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6. 21:57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대조대왕의 동순기록과 책성의 위치
다음글은 요동반도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던 옥저의 진실을 밝혀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글이다. 《삼국사기》라는 명색이 정사에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순기록에는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렀다는 기록과 동옥저, 남옥저, 남해등의 위치며 책성을 순방하며 위무하였다는 기록들이 있었지만 그 책성의 위치가 어디었는지 조차 애매하여 더불어 등장하는 동옥저.남옥저.남해.동예등의 위치와 낙랑국등의 위치가 어디었는지를 가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통설에서 주장하는 옥저등의 위치가 함경도와 강원도가 될수 없다는 이의가 제기됨으로서 옥저등의 위치를 요동반도에서 찾게되면서 책성이 봉황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사서들의 기록을 통해서 요동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추적한결과 정사인 《삼국사기》에서는 많은 기록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하는수 없이 다른 종류의 사서를 통한 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남당선생의 유고 《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에서 몇가지의 핵심 사실들을 발견하고 대무신왕과 태조대왕의 동순기록에 대입한 결과 피차 부족하였던 부분들을 파악하게 된것이다. <추모대제기>의 공인여부가 아직은 요원하지만 그 내용의 일부 기록은 어느 사서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중요한 열쇠 역활을 할것이라는 점은 확신한다. 쓰래기장에서 찾아낸 다이아몬드와 같은 사례들이 더 많이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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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시의 좌측으로 보이는 남여예군이란 표시가 구 예맥조선의 피란지였다. 진번지역이다..한나라는 이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3년만에 철수한 한사군시대 진번군이었다. 이곳에 있던 28만명의 백성들이 한나라의 팽오라는 장사꾼의 꼬임에 빠져 요동군으로 이동하였다가 사기당한걸 알고 예군이 자살하자 그의 아들 울상시가 요동 동부도위로 부임한 팽오를 척살하고 부여로 합류하게 된다. 남어지 백성들이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옮겨 다시 석성도에 건국한것이 동예다. 통설대로라면 한반도의 강릉으로 알려져 있다.이곳은 준왕이 옮겨왔던 마한도와 가깝다.
청나라에서 작성한 대청연해도 (크릭하면 확대 가능)
대고산항(大孤山港): 이곳을 남옥저라 하고 북부 마한이라고 한 기록은 요지음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질타를 받고있는 《남당유고》의 <백제왕기>에 나와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어떤 사서도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지 못한 남옥저의 위치를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하고 또 방향까지 병기하여 현재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켜놓은 배려는 참으로 감명깊은 행동이 아닐수 없다. 남옥저는 비교적 기록도 많지 않지만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해석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게 사실이고 따라서 무리한 억지 주장이 난무하였던것도 사실이다.그동안 수많은 설전과 토론으로 피차의 가슴을 멍들게하였던 사연들일랑 깨끗이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흩어진 역사의 조각들을 복원하는데 열쇠가 되기를 바란다. 이곳은 초대부통령 이시영선생께서 일제에 잃었던 조국을 수복하기위하여 전 재산을 쾌척하여 설립한 만주신흥군관학교를 세웠던 바로 그 장소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6.25
남침전쟁때 소련의 공군이 중공군으로 가장하여 한국전에 참가하였던 바로 그 비행장이 이곳에 있다. 특히나 당시 경상북도 안동땅에 계시던 동포들께서 신흥군관학교에 재정적 후원을 많이 하셨다는 기록과 이곳이 단동 이전에 안동이었다는 사실은 경북의 안동과 끈끈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하나 간과할수없는 사실은 항일독립운동과 더불어 역사광복운동을 벌리던 《한단고기》의 주인공들이 이곳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사실이다. 초대주인공인 계연수선생은 일제 경찰에게 암살되어 압록강에 시체가 유기되었고, 그의 제자 이유립선생은 수차에 걸쳐 체포되어 수감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월남하여 한단고기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자유지>를 발행하여 역사찾기 운동을 벌리던 박창암 장군은 간도출신으로 이유립.안호상. 임승국.문정창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들이 서로 얼키고 설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그들의 활동은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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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리장성 종점도의 동쪽이 책성 입구이고 남쪽 넓은곳이 남옥저인 대고산이다. 관구검군에게 쫓긴 동천왕이 도착하였던곳이 지도에 관전(寬奠)으로 표시된 남옥저로 추정된다. 동천왕은 왕으로 책봉되기 전에는 소금장사였다. 이곳은 대염주와 소염주로 다량의 소금 생산지다. 혹시 그가 소년시절을 남옥저에서 보냈을 공산이 크다.
근래에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들이 형편없는 대접을 받고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건 이미 알고 계실것이다. 그런데 구산은 남당선생께서 남겨주신 《추모대제기》에서 근거를 보충하여 태조대왕이 동쪽으로 책성을 오가며 활동하던 내용을 풀어보았다. 그 내용을 풀어본 결과는 책성은 봉황성이고 고구려의 건국지는 천산산맥의 서쪽이며 동옥저는 천산산맥의 동쪽이고 낙랑국은 동예의 서쪽이고 동옥저의 남쪽이며 남옥저는 동옥저의 남쪽이고 동예의 동쪽이라는 것과 남해는 이 낙랑국이 있던 요동반도의 남쪽바다 즉 장산군도를 지칭하는것으로 추정하였다. 《삼국사기》와 《추모대제기》란 두개의 사서를 혼합하여 여러개의 사실을 추정한것이다. 조금은 복잡한듯 하지만 오래 새겨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
**二十年 王襲樂浪滅之---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추모대제기>대무신대제 호동왕자편으로 보충하였다. 이 사건은 서기47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시길의 낙랑국은 이때 대무신에게 망하여 북쪽으로 대피하여 남옥저로 가게 된다. 그리고 7년뒤 서기 54년에 호동왕자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추모대제기>>대무신데제
○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북으로 도망하여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二十七年 春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 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村 恐當作林) 號爲大武神王 ---이 기록에서 살수 남쪽이라는 기록이 대무신왕조와 공통됨
《삼국사기》대조대왕
高句麗本紀 第三 大祖大王 次大王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太后 扶餘人也 慕本王薨 太子不秒 不足以主社稷 國人迎宮繼立 王生而開目能視 幼而岐嶷 以年七歲 太后垂簾聽政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동옥저의 남쪽에는 살수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가 있다는 기록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 有差 遂紀功於巖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
왕이 동순하여 책성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추모대제기>동명대제조와 대무신대제조에서 공통됨을 알수 있고 그 동순길에 낙랑이 있다는것과 낙랑은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섬이라는 사실을 추정할수 있음.
**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이 대목은 고구려의 강역을 설명하는데 통설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라서 거의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동옥저의 남쪽에는 남해라는 바다가 있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동순하던 왕들이 요동반도의 남쪽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낙랑으로 건너던 내용을 보충하는 내용임.
<추모대제기> 동명대제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而<馬黎>敎<溫祚>,上與<召>后,時往聽之.
**◎15년(단기2311년/BC23)무술, 5월, 동쪽으로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자, 배타고 바다에 떠서 <시길>에게 들려 그의 딸 <작>을 얻었다.
<추모대제기>대무신대제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추모대제기>>대무신데제
○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북으로 도망하여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二十七年甲寅,四月, <好童>太子將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女爲之破鼓角而迎, 王師大軍自<沃沮(尼古□)>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歸, 以其地爲<竹苓郡>. <樂浪>自<柴吉>四世八十餘年而國除. 七月,<大解>太子薨.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호동>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의 새 도읍(압구)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좋아지내었더니, 그녀가 <호동>을 위해 고각을 망가뜨리고 (호동을 성 안으로) 받아들이니, 왕이 대군을 <옥저>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서 배를 타고 건너가 그 도읍을 뿌리뽑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았더니 귀복하였고, 그 땅은 <죽령군>으로 삼었다. <낙랑>은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되었다. 7월, <대해>태자가 죽었다.
***시길의 낙랑국은 AD47년 대무신대제에게 망하고 시길은 남옥저로 패주하였었는데, 그들은 다시 호동왕자사건으로 AD54년에 망하게 된다. 따라서 이곳이 압록강 입해구의 서쪽에 있던 남옥저의 인근 대록도이기가 쉽다. 그렇다면 죽령군의 위치도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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