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 북한산 폐사지 - 삼천사(三千寺) 지나 삼천사(三川寺)계곡의 '삼천사지(三川寺址)' 순례 (3)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삼천사지대지국사법경탑비귀부와 이수(三川寺址 大智國師 法鏡 塔碑 龜趺·螭首)
※ 우리나라 사찰 특징은 많은 승려와 법도가 수행한 대가람은 대부분 평지에 있(었)다. 그러나 삼천불자가 수행정진했다는 옛날 삼천사는 북한산 용출봉,용혈봉,증취봉을 병풍 삼아 그 중턱쯤에 있다. 오늘 찾은 폐사터는 발굴지 중 4구역으로 대지국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는 지점. 흥망성쇠가 너무도 미스테리 한 삼천사지(三川寺址)에서 난 스핑크스 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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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사지 탐방. 발굴 4구역에 있는 '대지국사(법경) 탑비 의 귀부 와 이수' 가 동쪽 정면 의상봉능선의 나한봉을 바라보고 있다.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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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초 시산산행 비봉능선 문수봉 오름구간에서 본 의상봉능선과 삼천사계곡. 가운데 봉우리들 아래 삼천사터가 있다. ⓒ20140105 서울포스트 |
많은 사람들이 삼천사계곡을 경유하면서 삼천사(三千寺) 라는 절과 삼천사(三川寺)계곡, 삼천사지(三川寺址 삼천사터),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보물제657호) 을 헷갈려하고 있다.
현 삼천사(三千寺,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津寬外洞 산 34번지) 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 1960년대 옛 삼천사(三川寺)의 암자터에 중건했다.
폐사된 삼천사(三川寺)는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흥국사(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하나, 그 뒤의 연혁이 전하지 않는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삼천사(三川寺)는 한때 3,000여 명이 수도(승려 수가 아닌 불자 수)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따라서 현 삼천사(三千寺)는 폐사된 삼천사(三川寺)를 오마주했을 뿐이고 무관하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없어진 삼천사(三川寺)에 명맥을 이은 암자(현 삼천사 三千寺 자리) 가 있었으나 이마저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60년대에 진영이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세존 진신사리) 3과를 얻어와 봉안한 석종탑과 나한사리가 봉안된 오층탑이 있다. 따라서 현 삼천사(三千寺)이 있는 마애석불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 磨崖如來立像 보물제657호)'이다.
현재 사용한 사찰 이름(삼천 三千)은 과거 삼천사(三川寺)가 삼천(三千) 여 명이 수행할 만큼 대가람이었던 데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또 불교에서 삼천(三千)은 과거세(過去世)의 1000불 과 현재세(現在世)의 천불, 미래세(未來世)의 천불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폐사지는 많다. 한결같이 당 시대를 풍미한 대가람이었지만 정치적이나 이념적으로 갈등과 충돌을 겪으며 뚜렷한 영문도 없이 사라졌다. 아래 자료에 '비문을 도끼 등으로 잘게 부쉈다'는 기록을 보면 삼천사와 대지국사 의 행적을 매우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장축대나 탑(부도), 탑비(비석)라도 온전하면 현대에서 재해석하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해체되어 다른 사찰의 축조나 중창에 쓰였다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지난 시간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와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를 답사한 후, 북한산도 유서깊은 삼천사지(三川寺址)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작년 칼바위능선 타고 문수봉,삼천사계곡으로 내려와서 자료를 찾다가 삼천사터를 알게 되었다. 고려때부터 부왕동(扶王洞)이라는 지명의 삼천(三川)은 ①사모바위,승가봉 일원, ②문수봉 일원, ③나월봉,증취봉 일원의 세 갈래 물길을 말하며, 옛 삼천사(三川寺)도 여기서 유래했을지 싶다. 또한 삼천이 혹시 용출봉,용혈봉,증취봉을 하늘에 비유한 삼천(三天)이란 중의적 구도를 갖지 않았나.. 나만의 생각.. 삼천(三川)! 삼봉(三峰)!!
삼천사 예불소리를 들으며 본격적인 계곡에 들자, 물놀이에 와글와글바글바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야단법석이다. 이정표를 보고 의상능선 쯤을 기웃거렸는데 쉽지 않았다. 몇 사람째 물어물어 마침내 '거북이 머리' 소리를 들었다. 그 산객은 그리 가면 바위길이라고까지 귀뜸해줬다.
마침내 수풀로 덮힌 편평한 절터를 발견하고 조금 오르자 돌축대가 보였다. 꽃문양의 주추돌도 팽개쳐져 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자, 마침내 하얀 빛을 뿜어내는 돌거북이 망연히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순간의 고요와 정적, 천년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찰나에 애련함도 느껴졌다. 어찌보면 푸른 방태녹음 속을 두둥실 떠서 시간을 초월한 채 유영한 듯한 거북이 한마리. 대지국사는 여기에 세워진 비문으로 '내가 나라를 위해 일했노라'고 했을 것이다.
이 절터는 1916년 중요성이 알려졌고 1960년대 첫 발굴은 기상여건으로, 이후엔 공비출몰로 중단, 2005년~2007년 본격 발굴로 절의 내력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단다. 탑비의 비문(碑文 비신碑身)은 산산조각 나서 묻혀버려졌지만 퍼즐을 맞추듯 각고의 노력으로 그때서야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의 탑비(塔碑)'라는 파편들을 대거 수습했고, 청동 원통형 사리합과 청동 명문 대발, 은제 투각 칠보문 장식, '가순궁주'명 금니 목가구편, 석조보살두, 각종 명문기와 등의 출토유물을 발굴해 서울역사박물관에, 또 동종(銅鐘)은 보물로 지정돼 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삼천사지 유물 전시회를 열었던 서울역사박물관측은 당시 발굴이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게 된 점이 큰 성과라고 밝혔다. 폐사 이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정도가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지국사 법경은 왕사에 이어 국사를 지냈고, 고려 현종(1009∼1031)대에 고려 법상종의 종찰인 개경 현화사의 초대 주지를 지냈으며, 고려 전반기 법상종을 주도했던 인물로 드러났다.
시간을 잊고 고려와 조선을 오가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내 가슴 높이의 귀부(엄청난 크기임)는 동녘 나한봉을 응시하며 묵묵히 또 천년을 기다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龍)
※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
생졸년 미상. (고려 전반기, 대략 900년 중반 출생~1000년 중반 졸)
편년체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법상종파 고려 불교계의 거물. 삼천사(三川寺) 주지이자 왕사 도승통(都僧統) 등을 지냈다. 현종이 부모 명복을 빌기 위해 '법경(法鏡)'을 1011년(현종 2) 창건한 현화사(玄化寺) 초대 주지로 보냈으며, 1020년(현종 11)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1032년(덕종 1)에 대지국사(大智國師)에 올랐다.
대지국사탑비는 고양시 북한산 삼천사지에 비문이 있었으나 비문을 도끼로 잘게 부수고 파묻어, 간혹 출토되어도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을, 최근 발굴터에서 다량의 비문 파편이 발견되어 일부나마 행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승랍(僧臘) 85세이고 세속 92세로 돌아가셨다. 비문은 이영간(李靈幹)이 짓고 최홍검(崔弘儉)이 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1000년 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이후 사찰 중창 등으로 재제작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박경이 님 자료)
※ 400년 후 또 다른 대지국사(大智國師)
1328(충숙왕 15) 경기 양주~ 1390(공양왕 2). 고려 후기의 승려.
속성은 한씨(韓氏). 속명은 찬영(粲英).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庵). 아버지는 사복시직장 적(績)이다.
14세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보우(普愚)에게 출가하여, 5년간 사사하고 법을 받았다. 그뒤 정혜국사(淨慧國師)에게 있다가 총림(叢林)에 나아가 가지산(迦智山) 제2좌(第二座)가 되고, 유점사(楡岾寺)의 수자(守慈)에게 선열(禪悅)을 얻었다. 1350년(충정왕 2)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여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다가 잠시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도행을 연마하고, 중흥사에 거주했다. 공민왕은 찬영을 '벽안달마'(碧眼達磨)라 칭하고 '양가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로 임명했다. 특명에 따라 석남사·월남사·신광사·운문사 등 여러 사찰에 거주하다가, 1372년(공민왕 21) 내원당(內願堂)으로 초빙되어, 정지원명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의 호를 하사받았다.
뒤에 우왕이 즉위하여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로 삼고, 1383년에 왕사(王師)로 봉해 충주의 억정사(億政寺)와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게 했다. 창왕과 공양왕이 왕사로 모시고자 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들을 지도했다. 시호는 지감국사(智鑑國師)이고, 탑호는 혜월원명(慧月圓明)이다. 조선 태조도 1393년(태조 2) 대지국사(大智國師)라는 시호와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충주 억정사지(億政寺址)에 대지국사탑비(보물 제16호)가 남아있다. (=자료)
[※ 문화재 관리에서 혼용되는 명칭 :
탑(塔)=부도=부도탑=승탑=사리탑=묘탑, 비(碑)=부도비=탑비=비탑]
▲ 삼천사지 탐방. 발굴 4구역에 있는 '대지국사(법경) 탑비 의 귀부 와 이수' 가 동쪽 정면 의상봉능선의 나한봉을 바라보고 있다. ⓒ2014072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올초 시산산행 비봉능선 문수봉 오름구간에서 본 의상봉능선과 삼천사계곡. 가운데 봉우리들 아래 삼천사터가 있다. ⓒ20140105 서울포스트
▲ 증취봉이 어렴푸시 ⓒ서울포스트
▲ 삼천사지 4구역. 곳곳 박혀있는 석축에 수풀만 무성하다. ⓒ서울포스트
▲ 귀부가 햇살에 하얀 빛을 뿜는 스핑크스(?) ⓒ서울포스트
▲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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