황(深黃), curcuma root요약 테이블
분류 생강과(Zingiberaceae) 학명 Curcuma wenyujin Y. H. Chen et C. Ling.(온울금, 溫鬱金)
Curcuma longa Linné(강황, 薑黃)
Curcuma kwangsiensis S. G. Lee et C. F. Liang(광서아출, 廣西莪朮)
Curcuma phaeocaulis Val.(봉아출, 蓬莪朮)활용부위 약용 : 덩이뿌리 재배지
울금(鬱金)의 재료가 되는 식물들, 즉 온울금(溫鬱金)인 Curcuma wenyujin의 중국 산지는 저장(浙江)성이며, 광서아출(廣西莪朮)인 Curcuma kwangsiensis의 중국 산지는 광시(廣西)성, 광둥(廣東)성, 푸젠(福建)성, 타이완이다. 봉아출(蓬莪朮)인 Curcuma phaeocaulis의 중국 산지는 광둥성, 푸젠성, 광시성, 타이완이다.
온울금은 중국 저장성의 원저우(溫州)에서 대량 생산되며, 광서아출은 중국 광시좡족자치구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울금(鬱金)은 온울금(溫鬱金) Curcuma wenyujin(생강과), 강황 Curcuma longa(생강과), 광서아출(廣西莪朮) Curcuma kwangsiensis(생강과) 또는 봉아출(蓬莪朮) Curcuma phaeocaulis(생강과)의 덩이뿌리로서 그대로 또는 주피를 제거하고 쪄서 말린 것이다.
식품 사용 여부
한국의 『식품공전』에서 울금은 식품에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원료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뿌리줄기는 식용이 가능하다.
활혈지통, 행기해울 효능
울금은 혈(血)의 운행을 활발히 하여 통증을 없애고 행기(行氣)하여 울체(鬱滯)된 것을 풀어주는 효능이 있다. 그리고 열기를 식히고 혈열을 식히는 효능도 있다. 그러므로 생리통, 생리불순과 옆구리가 아픈 것, 토혈, 소변 출혈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 담즙분비를 촉진하고 건위작용이 있어 소화를 돕는다.
『동의보감』에 기재된 효능
울금의 성질은 차며[寒] 맛은 맵고 쓰며[辛苦] 독이 없다. 혈적(血積)을 낫게 하며 기를 내리고 혈림과 피오줌을 낫게 하며 쇠붙이에 다친 것과 혈기로 가슴이 아픈 것[心痛]을 낫게 한다[본초]. 울금은 '몹시 향기롭지 않으나 그 기운이 가볍고 날쌔어[揚] 술기운을 높은 데로 올라가게 하고 신(神)을 내려오게 한다. 옛사람들은 몰리고 막혀서 잘 헤쳐지지 않는 데 울금을 썼다'고 기재되어 있다.
한방 효능
덩이뿌리의 성미(性味)
맛은 맵고 쓰며 성질은 서늘하며 독이 없다.
덩이뿌리의 효능
• 활혈지통[活血止痛, 혈(血)의 운행을 활발히 하여 통증을 없앰] 효능이 있다.
• 행기해울[行氣解鬱, 행기(行氣)하여 울체(鬱滯)된 것을 풀어줌] 효능이 있다.
• 청열양혈(淸熱凉血, 열기를 식히고 열로 인해서 생긴 혈열을 식힘) 효능이 있다.
• 행기해울시키므로 간기능장애로 인한 생리통, 생리불순과 옆구리가 아픈 것을 치료한다.
• 청열작용이 있어 토혈, 코피, 소변 출혈 등에 양혈지혈의 효능을 나타낸다.
• 담즙분비 촉진, 건위, 항암의 약리작용이 있다.울금이 수재된 조선시대 의서와 한국의 공정서
•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방약합편』
• 『대한민국약전』(제10개정)
• 한국 『식품공전』(2012)의 '식품에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원료' 부분에 '울금'이 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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