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달산 - 익화 회고 9수 〔益化懷古 九首〕 / 성재집

2017. 11. 7. 08:10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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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집 제1권 / 시(詩)

익화 회고 9수 〔益化懷古 九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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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에서도 땅의 경계를 설명하였거늘 / 爾雅疏地界
누가 이 산이 깊다고 말하는가 / 誰謂此山深
아득히 먼 조선국 / 杳杳朝鮮國
푸르디 푸른 열수 남쪽 / 蒼蒼洌水陰
살 곳을 여기에서 얻으니 / 栖遲爰得所
티끌조차 영원히 닿지 않으리 / 埃壒永無侵
흥취를 느껴 세 번 노래하니 / 感興歌三疊
유유하구나! 긴긴 세월 지나온 마음이여 / 悠悠萬古心
  도성 문 동쪽 1백 리 거리에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산이 있는데 용문산이라고 한다. 용문산 줄기는 두 물이 양쪽으로 끼고 좇아오는데 산수(汕水)와 습수(濕水)라고 한다. 《이아(爾雅)》에서 조선 열수의 사이라고 말한 것은 대체로 이렇게 산이 끝나고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 익화군 하나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용문산 날 저물면 마음에 쏙 드는데 / 龍門晩托契
이렇게 절이 깊숙하여 사랑스럽네 / 愛此梵樓深
어제 아침 눈 맞아 대나무가 여위었고 / 竹瘦前朝雪
처사의 그늘을 위해 소나무도 산뜻하다 / 松淸處士陰
강산 풍경은 옛 그대로이거늘 / 江山文藻在
건물에는 세월의 꽃이 스며들었다 / 棟宇歲華侵
새벽녘 베개에 차가운 경쇠소리 들리면 / 曉枕來寒磬
구름 피어나듯 옛 생각 떠오르네 / 油然感舊心
용문산의 윤필암은 바로 나의 외선조이신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께서 독서하시던 곳이다.

정옹께선 지금 보이지 않고 / 靜翁今不見
남아 있는 사당에는 세월이 깊다 / 遺廟歲華深
심어 가꾼 나무 부질없이 남아 있어 / 空有栽培樹
머물러 쉴 그늘이 아직도 그대로네 / 尙留栖息陰
그리운 선생께서 정말 여기 계시니 / 羹墻亶在此
나무꾼은 절대로 들어오지 마시오 / 斤斧莫相侵
벽 사이의 글을 보고 거듭 탄식하니 / 重歎壁間記
또렷한 혼령은 그때의 마음이여 / 炳靈當日心
미원에는 정암 선생의 유적이 있으니 읍 아래 사는 유생이 나아가서 신주를 안치한 곳이다. 지금 사당 옆에는 선생께서 손수 심은 소나무 두 그루가 있으며 화서 스승님께서 〈원우중수기(院宇重修記)〉를 지으셨다.

잠강 기슭 낡은 집 / 弊屋潛江岸
오랜 회화나무는 봄빛이 깊도다 / 古槐春色深
이공께서는 세상 변고 슬퍼하시고 / 李公傷世變
난초 띠 매고 호수 남쪽에 은거하셨네 / 蕙帶臥湖陰
운검에는 풍상이 늠름하였고 / 雲劍風霜凜
원소에는 세월이 스미었다 / 原騷歲月侵
잠시 비단 그림 부채를 들고서 / 聊將紈扇畫
예나 지금의 단심을 비추어 본다 / 今古照丹心
잠강에는 이원충(李元忠)의 유적이 있다. 이공은 바로 효령대군의 먼 후손이다. 광해군 조정에서 변란이 있을 때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이 마을로 돌아와 숨어 살았다. 자호를 잠옹이라고 하였다.

크고 크신 청강 어른이여 / 奕奕淸江老
우리 조선에 내려주신 은덕 깊도다 / 吾邦受賜深
충성은 악비를 희망하였고 / 貞忠希武穆
경륜은 한신에게서 나왔다 / 經略出淮陰
오랜 성채는 가을 안개에 잠겨 있고 / 古壘秋烟鎖
무덤엔 새벽달이 스며드네 / 孤墳曉月侵
말을 멈추고 가슴이 벅차오르니 / 停驂多激仰
공의 떳떳한 마음을 함께 나누네 / 公共秉彝心
아호에는 청강의 유적이 있다

멀리 저 동강의 집은 / 敻彼東岡宅
청계(淸溪) 구곡(九曲)이 깊숙하다 / 淸溪九曲深
거친 밭을 대대로의 생계로 남기셨고 / 薄田遺世業
큰 나무에는 그늘마저 넉넉하다 / 大樹有餘陰
거문고 악보는 맑은 바람이 멀리 전하는 듯하고 / 琴譜淸風遠
바위에 새긴 글자에는 푸른 이끼가 스미었다 / 巖鐫碧蘚侵
오래된 정원의 잣나무에는 / 遲遲園上栢
지금도 세한심이 보인다 / 猶見歲寒心
방일산 속에는 동강의 옛집이 있는데 그 후손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대대로 남기신 학문을 연마하고 있다. 서적 상자에는 〈팔탄금보〉 한 묶음이 있고, 또 눈 내리던 날에 쓰신 글씨인 ‘대명산천’ 네 글자가 시냇돌 위에 새겨져 있다.

사천에는 진(晉)나라의 해가 저물고 / 斜川晉日暮
창해는 진(秦)나라의 원수가 깊다 / 滄海秦仇深
슬픈 노래 매섭게 부르던 곳 / 烈烈悲歌地
고목나무에 어둡게 드리운 그늘 / 冥冥古木陰
비릿한 내음 하늘도 이미 싫증나신 건지 / 膻腥天已厭
전쟁으로 날마다 서로 침략한다 / 戈戟日相侵
구원에 계신 이들을 다시 살려내어 / 誰使九原作
앞장서서 충성 다해 싸우게 할 이는 누구일까 / 前驅仗赤心
대명(大明)처사이신 창해 허격과 사천 이보만 두 공께서는 일찍이 함께 익화군 관내에 들어가서 어지러운 산속에서 서로 슬픈 노래를 부르고 목 놓아 우시면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 지금의 익화군 관내에 사천촌(斜川村)이 바로 그 땅이라고 한다.

아득히 먼 청화산 북쪽에 / 迢迢靑華北
샘과 돌이 예쁘고 그윽하다 / 泉石窈而深
화옥이 매던 밭엔 봄풀 그득하고 / 玉圃交春草
삼연이 살던 집엔 저녁 그늘 우거졌다 / 淵堂翳夕陰
우러러 두 분을 조명하고자 생각하며 / 頫昂懷共照
한가로이 은거하던 발자취를 밟아보네 / 薖軸迹相侵
벽계 집에 나의 책상을 옮겨놓고 / 溪社携余笈
경모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그리워한다 / 常懷景慕心
벽계에는 삼연의 유적이 있다. 화옥(華玉) 신시녕이 일찍이 나아가서 터를 잡고 살았었다. 계사와의 거리는 몇 궁(弓)이 족히 된다.

그 옛날 조정의 한 관리가 / 伊昔一朝士
왜 이 깊은 땅에 터를 잡으러 왔는가 / 何來卜地深
궁궐 섬돌의 꿈을 잊기 어려워서 / 難忘螭陛夢
날마다 곡산 북쪽으로 절을 하였다 / 日拜鵠山陰
옛날 역사에는 글들이 많이 빠져 있고 / 古史文多缺
남은 터에는 잡초가 자라 침범하였네 / 遺墟草自侵
마을에 검소한 풍습이 남아 있어 / 巷閭存儉俗
어짐을 숭상한 마음을 증명할 만하다 / 足證上仁心
   곡산 아래에는 이른바 한양배촌이 있다. 야담에는 옛날 조정의 한 관리가 벼슬을 내던지고 은거하더니 날마다 한양을 향해 절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옛날의 역사가 아득히 멀어 증거 삼을 만한 유적이 없다. 다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근검 질박하여 다른 마을과는 서로 다르니 유풍과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주-D001] 익화(益化) : 
경기도 양근의 옛 명칭이다.
[주-D002] 윤필암(潤筆庵)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에 있는 절이다. 용문사에 딸린 암자로 고려 중엽 묘덕 비구니가 창건했다.
[주-D003] 이색(李穡) : 
1328~1396.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주-D004] 정옹(靜翁) : 
정암 조광조를 가리킨다.
[주-D005] 미원(迷源)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 마을이다. 미원서원은 1661년(현종2)에 창건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ㆍ김식(金湜)의 위패를 모셨다. 1668년 김육(金堉), 1694년(숙종20) 남언경(南彦經), 1734년(영조10) 이제신(李濟臣), 1792년(정조16) 김창옹(金昌翁)을 추가 배향했다. 1869년(고종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4년 중수ㆍ개축하면서 박세호(朴世豪)ㆍ이원충(李元忠)ㆍ남도진(南道振)ㆍ이항로(李恒老)ㆍ김평묵(金平默)ㆍ유중교(柳重敎)를 추가 배향했다.
[주-D006] 정암(靜菴) 선생 : 
조광조를 가리킨다.
[주-D007] 잠강(潛江) : 
가평군 설악면에 있다.
[주-D008] 세상 변고 : 
광해군이 모후를 폐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9] 운검(雲劍) : 
주운(朱雲)의 검으로, 강직하게 간언하는 것을 뜻한다.
[주-D010] 원소(原騷) : 
굴원의 이소를 가리킨다. 이 시에서는 은거해 지내면서 읊은 우국충정의 시를 가리킨다.
[주-D011] 이원충(李元忠) : 
?~? 호는 잠옹(潛翁)이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한 것에 대해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경현단에 배향되었다.
[주-D012] 청강(淸江) :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을 가리킨다. 호는 청강이고 자는 몽응(夢應)이다. 조선의 문신으로,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주-D013] 우리 …… 깊도다 : 
이제신은 사은사(謝恩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주-D014] 악비(岳飛) : 
1103~1141. 중국 남송(南宋)의 무장으로, 자는 붕거(鵬擧)이다. 금나라에 대하여 주전론(主戰論)을 펴다 재상 진회(秦檜)의 참소로 옥사하였다.
[주-D015] 한신(韓信) : 
?~기원전 196. 중국 한나라의 장수이다. 유방의 부하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장량, 소하와 함께 유방 부하의 삼걸 중의 한 명이기도 하며, 세계 군사 사상의 명장으로도 알려졌다.
[주-D016] 아호(鵝湖) : 
경기 양평 서종면에 있다.
[주-D017] 동강(東岡) : 
남언경(南彦經, ?~?)을 가리킨다. 호는 동강이고 자는 시보(時甫)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양명학자(陽明學者)이며, 본관은 의령이다. 개국 공신 남재(南在)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영흥 부사 남치욱(南致勗)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양근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주-D018] 방일산(訪逸山) : 
경기 가평 설악면에 있다.
[주-D019] 사천(斜川) : 
진(晉)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주-D020] 창해(滄海) : 
한(漢)나라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주-D021] 구원(九原)에 …… 살려내어 : 
원문의 ‘九原作’은 ‘九原可作’의 준말로, 이 전고는 《국어(國語)》 〈진어(晉語) 8〉에, 조문자(趙文子)가 숙향(叔向)과 함께 구원(九原)에서 노닐다가 “죽은 사람이 일어날 수 있다면 내가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死者若可作也 吾誰與歸〕”라고 한 말에서 비롯한다. 이 전고는 ‘이미 죽은 사람이 만약 다시 살아난다면’을 의미한다.
[주-D022] 허격(許格) : 
16??~16?? 호는 창해(滄海), 숭정처사(崇禎處士), 대명처사(大明處士)이고 자는 춘장(春長)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주-D023] 이보만(李保晩) : 
16??~16?? 호는 청담(淸潭), 백운처사(白雲處士), 사천(斜川)이고 자는 처난(處難)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주-D024] 사천촌(斜川村) : 
경기 양평 용문산 부근이다.
[주-D025] 청화산(靑華山)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서종면 경계에 있는 산 이름이고, 지금은 ‘통방산(높이 650m)’이라 부른다.
[주-D026] 삼연(三淵) : 
김창흡(金昌翕)의 호이다.
[주-D027] 신시녕(辛蓍寧) : 
화서의 스승이다.
[주-D028] 궁(弓) : 
길이의 단위로서 1궁(弓)은 5척이다.
[주-D029] 곡산(鵠山) : 
곡달산(鵠達山)이다. 지금 경기 가평 설악면에 있다.
[주-D030] 한양배촌(漢陽拜村) : 
경기 가평 설악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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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집 제43권 / 가하산필(柯下散筆)

선고이신 낙은부군이 남기신 사적을 기록한 초고〔先考洛隱府君遺事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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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군께서는 어릴 적에 외숙(外叔)이신 고(故) 현감(縣監) 간재(簡齋) 심홍모(沈弘模) 공을 스승으로 모셨다. 심공은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문원공(文元公)이 도의(道義)로 사귄 분으로서, 성품과 도량이 엄정하고 학문에 연원이 있었다. 부군께서 어린 나이에 학문의 방향을 바르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이 분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부군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중후하였으며, 마음을 지키고 성정을 기르는 공부를 깊고 두텁게 더하여 평소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을 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래 사귄 벗일지라도 농담을 하며 대한 적이 없었다. 길을 걸어갈 때에는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무거웠으므로, 미치광이나 술에 취한 사람일지라도 부군과 마주치면 엄숙히 왼쪽으로 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군께서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또 젊은 시절에는 문장 공부를 하며 유명한 선배들과 고하를 다투었다. 22세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다음 해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장차 높은 벼슬길에서 활보할 듯하였으나, 한마음으로 유유히 자연 속에 들어가 살고자 하는 뜻을 가지셨다. 어떤 때는 손님들을 보내고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중용》ㆍ《근사록》ㆍ《성학십도》를 읽으셨다. 스스로 호를 낙은거사(洛隱居士)라고 불렀는데, 동년배들이 비웃기도 하였지만 개의치 않으셨다.

   부군께서는 38세에 황벽산(黃檗山)에서 화서(華西) 이 선생을 뵈었다. 그리고 청화정사(靑華精舍) 옆에 작은 서재를 짓고 조석으로 모시고 공부하며 십 년을 보냈는데, 조예는 날로 더욱 깊어졌고 규모는 날로 더욱 커졌다. 화서 선생은 경전의 뜻 중에서 중요한 곳이나 성명(性命)의 큰 근원을 함께 논할 때마다 늘 “정밀한 조예와 오묘한 해석에는 더불어 짝할 사람이 드물다.”라고 칭찬하였다. 대개 부군께서는 화서 선생에 비하여, 나이가 여섯 살 적어서 처음에는 벗을 사귀는 도로써 대했지만, 나중에는 존경하고 믿는 마음이 더욱 독실해져 마침내 제자의 예를 지키며, 조석으로 나아가 뵐 때에는 반드시 절을 하였다. 화서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5개월 간 심상(心喪)을 지냈다. 부군께서 평생 공부한 것은 대부분 주자(朱子)의 글이었다. 철종(哲宗) 신유년(1861, 철종12)과 임술년(1862, 철종13)에는 주자의 대전집(大全集)을 한 차례 반복하여 읽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벽산의 심설에 대하여, 처음에는 새로운 학설을 지어낸 것이라고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 주자의 설에서 근본을 찾아보고 나서 구절마다 근거가 있음을 알았으며, 양쪽을 대조하며 관통하여 이해한 뒤에 비로소 그것이 정론이 됨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절구 한 수를 이렇게 지었다.

정은 달도가 되고 성은 중이 되니 / 情爲達道性爲中
여기에는 본래 천군이 주재한 공로가 있네 / 自有天君主宰功
사문의 한 맥이 끝내 어둡지 않은 것은 / 斯文一脉終難晦
하늘이 해동에 활리옹을 내리셨기 때문이네 / 左海天降活理翁

   부군께서는 동문의 후배들과 심설을 토론할 때마다 말씀하셨다. “마음은 본래 이(理)와 기(氣)를 합하고 동(動)과 정(靜)을 아울러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평범하게 설명하면 출입존망(出入存亡)과 진망사정(眞妄邪正)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가령 선생이 가리켜 이(理)라고 본 것은 바로 본체의 진(眞)일 뿐이니, 주자(朱子)‘천리(天理)의 주재’ 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처음 배울 때에 혹 말에 자세한 설명 없이 단지 심즉리(心卽理) 한 구절만을 설명하면 도리어 선생의 본의에 어두워져서 그 폐해가 또 적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부군께서는 어려서부터 강학에 부지런하여 마음이 같은 사우를 만나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하시며 날이 저물 때까지 피곤해하지 않으셨다. 임종 며칠 전 호흡이 매우 약해졌을 때에도 중암(重菴)서사(書社)에 왔다는 말을 들으시자, 불러 보시고 태극(太極)의 주재(主宰)에 대한 학설과 하나의 근본인 기가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토론하셨는데, 정밀하고 주밀하게 말씀하시기를 한참 한 뒤에야 그치셨다. 중암이 물러나서 사수(士綏) 김영록(金永祿)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어른의 높은 견해는 어디에서 얻은 것인가? 평소에 저술을 일삼지 않으셔서, 후배와 공유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부군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제왕가(帝王家)에서 왕통을 계승하는 전례는 시암(時庵) 조상우(趙相禹)의 소(疏)를 백대의 정론으로 삼아야 한다. 당시에 여러 선정(先正)이 모두 그의 말이 호씨(胡氏 송(宋)의 호안국(胡安國))의 설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최고로 인정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조심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대체가 마디마다 안정되지 못한 곳이 많이 생겼던 것은 실로 당일에 제현의 의론이 미진했던 데에 원인이 있었다.” - 시암의 뜻은, 사군(嗣君)은 선군(先君)에 대하여 본래 친속의 소목(昭穆)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모두 ‘고(考)’라고 칭한다는 것이었다. -
   부군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철종 2년(1851) 진묘(眞廟)조천할 때에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진종(眞宗)은 증조의 묘위에 해당하므로 ‘조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고 하는 것은 방계의 친척으로 익묘(翼廟)헌묘(憲廟 헌종(憲宗)의 묘호)를 처우한 것이니, 본래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곧바로 영녕전(永寧殿)에 모시어 마침내 제사를 끊게 만드는 것은 또한 몹시 온당하지 못하다. 대개 왕통을 계승하는 의리가 비록 중대하지만 본래의 친속에 있어서 끊어지지 않은 은혜는 또한 어찌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땅히 특별한 방법을 써서 따로 모시고 사사로운 은혜를 펴서, 친속의 관계가 다하기를 기다린 후에 영원히 조천하는 것이 옳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천(伊川 송(宋)의 학자 정이(程頤)의 호)의 정론이 있어 문장마다 근거할 만한데도 당시에 이것을 강학하여 언급한 사람이 없어 왕가의 예법에 흠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백세의 한이 되었다.” -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있는 이천(伊川) 선생의 《유서(遺書)》는 기수(幾叟) 진연(陳淵)이 기록한 것인데 이런 내용이 있다. “‘조묘(祧廟)는 어떤 곳입니까?’라고 묻자, ‘조(祖)는 공이 있는 분의 묘호를 정할 때 쓰는 것이고, 종(宗)은 덕이 있는 분의 묘호를 정할 때 쓰는 것이다. 문무(文武)의 덕을 다 갖춘 왕의 묘는 영원히 조천하지 않는다. 조천하는 대상은 문무의 덕을 다 갖춘 왕 이하의 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형제가 서로 계승한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니, ‘그런 경우에는 모두 각각 묘를 세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가령 오(吳)나라 태백(太白)의 형제가 서로 계승한 것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니, ‘만약 위에 다시 조천하지 않은 묘가 두 개 있다면 마침내 할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묘가 많더라도 방해되지 않는다. 단지 친속이 끊어진 묘를 조천하는 것은 의리를 따라서 시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

   부군(府君)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붕당은, 그 시초를 찾아보면 선비 중 갑과 을의 다툼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말류에 이르러서는 음양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계기에 연결되고 시운이 막히고 펴지는 기수에 관계되었다. 선비라면 마땅히 이 점을 잘 보고 이 관점에 서서,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 신임(辛壬) 사이에 일어난 일에 이르면 사건의 계기가 애매하여 밝히기 어려운 것이 더욱 심하다.” 일찍이 손수 요점을 뽑은 역사서 한 부를 초록하여 집안에 전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저들은 지금까지도 ‘경종께서 편찮으셨다.’고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고, ‘성조(聖祖 경종)를 모함했다.’고 하며, 스스로 붕당의 칼자루를 휘두르며 사흉(四凶)을 경종의 충신이라 하고 사충(四忠)을 영조의 충신이라 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것은 그들의 말뜻이 더욱 흉악하고 험악해진 것이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났지만 이 한 마디 말을 살펴보면, 또한 저들의 가슴속을 볼 수 있으니, 저들은 원래 충(忠)이라는 한 글자가 어떤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 도리는 한결같이 곧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찌 돌아가신 임금에게 충성한 자가 유독 새 임금의 충신이 되지 못하며, 새 임금에게 불충한 자가 유독 돌아가신 임금의 충신이 될 수 있겠는가?”
   부군께서는 이 선생을 뵌 뒤로 벼슬길에서 자취를 감추어, 초연하기가 마치 은거하는 사람과 같았으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슴에서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선생과 당시의 세태를 논할 때마다, 늘 양적(洋賊 서양 도적)을 천하의 백성을 괴롭히는 근심덩어리로 여겼으며, 저들의 세력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논하기에 이르면 또 정학(正學)을 밝히고 명교(名敎)를 높이는 것을 큰 근본으로 삼고, 식량을 넉넉히 마련하고 군대를 넉넉히 갖추는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연 속에서 일상으로 시를 주고받을 때에도 왕왕 근심이 말 속에 나타났으니, 가령 〈곡령(鵠嶺)〉시에서 이른바 “바닷가 나라에 근심이 한창 커지니, 사람의 도리를 높이지 않네.〔海國憂方大 吾人道未尊〕”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 기유년(1849, 헌종15) 봄 선생을 모시고 곡령을 유람할 때에 이 시를 지으셨다. 그 뒤에 또 “하늘이 있으면 또 모름지기 인륜과 기강이 있는 법인데, 서풍은 깊이 들어와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天在也須倫紀在 西凮深入欲何成〕”라는 시구를 지으셨다. - 선생이 또 부군과 서양 학문에 관한 글을 논할 때에는 말씀이 지극히 통렬하고 절실하였는데, 이런 내용은 《화서집(華西集)》에 실려 있다. 대개 이때에는 서양 도적의 실정이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아 조정에서는 느긋하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상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진 산림(山林)도 또한 근심할 게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분의 말씀을 사람들 중에는 깊이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 뒤에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북경이 함락되어 중국 백성이 짓밟혔다. 또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도 사특한 종교가 안팎에 가득 찼으며, 병인년(1866, 고종3)에 강화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기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두 분의 말씀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하였다.

   부군께서는 횡거(橫渠)가 농토를 사서 정전법을 시행하고자 했던 뜻을 몹시 아끼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만간에 터가 조금 넓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구해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을 모아서 농지를 구획하고 마을을 만들어 학문을 일으키고 농업을 밝혀 선왕이 남긴 제도를 익히겠다. 이것이 진실로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임인년(1842, 헌종8) 겨울 이천(利川)에 유람갔다가, 이른바 사전(絲田)을 얻으셨는데 몹시 좋아서 그림을 그려 돌아오셨다. 사우와 의논하기까지는 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셨다. 이 선생이 강원도 홍천에 들어갔다가 삼정평(三汀坪)을 얻어 또 이 일을 추진하였다. 부군께서는 외종제(外從弟)인 홍암(弘庵) 박경수(朴慶壽)와 쟁기를 지고 따라가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선생께서는 맏이 괴원공(槐園公)이 세상을 떠나자, 일을 주간할 사람이 없어, 끝내 철수하고 벽산으로 돌아오셨다. 이 선생께서는 혀를 차며 중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에 하나 이 일을 이루었다면 존대인(尊大人 상대방의 부친을 높여부르는 말)이 평생 뜻하신 바람을 충분히 풀고, 마침내 우리는 만년에 일단의 아름다운 인연을 이루었을 텐데, 세상의 일은 사람의 뜻대로 이루기가 정말 어렵구나.”

   부군께서는 예(禮)로써 집안에서 모범을 보이셨다. 가묘에서 시제(時祭)나 기제(忌祭)를 지낼 때, 자손의 관례와 혼례를 치를 때에 이미 모두 《가례》를 따랐다. 만년에 또 불초한 저에게 명하여, 집안에서 법규를 읽는 예절을 헤아려 정하게 하셨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가묘에서 예를 행하고 나면, 가장(家長)은 부인과 정당(正堂)의 북쪽 벽 아래에 나아가 남쪽을 바라보고 앉고, 자손은 남녀가 세대의 차례에 따라 자리를 정하여 북쪽을 향해 절한다. 또 물러나 문 밖으로 나가서, 선배는 각각 후배에게 절을 받는데 대략 〈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와 같이 하고, 다시 들어와 자기 자리에 가서 앉는다. 가장이 한 사람에게 명하여 〈계가중사(戒家衆辭)〉 한 통을 읽게 하고, 《소학》 《가례》에서 각각 몇 조목을 뽑아서, 우리말로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반복해서 깨우쳐주었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그만두었다.
   부군의 〈계가중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집안 사람의 도(道)는 명분을 신중히 하고 사랑과 공경을 높이며,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고 예절을 숭상하는 데에 있다. 이른바 ‘명분을 신중히 한다.’ 는 것은, 존비장유(尊卑長幼)의 체제와 종지적첩(宗支嫡妾 종손과 지손, 적처와 첩)의 등급과 내외상하(內外上下)의 구분으로서, 이것에 집안의 명분이 달려있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고 여러 가지 일의 기강을 세우는 근본을 하루라도 익히거나 닦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집안에서 일어난 재앙과 난리를 살펴보면 모두 먼저 이것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천하국가에 어찌 두 가지 이치가 있겠는가? 이른바 ‘사랑과 공경을 높인다.’는 것은, 아버지는 자애로우면서도 엄하고, 자식은 효도하고 공경하며, 형은 사랑하면서도 훈계하고, 아우는 공손하고 신중하며, 남편은 온화하면서도 의롭고, 아내는 순응하고 바른 것을 말한다. 대개 사람의 마음은 은혜가 의리를 덮으면 절제를 잃고, 의리가 은혜를 끊으면 정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은혜와 의리를 병행하면서도 어그러지지 않게 한 뒤에야 가인(家人)의 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인이 《역》을 지어, 믿음과 위엄이 합치는 것을 가인괘(家人卦 )의 지선(至善)으로 삼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차라리 엄하게 할지언정 함께 희희낙락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그 뜻이니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이른바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한다.’는 것은, 《시경》에서 〈갈담(葛覃)〉을 앞머리에 놓고 예서(禮書)에서 적전(籍田)을 중시한 것이 천하의 큰 근본이기 때문이다. 부귀하여도 오히려 그렇게 했는데 하물며 빈천했을 때에랴? 게다가 천직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살림살이가 날로 위축되고 나쁜 마음이 날로 늘어나, 의리를 범하거나 법을 범하는 데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하지 않겠는가? 우리 집안은 마침 여러 세대를 편안하게만 보내다가 지금 어렵고 위급한 때를 만났다. 편안하게 살던 사람이 수고로운 일을 하게 되고 사치하게 살던 사람이 검소하게 사는 것, 이것은 사람이 어렵게 여기는 것이므로, 나는 거듭 너희를 위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예절을 숭상한다.’는 것에 대해, 옛 철인이 ‘예절을 한 번 잃으면 이적이 되고, 재차 잃으면 금수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과 화하(華夏)가 화하 되는 까닭이 예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은 풍속이 늘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쳐 있는 나라는 또한 중국에 미치지 못하며, 우리 한미한 집안은 또한 연원이 있는 큰 가문에 미치지 못하니, 백 배 노력하지 않으면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실천할 수 없다. 예절과 음악이 일어난 것은 비록 성인을 통해서였지만 그 근본을 미루어 넓히는 것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재단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행하는 것이니, 다시 어찌 남의 눈과 귀를 따라서 나아가고 물러나겠는가? 진실로 나라에서 법률로 허락하지 않는 것과 집안사람이 노력해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분수를 다해야 하지, 다른 것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또 말씀하셨다. “대저 한 집안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합치면 온갖 선행이 일어나 길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모이지만, 마음을 따로따로 먹으면 온갖 악행이 일어나 어긋나는 기운이 쌓인다. 이 이치는 몹시 분명하니, 너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부군께서는 만년에 불초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스무 살 때에 두 구절을 생각해내고 도장에 ‘만절불투유직도(萬折不渝惟直道) 백위수광저공심(百爲須擴這公心)’이라 새겼다. 나는 평생 이것을 실천하려 했지만 힘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너희는 이것에 힘써야 한다. 또 학문의 큰 뜻을 전한 정씨(程氏)고사를 본받아서, 이것을 남겨 우리 집안에 심법(心法)을 전하는 글로 삼는 것이 옳겠다.”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 중에는 또 부군께서 손수 쓰신 “홍의과감(弘毅果敢)” 네 글자가 있다. 대개 부군께서 처음 이 선생을 뵙고, 자신의 기질 상의 단점을 청하여 묻자, 이 선생이 “공은 견지하고 고수하는 데에는 넉넉함이 있지만, 펼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라고 하셨으며, 또 늘 온화하고 인자한 것은 대담하고 시원시원한 것만 못하다는 뜻을 말씀하셨다. 부군께서는 물러나와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또 이것을 가지고 불초한 저희에게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선생이 나의 단점을 정확하게 맞추셨다. 가만히 살펴보면, 덕을 이룬 예전 선배들은 대개 양강(陽剛)으로 근본을 세웠다. 대개 근본을 세운 것이 부드러우면 이리저리 흔들려서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한다. 너희는 또 이 네 글자를 대대로 전하는 가훈으로 삼아야 한다.” 불초한 형제에게는 아들이 하나씩 있는데, 하나는 이름이 “홍석(弘錫)”이고, 하나는 “의석(毅錫)”이다. 이들의 이름은 이 가르침의 뜻을 담은 것이다.

   부군께서는 일찍이 “벽산(檗山)의 심의설(深衣說)은 《예기》 〈옥조(玉藻)〉의 본래 뜻을 깊이 얻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집안의 길흉(吉凶)에 입는 심의는 모두 그 제도를 따라 쓰셨다. 또 “심의는 본래 옛날 사람의 평상복이다. 만약 이 심의에서 상의 부분은 남겨두고 하의 부분을 온 폭을 쓰는 치마로 바꾸면, 이것이 이른바 ‘단복(端服)’이다.” - 설명은 내가 기록한 〈양복통해(兩服通解)〉에 보인다. - 라고 하시고는, 한 벌을 재단하여 가묘(家廟)에서 시제(時祭)를 지낼 때나 축수하는 자손의 술잔을 받으실 때 반드시 몸소 입으셨고, 또 돌아가시면 염습하는 옷으로 쓰라고 명하셨다. 손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이 옷을 입는 것이 비록 세상과 어그러지는 듯해도 옛날 사람이 조회와 제사 때 입은 정복(正服)은 분명 이와 같았을 것이다. 만에 하나 이 제도가 흘러 전해져 중국이 의관을 회복하는 때를 만나서, 제도를 만드는 군자가 취한다면, 어찌 천하의 보편적인 제도로 확정되지 않겠는가?”
부군께서는 평생 재물과 이익으로 마음에 누를 끼치지 않으셨다. 의리상 온당하지 않은 것은 마치 자신까지 더럽힐까 여기셨다. 병이 위독해지시자, 집안사람이 산에 들어가 큰 나무 한 그루를 베었는데, 관 만들 재목을 두 벌 얻을 만하였다. 먼저 한 벌을 좋은 값으로 팔아 벌목에 든 비용을 다 갚고 나머지 한 벌을 집안에서 쓰려 하였다. 부군께서 얼핏 그 연유를 들으시자, 갑자기 “너희는 부모를 섬길 때에 예(禮)로써 해야 하는데, 지금 작은 이익을 꾀하며 나를 장사 지내려 하느냐? 차라리 관곽이 없는 벗과 나누어 쓰고 벌목 비용을 함께 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작은 일이지만, 평소 마음 씀씀이의 한 실마리를 볼 수 있다.
부군께서 잠강(潛江)에 사실 때에 주정뱅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마시면 반드시 취했고, 취하면 반드시 길에서 사람을 때려서, 온 마을 사람들이 괴로워하였다. 부군께서 그를 불러 앞에 세워놓고 사람의 도리로 깨우치시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울며 마침내 음주를 절제하였다. 가끔 취하면 숨을 죽이고 몰래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개 공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부군께서 지성으로 사람을 감동시키신 것이 이와 같았다.
종손 유인석(柳麟錫)이 늘 말하였다. “어려서부터 낙은부군을 매우 가까이에서 섬기고 또 오래 모셨지만 눈썹 찌푸리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이 가장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까닭입니다.” 부군께서는 예를 행하는 모습이 몹시 훌륭하여, 매 번 예절을 익히는 장소에서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며 걷는 방향을 꺾거나 돌릴 때에 행동이 법도에 맞았다. 가묘에서 예를 행할 때에도 신위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몸을 굽히고 단정히 빠른 걸음으로 가셨다. 간혹 와서 참석한 사람이 따라하려 해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음성이 크고 아름다워 시를 읊는 데에 장기가 있으셨다. 젊었을 때에 편전(便殿)에서 보는 강경(講經)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시경》의 〈대아(大雅) 한록(旱麓)〉시를 읊자 임금을 모시는 신하가 모두 주목하였고, 임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면서 어느새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셨다.
부군께서는 만년에 큰 병을 앓아 기운이 다한 채로 거의 한 해를 보냈으나, 정신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 흐리지 않으셨다. 임종 전 하루 이틀 사이에는 단정히 앉아 오언과 칠언 시를 지으며 자신을 시험하였는데, 시가 평소처럼 아름다웠으며 평측법도 어기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모두 외워 전하였고, 평소에 함양한 노력에 깊이 탄복하였다. 시는 모두 열 수인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다음과 같다.

형산에서 박옥을 캐내고 / 衡山採璞玉
수수에서 향란을 주웠네 / 洙水拾香蘭
배회하다 해가 저무니 / 徘徊歲已暮
임금 은혜에 보답할 길 없구나 / 無路報君恩

부군께서는 늘 “태학생(太學生) 이상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의리가 있다. 게다가 나는 임금님이 계시는 한양에서 나고 자라며 직접 즐거이 길러주시는 교화를 입었으나 종신토록 한 치도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시는 이러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나머지 시는 혹 경연에서 현명한 사람을 뽑는 것이 지금의 급선무라고 말하여 신하의 정성을 담기도 하였고, 혹은 이(理)와 기(氣)가 나누어지고 합하는 묘함을 말하여 평생의 말을 끝맺기도 하셨다.
부군께서는 병중에 불초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에는 글을 짓는 것을 만년에 덕을 이룬 뒤에 하는 일로 생각하여, 저술에 그다지 뜻을 두지 않았다. 중년 이후에는 또 질병으로 고생하느라 붓과 벼루를 던져두었다. 이런 까닭으로 너희에게 전할 만한 글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였다. 사장(詞章)과 잡문(雜文)은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건대, 스승이나 벗과 학문을 익히며 이야기 나눈 것에 통찰력을 발휘한 견해가 적지 않지만, 이것도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평생 나의 소견은 바로 이른바 ‘이천(伊川)의 학설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화옹(華翁 이항로)의 글을 숙독하면 그만이지, 따로 나의 말을 찾을 필요는 없다.” 부군의 시는 격조와 운치가 몹시 높아, 한양에 계실 때는 당시의 명사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만년에는 또 시를 짓지 않아 집안에 전하는 것이 겨우 백여 편이다. 그렇지만 글을 아는 자는 여기서도 부군께서 평소 가슴에 품었던 한두 가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부군의 힘차고 굳센 필획과 엄정한 결구는 마치 부군의 마음가짐과 같았다. 안성(安城)의 홍여장(洪汝章)은 서법에 힘을 쏟은 적이 있어, 안목이 매우 높았는데, 부군의 해서를 보고 얼굴빛을 가다듬고 공경심을 일으키면서, 필획으로만 말하더라도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하였다.
부군은 휘가 조(鼂)이고, 자가 낙문(洛文)이며, 자호가 낙은거사(洛隱居士)이며, 고흥 유씨(高興柳氏)이다. 먼 조상은 고려 시중(高麗侍中)을 지낸 휘 탁(濯)인데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으며 직간(直諫)하다가 죽었다. 고흥백(高興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의정공(義貞公) 어우당(於于堂) 휘 몽인(夢寅)이 문장과 절의로 세상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어우당의 조카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숙(潚)과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등 여러 공(公)이 잇달아 상소하며 광해군(光海君) 조정의 오적(五賊)을 성토하였다. 이 일은 나라의 역사서에 실려 있다. 부제학으로부터 몇 대를 전해 휘 순(諄)에 이르렀고, 휘 순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휘 운한(雲漢)을 낳았고, 휘 운한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휘 경(璟)을 낳았고, 휘 경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침착하고 소탈하며 엄정하여, 가정을 이끄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 “나의 자손 중에 성인의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나온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분은 아들을 둘 낳았다. 장남 휘 영오(榮五)는 순조(純祖)의 조정에서 벼슬하였으며, 언사가 권문귀족의 심기를 거슬러 외딴섬으로 유배 갔으며, 곧 돌아왔으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양근(陽根)의 용문산에 들어가 화서(華西) 이 선생을 따라 배웠다. 늙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선비들에게 전해져 칭송받았다. 만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를 입어 가선(嘉善)의 품계에 올랐으며,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풍천 임씨(豊川任氏)로 고(故) 학생(學生) 용백(容白)의 따님이다. 차남 휘 영구(榮九)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배위는 유인(孺人)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고(故) 학생 한영(漢永)의 따님이다. 부군은 참판공의 둘째 아들인데, 양자로 나가 통덕랑의 후사가 되었다. 정종(正宗) 무오년(1798, 정조22) 6월 6일에 태어나셨다. 순조(純祖) 기묘년(1819, 순조1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헌종(憲宗) 을미년(1835, 헌종 원년)에 서울로부터 참판공을 따라 양근에 들어와 이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다. 금상(今上) 경오년(1870, 고종7) 윤 10월 20일에 양근의 한포정사(漢浦精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이다. 이 해 12월 13일에 한포정사의 서쪽 5리 용란동(龍卵洞)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부인 이씨 묘소의 오른쪽이다. 붕우와 문생으로서 가마(加麻)하고 장례를 행한 자가 수십 인이었다.
이씨는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고(故) 학생 희복(羲復)의 따님이며,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으며, 따로 행적에 관한 기록이 있어 집안에 전한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중학(重學)이고, 차남은 중교(重敎)이다. 중학은 아들이 홍석(弘錫)이고, 장녀는 이정화(李廷和)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중교는 아들이 의석(毅錫)이고, 장녀는 이겸하(李謙夏)에게 시집갔고, 차녀 둘은 모두 어리다. 홍석은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주-D001] 낙은부군(洛隱府君) : 
유조(柳鼂, 1798~1870)로, 자는 낙문(洛文)이다. 유영구(柳榮九)의 계자(季子)이며, 생부는 유영오(柳榮五)이다.
[주-D002] 심홍모(沈弘模) : 
1767~183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천로(天老), 호는 간재(簡齋)이다. 1803년(순조3)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8년 혜릉참봉(惠陵參奉)에 기용된 뒤 금부도사ㆍ장릉령(長陵令)을 거쳐 예안현감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심정진(沈定鎭)과 큰아버지 심건영(沈健永)에게 특히 사랑을 받아 가르침을 받았다. 저서로는 《사례안(四禮按)》 6권, 《역주촬요(易註撮要)》 5권, 《주서유초(朱書類抄)》 5권, 《주차(朱箚)》 3권, 《일록초(日錄抄)》 2권, 《유고(遺稿)》 7권이 전한다.
[주-D003] 오희상(吳熙常) : 
1763~183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이다. 1800년(정조24)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부터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818년(순조18) 경연관ㆍ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주리(主理)ㆍ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讀書隨記)》ㆍ《노주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주-D004] 정시(庭試) : 
증광(增廣)ㆍ별시(別試) 등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대궐 안 마당에서 보이던 과거를 말한다.
[주-D005] 정은 …… 되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수장(首章)에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이다.”라고 했는데,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성(性)뿐이니, 아무런 편의(偏倚)가 없이 순수 원만한 상태이므로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에서 발하는 정은 모두 절도(節度)에 맞아 도리에 어긋남이 없으니 고금 천하에 누구나 이 길로 가야만 하기 때문에 통달한 도, 즉 달도라 한다.
[주-D006] 천군(天君) : 
본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순자》 〈천론(天論)〉에 “마음이 한가운데 빈자리에 있으면서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다스리는 까닭에 마음을 하늘의 임금님이라고 하는 것이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 하늘이 …… 때문이네 : 
해동은 우리나라를 일컫는다. 활리옹은 이항로(李恒老)를 말한다. 그는 신명(神明)을 이(理)라 하였으니, 이것은 리의 활성을 말한 것이다.
[주-D008] 출입존망(出入存亡) : 
공자가 이르기를 “잡으면 보존되고〔存〕 놓으면 잃어서〔亡〕 출입(出入)이 일정한 때가 없어 그 향방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 한 것을 이른다. 《孟子 告子上》
[주-D009] 김영록(金永祿) : 
1849~1900. 사수(士綏)는 자이고, 호는 충재(充齋)이다. 제천의병의 참모(參謀)를 지냈다.
[주-D010] 조상우(趙相禹)의 소(疏) : 
1582~1657. 자는 하경(夏卿)이고, 시암(時庵)은 호이다. 김장생(金長生)ㆍ장현광(張顯光)의 문인. 저서로 《시암집》이 있다. 조상우의 상소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인조 3년 을축(1625, 천계5) 12월 3일(정축) 〈유학 조상우가 왕이 의리에 입각한 예를 따르기를 청하다〉에 보인다.
[주-D011] 진묘(眞廟) : 
영조(英祖)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형인 진종(眞宗)의 묘호(廟號)이다.
[주-D012] 익묘(翼廟) : 
익종(翼宗)의 묘호이다. 익종은 순조(純祖)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로, 순조 말년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많은 공로가 있었으나 4년 만에 운명하였다. 그의 아들인 헌종(憲宗)이 즉위하여 익종으로 추존하였다.
[주-D013] 영녕전(永寧殿) : 
조선조의 왕 및 왕비로서 종묘(宗廟)에 모실 수 없는 분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는 곳이다. 종묘(宗廟) 18실(室)이 찰 때에 태조(太祖)와 부조(不祧)의 왕의 위패 및 그 왕비를 제외한 다른 한 왕을 옮겨 모시고 그 빈자리에 새로 죽은 왕을 모시고 그 조천(祧遷)한 왕 및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셔다가 제사하는 전(殿)을 말한다.
[주-D014] 진연(陳淵) : 
?~1145. 기수(幾叟)는 자이다. 학자들이 묵당(默堂)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정(二程)에게 배웠고, 또 양시(楊時)를 스승으로 모셨다.
[주-D015] 조묘(祧廟) : 
조상의 신주를 사당(祠堂)에 모셨다가, 4대가 지나면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신주를 옮겨 모신 데가 조묘이다.
[주-D016] 오(吳)나라 …… 것 : 
태백의 형제란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인 태백과 차자(次子)인 중옹(仲雍)으로 태왕의 뜻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있음을 알고는 계력이 위(位)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형만(荊蠻)으로 도망가서 단발문신(斷髮文身)하여 스스로 후사가 될 수 없음을 보였으며, 오(吳)나라에서 형제가 왕위를 서로 계승하였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주-D017] 조묘(祧廟)는 …… 하였다. : 
《二程遺書》 권22 하(下)에 보인다.
[주-D018] 갑과 을의 다툼 : 
조선 시대 동서 분당의 시초는 두 개인의 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선조 5년(1572) 이조 참의로 있던 심의겸(沈義謙)은, 당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청망(淸望)이 있던 김효원(金孝元)이 이조 정랑에 추천되자 그가 어릴 적에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식객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 후 늦게야 이조 정랑이 된 김효원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이조 좌랑의 추천에 오르자 외척(外戚 명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여 저지시켰다. 이후 심의겸과 김효원은 혐의가 생기고, 조신들은 심의겸을 옳다고 하는 파와 김효원을 옳다고 하는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동(貞洞)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에 있어 동인 서인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燃藜室記述 宣祖朝故事本末》
[주-D019] 신임(辛壬) …… 일 : 
신축년(1721, 경종1)부터 임인년(1722, 경종2)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이른다. 신임사화란 경종에게 병이 잦고 후사가 없음에 따라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서, 노론(老論)의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가 연잉군(延礽君) 즉 뒤의 영조(英祖)를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정무를 대리하게 한 데 대해, 소론의 4대신 조태구(趙泰耈)ㆍ이광좌(李光佐)ㆍ최석항(崔錫恒)ㆍ유봉휘(柳鳳輝)가 반대하며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한 결과, 노론의 4대신 이하 노론 일파가 극형에 처해졌다. 여기서 사충(四忠)은 노론 4대신을 말하고, 사흉(四凶)은 소론 4대신을 말한다.
[주-D020] 명교(名敎) : 
유교(儒敎)는 명분(名分)을 중히 여기므로 명교(名敎)라 한다.
[주-D021] 곡령 : 
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산 곡달산을 말한다.
[주-D022] 강화도에서 …… 뒤에야 :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략하여 군기, 양식, 서적 등을 탈취한 사건, 즉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承政院日記 高宗 3年》
[주-D023] 횡거(橫渠)가 …… 뜻 : 
횡거는 송(宋)나라 장재(張載)이다. 장재가 정전법을 시행하려 했던 본말이 《맹자집주》 〈등문공 상(滕文公上)〉 제3장에 나온다.
[주-D024] 사전(絲田) : 
현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내사리와 외사리 일대로 추정된다.
[주-D025] 삼정평(三汀坪) : 
현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내삼포리와 외삼포리의 중심에 해당하는 삼포(三浦)로 추정되는데, 삼포는 삼정포(三汀浦)의 줄임말이라 한다.
[주-D026] 괴원공(槐園公) : 
이준(李埈, 1812~1853)의 호이다, 이준의 자는 백흠(伯欽)으로, 1835년(헌종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과거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가학(家學)을 수업하면서 은거하였다. 1852년(철종3) 홍천으로 이거하였다가 이듬해 낙상하여 죽었다. 그밖의 저서로는 《괴원집》이 있다.
[주-D027] 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 : 
《가례》의 편명. 사마광(司馬光)이 집안에서의 각종 예절을 기록한 것이다.
[주-D028] 계가중사(戒家衆辭) : 
여러 식솔을 경계하는 말이다. 《성재집》 권39 〈경제황고계가중사후(敬題皇考戒家衆辭後)〉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D029] 성인이 …… 삼았지만 : 
《주역(周易)》 〈가인(家人)〉 상구(上九)에서 “미더움이 있고 위엄이 행해지면 마침내 길하리라.”라고 하였다.
[주-D030] 갈담(葛覃) :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인데, 그 내용은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몸소 부인(婦人)의 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효심(孝心)도 지극했던 훌륭한 덕을 노래한 것이다.
[주-D031] 예서(禮書)에서 …… 것 : 
적전은 《예기(禮記)》와 《주례(周禮)》에 언급되어 있다. 적전은 종묘(宗廟)에 쓰는 자성(粢盛 제사에 쓰는 곡식)을 재배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의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왕이 직접 나아가 경작하는 전지이다.
[주-D032] 예절을 …… 된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 상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3] 만절불투유직도(萬折不渝惟直道) 백위수광저공심(百爲須擴這公心) : 
만 번 꺾여도 변치 않는 것은 오직 직도(直道 곧은 도리)이고, 백 번 실행하여 반드시 확장해야 하는 것은 이 공심(公心 공평한 마음)이라는 말이다.
[주-D034] 학문의 …… 고사 : 
송나라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시잠(視箴)ㆍ청잠(聽箴)ㆍ언잠(言箴)ㆍ동잠(動箴)을 지은 것을 말하는 듯하다.
[주-D035] 홍석(弘錫) : 
유홍석(柳弘錫, 1841~1913)으로, 자는 효백(孝伯), 호는 외당(畏堂)이다. 강원도 춘천 출신이며 인석(麟錫)의 재종형이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중락(柳重洛)ㆍ유봉석(柳鳳錫)ㆍ김경달(金敬達)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 뒤 제천의진이 형성되자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서무를 관장하며 적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이 의병들이 관군 해산책에 회유되어 이탈자가 속출하자 《고병정가(告兵丁歌)》를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07년 민긍호(閔肯鎬)ㆍ이강년(李康埏)과 재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춘천ㆍ원주 등지에서 유영석(柳寧錫)ㆍ유제곤(柳濟坤)ㆍ박선명(朴善明) 등에게 명하여 의병 600명을 모집하고 가평에서 적과 교전하다가 부상당하였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주-D036] 의석(毅錫) : 
유의석(柳毅錫, 1857~1933)으로, 성재 유중교의 아들이다. 자는 원여(遠汝), 신암(愼庵)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중암, 성재, 항와(恒窩) 유중악(柳重岳, 1843~1909)에게 배웠다.
[주-D037] 벽산(檗山)의 심의설(深衣說) : 
벽산은 이항로를 말하며, 심의설은 《화서집(華西集)》 권18에 실린 〈옥조심의설해(玉藻深衣說解)〉와 〈심의설변(深衣說辨)〉을 말한다.
[주-D038] 단복(端服) :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을 말한다.
[주-D039] 양복통해(兩服通解) : 
《성재집》 권30에 있다.
[주-D040] 의리상 …… 여기셨다 :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라고 한 데서, 뜻을 가져온 표현이다.
[주-D041] 잠강(潛江) : 
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의 지명이다.
[주-D042] 편전(便殿)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을 말한다.
[주-D043] 강경(講經) : 
경서(經書)의 강독(講讀)을 말한다. 경서에 정통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하여 경서 가운데서 몇 가지를 골라내어 강송(講誦)시킨다.
[주-D044] 형산에서 박옥을 캐내고 : 
“변화(卞和)의 박옥” 고사를 가져와, 곧음과 정성으로 자신의 본성을 갈고 닦았다는 뜻을 말하였다. 형산(衡山)은 형산(荊山)인 듯하다. 박옥(璞玉)은 순도 높은 옥의 원석(原石)을 말한다.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 변화가 형산(荊山)에서 박옥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는데 여왕은 가짜라고 의심한 나머지 그의 왼발을 베었고, 무왕(武王)도 역시 알아보지 못한 채 오른발을 베었다. 그 뒤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박옥을 안고서 3일간 주야를 피눈물을 흘리며 슬피 우니, 문왕이 옥인(玉人)에게 가공하게 하니 과연 보옥(寶玉)이었다고 한다. 《韓非子 和氏》
[주-D045] 수수에서 향란을 주웠네 : 
공자의 학문을 배웠다는 말이다. 수수는 사수(泗水)의 지류로 공자(孔子)의 고향을 흐르는 강이다. 공자의 학(學)과 그 학통(學統)을 수사지류(洙泗之流)라 한다. 또 공자가 위(衛)나라로부터 노(魯)나라에 돌아와 향란(香蘭)을 보고는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의란조(猗蘭操)라는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주-D046] 태학생(太學生) : 
성균관(成均館)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는 생원(生員)ㆍ진사(進士)를 통틀어 일컫는다.
[주-D047] 이천(伊川) : 
송(宋)나라 정이(程頤)의 호로, 자가 정숙(正叔), 시호가 정공(正公)이다. 그의 형 정호(程顥)와 함께 유학(儒學)을 부흥시켰다. 저서로 《역전(易傳)》ㆍ《춘추전(春秋傳)》ㆍ《어록(語錄)》 등이 있다. 《宋史》 《宋元學案》
[주-D048] 광해군(光海君) 조정의 오적(五賊) : 
박엽(朴燁), 정준(鄭遵), 허정식(許庭式), 남이흥(南以興), 윤수겸(尹守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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