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故地에서 발견된 負兒巖의 정체 / 역사문 九山 님

2013. 8. 6. 22:06우리 역사 바로알기

 

 

 

 

   백제는 백가가 바다를 건너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건국하였다고 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대방고지란 대방군이 만들어지기 전의 백제의 초기 건국지인것이다.그런데 그 대방고지에는 부아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그들이 터전을 잡을 때 이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본 형세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그리고 이 땅을 왜 대방으로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 물이 마치 허리띠처럼 사방에 둘려 있어 대방 (帶方)이라 불렀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권제23(백제본기 제1)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하였는데 신비스러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회답하였다.“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서기전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서기전 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36년(서기 18)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년(서기 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왕이 훙(薨)했다.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발표한 남옥저의 부양과 연결이 된다.남옥저가 만약 함경도 원산 근처에 있었다면 20여가가 한산으로 귀순이 불가능하다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등주 북쪽 요동반도의 남쪽해중에 위치한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요동반도의 남부 일대를 조차하여 사실상 영토로 관리한 관동주의 영역이다.지도의 북쪽으로 그어진 적선 이남이다.물론 장산군도가 포함되어잇다.이 장산군도에는 삼한시 왜로 알려진 해양도가 포함되어있다.그리고 일본은 청일전쟁시 이 해양도를 근거지로 여순을 공격하였다.


    (아래) 이 지도안에 3세기 전후의 열국들의 위치들이 담겨 있다. 엉뚱한데 가서 싸우지들 마시고 《삼국지》 나 《통전》. 《구당서》 《신당서》. 《한서》. 《한원》등에 기록된 황당하게만 보이던 기록들을 확인 하시기 바란다. 동옥저가 왜 동북은 좁다고 하였는지, 왜 삼한이 바다안에 있다고 하였는지, 왜 왜가 그렇게 자주 신라를 공격하다가 5세기 이후 부터는 공격을 멈추었는지, 왜 왜의 위치를 대방의 동남쪽 대해에만 기준을 두었는지, 임라를 왜 계림의 서남쪽이라고 하였는지,원 대마도가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었는지, 바다물범(海豹)이 왜 동예에서 많이 잡힌다고 하였는지, 등등...

 

 

    대방의 동남쪽으로 산재한 섬들의 위치를 위성사진으로 검색한 지도다.이 사진에 의하면 백제의 초기 건국지 대방고지는 북쪽의 내륙과 가까워 낙랑과 말갈의 침략을 수시로 받자 다시 동남쪽의 마한땅으로 거점을 옮긴것이다.이후 백제는 마한의 54개국을 통합하여 삼국과 대치한다.나라의 면적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사료들의 기록대로 방향과 위치를 비교하면 더 이상 해당되는곳을 찾을 수  없다.


 

 

    아기를 업었을까 아니면 개나리 봇짐을 졌을까 좌측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이 바위는 대방고지로 알려진 광록도의 동쪽에 있다.두개의 바위 바위 사이는 마치 석문으로 보인다.라당전투에서 석문전쟁을 상기시키는 바위다.현지의 이름은 장군초(將軍礁)다.

 

 

    사진설명: (위) 백제초기에 등장하는 부아악을 우리들은 북한산에다 비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바위인지를 밝히지 못한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초기 백제의 건국지로 알려진 대방고지(帶方故地)광록도의 동쪽 입구에 버티고 서있는 바위다. 마치 바다에 서있는 문과 같다고 하여 일명 석문으로 불리기도하고  오른쪽을 전면으로 보면 마치 장군의 얼굴 같다고 하여 장군초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왼쪽을 전면으로 하면 등에 아기를 업고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엄마처럼 보여 부아악(負兒岳)으로 불렀던 것으로 본다.이 사진은 촬영하는 방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 장면은 장군의 얼굴을 위주로 촬영된 것이다. 

    ***만약 한성을(서울)백제의 초기 건국지인 대방고지(帶方故地)로 고집한다면 한강 이남의 한국 영토 모두가 대방군의 속방이었다고 하였으니 한때 위나라의 속방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왜(倭) 또한 마찬가지다.그러나 한성(서울)은 당시 대방고지가 될 수 없는것이다.왜냐면 당시 사료의 기록들이 대방고지가 요동반도의 남족바다에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한사코 이러한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언제 한성이 위나라의 통치를 받았단 말인가.

 

    《삼국지》<위지30>한전 에 의하면 대방군을 만든사람은 후한의 헌제 건안때(196~220)요동의 공손강에 의해서다.이는 환제와 영제때 이르러 한(韓)(예)이 강성해져 통제불능이 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흘러들어갔다.이를 목격한 공손강은 건안중(196~220) 둔유현 남쪽에 있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고 공손모와 장창등을 파견하여 흩어진 유민들을 모았다.이들로 병을 이르켜 한(韓)(예)을 치니 한으로 들어갔던 구민들이 점차 밖으로 나왔다.이후 왜와 한은 대방의 속방이 되었다.경초중(238)위 명제는 대방태수 유기와 낙랑태수 선어사를 몰래 바다를 건너 파견하여 대방군과 낙랑군등 두군을 평정하였다....하략《삼국지》<위지>한전

 

桓、靈之末,韓(濊)強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 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 鮮於嗣 越海定二郡,...하략《삼국지》<위지>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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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견??만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