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1. 14:13ㆍ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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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시집 제6권 / [시(詩)] ㅡ 김종직(金宗直)
또 세 수를 짓다[又三首]
도 닦은 일본인으로 누가 그대만하랴 / 扶桑學道孰如君
근래에 나와서 인간 세계를 밟아보고는 / 邇來脚踏人間世
다시 송창에 가서 흰 구름을 주관하겠지 / 還向松窓管白雲
해운대 아래에는 뜬 하늘이 잠겨있고 / 海雲臺下浮天浸
서복사 앞에는 낙엽진 나무에 바람 불어라 / 徐福祠前落木風
기억하건대 천 길의 오배에 당도하거든 / 記得千尋鰲背泊
금계가 막 울면 해 바퀴 붉게 오르리 / 金雞初叫日輪紅
원교산 방호산을 차례로 지날 터이니 / 員嶠方壺取次過
생각컨대 밤에 좌선하여 상량하는 가운데 / 遙憶夜禪商搉處
한 병의 가을 물로 스스로 차를 끓이리 / 一甁秋水自煎茶
- [주-D001] 불이문 :
- 대승교(大乘敎)의 별칭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준말로, 전하여 불문(佛門)을 이른 말이다.
- [주-D002] 오배 :
- 큰 자라의 등에 얹혀 있다는 동해(東海)의 신산(神山)을 말한다.
마을에선 밤에도 문 열어 놓누나 / 窮閻門夜開
솥 쓰러져 먼지조차 안 일어나고 / 甑傾塵不動
금 소리 늘어져서 꿈 더디 깨네 / 琴倦夢遲回
홀로 턱을 괴고 보는 산은 가깝고 / 拄笏殘山近
차가 끓자 아전은 재촉을 하네 / 煎茶小吏催
걸상 내려 날 맞이해 시를 지으매 / 尋詩叨下榻
죽은 심회 일으키려 재 불어보네 / 心死强噓灰
- [주-D001] 누각 …… 지내고 :
- 고을 수령이 정사를 맑게 해서 고을이 편안한 것을 말한다. 한나라 때의 양리(良吏)였던 급암(汲黯)이 동해 태수(東海太守)로 있으면서 세세한 절목을 따지지 않고 대체(大體)만을 다스리기를 힘썼다. 그러자 자신은 병으로 방 안에 누워 있는 채 나가지 않아도 동해 고을이 잘 다스려져 백성들이 평안하였다고 한다. 《漢書 卷50 汲黯傳》
- [주-D002] 마을에선 …… 열어 놓누나 :
- 고을 안의 치안이 잘 유지된다는 뜻이다.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재상이 되어 다스린 지 3년 만에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닫아걸지 않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았다고 한다.
- [주-D003] 솥 …… 일어나고 :
- 수령이 청빈(淸貧)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때 범염(范冉)은 자가 사운(史雲)으로, 내무현(萊蕪縣)의 장(長)이 되었다가 뒤에 당인(黨人)의 금고(禁錮)에 걸리게 되었는데, 생활이 아주 청빈하여 궁하게 살면서도 태연자약하였으며, 말과 용모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시루에 먼지가 이는 범사운이요, 솥에 고기가 사는 범 내무이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 하였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冉》
- [주-D004] 금(琴) …… 깨네 :
- 고을 수령의 정사가 간략하고 형옥(刑獄)이 맑아서 다스리지 않아도 잘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인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적에 방 안에서 악기나 뜯고 지내면서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呂氏春秋 察賢》
- [주-D005] 홀로 …… 가깝고 :
-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는 성품이 몹시 호방하여 구애되는 바가 없었다. 일찍이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참군(參軍)이 되었을 적에 정무를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환충이 이에 대해 말하자, 왕휘지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다가 홀로 턱을 괴고 말하기를, “서산(西山)에 새벽이 오니 기운이 맑고 상쾌하다.” 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 [주-D006] 걸상 …… 맞이해 :
- 선비를 예우하는 것으로, 김장(金墻)이 자신을 잘 대우해 준 것을 뜻한다. 동한(東漢) 때 진번(陳藩)이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었을 때 다른 빈객들은 일체 접대하지 않으면서, 오직 남주(南州)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가 올 때만 걸상 하나를 옆에 놓아두고서 서치를 맞이하였으며, 서치가 떠난 뒤에는 그 걸상을 즉시 치웠다고 한다. 《後漢書 卷66 陳蕃列傳》
요약 1545(인종 1)∼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사옹원정 조치우(曺致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조효연(曺孝淵)이고, 아버지는 증좌참찬 조윤신(曺允愼)이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중우(仲羽)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풀려나와 금오랑(金吾郎)에 특별 임명되어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다. 그 뒤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고, 1593년 평양싸움에 참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대구부사·성주목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지산집』·『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가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으나,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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