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6. 22:2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부도지(符都誌)가 한민족 대서사시가 될 수 있을까?>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 한민족의 세상을 창건하신 우주의 어머니인 마고(麻姑) 이름하여 마문명설이다. 마고(麻姑)로 부터 우리 민족 아니 인류의 기원이 시작됬다는 게 "부도지(符都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도지(符都誌)는 신라 충렬공 박제상이 삽량주 간으로 있을 때, 전에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비서(秘書)를 정리하여 저술한 책이라고, 김시습 선생이 그의 <징심록 추기>에서 추정하고 있다. '부도(符都)'라는 말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곧 단군의 나라를 말한다고 한다.
부도지(符都誌)는 《징심록》15지 가운데 제1지이며,<징심록>은 상교(上敎) 5지인 <부도지>, <음신지(音信誌)>, <역시지(曆時誌)>, <천웅지(天雄誌)>, <성신지(星辰誌)>와 중교(中敎) 5지인 <사해지(四海誌)>, <계불지( 誌)>, <물명지(物名誌)>, <가악지(歌樂誌)>, <의약지(醫藥誌)>, 그리고 하교(下敎) 5지인 <농상지(農桑誌)>, <도인지(陶人誌)>, 그밖에 알려지지 않은 3지를 포함하여 모두 15지로 되어 있다. 후에 박제상 선생의 아들 백결 선생이 <금척지(金尺誌)>를 지어 보태고, 김시습 선생이 <징심록 추기>를 추가하여, 모두 17편으로 된 책이다.
그러나 현재 원문은 모두 전하지 않고 있으며, 현존하는 부도지(符都誌)는 1953년 박금(朴錦)이 울산의 피난소에서 과거에<징심록>을 번역하고 연구하던 때의 기억을 되살려 거의 원문에 가깝게 되살려 낸 것이라고 한다. 한민족 최고의 성전이라고 불릴만한 부도지(符都誌) 원본을 박금(朴錦)은 그의 고향(문천)에 두고 왔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려 1953년 프린트본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부도지(符都誌)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박금(朴錦)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영해박씨 대동보(1987)>와 한문화에서 간행한 <부도지>등의 내용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박재익(朴載益, 1895년 10월 ~ 1964년 10월) 통명은 박금(朴錦). 자(字)는 광포(光浦), 호(號)는 금당(琴堂). 박제상의 55세손, 본명은 박재익. 1895년 함경남도 문주 출생. 형제가 있었고, 2남을 두었다.
1925년 동아일보 판매부서기. 1928년 8월 원산 지국장. 1929년 3월 지국장 사임, 사회부.정리부 기자 역임. 1934년 동아일보 퇴사. 문예운동. 성인교육본부 이학장. 종합이학원 및 선사학회연구원 설립.
사진은 동아일보에 게재(1931.7.18)되었던 전달식 광경
동아일보 기자 시절(1925 ~ 1934년) 만보산 사건을 취재하여 만주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충돌 보도가 일제의 조작이었음을 알려 사태(국내외의 화교 박해)수습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후일 장개석 총통으로부터의 표창과 직접 입었던 중산복(전투복)을 받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글씨와 글솜씨와 대처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박금(朴錦)은 1946년 미 군정청 성인교육협회본부 이사로 임명되었고, 1947년3월9일 민주독립전선 상임위원으로 위촉 되었다. 1960년 7월 23일 사월혁명 민중협회 회장으로 선출되는데 당시 박금(朴錦)은 민주주의 자유옹호회 이사장이었다. 1964년 11월에 박금(朴錦)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부도지(符都誌)는 1953년 박금(朴錦)에 의해 프린트본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박금(朴錦)이 사망하여 '잃어버린 원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현재 영해박씨 대종회 홈페이지에서는 박금(朴錦)이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초벌원고 사본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부도지(符都誌)는 이렇게 세상 속에 나왔지만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1986년 김은수(金殷洙)에 의해 햇빛을 보게 된다.
한문 원본을 번역한 김은수(金殷洙)의 부도지(符都誌) 서문에 의하면 효성(曉星) 정시화(鄭時和)라는 분이 부도지의 프린트본을 갖고 있다가 멸실될 것을 우려하여 김은수(金殷洙)에게 복사본을 넘겼다고 한다.
부도지(符都誌)가 1953년 박금(朴錦)에 의해 프린트본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나온 이후 30년이 지나서 홀연히 재야사학자 정시화(鄭時和)에 의해 박금(朴錦)의 프린트본이 전달되는 기막힌 일이 발생한다.
부도지(符都誌)은 박제상이 초기 신라의 고대 사서를 토대로 <징심록>의 내용을 정리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 김시습이 고대어를 읽기 쉽게 옮겨 적었다고 한다. 부도지(符都誌)가 전해진 경로는 영해박씨 가문의 내력과 부합한다는 국어학자(김재수)의 고증이 있었고, 1986년본에 1953년 프린트본을 보관했던 정시화(鄭時和)의 글과 영해박씨 대종회장 50세손 박영두의 글에 자세히 보인다.
따라서 부도지(符都誌)는 박금(朴錦) 사후에 전적으로 영해박씨 대종회, 재야사학자 정시화(鄭時和), 한문 원본을 번역한 김은수(金殷洙) 등에 의해 한민족 대서사시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은수(金殷洙)의 부도지(符都誌) 서문에 따르면 박금(朴錦)이 해방후 월남할 때 필사하여 전해져 왔다는 원본은 함경도 문천(文川)의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 통칭 양산댁)에 두고 왔기 때문에 이전에 연구했던 내용을 기억하여 복원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1931년1월15일 (동아일보)에 “함경북도 회령방면과 간도방면에 박금기자를 사칭하는 자가 출몰하여 모단체를 방문한 바, 본사기자인 박금(朴錦)은 그 지방에 간 일이 없다.”라는 기사가 게제된다.
박금(朴錦)이 원산지국장을 퇴임하고 기자로 활동한 이후로 재해복구 등으로 함경도 지역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해방되기 전까지 함경도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김은수(金殷洙)의 부도지(符都誌) 서문에 박금(朴錦)이 해방 후 월남할 때 원본은 함경도 문천(文川)의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 통칭 양산댁)에 두고 왔다라는 주장은 어찌된 것인가?
이쯤에서 전 전교조위원장인 정해숙씨와 김은수(金殷洙)와의 만남 과정을 살펴본다.
광주농고 시절 함께 근무한 국어 담당 김은수(金殷洙) 선생은 필자가 구해준 <환단고기> 한문 원본을 우리말로 번역해 1985년 <주해 환단고기>를 펴냈다. 새로운 우리 역사 발굴에 심취했던 그는 8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1982년 무렵 증산교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던 우리 역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듬해 5월 전남대의 증산교 동아리가 교내 학생회관에서 며칠 동안 우리 역사 관련자료를 전시하는 행사를 열었다. 나는 솔깃해서 김은수(金殷洙) 선생한테 ‘같이 가자’며 정보를 알려줬다. 하지만 김선생은 함께 가지 못했다. 어수선한 최루탄 연기를 뚫고 나 혼자 전시회장을 찾았다. <환단고기>라는 책을 소개하는 자료를 얻어 다음날 학교에서 김선생한테 전해 주었다. 상고사를 공부하고 싶어했던 김선생은 반색을 하며 ‘환단고기’ 복사본이라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증산교를 통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서적을 취급하는 춘추서림으로 찾아갔다. 책은 들어왔는 데 개인이 사 보기에는 값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전남대 도서관의 민관장께 연락을 했더니, 대출은 안되니 복사해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었다.
김은수(金殷洙) 선생은 도서실에 자주 들렀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국어 담당인데 주로 역사책만 빌려갔다. “선생님은 국어교사인데 왜 역사책만 빌려 가시나요?” 어느 날 물었더니 뜻밖의 답을 했다. “아! 그럴 이유가 좀 있습니다. 저는 일생일대에 민족의 서사시 하나 남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민족 서사시를 쓰기 위해 습작을 많이 했는 데 우리 역사를 잘 모르니까 막히는 대목이 있어서, 목표를 이루려면 우선 상고사를 비롯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것이다. “김 선생님, 대단한 목표를 갖고 계시네요. 훌륭하십니다. 우리 학교에 없는 책도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다 드릴께요.” “작품은 언제 나올지 모릅니다. 하하!” 김선생과는 그렇게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그 이후 김 선생은 마침내 85년 6월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서문에서 ‘정해숙 선생님, 자료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김은수(金殷洙) 선생은 광주농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한민족 상고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두 하던중 증산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정해숙과 친분관계를 갖고 상고사에 관련된 참고 자료를 얻는다. 김은수(金殷洙)은 주로 백제관련 연구에 매진 하지만 정해숙의 도움으로 마침내 85년 6월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를 출간한다. 이때까지 김은수(金殷洙)은 부도지(符都誌)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몰랐던 것이다. 이듬해 우연찮게 재야사학자 정시화(鄭時和)로부터 1953년 박금(朴錦)에 의해 프린트본으로 출간된 부도지(符都誌)를 전해받은 것이다. 결국 김은수(金殷洙)은 부도지(符都誌)에 관한 세밀한 공부도 없이 재야사학자 정시화(鄭時和)로부터 전달받은 내용 그대로 출간하게 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지(符都誌) 서문에 박금(朴錦)이 해방후 월남할 때 필사하여 전해져 왔다는 원본은 함경도 문천(文川)의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 통칭 양산댁)에 두고 왔기 때문에 이전에 연구했던 내용을 기억하여 복원했다는 사실규명없는 글을 남긴다.
김은수(金殷洙)의 부도지(符都誌) 따르면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궁희, 황궁, 유인, 한인, 한웅, 단군에 이르는 동안 천산, 적석산, 태백산과 청구를 거쳐 만주로 들어 왔으며, 그 사이 지구상의 동서남북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천도 정치의 한국문화를 전 세계에 심어놓았다. 천부의 한국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메소포타미아, 인도, 이집트, 그리스, 프랑스, 영국, 동남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대륙에 역법, 거석, 세석기, 빗살무늬 토기, 신화, 전설, 종교, 철학, 천문학, 음악, 수학에 그 잔영을 남겨 놓고 있다. 단군의 사자(使者)인 순(舜)의 아버지 유호씨(有戶氏)가 서방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전고자(典古者)를 만나 천부의 본리를 술회하여 전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수메르에 근원을 둔 기독교 사상의 뿌리가 되었으며, 스키타이족에 의해 이루어진 불교와 그리스의 고대 문화도 한국의 천부문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호씨는 피라미드나 지구라트와 같은 높은 탑이나 계단이 마고성에서 소(巢)를 만들던 옛 풍속에서 유래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하프구트 교수는 그의 저서《고대 해양왕의 지도》에서 1만년 정도 전의 태고시대에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있었으며, 그것은 중국에서 아메리카까지 지구 전역에 퍼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민족의 세상을 창건하신 우주의 어머니인 마고(麻姑) 이름하여 마문명설이다. 마문명설은 우리민족의 시원을 마고(麻姑)로 보는 것인데, 웃스운 사건 하나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국학부흥과 민족정신 교육을 위해 창립한 국학원이 있다. 국학원의 창립자가 바로 이승헌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또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국학원은 곧 단월드이며 미국단요가와 관련이 있다.
미국 주요 언론에 cult라고 명명되어진 단요가 단체에서 세운 동상이다. 문제는 저 동상이 미국 현지법을 어겼고, 여론의 지탄을 받아 철거된 동상이라는 것이다.
저 정체불명의 노란머리 파란눈의 해괴망칙한 상이 바로 마고(麻姑)상이란다. 민족역사학 혹은 국학원이라 허울을 쓰고 저런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위키백과에 보면 "마고(麻姑)는 마고 할머니, 혹은 마고할망이라고도 한다. 주로 무속신앙에서 받들어진다. 박제상이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부도지에는 마고성과 함께 탄생한 '한민족의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설명되고 있다."
무속인들이 받들던 마고(麻姑)를 사실규명도 안된 1953년 박금(朴錦)에 의해 프린트본으로 출간된 부도지(符都誌)에 기술된 '한민족의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둔갑시키고, 이것이 마문명이 아니냐고 항변하고 있다.
다음 카페 <자연문화동호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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