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3. 23:29ㆍ산 이야기
폐사지학교 (23)
폐허로부터 받는...뜻밖의 힐링-.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가 12월 <송년특집>으로 서울의 이웃 북한산(삼각산)에 깃든 폐사지들을 찾아갑니다. 제6강으로 오는 12월 21일(토) 당일로 진행됩니다. 북한산에 산재한 폐사지들이 초겨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때에 맞춰 찾아갑니다. 삼천리골의 사찰 삼천사로 들어가 삼천사지 탑비전과 마애여래입상, 원각사지, 청하동문과 부도, 중흥사지,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 등을 만나는 일정입니다. 초겨울의 햇살과 신선한 바람을 벗 삼아 걸으면서, 특별히 송년 힐링의 깊은 적요(寂寥)에 젖어보시기 바랍니다.
▲북한산 폐사지로 가는 길, 청하동 계곡 Ⓒ이지누 |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부왕사지 문루 돌기둥과 삼각산 Ⓒ이지누 |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삼천사지 대지국사 법경 탑비의 귀부 Ⓒ이지누 |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산 구경 어디가 좋은가 하면, 부왕이라 옛 절 선림이라네.
추사 김정희가 그랬습니다. "산 구경 어디가 좋은가 하면, 부왕(扶旺)이라 옛 절 선림(禪林)이라네"라고 말입니다. 그가 말한 부왕사는 지금은 폐사가 되어 흔적만 남았습니다. 그 부왕사가 있었던 북한산은 수도권에 있는 산으로서는 전 세계에 내로라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 산 속에 폐사지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북한산의 능선을 동서로 나누면 그 북쪽에는 고려시대의 절터가, 또 남쪽에는 조선시대의 절터들이 남은 것입니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산, 곧 삼각산은 남쪽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스님들은 물론 유자(儒者)들까지도 북한산에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이 유자들은 물론 여러 스님들과 함께 맺은 결사가 전해집니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폐사지 중 삼천사지에는 보물 제657호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개경의 현화사 주지를 역임하며 법상종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국사가 된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또 성곽을 지나 산 가운데로 들어가 청하동(靑霞洞) 계곡을 따라가면 샘만 남은 조선시대의 원각사지와 문루의 돌기둥이 웅장하게 남아 있는 부왕사지가 있습니다.
또 산중대처인 중흥동에는 한창 복원 공사 중인 중흥사지(重興寺址)가 있으며, 중흥사 위 태고사에는 중흥사에 주석했던 원증국사(圓證國師)인 태고(太古) 보우(1301~1382) 스님의 탑비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 모두 불적이건만 그것만을 보기 위하여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무심코 올랐다가 그들을 만나고 보면 언제나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반갑기만 합니다.
▲청하동문 Ⓒ이지누 |
12월 <송년특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답사 일정>
<12월 21일(토요일)>
폐사지학교 제6강은 12월 21일(토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서울 은평구 진관동 산 34번지 삼천사 주차장에 모입니다.
(삼천사 주차장 오시는 길 :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로 나가서 범서쇼핑을 에돌아 버스정류장에서 7211번 버스에 승차해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합니다. 범서쇼핑에서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까지는 버스로 15~20분 정도 걸리고, 택시는 대략 5,0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천사 주차장→삼천사지 탑비전→부왕동암문→원각사지→부왕사지→점심식사(각자 준비한 도시락)→청하동문과 부도→중흥사지→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부왕동암문→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삼천리골 입구(송년모임)
08:30 삼천사지 탑비전 도착
북한산 삼천리골에 위치한 삼천사터의 사명(寺名)은 삼천사(三川寺)였으나 조선시대 후기부터 삼천사(三千寺)로 불리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삼천사가 있는 곳으로부터 폐사지가 있는 삼천리골에 대략 삼천 명 가량의 승려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그렇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절의 창건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신라 문무왕(626~681, 재위 661~681) 1년인 661년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옛 삼천사의 들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마애여래입상 근처에 세워진 삼천사는 옛 삼천사의 암자가 있었던 곳으로, 그곳에서 계곡을 따라 부암동암문 방향으로 15분 남짓 오르면 왼쪽으로 옛 삼천사로 향하는 길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오래 묵은 돌계단을 오르자마자 오른쪽의 넓은 평지에 주춧돌이 있으며, 주변 일대는 군부대가 들어섰던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을 따라 2~3분 오르면 오른쪽으로 석축들이 나타나고 석축을 왼쪽으로 돌아 올라서면 다시 왼쪽 위에 옛 삼천사의 금당터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길고 우람한 석축이 나타난다.
석축 위에는 숲이 우거져 건물지의 확인이 쉽지 않지만 석축 바로 아래를 따라 숲을 헤치며 톺아보면 탑 지붕돌 두 점과 계단 난간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긴 장대석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탑의 지붕돌은 석축 위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작은 것은 다행히 온전하지만 큰 것은 모서리가 깨진 채 있다. 작은 지붕돌의 크기는 한 변이 대략 80cm, 큰 것은 120cm 남짓하다. 지붕돌 주위에도 눈여겨보면 장대석은 물론 모양을 내어 다듬은 돌들이 있지만 마멸이 심하고 잘게 깨져서 용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석축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희미한 길을 따라 계곡 두엇을 건너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그곳에 석조가 있다. 석조는 대개 장방형이기 마련이지만 삼천사의 석조는 정방형이다. 한 변이 2m 남짓한 그리 크지 않은 석조이다. <북한지>에 따르면 삼천사와 진관사에 석조가 있는데 이는 승려들이 목욕을 할 때 사용하던 목욕통이라고 한다.
탑비전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석조에서 오던 길로 되돌아서서 바라보면 열 걸음 남짓 아래에 왼쪽 등성이로 올라가는 희미한 길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서 등성이를 따라 숨 가쁘게 20분, 오른쪽으로 넓은 바위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숲이 크게 뻥 뚫린 곳이 보이는데 그곳이 탑비전이며, 그 앞으로 작게 숲이 뚫린 곳은 탑비전 앞의 건물지이다. 탑비전으로 내려서는 길은 제대로 없다. 그곳에서 대충 계곡을 따라 탑비전을 짐작하며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가다 보면 탑비전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며 바로 탑비전이 보인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처음 삼천사터로 들어서던 삼천리골로 되돌아 나가서 계곡 길로 편안하게 오르는 방법이다. 절터 입구로부터 탑비전 입구까지는 15분 남짓하며 오르막이라고 할 것도 없는 편안한 길이다. 다만 비봉과 부왕동암문, 그리고 문수봉과 부왕동암문 방향의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모두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문수봉과 부왕동암문 갈림길에서 계곡을 건너 150~200m 남짓 가다보면 왼쪽으로 발굴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서면 무너진 석축 위로 건물터가 나타난다.
건물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사각형 연화대좌가 있으며, 그곳에서 계곡을 따라 10~20m 남짓 오르면 오른쪽으로 거꾸로 넘어져 있는 석종형 부도의 탑신석과 원형의 연화대좌가 있다. 부도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두 개의 연화대좌는 모두 고려 초기의 솜씨를 보여 준다. 다시 길을 따라 40~50m를 오르면 눈앞에 우람한 석축이 나타나는데 그곳이 탑비전이다. 탑비전에는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의 탑비를 장식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머릿돌인 이수와 받침돌인 귀부가 동남쪽을 향해 놓여 있으며, 부도의 받침돌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방형의 하대석이 앞으로 놓여 있다. 한 변의 길이가 120cm에 달하는 하대석은 측면에 3조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 밖에도 부도의 부재로 보이는 한 변에 2조의 안상이 새겨진 팔각의 하대석과 팔각의 지붕돌이 탑비전 모퉁이에 남아 있으며, 귀부와 이수 주변으로는 갖가지 형태의 주춧돌이 흩어져 있다. 산 방향으로는 신방석이 아래로는 탑비전으로 오르던 계단과 문지(門址)가 남아 있는데 이로 미루어 탑비전의 출입구는 남서쪽으로 짐작된다. 문지의 계단을 내려서서 석축을 바라보면 오른쪽 끝에는 산의 경사면을 따라 튼튼하게 보축(補築)을 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귀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석축을 내려가 정면의 계곡으로 거슬러 10m 남짓 올라가면 넓은 돌에 작은 구멍이 나있는 돌이 있다. 그러나 계곡 가운데에 놓여 있어 어떤 용도였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삼천사지 탑비전 귀부와 증취봉 Ⓒ이지누 |
09:30 탑비전 출발
10:30 부왕동암문 도착
10:40 원각사지 도착
10:50 원각사지 출발
11:10 부왕사지 도착
부왕사터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소재한다. 북한산 등산로 어느 곳으로라도 갈 수 있지만 등산이 아니라 폐사지 답사가 목적이라면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는 삼천사를 기점으로 오르는 것이 좋다. 삼천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삼천사지를 둘러보고 부왕동암문에 올라 중흥사 방향으로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부왕사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부왕동암문에서 300m 남짓하며, 삼천사지의 법경대사 탑비의 귀부가 이수가 남아 있는 탑비전으로부터는 채 1km가 되지 않는다. 삼천사로부터 부왕사터까지는 두어 차례 다리쉼을 하고도 1시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내려가는 길은 중흥사터와 용암사터 방향으로 잡는 것이 좋다. 부왕사터로부터 중흥사터까지는 15분 남짓한 거리로 편안한 계곡길이다. 가는 길 곁으로 청하동문 암각과 부도, 그리고 산영루터와 비석거리가 산재해 있다. 중흥사터에서는 용암사터(북한산대피소) 방향으로 향하여 우이동 도선사로 내려가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삼천리골의 삼천사터와 부왕동암문을 넘어서자마자 만나는 원각사터와 부왕사터 그리고 중흥사터와 대피소 근처에 석탑 부재만 남은 용암사터를 합하여 다섯 군데의 절터를 돌아 볼 수 있다.
성능스님이 지은 <북한지>에 "부왕사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으며, 111칸이고 심운(尋雲)스님이 창건했다. 절 앞에 유선대(游仙臺)가 있다"고 되어 있다. 부왕사터는 고려 당시부터 사찰이 존재했다고 전하지만 어떤 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였다고 전하지만 그 또한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루어진 절의 창건은 조선 숙종 43년인 1717년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까지 존속하였다고 하나 그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아래는 추사 김정희가 지은 <부왕사(扶旺寺)>다.
산 구경은 어디가 좋은고 하면 看山何處好
부왕이라 옛날의 선림이라네 扶旺古禪林
해 지니 봉우리는 물든 것 같고 日落峯如染
단풍 밝아 골짝은 어둡지 않네 楓明洞不陰
종어소리 원근에 들려오는데 鍾魚來遠近
온갖 새들 유심을 함께 즐겨라 禽鳥共幽深
머리머리 절묘함을 차츰 깨치니 漸覺頭頭妙
영구는 곧 도심과 서로 맞거든 靈區愜道心
▲부왕사지 금당 Ⓒ이지누 |
양지바른 곳에서 옹기종기 점심식사(각자 준비한 도시락)
12:20 부왕사지 출발
12:30 청하동문과 부도
12:45 중흥동 도착
13:00 중흥사지 도착
경기도기념물 제136호인 중흥사지(重興寺址)는 고려 말 원융불교를 주창한 태고(太古) 보우(1301~1382)국사가 머물며 중창불사를 일으킨 곳이다. 절터는 북한산중에 있으며 소재한 곳의 행정명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이다.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로 어느 곳으로 올라도 거리가 어슷비슷하다. 그러나 폐사지 답사가 목적이라면 삼천리골로 오르는 것이 가장 좋다. 삼천사에서 삼천사지나 삼천사지의 탑비전까지 대략 30분 정도이며, 부왕동암문까지는 45분에서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부왕동암문에서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왼쪽으로 우물터가 보이는 곳이 원각사지이며 부왕사지까지는 300m 거리이다. 부왕사지에서 청하동문을 지나 10분 정도 걸어 계곡으로 내려서면 산영루터와 비석거리 그리고 중흥사지가 연이어 있다. 중흥사지를 돌아보고 난 다음에는 용암사지 방향으로 가도 좋다. 지금 북한산대피소가 있는 곳으로 석탑부재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암사지에서는 도선사 방향으로 길을 택하거나 정릉 방향으로 내려와도 된다. 이처럼 하루 동안에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삼천사지 법경대사 탑비전, 원각사지, 부왕사지, 청하동문, 산영루터, 중흥사지, 용암사지 그리고 도선사를 둘러볼 수 있는 이 길은 북한산 답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왕동암문으로부터 중흥사지로 이어지는 1km 남짓한 내리막길은 봄이나 가을이면 빼어난 자연풍광을 뽐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등산객들이 드물어 한갓진 산중 답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중흥사지는 1915년 연이은 화재와 홍수로 인해 허물어진 뒤 복원불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2001년 봄, 보우국사의 탄신 700년을 기념하여 복원 불사를 일으켰으나 대웅보전을 짓다가 중단된 상태였다. 다시 2012년 4월18일 대웅전 상량식을 거행하고 복원불사에 박차를 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축대는 허물어져 내리고 건물터 서너 곳만이 옛 중흥사의 모습을 추억하고 있을 뿐이다. 한 때는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은 물론이거니와 왕까지도 거둥하여 시를 남겼던 곳이련만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은 것이다.
농암(農嚴) 김창협(1651~1708)이 숙종 8년인 1682년 초여름에 중흥사에 올라 시를 남겼는데 <중흥사를 찾다(訪重興寺)>라는 것이다. 후에 정조가 중흥사에 거둥하여 농암의 시를 차운하여 <중흥사에 들러서 농암의 시운에 차(次)하다(過重興寺 次農巖韻)>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때는 1769년에서 1775년 사이이며, 김창협의 시와 정조의 시를 차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깊은 가을 서리 이슬 짙은 숲 깨끗이 씻어내니 高秋霜露洗林丘
하늘 끝에 높이 뜬 세 봉우리 반겨 바라보네 喜見三峰天畔浮
절벽의 싸늘한 노을 아직 비 기운 남아있고 絶壁冷霞餘雨氣
무너진 성에 비낀 햇살 차가운 계류에 비치누나 壞城斜日映寒流
등라넝쿨 얽힌 옛 길이라 갈피잡기 난감하여 藤蘿古道深難取
등불 밝힌 선방에 날이 저물어 들어갔네 燈火禪房暝始投
아름다운 산수 속에 언제나 은둔하여 勝處每懷長往志
계수나무 부여잡고 스님과 함께 머물고 싶네 會攀叢桂共僧留
절 가까이서 풍경 소리 가늘게 들려오는데 細聞淸磬近禪丘
깊고 깊은 하 많은 숲은 하늘 밖에 떠 있네 萬木深深天外浮
절벽으로 돌아가는 구름은 우기를 더하였고 苔壁歸雲增雨氣
치성에 비친 석양은 흐르는 샘으로 드는구나 雉城斜照入泉流
고요한 산창에선 몇 사람이나 경권을 읽는고 幾人經卷山窓靜
늙은 중의 한가한 지팡이는 돌길을 짚어가네 老釋閒筇石逕投
농암의 산수 혹애하는 벽을 문득 생각하니 忽憶農巖山水癖
절방에 가부좌하여 그 얼마나 머물렀던고 佛龕趺坐幾曾留
▲중흥사지 건물지와 복원중인 금당 Ⓒ이지누 |
더불어 농암이 북한산을 유람할 당시 동행했던 옥오재(玉吾齋) 송상기(1657~1723)는 1682년, 1687년, 그리고 1717년 세 차례에 걸쳐 북한산에 올랐는데 1717년의 기록인 <유북한기(遊北漢記)>에 중흥사의 모습을 그려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중흥사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경리청 별관과 창고는 백여 칸이 되는데 중흥사 전후좌우로 연이어 늘어서 있다. 중들이 산영루를 중수하였고 단청칠이 이제 막 끝났다. 자리를 펴고 앉아 난간 아래를 보니 물빛 속에 산 그림자가 드리웠다. 산과 그림자가 아래위로 이어진 모습을 보니 눈과 귀가 맑아지고 정신이 확 깨는 것이 참으로 즐길만한 경치였다. 중흥사는 옛부터 이름난 절이다. 성을 쌓고 창고를 만들 때 군졸들 발길에 지저분해진 곳이 여러 곳이 생겨서 그 청결한 맛이 줄어들었다. 저녁에는 경리청 별관에서 유숙했다.
또한 형암(炯庵) 이덕무(1741~1793)도 영조 37년인 1761년 9월 그믐날에 지인인 자휴(子休)·여수(汝修)와 함께 북한산에 올라 첫날은 태고사에서 묵었다. 이튿날 아침 용암사에 들렀다가 중흥사로 왔는데 <북한산유람기(北漢山遊記)>에 중흥사에 대하여 쓰기를 다음과 같았다.
용암사를 떠나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 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호를 농은(農隱)으로 쓰는 이엽(1729~1788)이 정조 3년인 1779년 4월 15일에 북한산에 올라 중흥사에 대한 기록을 <북한도봉산유기(北漢道峰山遊記)>에 그나마 길게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산영루 위로 길이 점차 험준하고 가팔랐다. 큰 바위가 층층이 서 있고 나무 그늘 무성한데, 괴이한 새 울고 맑은 물 세차게 흐르니, 그윽한 정취를 가눌 수 없었다. 푸른 풀밭에 말을 쉬게 하고, 숲을 헤치고 경치 좋은 곳을 골라서 옷을 벗고 발을 씻으며, 한창려(韓昌黎)의 '흐르는 물에 맨발 담그고 시내 돌을 밟으니(當流赤足踏澗石)'라는 구절을 조용히 읊으니 또한 절로 기이한 운치가 있었다.
중흥사의 옛 모습을 그려보려면 위와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나오는 조각들을 꿰맞추어야 한다. 개인 문집에 나오는 내용으로 성보에 대한 기록은 이덕무의 그것이 유일하다. 그것도 한 길이나 되는 금불상이 있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또한 상촌 신흠의 글에 따르면 1600년 초에 새로운 불상을 모셨다고는 하지만 그 불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13:10 중흥사지 출발
13:20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도착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에 있는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 태고 보우[圓證國師 太古普愚. 1301(충렬왕 27년)~1382(우왕 8년)]의 비. 이색(李穡)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써서 국사 입적 3년 후인 1385년(우왕 11년)에 세웠다. 현재 원 위치에 보존되어 있는 비는 귀부에 운문과 연화문의 이수를 한 형태로 보물 제 611호로 지정되었으며 비신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아래쪽 일부가 마모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국사가 홍주에서 태어나 회암사로 출가하여 만법귀일 조주무자 등의 화두를 참구하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중흥사에 주석하며 태고암가를 짓고 원에 유학하여 임제의 18대손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었으며 소설산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다 공민왕이 참석한 봉은사 법회를 주관하고 왕사에 책봉되어 원융부를 중심으로 구산 통합운동을 하였으며 신돈에 의해 속리산에 금고당하기도 하였으나 신돈 실각 후 국사에 책봉되었고 영원사에 주석하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원증국사의 기념물은 태고사와 가은 양산사와 양평 사나사에 석종이, 그리고 미원 미지산 소설암에 석탑이 세워졌다. 음기에는 문도를 승계에 따라 열거하였는데 운수(雲水) 1천 3인이 특이하며 재가신도는 고관 위주로 열거되었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발췌)
13:40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 출발
14:10 부왕동암문 도착
15:00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도착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은 북한산 자락인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다. 1979년에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마애불 근처에 세워진 삼천사(三千寺)는 역사적으로 이 마애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삼천사지 입구 마애여래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본디의 삼천사는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부터 1km 남짓, 30분 가까이 올라가야 한다.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전체 높이가 3.02m, 불신은 2.59m에 이르지만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작은 규모에 속한다. 현재는 이마에 백호가 박혀 있지만 예전에는 구멍만 남아 있었으니 그것 또한 후대에 누군가가 손을 댄 것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다소 높이 솟았다는 느낌이 든다. 목의 삼도는 길게 표현되어 가슴께까지 내려오며 법의는 통견이다. 가슴에는 띠 매듭이 보이는데 겉에 걸친 가사 속의 내의(內衣)를 묶은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두광은 두 겹이며 신광은 한 줄로 표현되었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지누 |
15:20 삼천사지 주차장 도착, 삼천리골 입구 <청솔산장>에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송년모임
<답사 메모>
가벼운 트레킹이 아니라 산행입니다. 넉넉하게 편도 2시간 정도, 왕복 4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며 7시간 정도를 산중에 있어야 합니다. 운동화보다는 등산화를 신는 것이 좋습니다. 또 굳이 새로 등산복을 장만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있다면 등산복을 입고 특히 방한복을 지참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체 등산로의 절반 정도는 경사가 있는 편이어서 스틱 또한 갖추시는 것이 편리합니다. 물은 삼천사와 부왕사터 그리고 중흥사터와 태고사에서 구할 수 있지만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담아 오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폐사지학교 제6강 답사로 Ⓒ폐사지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드시 도시락을 준비해주세요.
걷기 편한 방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방한모자, 장갑, 스틱, 아이젠,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의,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6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송년모임비,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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