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0

2018. 4. 11. 02:16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0




점필재집 시집 제1권 / [시(詩)]    ㅡ 김종직(金宗直)



임 참판이 궁핍한 나에게 쌀을 보내주면서 술 빚을 재료라고 칭탁하여 말한 데 대하여 사례하다[謝任參判惠米周急托言釀酒之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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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술 바꿔 마실 만한 귀어가 있으랴 / 豈有龜魚堪換酒
스스로 창자를 채울 만한 문자도 없는데 / 亦無文字自撑腸
공이 이제 쌀 주어 우리 도를 어여삐 여기니 / 公今指廩憐吾道
내 아내 얼굴 다시 환해진 게 우습네그려 / 笑殺山妻面復光
[주-D001] 어찌 술……귀어가 있으랴 : 
귀어(龜魚)는 황금으로 만든 귀형(龜形)과 어형(魚形)의 완구(玩具)인데, 이백(李白)의 대주억하감시(對酒憶賀監詩)의 서(序)에 “태자빈객(太子賓客) 하감(賀監: 비서감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이름)이 장안(長安)에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보고 적선인(謫仙人)이라 부르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금귀(金龜)를 풀어 술과 바꾸어 마시면서 서로 즐겼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 창자를 채울 만한 문자 : 
소식(蘇軾)의 시원전다시(試院煎茶詩)에 “창자와 배를 채울 만한 문자 오천권은 필요없고 항상 충분히 자고 해 높이 올랐을 때 차 한잔만을 바라노라[不用撑腸拄腹文字五千卷 但願一甌常及睡足日高時]”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점필재집 시집 제3권 / [시(詩)]


간원 제공의 운에 차하여 절도사를 대신해 짓다[次諫院諸公韻代節度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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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절 갖고 영남에 와 외람되이 장수가 됐건만 / 分符嶺表忝元戎
맑은 꿈은 항상 대궐 안으로 달려가노니 / 淸夢常馳魏闕中
그 누가 자미의 꽃 아래 나그네만 하리요 / 誰似紫微花下客
봄바람에 술동이 비는 것도 두렵지 않는걸 / 春風不怕酒尊空

이년 동안 남쪽 끝에서 매화를 구경하면서 / 二年南裔看梅花
부질없이 강산이 영가 같다고 말을 하지만 / 謾說江山似永嘉
약성과 유영은 서로 풍미가 워낙 다른데 / 藥省柳營風味隔
누가 고주가 엽차보다 낫다고 말을 했나 / 誰言羔酒勝煎茶
[주-D001] 자미의 꽃 아래 나그네 : 
자미는 곧 임금이 있는 대궐을 이르는 말로, 즉 조정에 있는 벼슬아치들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 강산이 영가……말을 하지만 : 
남조 송(南朝宋) 때 사령운(謝靈運)이 영가태수(永嘉太守)로 나갔을 적에 영가군에는 이름난 산수가 많았으므로, 사령운이 산수를 대단히 좋아하여 여러 현(縣)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완상하고 가는 곳마다 시(詩)를 읊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六十七》
[주-D003] 약성과 유영 : 
약성은 중서성(中書省)의 별칭이고, 유영은 한(漢) 나라 때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군영(軍營)인 세류영(細柳營)의 준말로, 전하여 장군의 막부(幕府)를 이른 말이다.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김종직

金宗直  
 
요약 테이블
출생 1431년
사망 1492년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사후인 1498년의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무오사화 당시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많은 제자가 죽임을 당했다.
중종 때 신원되고,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사림의 영수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표방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 것은 100여 년이 지나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림(士林)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는 정도전 등 관학파의 노력이 컸다. 이후 관학파들은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경국대전》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면서 유교 윤리의 기틀을 닦고 조선의 제도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이 조선다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즉위 후 사림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사림은 15세기 중반 이후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세력들을 말한다. 이들은 투철한 성리학적 이념을 발판으로,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성리학의 도통(道通)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진다. 이 도통론은 처음부터 존재했다기보다는 훗날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몽주에게 길재가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니었고, 길재가 선산으로 낙향한 후에는 선산 출신인 김숙자가 그에게서 배웠다.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은 임지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 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 정여창, 이승언, 홍유손, 김일손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김종직은 외가인 경상남도 밀양에서 아버지 김숙자와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대학자로 문장과 역사에 두루 능했다. 조선이 세워진 이후 선산 교수, 성균관 사예 등 많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낙향한 후 제자들을 양성했다. 아버지의 이러한 가르침은 1486년에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할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그가 쓴 많은 책들이 사라져 그의 학문적 성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가 성리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열여덟 살 때이다. 그는 《주역(周易)》을 읽으며 성리학의 근원을 알게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은 더 깊어졌다.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나무토막을 베고 잤으며 껍질을 벗긴 조밥으로 끼니를 이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효심에 혀를 내둘렀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그는 사가독서하고, 1462년 승문원 박사로 예문관 봉교를 겸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경연을 열어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했을 때 선발된 19명의 선비들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그가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그 사정을 딱히 여겨 함양 군수와 선산 부사를 맡겨 귀향할 수 있도록 해 줄 정도였다. 그가 향리에 머무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일생 중 가장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가 이런 외직(外職)을 원한 것은 조정에서의 복잡한 파벌 정치를 피하고 소외된 지방 백성들을 살피면서 후진 양성에 힘쓸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학사루

최치원이 함양 태수였을 때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고 하여 학사루라 불렸다. 후일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재직할 때 이곳에 붙여진 유자광의 시를 적은 편액을 떼어내어 대신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이후 김종직의 문하를 ‘영남학파’라고 일컫는 것은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학자들이 이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정여창과 김굉필은 그의 학문을 이어받아 도학(道學)을 일으켰고,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일손은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485년(성종 16) 이후이다. 1478년 홍문관이 생기면서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기능이 갖추어졌고, 사림들이 삼사로 진출하면서 언로(言路)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사림파와 관학파의 학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사림들이 경학을 중시한 것도 그들의 입지가 확고해진 후의 일이다.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삼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했다. 사림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이 바로 김종직이다. 성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중용했으므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얼마 후 성종은 그를 조정으로 불렀다. 성종은 그에게 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등의 요직을 맡겼다. 이듬해에는 승정원 부승지라는 초고속 승진에 이어 우부·좌부승지를 거쳐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그러자 훈구대신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젊은 신진 인사가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데에다 직위도 오르자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성종이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그에게 맡기자 훈구파들의 소외감은 극에 달았다. 그러자 오랫동안 대제학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거정이 물러나면서 적임자인 김종직을 제외시키고 홍귀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할 수 있다는 당시의 전례를 이용하여 김종직을 따돌린 처사였다. 김종직으로서는 대제학의 꿈을 잃었지만 성종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와 형조 판서 등을 거치면서 공정하게 일처리를 해 나갔다. 그러던 중 김종직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492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던 전국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그의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일찍이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이 전라도 감사로 있을 당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의 한 기생집에 머물러 논 일이 있었다. 김종직의 문하인 김일손이 이 일을 사초(史草)에 기록했고, 이극돈은 삭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렇듯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마침내 폭발하게 되었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아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의 대부분을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숙박을 한 일이 있었다. 그날 밤 신선이 칠장복을 입고 나타난 꿈을 꾸고 나서 그는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단종에 비유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지었다. 이것이 〈조의제문〉이다. 이는 세조와 그 후손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건은 당시 사관이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기록해 스승을 칭찬하면서 비롯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 유자광, 노사신 등이 연산군에게 이것은 “선왕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역무도한 글”이라고 간언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은 능지처참되었으며 김굉필과 정여창 등 40여 명이 참해지거나 유배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존의 집권 세력인 유자광, 정문형, 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삼사에 진출해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행태를 비판해 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김종직은 중종반정 이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도학 사상은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조위, 이맹전, 이종준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는 세조와 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사림 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사림의 영수’로 추앙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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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을 통해 한국사에 깃든 생동감과 역동성, 그리고 인간성을 발견하면서 쉽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특히 인물이 관여된 중심적 사건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펼쳐보기

전체목차
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청백리의 표상, 황희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사림의 영수, 김종직비운의 폐왕, 연산군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동방의 주자, 이황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홍길동의 아버지, 허균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정조의 남자, 홍국영실학의 아버지, 박지원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님의 침묵〉, 한용운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ㅡ 자료 출처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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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近肖古王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375년

   백제 제13대 왕(재위 346~375년).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4세기 중반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아직기, 왕인 등을 일본에 보내 학문과 각종 문화를 전파했다.


< 해상왕국을 이루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제13대 왕이다. 그는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적 기틀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백제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닦았다.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된 후 한반도의 정세는 복잡해졌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위치한 지역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하게 영토 분쟁을 벌였고, 신라-가야-왜는 필요에 따라 고구려, 백제와 각기 교섭을 맺었다.

   4세기 중반 백제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갑자기 피살된 이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내분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당시 백제의 지배층은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구-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알력싸움이 한창이었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당시 왕위 계승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근초고왕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근초고왕은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표기된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근(近)’ 자를 덧붙여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았다’는 뜻을 왕명에서부터 밝힘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이는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그는 그동안 왕권이 미치지 못했던 지방을 직접 통치할 수 있도록 구역을 나누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중앙집권화를 꾀한 것이다.

   내부 조직을 정비한 근초고왕은 밖으로 눈을 돌렸다. 우선 남쪽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전라도 지역 전체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통합은 공납을 받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현지 지배층의 권위를 일정 부분 보장해 주는 대신 공납을 받은 것이다. 이는 5세기 들어 이 지역에 대형 옹관묘가 조성되고, 그 안에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 칼을 부장할 만한 지배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근초고왕은 소백산맥 너머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백제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한 까닭은 왜와의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364년(근초고왕 19) 백제 사신 3명이 왜와의 통교를 위해 파견됐지만 해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2년 뒤 왜에서 사신이 찾아오자 근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보물창고를 열어 진귀한 물건을 보여 줬다. 왜 사신들의 교역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결국 근초고왕은 왜와의 독점 교역권을 확보했다.

   백제는 남으로는 왜국과의 무역을, 북으로는 북진 정책을 통한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따라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는 고구려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369년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에서 처음 맞붙은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371년 평양성 전투로 최고조에 이른다.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했다. 이제 역사상 최대 영역을 확보한 백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옛 땅에서 주도권을 잡아 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동아시아 국제 교역도 손에 넣게 되었다.

근초고왕 재위 시 영토  
                 

  백제는 정복 활동에 힘을 기울이면서도 외교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고구려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근초고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근초고왕의 백제는 한반도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또한 중국 동진(東晋)과의 외교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동진 계통의 발 3개가 달리고 자루가 있는 냄비인 초두(鐎斗), 석촌동 고분에서 출토된 동진의 청자와 배 젓는 노는 당시 양국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음을 입증한다.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된 것도 이런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제가 랴오시(遼西) 지방에 진출한 시기도 근초고왕 때이다. 호족의 침입으로 중국이 분열된 틈을 타 그는 랴오시 지방으로 진출하고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 랴오둥(遼東)으로 진출하려던 고구려를 견제하는 동시에 무역기지를 확보해 상업적인 이득을 취한 것이다. 한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를 백제가 계승한 셈이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방의 무역기지와 한반도, 일본에 있는 백제계 세력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도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의 활발한 해상무역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절벽 위에서 발견됐는데 수성 뒤쪽 숲에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이 깔려 있었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를 향해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가야와 왜는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게 되었다. 특히 왜왕은 낙랑과 대방이 축출된 이후 선진 문물을 공급받을 수 없던 차에 백제가 교역을 중개하기 시작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백제가 일본 열도에 해양 거점을 개설하고 왜왕과 긴밀한 교역을 펼쳤던 것이 바로 이즈음이다. 근초고왕이 369년 왜왕에게 보냈다는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인 증거이다.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에는 금석문자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 해석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제후)’인 왜왕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칠지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철제 칼로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근초고왕 시절 백제는 왜에 다양한 선진 문물을 전수했다.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왜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유학 사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강력한 왕권과 외부 교역로를 확보한 근초고왕은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국사책 《서기(書記)》를 짓게 했다. 왕실의 계보를 정리하는 한편 그 신성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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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있으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그 동안 쓴 책으로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가 있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쓴 책으로 『천년을 여는 미래인 해상 장보고』『새롭게 본 발해사』『고구려 문명기행』『발해의 역사와 문화』등이 있다.접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신의주>(공저) 등이 있다.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