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삼천사(三川寺) 계곡 과 삼천사(三千寺) 外 / 서울포스트 기사

2018. 12. 12. 01:36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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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북한산 삼천사(三川寺) 계곡 과 삼천사(三千寺)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3/11/02 23:36:11)  


[탐방] 삼각산 삼천사(三千寺)와 삼천사(三川寺) 계곡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잘 알려지지 않은 삼천사계곡 폭포는 아기자기한 멋을 준다. 향림담폭포 처럼 비스듬히 누운 와폭(臥瀑)으로 자체의 완성도에서는 북한산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저 위 삼천사지와 함께 다시 찾을 곳이다.
ⓒ20131102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나월봉 아래 펼쳐진 삼천사계곡 ⓒ2012 서울포스트자료


  삼각산 삼천사(三角山 三千寺)는 조선시대 북한산 지도에 삼천동(三川洞)으로 표시돼 있는 계곡에 위치한다. 또 '삼천사지(三川寺址)'라는 옛 절터는 현 삼천사(三千寺) 보다 훨씬 높은 위치(용출봉,용혈봉,증취봉 기슭)에 있다.

개인적 생각으로, 옛 삼천사의 '삼천(三川)'은 글자의 형상에서 가로(三) 와 세로(川) 의 대비와 합치를 통한 우주원리를 나타내지 않았나,유추되며, 실제 세 개의 개천(①문수봉쪽에서 시작한 계곡, ②사모바위쪽에서 시작한 계곡, ③나월봉쪽에서 시작한 계곡)이 삼천사 계곡을 만들고 있다.

   폐사지 '삼천사(三川寺)'는 1960년대부터 수차례 발굴했으며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자료를 보고서야 유서 깊은 사찰인 것을 이제 알았으니, 이게 또 나를 흥분시킨다. 없어진 절터 흔적에서 여주 고달사지, 양주 회암사지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평지에 있는 여타 폐사지와는 달리 험준한 의상봉능선 상부에 위치하면서 한때 3,000여 명의 군중이 수도정진한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폐사된 다른 대형 사찰처럼 필시 동족끼리 종파나 이념 분란이 틀림없다. 진즉 알았더라면 지난달 북한산 남방능선을 돌아 이 계곡으로 내려올 때 탐방했을텐데.

   사실 그날, 해 떨어진 삼천사계곡을 내리면서 등산로로는 적합치 않다고 나름 생각했다. 능선이나 봉우리 기점도 아니고 나월봉에서 내려다보면 수직벽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산행만 힘들고 볼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찾을려 했던 것은 계곡의 아기자기한 폭포(와폭 臥瀑)와 마애불(磨崖佛 마애여래불 磨崖如來佛) 때문이었다.

   삼천사(三千寺)에 있는 마애불1979년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이다. 문제는 현 삼천사(三千寺)와 옛 삼천사(三川寺)의 연관성인데, 대체적 시각은 연관성이 '없다'이지만, 마애불 옆 옛 삼천사 암자를 1960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아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도 없다.

   현 삼천사는 특이한 지형에 세워졌다. 의상봉능선과 응봉능선이 만든 협곡의 개천 바로 옆에 위치해, 대부분의 사찰이 둥그런 땅과 지형을 기반으로 하거나 높은 곳에 지어진 것과 사뭇 다르다. 또 마애석불을 모신 기도장과 산신각은 아예 계곡을 복개하여 그 위에 축조되었다.

   시간이 촉박해 뛰듯했지만 삼천사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구불구불 정다운 길목의 산세와 개천, 그다지 힘들지 않으며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위치해, 오가며 들어오는 풍광과 상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길이다. 진짜 절집에 간다는 기분이 들었으니, 옛날 행랑 메고 실같은 길을 한가히 걸었을 스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나중 저 꼭대기 삼천사 터 를 찾을 땐 수행정진 길이 될 것이다. (龍) 



이하 검색 등:

  삼천사(三千寺,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津寬外洞 산 34번지)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 1960년 옛 삼천사(三川寺)의 암자터에 중건했다.

삼천사(三川寺)는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흥국사(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하나, 그 뒤의 연혁이 전하지 않는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삼천사(三川寺)는 한때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된 암자터에 1960년에 진영이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세존 진신사리) 3과를 얻어와 봉안한 석종탑과 나한사리가 봉안된 오층탑이 있다.

   현재 사용한 사찰 이름(삼천 三千)은 과거 삼천사(三川寺)가 삼천(三千) 여 명이 수행할 만큼 대가람이었던 데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 진입로에서 본 삼천사계곡. 구름에 덮힌 의상봉부터 용출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봉능선 
ⓒ서울포스트

▲ 미타교(彌陀橋)에서 구름속 용출봉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 '적멸보궁'으로 위상을 가졌으나,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찰은 종로의 조계사 를 비롯해 많다.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은 ①양산 영축산 통도사, ②평창 오대산 상원사(월정사), ③인제 설악산 봉정암(백담사), ④영월 사자산 법흥사, ⑤정선 태백산 정암사 에 있다. 적멸보궁이 있는 사찰은 통상 불단만 갖추고 불전에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다. ⓒ서울포스트

▲ 나한사리 가 봉안된 오층석탑 ⓒ서울포스트

▲ 새로 조성된 십층석탑 뒤로 용출봉 이 아직 구름에 싸여있다. 
유물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야 가치로 남는데, 새 것은 언제나 어색하다. ⓒ서울포스트

▲ 대웅보전 뒤로 모습 드러낸 용출봉 ⓒ서울포스트

▲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오층석탑 ⓒ서울포스트

▲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서울포스트



▲ 좌측 나월봉과 우측 나한봉 ⓒ서울포스트

▲ 세존(석가모니,부처님)진신사리가 봉안된 종형부도탑 ⓒ서울포스트


▲ 계곡에 쌓은 돌탑들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삼천폭포, 삼천계곡폭포, 삼천사계곡폭포, 삼천동폭포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돌 캐낸 흔적들 ⓒ서울포스트

▲ 법고와 범종 ⓒ서울포스트

▲ 탑 좌측 용출봉,용혈봉,증취봉, 우측은 나월봉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잘 알려지지 않은 삼천사계곡 폭포는 아기자기한 멋을 준다. 향림담폭포 처럼 비스듬히 누운 와폭(臥瀑)으로 자체의 완성도에서는 북한산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저 위 삼천사지와 함께 다시 찾을 곳이다. ⓒ20131102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집입로에서 본 삼천사계곡. 구름에 덮힌 의상봉부터 용출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봉능선. 가운데는 백화봉 ⓒ서울포스트
▲ 미타교(彌陀橋)에서 구름속 용출봉 ⓒ서울포스트
▲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 '적멸보궁'으로 위상을 가졌으나,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찰은 종로의 조계사 를 비롯해 많다.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은 ①양산 영축산 통도사, ②평창 오대산 상원사(월정사), ③인제 설악산 봉정암(백담사), ④영월 사자산 법흥사, ⑤정선 태백산 정암사 에 있다. 적멸보궁이 있는 사찰은 통상 불단만 갖추고 불전에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다. ⓒ서울포스트
▲ 새로 조성된 십층석탑 뒤로 용출봉 이 아직 구름에 싸여있다. 유물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야 가치로 남는데, 새 것은 언제나 어색하다. ⓒ서울포스트
▲ 대웅보전 뒤로 모습 드러낸 용출봉 ⓒ서울포스트
▲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오층석탑 ⓒ서울포스트
▲ 보물 제657호 로 지정된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서울포스트
▲ 좌측 나월봉과 우측 나한봉 ⓒ서울포스트
▲ 세존(석가모니,부처님)진신사리 가 봉안된 종형부도탑 ⓒ서울포스트
▲ 계곡에 쌓은 돌탑들 ⓒ서울포스트
▲ 삼천폭포, 삼천계곡폭포, 삼천사계곡폭포, 삼천동폭포 ⓒ서울포스트
▲ 돌 캐낸 흔적들 ⓒ서울포스트
▲ 법고와 범종 ⓒ서울포스트
▲ 탑 좌측 용출봉,용혈봉,증취봉, 우측은 나월봉 ⓒ서울포스트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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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 북한산 삼천사(三川寺) 계곡 과 삼천사(三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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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북한산 아름다운 길⑩ - 삼천사계곡, 삼천사지, 의상봉능선(증취봉) 넘어 북한산성계곡 (1)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8/03 17:03:42)  



[탐사] 북한산 아름다운 길⑩ - 삼천사계곡 올라 삼천사지, 의상봉능선(증취봉甑炊峰 시루봉 593m) 넘어 북한산성계곡 (1)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①삼천사(三千寺) - 삼천사(三川寺)계곡 - 삼천사지(三川寺址) - 증취봉(甑炊峰 시루봉 593m) - ②[의상봉능선] - 부왕동암문 - 부황사지(부왕사지) - 백운동계곡 - 용학사 - 산영루(비석거리) - 중성문 - 북한산성계곡 하류] 


▲ 북한산 삼천사계곡 올라, 삼천사지 답사, 의상봉능선 넘어 북한산성계곡 내려. 
사진은 '삼천폭포(三川瀑布)'로 이름하고 싶은 멋진 폭포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작년 서쪽 덕양산(행주산성)에서 본 북한산. 가운데 잘록한 부분에 의상봉능선(증취봉과 나월봉 사이)의 부왕동암문이 있다. '부왕'은 부왕(扶王),부왕(扶旺),부황(扶皇)이 같은 의미로 혼용. '삼천사지(三川寺址)'는 사진의 정중앙 약간 아래에 있다. ⓒ2013 서울포스트자료




















































   진즉부터 산행계획으로 잡은 루트 는 삼천사(三川寺)계곡을 올라, 현 삼천사(三千寺)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보물제657호)을 뵙고, 삼천사지(三川寺址)를 탐사 후, 왕동암문을 거쳐 산성계곡으로 내려, 중흥사지태고사를 경유, 다시 산성능선으로 올라 만경대동벽(낭만길)으로 해서 도선사 쪽 우이동계곡으로 내릴 생각이었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삼천사터 에서 바로 증취봉을 타면서 너무 많은 관광(?)을 했던 터라 의상능선에 올라 밥을 먹으며 부득이 코스를 바꿔야 했다. 사진 200장 정도를 찍으면 통상 산행시간보다 두어 시간은 늦어진다. 또 삼천사지와 태고사의 역사적 가치를 봤을 때, 하루 두 사찰을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시기가 여름철이라 북한산을 대표할 만한 두 계곡을 사진으로 남겨 놓는 것도 좋을 것 같은 생각, 게다가 어제까지 비가 내려 이만한 물줄기를 보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었다.

▲ 미타교 위 동그란 봉우리 아래 현 삼천사(三千寺), 멀리 원추형 봉우리(용출봉)를 포함한 세 봉우리 밑에 옛 삼천사(三川寺) 가 있다. ⓒ서울포스트










































   북한산 최고 계곡은 역시 '북한산성계곡'. 백운대,만경대,노적봉 북쪽, 영취봉의 물줄기를 모아 개연폭포를 만들고, 문수봉,715봉,나한봉,나월봉,증취봉 북쪽의 물줄기가 만나 백운동계곡을 이룬 것이 새마을교에서 합류해 굉음을 내고 흘러 내려간다. 이게 다시 용혈봉,용출봉,의상봉의 물줄기를 더하고 하류에서는 원효봉 줄기까지 가세함으로 대단원을 이룬다.

   수량으로야 사기막계곡은 개천급이지만 군부대가 많아 출입금지, 산성계곡이나 우이동계곡도 보호되어 출입금지다. 암암리에 허용한 곳이 삼천사계곡,진관사계곡,정릉계곡,구기계곡,구천계곡 등인데 접근성에서 진관사계곡이 좋고, 삼천사 계곡은 한참을 걸어야 한다. 여기엔 와폭이지만 멋진 폭포가 있다. '삼천폭포(三川瀑布)'라 명명해도 좋을듯. 지명의 삼천(三川)①사모바위,승가봉 일원, ②문수봉 일원, ③나월봉,증취봉 일원의 '세 물'길을 말하며, 옛 삼천사(三川寺)도 여기서 유래했을지 싶다.

   삼천사(三川寺)계곡삼천동(三川洞)이라고 하나 원래 '부왕동(扶王洞)'이다. 부왕동은 증취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삼천사계곡을 만들고, 그곳 옛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神穴寺, 현 진관사) 스님의 기지 로 임금(고려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해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이름되었다고 한다.

   애쓰고 삼천사지까지 찾아서 다시 내려 부왕동암문으로 오르느니 바로 능선을 타고 싶었다. 산객중 한 사람이 삼천사지(거북이)를 알고 그쪽은 바위구간이라서 힘들거라고 귀뜸도 해줬다. '대지국사법경탑비 의 귀부 와 이수' - 이렇게 긴 글자가 제대로 된 명칭이다. 이미 정부 주도로 발굴도 했다지만 시간이 멎은 듯한 공간 속 수풀에 방치돼 덩그랗게 앉아있는 귀부(이 시기 양식은 거북등 에 용머리라고 한다). 딱 천 년전의 자태를 지니고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잡목을 몇 개 꺾는 것, 그리고 나중엔 주변 쓸데없는 수풀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북이와 물 한모금씩 나누고 암릉을 타기 시작했다. 역시 남들이 잘 '가지않는 길'. 슬랩 보다 높고 암벽보단 낮은 곳에 누군가가 로프 를 내려놨다, 고맙게.

아래서 볼 때 용혈봉으로 봤는데 깍아지른 암봉은 올라보니 증취봉에 속해 있다. 능선을 탄 산객들 강아지바위라고 애칭을 둔 바위.. 이쁜 강쥐? 웃기고 있네.. 와보면 오갈 데가 없는 삼면이 절벽이다.

   증취봉(甑炊峰 시루봉 593m) 증봉(甑峰) 이라고도 한다. 시루처럼 생겨서 '시루봉', 솥을 걸어놓고 불을 땐 모양이라고 해서 '증(솥단지,시루) 취(불땐다)'라고 명명. 애칭인 '눈썹바위'는 이 '솥단지'를 보고 붙여준 이름. 눈썹바위는 증취봉 정상 약간 아래에 있어 의상능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삼천사계곡으로 오르면 시루를 걸어놓은 듯한 모양이 선명하다. 북한산 봉우리 중 이름도 제일 난해하다. 아마 옛날 삼천사 스님들이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 산행은 밑도 끝도 없이 삼천사지에서 증취봉을 올랐던 것. 힘든 길이었지만 가장 흥미롭고 가장 보람있는 길이었다. 증취봉 전망바위에서 백운대,만경대,노적봉,용암봉과 나월봉,나한봉 그리고 비봉능선을 두리번거리며 그때서야 허기를 달랬다. (龍) 










▲ '출발16'루트 를 따름 ⓒ서울포스트 <

▲ 북한산 삼천사계곡 올라, 삼천사지 답사, 의상봉능선 넘어 북한산성계곡 내려. 사진은 '삼천폭포(三川瀑布)'로 이름하고 싶은 멋진 폭포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작년 서쪽 덕양산(행주산성)에서 본 북한산. 가운데 잘록한 부분에 의상봉능선(증취봉과 나월봉 사이)의 부왕동암문이 있다. '부왕'은 부왕(扶王),부왕(扶旺),부황(扶皇)이 같은 의미로 혼용. '삼천사지(三川寺址)'는 사진의 정중앙 약간 아래에 있다. ⓒ2013 서울포스트자료
▲ 미타교 위 동그란 봉우리 아래 현 삼천사(三千寺), 멀리 원추형 봉우리(용출봉)를 포함한 세 봉우리 밑에 옛 삼천사(三川寺) 가 있다. ⓒ서울포스트
▲ 1960년 중창한 삼천사(三千寺).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보물제657호)이 있다. ⓒ서울포스트
▲ 여래불상 과 진신사리를 모신 종탑 ⓒ서울포스트
▲ 짧은 장마 후라 깨끗한 물로 기득한 계곡. ⓒ서울포스트
▲ 삼천사지 대지국사법경탑비 의 귀부 와 이수 ⓒ서울포스트
▲ 증취봉. 우측이 애칭 '눈썹바위'라는 것인데, 시루(솥단지) 같다고해 증취봉이 유래되었다. ⓒ서울포스트
▲ 맞은 편 나월봉 ⓒ서울포스트
▲ 본격적인 암릉구간 ⓒ서울포스트
▲ 이끼가 그린 탱화(?) ⓒ서울포스트
▲ 솥단지와 나월봉 ⓒ서울포스트
▲ 애칭 '강아지바위'와 멀리 비봉능선의 사모바위(모자바위)와 비봉, 향로봉 뒤 웨딩슬랩 ⓒ서울포스트
▲ 용출봉,용혈봉,증취봉 ⓒ서울포스트
▲ 이 3m구간을 오르지 못해 우회 ⓒ서울포스트
▲ 의상능선의 산성 ⓒ서울포스트
▲ 증취봉 쉼터에서 나월봉. 나월봉은 개인 생각으로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같다. ⓒ서울포스트
▲ 증취봉 쉼터에서 북한산정상부. 영취봉(염초봉),백운대(그 뒤 인수봉 살짝), 만경대, 용암봉, 노적봉 ⓒ서울포스트
▲ '출발16'루트 를 따름 ⓒ서울포스트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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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북한산 아름다운 길⑩ - 삼천사계곡, 삼천사지, 의상봉능선(증취봉) 넘어 북한산성계곡 (2)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8/03 17:03:45)  


[탐사] 북한산 아름다운 길⑩ - 삼천사계곡 올라 삼천사지, 의상봉능선(증취봉甑炊峰 시루봉 593m) 넘어 북한산성계곡 (2)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①삼천사(三千寺) - 삼천사(三川寺)계곡 - 삼천사지(三川寺址) - 증취봉(甑炊峰 시루봉 593m) - ②[의상봉능선] - 부왕동암문 - 부황사지(부왕사지) - 백운동계곡 - 용학사 - 산영루(비석거리) - 중성문 - 북한산성계곡 하류]

백운대,만경대에서 쏟아져 북한산 최고의 개연폭포를 만들고, 문수봉 북쪽에서 발원한 백운동계곡보리사에서 합류한 북한산성계곡은 북한산국립공원 제일로 꼽힌다.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증취봉 전망바위에서 한참을 누웠다가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으로 향했다. 숙종때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엔 남쪽은 대남문과 소남문, 암문을 하나씩 계획했으나 사정상 소남문(현 대남문)암문 2개(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을 만들었다.

   부왕동(扶王洞)증취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삼천사계곡을 만들고, 그곳 옛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神穴寺, 현 진관사) 스님의 기지로 임금(고려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하여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이름되었다.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扶旺洞暗門)을 지나 백운동계곡에 가까워지면 이번엔 바위에 청하동문(靑霞洞門)이라고 새겨진 동네에 부황사지(扶皇寺址 부왕사지 扶王寺址,扶旺寺址)가 나온다. '부황사(扶皇寺)'는 임금(황제)을 돕는다는 뜻으로 1717년 숙종때 북한산성 수비를 위해 세워졌고 한국전란 중 폐허돼 누각의 장주초석과 단촐한 부도가 남아있다. 폐사지 비석에는 부황사의 '부(扶)' 자가 좌우로 뒤집혀 써져있는데 풍수로 그랬단다.

풍수상 '부'자를 좌우로 바꾼 게 아니라 혹시 '도울 扶'자를 돌리면 '돕지 않는다'는 뜻이 돼, 임금을 돕지 않겠다고 어떤 불손 세력이 개입된 절이 아닌가 상상도 해본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보니 1717년 심운대사(尋雲大師)가 창건할 당시 편액은 '부왕(扶旺)'이라고 돼 있지만 이후 '부황사(扶皇寺)로 바꿨단다. 여기의 '왕(旺)'은 일본 왕(日王)을 뜻한 바도 있어 혹시...라는 생각도. 현재 부왕(扶王),부왕(扶旺),부황(扶皇)은 같은 의미로 혼용되고 있음.



   산성내 사찰은 고려때부터 중흥사와 부속 태고사만 있었는데, 조선 후기 산성축조시 승군에 의해 창건된 것이 대부분이다. 중흥사는 승병을 지휘한 승영으로 산성내 가장 큰 사찰이었으나 전각 하나만 남아있는 폐사지로 조계종에서 부황사와 함께 복원중이다. 대신 태고사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2) 보우대사(태고종의 종조)중흥사 주지시절 동암(東庵)으로 지은 개인기도처에 '태고(太告)'라는 편액을 달아 태고사와 오늘날 태고종의 기원이 되었다. 전각들은 6.25전쟁때 불타 근래 복원했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 태고사 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만이 역사를 말해준다.
[* 원증국사보우탑비,원증국사보우탑, 여기 원증 보우 국사 圓證 普愚 國師: 태고(太古)는 호(號), 보우(普愚)는 휘(諱)이고, 법명은 보허(普虛), 시호는 원증(圓證). 조선 중기 허응(당) 보우 대사(虛應 普雨 大師)와 구분]

   이 중흥사태고사는 나중으로 미뤘기에 아예 산영루(山映樓)폭포에서 오래 머물렀다. 능선에서 내려보인 용학사도 들렀다. 비석거리산영루도 현재 복원이 한창이다. 계곡으로 내리면서 쉴새없이 시원한 물소리를 들은지라 피곤함은 덜했다. 중성문을 지나 원효봉북한산계곡의 대단원을 담기 위해 달음질을 해댔다.

   길은 나 있으나 쉽게 가지 않는 길로 증취봉을 오른 오늘 탐사는 매우 기분 좋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간 봄에서 여름 사이, 세상과 부딪히면서 공허함에 신물났지만 이제야 마음속에 생긴 보람됨이 오래 남을 것이다. (龍)








▲ 백운대,만경대에서 쏟아져 북한산 최고의 개연폭포를 만들고, 문수봉북쪽에서 발원한 백운동계곡과 보리사 에서 합류한 북한산성계곡은 북한산국립공원 제일로 꼽힌다.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증취봉 쉼터에서 나월봉. 나월봉은 개인 생각으로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같다. ⓒ서울포스트
▲ 증취봉 쉼터에서 북한산정상부. 영취봉(염초봉),백운대(그 뒤 인수봉 살짝), 만경대, 용암봉, 노적봉 ⓒ서울포스트
▲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扶旺洞暗門). 부왕(扶王),부왕(扶旺),부황(扶皇)은 같은 의미로 혼용 ⓒ서울포스트
▲ 폐사지 부황사의 장초석과 북한산 정상부 ⓒ서울포스트
▲ 청하동분(靑霞洞門) ⓒ서울포스트
▲ 비석거리와 복원중인 산영루(山映樓) 앞 계곡 ⓒ서울포스트
▲ 용학사 대웅전 앞 오층석탑 ⓒ서울포스트
▲ 용학사에서 본 의상봉능선의 나월봉(좌)과 증취봉. 저기도 길매재 다. ⓒ서울포스트
▲ 중성문 ⓒ서울포스트
▲ 새마을교 앞 두 천이 합해진 곳의 보리사(菩提寺). 이승만 대통령을 맞았던 영빈각 인 등운각(登雲閣)이었다. ⓒ서울포스트
▲ 원효봉 밑 산성계곡 ⓒ서울포스트
▲ 원효암 에 불켜진 좌 원효봉, 용출봉을 뒤로 한 우 의상봉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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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북한산 폐사터 - 삼천사(三千寺) 지나 삼천사(三川寺)계곡의 '삼천사지(三川寺址)' 순례 (3)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8/03 17:03:48)  


[탐사] 북한산 폐사지 - 삼천사(三千寺) 지나 삼천사(三川寺)계곡의 '삼천사지(三川寺址)' 순례 (3)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삼천사지대지국사법경탑비귀부와 이수(三川寺址 大智國師 法鏡 塔碑 龜趺·螭首)

※ 우리나라 사찰 특징은 많은 승려와 법도가 수행한 대가람은 대부분 평지에 있(었)다. 그러나 삼천불자가 수행정진했다는 옛날 삼천사는 북한산 용출봉,용혈봉,증취봉을 병풍 삼아 그 중턱쯤에 있다. 오늘 찾은 폐사터는 발굴지 중 4구역으로 대지국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는 지점. 흥망성쇠가 너무도 미스테리 한 삼천사지(三川寺址)에서 난 스핑크스 를 보았다.

▲ 삼천사지 탐방. 발굴 4구역에 있는 '대지국사(법경) 탑비 의 귀부 와 이수' 가 동쪽 정면 의상봉능선의 나한봉을 바라보고 있다.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올초 시산산행 비봉능선 문수봉 오름구간에서 본 의상봉능선삼천사계곡. 가운데 봉우리들 아래 삼천사터가 있다. ⓒ20140105 서울포스트


   많은 사람들이 삼천사계곡을 경유하면서 삼천사(三千寺) 라는 절과 삼천사(三川寺)계곡, 삼천사지(三川寺址 삼천사터),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보물제657호) 을 헷갈려하고 있다.

현 삼천사(三千寺,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津寬外洞 산 34번지) 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 1960년대 옛 삼천사(三川寺)의 암자터에 중건했다.

   폐사된 삼천사(三川寺)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흥국사(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하나, 그 뒤의 연혁이 전하지 않는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삼천사(三川寺)는 한때 3,000여 명이 수도(승려 수가 아닌 불자 수)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따라서 현 삼천사(三千寺)는 폐사된 삼천사(三川寺)를 오마주했을 뿐이고 무관하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없어진 삼천사(三川寺)에 명맥을 이은 암자(현 삼천사 三千寺 자리) 가 있었으나 이마저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60년대에 진영중건하고 1978년 성운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세존 진신사리) 3과를 얻어와 봉안한 석종탑과 나한사리가 봉안된 오층탑이 있다. 따라서 현 삼천사(三千寺)이 있는 마애석불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보물제657호)'이다.

현재 사용한 사찰 이름(삼천 三千)은 과거 삼천사(三川寺)가 삼천(三千) 여 명이 수행할 만큼 대가람이었던 데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또 불교에서 삼천(三千)은 과거세(過去世)의 1000불 과 현재세(現在世)의 천불, 미래세(未來世)의 천불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폐사지는 많다. 한결같이 당 시대를 풍미한 대가람이었지만 정치적이나 이념적으로 갈등과 충돌을 겪으며 뚜렷한 영문도 없이 사라졌다. 아래 자료에 '비문을 도끼 등으로 잘게 부쉈다'는 기록을 보면 삼천사와 대지국사 의 행적을 매우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장축대나 탑(부도), 탑비(비석)라도 온전하면 현대에서 재해석하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해체되어 다른 사찰의 축조나 중창에 쓰였다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지난 시간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를 답사한 후, 북한산도 유서깊은 삼천사지(三川寺址)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작년 칼바위능선 타고 문수봉,삼천사계곡으로 내려와서 자료를 찾다가 삼천사터를 알게 되었다. 고려때부터 부왕동(扶王洞)이라는 지명의 삼천(三川) ①사모바위,승가봉 일원, ②문수봉 일원, ③나월봉,증취봉 일원의 세 갈래 물길을 말하며, 옛 삼천사(三川寺)도 여기서 유래했을지 싶다. 또한 삼천이 혹시 용출봉,용혈봉,증취봉을 하늘에 비유한 삼천(三天)이란 중의적 구도를 갖지 않았나.. 나만의 생각.. 삼천(三川)! 삼봉(三峰)!!

   삼천사 예불소리를 들으며 본격적인 계곡에 들자, 물놀이에 와글와글바글바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야단법석이다. 이정표를 보고 의상능선 쯤을 기웃거렸는데 쉽지 않았다. 몇 사람째 물어물어 마침내 '거북이 머리' 소리를 들었다. 그 산객은 그리 가면 바위길이라고까지 귀뜸해줬다.







   마침내 수풀로 덮힌 편평한 절터를 발견하고 조금 오르자 돌축대가 보였다. 꽃문양의 주추돌도 팽개쳐져 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자, 마침내 하얀 빛을 뿜어내는 돌거북이 망연히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순간의 고요와 정적, 천년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찰나에 애련함도 느껴졌다. 어찌보면 푸른 방태녹음 속을 두둥실 떠서 시간을 초월한 채 유영한 듯한 거북이 한마리. 대지국사는 여기에 세워진 비문으로 '내가 나라를 위해 일했노라'고 했을 것이다.

   이 절터는 1916년 중요성이 알려졌고 1960년대 첫 발굴은 기상여건으로, 이후엔 공비출몰로 중단, 2005년~2007년 본격 발굴로 절의 내력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단다. 탑비의 비문(碑文 비신碑身)은 산산조각 나서 묻혀버려졌지만 퍼즐을 맞추듯 각고의 노력으로 그때서야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의 탑비(塔碑)'라는 파편들을 대거 수습했고, 청동 원통형 사리합과 청동 명문 대발, 은제 투각 칠보문 장식, '가순궁주'명 금니 목가구편, 석조보살두, 각종 명문기와 등의 출토유물을 발굴해 서울역사박물관에, 또 동종(銅鐘) 보물로 지정돼 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삼천사지 유물 전시회를 열었던 서울역사박물관측은 당시 발굴이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게 된 점이 큰 성과라고 밝혔다. 폐사 이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정도가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지국사 법경왕사에 이어 국사를 지냈고, 고려 현종(1009∼1031)대고려 법상종의 종찰인 개경 현화사의 초대 주지를 지냈으며, 고려 전반기 법상종을 주도했던 인물로 드러났다.

시간을 잊고 고려와 조선을 오가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내 가슴 높이의 귀부(엄청난 크기임)는 동녘 나한봉을 응시하며 묵묵히 또 천년을 기다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龍)


※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

생졸년 미상. (고려 전반기, 대략 900년 중반 출생~1000년 중반 졸)

   편년체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법상종파 고려 불교계의 거물. 삼천사(三川寺) 주지이자 왕사 도승통(都僧統) 등을 지냈다. 현종이 부모 명복을 빌기 위해 '법경(法鏡)'을 1011년(현종 2) 창건한 현화사(玄化寺) 초대 주지로 보냈으며, 1020년(현종 11)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1032년(덕종 1)에 대지국사(大智國師)에 올랐다.

   대지국사탑비는 고양시 북한산 삼천사지에 비문이 있었으나 비문을 도끼로 잘게 부수고 파묻어, 간혹 출토되어도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을, 최근 발굴터에서 다량의 비문 파편이 발견되어 일부나마 행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승랍(僧臘) 85세이고 세속 92세로 돌아가셨다. 비문이영간(李靈幹)이 짓고 최홍검(崔弘儉)이 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1000년 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이후 사찰 중창 등으로 재제작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박경이 님 자료) 



400년 후 또 다른 대지국사(大智國師)

1328(충숙왕 15) 경기 양주~ 1390(공양왕 2). 고려 후기의 승려.
속성은 한씨(韓氏). 속명은 찬영(粲英).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庵). 아버지는 사복시직장 적(績)이다.

   14세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보우(普愚)에게 출가하여, 5년간 사사하고 법을 받았다. 그뒤 정혜국사(淨慧國師)에게 있다가 총림(叢林)에 나아가 가지산(迦智山) 제2좌(第二座)가 되고, 유점사(楡岾寺)의 수자(守慈)에게 선열(禪悅)을 얻었다. 1350년(충정왕 2)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여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다가 잠시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도행을 연마하고, 중흥사에 거주했다. 공민왕은 찬영을 '벽안달마'(碧眼達磨)라 칭하고 '양가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로 임명했다. 특명에 따라 석남사·월남사·신광사·운문사 등 여러 사찰에 거주하다가, 1372년(공민왕 21) 내원당(內願堂)으로 초빙되어, 정지원명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의 호를 하사받았다.

   뒤에 우왕이 즉위하여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로 삼고, 1383년에 왕사(王師)로 봉해 충주의 억정사(億政寺)와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게 했다. 창왕과 공양왕이 왕사로 모시고자 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들을 지도했다. 시호는 지감국사(智鑑國師)이고, 탑호는 혜월원명(慧月圓明)이다. 조선 태조도 1393년(태조 2) 대지국사(大智國師)라는 시호와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충주 억정사지(億政寺址)에 대지국사탑비(보물 제16호)가 남아있다. (=자료)

[※ 문화재 관리에서 혼용되는 명칭 :
탑(塔)=부도=부도탑=승탑=사리탑=묘탑, 비(碑)=부도비=탑비=비탑]





▲ 삼천사지 탐방. 발굴 4구역에 있는 '대지국사(법경) 탑비 의 귀부 와 이수' 가 동쪽 정면 의상봉능선의 나한봉을 바라보고 있다.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올초 시산산행 비봉능선 문수봉 오름구간에서 본 의상봉능선과 삼천사계곡. 가운데 봉우리들 아래 삼천사터가 있다. ⓒ20140105 서울포스트
▲ 증취봉이 어렴푸시 ⓒ서울포스트
▲ 삼천사지 4구역. 곳곳 박혀있는 석축에 수풀만 무성하다. ⓒ서울포스트
▲ 귀부가 햇살에 하얀 빛을 뿜는 스핑크스(?) ⓒ서울포스트
▲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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