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설악산(1,708m)을 금강산의 아류쯤으로 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바위들이 금강산에 모여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뒤늦게 도착한 울산바위가 금강산에 자리를 못 잡아 금강산을 바라보며 설악산에 걸쳐 앉았다는 전설도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혹자는 금강산보다 설악산이 더 아름답다고까지 말한다.
<삼국사기>에는 설악산이란 지명이 금강산보다 먼저 보인다. ‘설악雪嶽’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중사·소사로 나눌 때 소사 24곳 중의 하나였다. 소사에 상악霜岳, 설악雪岳이 나란히 등장한다. 지정 시기는 680년쯤. 설악은 지금 설악산을 말하고, 상악은 금강산을 가리킨다. 그 뒤 많은 기록에 설악이란 지명은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금강산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들어서 급격히 늘어난다. 아마 성리학의 자연관과 함께 삼신산이란 개념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봉래’ 금강산의 지명도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설악산을 ‘은자隱者의 산’이라고 한다. 실제 김시습, 김창흡과 같은 은자들이 세속을 등지고 살았던 산이기도 하다.
설악산의 정확한 유래에 대한 애초의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여름이 돼서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나온다. 글자 그대로 눈 덮인 바위산이란 말이다.
설악산은 설산雪山·설봉산雪峰山·설화산雪華山·설뫼雪嶽라고도 했다. 눈雪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이다.
<고려사> 이어 <조선왕조실록>에도 명산으로 지정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부터 명산이었고, 근대 들어서도 그 명성이 이어졌다. 금강산의 아류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설악산 탐방객은 2016년 10월에 96만679명. 10월 탐방객으로는 전국 22개 국립공원 월별 탐방객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다. 북한산이 56만9,712명, 무등산이 36만8,433명, 주왕산이 35만6,926명, 지리산이 32만4,991명, 오대산이 28만899명, 내장산이 26만991명 등이다. 10월과 11월에 탐방객이 많은 건 단풍이 절경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설악산이란 지명이 금강산보다 먼저 보인다. ‘설악雪嶽’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중사·소사로 나눌 때 소사 24곳 중의 하나였다. 소사에 상악霜岳, 설악雪岳이 나란히 등장한다. 지정 시기는 680년쯤. 설악은 지금 설악산을 말하고, 상악은 금강산을 가리킨다. 그 뒤 많은 기록에 설악이란 지명은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금강산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들어서 급격히 늘어난다. 아마 성리학의 자연관과 함께 삼신산이란 개념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봉래’ 금강산의 지명도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설악산을 ‘은자隱者의 산’이라고 한다. 실제 김시습, 김창흡과 같은 은자들이 세속을 등지고 살았던 산이기도 하다.
설악산의 정확한 유래에 대한 애초의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여름이 돼서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나온다. 글자 그대로 눈 덮인 바위산이란 말이다.
설악산은 설산雪山·설봉산雪峰山·설화산雪華山·설뫼雪嶽라고도 했다. 눈雪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이다.
<고려사> 이어 <조선왕조실록>에도 명산으로 지정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부터 명산이었고, 근대 들어서도 그 명성이 이어졌다. 금강산의 아류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설악산 탐방객은 2016년 10월에 96만679명. 10월 탐방객으로는 전국 22개 국립공원 월별 탐방객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다. 북한산이 56만9,712명, 무등산이 36만8,433명, 주왕산이 35만6,926명, 지리산이 32만4,991명, 오대산이 28만899명, 내장산이 26만991명 등이다. 10월과 11월에 탐방객이 많은 건 단풍이 절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