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5> 홍태유 <설악유람기> ] 금강산과 견줄 유일한 산… 선홍색 물든 잎, 비단 두른 듯 장관

2018. 1. 19. 15:54산 이야기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5> 홍태유 <설악유람기> ] 금강산과 견줄 유일한 산… 선홍색 물든 잎, 비단 두른 듯 장관

입력 : 2017.10.17 10:42

최고의 단풍으로 꼽혀… 설악·봉정암은 옛날 명칭 그대로 전해

 ‘지금까지 많은 명산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도 금강산만이 이 설악산과 우위를 다툴 수 있고, 다른 산은 견줄 바가 못 된다. 금강산은 그 아름다움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의 경치는 우리나라 사람조차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무니, 이 산은 산 가운데 은자隱者이다. 내가 세세히 설악의 경치를 적은 것은 고향에 돌아가 친우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요, 또 절경을 찾아 유람하려는 이들에게 알려 주려는 뜻에서이다.’ - 홍태유 <설악유람기雪嶽遊覽記> 중에서 ‘산문기행’ 인용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권혁진 박사는 설악산을 ‘은隱·성聖·기奇·영靈’ 네 개의 키워드로 요약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은자의 산’이고, 덕을 숨긴 군자 같은 산 중의 ‘성인 같은 산’, 물과 돌들이 끊이지 않은 ‘기이한 산’, 변화가 많은 물은 웅장하고 그윽하고 교묘하면서 신령스러운 ‘영적인 산’이라 설명했다.

육당 최남선은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되 웅장한 맛이 없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되 수려하지 못한데, 설악산은 수려하면서도 웅장하다”고 하면서 “절세미인이 골짜기에 고이 숨어 있는 산”이라 평가했다.

설악산은 과거부터 그 아름다움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연중 8개월 이상 눈이 덮여 너무 춥고 접근하기 어렵고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의 접근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조선 선비들이 제법 찾았다. 첫 유산기도 의외로 지리산 유산기에 그리 뒤지지 않았다. 김종직의 문인이자 김굉필·정여창 등과 함께 수학한 남효온(1454~1492)이 1485년 <유금강산기>를 쓰면서 설악산에 대한 기록을 살짝 남겼다. 실질적인 설악산 첫 유산기는 1575년 양양군수로 있던 문익성(1526~1584)이 쓴 <유한계록遊寒溪錄>이다. 이후부터는 제법 눈에 많이 띈다. 이들은 주로 봄과 가을에 설악산에 올랐다.

1700년대 들어서는 어느 산 못지않게 많은 선비들이 찾아 유산기를 남겼다. 하지만 그 명성만큼이나 의외로 눈에 띄지 않게 계속 고이 숨어 있었다. 은자의 산, 그 자체였다. 은자의 산이란 별명만큼이나 설악산을 찾은 선비들도 은자들이었다. 특히 김시습과 김창흡은 설악산에 숨어들어 신선같이 살다 갔다.

김창흡은 <설악산유산기>를 남겼지만 그의 작품은 이미 <유오대산기>에 소개했기에 홍태유의 <설악유람기>를 따라 설악산을 한 번 둘러보자.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직원 박배광씨가 안내를 했다.




봉정암 바로 위에서 바라본 내설악 용아장성은 마치 속세와 선계를 구분 짓는 경계 같아 보인다.
홍태유, 이 깊고 험한 길을 1박2일에 끝내

홍태유洪泰猷(1672~1715)는 효종의 딸 숙안공주가 할머니로서, 그녀를 따라 일찌감치 궁궐에 들었다. 하지만 당파에 휘말려 영의정이었던 부친이 사사賜死되자, 오대산·금강산 등지의 산천을 유람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설악유람기>는 그가 산천을 유람하던 시절 1709년 가을, 몇몇 지인과 함께 설악산에 갔던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는 갈역촌에서 백담사~곡백담~심원사~삼연정사~유홍굴~십이폭동~봉정암(1박)~적멸보궁~폐문암~오세암을 거쳐 백담사로 하산했다. 설악산은 지금도 험하지만 당시 호랑이와 곰·늑대가 설치던 시절, 이 유람코스를 1박2일에 마쳤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지금 등산로를 정비한 상태에서도 홍태유의 산행거리는 20km가 훨씬 더 나온다.

‘다시 10리쯤 가서 시내를 건너니 갈역촌葛驛村이다. 마을은 아주 쓸쓸한데다 모두 너와집이다. 이곳을 지나면 길은 대부분 험한 자갈길이다. 말을 타고 갈 수 없어 비로소 짚신을 챙겨서 걸어갔다.’

그의 유람기 출발 부분이다. 갈역촌은 지금 백담사 입구 용대리 일대를 말한다. 이어 마을 앞 시내를 따라 몇 걸음 안 간 곳이 곡백담이라고 한다. 곡백담은 지금의 백담계곡을 가리키는 듯하다.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인 이의숙의 <이재집>에 ‘백담계곡 내산의 모든 샘물은 서북으로 쏟아져서 갈역으로 돌아간다. 황정역으로부터 아래로 20리, 맑은 물굽이와 깨끗한 늪이 많으니 이것을 통틀어 곡백담曲百潭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나온다. 갈역의 남쪽에 옛날 삼연옹(김창흡의 호)의 정사亭舍가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삼연정사’다.

다시 계곡을 따라 5리를 가니 심원사가 나온다고 했다. 이 심원사가 지금 백담사. 백담사는 647년 자장율사(590~658)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창건 당시엔 설악산 한계리에 있다고 해서 한계사寒溪寺라 불렸다. 이후 운흥사→심원사→선구사→영취사 등으로 몇 차례 명칭이 바뀐다.

백담사란 명칭의 첫 등장은 15세기 중반설과 18세기 중반설로 기록마다 조금 다르다. 인물과 관련시켜 유추하면 조금 더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백담사는 김시습과 관련 있다. 어떤 문헌은 김시습이 머물던 시기 소실돼 재건하면서 백담사 이름이 첫 등장한다고 전한다.

이것도 조금 다른 듯하다. 김시습의 생존 시기는 15세기. 김시습은 단종이 죽자 한계사로 들어 은거했다고 기록에 전한다. 그렇다면 백담사란 명칭의 첫 등장은 18세기가 유력하다. 이후 심원사란 명칭을 다시 잠시 사용하다가 18세기 후반 지금의 백담사로 완전 정착했다. 백담사 입구 안내문에는 ‘한계사로 창건 후 1772년(영조 51)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했다’고 한다. 주로 화재로 절이 없어져 불이 나지 않는 장소를 여기저기 골라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백담사 위치와 다르다는 말이다.

<백담사 중건기>에 나오는 ‘대청봉에서 백담사까지 100개의 담潭이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은 후세에 조작됐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백담사는 화재를 피해 이리저리 곳으로 옮겨 다닌 결과이지 100개의 담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부주의와 한국전쟁으로 소실됐다가 1957년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봉정암과 오세암도 한국전쟁으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가 백담사 주지를 지낸 도윤 스님이 1962년과 1963년에 건물 한 채씩 각각 건립해 현재의 모습으로 넓힌 것이다.



1. 구곡담계곡 위 데크에서 용아장성의 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2. 홍태유가 곡백담이라 지칭한 수렴동계곡을 올라가고 있다.
김창흡의 삼연정사가 지금 영시암

홍태유가 <설악유람기>를 쓴 1709년에도 백담사 대신 심원사로 불렸다는 사실을 유람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백담사, 아니 심원사에서 동쪽으로 서너 리를 가면 삼연 김창흡의 정사가 나온다고 했다. 삼연정사 자리가 지금 영시암이다.

권혁진 박사는 “삼연정사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계곡 건너편”이라고 주장한다. “유산기에 몇 번 계곡을 건너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짐작컨대 맞은편이 맞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시암을 창건한 도윤 스님은 “지금 자리가 맞다”고 말한다. 현재 87세의 도윤 스님은 설악산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1960년도에 백담사에 들어와 4년간 주지를 역임한 뒤 터만 남아 자취를 전하던 봉정암과 오세암, 그리고 영시암까지 재건에 나서 건물을 짓는 등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한 주인공이다. 도윤 스님은 삼연이 원래 살던 정자 터까지 안내하며 영시암 터에 삼연정사가 있었고, 영시암이란 명칭도 삼연이 사용했던 것이라 주장했다.

김창흡은 삼연정사를 영시암으로 개칭한다. 이 영시암永矢庵이란 명칭에 삼연 김창흡의 심정이 잘 녹아 있는 듯하다. 영원할 永자에 화살 矢자의 영시암은 글자로는 ‘영원히 쏜 화살’이란 뜻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속세를 떠나기를 영원히 맹세한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만큼 김창흡은 당파로 영의정이었던 아버지 김수항을 잃은 아픔이 너무 커 설악산에 묻혀 살고 싶은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흔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고 한다. 하지만 산천도 전혀 의구하지 않다. 홍태유가 유람했던 설악산은 지금과 너무 달라져 있다. 유람기에 나오는 지명은 알 수 없는 것이 태반이고, 더욱이 걸었던 길은 전혀 찾을 수 없다. 특히 산길은 낙석이나 태풍으로 인한 폭우가 한 번 휩쓸고 가면 흔적조차 없다. 새 길이 나기 마련이다. 과거 유산기의 길을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전체 맥락에 따라 두루뭉술 추정해서 따라갈 뿐이다.

계곡을 따라 유람은 계속된다. 그가 걸었던 발길이라 생각하며 따라간다. 홍태유는 다시 계곡을 따라 1리쯤 가면 유홍굴兪泓窟에 이른다고 했다. 유홍은 조선 중기 문신인데, 그가 이곳을 유람하면서 쉬어갔다고 해서 명명했다고 말한다. 아쉽지만 수렴동대피소 소장도 유홍굴의 명칭과 자취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1 봉정암 올라가는 중 구곡담계곡 위 사자암 바위를 오르고 있다. 2 홍태유가 십이폭동으로 표현한 폭포 길을 올라가고 있다. 소와 폭포가 어우러져 장관이다.
십이폭동의 풍광, 예나 지금이나 빼어나

오른쪽으로 위태로운 돌길을 돌아가면 십이폭동十二瀑洞으로 들어간다. 십이폭동은 지금의 구곡담계곡의 쌍폭부터 봉정암까지를 일컫는다. 마치 폭포로 골짜기나 동굴을 이뤘다는 표현이다. 지금도 이 표현 그대로 폭포골짜기다. 구곡담계곡은 백담사에서 시작하는 수렴동계곡 위에 있는 계곡을 말한다. 쌍폭만 과거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수렴동이나 구곡담이나 백운동은 홍태유의 유산기뿐만 아니라 다른 유산기에도 없다. 십이폭동은 지금 거의 사용하지 않은 명칭이다. 십이폭동의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빼어나다.

‘이곳의 시내와 바위의 경치는 곡백담과 비슷하면서도 더욱 깨끗하고 밝으며, 좌우의 설봉들은 삼연정사와 비슷하면서도 더욱 기이하고 장엄하다. 그 사이 높은 절벽이 한데 모여 첩첩이 솟아 있다. 나무는 단풍나무와 전나무로 한창 가을이라 선홍색으로 물들어 마치 그림 병풍을 단장하고 비단병풍을 둘러친 것 같다. 앉아서 쉴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차마 떠나지 못할 정도였다.’

절벽 끝에 폭포가 걸려 있고, 그 아래는 못을 이룬 계곡이 줄을 잇는다. 십이폭동이라 했는데, 크고 작은 폭포가 12개는 훨씬 더 되어 보인다.

길은 험하고 가파르다. 이 험한 길을 조선시대에 어떻게, 왜 올라갔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하긴 지금은 70~80세 되는 할머니들도 지팡이 들고 봉정암까지 올라간다. 그 힘의 원천이 궁금하다. 한국 최고의 기도처라 불리는 봉정암의 기도발 때문일까.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힘을 발휘하는 자식을 위한 모정 때문일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마침 70세를 훌쩍 넘은 듯한 할머니가 지나간다.

“봉정암까지 가십니까? 왜 가십니까? 기도하러 가십니까?”

“예” 하고 답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표정이다.

“누구를 위한 기도를 하십니까? 봉정암까지는 몇 번이나 오르셨습니까?”

“자식도 하고, 가족도 하고…. 3번 이상 올랐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우리가 봉정암에 겨우 도착해서 기진맥진 쉬는 사이 정상 대청봉을 향해서 거침없이 올랐다. 요즘은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힘보다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정상까지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가파른 계곡 왼쪽으로 용아장성, 오른쪽으로는 서북능선에서 뻗어 나온 험한 능선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마치 속계와 선계를 구분 짓는 경계선, 즉 천상계로 가는 길인 듯한 느낌이다. 선계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조선 선비들이 산에 오를 때 짐꾼은 주로 승려들이 했다. 승려들이 짐을 지고 갈 뿐만 아니라 다음 목적지인 절까지 안내를 도맡았다. 이 험한 길을 간 선비보다 승려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길이 너무 험하니 이정표를 세운 기록이 나온다.



1 오른쪽 만경대와 함께 봉우리들이 연화반개형이라는 오세암을 좌우로 둘러싸고 있다. 2 수렴동계곡 위 구곡담계곡으로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옛날엔 돌무더기 쌓아 이정표로 활용한 듯

   ‘길이 끊겨 찾지 못하고 한참 동안 헤맸다. 그때 시냇가 바위 위에 돌무더기가 보인다. 누군가 일부러 쌓아 놓은 듯했다. 일행 가운데 한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승려들이 선정에 들러 왔다가 돌아가면서 표시로 쌓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길에는 헷갈릴 만한 곳마다 모두 그런 돌이 있었으므로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길이 험해 우거진 숲을 헤치고 벼랑의 바위에 붙어서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조심 올라가 가까스로 낙상의 화를 면했다. 정말로 산수에 뜻이 있어 경승을 탐색할 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비록 오고 싶어도 못 올 길이다.’

봉정암 도착하기 직전 백운동계곡이 끝나고 깔딱고개가 시작되는 지점의 묘사로 짐작된다. 지금도 그 등산로는 험하기 짝이 없다. 거의 두 발, 두 팔을 다 써야 올라갈 정도로 가파르다. 낙상뿐만 아니라 낙석까지 조심해야 한다. 그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비로소 봉정암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

‘암자 이름은 봉정암鳳頂庵이고 설악산의 9/10 높이에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올려다보며 온 모든 산들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는 듯하다. 암자 뒤편의 봉우리도 높았지만 여기 와 보니 몇 길 바위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곳이 얼마나 우뚝하게 높은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봉정암이란 명칭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주 오래된 듯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딱 떨어지는 명칭이 설악과 봉정암이다. 유산기 여기저기 등장한다. 불교신도들의 순례지로 유명한 봉정암은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귀국한 자장율사에 의해 한계사 창건 전인 643년에 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한 암자로 알려져 있다. 이어 원효와 지눌이 중건했다고 전한다.

봉정암의 명칭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장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기 위해 금강산을 찾아 기도를 하는 중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자장은 봉황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봉황새는 높은 봉우리를 선회하더니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종적을 감췄다. 자장이 유심히 살펴보니 봉황이 사라진 곳이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했다.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은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사리를 봉안하고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이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鳳頂이 이곳에서 수도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고 전한다.

봉정암은 평일인데도 제법 사람들이 있다. 아까 본 70세 전후의 할머니는 씩 웃고는 대청봉을 향해 올라갔다. 그녀의 건강비결은 등산이 분명해 보인다. 그 연세에 부러운 인생이다.

‘아침에 암자 위쪽에 있는 탑대에 올랐다. 그곳에 큰 바위가 있다. 그 위에 마치 부도浮屠처럼 포개진 탑이 있다. 승려는 석가의 사리를 넣어둔 곳이라 한다. 거기서 길을 바꿔 오른쪽으로 올랐다. 높이 올라갈수록 앞이 확 트여온다. 앞에는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아마 지금의 용아장성 끝 지점에 올라선 듯하다. 앞에 펼쳐진 용아장성과 오른쪽의 공룡능선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용아장성이란 지명도 유산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있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실제로 조선시대 문헌에는 용아장성이란 지명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은상이 1933년 설악산을 오른 뒤 남긴 기록에도 없다. 처음으로 용아장성이란 명칭이 등장한 문헌은 일본인 이이야마 다츠오가 1943년 쓴 <조선의 산朝鮮の 山>이라는 등반책자에서다.

여기서 ‘설악산은 청봉이 최고봉이고, 서쪽 방향으로 중청봉을 거쳐 상어이빨 모양의 용아장성이 성곽처럼 이어졌다’로 썼다. 천불동이란 단어도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용아장성은 속세와 선계의 경계

실제로 용아장성은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들이 연이어 성처럼 길게 둘러쳐져 장관이다. 특히 운해가 암봉들을 휘감을 때면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듯 비경을 보여 주며, 가을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 때면 세상 어느 풍경에 견줘도 손색없다.

‘이곳으로부터 절벽을 부여잡고 5, 6리쯤 가자 약간 평탄한 곳에 이르렀다. 바위벼랑과 천석泉石의 승경은 십이폭동의 하류에 버금간다. 또 20리 남짓 간 곳이 폐문암閉門巖이다. 이 골짜기에서 제일 뛰어난 곳이다. 양쪽 벼랑이 깎아지른 듯 관문처럼 솟아서, 마치 인간 세상과 선계仙界를 구분 짓는 관문 같다.’

속세와 선계의 관문. 홍태유가 무얼 보고 그렇게 표현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용아장성이나 공룡능선 앞이나 옆에 서면 실제 그런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오른쪽 고개를 하나 넘어 오세암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러면 그가 본 암벽은 용아장성일 가능성이 높다. 용아장성은 설악산으로 접어드는 속계와 선계의 관문인 셈이다. 폐문암을 고개로 선계인 봉정암에 들었다가 다시 오세암을 거쳐 폐문암을 통해 속세로 돌아온 것이다.‘오세암의 산봉우리들이 지닌 빼어남은 삼연정사에서 보던 것을 다 지니고도 또 그보다 훨씬 더 빼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비를 만나 직접 가볼 수 없어 한스럽다.’그의 유산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서문에 썼던 내용은 그가 지인들에게 설악산을 알리기 위해 추가로 기록한 부분이다. 속세에서 선계로 갔다 다시 속세로 돌아온 진한 감동의 여운이 남아 설악에 대한 평가를 부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세암 삼성각의 산신도(아래)와 봉정암 산령각에 있는 산신도.

설악산 산신

한국 산신의 메카라 하지만 기록
·실체 없어…
오세암 관세음보살說도

설악산은 <삼국사기> 제사조에 나오는 소사小祀 24개 명산 중에 하나였다. 신라시대부터 국행제를 지냈다. 고려시대까지는 국가에서 주관했고, 조선시대 들어서는 지방으로 이관됐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국교였으니 산신제보다 조상숭배를 우선시했다. 여러 왕조에 걸쳐 명산으로 분류돼, 산신제를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산신에 대한 기록이 없다. 구전으로는 봉정암을 ‘한국 산신의 메카’라고 지칭한다. 한민족 전통신앙인 산신신앙의 본거지로서 최고의 기돗발 터, 즉 한국 최고의 기도터로 통한다. 팔공산 갓바위 마애불상 못지않게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봉황이 부처님 이마로 들어간 자리라고 해서 최고의 명당 터로 여긴다.

봉정암은 또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한국의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이다. 한국 산신의 메카와 5대 적멸보궁. 굳이 따지자면 불교의 성지와 산신신앙의 메카가 서로 충돌한다. 오대산 산신의 경우, 오대에 각각의 보살이 좌정해 있어 산신의 입지가 좁아 잘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불교 최고의 신인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자리에 산신이 좌정해 있기에는 뭔가 격이 맞지 않은 느낌이다. 산신도 불교의 한 신으로 습합된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설악산이 산신의 메카로 알려졌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오세암 주지 일념 스님이 나름 해석을 했다.

“설악산이 산신의 메카라고 하는 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중한 기운을 느낄 수 있어 산신이 거처하기에 좋은 장소라서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는지 짐작할 뿐이다.

기암괴석과 깊은 계곡은 산신이 머물기 적합한 곳이다. 그리고 기암괴석으로 인해 기氣가 센 곳으로 느껴질 수 있다. 기가 센 곳은 좋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봉정암에서 산신 관련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실화라고 한다.

‘봉정암에 한 땡추중이 주인 노릇을 했다. 어느 날 신심 깊은 거사가 백일기도를 하러 왔다. 거사는 눕지도 않고 백일기도를 계속했다. 출타했다가 보름  만에 돌아온 땡추중은 이내 잠에 곯아 떨어졌다. 꿈에 하얀 수염의 노인이 나타나 “버릇을 못 고치면 우리 집 개를 보내겠다”고 했다. 거사는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땡추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며칠 후 또 다시 나간 땡추는 다시 보름 만에 돌아왔다. 자정쯤 갑자기 벼락이 치더니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누군가 땡추를 덜컥 집어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순식간이었다. 거사는 정신을 가다듬고 찾으러 나섰다. 오세암 가는 길 15리쯤 땡추의 시신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거사는 오세암에 이 사실을 알리고 땡추의 시신을 거둬 화장해 주었다.’

산신이 허투루 사는 승려와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구전되는 일화다.

그런데 인근 오세암五歲庵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전설이 전한다. 오세암의 유래와 관련된 내용이다.

‘오세암은 643년 또는 645년 창건 당시엔 자장이 관음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관음암觀音庵이라 했다. 고려시대 설정雪頂조사가 암자를 중수하고 그의 다섯 살 된 조카가 일찍이 부모를 잃어 같이 살았다. 겨울이 오기 전 영동에 갈 일이 있어 설정은 암자에 조카를 혼자 남겨두고 떠났다. “머지않아 올 테니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며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부터 눈이 내려 도저히 돌아올 수 없었다. 이듬해 봄이 돼서야 설정이 돌아왔다. 이럴 수가…. 조카는 건강하게 기다렸다. “인자하신 어머니가 오셔서 젖과 밥을 주셨습니다”라고 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었다. 그 오세동자는 견성득도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김시습이 단종이 죽자 오세암에 머물렀다. 김시습은 5세 때 대학을 통달해 신동이라 불렸다. 1761년 설정 스님이 김시습의 초상화를 구해 오세암에 모셨다. 설정은 관음영험설화를 바탕으로 오세암으로 바꿨다.’

‘오세암 사적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봉정암은 용아장성의 끝, 설악산 기운의 정수精髓에 해당하는 자리다. 자장율사도 봉황이 사라진 곳을 찾아 진신사리를 봉안했고, 그 자리가 부처님 이마에 해당해서 봉정이라 명명했다고 전한다. 기운의 정수 자리에 부처님이 좌정했으니 산신은 그 옆 오세암으로 비켜갔을까.

그런데 봉정암에서는 봉정암 바로 뒤 바위를 산신봉이라 부른다. 산신과 관련이 있어서일까.

산신의 실체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관세음보살이 산신이 될 수도, 김시습일 수도 있다. 성별에 대해선 일부는 여산신이라 하고, 혹은 남산신이라고도 한다. 산신신앙의 고유의 형태로 보면 여산신이 분명하다. 덧씌워진 객체가 없으면 대개 여산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양)과 계곡의 신비한 물(음)은 양과 음의 절묘하고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렇다. 설악산 산신은 자연의 조화, 음과 양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만큼 더 절묘한 산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설악산을 한국 산신의 메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설악산 산신에 대한 유일하게 찾은 기록은 노산 이은상이 쓴 ‘설악행각, 묘고봉두에 서서’이다.

‘증왕曾往에는 상하 양봉 사이에 규모도 적지 아니한 번듯한 당우가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을 뿐이다. 그 대신 이 상봉上峰 최고 정상에 돌담으로 두르고 기와로 덮은 조그마한 제단이 있거니와, 단상에 세워놓은 위비에는 한가운데 “설악산봉 국사천왕 불신지위雪嶽山峰 國

司天王 佛神之位”라 썼고, 좌에는 소자로 “팔도산신 중도신령八道山神 中道神靈”이라 썼으며, 우에서 역시 소자로 “설악산 신령雪嶽山 神靈”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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