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류왕 / 역사문 김용만 소장님

2013. 8. 6. 21:53우리 역사 바로알기

 

 

 

영류왕 고-수 전쟁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해 스러지다

영류왕 이미지 1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은 큰 전쟁 없이 25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한 임금이다. 그의 죽음 이후 고구려는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해한 연개소문과 관련되어 지금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아들로,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건무였다.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이 559년 무렵에 태어난 것에 비해, 그는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했을 때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동생으로 대양왕(大陽王, 28대 보장왕의 아버지)이 있었으므로, 평원왕이 죽기 직전인 590년에 가까운 시기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618년 영양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60세 무렵에 죽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그가 30세 무렵인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바다 건너 직접 고구려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래호아의 군대는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군수품을 보급해주며, 함께 평양을 공격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빨리 격파하여,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쳐 이들을 섬멸하고자 했다.

 

   [북사(北史)] <래호아> 열전에 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驍勇)하기가 매우 뛰어나(絶倫),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직접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형인 영양왕처럼 그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고건무의 작전은 적에게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부총관 주법상이 래호아에게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렸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장안성은 외성, 내성, 중성, 북성으로 이루어진 도성(都城)이다.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다. 외성 안에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마구 약탈에 나섰다. 이때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 간신히 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마련한 진지만을 겨우 지킨 채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건무의 활약 덕택에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쳐버린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대 내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음에 따라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양왕에게 자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손이 있었음에도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에서 거둔 공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류왕의 초기 대당(對唐) 정책

 

    그가 왕위에 오른 618년은 마침 고구려의 숙적인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 시기였다. 영류왕은 619년, 621년, 622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 특히 622년에는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로 교환을 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 1만명을 돌려보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돌려보낸 고구려인의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1만 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여전히 수나라 출신 포로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624년 영류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도사(道士)와 도교서(道敎書)를 받아들였다. 또한 당나라의 책봉(冊封)도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때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신하들에게 고구려와의 관계는 명분과 실제가 다르다며, 굳이 신하의 예를 강요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때, 책봉의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거듭 격파한 고구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622년 고구려에서 이탈해 당나라에 귀부한 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를 고구려와 가까운 연주(燕州) 총관에 임명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국경을 자주 침략하니 이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도 당나라가 백제, 신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는 등, 당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해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는 외교 갈등을 우려해 당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돌궐(突厥)

 

   이처럼 영류왕이 당나라의 요구를 대체로 들어주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을 원했던 것은, 유목제국인 동돌궐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551년과 580년대 초에 동서로 분리되기 전 강성했던 돌궐과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지켜보며 힘을 축적했던 동돌궐은 수-당 교체기 중원의 여러 군웅(群雄)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져 있었다. 고-수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된 동돌궐은 고구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요해(遼海 - 요서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해왔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던 고구려로서는 적극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거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돌궐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갈등을 야기하기보단 우호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는 628년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630년이 옳다. 이때 영류왕이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축하한 것은 동돌궐을 견제하고 있던 고구려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변화하는 고구려-당의 관계

 

   고구려는 당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주었다. 봉역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 라는 뜻인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봉역도가 만약 실제로 고구려의 지리 정보가 상세한 지도라면, 641년 지도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당의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이 고구려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리정보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보낸 것은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국경지도로,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626년 아버지 고조(이연)를 핍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唐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은 언젠가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야심과 오만함은 631년 8월, 고구려에 보낸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적의 시신을 모아 만든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것으로 표출되었다. 경관 파괴는 곧 고구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리장성의 축조와 외교 정책

 

   영류왕은 당나라가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부여성에서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에 달하는 지역에 장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천리장성 축조를 연개소문이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연개소문의 나이가 국내 정치에 간여할 정도가 아니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의 지시로 632년 2월부터 646년까지 15년간 지속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하나로 연결된 장벽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여러 곳에 성을 쌓고 보수하여 일종의 네트워크 방어망을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축성되고 보수된 성들은 고-당 전쟁에서 적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史書)들에는 631년부터 639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건설하며 당장 당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634년 고구려 승려가 당나라에 입국하는 등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638년 토번과 싸워 승리하고, 서돌궐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서역의 여러 소국들을 제압하였으며, 640년에는 고창국까지 멸망시키는 등 서쪽 변경에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당나라의 팽창을 예의주시하던 영류왕은 639년 태자 환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나라 국학(國學)에 청년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등 당나라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러자 640년 당나라에서 태자의 방문을 대한 답례로 사신 진대덕을 보내왔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알고 있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강성함을 크게 경계하고 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사신도 크게 우대해 주었다.

 

 

영류왕의 남방정책

 

   영류왕은 고-수 전쟁 때 수나라를 지지했던 신라를 견제했다. 신라와는 한수 이북의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6세기 말 이후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작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629년 8월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영류왕은 630년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621년 사신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왜국을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류왕은 군대를 보내 임진강 주변의 칠중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 신라와 작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대군을 보내 정벌하기보다는 국경의 현상 유지와 외교를 통한 신라 견제에 치중하고 있었다. 백제와도 큰 갈등을 만들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다

 

   영류왕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와의 관계였다. 영류왕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641년 8월 당태종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고구려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하면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나, 지금은 산동지역이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류왕이 막고자 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태종의 야심과 당나라의 필요에 의해 발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60세에 이른 영류왕은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의해 642년 10월 시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여러 대신들을 먼저 제거한 후,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가 영류왕을 시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당나라와의 대외 정책을 놓고 젊은 연개소문과 노회한 정치가 영류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영류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변화시키며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임금이라는 점이다.


참고문헌

김진한, <영류왕 대 고구려의 대당관계와 서북방정세>, [정신문화연구] 32-4집, 2009년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년 - 10년 전 필자가 쓴 이 책의 ‘영류왕의 대외 정책과 인물에 대한 평가’ 부분이 이번 글과 다르다. 이번 글이 현재 필자의 수정된 견해임을 밝힌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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